1999년 1월 2일에 쓴 글을

문득 돌아본다.

새벽에 신문배달을 마치고서 쓴 글일 테지.

아스라한 지난날이로구나.


..


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1999.1.2. 길그림에 없는 책집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2년에 헌책집을 찾으러 서울로도 가 볼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인천에서 늘 드나들던 배다리 헌책집에서 여러 어른한테 여쭈니, 서울에는 인사동이나 청계천이나 서울역 둘레에 헌책집이 참 많다고 알려준다. 큰책집에 가서 두툼한 길그림책을 들추었다. 그런데 아무리 커다란 길그림책이어도 인사동이건 청계천이건 서울역 언저리에 있다는 책집을 찾을 길이 없다.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커다랗다는 책집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인천 길그림에는 〈대한서림〉조차 없다. 백화점이나 큰가게나 병원이나 은행은 길그림에 잘 나온다만, 책집을 길그림에 담은 적은 없지 싶다. (1992년과 1999년뿐 아니라 2024년에도 매한가지이다. 따로 ‘책집 길그림’을 낼 적에는 담되, 여느 길그림에는 책집을 안 적어 놓는 우리나라이다)


  서울이나 부산은 땅밑을 다니는 전철길이 거미줄 같다. 전철을 타고내리는 곳에는 으레 커다랗게 길그림을 걸어 놓는데, 전철나루 길그림에 책집을 그려 놓은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굳이 책집을 길그림에 넣느냐 안 넣느냐 하고 따질 마음은 아니다. “책집을 길그림에 넣을 줄 아는 나라와 고장과 마을”이라면, 이 나라와 고장과 마을은 아름답고 알차다고 느낀다. 먹고 마시고 노는 밥집과 술집과 옷집만 길그림에 빼곡하게 담는 나라와 고장과 마을은, 안 아름답고 앞날이 새카맣다고 느낀다.


  나라에서는 으레 ‘문화사업’이나 ‘예술사업’을 한다고 떠들썩하다. ‘문화·예술’이란 무엇인가? 돈을 더 많이 들여야 ‘문화·예술’인가? 사람들이 더 많이 구경해야 ‘문화·예술’인가? 마을에서 마을사람이 스스로 조촐히 삶을 새기고 살림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도록 이바지하는 마을책집 이야기를 돌아볼 줄 아는 마음에서 ‘문화·예술’이라는 새싹이 돋을 수 있지 않을까?


  이리하여 나는 스스로 ‘책집그림(책집지도)’을 그린다. 나라에서 안 그린다고 나라를 탓하지 말자. 인천이나 부산이나 서울 같은 큰고장이 책집그림에 아무 뜻이 없다고 나무라지 말자. 벼슬꾼(국회의원·공무원)이 책집그림에 팔짱을 끼든 말든 그들을 쳐다보지 말자. 내가 오늘 다니는 책집을 스스로 눈여겨보면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길이를 재서 흰종이에 차근차근 길을 담아 보자. 책집을 둘러싼 마을은 골목이 어떠한지 모두 두 다리로 누벼 보고서 천천히 길그림을 여미자.


  내가 하면 된다. 내가 읽으면 되고, 내가 새기면 되고, 내가 느끼면 되고, 내가 하면 된다. 내가 그리면 된다. 책마을 언저리를 스스로 그리고, 책숲마실을 그리고, 책집마실을 함께할 동무하고 이웃을 그리면 된다.


  전화번호부에조차 책집이름이 안 오르기 일쑤이니, 책집을 찾아다닐 적마다 책집 전화번호하고 주소도 챙기자. 책집 둘레로 지나가는 버스를 살피고, 어디에서 어떤 버스나 전철을 내려서 몇 걸음(미터)을 가면 책집을 만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짚으면서 책집그림을 선보이자. 내가 꾸리는 책집그림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누리집(피시통신)에 모두 올려놓자.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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