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00) 미지의


 미지의 길을 개척하다​

→ 새로운 길을 열다

→ 낯선 길을 뚫다

→ 숨은 길을 파헤치다

 미지의 땅으로 여행하다

→ 새로운 땅으로 여행하다

→ 낯선 땅으로 여행하다

→ 숨겨진 땅으로 여행하다


  한자말 ‘미지(未知)’는 “알지 못함”을 뜻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사람들이 “알지 못함”이나 “모름”이라고 쓰는 말을 한자로 옮기면 ‘미지’가 되는 셈입니다.


  “미지의 세계”란 “알지 못하는 세계”이거나 “모르는 세계”입니다. “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아득한 두려움”이거나 “하나도 모르는 어렴풋한 두려움”입니다. 말뜻 그대로 쉽게 쓰면 될 노릇이면서, 한국말로 쉽게 쓰면 됩니다.


  찬찬히 간추리자면, 알지 못하니 모릅니다. 모르니 숨겨졌거나 숨겼다고 할 만합니다. 숨겨졌거나 숨겼으니 낯섭니다. 낯설기에 아리송합니다. 아리송하니 알쏭달쏭합니다. 알쏭달쏭하니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이니 새롭습니다.



이것도 역시 텍스쳐의 강조가 표현에 박진감(迫眞感)을 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강철(鋼鐵)이 갖는 미지(未知)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 작품이다

→ 이 또한 겉느낌을 도드라지게 살려서 마치 참으로 그러하다는 듯이 나타낼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무쇠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낸 작품이다

《와타나베 츠토무/육명심 옮김-사진의 표현과 기법》(사진과평론사,1980) 54쪽


우리는 보통 미지의 것들에 대해 보호막이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게 되는 거야

→ 우리는 흔히 낯선 것을 막아 주는 울타리가 없다고 느끼고, 그래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끔찍한 일을 생각하고 말아

《타하르 벤 젤룬/홍세화 옮김-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상형문자,2004) 18쪽


또 한 명의 칠레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었다

→ 또 다른 칠레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알쏭달쏭한 사람이었다

→ 또 다른 칠레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숨겨진 사람이었다

→ 또 다른 칠레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조안 하라/차미례 옮김-빅토르 하라》(삼천리,2008) 29쪽


그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미지의 대륙을 발견하였다

→ 그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새로운 땅을 보았다

→ 그 끝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수수께끼 땅을 보았다

《김민희-젤리장수 다로 1》(마녀의책장,2010) 12쪽


마치 미지의 정글과도  한 남자의 삶이 그런 나의 소망 속으로 파고들었다

→ 마치 수수께끼 숲과도 같이 살던 사내가 그런 내 꿈으로 파고들었다

→ 마치 낯선 숲과도 같은 한 남자 삶이 그런 내 꿈으로 파고들었다

《신지아-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 274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넋·삶 71 꼴 보다, 꼴 사납다



  나는 내 눈으로 내 꼴을 볼 수 없습니다. 내 눈은 오직 앞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기에, 내 얼굴을 못 보고, 내 몸짓을 못 봅니다. 나는 내 얼굴이나 몸짓이 아닌 네 얼굴이나 몸짓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들여다보면 내 꼴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이나 유리를 바라보아도 내 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과 거울과 유리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나 스스로 내 꼴을 보지 않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제 꼴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숨결이라고 할 만합니다. 내 꼴을 바라보는 데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지을 삶을 바라보는 데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할 만합니다.


  내 눈은 내 꼴을 못 보지만, 내 마음은 내 꼴을 늘 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한테 말할 수 있어요. ‘꼴 보기 싫다’라든지 ‘꼴 보기 좋다’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면 나는 내 꼴을 보기 싫습니다. 내가 스스로 지은 삶을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기면 나는 ‘내 꼴이 보기 좋다’는 말을 비아냥처럼 합니다. ‘꼴좋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꼴’이라는 낱말은 먼 옛날부터 좋음이나 나쁨을 가리는 자리에 안 썼습니다. 생김새를 가리키는 낱말일 뿐입니다. ‘세모꼴’이나 ‘네모꼴’이나 ‘부채꼴’처럼 말합니다. 집을 짓거나 일을 할 적에 ‘꼴’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리에 ‘모습’이나 ‘새’나 ‘생김새’ 같은 낱말을 쓰지 않아요. 어떻게 보이는가를 나타내려고 하면서 ‘꼴’을 씁니다. ‘몰골’이나 ‘얼굴’ 같은 낱말도 이 같은 느낌과 결을 나타내면서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내 꼴’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는 ‘내 꼴’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 꼴’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남(너, 그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 꼴을 바라보지 않고 ‘네 꼴(다른 사람 모습)’을 바라봅니다. 네가 나를 보면서 ‘꼴사납다’고 한다면, 나도 너를 보면서 ‘꼴사납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두 눈으로만 마주할 적에 겉모습만 훑습니다. 저마다 어떤 꼴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들여다볼 노릇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자꾸 ‘눈으로 보는 꼴’에 얽매입니다.


  남이 나를 보면서 ‘꼴좋다’고 비아냥을 하거나 ‘꼴사납다’고 나무란들,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눈으로 보이는 꼴’로 삶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마음을 보고, 사랑으로만 사랑을 보며, 꿈으로만 꿈을 보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남, 너, 그대)이 하는 말에 휘둘릴 적에는 내 삶·사랑·꿈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좋고 나쁨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힌 채 제 길을 잃거나 잊습니다. 나도 이와 같아요. 나도 나와 마주한 그대(너, 남)한테 ‘네 꼴이 우습네’ 하고 말할 수 있어요. 나도 그대를 뒤흔들 수 있습니다. 그대도 내가 하는 말 때문에 막상 그대가 짓는 삶과 사랑과 꿈을 잊거나 잃으면서 어지럽게 떠돌거나 헤맬 수 있습니다.


  ‘꼴’이라는 낱말은 낮잡거나 깎아내리려는 뜻이 안 담깁니다. 그러나, 사회의식은 이 낱말을 낮잡거나 깎아내리려는 자리에 쓰도록 부추깁니다. ‘별(別)꼴’ 같은 말마디는 그야말로 우스꽝스럽습니다. 아무 뜻도 없는 말마디인 ‘別꼴’은, 한국말로 뜻을 풀면 “다른 꼴”입니다. “다른 모습”이라는 소리요, “다른 삶·사랑·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머, 별꼴이야!” 하고 읊는 말은 네가 나와 다르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요. 서로 다르면서 새로운 삶과 사랑과 꿈을 지으니까요. 그렇지만 ‘별꼴’이라는 말마디로 마치 어느 한쪽은 나쁘거나 틀리거나 그릇되기라도 하는듯이 몰아세우는 사회의식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다른 꼴’이어야 맞고,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삶을 지으려 하기에 ‘새로운 꼴’로 가야 즐겁습니다.


  ‘내 꼴’을 내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재거나 따지는 틀에 휘둘리지 말고, ‘내 꼴’은 늘 씩씩하고 튼튼하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네 꼴’을 기쁘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너를 재거나 따지는 틀에 휩쓸리지 말고, ‘네 꼴’은 언제나 상냥하고 착하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느껴야 합니다. 다른 꼴이기에 웃고, 새로운 모습이기에 노래합니다. 다른 모습이기에 어깨동무하고, 새로운 꼴이기에 손을 맞잡습니다. 4348.3.16.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람타 공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말도 익혀야지

 (1104) 매분마다


 매분마다 선택을 하고

→ 1분마다 고르고

→ 1분마다 한 번씩 고르고


  한국말사전을 살피니 ‘매분(每分)’이라는 낱말이 실립니다. “일 분 일 분”이나 “일 분마다”를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 이 보기글처럼 “매분마다” 꼴로 적으면 겹말입니다. ‘每’를 넣는 한자말 ‘매일·매월·매년’을 ‘매일마다·매월마다·매년마다’처럼 쓰는 분이 꽤 많은데, 이러한 말투도 모두 겹말입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매일·매월·매년’처럼 쓸 노릇이고, 한국말을 쓰려 한다면 ‘날마다(나날이)·달마다(다달이)·해마다’처럼 쓸 일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1분마다 한 번씩”이나 “1분에 한 번씩”처럼 쓸 수 있어요. 더 힘주어 말하고 싶기 때문에 겹말이 나타나기 일쑤이니, 이렇게 한결 또렷하게 적어 볼 수 있습니다.


  한자말을 쓰든 한국말을 쓰든, 일본말이나 영어를 쓰든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국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매분마다’ 같은 말투를 쓰고 맙니다. 한국에서 이웃하고 나누는 말이나 글을 펼칠 적에는 오롯이 한문이나 일본말이나 영어로 쓰지는 않지만, 낱말이나 말투 몇 가지를 한자말이나 영어를 끼워서 쓰려고 하다 보니, ‘매분마다’ 같은 겹말이 자꾸 나타납니다. 4348.8.5.물.ㅅㄴㄹ



앨리스와 밥은 각자 자신의 상자 앞에 앉아서 매분마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선택을 하고

→ 앨리스와 밥은 저마다 제 상자 앞에 앉아서 1분마다 마음대로 스스로 고르고

《니콜라스 지생/이해웅,이순칠 옮김-양자우연성》(승산,2015) 58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304) 아래의


 아래의 책을 참고하시오

→ 다음 책을 살펴보시오

→ 다음에 드는 책을 살펴보시오

→ 이 책을 살펴보시오

→ 이 같은 책을 살펴보시오


  말을 할 적에는 “아래의 보기”나 “아래의 이야기”처럼 말하지 못합니다. ‘아래’에는 아무런 보기도 이야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같은 말투는 글을 쓸 적에 흔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투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일본 말투이지요. 일본사람이 원고지로 글을 쓸 적에 ‘한쪽에서 위와 아래를 갈라서 아래쪽이 되는 자리’에 드는 보기나 이야기를 밝히려고 ‘아래’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종이(원고)에 글을 쓸 적에는 ‘아래’에 놓이더라도, 책을 엮으면서 다음 쪽으로 넘어갈 수 있고, 위쪽에 다른 보기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러하든 저러하든 “아래의 보기”나 “아래의 이야기”는 틀립니다. 말을 할 적이든 글을 쓸 적이든 ‘다음’이나 ‘이러한’이나 ‘이 같은’이나 ‘이’라고 하는 말마디를 넣어서 써야 올바릅니다. 4348.8.5.물.ㅅㄴㄹ



그리고 기자를 데리고 언덕 아래의 공터로 향했습니다

→ 그리고 기자를 데리고 언덕 아래 빈터로 갔습니다

《쿠루사(글),모니카 도페르트(그림)/최성희 옮김-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동쪽나라,2003) 41쪽


이시모토 야스오 씨와 의논해서 편집한 것이 아래의 내용이었다

→ 이시모토 야스오 씨와 얘기해서 엮은 줄거리가 이와 같다

《오쓰카 노부카즈/송태욱 옮김-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2007) 27쪽


아래의 이야기는 그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 다음 이야기는 그와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던 일이다

《니콜라스 지생/이해웅,이순칠 옮김-양자우연성》(승산,2015) 68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적' 없애야 말 된다

 (1724) 결론적


 결론적 입장 → 마지막 생각

 결론적인 이야기 → 끝맺는 이야기

 결론적으로 말하다 → 끝맺으며 말하다


  ‘결론적(結論的)’이라는 말마디는 2010년 즈음까지 한국말사전에 안 실렸습니다. 요즈막에 한국말사전에 실립니다. 쓰임새가 부쩍 늘었기에 한국말사전에 실을 수 있습니다만, ‘결론’이라는 한자말은 “끝”이나 “마지막”을 뜻합니다. 요즈막에 한국말사전에 실린 ‘결론적’은 “최종적으로 말하거나 판단하여 나온”을 뜻한다고 해요. ‘최종적(最終的)’은 “맨 나중의”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이든 ‘최종적’이든 “맨 나중”이나 “끝”이나 “마지막”이나 “마무리” 같은 한국말로 손질하면 됩니다.


  어떤 말을 마무리를 짓는 자리라면 “마무리를 짓자면”이나 “마무리를 지어서”라 말할 만하고, 어떤 말을 끝맺는 자리라면 ‘끝맺다’라는 낱말을 넣지요. ‘곧’이나 ‘그러니까’나 ‘그래서’나 ‘이리하여’ 같은 말마디를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4348.8.5.물.ㅅㄴㄹ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장치이다

→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장치이다

→ 한 마디로 사진은 삶을 적는 장치이다

《한정식-사진, 예술로 가는 길》(눈빛,2006) 70쪽


결론적으로 상자 안에 정확히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그러니까 상자에 바로 어떤 것이 들었는지는 대수롭지 않다

→ 이리하여 상자에 바로 어떤 것이 들었는지는 대단하지 않다

《니콜라스 지생/이해웅,이순칠 옮김-양자우연성》(승산,2015) 68쪽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