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3. 억지로 ‘만들’ 수 없는 말



  오늘날 ‘어른’이라는 낱말이 제자리를 잃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은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어른’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줄었고, 아이들한테 ‘어른 구실’을 가르치려는 어버이가 자꾸 줄어듭니다. 어른 자리에 서야 할 분들 스스로 ‘어른다이 살기’하고는 멀어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른’이라는 낱말을 놓고 ‘얼운·얼우다’라는 옛말을 살펴서 말하기도 합니다. “혼인한 사람”이 어른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밑풀이는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더 헤아릴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부터 어떤 사람을 놓고 ‘어른’이라고 할 적에는 혼인한 사람만 두고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이만 많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임금님 자리에 선대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쯤 되기에 어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인을 안 했대서 어른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어른일까요? 바로 “어른다운 사람”일 때에 어른인데요, ‘답다’라는 말이 붙는 사람으로 살자면, “어른 구실”을 해야 하고, 이 “어른 구실”이라고 한다면, 너그럽고 슬기롭고 따스하고 깊고 손수 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몸짓이나 모습입니다. 아무나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부터 어른 자리에 서려면 “철이 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철모르쇠(철모름쟁이·철부지)’는 어른이 아닙니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밥을 지어서 먹지 못한다면, 마흔 살이나 쉰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집을 짓거나 옷을 지을 줄 모른다면, 예부터 이런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고 했어요.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스스로 짓기에 어른이라 했습니다.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했지요. 씨앗을 심고 가꾸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해요. 그러면 아이(어린이)는 누구일까요? 아직 철이 들지 못하기에 아이예요. 나이는 많아도 철이 들지 못하면 그냥 ‘아이’라고 해요.


  어른이 맡은 몫은 무엇보다도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정갈하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짓도록 가르치는 몫이 바로 어른이 할 일이에요. 이러면서 어른이 하는 일이 더 있어요. 바로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고 가르치는 몫”이지요.


  오늘날 수많은 “나이 많이 든 사람” 가운데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 말이나 그냥 쓰지는 않는가요? 어설픈 번역 말투나 외국 말투를 버젓이 쓰지는 않는가요?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짓거나 보살피는 숨결을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른다운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제 간추려 보자면, ‘어른’은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은 ‘얼’이 곧게 서거나 든든히 들어선 사람입니다. “얼이 있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에요. 철이나 얼이 없으면 ‘철모르쇠(철부지)’이거나 ‘얼간이(얼 빠진 이)’입니다. ‘얼찬이’이 되어야 비로소 ‘어른’입니다.


첫날 : 1.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 2. 시집가거나 장가드는 날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한국말사전을 살펴봅니다. ‘첫날’을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로 풀이합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이루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첫날’ 말풀이는 돌림풀이가 됩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와 널리 퍼진 한자말 가운데 ‘시작’이 있는데, “준비 시작”이라든지 “시작해 봐”처럼 흔히 써요. “준비 시작”은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꼴만 바꾼 얼거리예요. 이런 말은 아직 한국말이 아닙니다. “자, 달려”나 “자, 가자”나 “하나, 둘, 셋”처럼 한겨레 살림새를 살피면서 새롭게 써야 비로소 한국말이 되어요. “시작해 봐”는 “이제 해 봐”나 “이제 하자”나 “자, 해 봐”로 새롭게 고쳐서 쓸 수 있어요.


제과(製菓) : 과자나 빵 따위를 만듦

제빵(製-) : 빵을 만듦

제작(製作) :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물건이나 예술 작품을 만듦


  한겨레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한겨레 밥살림은 “밥을 지어서 먹기”, 곧 ‘밥짓기’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하고 흔한 ‘밥짓기’나 ‘밥짓다’는 한국말사전에 안 실립니다. ‘밥하다’라는 낱말은 겨우 실리지요.


  왜 한국말사전에는 ‘밥짓기·밥짓다’가 안 실릴까요? 이 나라 학자들이 여느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요, 제대로 안 살피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지만 정작 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니 아주 쉽고 수수한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빠뜨리고 말아요. ‘옷짓기·집짓기’도 한국말사전에 없어요.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집짓기’는 한국말사전에 실리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장난감 놀이를 하는 이름으로만 실려요.


  밥을 먹는 한겨레 삶에 과자하고 빵이 들어온 지 얼추 백 해쯤 됩니다. 과자하고 빵은 아주 빠르게 퍼져서 누구나 손쉽게 과자하고 빵을 사거나 집에서 구워서 먹어요. 그러나 이런 살림이 예부터 없었기에 이를 가리키는 한국말은 없었지요. 한국말을 새로 지어야 텐데, 이 나라에서는 ‘제과·제빵’ 같은 낱말을 일본을 거쳐서 받아들였습니다. 말풀이를 “과자 만들기”나 “빵 만들기”로 달고요.


  ‘만들다’하고 ‘짓다’는 다릅니다.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다. 밥은 ‘짓는다’고 하지요. 옷도 집도 ‘만들’지 않아요. 옷도 집도 ‘지을’ 뿐입니다. 글을 쓰는 일도 ‘글짓기’나 ‘시짓기’나 ‘소설짓기’라고 했지, ‘글 만들기’나 ‘시 만들기’나 ‘소설 만들기’라 하지 않아요.


  왜 ‘짓다’라는 낱말을 쓸까요? ‘지음(짓다)’은 우리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들다’라는 낱말은 언제 쓸까요? 공장에서 물건을 내놓을 적에 ‘만들다’라 합니다. 뚝딱뚝딱 이것저것 맞추어서 ‘만든다’고 해요.


  요새는 “친구를 만든다”나 “영화를 만든다”나 “책을 만든다”나 “시간 좀 만들어 봐”나 “좋은 분위기를 만들자”나 “괜한 일을 만드네”나 “쉴 시간을 만들자”처럼 쓰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쓰려면 쓸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 올바르지 않아요. 왜냐하면, “친구를 사귄다”, “영화를 찍다”, “책을 내다·책을 엮다·책을 짓다”, “시간 좀 내 봐”, “좋은 분위기로 바꾸자”, “괜한 일을 하네·괜한 일을 키우네”, “쉴 틈을 내자”처럼 쓰던 말이요, 이러한 말투가 올바르지요.


  한국말사전에 나오기에 그대로 써야 하지 않아요. 옳지 않은 낱말이나 말투조차 한국말사전에 실릴 수 있기도 해요. 아직 한국은 한국말을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는 손길이나 솜씨가 매우 모자라요. 앞으로 한국은 한국말사전을 새롭게 고치고 손질하고 가다듬고 갈고닦아야지 싶어요. 그나저나 ‘제과·제빵’은 어떻게 옮겨야 알맞거나 올바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과자를 굽다·과자를 짓다

빵을 굽다·빵을 짓다


  과자나 빵을 놓고는 ‘짓다’라는 낱말을 잘 안 쓰지만 ‘밥짓기’처럼 ‘과자짓기·빵짓기’로 써야 올발라요. 다만, 이 말마디는 그리 익숙하지 않으니 ‘과자굽기·빵굽기’로 쓸 만합니다. 과자나 빵은 으레 ‘굽’거든요. “빵 굽는 마을”이나 “빵굼터” 같은 빵집 이름이 괜히 쓰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살피면 빵을 굽는 사람을 ‘빵굼이’로 나타내 볼 만해요. 또는 ‘빵굼지기’나 ‘빵굼님’이라 해 볼 수 있어요. 생각을 활짝 펴며 새로운 말을 즐거이 짓습니다. 2016.10.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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