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몰아치다 (태풍 수다)
2012년 뒤로 2018년에 드디어 이 땅에 회오리바람(태풍)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오리바람은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고, 제주섬에 겨우 닿고서 느릿느릿 다가오다가 차츰 힘을 잃으면서 조용히 사그라들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남녘 바닷가로 찾아올 즈음, 마당에 선 후박나무 줄기에 손을 대고 뺨을 대며 물어보았습니다. “이 태풍은 어떠니?” “태풍? 태풍이 어디 있어?” “다들 태풍이 온다고들 하는데?” “아, 그 태풍? 나한테는 태풍이 아니야. 모처럼 부는 바람일 뿐이야. 가벼운 바람.” 2012년에 회오리바람이 불 적에 우리 집 마당 후박나무는 쉴새없이 춤을 추며 휘청휘청했습니다. 그때에 우리 집 담벼락 두 군데가 와르르 무너졌지만, 후박나무는 신나게 휘청춤을 추며 속삭였어요. “너도 좀 춤을 춰 봐. 담벼락 걱정은 그만해.” 다음부터는 오랜만에 한국에 찾아온 회오리바람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너희(사람)는 나(회오리바람)를 너무 미워하고 싫어하는구나
1. 너희가 이렇게 나를 미워하고 싫어할 줄 몰랐어. 나는 너희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려고 하지 않아. 나는 바다에서 태어나 뭍을 시원스레 긁어 줄 뿐이야. 내가 한동안 여기(한국)를 긁지 않아서 지저분한 것이 너무 많지 않니? 너희는 그 지저분한 것을 다 끌어안고 살 생각이니? 너희가 치우지 않으니 내가 치워 준단다.
2. 내가 해마다 너희한테 꾸준히 찾아가면 너희는 너희 보금자리나 마을에 지저분한 것을 두지 않아. 꼭 두어야 할 것만 두지. 그런데 너희는 나를 아예 생각하지 않았고, 나 따위는 오지 말라고 빌었고, 너희 도시를 키우려고 나는 아랑곳하지도 않더군. 너희는 컴퓨터로 나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데, 너희가 컴퓨터를 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
3. 나는 바람이야. 상냥하지도 거칠지도 않은 바람이야. 나는 뭍에서 가려운 곳을 긁으면서, 살살 긁으면서 물(비)을 뿌리지. 생각해 봐. 너희도 청소를 할 적에 솔로 박박 비비고 물을 붓잖아. 나는 너희하고 이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청소 벗이야.
4. 옛날에 너희는 늘 우리를 기다리고 바랐어. 너희는 때때로 우리를 두렵게 여기기도 했지만, 우리를 두렵게 여긴 사람은 드물어. 으레 우리가 올 줄 알고서 보금자리를 알차게 가꾸었어. 그런데 너희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하면, 아니, 너희 자리를 지저분한 것으로 채우려 하면, 우리는 그 부질없는 것을 너희가 왜 자꾸 가지려 하는지 알쏭하다고 여기면서 치워 주지.
5. 너는 아니? 네가 어릴 적에 네가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어서, 내가 너를 가볍게 들어올려서 하늘을 날게 했지. 그런데 너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져 하늘로 오르자 아주 무서워했어. 막 울려 했지. 너는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는 했어도 도시에 젖은 나머지 네 꿈이 참으로 무슨 꿈인지 알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너를 바로 사뿐히 땅에 내려주고, 다시는 너를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안아 주지 않았어. 너희는 나를 불러서 얼마든지 마음껏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는데, 왜 하늘을 나는 꿈을 제대로 그리지 않니?
6. 아스팔트길이 끊어지면 피해이니? 아파트나 빌딩이 무너지면 피해이니? 자동차가 뒤집어지면 피해이니? 그런데 아스팔트나 아파트나 빌딩이나 자동차를 만들려고 하는 동안 너희가 숲에 얼마나 피해를 끼쳤는 줄 아니? 숲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너희가 제넋을 차리도록, 바보스러운 것들을 왕창 긁어모은 땅이 아닌 즐거운 보금자리를 새로 짓도록, 너희가 사는 곳을 살살 긁어서 빗물로 말끔히 닦아 주려고 내가 너희한테 해마다 찾아간단다.
7. 옛날에 너희가 우리를 해마다 기다린 뜻을 알겠니? 옛날에는 해마다 여러 걸음을 했어. 열 걸음 넘게 다녀간 적도 있지. 너희가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면 우리가 열 걸음이나 스무 걸음을 다녀간들 대수롭지 않아.
8. 나는 노래하는 사람을 기다려. 비를 바람을 회오리를 노래하는 사람을 기다려. 노래하면서 불러 주렴. 너희 손으로 치울 수 없는 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적에 즐겁게 춤추면서 나를 부르렴. 언제든지 찾아갈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