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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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으로 좋은 이야기 피우는 좋은 책
 [책읽기 삶읽기 100] 물만두 홍윤,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

 


  스스로 짓고 싶은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키우는 덧없는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가장 고우며 가장 빛나며 가장 착한 생각은 언제나 삶으로 지을 수 있습니다. 어리숙하거나 어리석거나 어설픈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좋은 삶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은 있으나, 좋으니 나쁘니 하고 가를 만한 삶은 딱히 없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기에 내가 바라는 길로 꾸리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기에 내 온마음을 기울여 보살피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나머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기에 이냥저냥 흘리고 마는 삶이 있어요.


  삶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말이 있는데, 스스로 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쓸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속뜻을 담아요. 삶을 담는 글이기에 앞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쓰는 나날이 돼요. 글은 삶을 드러낸다고 말하기 앞서, 글을 쓰려면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며 아낄 수 있어야 해요.


.. 10억으로 무얼 하겠는가. 10억을 번 다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말이다 …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어쩌면 누군가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내가 남긴 날들보다 나를 기다리는 날들이여, 내가 너희를 더 기쁘게 맞이하마. 이제야 그걸 알다니. 나이 든다는 건 좋은 거란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14, 33, 217쪽)


  좋아할 수 있는 매무새라면 누구나 내 삶을 글로 담습니다. 좋아할 수 있고 아낄 수 있을 때에는 누구나 내 삶을 글로 차곡차곡 담으며 갈무리해요. 그러나,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넘어, 사랑하며 빛내려 한다면 한결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삶을 어떻게 일구고 싶은가 하고 꿈꾸어야 해요. 나 스스로 좋아하며 누릴 삶을 어떻게 짓고 싶은지 생각해야 해요.


  도토리 예배당 종기기 아저씨로 살아가며 할아버지가 된 권정생 님은 언제나 당신 마음밭에 씨앗을 심었어요. 그림책으로도 나오고 만화영화로도 나온 《강아지똥》은 다른 누구도 아닌 권정생 님 스스로를 사랑하며 빚은 글이에요. 이리 구르고 저리 뒹굴며 쓸모없다고 버려진 당신 몸뚱이라 하지만, 이 당신 몸뚱이를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며 좋아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꿈꾸며 ‘강아지똥’ 하나를 빚었어요. 이 강아지똥이 밑거름이 되어 동시를 쓰고 동화를 쓰며 수필을 썼어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을 쓰고 《몽실 언니》를 쓰며 《우리들의 하느님》을 썼어요. 권정생 님 책을 읽는 사람은 많아도 권정생 님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함께 읽는 사람은 퍽 드문데,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 싶은 삶을 생각하며 누린 나날이 고스란히 깃든 글줄이라고 읽을 때에 내 마음밭에도 내 손으로 씨앗 하나 심을 수 있어요.


  내가 심을 내 마음밭 씨앗 하나는 내 삶을 가장 예쁘게 빛낼 씨앗 한 알입니다. 때로는 두 알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석 알이나 넉 알이 될 수 있어요. 한 알은 내 삶을 북돋우고 한 알은 들꽃을 빛내며 한 알은 들새를 살찌울 씨앗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석 알 모두 내 배를 불리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든 좋아요. 맨 처음부터 가장 사랑스레 빛날 수 있고, 차츰차츰 고운 빛을 찾을 수 있으며, 느즈막하게 아리따이 빛나는 햇살을 나눌 수 있어요.


.. 안락사에 찬성한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 아픈 사람을 돌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하더니만 우리 구역 투표소는 계단이 많은 교회였다. 휠체어를 들고 가나, 업고 가나, 장애인은 사람도 아닌가. 장애인이 투표하는 곳에서는 비장애인도 투표할 수 있다. 장애인만 불편할까? 임산부, 노약자 모두 불편하다. 왜 모르는 걸까? … 다른 것보다 장애아 어머니의 마음만 갖는다면,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 가는 부모님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건 분명 고치기 쉬운 일이다. 왜 모든 관공서와 은행 같은 편의 시설에 계단이 있는지 ..  (19, 26∼28쪽)


  날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삶자락인가 하는 이야기가 아주 짙게 드러나는 글을 쓴 미우라 아야코 님이 있어요. 한창 눈부시게 빛난다는 아가씨 나이에 그만 드러눕고 말아 일곱 해를 내리 침대살이만 했다던가요. 이제 죽나 저제 죽나 하고 기다려야 하던 눈부신 젊음이었다고 하는데, 당신을 침대에서 일으켜 꽤 기나긴 해를 살아가며 옆지기를 만나고 책을 내놓으며 문학을 일구고 편지를 쓰도록 이끈 힘은 병의원 처방이나 수많은 약품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픈 몸이건 안 아픈 몸이건,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 이렇게 숨을 쉬고 햇살을 먹으며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하루란, 얼마나 대단히 고마운 선물이며 아름다운 삶인가 하고 느끼며,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다만, 미우라 아야코 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밥먹으며 여행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움직이고 나면 며칠을 드러누우며 쉬어야 했답니다. 이레나 보름을 내리 쉬며 몸을 달래는 일이 잦았다고 해요. 아픈 몸으로 수필을 쓰고 소설을 씁니다. 아픈 몸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믿음을 꿈꿉니다.


  문득 돌아보면, 미우라 아야코 님은 당신 몸이 씻은 듯이 낫기까지는 바라지 않았구나 싶어요. 아픈 몸이든 튼튼한 몸이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아픈 몸이기 때문에 당신 몸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깨달았으니까요. 아픈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아픈 동안 당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더 사랑스레 헤아리며 어깨동무하는 길을 보았다고 하니까요.


  누구라도 몸이 아파 드러누워야 한다면 괴롭겠지요. 나도 몸이 아파 집일을 못하며 꼼짝없이 끙끙 앓아야 하면 괴롭고 힘듭니다. 누가 이 집일을 맡아서 하나 걱정스럽고, 아픈 몸을 쉰다며 드러눕는 일이 안 아픈 몸으로 온갖 집일을 맡아서 할 때보다 훨씬 짐스러우며 무겁다고 느껴요.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짐스러우면서, 어느 한편으로는 몹시 홀가분하고 기뻐요. 내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 나를 보살펴 주고, 집일이나 집살림을 거느리니까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 몫과 길과 삶을 예쁘게 건사하니까요.


  줄 수 있는 사랑은 참 좋은 사랑입니다. 받을 수 있는 사랑 또한 참 좋은 사랑입니다. 돈이 많아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요, 돈이 없어 돈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에요. 가난한 살림이란 얼마나 좋은 사랑인가요. 가멸차서 돈을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람이 기꺼이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좋은 빛줄기이거든요. 가난한 살림인 탓에 둘레에서 돈이나 여러 가지를 기쁘게 얻는다면, 받으면서 사랑스럽고, 나한테 주는 사람도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테니, 서로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생각해요.


.. 내가 만든 서재는 내 얼굴이다. 내 얼굴에 남의 눈과 코를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 우리 나라의 장애인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생긴다. 장애인 자식을 귀하게 여기면 사회 또한 그들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 이사 오면서 옛날 집 사진을 제대로 찍어 놓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까웠다. 철문이 나무문으로 바뀔 때도 못 찍고, 장독대도, 펌프가 있던 수돗가도, 아궁이도, 쪽마루도 못 찍었다 … 그동안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 많은 책 중에 얼마나 많은 보석이 숨어 있을까. 그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내지 못한 것이 가슴에 박혀 아프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좋은 독자가 아니어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제발 책을 쓰시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뻔뻔할까? ..  (25, 195, 226, 321쪽)


  창호종이 문살로 아침햇살을 느낍니다. 저 멀리 멧등성이 너머로 새벽마다 보얀 빛이 서립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을 안 열면 희뿌윰히 밝다가는 노랗게 되는 결을 살짝 느끼고, 이내 온 방이 환해지는 빛을 느껴요. 창호종이 바른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앉아 저 먼 멧등성이를 바라보면, 새까만 밤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다가는 노르스름한 빛깔로 바뀝니다. 이내 발그스름해지다가는 새하얀 빛으로 젖어들고, 시나브로 파아란 하늘이 됩니다. 밤하늘에서는 똑같이 시커멓게만 보이던 구름이 하얀 솜빛이 되는 모양새를 느낍니다.


  밤이 있어 아침이 있습니다. 달이 있어 해가 있습니다. 풀싹이 있어 풀꽃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어 씨가 있습니다.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좋은 짝꿍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예쁘게 어울립니다. 아이와 어른은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님입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사로이 누리는 봄입니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여름을 지나 시원한 산들바람 보드라이 누리는 가을입니다.


  하루하루 기쁜 꿈입니다. 언제나 좋은 이야기밭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랑입니다. 늘 빛나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모든 삶은 어여삐 책입니다.


..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은데, 나 혼자만 보는 게 아까울 때가 있다 …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도, 주인공도, 줄거리도 기억 못하게 될지언정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 냄새, 내 기억의 편린 한 조각만 남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 내가 바라는 건 좋은 작품뿐이다 … 책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니까 ..  (44, 46, 265, 273쪽)


  물만두 홍윤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해 엮은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을 읽습니다. 아픈 몸으로 살아낸 마지막 발자국을 담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득, 홍윤 님이 아프지 않은 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할 때에도 이렇게 글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글을 썼다면 어떠한 결로 어떠한 꽃을 피우는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아픈 몸이요 아픈 삶이기에 마지막에 ‘안락사’로 느긋하게 쉬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을 나쁘게 볼 수 없다는 글줄을 읽다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걷는 길’을 받아들여야겠지만, 나는 ‘안락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꿈을 꾸는 얼굴로 조용히 잠들어 숨을 거둘 생각이거든요. 내 곁 아픈 사람이 아파 괴롭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아파 괴로울 때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플수록 하루하루가 더 고맙습니다. 힘들수록 한 시간 한 분 한 초가 더 애틋합니다.


  괴로운 몸이 되는 까닭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괴롭게 몸부림치는 까닭은 한 분 한 초라도 더 버티고 싶기 때문이에요. 나는 살 만큼 살고서 조용히 삶을 놓고 싶어요. 삶과 다른 누리로 새롭게 이어가고 싶어요. 내 곁 좋은 사람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음으로 담고 싶어요. 아이들 똥오줌기저귀 빨래하는 일이란 수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종이기저귀를 쓸 수 없어요. 날마다 내 두 손과 몸뚱이는 아이들 똥오줌 냄새 짙게 배요. 첫째하고 네 해를 똥오줌 냄새를 맡았고, 둘째하고 앞으로 세 해 더 똥오줌 냄새를 맡겠지요.


  좋은 삶을 좋은 사랑으로 빛내고 싶어요.


.. 다른 건 다 지나쳐도 아버지 생신만은 챙겨야 한다. 왜냐하면 울 아버지가 삐지면 무섭기 때문이다 … 아침부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엄마는 활짝 핀 꽃이 눈에 띄어 집에만 있는 내게 보여준다며 사진을 잔뜩 찍어 오셨다 … 내가 안 봐도 감나무에는 감이 열린다 ..  (78, 184, 264쪽)


  수필책이라 할 《별 다섯 인생》을 가만히 덮으며 생각합니다. 홍윤 님은 어떤 꿈을 꾸며 살았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마, 대단하다 싶은, 또는 거룩하다 싶은, 아니면 놀랍다 싶은 꿈을 꾸었을까 안 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다를 테지만, 삐지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은 ‘보잘것없’거나 ‘수수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삐짐쟁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이 참 대단하고 거룩하며 놀랍다고 느껴요. 아침에 쓰레기 버리러 나간 어머니가 꽃 사진 찍어 오는 모습을 생각하는 삶은 ‘하찮’거나 ‘흔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꽃송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삶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다고 느껴요.


  홍윤 님이 애써 들여다보지 않아도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잎이 흐드러지며 감열매가 맺습니다. 홍윤 님이 모르는 봄꽃이 온 들판과 멧자락에 가득합니다. 홍윤 님이 굳이 봄들을 누비며 냉이와 달래와 쑥과 씀바귀를 캐거나 뜯지 않더라도, 훙윤 님 어머님이 저잣거리에서 소담스레 장만해서 소담스레 된장국 끓여 내놓을 수 있어요.


  좋은 삶이고, 좋은 사랑이며, 좋은 글입니다. 좋은 사람이며, 좋은 이야기이고, 좋은 책입니다. (4345.3.12.달.ㅎㄲㅅㄱ)


― 별 다섯 인생 (물만두 홍윤 글,바다출판사 펴냄,2011.12.1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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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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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는 삶을 배우지 못한다
 [책읽기 삶읽기 95] 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마티,2011)

 


 소설쓰는 장정일 님이 내놓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마티,2011)을 읽습니다. 1권에 이은 2권이니 3권이나 4권도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다른 이가 쓴 소설을 퍽 많이 읽습니다. 소설을 비롯해 온갖 책을 꽤 많이 읽습니다. 모든 갈래 수많은 책을 읽는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만, 문학책 테두리에서만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은 장정일 님이 읽고 나서 당신 느낌을 밝힌 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른바 ‘독서일기’입니다. ‘전문서평’이나 ‘책 비평’이 아닌 ‘읽은이 느낌’을 풀어놓는 글입니다. 서평이나 비평이 아닌 만큼, 책 하나를 둘러싼 장정일 님 생각을 홀가분하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서평이나 비평에 매이지 않는 만큼, 책 하나를 한껏 즐거이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말할 수 있습니다.


.. 인문학과 고전이 대학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학이 죽었다는 것 … 한국인들은 초·중·고등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대학교에서마저 ‘인간이 자라는’ 교육을 받아 보지 못했다. 즉 시험지옥 속에서 점수 벌레로 사육되면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삭제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  (22, 23쪽)


 책을 읽는 사람은 스스로 읽은 책을 두고 ‘좋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안 좋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아깝구나’ 하고 말할 수 있으며, ‘내 동무나 이웃더러 읽으라 할 수는 없겠네’ 하고 말할 수 있어요.

 

 따로 틀에 매이지 않고 내 느낌을 말하기에 장정일 님 독서일기는 마음 가벼이 읽을 만합니다. 다만, 장정일 님 독서일기를 읽는 사람도 장정일 님처럼 마음 가벼울 때에 홀가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어떤 틀에 가두려 하지 않을 때라야 즐거이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넋을 가꾸면서 내 삶을 일구려 하는 마음가짐을 건사해야 비로소 책읽기를 예쁘게 누려요.


.. 기업이 제공한 친절에 중독되었던 만큼 당신은 기업에 휘둘리기 쉬운 ‘봉’이 된다 … 1921∼29년 즈음엔 기업인들이 전체 대학 이사회의 66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때는 미국 자본주의가 거대 자본가 중심으로 통합·재편된 때와 겹치는데, 그때부터 거대기업들은 후원을 무기로 좌파 지식인을 색출하고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보이는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이익에 유리하도록 철학·심리학·인류학·정치학을 통제했다 ..  (34, 79쪽)


 책 하나를 읽거나 책 여럿을 겹쳐서 읽은 느낌을 풀어놓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장정일 님은 이 느낌글을 쓰는 힘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하고.

 

 장정일 님은 책을 읽으면서 ‘책 읽은 느낌 적는 글’을 쓰는 힘을 얻었을까요.

 

 사회를 읽고 정치를 읽고 경제를 읽고 문화를 읽고 언론을 읽고 문학을 읽고 교육을 읽는 눈썰미나 눈길이나 눈높이는 ‘다른 책을 읽으’면서 얻었을까요.

 

 책을 읽으면서 얻은 힘이나 눈썰미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문득 깨달은 대목이 있을 테고, 책에 밝힌 이야기가 밑거름이 되어 비로소 알아챈 대목이 있겠지요. 그러나, 책으로 얻은 힘이나 눈썰미라 할 만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곧, 장정일 님 스스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몸부림으로 온누리를 읽고 지구별을 헤아릴 수 있구나 싶어요.

 

 삶을 바탕으로 삶터를 읽습니다. 삶을 발판으로 사람을 읽습니다. 삶을 거름으로 삼아 사랑을 읽습니다.


.. 자신의 정치적 대리인을 내세우는 데 실패한 저소득층은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과시적인 문화 시설을 짓기 좋아하는 정채 결정자들의 결정을 바꾸지 못한다 … 황우석 파동은 대한민국 국민을 줄기세포 전문가로 만들고 과학 논문 검증가로 만들었지만, 아쉽게도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 교육에서 아이의 선천적인 능력보다 후천적인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사회에서라면, 애초부터 ‘슈퍼 베이비’를 만들려는 시도가 지탄받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  (131, 157, 158∼159쪽)


 책으로는 삶을 배우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책으로는 책을 배운다고 느낍니다.

 

 책에 깃든 이야기를 읽으며 비로소 사람들 살아가는 다른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삶과 꿈과 넋과 사랑을 헤아리는 실마리를 얻는다고 느낍니다.

 

 똑같은 줄거리 담은 책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읽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살아가니 다르게 읽을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터전에서 읽으니, 다르게 헤아릴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줄거리 담은 책을 누군가는 멧새 노래하는 숲속에서 읽고 누군가는 자동차 빵빵 소리 시끄러우면서 배기가스 자욱한 한길에서 읽는다고 생각해 보셔요. 같은 사람이 이러한 터전에서 읽을 때,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터전에서 읽을 때, 똑같은 줄거리 담은 책은 그때그때 어떻게 스며들까요.

 

 갓난쟁이하고 하루 내내 부대끼는 사람이 읽는 책, 공무원이 책상맡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 슬쩍 펼치는 책, 서울로 일하러 가는 서울 변두리(인천, 부천, 수원, 의정부, 구리, 고양, 용인, 성남 같은) 사람들이 지옥과 같다는 전철에서 읽는 책,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읽는 책, 회사원이 주말에 도서관에 나들이 가서 읽는 책, 이런 여러 가지 책은 얼마나 같거나 다를 만할까요.


.. 다산의 모든 저작은 유배지라는 열악한 환경과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초인적인 노력이 한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실학을 설명할 때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 두 아들에게 독서 이외의 다른 살길을 찾아보라고 길을 터주지 못한 것도 실학을 좀더 냉정하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 독서대국! 아마 그때(1970년대)는 여성지가 그 임무를 맡았나 보다. 농담이 아니라 윌리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해, 어떤 여성지는 그의 중편인 〈황제특명전권공사〉를 본문 가운데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요즘의 여성지는 어떤지…… ..  (222, 266∼267쪽)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보금자리를 튼 터전에서 몸으로 배운다고 느낍니다. 삶을 부대끼며 삶을 배웁니다. 사람을 만나며 사람을 배웁니다. 일을 하며 일을 배웁니다. 놀이를 즐기며 놀이를 배웁니다. 설거지를 하며 설거지를 배웁니다. 빨래를 하며 빨래를 배웁니다. 호미질을 하며 밭을 배웁니다. 책을 읽으며 책을 배웁니다.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배웁니다. 사진을 찍으며 사진을 배웁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을 읽는다면 ‘글쓰기 다루는 책’을 배울 뿐, 글쓰기도 책도 배우지 못합니다. 스스로 글을 써야 글을 배웁니다. 책읽기 드러내는 책을 읽으면 ‘책읽기 드러내는 책’을 배울 뿐, 책읽기도 책도 배우지 못해요. 스스로 책을 읽어야 책읽기나 책을 배웁니다.

 

 소설쓰는 장정일 님은 책을 읽은 느낌을 책 하나로 그러모읍니다만, 이 책에는 ‘책 읽은 느낌’을 애써 담지 않습니다. 책 하나에 비추어 ‘장정일 님 스스로 이 땅에서 부대낀 삶과 꿈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읽고 싶으면 읽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책은 안 읽어도 됩니다. 온누리를 배우고 싶으면 온누리를 내 가슴으로 끌어안으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책을 속깊이 알고 싶으면 독서일기 아닌 ‘책’을 읽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장정일 님 책을 왜 읽었을까요? 한 마디로 갈무리하자면, 장정일 님이 살아가는 매무새를 헤아리고 싶어 이 책을 읽었습니다. (4345.2.2.나무.ㅎㄲㅅㄱ)


―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씀,마티 펴냄,2011.8.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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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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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은 대로 똥을 누듯, 삶결 그대로 읽는 책
 [책읽기 삶읽기 95] 김남일, 《책》(문학동네,2006)

 


 사람들은 책을 읽습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글을 씁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글을 씁니다.

 

 사람들은 삶을 꾸립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삶을 꾸립니다. 도시가 되든 시골이 되든 살림터를 찾고, 높다랗게 층층집이 되든 낮다랗게 골목집이 되든 살림자리를 돌봅니다.

 

 살아가는 곳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는 마음결대로 책을 마주합니다. 살아가고픈 대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매무새대로 책을 다룹니다.

 

 어떤 이는 책에만 빠져들는지 모릅니다. 아름답다 여기는 생각씨앗을 얻으려고 책에 흠씬 젖어들는지 모르고, 책에서 눈을 떼고 바라보는 둘레 터전이 그닥 사랑스럽지 않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아직 책 바깥 누리가 어떠한 모습이고 빛깔이며 무늬이고 내음인지를 못 깨달았기 때문인지 몰라요.

 

 어떤 이는 책에는 등돌릴는지 모릅니다. 젊을 적부터 책읽기를 하지 않거나 책읽기를 할 겨를이 없던 나머지, 나이가 든 뒤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말아 책을 못 읽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 날 글을 깨우쳐 처음 책읽기를 할 수 있기까지 여러 해를 애써야 하듯, 늙은 몸뚱이를 이끌고 여러 해 힘을 쏟아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에 처음으로 책읽기에 사로잡힐는지 몰라요.


.. 서점은 그저 책만 사고팔던 가게가 아니었다  ..  (20쪽)


 사람이 좋아 사람읽기를 합니다. 사랑이 따스해 사랑읽기를 합니다. 내 삶을 아끼면서 삶읽기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늘읽기를 합니다. 밤하늘 별을 좋아하면서 별읽기를 합니다. 흙을 만지며 곡식과 푸성귀를 일구는 나날, 흙읽기를 합니다.

 

 누군가는 돈읽기를 할 테고, 누군가는 정치읽기를 합니다. 누군가는 학력읽기를 할 테며, 누군가는 밥그릇읽기를 합니다. 저마다 가장 바라는 대로 살아가며 무언가를 읽습니다. 스스로 가장 잘 할 만하다 여기는 쪽으로 흐르며 무언가를 읽습니다.

 

 허물없이 살아가고자 마음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어깨동무하려는 몸가짐으로 믿음읽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책읽기를 한다면, 종이에 새긴 글을 읽는 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글만 읽는다면 글읽기이고, 글이 보여주는 정보나 지식을 읽는다면 정보읽기나 지식읽기이며, 시험공부를 하며 들여다보는 일이라 하면 시험문제읽기예요. 책읽기란, 책으로 나누려 하는 삶이나 마음이나 사랑이나 꿈이나 빛이나 생각이나 자연이나 사람을 읽는 일입니다.


.. 나는 양심을 잃은 대신 헐값에 지식을 얻었다 … 한 권의 책이 한 인간, 특히 하루에도 백 번쯤 꿈을 키웠다가 접고 접었다가 키우는 젊은 영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  (26, 214쪽)


 소설쓰는 김남일 님이 쓴 글을 그러모은 《책》(문학동네,2006)을 읽습니다. 김남일 님은 글로 쓸 때에는 한글 ‘책’이 아닌 한자 ‘冊’으로 적어야 맛이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아마, 글읽기를 할 때에는 ‘冊’이 ‘책’보다 낫다 여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욱이, 요사이에는 ‘冊’도 ‘책’도 아닌 ‘book’을 써요. 영어조차 아닌 한글로 ‘북’을 쓰는 이도 꽤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책을 읽는 맛을 달리 느끼니까, 누군가는 ‘오피니언’처럼 ‘북피니언’을 말하고, ‘북셀러’를 말한다든지 ‘북토피아’나 ‘북클럽’이나 ‘북마케팅’을 말해요. ‘북쇼’나 ‘북시티’를 말하는 이들은 이러한 말이어야 비로소 ‘책맛’이 산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 만일 그(이문열)가 싫어 그를 초라하게 만들고 싶다면, 누군가가 그가 쓰는 어떤 소설보다 더 가치 있고 더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우리 나라 독자들이 차차 그의 품에서 벗어나면 된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보인 행보는 나로 하여금 이제 그런 생각조차 접게 만든다 ..  (63쪽)


 입으로 말할 때에는 그저 ‘책’입니다. 버스를 타든 택시를 타든 입으로 말할 때에는 늘 ‘버스’이고 ‘택시’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는 밥을 먹을 뿐입니다. 누군가 식사하자 말한대서 입으로 읊는 말이 ‘食事’가 되지 않아요.

 

 풀은 그예 풀입니다. 풀을 바라보며 느끼는 빛깔은 풀빛입니다. 중국사람은 ‘草綠’이라 적을 테고, 일본사람은 ‘綠色’이라 적을 테며, 영국이나 미국에서 사는 사람은 ‘green’이라 적을 테지요. 한국사람은 풀을 바라보니 오직 풀빛입니다. 무지개는 무지개빛이고 하늘은 하늘빛이요 바다는 바다빛입니다. 사람은 사람빛이고 사랑은 사랑빛이며 책은 책빛이에요.

 

 사람들마다 손에 쥘 책에는 어떠한 책빛이 서릴까 궁금합니다. 널리 읽히는 책이라 수십 수백만 권이 팔린다는 책에는 집집마다 어떤 빛이 드리울까 궁금합니다. 1000권이나 100권 겨우 읽히는 책에는 사람들마다 어떤 빛을 느끼면서 맞아들일까 궁금합니다. 10만 권 팔리는 책을 쓴 사람은 대단하다 여길 만하고, 10권 팔리는 책을 쓴 사람은 하찮다 여길 만할지 궁금합니다. 20만 권 팔린 책은 두루 알릴 만하고, 200권 팔린 책은 느낌글 하나 붙을 값어치 없을는지 궁금합니다.


.. 그때 마침 미군의 용병으로 간 친구가 나를 불렀다. 용산의 미8군 도서관, 그곳이 보물창고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에 없는 것은 거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 어찌어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과연 듣던 것 이상이었다. 거기에는 특히 마오의 중국혁명에 관한 책이며 난공불락이라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킨 베트남의 영웅 보 응웬 지압 장군의 전술 전략서 등 … 게다가 그런 것들을 아무런 제지 없이 빌려가 볼 수 있다는 것. 나는 아마 다시 한 번 미국의 충격적인 힘의 실체를 절감했을 것이다 ..  (158∼159쪽)


 소설쓰는 김남일 님은 오직 김남일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오는 나날에 빗대어 책을 읽습니다. 때때로 겉멋에 들린 채 ‘높아 보인다’던 선배나 후배가 훑던 책을 빌리거나 사서 읽기도 하지만, 몇 장 못 넘기고 묵힌다는 이야기를 《책》에 적바림합니다. 곧, 겉멋에 들리기도 하던 책읽기는 김남일 삶읽기하고 서로 같아요. 때로는 겉멋이고 때로는 속맛이며 때로는 겉훑기이고 때로는 속치레입니다.

 

 이리로 살가이 흐르는 삶이고, 저리로 안타까이 흐르는 삶입니다. 더 낫다거나 더 모자라다거나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고 재거나 따질 수 없는 삶입니다. 김남일 님은 김남일 님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아갑니다.


.. 새로운 미래는 중심으로 치닫는 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탈중심화’로부터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조용히’ 외치는 것이다. 어지러운 새해 벽두, 아파트에 갇혀 사는 나 또한 과거에서 미래를 보고 싶은 꿈에 사로잡힌다 ..  (255쪽)


 김남일 님은 《책》이라는 책에서 아파트 문명과 권력을 살짝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아파트에 갇힌 삶이라고 푸념합니다. 김남일 님은 아파트에 갇힌 삶에서 스스로 헤어날 낌새는 보이지 않아요. 슬그머니 푸념하는 매무새로 지나갑니다. 어쩌면, 김남일 님 소설도, 김남일 님 《책》도, 김남일 님 ‘읽는 책’도 이러한 굴레하고 한동아리 아닐까 싶습니다.

 

 ‘탈중심화를 조용히 외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어디에 선 삶인가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나한테 새로운 앞날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앞날이란 대한민국 정부가 나아갈 새로운 앞날이 아니에요. 지구별이 나아갈 새로운 앞날 또한 아니에요. 바로 나 스스로 살아갈 새로운 앞날입니다. 정부가 어찌저찌 바뀌건 말건 나 스스로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새로 일구어야 합니다. 지구별을 걱정한다면, 나부터 내가 선 곳을 아름답게 돌보도록 마음을 쏟아야 해요.

 

 김남일 님 스스로 한결 사랑스러우면서 따스하게 길을 걷는다면 《책》에 감도는 맛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꿈꾸어 봅니다. 당근을 짠 물을 마시는 갓난쟁이는 당근물처럼 바알간 똥을 누고, 어머니젖을 무는 갓난쟁이는 어머니젖 내음 풍기는 똥을 눕니다. 세겹살 구워먹는 어른들은 세겹살 삭은 내음 풍기는 똥을 누고, 소주를 들이붓는 어른들은 소주 내음 짙은 똥을 눠요. 먹은 대로 똥을 누듯, 읽은 대로 글을 씁니다. 읽는 대로 책을 바라보듯, 삶 그대로 책을 느낍니다. (4344.12.31.흙.ㅎㄲㅅㄱ)


― 책 (김남일 글,문학동네 펴냄,2006.5.3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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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범우문고 163
윤형두 지음 / 범우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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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책읽기 삶읽기 91] 윤형두,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범우사,1997)

 


 책을 말하는 책이 나날이 쏟아집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첫무렵을 헤아리면, 이때에는 책을 말하는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는 책읽기를 그닥 즐기지 않았으니 이무렵에 책을 말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가 알 수 없으나, 1992년부터 헌책방마실을 하며 예전 책을 더듬어 본다면, 1980년대나 1970년대에는 책을 말하는 책이 몹시 드뭅니다. 책을 소개하는 책이든 책 발자취를 다루는 책이든 책문화나 책역사 톺아보는 책이든 좀처럼 찾아볼 수 없어요.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한국에도 책을 말하는 책이 제법 나타납니다. 2010년대에 가까워지고 2010년대를 넘어서면 책을 말하는 책 가운데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이 퍽 늘어납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문학을 놓고 비평하는 책은 곧잘 나왔지만, 어린이문학을 놓고 비평하는 책은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씀)이 첫끈이라 할 만하고, 아직 이만 한 높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없다 할 만합니다.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이라면, 《어린이와 그림책》(마츠이 다다시 씀)만 한 책이 없는데, 어린이문학을 두루 살피는 아름다운 책으로 《현대 어린이문학》(우에노 료 씀) 하나 더 있어요. 다만, 이 두 가지 책은 번역책이요, 한국사람이 읽은 한국책을 놓고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읽히도록 내놓은 아름다운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은 마땅히 없구나 싶어 아쉬워요.


.. 대학에 와서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책들을 골라 읽었다. 남들이 다 사 보는 월간 《사상계》란 잡지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또 해석할 수도 없는 《타임》, 《뉴스위크》도 사 보았다 … 그 후 나는 다종의 책을 출간하였다. 주부들이 가족의 육체를 위하여 식탁에 반찬을 갖추어 놓는다면, 나는 정신적인 식탁에 반찬을 마련해 주기 위해 책을 출간하는 것이다 ..  (17, 24쪽)


 출판사 범우사 큰일꾼 윤형두 님이 내놓은 조그마한 책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범우사,1997)를 읽습니다. 윤형두 님은 커다란 책도 내놓으나,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처럼 자그마한 책도 함께 내놓습니다. 출판사 큰일꾼이 당신 책삶을 다루는 책을 내놓는다 할 때에, 이렇게 조그마하고 값싼 책을 내놓은 적이 또 있을까 싶도록, 윤형두 님이 내놓는 책은 남다릅니다.

 

 윤형두 님은 당신 책에서, 책을 만들면서 느끼는 책마을 이야기를 다루고,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책삶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린 날부터 책을 가까이하며 당신 넋을 일군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이들어서까지 책을 가까이하며 책으로 얻은 열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조금 더 홀가분하게 ‘책과 삶’, ‘책과 사람’, ‘책과 사랑’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대목은 아쉽다 할 만하지만, 이렇게 느낄 아쉬움은 젊은 뒷사람이 쓰다듬으면서 북돋우면 됩니다. 윤형두 님은 당신과 같은 나이인 어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줘요. 주절주절 푸념을 늘어놓는 늙은이가 될는지, 서울 탑골공원 같은 데에 주루루 앉아 해바라기하면서 옛날이야기에 젖는 늙은이가 될는지, 관제데모행사에 경품 받으러 몰려다니는 늙은이가 될는지, 아니면 언제나 젊은 늙은이가 될는지, 언제나 일하는 늙은이가 될는지, 언제나 흙을 만지는 시골 늙은이가 될는지를 보여줍니다.


.. 어릴 때부터 활자매체인 책을 대하지 않은 사람은 커서도 신문을 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찾기보다는 리모콘을 들고 TV 앞에 가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신문은 휴지가 되고 신문사는 문을 닫게 된다. 그래서 외국 신문사는 독서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좋은 지면에 책광고를 할애하고 광고료는 다른 업종보다 싸게 한다. 우리 나라 신문들도 인쇄매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간 스포츠지가 그렇게 많은데도 종합일간지가 문화 면보다 스포츠 면을 더 할애하고 있으며, 일반 연애기사보다 출판기사가 훨씬 적다는 것은 구독층의 선호에 영합하면서 인쇄매체로서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아닌가 본다 ..  (101쪽)


 인천 배다리에는 여든 넘은 나이로 헌책방 일을 붙잡는 할배가 한 분 있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와서 헌책방 일을 처음 한 뒤 이제껏 헌책방 일을 놓은 적 없는 할배는, 저녁마다 술 한잔 기울이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립니다. 다른 여느 할배는 방구석에 갇히거나 늙은이 모아 가두는 건물에 얽매이지만, 인천 배다리 헌책방 할배는 예순 해 넘는 책삶을 일구어요.

 

 다만, 헌책방 할배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다루고 책을 팔지만 책읽기로 당신 삶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책을 못 읽기도 하지만 글을 못 쓰기도 합니다. 책을 만지면서 책을 못 읽고, 책을 다루면서 글을 못 써요. 그래서, 윤형두 님 같은 분은 적잖은 책을 써내며 여러모로 이름을 날리지만, 헌책방 할배는 적잖은 사람들한테 씨알 같은 삶말을 들려주면서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아는 이는 아주 드물어요.

 

 아마 우체국 일꾼은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겠지요. 이웃 헌책방 일꾼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 테지요. 동네에서 오래오래 늙은 이웃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 테고요.


.. 그러나 한국에서의 서점들이 출판물 중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문고본이다. 진열해 놓은 면적만큼 매상고를 올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행본 한 권을 팔면 6∼7천 원인데, 문고본 한 권에 1∼2천 원이니 문고본 서너 권을 팔아야 단행본 한 권 값인데 손도 많이 가고 한정된 구매자에게 가능하면 고가의 책을 팔아야 경영 합리화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108쪽)


 나는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를 내놓은 윤형두 할배가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 할배가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 흙일꾼 할배와 할매 모두 좋다고 느낍니다. 옆지기와 나를 낳은 ‘하루하루 늙는 어버이’,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 할배와 할매가 참 좋다고 느낍니다.

 

 삶을 들려주는 할배는 예쁩니다. 삶을 보여주는 할매는 아름답습니다. 책이란 삶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책은 아름다이 살아온 나날을 찬찬히 그러모으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지식을 담을 때에는 책이 아니라 지식꾸러미입니다. 정보를 실을 때에는 책이 아니라 정보꾸러미입니다.

 

 책은 오직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책은 언제나 삶꾸러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은 베스트셀러도 아니요 스테디셀러도 아닙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 또한 책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아요. 삶을 담은 이야기보따리요, 사랑을 싣는 이야기꾸러미이면서, 사람을 드러내는 이야기꿈만 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4344.12.13.불.ㅎㄲㅅㄱ)


―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윤형두 글,범우사 펴냄,1997.12.20./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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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303호 2011.09.05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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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한테 읽히는 책일까
 [책읽기 삶읽기 86] 《기획회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303호



 책을 다루는 잡지 《기획회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303호(2011.9.5.)를 읽으며 생각한다. 《기획회의》 303호는 ‘대안의 삶을 꿈꾸다’를 내걸며 꾸린다. 책마을 안팎에서 힘껏 일하는 분들이 퍽 좋다 손꼽을 만한 책을 한두 가지씩 들면서 ‘다른(대안) 삶길’을 이야기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나로서는 선뜻 와닿는 이야기가 없다고 느낀다. 한 마디로 간추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무엇부터 함께하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다루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 시골살이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서 뭘 하고 살든 일상에서, 마음속에서 ‘시골’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때 ‘시골’은 곧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 혹은 겸손하고 자족적인 생활의 추구와 다른 뜻이 아니다 ..  (17쪽 여는글/최성각)


 참다이 즐겁게 살아가자면 바로 오늘 이곳부터 내 나날을 고쳐야 한다. 좋다고 여기는 삶이라면 더 좋게 고치고,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삶이라면 좋게 고쳐야 한다. 더도 덜도 아니다. ‘좋게’ 고칠 삶이다.

 나는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과 같은 말놀이가 달갑지 않다. 무슨 소리인가. ‘생태적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누가 알아들으라는 말인가. 이런 말을 알아들을 사람한테 읽히면 되는 《기획회의》인가. 이런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말은 알아들으’면서 ‘삶은 안 고치느’라 ‘책만 더 많이 읽고 살아가’지는 않는가.

 책은 덜 읽어도 된다. 책은 안 읽어도 괜찮다. 아름다이 살아가면 넉넉하다. 착하게 어깨동무하면 흐뭇하다.

 텃밭을 일구거나 꽃그릇농사를 지으는 나날을 누린다면, 서울이나 인천이나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얼마든지 예쁘게 살아갈 만하다. 그러나, 텃밭도 꽃그릇농사도 짓지 못하며 시멘트와 아스팔트 울타리에서 플라스틱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도시사람이면서 ‘시골살이 넋을 보여주는 책을 골고루 읽는’대서 스스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니, 달라지기는 하는가.


.. 후일담이지만, 책을 낸 뒤 “기획자인 당신은 이 가운데 몇 권이나 읽었나?” 그리고 “제목대로 된다는데 이 책도 안 팔리면 어쩌냐?” 하는 질문 또는 걱정을 많이 들었다 ..  (131쪽/정희용)


 그야말로 책은 안 읽어도 된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다. 사람다운 사랑을 일구지 못하며 책만 많이 알거나 읽거나 좋아한다면, 고운 목숨 선물받아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왜 고운 목숨을 선물받았는가. 나는 내 아이한테 왜 고운 목숨을 선물하는가.

 책은 안 팔려도 되고 덜 팔려도 된다. 제대로 읽혀야 비로소 책이다. 제대로 읽힐 수 있은 다음에 알맞게 팔리면 된다.

 1000권 팔리니 안타까운 책일 수 없다. 1만 권 팔리니 그럭저럭 쏠쏠한 책일 수 없다. 10만 권이나 100만 권 팔려야 책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 한 권이 팔리건 열 권이 팔리건, 한 권이 팔릴 때에는 한 사람이 옳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열 권이 팔릴 적에는 열 사람이 바르게 사랑하며 지내는 꿈을 들려주어야 바야흐로 책이다.


.. 모든 일의 최우선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  (151쪽/한기호)


 좋은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한다면 참 기쁘리라. 그런데 ‘어떤 사람’한테서 ‘어떤 마음’을 얻으려 하는가부터 똑똑히 알아야 한다. 나쁜 사람한테서 나쁜 마음을 얻어도 될까? 어설픈 사람한테서 어설픈 마음을 얻어도 되나? 짓궂은 사람한테서 짓궂은 마음을 얻어도 되려나?

 책을 다루는 잡지 《기획회의》일 테지만, 책만 다루는 잡지로 나아가기보다는, 책을 사랑하는 삶을 아끼는 이야기를 다룰 줄 아는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은 덜 읽거나 책은 잘 모르거나 책하고는 좀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가더라도 착하며 참답고 예쁜 나날을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들 글을 조금이나마 함께 싣는다면 반갑겠다.

 《기획회의》 303호는 ‘대안적 삶을 꿈꾸다’라 말하지만, 정작 ‘다른 자리에서 다른 꿈을 꾸면서 다른 사랑을 나누는’ 글을 찾아 읽을 수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글을 써서 담았으나, 그저 좋다 여길 만한 글에 머물 뿐, 착하며 아름다운 다른 사랑까지 거듭나지 못하고 만다. (4344.11.11.쇠.ㅎㄲㅅㄱ)


― 기획회의 303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2011.9.5./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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