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범우문고 163
윤형두 지음 / 범우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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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책읽기 삶읽기 91] 윤형두,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범우사,1997)

 


 책을 말하는 책이 나날이 쏟아집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첫무렵을 헤아리면, 이때에는 책을 말하는 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는 책읽기를 그닥 즐기지 않았으니 이무렵에 책을 말하는 책이 얼마나 있었는가 알 수 없으나, 1992년부터 헌책방마실을 하며 예전 책을 더듬어 본다면, 1980년대나 1970년대에는 책을 말하는 책이 몹시 드뭅니다. 책을 소개하는 책이든 책 발자취를 다루는 책이든 책문화나 책역사 톺아보는 책이든 좀처럼 찾아볼 수 없어요.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한국에도 책을 말하는 책이 제법 나타납니다. 2010년대에 가까워지고 2010년대를 넘어서면 책을 말하는 책 가운데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이 퍽 늘어납니다. 가만히 보면, 어른문학을 놓고 비평하는 책은 곧잘 나왔지만, 어린이문학을 놓고 비평하는 책은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씀)이 첫끈이라 할 만하고, 아직 이만 한 높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없다 할 만합니다.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이라면, 《어린이와 그림책》(마츠이 다다시 씀)만 한 책이 없는데, 어린이문학을 두루 살피는 아름다운 책으로 《현대 어린이문학》(우에노 료 씀) 하나 더 있어요. 다만, 이 두 가지 책은 번역책이요, 한국사람이 읽은 한국책을 놓고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한테 읽히도록 내놓은 아름다운 ‘어린이책을 말하는 책’은 마땅히 없구나 싶어 아쉬워요.


.. 대학에 와서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는 책들을 골라 읽었다. 남들이 다 사 보는 월간 《사상계》란 잡지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또 해석할 수도 없는 《타임》, 《뉴스위크》도 사 보았다 … 그 후 나는 다종의 책을 출간하였다. 주부들이 가족의 육체를 위하여 식탁에 반찬을 갖추어 놓는다면, 나는 정신적인 식탁에 반찬을 마련해 주기 위해 책을 출간하는 것이다 ..  (17, 24쪽)


 출판사 범우사 큰일꾼 윤형두 님이 내놓은 조그마한 책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범우사,1997)를 읽습니다. 윤형두 님은 커다란 책도 내놓으나,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처럼 자그마한 책도 함께 내놓습니다. 출판사 큰일꾼이 당신 책삶을 다루는 책을 내놓는다 할 때에, 이렇게 조그마하고 값싼 책을 내놓은 적이 또 있을까 싶도록, 윤형두 님이 내놓는 책은 남다릅니다.

 

 윤형두 님은 당신 책에서, 책을 만들면서 느끼는 책마을 이야기를 다루고,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책삶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린 날부터 책을 가까이하며 당신 넋을 일군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이들어서까지 책을 가까이하며 책으로 얻은 열매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조금 더 홀가분하게 ‘책과 삶’, ‘책과 사람’, ‘책과 사랑’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대목은 아쉽다 할 만하지만, 이렇게 느낄 아쉬움은 젊은 뒷사람이 쓰다듬으면서 북돋우면 됩니다. 윤형두 님은 당신과 같은 나이인 어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줘요. 주절주절 푸념을 늘어놓는 늙은이가 될는지, 서울 탑골공원 같은 데에 주루루 앉아 해바라기하면서 옛날이야기에 젖는 늙은이가 될는지, 관제데모행사에 경품 받으러 몰려다니는 늙은이가 될는지, 아니면 언제나 젊은 늙은이가 될는지, 언제나 일하는 늙은이가 될는지, 언제나 흙을 만지는 시골 늙은이가 될는지를 보여줍니다.


.. 어릴 때부터 활자매체인 책을 대하지 않은 사람은 커서도 신문을 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찾기보다는 리모콘을 들고 TV 앞에 가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신문은 휴지가 되고 신문사는 문을 닫게 된다. 그래서 외국 신문사는 독서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좋은 지면에 책광고를 할애하고 광고료는 다른 업종보다 싸게 한다. 우리 나라 신문들도 인쇄매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간 스포츠지가 그렇게 많은데도 종합일간지가 문화 면보다 스포츠 면을 더 할애하고 있으며, 일반 연애기사보다 출판기사가 훨씬 적다는 것은 구독층의 선호에 영합하면서 인쇄매체로서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아닌가 본다 ..  (101쪽)


 인천 배다리에는 여든 넘은 나이로 헌책방 일을 붙잡는 할배가 한 분 있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와서 헌책방 일을 처음 한 뒤 이제껏 헌책방 일을 놓은 적 없는 할배는, 저녁마다 술 한잔 기울이면서 ‘살아가는 보람’을 누립니다. 다른 여느 할배는 방구석에 갇히거나 늙은이 모아 가두는 건물에 얽매이지만, 인천 배다리 헌책방 할배는 예순 해 넘는 책삶을 일구어요.

 

 다만, 헌책방 할배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다루고 책을 팔지만 책읽기로 당신 삶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책을 못 읽기도 하지만 글을 못 쓰기도 합니다. 책을 만지면서 책을 못 읽고, 책을 다루면서 글을 못 써요. 그래서, 윤형두 님 같은 분은 적잖은 책을 써내며 여러모로 이름을 날리지만, 헌책방 할배는 적잖은 사람들한테 씨알 같은 삶말을 들려주면서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아는 이는 아주 드물어요.

 

 아마 우체국 일꾼은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겠지요. 이웃 헌책방 일꾼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 테지요. 동네에서 오래오래 늙은 이웃도 헌책방 할배 이름을 알 테고요.


.. 그러나 한국에서의 서점들이 출판물 중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문고본이다. 진열해 놓은 면적만큼 매상고를 올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행본 한 권을 팔면 6∼7천 원인데, 문고본 한 권에 1∼2천 원이니 문고본 서너 권을 팔아야 단행본 한 권 값인데 손도 많이 가고 한정된 구매자에게 가능하면 고가의 책을 팔아야 경영 합리화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108쪽)


 나는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를 내놓은 윤형두 할배가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 할배가 좋다고 느낍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 흙일꾼 할배와 할매 모두 좋다고 느낍니다. 옆지기와 나를 낳은 ‘하루하루 늙는 어버이’,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 할배와 할매가 참 좋다고 느낍니다.

 

 삶을 들려주는 할배는 예쁩니다. 삶을 보여주는 할매는 아름답습니다. 책이란 삶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책은 아름다이 살아온 나날을 찬찬히 그러모으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지식을 담을 때에는 책이 아니라 지식꾸러미입니다. 정보를 실을 때에는 책이 아니라 정보꾸러미입니다.

 

 책은 오직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책은 언제나 삶꾸러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은 베스트셀러도 아니요 스테디셀러도 아닙니다. 추천도서나 명작도서 또한 책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아요. 삶을 담은 이야기보따리요, 사랑을 싣는 이야기꾸러미이면서, 사람을 드러내는 이야기꿈만 책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4344.12.13.불.ㅎㄲㅅㄱ)


―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윤형두 글,범우사 펴냄,1997.12.20./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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