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 마흔살 고백
공선옥 지음 / 생활성서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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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48

 


마흔 살에 걷는 길
― 공선옥의 마흔 살 고백
 공선옥 글
 생활성서사 펴냄, 2009.2.10.

 


  소설쓰는 공선옥 님은 지난 2003년에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월간말)라는 책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공선옥의 마흔 살 고백》(생활성서사)을 내놓습니다. 1964년에 태어나셨으니 어느새 쉰 줄에 접어든 공선옥 님이니, 앞으로는 “쉰에 길을 나서다”나 “쉰 살 고백”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내 서른 살 언저리에 읽었고, 《공선옥의 마흔 살 고백》은 마흔 살 길목에서 읽습니다.


.. 그때 누군가 작은 소리로 그러던 것이었다. 으이구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 나는 뒷머리를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미운 짓 하는 내 아이를 누군가는 지금 콱 한 대 때려 주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그 나들이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위로하는 거예요. 제 곁에 그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울지 않게 되었어요.” … 아이가 우는데도 악이나 쓰는 아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 이전에 나는 세상에 대한 무서움을 느꼈다. 아이 엄마는 필리핀 사람이라고 했다. 무슨 일로인지 두 사람이 다퉜고 아이 엄마가 식당을 뛰쳐나갔다는 것인데 ..  (20, 27, 29쪽)


  옛날이라면 마흔 살 나이로 접어든 사람한테는 스무 살 아이가 있습니다. 스무 살 나이로 접어든 아이는 마음을 밝히는 짝꿍을 만날 만합니다. 마음을 밝히는 짝꿍을 만난 스무 살 아이는 푸른 빛으로 고운 아이를 낳을 테고, 이 아이는 새롭게 자라겠지요. 이리하여, 마흔 살 어른이 예순 살이 될 무렵, 스무 살 젊은이는 마흔 살 어른이 되고, 갓 태어난 아기는 새로운 스무 살로 꽃피우리라 느껴요.


  커다란 느티나무는 아주 작은 꽃을 풀빛으로 피우고는 아주 작은 열매를 또 풀빛으로 맺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둘레에는 작은 씨앗 떨어져 작은 싹이 돋습니다. 이들 작은 싹은 풀을 먹는 숲짐승이 냠냠 훑어먹기도 하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어버이 나무 곁에서 어린이 나무로 줄기가 굵어지기도 해요.


  너무 마땅한데, 사랑스러운 손길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이웃을 아낍니다. 비록 사랑스러운 손길을 덜 받거나 못 받으며 자란 아이라 하더라도, 이 아이들은 그동안 덜 받거나 못 받은 따순 손길을 그리며 이웃을 곱게 아낍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언제나 이웃을 아끼는 마음길로 자라요. 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또는 어른)는 아이들 모습과 매무새를 바라보면서 새롭게 깨닫지요. 사랑을 주어도 사랑을 먹고, 사랑을 미처 못 주어도 사랑을 먹는 이 아이들 삶빛에서 한 가지를 슬기롭게 배워요. 어른 스스로 어떻게 삶길 걸어갈 때에 스스로 아름다운가 하고.


.. 울어도 감싸 주거나 뺨 부벼 주는 이 하나 없는 아이들은 이다음에 커서도 그 영혼이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 나는 내심 아이에게 미안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 한 번이라도 풍족하게 먹여 준 적 없고 입혀 준 적 없는 엄마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언제 한 번을 새 물건 사 주라고 떼쓴 적이 없었다. 맛난 것 먹자고 한 적도 없었다. 있는 반찬에, 있는 옷에 저희끼리 그냥 커 버린 내 아이 입에서, 오늘의 불편한 여행에 대해 불평 한 마디 없이 고맙다는 말이 턱 하니 튀어나오다니 … 남도 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어제 나는 장흥에 사는 지인의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을 때 맨 먼저 나를 압도한 것은 바로 ‘밤의 빛깔’이었다 … 요즘 사람들은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아릴 생각은 아예 잊어버리고 인공의 빛으로 반짝이는 거리를, 그 ‘야경’이란 것을 구경하는 것이다. 아니,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야경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  (30, 49, 117쪽)


  오늘날 거의 모든 어버이(또는 어른)는 아이들한테 입시공부만 보여줍니다. 오늘날 웬만한 어버이(또는 어른)는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문제집과 참고서만 건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한테 입시공부 아닌 사랑을 들려주고 삶을 보여주는 어버이(또는 어른)이 어김없이 있어요. 아이들한테 교과서나 문제집이나 참고서 아닌, 사랑책과 삶책을 넌지시 건네며 함께 즐기는 어버이(또는 어른)가 틀림없이 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을 학교 울타리에 가두지 않는 어버이가 꼭 있습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지 않는 어른이 반드시 있어요.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아이들을 들볶지 않는 어버이가, 그러니까 아이들을 사랑하며 아끼는 어른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톱니바퀴 되어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군인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아요. 맑은 넋으로 밝은 숨결 사랑하는 어른이 있어 이 나라가 튼튼히 섭니다.


  맑은 숨결이 목숨을 살려요. 밝은 웃음이 사람을 살리지요. 고운 바람이 목숨을 지키고, 따사로운 햇볕이 사람을 살찌웁니다.


  갓 태어난 아기한테 ‘어머니 학력’이나 ‘아버지 재산’은 덧없습니다. 일흔 할매나 여든 할배한테 ‘할매 학력’이나 ‘할배 재산’은 부질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어버이 학력이나 재산을 물어 볼 까닭 없어요. 할매와 할배한테 이녁 학력이나 재산이 어떠한가 여쭐 까닭 없어요. 언제나 즐겁게 마주하고, 늘 사랑으로 어루만지며, 노상 웃음꽃으로 이야기 나누면 돼요.


.. 네가 대학에 안 가면 나는 돈 안 들어서 좋고 너는 시간 벌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네가 알면 ‘기절할까 봐’ 너 몰래 나 혼자 했었다. 대학이야 네가 나중에 진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이 꼭 대학이란 데서 배워야만 할 때, 하여간 뭔가 필요성이 생길 때 가면 되지 않을까. 사람은 내가 정말로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저절로 하게 되어 있잖냐 … 너는 나를 최초로 엄마로 만들어 준 아이다. 나는 너를 낳았지만 너는 나를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 어떤 사람이 어떻게 세 아이를 혼자서 떠맡을 생각을 다 했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그랬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나만 고생한다는 순간적인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들을 아이 아빠들에게 두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땠을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 어찌어찌하여 그 ‘험한’ 세월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둘째 아이 입양하라는 그 상담원을 떠올리곤 했다 ..  (62, 64, 75쪽)


  공선옥 님이 걸어온 길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험한 세월(75쪽)”이었을까요? 아마, 공선옥 님 둘레에서 공선옥 님을 바라보던 이들이 이렇게 말했겠지요. 힘들거나 고단하다고 하지만, 늘 사랑이 피어났을 삶이 아닌 껍데기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겠지요.


  배고프다고 죽지 않아요. 목마르다고 죽지 않아요. 배고프면 배고플 뿐이고, 목마르면 목마를 뿐이에요. 배고픔을 잊자면, 목마름을 잊자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니까, 배고픔 아닌 다른 이야기를 떠올려야지요. 목마름 아닌 다른 삶을 찾아야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꿈꾸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날마다 다섯 끼니를 먹더라도 늘 허거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물을 몇 동이 들이켜더라도 언제나 메마릅니다.


  한 숟가락 더 먹기에 배부르지 않아요. 한 숟가락 덜 먹으니 배고프지 않아요. 한 그릇 더 먹으니 배부르지 않아요. 한 그릇 덜 먹기에 배고프지 않아요. 사랑이 없을 때에 배고파요. 꿈이 없으니 목말라요. 사랑하고 멀어지니 힘들어요. 꿈을 잊으니 고단하지요.


.. 내가 꿋꿋이 작은 글들 쓰는 시간들을 견뎌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우리들 먹여살리기 위해서 내가 하는 글쓰는 일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힘든 일들을 하지 않았나 …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올 수 있는 그 어떤 형태의 고난, 억압, 모욕, 치욕까지도 받아들이고 감내할 수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 밥 먹고 집 앞 오솔길을 걷고 글을 쓰고 사는 단순한 삶을 사랑하고 싶다 …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 놓으면 과연 늙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지만, 혹시 돈 버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때까지도 돈돈 하는 사람이 될까 무섭다 ..  (79, 81, 113, 115쪽)


  내가 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낀 적 없습니다. 가끔 “아이고 힘들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기는 하지만, 힘들기에 내뱉는 말은 아니에요. 그저 힘을 더 써야 하니 이런 말이 절로 나올 뿐입니다. 그러면? 그러면 어떡할까요? 힘이 들면 쉬면 돼요. 힘이 들기에 힘을 더 내면 돼요. 힘이 드니까 살짝 쉬었다고 새로 기운을 차려서 일하면 돼요. 힘이 드는 만큼 더더욱 땀을 쏟으면서 애쓰면 돼요.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길이란, 날마다 새롭게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이지 싶습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는 나날이란, 언제나 새삼스럽게 꿈꾸겠다는 매무새이지 싶습니다.


  아이한테 베풀 사랑을 키운다기보다, 스스로 새롭게 사랑하려는 삶을 일굽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꿈을 가꾼다기보다, 스스로 새삼스럽게 이루면서 웃고 싶은 꿈을 돌봅니다.


  즐겁게 살아갑니다. 노래하며 살아갑니다. 춤추며 살아갑니다.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즐거움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는 빛이 됩니다. 춤은 밥이 되고, 웃음은 꽃이 됩니다.


..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는 소나무, 잣나무, 꽃사과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나무, 잣나무, 꽃사과나무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먹는 게 즐겁지 않으니, 뭔들 즐거웠겠는가 … 모든 엄마들은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모든 아이들은 모든 엄마들의 아이들이 되었던 것이다 …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되기는 저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내가 왜 진작 몰랐을까. 나이 마흔의 어느 아침에 거울을 보고 앉아 내가 나를 예뻐하며, 나는 그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예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  (123, 148, 174, 191쪽)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아이를 사랑할 수 있지 않아요. 어버이로서 내가 나를 사랑하면 아이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아이한테 집이나 자가용이나 돈을 물려주어야 어버이 몫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루를 새롭게 일구면 아이는 시나브로 사랑과 꿈을 이어받아요. 스스로 날마다 즐겁게 노래하면 아이는 천천히 웃음꽃과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어요.


  마흔 살에 걷는 길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스무 살에 걷는 길이 더 푸르지 않습니다. 예순 살에 걷는 길이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열 살에 걷는 길이 더 싱그럽지 않습니다. 스스로 아름답고 싶은 사람이 아름답게 걷습니다. 스스로 싱그럽고 싶은 사람이 싱그럽게 걷습니다.


  꿈을 꾸려고 해야 꿈을 꿉니다. 돈이 넉넉해야 꿈을 꾸지 않아요. 사랑을 나누려고 해야 사랑을 나눕니다. 살림이 넉넉해야 사랑을 나누지 않아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여다봐요. 마음속에서 자라는 웃음을 노래로 빚어요.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젊은이이고, 스스로 어른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스스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스스로 꿈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꿈날개를 폅니다. 아이도 어른도 골고루 한 살씩 더 먹으면서, 저마다 새 하루를 즐겁게 어깨동무합니다. 4347.1.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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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집의 리사벳 동화는 내 친구 3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일론 비클란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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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3

 


놀면서 아름답게 자라는 아이들
― 재미있는 집의 리사벳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일론 비클란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3.10.15.

 


  오늘 아침에 마을회관에서 한 해를 갈무리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마을 할매는 회관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시고, 마을 할배는 회관 마루에 앉아서 밥상을 기다리십니다. 이동안 우리 집 두 아이는 회관 마루와 부엌 사이를 쉴새없이 오갑니다.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마을회관 할배들은 아이들이 어지럽게 뛰논다며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웃고, 그저 달리며, 그저 뒹굽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아이들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누가 무어라 하건 말건 까르르 웃으면서 뛰놀아요. 지구별 모든 아이들은 할매나 할배가 말리든 안 말리든 신나게 달리고 뒹굴면서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뛰놀지 못한다면 아이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뛰놀도록 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공부를 시킨다면서 조용히 하라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도록 하더라도 공부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마음껏 뛰놀도록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래야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랄 테니까요. 아이들은 아이답게 꿈꾸고 노래하면서 뒹굴어야 아이다우니까요.


.. 재미있는 집에서는 목요일마다 완두콩 수프를 먹어요. 그렇다고 리사벳이 목요일마다 완두콩을 콧구멍에 쑤셔넣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딱 한 번 그래 봤을 뿐이에요 … 누군가를 골탕먹이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넣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을 뿐이에요 … 사실 엄마는 오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조용히 누워 쉬고 싶었어요. 리사벳의 콧구멍을 후벼파고 싶지 않았다고요..  (5, 6, 10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노는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이 놀 만한 곳에서 살아가는지 궁금하곤 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하루 내내 신나게 뛰놀면서 자라는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어떤 데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놀기 어려운 곳을 집으로 삼지는 않는가요. 아이들이 놀 수 없는 데에서 일하지 않는가요. 아이들이 놀기 어려운 곳에서 살며 아이들을 묶어 놓지 않는가요.


  놀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될까요. 놀이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아이는 어떤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어른으로 살아갈까요.


  아이한테는 이것을 가르치거나 저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아이 나름대로 이렇게 놀거나 저렇게 놀도록 해야지 싶어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른은 아이들이 이렇게도 놀고 저렇게도 놀도록 즐겁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놀이마당을 마련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 장롱 옆에는 리나스 이다 아주머니의 기타가 세워져 있어요. 마디켄이 줄을 퉁기자, 마음을 적시는 듯한 고운 소리가 났어요. 어떻게 하면 아주머니처럼 기타를 잘 칠 수 있을까요 ..  (22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재미있는 집의 리사벳》(논장,2003)을 읽습니다. 리사벳은 언제나 즐겁게 놀고 싶은 아이입니다. 리사벳네 언니 마디켄도 늘 기쁘게 놀고 싶은 아이입니다. 둘은 한결같이 놀이에 살고 놀이로 하루를 누립니다.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요.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지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이 땅에 드리울까요.


  어찌 보면 말썽꾸러기이고, 어느모로 보면 말괄량이입니다. 언니 마디켄은 여기에 싸움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 마음은 착해요. 착하면서 참답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동무를 아끼고 싶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동무와 예쁘게 어울리고 싶으며, 날마다 새롭게 놀이를 찾고 싶어요.


.. 마디켄은 리사벳의 손을 꼭 쥐었어요. 동생이랑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틀림없이 기뻐하겠죠 … 마디켄은 꼭 중요할 때는 엄마 말을 까맣게 잊어버려요. 늘 싸우고 난 뒤에야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죠. 하지만 지금은 리사벳을 도와줘야 하니까 이야기가 달라요.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  (12, 35쪽)


  리사벳은 콩알을 콧구멍에 넣으며 놀아요. 우리 집 두 아이도 콧구멍에 무언가 넣기를 즐깁니다. 길다란 과자도 콧구멍에 넣고, 까마중 까만 열매도 콧구멍에 넣습니다. 그리고, 콧구멍에 넣은 것을 도로 빼서 입에 넣고 아주 맛나게 먹어요.


  재미있지요. 재미나지요. 오이 한 조각이나 무 한 조각도 그냥 먹지 않아요. 두 손으로 살며시 휘면서 무지개라 말하고, 둥그런 오이 조각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보름달로 바뀌었느니 반달이 되었느니 초승달이라느니 하면서 놀아요.


  나무막대기는 긴칼이 되기도 하지만, 하늘 나는 빗자루가 되기도 합니다. 바닥에 내려놓고는 냇물 건너는 다리로 삼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거나 커다란 울타리라 여기며 껑충껑충 뛰어넘기도 해요. 맨손 맨몸으로 마당을 휘휘 달리면서 어마어마한 모험을 한다고 여겨 까르르 웃기도 합니다.


  옆에서 아이들 놀이를 지켜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아이들 사이에 섞여 함께 놀아도 즐겁습니다. 장난감이 따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꼭 놀이터까지 가야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들길을 걸어도 놀이가 됩니다. 자전거를 달려 이웃마을 찬찬히 지나다녀도 놀이가 되어요.


.. “자, 꼬마 아가씨들, 뽀뽀를 받고 나서 엉덩이를 좀 맞아야겠어. 그런 다음, 자는 거다.” 아빠는 딱 이 말만 했고요. 하지만 둘은 뽀뽀는 받았지만 엉덩이는 맞지 않았을뿐더러, 아직 자지도 않았어요. 어린이 방 불은 꺼진 지 오래였지만. 리사벳이 물었어요. “언니 침대에 가도 돼?” “응, 와도 돼. 그 대신 내 코에 손대지 않도록 조심해.” 리사벳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마디켄의 침대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언니, 팔베개 해 줘.” 하고 말하며 마디켄의 팔에 머리를 괴고 누웠어요. 마디켄은 팔베개를 해 주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면 자기가 훨씬 나이 많은 언니 같아, 리사벳이 귀엽게 느껴졌죠 ..  (54∼55쪽)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아이들마냥 혼자서 놀이를 생각해 내면서 놀았습니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혼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신나게 즐겼어요. 종이 한 장에 이 그림 저 그림을 그리면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까맣게 잊으면서 놀았어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얼굴은 칠판을 쳐다보지만 마음속으로는 ‘노는 꿈’을 그리면서 나도 모르게 빙긋빙긋 웃곤 했어요. 이러다가 교사한테 들켜 얻어맞는다든지 꿀밤을 맞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는 ‘노는 꿈’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업 진도는 따분하고, 교과서 지식도 재미없지만, 머리로 하나하나 그리는 노는 꿈은 언제나 새롭고 즐거워요.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닷속을 가르기도 합니다. 먼 우주를 날기도 하며 지구별 맞은편에 있는 이웃나라 아이하고 어깨동무하기도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 바라볼 적마다 어린 날을 떠올립니다. 나는 언제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랐습니다. 이렇게 즐거우면서 고맙게 받아먹은 사랑을 아이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든 기쁘게 맞이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즐기는 눈빛을 따사롭게 얼싸안고 싶어요. 이러는 동안 저도 새롭게 일하는 기운을 얻고, 이러는 사이 아이들은 씩씩하면서 튼튼한 마음이 되어요.


  놀면서 아름답게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놀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어른들입니다. 놀면서 웃습니다. 놀면서 노래합니다. 놀면서 아름답게 일합니다. 4346.12.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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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기독교 - 청소년과 예수의 커뮤니케이션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1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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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9

 


하느님과 성경은 어디에 있는가
― 10대와 통하는 기독교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3.12.25.

 


  아침이 되면 해가 뜹니다. 해가 뜨면서 온누리에 고운 빛이 드리웁니다. 까맣던 하늘은 차츰 파란 빛깔로 바뀝니다. 구름은 새롭게 하얀 빛이 짙고, 겨울에도 짙푸른 나무는 고운 풀빛을 뽐냅니다. 추운 겨울밤이 저물면서 따사로운 아침이 됩니다.


  겨울철에 아침을 맞이할 적마다 봄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밤이 저물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듯, 추운 겨울이 저물며 시나브로 봄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전거를 달려 면소재지나 다른 마을로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올 때면, 겨울에 참 춥구나 하고 느낍니다. 겨울에 바람만 없어도 한결 나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 겨울에 찬바람이 없으면 어찌 될까 하고 돌아보며 고개를 젓습니다. 들과 숲과 내를 꽁꽁 얼리는 찬바람이 있어 겨울이 겨울답습니다. 겨울이 겨울답기에 풀이 시들고 벌레가 죽습니다. 겨울이 겨울다우니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 있으며, 논밭을 일구는 사람들도 들일을 쉽니다. 겨우내 흙은 포근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 걸쳐 온갖 풀이 잇달아 자라는 흙이지만, 겨울에 이처럼 포근히 쉴 수 있으니 한결 기름지리라 느껴요. 이 땅에 여름과 함께 겨울이 있으니, 이 누리에 봄과 함께 가을이 있으니, 모두들 즐겁게 밥을 먹고 고맙게 삶을 누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여름만 있다고 할 수 있는 터전이라면? 찬바람이 없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여름이 몹시 짧고 추운 바람과 눈으로 오래오래 덮이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너른 들이 아닌 메마른 벌이 펼쳐지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 사막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에선 자연의 다채로운 변화에 부응하듯 신의 모습이 다채롭게 나타나죠. 거의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서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유일신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동을 중시합니다 …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 기독교는 ‘천주교’ 또는 ‘야소교’로 불렸습니다. ‘야소’는 예수의 한자 이름 표현입니다. 그런 가운데 외국 선교사와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은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경외해 온 ‘초월적 대상’이 있다는 사실, 그 대상을 ‘하느님’으로 불러 왔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  (21, 31쪽)


  여섯 살 큰아이가 저녁에 문득 “아버지, 나 그려 주셔요.” 하면서 종이와 연필을 내밉니다. 빙그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얼른 그림을 그려 달라고 말합니다. 네 웃음짓는 얼굴은 그림보다 사진으로 담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지만, 여섯 살 큰아이는 “사진기는 치우고 그림 그려 주셔요.” 하고 덧붙입니다.


  아이 말마따나 사진기를 들려다가 내려놓습니다. 아이 얼굴을 그립니다. 여느 때 얼굴과 달리 웃음을 가득 품은 얼굴은 통통합니다. 어쩜 이렇게 입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웃음을 가득 물 수 있을까 싶은데, 만화책에 흔히 나오는 함박웃음, 하하하 터뜨리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입꼬리만 위로 올린 웃음은 참말 이렇게 짓는 웃음을 그대로 옮겨 그렸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자, 다 그렸어.” 하고 그림을 내밉니다. 아이가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는 이윽고 “자, 아버지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안 돼요.” 하면서 내 모습을 그려 주겠다고 합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는데 끝날 낌새가 안 보입니다. 얼마나 꼼꼼히 그리는데 그런가 하고 살며시 다가가서 들여다봅니다. 한 번 그렸다가 슥슥 지우고 새로 그립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립니다. 이제 다 그렸나 싶더니, 아버지가 앉은 걸상까지 그리겠다며 “아직 안 됐어요.” 합니다.


  나는 아이한테 그림을 가르친 적 없습니다. 아이더러 이렇게 그리라느니 저렇게 그리라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저 스스로 그리고픈 대로 그립니다. 흉내를 내는 그림이란 없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고, 아이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픈 빛을 그림에 담습니다.


  아이와 함께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이 그림은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그림이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 마음을 그림에 담고, 나는 내 마음을 그림에 담습니다. 마음을 그림에 담아 활짝 웃고 싶습니다. 마음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운 빛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림이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닙니다. 그림이란 오직 그림입니다. 사진을 찍을 적에느 그저 사진이지,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요, 작품이나 창작이 아닙니다. 글을 쓸 적에도 언제나 글이에요. 문학이 아닙니다.


.. 핵심은 예수가 그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와 명성,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지요 … 예수가 직접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듯이, 직접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는 제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는 이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걸 믿으라고 거듭 강조하지요 ..  (43, 75, 99쪽)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리면서 풀잎이나 나물을 꼭 올립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 집 둘레에서 손쉽게 풀을 얻습니다. 때로는 읍내로 나가서 우리 집 둘레에는 없는 풀을 사다가 먹기도 합니다. 이제 찬바람이 드세니 우리 집 까마중풀은 그예 시들어 새까만 까마중 열매를 먹을 수 있는 날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섣달 둘째 주까지만 하더라도 새로운 까마중꽃 하얗게 맺혔지만, 이제 새로운 까마중꽃은 더 없어요. 푸르딩딩한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끝이고, 이듬해에 새롭게 자라는 까마중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다시 누릴 수 있습니다.


  까마중풀이 시들어 죽을 요즈음, 집 둘레로 갓풀과 유채풀이 돋습니다. 갓풀은 쓴맛이 퍽 세기에 아직 좀처럼 뜯어먹지 못합니다. 유채풀은 쓴맛이 하나도 없어 신나게 뜯어서 밥상에 올립니다. 따로 배추씨를 심으면 겨울에 겨울배추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배추씨를 심지 않아도 들유채를 얻어요.


  봄이 오면 온갖 나물이 곳곳에서 자랍니다. 아니, 온갖 나물이 아닌 온갖 풀이 자라지요. 온갖 풀은 우리한테 나물이 됩니다. 민들레도 나물이고 씀바귀도 나물입니다. 소리쟁이도 나물이고 미나리도 나물입니다. 질경이도 나물이고 환삼덩굴도 나물이에요.


  원추리도 나물로 먹지만, 새봄 감잎과 느티잎도 나물로 먹습니다. 도깨비바늘풀 잎사귀도 나물로 먹고, 피나물이든 젓가락나물이든 갯기름나물이든 모두 즐겁고 반가운 나물입니다.


  다 다른 풀을 뜯으면서 다 다른 풀내음을 맡습니다. 다 다른 풀을 밥상에 올리면서 다 다른 풀빛을 먹습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풀숨입니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른 넋입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한 해 내내 언제나 다른 풀을 뜯어서 먹으며 생각합니다. 이 지구별에는 얼마나 다른 풀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 다른 풀은 어떻게 해서 다 다른 풀이 되었을까요. 어쩜 이렇게 다 다른 풀이 골고루 돋으며 자랄 수 있을까요.


  온갖 풀이 자라듯이 온갖 벌레가 살아갑니다. 온갖 벌레 곁에는 온갖 짐승이 있습니다. 온갖 버섯이 돋고, 온갖 새가 납니다. 온갖 물고기가 살고, 온갖 갯것과 갯풀이 있어요. 사람 또한 온갖 사람이 있어요.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다르고, 고장마다 사람들 삶자락이 달라요. 또, 나라와 겨레마다 사람들 삶빛이 다릅니다.


.. 마침내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참혹한 유혈극이 벌어집니다. 십자군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 성경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입을 통해서 해석되고 유포되었지요. 더러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전달했고, 심지어 성경에 없는 말까지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 개신교의 모든 교파 각각이 ‘오직 성경’을 강조하며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문제는 교파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과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자신만 ‘성경을 믿는 사람들’로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상륙한 이후 초기 50년 사이에 아메리카 원주민 1500만∼20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  (122, 165, 170, 197쪽)


  풀을 먹는 사람은 풀숨으로 살아갑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은 고기숨으로 살아갑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밥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먹는 대로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우리 몸에 넣는 대로 우리 몸은 새로운 빛이 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란, 햄버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과 다릅니다.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 사람들 넋이란, 자가용을 몰거나 펜대를 굴리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시장이나 군수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들 넋은, 바다에서 고기를 낚거나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 넋과 다릅니다.


  대학입시만 바라보면서 입시공부에 매달리는 푸름이하고, 시골 어버이 일손을 거들며 흙을 만지는 푸름이는 넋이 서로 다릅니다. 대학바라기로 살아가며 새벽부터 밤까지 교실에 갇혀 시험공부만 하는 푸름이하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기도 하고 집일을 거들기도 하는 푸름이는 넋이 사뭇 다릅니다.


  맞벌이를 한다면서 두 어른이 바깥일에 매달리느라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이 짧은 집안과, 아이하고 하루 내내 얼크러지면서 살아가는 집안은 서로 넋이 달라요. 손수 밥을 차리고 옷을 빨며 집살림 꾸리며 아이하고 지내는 어버이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에 아이를 맡긴 채 아이 얼굴은 아침과 저녁에만 겨우 보는 어버이는 서로 넋이 달라요.


  어느 한쪽이 더 아름다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슬프거나 안타까운 넋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서 살아가더라도 스스로 즐거운 마음빛이 못 된다면 즐겁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요. 어느 쪽에 서서 삶길을 걷더라도 스스로 기쁜 사랑빛이 못 된다면 사랑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 기독교는 단일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기독교가 있는 거죠. 기독교 가운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은 물론, 예수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이지만, 분명한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단일한 또는 통일된 책이 아니라 여러 책을 모아 놓은 ‘여러 책들’ 또는 ‘책들’입니다 … 2세기에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로소 그 책들을 묶는 데 나섭니다. 신의 언약과 관련된 모든 책이 묶인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신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글들을 ‘엄선’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그 판단을 했느냐입니다 … 〈도마복음〉을 비롯해 탈락되어 폐기된 문서들은 개개인이 자기 안에 있는 신을 만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  (157, 158, 161쪽)


  손석춘 님이 쓴 이야기책 《10대와 통하는 기독교》(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기독교 이야기라니. 푸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푸름이는 온통 대학바라기에 얽매이는데, 이 책에 깃든 이야기를 얼마나 삭히거나 받아들이면서 제 넋을 살찌울 만한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푸름이가 이 책을 맞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책을 읽는대서 예수나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는 않아요. 마음이 있는 푸름이가 이 책을 집어들 테지요. 마음이 있는 어버이과 이녁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겠지요. 마음이 있을 적에는 대학입시지옥에 휘둘리면서 숨가쁘거나 힘들더라도 이 책 하나 가슴에 포옥 안으면서 삶빛과 넋빛을 가꾸겠지요. 푸름이로 지내는 나날에는 미처 못 읽는다 하더라도, 대학입시를 마친 뒤 스무 살 풋풋한 젊은이로 꿈을 키우면서 이 책을 두 손에 살포시 쥘 수 있어요.


.. 루터는 뮌처와 정반대쪽에 섰습니다. ‘강도와 도적 같은 폭동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직접 글을 쓰고 발표합니다. 루터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어겼고, 강도와 도적질로 공공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했으며, 자신의 요구를 정당화하려고 성경의 복음을 끼워 맞춰 “신을 비방하는 죄”를 범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이어 ‘공권력’을 가진 정부는 농민들의 ‘폭동’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며 “미친개를 죽이듯 목을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라”는 살벌한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지요 … 자신이 ‘신의 뜻’을 알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선택’ 또는 ‘명령’을 받았다고 믿는 기독교인의 공통적 문제는 교만이고 오마입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국제적 차원이든 그런 오만은 다른 사람, 다른 국가의 불행을 불러오지요. 끝내는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  (181, 215∼216쪽)


  서양에서 태어나 온 지구별로 퍼진 천주교와 개신교입니다. 서양사람은 이녁 삶터에 맞게 이녁 종교를 세웠는데, 이녁 삶터를 넓혀 권력과 돈과 이름을 떨치려고 전쟁무기를 끝없이 만들었어요. 전쟁무기로 시골 흙지기를 내리누르거나 괴롭힙니다. 한손으로는 종교개혁을 한다고 나서던 이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시골 흙지기를 깎아내리고 짓밟는 일을 저질렀어요. 한손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외친 종교 우두머리들조차, 다른 한손으로는 돈과 권력과 이름에 끄달리면서 참삶하고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너무 마땅한 노릇 아니랴 싶습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면서 삶을 곱게 빛내는 길이 아니라면, 착하지도 참답지도 않아요.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성공회이든 정교회이든 침례회이든 감리회이든 대순진리회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가 바라보는 하느님이란 다 다를밖에 없어요. 삶터에 따라, 고장에 따라, 날씨와 철에 따라, 흙과 풀과 물에 따라, 하늘과 바람과 숲과 들에 따라, 가슴으로 맞아들이는 숨결이 모두 다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마주합니다. 다 다르게 마주하지만 빛은 하나입니다. 이 빛은 저 높은 하늘에서 드리울 수 있고, 내 마음에서 샘솟아 퍼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드리우는 빛이 나한테 찾아와 내가 아늑하면서 너그러운 삶 될 수 있는 한편, 나 스스로 내 마음속에서 빛 한 줄기 길어올려 내 둘레로 곱게 퍼뜨릴 적에 나를 비롯해 내 이웃과 곁님과 동무 모두 포근하면서 따사로운 삶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지 빛이 하나로 만나야겠지요. 두 가지 빛은 언제 한 줄기 빛으로 어우러져야겠지요.


  사랑은 사랑일 뿐, 전쟁이나 전쟁무기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를 든 하느님은 없습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전쟁무기는 전쟁무기일 뿐입니다. 남을 짓밟아 죽이는 짓은 죽임일 뿐입니다. 한손에 커다란 예배당을 지었으면, 이들은 커다란 예배당일 뿐입니다. 한손에 엄청난 돈을 쥐었으면, 이들은 엄청난 돈일 뿐입니다. 믿음은 믿음일 때에만 믿음이 되어, 나와 이웃 모두를 살찌웁니다. 사랑은 사랑일 때에만 사랑이 되어, 서로 어깨동무하는 맑은 숨결 됩니다.


  풀빛을 마음으로 담고, 풀내음을 몸으로 담으면서, 풀숨으로 온 넋 살찌울 수 있기를 빌어요. 겨울바람을 마시고 봄바람을 들이켜면서, 이 지구별 어디에서나 함박웃음 퍼지기를 빌어요. 성경이란 책이 아니에요. 성경에 담긴 말씀이란 바로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들 빛입니다. 성경으로 옮긴 말씀이란 곧 사랑스럽게 살아온 사람들 꿈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꿀 적에 성경이 태어나고, 삶을 사랑스레 나눌 적에 성경이 빛납니다. 4346.12.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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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함세웅 신부님과의 대화 <껍데기는 가라>를 쓰신 분의 책이로군요.
함께살기님의 좋은 느낌글에 힘입어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12-27 09:27   좋아요 0 | URL
청소년 눈높이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 눈높이에도 잘 맞춘
참 잘 쓴 책이라고 느꼈어요.

이런 책들을 교회 지도자들이
차근차근 읽으며
생각을 깨우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숲으로 가자 - 숲유치원과 숲학교를 위한 자연물 놀이 108가지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지음, 장희정 옮김 / 호미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배움책 20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맑은 빛
― 숲으로 가자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글
 장희정 옮김
 호미 펴냄, 2012.10.20.

 


  달빛이 드리웁니다. 달빛은 시골집 마당에도 드리우고, 큰도시 아파트 꼭대기에도 드리웁니다. 달빛은 비무장지대 아닌 무장지대 쇠가시그물과 군인들 총구멍에도 드리우고, 사냥터가 된 시골마을 숲에서 덜덜 떨며 밤잠조차 못 이루는 숲짐승 가녀린 눈망울에도 드리웁니다.


  햇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은 시골집 아름드리 나무에도 내리쬐고, 큰도시 길가에 줄기 뭉텅뭉텅 잘리는 가녀린 버즘나무 아픈 몸통에도 내리쬡니다. 햇볕은 축구장과 야구장에도 내리쬐고, 농약으로 범벅이 된 시골마을 논밭에도 내리쬡니다.


  겨울이 가면서 봄이 옵니다. 봄이 지나면서 여름입니다. 여름이 흐르면서 가을로 접어듭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겨울이 찾아듭니다.


  가만히 보면, 도시에는 봄도 가을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여름도 겨울도 없습니다. 도시에는 아무 철이 없습니다. 도시사람은 철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스물네 절기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낮과 밤이 없고 아침과 저녁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오직 숫자만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둘까지, 하나부터 서른까지, 하나부터 스물넷까지, 도시에는 오로지 숫자만 넘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에 맞추어 숫자를 챙기는 일을 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에 따라 숫자를 챙기는 교육을 합니다. 도시사람은 숫자를 살펴 숫자로 움직이는 집살림을 꾸립니다. 도시사람은 숫자를 헤아려 숫자로 사귀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 노래가 끝나면, 술래는 “나는 ○○에게 꽃 인사를 전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함께 춤추고 싶은 친구 이름을 부른다. 호명된 친구가 원 안으로 들어가 꽃을 받으면 아이들은 다시 노래를 부르고 술래는 춤을 춘다 … 나무와 나무 사이에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줄을 치고, 줄에 솔방울 두 개를 매단다. 교사가 신호를 보내면 솔방울 앞에 선 두 아이는 뒷짐을 지고 코로 솔방울을 건드린다 ..  (28, 49쪽)


  섣달 그믐이 가까운 시골마을에서 유채를 뜯습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언제부터 겨울유채가 돋았나 모르겠지만, 제주뿐 아니라 온 나라에서 ‘경관사업’을 한다며 시골마을마다 유채씨를 어마어마하게 뿌립니다. 유채는 자라고 자라 씨를 날립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무렵 모두 목아지 잘리기도 하지만, 유채씨를 건사하려고 하는 시골 흙지기 더러 있어, 유채씨는 바람 따라 고샅에도 마당에도 꽃밭에도 숲속에도 살몃살몃 내려앉아 뿌리를 내립니다. 나라에서는 ‘꽃만 보려’고 뿌리는 씨앗인 유채이지만, 이 씨앗이 들판에서 찬바람 먹으며 농약에 시달리며 자라는 동안 어느덧 들유채로 거듭납니다. 한겨울에도 씩씩하게 돋습니다. 가을걷이 마친 논둑에서 뜬금없다 할 만큼 돋습니다. 시골버스 지나가는 길가에서 돋습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들마실을 다니다가 이곳에서 조금 저곳에서 살짝 들유채를 뜯습니다. 웬만한 다른 시골에서는 한겨울에 날푸성귀 얻기 힘들 테지만, 겨울이 포근한 고흥에서는 조금만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로 마실을 하더라도 싱그러이 푸른 들풀을 얻습니다. 숲이 있어 푸른 숨결을 베풀고, 들이 있어 푸른 밥을 나누어 줍니다. 숲이 있어 푸르게 우거진 나무가 아름답고, 들이 있어 앙증맞은 작은 들꽃이 알록달록 어여쁩니다.


  날마다 들유채 한 줌씩 뜯어 밥상에 올리기로 합니다. 섣달 막바지까지 씩씩하게 까만 열매 맺는 까마중 있으면 까마중 열매를 훑어 밥상에 함께 올립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들풀을 뜯어서 먹을 수 있기에 고맙습니다. 한겨울에는 들유채를 뜯을 수 있기에 반갑습니다.


  누군가는 밭자락에서 배춧잎을 뜯겠지요. 누군가는 밭뙈기에서 무잎을 뜯겠지요. 배추는 배춧잎을 먹어도 맛나고, 배추뿌리를 캐서 먹어도 맛납니다. 무는 무뿌리를 먹어도 맛나지만, 무청을 먹어도 맛나요. 무청은 시래기가 되도록 말리지 않아도 돼요. 그때그때 한 뿌리씩 뽑아서 무잎을 날푸성귀로 맛나게 누릴 수 있어요. 당근과 함께 당근잎을 먹어요. 참말 숲과 들은 우리를 살찌우는 고마운 님입니다.


.. 자연 숲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활발한 움직임 말고도 주변 환경의 변화나 곤충의 움직임이나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정적인 동작과 함께 정신 집중이 요구된다 … 아이들은 숲에서 다양한 놀잇감을 스스로 발견하고, 그 놀이를 통해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넓혀 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무뿌리를 뛰어넘고, 그루터기 위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네 발로 기어 다닌다 ..  (42, 60쪽)


  바람이 붑니다. 겨울에 겨울바람이 붑니다. 겨울바람 부는 마당이나 들이나 바닷가에 가만히 서면, 온몸이 오들오들 떨립니다. 그렇지만, 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기에 내 몸은 한결 씩씩하고 튼튼할 수 있습니다. 겨울바람 먹고 봄바람 먹으며 여름바람 먹다가 가을바람 먹고, 다시 겨울바람 먹으면서 즐거운 삶이 되어요. 겨울풀 먹고 봄풀과 여름풀과 가을풀 먹듯이, 바람도 물도 모두 철 따라 새로운 빛으로 맞아들입니다.


  새봄 찾아와 동백나무에 짙붉은 꽃잔치 흐드러질 무렵이면, 발갛고 고운 꽃송이를 줍습니다. 동백꽃은 꽃송이 덩이째 떨어져요. 곱게 떨어진 동백꽃송이를 주으면, 꽃잎을 살살 떼어 꽃부침개를 합니다. 달걀말이를 하면서 살포시 얹습니다. 튀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날잎을 살살 씹어서 먹어도 돼요. 감꽃을 먹고 참꽃을 먹듯 동백꽃을 먹어요. 찔레꽃을 먹고 민들레꽃을 먹듯 동백꽃을 먹습니다.


  냉이꽃도 먹지요. 봄까지꽃도 먹어요. 별꽃도 먹으며, 꽃다지꽃이랑 꽃마리꽃도 먹습니다. 꽃을 풀잎과 함께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예쁜 꽃이 내 몸으로 들어오면서 내 넋과 삶 또한 꽃처럼 곱고 맑게 거듭나는구나 하고. 이 고운 꽃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내 눈빛과 말 또한 꽃처럼 상냥하고 착하게 추스르는구나 하고.


.. 아이들은 보통 이야기를 많이 한다.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기도 하고, 또래끼리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배를 잡고 웃고 즐거워한다. 아이들한테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 … 아이들의 조그마한 손이 자연물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위대한 예술가의 독창적 발상과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  (78, 104쪽)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숲이 있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숲 아닌 곳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이 될는지 모르지만, 숲이 없으면 숲 아닌 곳에서 살더라도 제대로 살지 못해요.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서 살아가더라도, 숲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맑은 물 흐르고 싱그러운 바람 부는 시골이 있어야, 도시에서 넘쳐나는 온갖 지저분한 물과 바람을 걸러 내요. 바보스러운 토목건설 공무원과 정치꾼은 인천 앞바다 갯벌을 메워 덩그러니 공항을 지었는데, 인천 앞바다에 갯벌이 있어야 서울사람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와 똥오줌을 이곳 갯벌에서 걸러내지요. 갯벌이 없으면 서울과 경기도는 온통 쓰레기밭, 쓰레기구덩이가 되고 말아요. 그리고, 시골이 없으면, 숲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시골이 있고 숲이 있기에 숨을 쉬어요. 시골이 있고 숲이 있어 도시사람이 안 굶습니다. 시골이 있고 숲이 있으니 도시사람이 목마르지 않습니다.


  브라질 열대숲만 지켜야 하지 않아요. 이 나라 시골숲도 지켜야 해요. 국립공원에 하늘차를 함부로 놓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라든지 국립공원이 아닌 작은 멧자락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구멍을 뚫어 고속철도나 고속도로를 놓지 말아야 하는 까닭을, 도시사람부터 깨달아야 하고 시골사람도 알아야 해요.


  돈으로 사서 다시 심을 수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아닙니다. 우리 숨을 살리는 나무 한 그루입니다. 나무가 없으면 지구별에서 누가 살아갈 수 있겠어요. 나무를 모조리 베어 공장과 도시와 관광지와 골프장과 경기장 따위만 만들면, 참말 도시사람조차 어떻게 문화나 문명을 누리겠어요.


  흙이 있기에 똥과 오줌을 받아들여 삭힙니다. 흙이 있기에 온갖 밥찌꺼기를 맞아들여 삭힙니다. 숲에서 나무가 우거져야 하고, 들에서 흙이 싱그러워야 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도시라 하더라도 동네 곳곳에 작은 숲이나 공원이 있어야 합니다. 시골마을에서는 고샅이나 밭둑이나 논둑을 섣불리 시멘트로 덮지 말아야 합니다. 바닷가에 함부로 해변도로랍시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퍼붓지 말아야 합니다. 크고 작은 숲과 멧골에 관광도로랍시고 함부로 나무를 베고 숲을 밀어 찻길 넓히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자연의 소리는 여러 가지 음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특별히 집중하는 경우만 한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순간순간 다르면서도 항상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가끔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들, 그리고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 숲에서 하는 놀이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 아이들은 숲에서 끝없이 만지고 보고 듣는데 이러한 감각을 놀이로 가져갈 수 있다.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해 보자. “누가 밝은 초록색 또는 어두운 초록색을 발견할 수 있을까?” ..  (144, 176쪽)


  안드레아 에르케르트 님이 쓴 《숲으로 가자》(호미,2012)를 읽습니다. ‘숲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숲에서 할 수 있는 놀이 108가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이야기책입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백여덟 가지 놀이는 ‘숲 유치원’에서 즐기는 놀이라고 하는데, 꼭 숲 유치원 아니더라도 다른 유치원에서도 할 수 있는 놀이요, 유치원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에서나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살짝살짝 바꾸거나 손질해서 새롭게 놀 수 있어요. 깊은 숲이 아닌 자그마한 동네 숲에서도 즐길 수 있어요. 나무 한 그루하고도 놀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와 풀 한 포기하고도 놀 수 있어요.


.. 자, 이제 눈을 뜨고 두 주먹을 꼭 쥐어 보렴. 그리고 머리 위로 힘차게 기지개를 켜 보렴.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외쳐 보렴. “나는 꽃으로 가득한 들판처럼 상쾌하다!” ..  (171쪽)


  다 함께 눈을 떠요. 참다운 삶에 다 함께 눈을 떠요. 다 같이 손을 잡아요. 돈과 졸업장은 내려놓고, 다 같이 맨손을 잡아요. 모두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요. 자가용은 내려놓고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요. 다리 아픈 이웃 있으면 업어 주셔요. 바퀴걸상에 앉히고 뒤에서 밀 수 있어요. 흙을 만지고 흙내음을 맡아요. 빗물을 마시고 냇물에 낯을 씻어요.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어른들부터 즐겁게 일해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만한 보금자리가 되도록 어른들부터 즐겁게 일할 터전을 가꾸어요.


  숲으로 가야지요. 아파트가 아닌 숲으로 가야지요. 숲으로 가야지요. 극장도 경기장도 아닌 숲으로 가야지요. 숲내음을 맡아야지요.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닌 흙밭 숲길에서 흙내음이랑 숲내음을 맡아야지요.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맑은 빛이 드리웁니다. 달빛이 포근하게 드리웁니다. 철없는 어른들 살리는 밝은 볕이 내리쬡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4346.12.24.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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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 책놀이터 3
나가사키 나쓰미 글, 하세가와 도모코 그림, 주혜란 옮김 / 서울교육(와이즈아이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42

 


아버지가 차리는 밥상
― 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
 나가사키 나쓰미 글
 하세가와 토모코 그림
 주혜란 옮김
 와이즈아이 펴냄, 2009.5.20.

 


  느즈막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작은아이가 꽁꽁거립니다. 작은아이에 이어 낮잠에서 깨어난 큰아이가 “아버지, 빵?” 하고 묻습니다. 여섯 살 큰아이한테 “벼리야,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배고프니?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다고 말해야지. 밥을 먹고 나서 빵을 먹고 싶으면 그때에 빵을 달라고 하렴.” 하고 이야기합니다. 큰아이는 “응, 알았어. 배고파요. 밥 주세요.” 하고 얘기해 줍니다.


  밥은 있고 국을 덥히면 됩니다. 국을 덥히면서 곤약 한 덩이를 잘라 국에 넣습니다. 달걀 다섯 알을 삶습니다. 달걀이 익고 국이 끓는 사이 양배추를 썰고 나물을 헹구어 나물부침을 마련합니다. 오이와 무를 채 썰어 꽃접시에 얹습니다. 물고기묵을 네모낳게 잘라 보글보글 끓는 국에 꼬치로 꿰어 담가 놓습니다. 국냄비는 불을 끄고 가위로 김을 한 장 잘라 흰접시에 담습니다. 아이들을 부르고, 밥과 국을 퍼서 밥상에 척척 올립니다. 큰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수저를 밥상에 놓습니다. 곤약을 토막토막 잘라 작은 질그릇에 담습니다. 국에 끓인 두부를 꺼내어 칼로 썰어 흰접시에 담습니다. 달걀 삶은 냄비는 아까 불을 껐습니다. 달걀은 조금 식은 뒤에 내주어야지요.


  천천히 저녁을 먹습니다. 작은아이는 부엌으로 오다가 문고리에 머리를 박아 징징 웁니다. 작은아이를 달래면서 수저로 밥과 반찬을 떠서 먹여 줍니다. 부아가 난 작은아이는 떠먹여 달라 합니다.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보라는 왜 먹여 달라고 해?” “응, 머리가 문고리에 부딪혀서 부아가 났나 봐.” “그래? 보라는 젓가락질 못 해?” “할 수 있는데, 아직 하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 기다리면 할 테야.”


.. “나는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물 먹는 소리도 듣기 좋고.” 마리도 “맞아, 맞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참 포근해지는 느낌이야.” “맞아.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이 들까?” ..  (8쪽)


  아이들이 밥그릇을 4/5쯤 비웠다 싶을 즈음, 달걀을 꺼내기로 합니다. 아직 뜨거운 물은 설거지를 기다리는 그릇에 찬찬히 붓습니다. 찬물에 두 차례 삶은달걀을 헹굽니다. 그러고는 큰아이와 작은아이한테 따로 작은 접시를 내주면서 삶은달걀을 통째로 줍니다. 스스로 껍질을 벗기도록 합니다.


  알맞게 잘 삶았기에 껍질이 아주 잘 벗겨집니다. 두 아이 모두 예쁘게 벗깁니다. 노른자도 맑은 노랑 빛깔이 곱습니다. 달걀 한 알로 남은 밥을 말끔히 비웁니다. 나물무침도 그릇을 싹싹 비웁니다. 그야말로 배부르게 잘 먹었지?


  저녁을 다 먹은 두 아이는 빵 달라는 소리를 더 하지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 먹고 싶다는 말도 없습니다. 꼭 알맞춤하게 배가 고플 즈음 밥을 차려서 즐겁게 함께 먹으면 됩니다.


  이런 밥차림은 힘들까요? 힘들다면 힘들는지 모르지만, 수월하다면 수월하다고 느껴요. 우리 어머니도 내가 어릴 적에 퍽 수월하게 밥상을 차려서 주셨어요. 뚝딱뚝딱 아주 빠르게 밥을 내어주셨어요.


  미리 갖추거나 마련한 먹을거리는 없어도, 몇 차례 손길을 타면 어느새 보기에도 예쁘고 먹기에서 고소한 밥이 되어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 손길을 돌아보면서 ‘나도 이렇게 사랑스레 밥을 차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 어릴 적이나 오늘날이나 아직도 ‘밥은 가시내(어머니나 할머니)가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짙은 우리 사회이지만,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가장 따사로운 넋을 담아 밥을 차리면 즐거운 살림이 되리라 느꼈어요. 성평등이나 일나눔을 떠나, 서로 즐겁게 노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랐어요.


.. 집 밖까지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옆집 시미즈 아저씨네 할머니.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오늘 나는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늦잠만 안 잤어도 엄마랑 말했을 텐데 ..  (26쪽)


  어린이책 《나가사키 나쓰미/주혜란 옮김-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와이즈아이,2009) 를 읽습니다. 책이름을 보고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한테 밥을 곱게 차려 주는 이야기가 흐르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고 보니 ‘밥 먹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바깥일을 하느라 집을 으레 비우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깥일을 하면서 커다란 주먹밥을 싸 주기만 할 뿐, ‘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하고 함께 놀 겨를이 얼마 없습니다.


  그러면 책이름이 왜 “아빠 엄마 잘 먹겠습니다”일까 갸우뚱하면서 책을 읽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함께 지내는 때보다 혼자 지내는 때가 깁니다. 때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 마디 할 겨를이 없기도 합니다. 홀로 생각에 잠기는 때가 길고, 어머니가 싸 주는 주먹밥도 그리 예쁘지 않습니다. 그저 커다랗고 투박하기만 합니다.


  이러던 어느 날, 바깥일 때문에 퍽 오래 집을 비운 아버지가 깜짝잔치를 하듯이 집에 왔어요. 그러고는 주인공 아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바다로 갑니다.


.. 드넓은 우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별들. 나는 그 많은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다. 아빠 엄마는 물론, 마리도 함께 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그런 느낌 ..  (38쪽)


  주인공 아이 아버지는 ‘돌을 살피는 사람’이에요. 돌마다 어떤 무늬이고 빛깔이며, 이 돌을 사람들이 어떻게 쓸는지 살피는 일을 합니다. 아이와 함께 바다로 왔으면서도 이곳에서까지 돌을 들여다봅니다. 이러다가 문득 아이한테 이야기를 해요. “두 손 가득 움켜쥐고서, 볼이 미어터지게 먹다 보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단다(54쪽).” 아버지가 들려준 말 한 마디로 아이는 마음을 살짝 풀었을까요.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 나긋나긋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 “돌멩이가 재미있어요?” “돌멩이에는 지구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 있단다.” 지구의 역사? 나는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고서 쳐다보았다. 하얗고 평범하게 생긴 돌멩이였다 ..  (66쪽)


  커다랗고 투박하기만 한 주먹밥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커다랗고 투박한 주먹밥일 테지요. 그런데 이 못생겼다는 주먹밥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온 발자국’이 깃들어요. 두 어버이가 바쁘다면서 얼렁뚱땅 크고 투박한 주먹밥을 도시락으로 싸 줄 수 있지만, 두 어버이가 처음 만나서 사귈 무렵, 이런 모양 주먹밥하고 얽힌 애틋한 이야기 있을 수 있어요. 아직 아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서로 살가이 나눈 이야기 있으니, 오래오래 크고 투박한 주먹밥을 즐길 수 있어요.


  돌멩이 하나에 지구 역사가 깃들고, 풀씨 한 톨에 우주 역사가 깃들어요. 눈물 한 방울에 수많은 이야기 서리고, 노래 한 가락에 온갖 꿈 서립니다. 눈짓 하나에 깊은 사랑 감돌고, 손길 한 번에 너른 빛 감돌아요.


  즐겁게 차려서 즐겁게 먹는 밥입니다. 즐겁게 꾸리면서 즐겁게 가꾸는 살림입니다. 즐겁게 배우고 즐겁게 가르칩니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아요. 아름답게 빛내는 우리 이야기이고 꿈이며 삶입니다. 4346.12.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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