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타 - 2단계 문지아이들 6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일론 비클란드 그림, 김라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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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66


 

너랑 같이 놀면 즐겁구나

― 마디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일론 비클란드 그림

 김라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5.3.28.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열면 바람소리가 훅훅 들어옵니다. 눈을 감아도 바람소리가 들리고, 눈을 떠도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소리는 온몸을 감돌면서 흐릅니다.


  바람이 자는 날 마당에 서면 바람결에 묻어나는 햇볕을 느낍니다. 햇볕이 이리 포근하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햇볕 한 줌이 있어서 풀과 나무가 살고, 풀벌레와 새가 살며, 사람이 뭇짐승과 이웃이 되어 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별이 돋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이 부십니다. 환한 별빛을 마주하면서 눈이 부십니다. 저 먼 별은 지구로 고운 빛을 나누어 줍니다. 지구에 있는 우리도 저 먼 별한테 고운 빛을 나누어 줄 테지요. 우리는 서로 고운 빛을 나누는 아름다운 동무이자 이웃이 될 테지요.



.. 마디타는 이러면서 리사벳의 팔을 깨문다. 아프지 않게 살짝. 그러면 리사벳은 마디타가 간지럼을 태우기라도 한 양 까르르 웃는다 … “오늘 뭘 했냐니까?” 엄마가 다시 물었다. “우리 옷을 빨았어요.” 마디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엄마 아침 가운도요…… 잘했죠?” “마르가레타!” 엄마 입에서 마디타의 진짜 이름이 튀어나왔다 ..  (16, 37쪽)



  끙끙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몸이 다 나아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납니다. 마음속으로 찬찬히 헤아려요. 나는 튼튼하다고 헤아리고, 내 몸은 눈부시게 튼튼하다고 헤아리며, 내 마음과 몸은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답게 튼튼하다고 헤아립니다.


  끙끙 앓으면서 내 몸이 튼튼하다고 헤아리면 온몸이 비틀립니다. 더 아픕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아픈 기운이 천천히 빠져나가요. 아프고 나면 늘 새로운 몸이 된다고 느껴요. 아픈 뒤에는 언제나 다른 몸과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는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려고 앓는지 모릅니다. 새롭게 거듭나려고 끙끙 앓는구나 싶어요. 예부터 아이들은 아프면서 자란다고 했는데, 나는 마흔 줄이 넘는 나이에도 ‘아프면서 새로 자란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가 열 살이건 스무 살이건 마흔 살이건 여든 살이건, 이렇게 몸을 쓰면서 하루를 맞이한다면, 나는 내 삶을 잇는 동안 한결같이 자라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숨인 밥을 먹으면서 내 목숨을 건사하기도 하지만, 내 목숨을 늘 새롭게 바라보기에 하루하루 누립니다.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쬐면서 내 몸을 돌보기도 하지만, 내 마음자리를 언제나 새삼스레 살피기에 하루하루 맞이합니다.



.. 리사벳은 마디타한테서 옷과 신발을 물려받는다 … “나도 소풍 가고 싶어. 산에 올라가서 버터빵 먹고 싶단 말이야!” 서럽게 우는 리사벳을 보자, 마디타는 동생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풍은 우리끼리도 갈 수 있어.” 마디타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만 소풍 가자.” … 리사벳도 이따금 사다리를 오르지만 제일 아래 칸까지만 올라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지붕 위에 앉아야 한다. 리사벳은 신이 나면서 한편으로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소풍이란 원래 그런 거려니 생각했다 ..  (56, 58, 63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그린 《마디타》(문학과지성사,2005)를 읽습니다. 읽고 나서 다시 읽습니다. 읽은 뒤에 또 읽습니다. 마디타라는 아이가 지구별 가운데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날마다 무엇을 하며 노는가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지구별 한쪽에서 마디타라는 아이가 날마다 새롭게 논다면, 지구별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아이가 날마다 어떤 놀이를 즐기면서 하하 웃고 히히 노래하며 호호 춤출까 하고 헤아립니다.



.. 마디타와 리사벳은 사내아이들과 달랐다. 두 아이는 경치를 실컷 즐겼다. 닐손 씨네 부엌만 들여다보지 않고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 가며 경치를 구경했다. 지붕 위에서 보니 강물이 저 멀리 굽이를 도는 데까지 보이고, 물 위로 가지를 축 늘어뜨린 수양버들도 보였다 … 마디타는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앉아서 와플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었다. 속눈썹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오늘이 슬픈 날이기는 하지만 와플과 코코아는 맛있었다 ..  (71, 93쪽)



  우리는 모두 놀면서 자랍니다. 놀지 않고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이나 학교를 가야 자라지 않습니다. 교과서나 문제집을 펴야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릴 적부터 마음껏 뛰놀 때에 자랍니다. 우리는 어버이 곁에서 어깨너머로 이모저모 살피기에 배웁니다.


  땅을 박차면서 구릅니다. 무릎이 깨지고 얼굴이 긁힙니다. 이마가 찢어지고 팔다리를 접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치는 몸은 어느새 낫습니다. 다치면 다치는 대로 새롭게 놀고, 나으면 낫는 대로 기운차게 놉니다.


  숲을 사랑하고 가꾸는 어버이 곁에서 숲을 사랑하고 가꾸는 아이가 자랍니다. 바다를 껴안으며 아우르는 어버이 곁에서 바다를 껴안으며 아우르는 아이가 자랍니다. 얼음을 가르고 냇물을 가로지르는 어버이 곁에서 얼음을 가르고 냇물을 가로지르는 아이가 자랍니다.


  오늘 우리 어른은 무엇을 할까요? 오늘 우리 어른은 어디에서 지낼까요? 오늘 우리 어른은 날마다 어떤 삶을 지을까요? 오늘 우리 어른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할까요?



.. 마디타도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마음일 때의 느낌이 참 좋았다. 또 더 이상 소풍 생각을 하며 슬퍼하지 않는 것도 느낌이 참 좋았다 … 마디타는 한숨을 쉬면서 신문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되게 재미있는 사람인데, 그런 아빠가 이렇게 재미없는 신문을 만든다는 게 이상했다 … 엄마랑 아빠가 같이 아이들 방에 와 있으니 참 좋았다. 마디타는 엄마랑 아빠를 오래오래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 엄마는 이제 큰딸에게 갔다. 아무리 큰딸이라고 해도 마디타는 잠을 잘 때는 작아 보였다. 작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  (99, 105, 110, 111쪽)



  아이들은 무엇이든 모두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둘레 어버이와 다른 어른이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봅니다. 아이들은 또래 동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몸짓을 보여주는지 찬찬히 살펴봅니다.


  아이가 컴퓨터게임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든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게 한대서 나쁜 짓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삶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사랑을 물려주지 못할 때에 바보스러운 짓이 됩니다. 아이를 자가용에 태워서 놀러 다녀도 즐겁지요. 꼭 아이와 손을 잡고 걷거나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야 하지 않아요. 아이와 도란도란 말을 섞으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올바른 말’을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올바른 넋’으로 들려줄 때에 즐겁습니다.


  우리 어른은 누구나 스스로 즐겁게 놀고 일하면서 삶을 누려야 하고, 우리 아이는 저마다 스스로 기쁘게 놀고 배우면서 삶을 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태어나 누리는 이 삶이란 오직 아름다움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두 아이가 얼마나 의젓하게 걷고 있는지 엄마가 보았더라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 “엄마, 엄마는 뭘 제일 갖고 싶어요?” “아주아주 착하고 사랑스런 두 딸.” 엄마가 대답했다. 그 순간 마디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럼 리사벳이랑 저는 어디로 가라고요?” 엄마는 마디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해 주었다. 엄마가 바라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고. 엄마는 마디타와 리사벳이 지금처럼 착하고 사랑스럽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  (120, 190쪽)



  어린이문학 《마디타》에 나오는 마디타라는 아이는 말괄량이나 개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디타는 그저 마디타입니다. 마디타는 그저 아이입니다. 마디타는 그저 사람입니다. 마디타는 그저 지구별 푸른 숨결입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마디타를 사랑스레 바라보셔요. 그리고 우리 둘레에 있는 모든 아이를 사랑스레 바라보셔요.


  아이들 누구나 마음껏 뛰놀도록 해 주셔요. 골목에서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당에서도 아이들이 저마다 온몸을 신나게 움직이면서 뛰놀도록 해 주셔요.


  놀면서 자라는 아이일 때라야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놀이를 알며 자라는 아이일 때라야 이웃과 동무를 아끼는 넋을 키웁니다. 놀이동무를 사귀면서 까르르 웃고 스스로 노래하는 아이일 때라야 지구별에 푸른 바람이 싱그럽게 붑니다.



.. 강이 얼었다는데 꾸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 오늘 날씨가 참 아름답다고, 꼭 노래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는 누구나 아주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 같았다 … 마디타와 리사벳은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 방 창문 밑에서 있노라면 두 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창문 밑에 서서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비쩍 마른 사내아이였다. 사내아이의 뻣뻣한 금발머리가 어둠 속에서 언뜻언뜻 빛났다 ..  (194, 196, 287쪽)



  나는 내 동무와 놀면서 즐겁습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과 놀면서 즐겁습니다. 나는 내 이웃과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기쁩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 밥 한 그릇 차려서 함께 먹으며 기쁩니다. 삶은 온통 즐거움이요, 사랑은 숱한 기쁨입니다. 삶은 늘 노래요, 사랑은 언제나 웃음입니다.


  환하게 웃는 어른이 되어요. 맑게 노래하는 아이를 보살펴요. 사랑스레 춤추는 어른이 되어요. 아름답게 꿈꾸는 아이를 돌봐요. 4347.12.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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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동생이라 좋겠다 아이스토리빌 3
아이하라 히로유키 지음, 아다치 나미 그림, 김정화 옮김 / 밝은미래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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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어린이책 76



언제나 사랑받는 줄 알겠니

― 넌 동생이라 좋겠다

 아이하라 히로유키 글

 아다치 나미 그림

 김정화 옮김

 밝은미래 펴냄, 2009.11.5.



  풀이나 나무한테는 왼쪽이나 오른쪽이 없습니다. 잎이 있고 줄기가 있습니다. 꽃이 피고 뿌리가 뻗습니다. 왼잎이나 오른잎이 아닌 잎일 뿐이고, 왼가지나 오른가지가 아닌 가지일 뿐입니다.


  새를 보면 왼날개와 오른날개가 있다 할 만하고, 사람을 보면 왼손과 오른손이 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왼쪽이고 어느 쪽이 오른쪽일까요? 앞에서 볼 때와 옆에서 볼 때와 뒤에서 볼 때에, 어느 쪽이 왼쪽이로 어느 쪽이 오른쪽일까요?


  가만히 보면, 새는 날개가 있으니 날 뿐입니다. 사람한테는 손과 발이 있을 뿐입니다. 이쪽과 저쪽으로 가를 것이란 없습니다. 오롯이 있는 몸이고, 오롯이 깃드는 숨결이며, 오롯이 흐르는 마음입니다.



.. 오늘은 엄마의 생일. 유타는 엄마 생일에 하려고 마음먹은 일이 있어요. 몰래 선물을 사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거예요. 무엇을 살지도 정해 두었어요. 바로 케이크예요 ..  (9쪽)



  먼저 태어나기에 언니가 된다지만, 언니 자리에 있든 동생 자리에 있든 똑같이 아이입니다. 어버이가 있으니 아이요, 아이는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습니다. 모든 아이한테는 어버이가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아이는 새로운 어른이 되면서 아이를 둡니다. 그리고, 모든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사람입니다. 똑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면서 따사로운 목숨입니다.


  언니라서 더 사랑스럽지 않고, 동생이라서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언니가 더 아름답거나 동생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둘은 저마다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둘은 똑같이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아이를 여럿 낳은 어버이는 언제나 ‘모든 아이가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열 손가락이 모두 아프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습니다. 모든 아이가 똑같이 사랑스러우면서, ‘다 다르게’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마주할 적에는 똑같이 사랑스럽고, 다 다른 숨결인 줄 느끼면서 마주할 적에는 다 다른 숨결답게 빛나는 넋이기에 다 다르게 사랑스럽습니다.



.. 정류장에 닿자, 마침 버스가 오고 있었어요. 둘은 얼른 버스에 올라탔어요. “오빠!” “응.” “오빠랑 둘이 버스 타는 거 처음이다, 응?” ..  (17쪽)



  아이하라 히로유키 님이 글을 쓰고, 아다치 나미 님이 그림을 넣은 어린이문학 《넌 동생이라 좋겠다》(밝은미래,2009)를 읽습니다.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가 차분하게 흐릅니다. 어디에서나 볼 만한 모습이 가만히 흐릅니다. 다만, 사랑이 자라는 집에서만 흔하게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믿는 보금자리에서만 즐겁게 볼 만한 모습입니다.


  사랑이 자라는 집에서 언니가 동생을 아끼고, 동생이 언니를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집에서 언니가 동생을 사랑하며, 동생이 언니를 믿고 따릅니다. 어버이가 서로 보듬으면서 아끼는 집에서 언니와 동생이 사이좋게 놉니다. 어버이가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보금자리에서 언니와 동생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끌고 다독입니다.



.. 옥신각신하는 두 아이를 보고 있던 점원 누나가 말했어요. “얘들아, 이 케이크는 어떠니? 그러면 사탕하고 케이트 둘 다 살 수 있는데…….” 점원 누나가 가리킨 것은 세모난 조각 케이크였어요. 딸기가 얹혀 있기는 해지만 너무 조그마해서 엄마가 배불러 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모모는 사탕 깡통을 쥔 채 꼼짝도 않고 유타를 노려보고 있었어요 ..  (40쪽)



  이야기책 《넌 동생이라 좋겠다》에 나오는 오빠는 동생을 성가시게 여깁니다. 어느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동생을 더 귀여워하는 듯이 생각합니다. 아직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니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동생을 더 귀여워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큰아이(오빠)는 덜 귀여워할 수 있을까요?


  큰아이는 나이를 먹고 몸이 튼튼히 자라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늡니다. 큰아이는 제법 심부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버이는 큰아이를 찬찬히 지켜봅니다. 큰아이한테는 일부러 손을 덜 뻗지 않습니다. 큰아이가 스스로 제 삶을 가꾸거나 짓도록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서 앞으로 어느 때가 되면 모든 삶을 혼자 지어야 할 테니, 큰아이는 동생과 달리 혼자 해내면서 몸과 마음으로 익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동생은 아직 어리니 이모저모 손이 많이 갑니다. 동생은 앞으로도 손이 많이 가야 할 테고, 큰아이가 나서서 돌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큰아이는 마치 개구리처럼 올챙이 적을 모를 수 있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저도 동생처럼 하루 내내 어버이 손길을 받으면서 모든 것을 어버이한테 맡기던 때가 있은 줄 알아차리리라 봅니다.



.. 모모는 다른 때보다 아주 작아 보였어요. 아주 가냘퍼 보였고요. 누가 지켜 주지 않으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았어요. 하긴 모모는 이제 겨우 네 살이고 … 유타는 한 발 한 발 터벅터벅 걸었어요. 모모가 아기였을 때 이렇게 모모를 업고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엄마가 감기에 걸렸을 때 모모의 기저귀를 갈아 준 적도 있었어요 ..  (53, 57쪽)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사랑받습니다. 너도 나도 언제나 사랑받으면서 이제껏 살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나 사랑합니다. 너도 나도 언제나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모두 골고루 사랑하면서 여태껏 살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랑받습니다. 사랑받으면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는 않고,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사랑하고, 마음이 다시 따뜻해지도록 사랑받습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이끕니다. 나이도 있고 힘도 있으며 슬기와 사랑이 있으니 작은아이를 이끌 수 있는 큰아이입니다. 작은아이는 큰아이를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새롭고 즐겁습니다.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마주보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헤아리고 즐겁게 짓습니다. 서로 돕기에 기쁘고, 함께 이곳에 씩씩하게 서기에 웃고 노래합니다. 4347.12.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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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박성준 외 옮김 / 레디셋고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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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74


 

어버이가 아이를 바라볼 적에

― 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

 러디어드 키플링 글

 박성준·문정환·김봉준·김재은 옮김

 레디셋고 펴냄, 2014.11.30.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슬기로운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엉터리로구나 싶은 짓을 일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보짓은 무엇이 바보짓이고, 슬기로운 길은 무엇이 슬기로운 길이 될까요. 엉터리와 아름다움은 어떻게 가를 만할까요.



.. “야! 야! 저건 정말로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인데? 표범아, 우리 이번 일을 교훈 삼자. 이 어두운 곳에서 너는 마치 까만 석탄 통에 들어 있는 흰 비누처럼 눈에 확 띈단 말이야.” 표범이 말했어. “흥! 흥! 너야말로 이 어두운 곳에서 마치 석탄 자루 속에 든 겨자씨처럼 눈에 확 띄는 걸 알고는 있니?” 에티오피아 사람이 말했어. “잠깐! 계속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먹이를 잡을 수 없어. 요점은 결국 우리가 이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바비안의 충고를 받아들일 거야.” ..  (55쪽)



  어버이가 아이를 바라봅니다. 어버이 아닌 여느 어른이 아이를 바라봅니다. 내 배가 아프면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하고 여느 어른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사뭇 다릅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아이를 바라보지만, 두 사람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다르되, 어느 한쪽이 더 깊거나 짙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두 사람은 다른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면서 사랑할 뿐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아이를 보살피면서 사랑합니다. 여느 어른은 여느 어른대로 아이를 마주하면서 사랑합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여느 어른이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사랑을 베풀면서 마음속에 새로운 사랑을 길어올려 더욱 즐겁고, 아이는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기쁩니다.


  사랑을 베푸는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사랑을 자꾸자꾸 새롭게 길어올려서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아이는 아무런 걱정이 없이 꿈을 키우는데, 아이가 키우는 꿈은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따사로운 손길은 따사로운 손길을 낳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노래는 노래를 낳습니다.



.. 아기 코끼리의 호기심은 여전했단다. 아기 코끼리는 본 것, 들은 것, 맡은 것, 느끼는 것, 만져 본 것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럴 때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에게 계속 엉덩이를 맞았단다. 그런데도 그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어 ..  (67쪽)



  예부터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모든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맨 먼저 사랑을 물려주고, 다음으로 말을 물려줍니다. 사랑과 말을 물려주면서 삶을 물려줍니다. 사랑과 말과 삶을 물려주는 동안 보금자리를 물려주지요.


  오늘날 사회를 돌아보면,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아무것도 안 물려줍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저 학교에 보내고, 그저 회사원이나 공장 일꾼이 되도록 내몰 뿐이요, 그저 다시 쳇바퀴를 도는 굴레로 몰아세울 뿐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아이한테 말을 물려주는 어버이나 여느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어버이와 여느 어른 스스로 ‘아이한테 물려줄 말’을 찬찬히 살피고 가누면서 아름답게 새로 익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사회에서 아이한테 ‘아파트라는 재산’이 아니라 아이가 손수 삶을 짓고 가꿀 만한 보금자리를 물려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나무’와 ‘숲’과 ‘들’을 물려주었습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노래와 이야기와 춤과 웃음을 물려주었습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어버이와 여느 어른은 아이한테 사랑을 비롯하여 꿈과 믿음과 생각과 넋을 물려주었습니다.



.. “고슴도치야, 난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어. 이젠 점박이 재규어를 놀려 줄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가시가 진화하면 비늘이 되는가 봐. 수영을 잘하게 된 것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점박이 재규어가 정말 놀라겠는걸!” … “괜찮단다. 이건 대발견이야.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걸 보고 ‘편지’라고 할 게다. 지금은 단순한 그림이고, 오늘 봤듯이 그림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하지만 타피야, 우리는 언젠가 문자를 만들게 될 거고, 그걸 읽고 쓰게 될 거야.”..  (109, 132쪽)



  러디어드 키플링 님이 쓴 《아빠가 읽어 주는 신기한 이야기》(레디셋고,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아버지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서양에서 여느 어버이가 여느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요.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버이는 이녁이 어릴 적에 이녁 어버이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이녁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그리고, 이녁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새로 깨닫거나 헤아리거나 알아낸 이야기를 더 붙여서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이야기에다가 아이가 스스로 새로 익힌 이야기를 모두어 앞으로 새로운 아이한테 다시 물려줄 수 있을 테지요.



.. 사랑하는 내 아이야,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이 고양이를 보면 언제나 물건을 집어 던지게 되었고, 개는 고양이를 나무 위로 쫓아 버리게 되었단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날 이후에도 집에서는 생쥐를 잡고, 아기들이 꼬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기지 않는 한 언제나 아기들에게 친절했지. 그리고 그런 일들을 다 하고 나서도 짬이 나거나 달이 뜨는 밤이 되면 고양이는 다시 혼자 다니면서 어디든 다 비슷하다며 모든 공간이 다 제것인 양 행동한단다 ..  (216∼217쪽)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대학입시 지식이 아닌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과외수업이나 학원수업 따위가 아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어른이라면 아이가 마음껏 뛰놀 만한 보금자리와 마을을 가꾸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공원을 돈을 들여서 짓는 사회 얼거리가 아닌, 여느 사람들 여느 보금자리가 아이한테 기쁜 놀이터요 쉼터요 삶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놀고, 마을 고샅이나 동네 골목에서 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샅이나 골목에는 자동차를 세우면 안 됩니다. 자동차는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데에 세워서 걸어서 오가야 합니다. 고샅과 골목은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 자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고, 이야기를 먹으면서 자라며,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기 때문이에요. 어른은 아이와 함께 걸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와 함께 뛰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와 함께 달려야 합니다. 아이는 어른 곁에서 나물을 뜯어야 하고, 아이는 어른 옆에서 나무를 심어야 하며, 아이는 어른 둘레에서 숲을 가꾸어야 합니다. 삶을 아름답게 일구는 길을 함께 걸어갈 때에 지구별에 사랑꽃이 피어납니다. 4347.12.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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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배움책 29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교육

― 바보 만들기

 존 테일러 개토 글

 김기협 옮김

 민들레 펴냄, 2005.7.7.



  나는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삽니다. 책 만드는 일은 으레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 여기는지, 이래저래 일 때문에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면 나더러 “몇 학번이냐?” 하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면 나는 “1975년에 태어났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그래도 학번을 또 물으면 “나는 대학교를 안 다녀서 잘 모릅니다.” 하고 덧붙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나서 “미안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학번으로 따지면 몇 학번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이때에는 참으로 더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잘 아시면, 그해에 태어난 사람이 대학교에 어느 때에 들어가는지 셈을 하셔요.” 하고 말한 뒤 입을 꾹 닫습니다.


  이제 나는 시골에서 삽니다. 1975년에 태어나 1995년에 군대에 가기까지 도시에서만 살았고,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강원도 멧골짝에서 보낸 뒤,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 2003년 8월까지 일하다가, 이때부터 2007년 3월까지 충청도 멧골짝에서 이오덕 님 책과 글을 만지면서 시골살이를 했는데, 2007년 4월에 도로 도시로 돌아가서 마을도서관(사진책도서관)을 열어서 꾸리다가 2010년 가을부터 새롭게 시골로 보금자리를 꾸려서 지냅니다.


  시골에서 사니까 나한테 학번을 묻는 이웃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그저 나이만 묻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묻습니다. 도시에서 만나는 이웃은 으레 학번을 묻더니, 시골에서 만나는 이웃은 으레 고향을 묻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사는 요즈음은 “뿌리를 내려서 살면 그곳이 고향이지요.” 하고 대꾸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그래, 여그서 살면 여그가 고향이지.” 하고 말하는 분이 있지만, 끝끝내 “그라도 태어난 곳이 있을 거 아닌가?” 하고 늘어지는 분이 꽤 있습니다.


  이웃이 되고 싶은 이들은 무엇을 알고 싶을까요. 이웃이 되려면 서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나이를 알면 이웃이 될까요. 고향을 알거나 ‘다닌 대학교’를 알아야 이웃이 될까요.



.. 아이들을 나이에 따라 분류해서 감방에 처넣는 대신 온전한 삶을 살게 해 주면 아이들이 읽기, 쓰기, 셈본을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자기들 주변에서 펼쳐지는 현상들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기만 하다면 말입니다 …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며 자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어린아이 때부터 제 몫의 의무를 책임지는 습관을 통해 일하는 방법을 가르칠 줄 알게 된 곳, 그 강과 그 강가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한 일상적인 환경에서 스스로 모험을 빚어내고 찾아낼 줄 알게 되었던 곳..  (44, 61쪽)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대학교에 살짝 들어가기는 했습니다. 대학교라는 곳을 다섯 학기 다니면서, 이곳에서 나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 대목은 ‘교수한테 잘 보이고 숙제 잘 내고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학점을 잘 받을 수 있고, 교재 아닌 책을 보지 않으면서 달달달 암기능력을 선보여서 실기점수를 높이고, 시험을 치를 적에 교수를 속이는 훔쳐보기를 잘 해내면 학교를 마친 뒤에도 큰 회사에 들어가서 돈을 많이 벌기 좋다’ 말고는 더 없다고 느꼈습니다. 대학교에서 첫 학기부터 바지런히 모든 강의를 빠지지 않고 들으면서 배우려고 애썼으나 남학생보다 여학생한테 높은 점수를 주는 전공 교수‘꾸러미’를 보고, 교재 베껴쓰기 숙제를 하나라도 안 내면 학점을 한 단계씩 깎는 교수를 보며, 보고서에 한자를 드러내어 일부러 어렵게 써야만 ‘작문’을 잘했다고 북돋우며 점수를 잘 주는 교수를 보았습니다.


  한 학기를 마친 뒤 성적표를 받고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런 데가 대학교였는가? 이런 대학교에 들어오려고 그렇게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시험공부 미치광이’가 되어야 했는가? 이런 바보짓을 일삼고 겪으면서 다시금 ‘입사시험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 하는가?


  대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전공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교재 한 권으로 한 해를 가르칠 뿐 아니라, 기껏 내는 숙제는 교재 베껴쓰기뿐이니, 나 혼자 이 교재를 읽으면 될 뿐입니다. 혼자서 교재를 읽고 익힐 때에 훨씬 빠르고, 베껴쓰기 숙제 때문에 막상 내 공부를 더 깊거나 넓게 하지 못하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학기째 다니고 보니 돈이 너무 아깝습니다. 대학교 등록금이면 책을 몇 권이나 살 수 있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대학교 등록금을 이곳에 바치느니, 이 돈으로 내 마음을 살찌울 책을 하나하나 알뜰히 살펴서 장만하자고 느낍니다. 강의보다 ‘강의 뒤에 마실 술’에 눈이 먼 선배와 동기를 쳐다보기 싫습니다. 아예 강의를 빼먹으면서 학교 잔디밭에서 낮부터 술에 저는 선배와 동기를 만나기 싫습니다. 나는 대학교 강의는 젖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대학교 둘레 헌책방’을 찾아나서기로 하고, 다른 대학교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 깃들어 여러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장만하고 읽고 장만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 스스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목적을 찾아낼 줄 아는 것, 이것이 진짜 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교제도를 통해서는 빈부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없습니다 … 학교에서 측정하는 것은 학생의 유순함이고, 이러한 측정은 상당히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누가 고분고분하고 누가 그렇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일까요? ..  (88, 97, 142쪽)



  한국을 보면, 초·중·고등학교는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고 시험 성적이 높은 아이가 사랑받습니다. 대학교는 이런 학생도 사랑을 받지만 집회에 잘 나가는 선·후배도 사랑받고, 얼굴과 몸대를 가꾸어 짝짓기놀이를 잘하는 아이도 사랑받으며, 어디 놀러가서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사랑받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참말 사랑을 못 받습니다.


  대학교에 와서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나 토익 공부를 안 하’고, ‘교양도서나 인문도서를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받습니다. 강의를 듣다가 궁금한 대목을 물으면서 ‘교재 진도를 막’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받습니다. 보고서를 다섯 장 써서 내라 하는데, 열 장이나 스무 장까지 써서 이녁 생각을 펼치려고 하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받습니다. 술자리를 마다 하거나 담배를 피라고 내미는데 안 피우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받습니다. 금요일 낮 강의부터 빼먹으면서 주말에 놀러가서 밤새 술을 먹자고 하는 모꼬지에 안 가겠노라 하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받습니다. 술과 짝짓기놀이가 어우러지는 모꼬지에 안 간 사람은 다음부터는 아예 따돌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1학년을 마치던 해 겨울에 일찌감치 ‘입영 신청서’를 냅니다. 하루 빨리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술자리에 안 가겠다고 하면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하거나 얼차려를 시키는 선배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서 군대부터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술자리에서 빠졌으니 오늘은 반드시 술자리에 와야 한다고 윽박지르면서 거친 말을 내뱉는 선배는 더 보고 싶지 않아서 아예 학교 문턱에는 들어가지 않고 도서관에 새벽처럼 들어갔다가 첫 강의를 할 때에 슬그머니 나와서 다른 대학교로 찾아가 그곳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서 마지막 강의가 끝날 때까지 책을 읽다가 ‘대학교가 없는 동네(용산)’에 있는 헌책방에서 ‘인천으로 가는 전철 막차’가 떠날 때까지 책을 읽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 시험과 성적, 통지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인간사의 복잡다기한 여러 측면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 ..  (27, 71쪽)



  군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진작 그만두려 했지만 집에서 아주 싫어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 크게 싫어하셔서 한 해만 더 다니기로 합니다. 나는 이때부터 집을 나옵니다. 더 일찍 집을 나오고 싶었지만, 군대에서 생각을 추슬러서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군대에 가기 앞서 대학교 앞 신문사지국에 들어가서 신문배달을 하며 책값을 벌었습니다. 이제 ‘대학교 2학년 복학생’이 된 나는 집을 나와서 학교 앞 신문사 지국으로 다시 들어가서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면서 학교를 다닙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술 안 마신다고 하면 멱살 잡는 선배’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선배가 되었고, 게다가 복학생이니까요.


  그런데, 선배가 되어 후배한테 ‘나는 너희한테 술 먹일 생각이 없다’고 하니, 후배들이 제 둘레에 안 옵니다. 후배들은 ‘술을 사 주고 신나게 놀자’고 하는 선배한테만 붙습니다. ‘대학교에 와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짝짓기놀이도 할 만하지만, 삶을 배우고 생각을 짓는 하루를 보내고서 놀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래 구슬리고 저래 달래도, ‘대학생으로서 책방마실’을 하거나 ‘대학생으로서 도서관마실’을 하는 일을 반기는 후배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간 대학교에서 아예 전공수업을 안 듣기로 합니다. 한 해만 더 다니고 그만두기로 한 만큼, 바보스러운 전공수업을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떤 수업을 들어야 이 비싼 등록금이 안 아까울까 하고 살피다가 ‘고졸 학력으로 기자가 되는 길’을 뚫으면 재미있겠다고 느낍니다. ‘신문배달 고졸 학력으로 기자 시험을 뚫고 들어가’면 참으로 새로운 길이 될 만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의계획표를 살펴서 두 학기치 계획을 짭니다. 두 학기에 걸쳐 신문방송학과 모든 수업을 듣기로 합니다. 교수가 뭐라고 따지거나 말거나, 학점이 어떻다거나 말거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을 빈틈이 없이 꽉꽉 눌러서 채웁니다. 신문방송학과 수업이 없는 빈 자리는 교양과목으로 채웁니다. 우리 학과 조교가 내 ‘강의신청서’를 보더니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신청할 강의가 20점이 넘으면 안 된다고, 자그마치 40점이 넘게 신청하지 말라 했지만, “조교야, 난 두 학기만 다니고 이 학교 그만둘 생각이야. 난 학점이나 성적 때문에 강의를 들을 생각이 없어. 난 내가 들을 강의만 들을 생각이야. 그러니 이대로 신청서를 받아. 네가 이 신청서를 안 받아도 나는 그 강의를 들으러 갈 테니 알아서 해.” 하면서 밀어넣었습니다.



.. 아이들은 낡아빠진 과정을 되풀이하며 과학용어를 외웁니다. 텔레비전 상업광고를 따라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공식을 따라 외웁니다. 과학교사는 국가가 인정한 과학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정치적인 진리를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 책은 어떤 선생이 가르치든 어떤 학생들이 배우든 똑같은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  (134, 136쪽)



  책만 보고는 버드나무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책만 보고서는 감꽃이 피고 지는 때와 감을 언제 따서 먹으면 될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책만 볼 때에는 멧골에서 우짖는 멧새가 어떤 새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그 어느 도감에도 ‘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어떠한지 못 밝힙니다. 더군다나 도감에서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적어 주더라도, 막상 내 귀로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사뭇 다릅니다.


  사진이나 그림만 보아서는 요것이 벼인지 피인지 가려낼 수 없습니다. 사진이나 그림만 보았으면 봄에 올라오는 요 녀석이 보리싹인지 밀싹인지 가려내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그럭저럭 이름이 있는 대학교 졸업장은 ‘대학교를 다니지 못한 우리 아버지’한테는 대단히 컸습니다. 큰아버지인 우리 아버지는 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대학교에 못 갔습니다. 동생인 작은아버지 세 분은 모두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학교를 마쳤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이 대목이 큰 짐으로 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대학교에 못 간 아쉬움과 아픔’이 어떠한지 하나도 모릅니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아버지한테 “그깟 대학교 안 갔으면 뭐 어때?” 하고도 말하고 “대학교 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하고도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이녁이 손수 발을 밟지 못한 대학교이기 때문에 몹시 아쉽고 아프며 서운하게 여깁니다.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으로 일하면서 저녁에 짬을 내어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초등학교 교장이 된 뒤에도 대학원 수업을 빠짐없이 듣고 숙제를 내시더군요. 그러더니, 교대 대학원을 수석으로 마칩니다. 아쉬움과 아픔을 이렇게 풀어내는 아버지인데, 이렇게 ‘대학원 수석 졸업장’을 가장 큰 보배처럼 집에 붙이시지만, 그래도 ‘대학교 졸업장’이 없는 대목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녁 아들이 ‘대학교 자퇴’를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나는 나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나는 내가 품을 꿈을 이루는 삶이 대수롭습니다. 나는 졸업장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나는 삶을 배우는 길이 대수롭습니다. 나는 나한테 삶을 가르치거나 보여줄 스승이나 길동무나 이슬떨이나 곁님이 대수롭습니다. 나는 나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베풀 기관이나 시설이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읽을 노릇입니다. 겉모습으로는 사람을 읽지 못합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사귈 노릇입니다. 몸매와 얼굴로 사람을 사귈 수 없습니다.


  대학교에 몸을 두기는 했으나, 나는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의를 빠짐없이 들은 뒤, 대학교 도서관과 구내서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합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만 자면서 ‘대학교 2학년 복학생’ 나날을 보냅니다.



.. 우리 아이들의 삶을 통제하는 두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학교. 중요한 순서대로 적은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진짜 세계, 즉 지혜와 용기, 자제와 정의의 세계를 쥐어짜서 쉴 새 없고 끝없는 추상의 세계로 만들어 놓습니다. 지난 시절, 사람들은 진짜 일, 진짜 사랑, 진짜 모험, 그리고 정말로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쳐 줄 만한 스승을 찾아다니는 일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 학교는 일하는 사회에 대한 기생충 노릇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온통 훑어보아도 아이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공익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일체 주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일그러진 이 사회뿐입니다 ..  (45, 53쪽)



  내 다짐대로 한 해만 더 다닌 대학교를 그만둡니다. 1998년 12월입니다. 이해 시월에는 한글학회에서 ‘한글공로상’이라는 상패를 나한테 주었습니다. 군대에 있을 적과 대학교로 돌아온 뒤 틈틈이 하루를 쪼개어 ‘우리 말 소식지’를 주마다 한두 가지씩 펴내어 둘레에 돌렸는데, 이런 일을 두고 한글학회에서 젊은이를 이쁘게 보아주었구나 싶습니다.


  스물서너 살 젊은이가 ‘한글공로상’을 받았다고 하니 여러 신문사에서 취재를 하자고 전화가 옵니다. 이때 나한테는 손전화가 없고 삐삐만 있습니다. 학과방이나 학과실에 전화가 오지만 일부러 전화를 안 받고, 신문배달 자전거를 몰아 책방마실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용케 〈조선일보〉 기자는 내 발걸음을 좇아서 내가 ‘숨은’ 헌책방까지 찾아옵니다. 〈조선일보〉 기자한테 나는 이녁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말합니다. 사진도 찍지 말라고 말합니다. 〈조선일보〉 기자는 이런 말을 고분고분 들어줍니다. 그러더니, 내가 엮은 소식지를 몇 부 어디에선지 얻어서 스스로 기사를 써서 신문에 싣습니다. 참 대단한 기자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취재를 하려면 이렇게 취재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취재 거부’를 했더니, 〈조선일보〉 기자는 스스로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해서 ‘알찬 기사를 만듭’니다. 이와 달리 〈한겨레〉 기자는 두 시간 즈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작 알맹이가 빠진 ‘빈껍데기 기사를 만듭’니다. 〈한겨레〉 기자는 받아적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기사에 잘못 적은 대목까지 있습니다.


  1998년 한글날 아침에 아버지는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나는 〈조선일보〉 기자한테 내 사진을 준 적도 찍힌 적도 없지만, 참말 어디에선지 내 증명사진을 얻어서 기사에 넣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녁 아들이 이녁이 날마다 보는 신문에 떡하니 기사로 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셨고, 저녁에 신문사지국으로 전화를 걸어 “종규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 축하한다. 애썼어.” 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들려준 짤막한 말에 힘입어 이해 겨울에 씩씩하게 자퇴서를 냈고, 당차게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자퇴 대자보’를 석 장 써서 붙였습니다. ‘자퇴 대자보’는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갈기갈기 찢어서 바닥에 흩뿌렸지만, 다 괜찮습니다. 대학교에 다닐 사람은 다니면 되고, 졸업장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가지면 됩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떠날 사람은 떠나면 되며, 졸업장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러고 보니, 나중에 내가 들어갈 만한 일터가 없더군요. 그래서 나는 오로지 신문배달만 합니다. 〈한겨레〉에서 나를 ‘한겨레신문 홍보 모델’로 써서 〈한겨레21〉이나 〈씨네21〉에 이런 홍보 사진이 나오기도 했고, 신문사에서 나를 ‘특채’로 뽑아 주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학력제한 없는 입사시험 제도’가 없으면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을 여쭈면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 저는 조직이 가정을 대신할 수 있다는 기본 전제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 조직이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사회와 가정의 생명력을 뽑아 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조직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수량으로 파악되는 기계적인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  (45, 53, 71쪽)



  국민학교 3학년 무렵에 겪은 일이 있니다. 이날 마침 담임교사가 학교를 비워서 양호교사가 하루를 맡았습니다. 양호교사는 교과서 수업을 하기 어려워서 하루 내내 ‘다른 수업’을 했습니다. 양호교사는 이날 하루 내내 “내 꿈 이야기하기”를 했습니다. 양호교사는 우리더러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마음껏 적어서 모든 아이가 교탁으로 나와서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한 반에 예순 아이쯤 있으니, 모든 아이가 앞으로 나와서 말을 하자면 참 오래 걸립니다. 하루를 꼬박 들이니 겨우 모든 아이가 “내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나는 일부러 내 자리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 “내 꿈 발표”를 미루었습니다.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더 미룰 수 없어서 겨우 “내 꿈 발표”를 합니다. 동무들은 1분이건 10분이건 30분이건 마음껏 “내 꿈 발표”를 할 수 있었고, 한 번 들려준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이야기를 해도 되었습니다.


  꽤 많은 동무들은 “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하고 말하는데, “나는 대통령 비서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 대통령이 된 아무개(동무 이름)를 똥통에 빠뜨려 죽이고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요……(깔깔깔)” 하면서 놉니다. 차분하게 꿈을 말하는 동무가 여럿 있었다고 떠오르지만, 거의 모든 아이들은 장난으로 때우려 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나는 그야말로 엄청난 개구쟁이여서 ‘어떤 장난을 치면 동무들을 더 웃길 수 있을까, 뭘 꾸미지?’ 하고 머리를 굴리고 뒷통수를 긁적였습니다. 이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발표를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한 줄을 종이에 썼습니다.


  “저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어른이 되는 게 꿈입니다.”


  이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동무들은 책상을 치고 걸상을 끌고 긁고 뒤로 자빠지고 앞으로 엎어지고 웃어대었습니다.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 해냈구나 하고 느끼며 같이 웃기는 했지만, 동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좀 많이 지나치지 싶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양호교사도 웃음이 새어나오는지 웃음을 못 참다가 제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더니 “장난치지 말고, 다시 말해요.” 했습니다. 나도 따라서 웃다가 꿀밤 맞은 머리를 긁으면서 곧 얼굴빛을 바꾸었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참말로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커서 진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다음 말은 어디에서 샘솟았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이 말은 모든 아이들을 잠재웠고, 양호교사도 “그래, 그렇구나. 아까 꿀밤 먹여서 미안하다.” 하고 말했습니다. 양호교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했다.”고 덧붙였습니다.



..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겁니다. 독학도 선택의 한 갈래가 될 수 있겠죠 … 조직은 더 좋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습니다. 목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이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의미의 발전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37, 78쪽)



  국민학교 3학년, 그러니까 내 열 살 적이나, 마흔 살이 넘은 오늘이나, 내가 품는 꿈은 ‘어른 되기’입니다. 나이로만 어른이 아니라 마음으로 어른이 되고, 짝을 지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이 아니라,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차며, 옳은 일에는 옳다 말하고 그릇된 일에는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일이 꿈입니다.


  ‘어른 되기’란 ‘사람 되기’입니다. 누구나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정작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학교에 얽매이거나 사회 얼거리에 짓눌립니다. 도시에서 회사원 톱니바퀴가 되거나 독재정권 나팔수가 되기도 합니다. 지식장사꾼이 되는 사람도 있고, 종이 되거나 꼭둑각시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지식이 모자라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내 지식이 모자라다면 새롭게 배워서 채울 노릇입니다. 다만, 내 마음이나 생각이 옳지 못하고 그릇된 길로 간다면 땅을 치면서 뉘우쳐야 합니다. 참다운 지식은 앞으로 내 나이가 몇 살이 되더라도 꾸준히 익혀서 얻어야 합니다. 참다운 지식은 참말 스스로 애쓰면 언제가 되든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올곧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어릴 적부터 몸에 붙이지 않으면 얼마나 기나긴 나날이 흐르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기 일쑤라고 느낍니다. 어릴 적부터 삶을 삶대로 맞아들이면서 누릴 때라야 비로소 참사람이 되고 참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나는 2003년 여름에 도시를 떠나 충청도 멧골짝으로 삶자리를 옮겨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오덕 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곳에 와서 이녁 자취를 하나씩 더듬으면서, 이녁 참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피면서, ‘이제껏 나한테 스승다운 스승은 없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참 그랬어요. 그렇다고 이오덕 님이 내 삶길에서 스승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이오덕 님이 남긴 어마어마한 글과 책은 나한테 ‘스승이란 무엇이고, 스승이란 누구인가?’를 일깨웠습니다.


  스승은 무엇일까요? 숲입니다. 스승은 누구일까요? 나입니다.



 … 메인 주 해양박물관은 배 만들기, 밧줄 만들기, 새우잡이, 돛 만들기, 물고기 잡기, 해양 건축을 가르치는 데 몇 달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학교교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습니다. 학기가 짧은 홍콩은 모든 과학이나 수학 경연에서 일본을 능가합니다. 학기가 긴 이스라엘이 전세계에서 가장 짧은 학기를 가진 벨지움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  (37, 78, 129쪽)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며 배운 대목은 ‘내 밥그릇 잘 챙겨서 돈 잘 벌어서 도시에서 살기’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학문을 깊이 파헤치거나 살피는 일은 꼭 대학교를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대학교를 옳게 다니고, 제대로 나오는 사람도 많고, 옳고 바르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수도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 대학교 얼거리(조직)는 젊은이를 젊은이답게 키우거나 길러내지 못합니다. 제 한 몸뿐 아니라, 이웃사람 몸을 아울러서 헤아리도록 가르치지 못합니다.


  내가 보기로 대학교는 ‘조직’이거나 ‘공장’이지, ‘배움터’나 ‘삶터’가 아닙니다. 배움터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뿐 아니라, 학생한테서 교사가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학생이 교사한테 배울 뿐 아니라,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는 곳이어야 배움터이면서 삶터가 된다고 봅니다. 대학교라는 곳에 몸담은 사람한테만 도움 되는 대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한테도 도움이 되는, 아니 대학교에 갈 수 없고, 대학교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한테까지 제대로 도움이 되어야 비로소 대학교라고 봅니다.


  《바보 만들기》(민들레,200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쓴 존 테일러 개토 님이 말하는 ‘의무교육 문제’ 고갱이는 여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받는 초·중·고등학교 의무교육은 ‘대학교 바라기’일 뿐인데, 윽박지르고 짓누르면서 바보로 만드는 공장살이나 감옥살이입니다. 다른 곳으로는 가지 말고 오로지 대학교만 바라보게 하는 ‘통제와 획일’이 바로 우리네 의무교육입니다. ‘일방통행이오니 이 길 말고 다른 길로는 가지 마시오. 다른 길로 가면 그대는 이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질 테니까!’ 하고 으름장을 놓는 비틀린 교육 얼개와 사회 얼개인 한국입니다.



.. 우리가 학교교육에 쏟아붓고 있는 돈을 도로 가정교육으로 돌린다면 약 하나로 두 가지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회복시키면서 동시에 가정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가능하며 거기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은 독창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하지, 틀에 맞춘 인간형을 찍어 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  (49쪽)



  한 해에 80만이나 되는 수험생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 아이들이 모두 대학교에 가야 한다면, 이 아이들은 모두 대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해마다 80만에 이르는 아이들이 저마다 제 삶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을 써서 대학생이 될 노릇이 아니라, 돈을 들여서 ‘숲집’을 가꾸고 ‘배움터’와 ‘보금자리’를 일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어버이라면, 이녁 아이가 대학교에 쏟아붓는 ‘네 해 오천만 원, 또는 네 해 일억 원’으로 시골자락에 땅을 장만해서 숲으로 가꿀 노릇입니다. 생각이 슬기롭게 자라는 어버이라면, 이녁 아이를 대학교에 보내기까지 초·중·고등학교에 집어넣어서 시험기계로 길들이며 쓰는 ‘일 억원, 또는 이억 원’에 이르는 돈을 일찌감치 시골자락에 땅을 마련해서 숲으로 일구는 일을 할 노릇입니다.


  돈이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죽자 사자 돈을 벌었으면 이 돈을 제대로 써야 합니다. 죽자 사자 번 돈으로 학원비나 교재비로 쓰지 말고, 이 돈으로 시골자락에 땅을 사야지요. 그리고 이 땅을 아름다운 숲으로 일구어서 ‘자급자족’을 하는 길을 열어야지요. 바로 이 길만이 아이를 살리고 어버이를 살립니다. 아이가 살면 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낳을 아이도 살립니다.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 가운데에는 모든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습니다. 숨 쉬기, 물 마시기, 밥 먹기는 누구나 해야 마땅하지만, 이런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아주 마땅한 일, ‘본능’이라고만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울 것은 ‘숨(바람)’과 ‘물(빗물과 냇물)’와 ‘밥(해와 흙)’입니다. 여기에 ‘집(숲과 나무)’과 ‘옷(풀과 꽃)’입니다. 하나를 덧붙이면 ‘말(이야기와 글과 책)’입니다. 숨과 물과 밥과 집과 옷이 있어야 사람이 몸과 마음으로 사는데, 여기에 말이 있으면 날마다 오순도순 재미나게 어우러집니다. 말이 있기에 노래와 춤이 잇달아 태어납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셔요. 대학교에서 무엇을 보여줄까요?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무엇을 할까요? 이 모든 학교와 시설과 교육과 복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숨·물·밥·집·옷·말’을 살피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와 학원도 ‘숨·물·밥·집·옷·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떤 교사와 교수와 작가와 지식인과 기자도 ‘숨·물·밥·집·옷·말’을 다루는 이야기를 글로 쓰지도 못하고 책으로 내지도 못합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무턱대고 학교에 집어넣는 일이란, 아이를 시험기계로 만드는 짓일 뿐 아니라, 바보로 만드는 짓입니다.



.. 스웨덴의 학교에 입학을 하면 학교당국은 아이에게 세 가지를 묻습니다. (1) 왜 학교에 다니려고 하는가? (2)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가? (3) 네게 흥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고 나서는 이제 학부모들이 교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집이나 배를 지을 줄 아십니까? 당신은 채소를 키우고 옷을 만들고, 우물을 파고, 노래를 부르고(당신 자신의 노래), 당신 자신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당신 주위 일상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까? 아니라고요? 당신은 그렇게 할수 없다고 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제 아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130쪽)



  대학교 입시 문제를 풀지 않고는 중·고등학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문제를 풀지 않고는 초등학교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문제를 풀지 않고 유치원과 어린이집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졸업장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돈과 이름과 힘을 얻는다는 이 팍팍하고 바보스러우면서 메마른 사회에서 아이가 아이답게 사는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는 ‘사회 경험’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삶을 사랑스럽게 누리는 꿈을 지으면서 하루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대학바라기’를 버려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대학교를 없애야 합니다. 아니면, 올바로 뜯어고치든지요. 아이를 대학교에 넣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조차 넣지 말아야 합니다. 어버이라면, 아이를 시험기계 되는 구렁텅이에 몰아넣지 말고, 아이를 온몸으로 사랑하고 아끼도록 어버이 스스로 아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집이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이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집이 마을’로 되어야 합니다.


  학원을 하나라도 더 보내고, 과외를 하나라도 더 시켜서 점수따기를 잘하는 기계로 만드는 바보짓은 멈추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책’이 아닌 ‘입시교재’를 사서 안기는 바보짓은 그쳐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짓에 돈을 하나도 안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다운 길에 돈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고 아름답게 가꾸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 나라 얼거리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온갖 나쁜 법을 없애고 고치는 실타래도, 차별과 불평등이 곳곳에 넘친 이 사회를 아름답고 고른 사회로 다독이는 응어리도, 지식인이 엉터리 말과 글로 지식 공해를 일으키는 골칫거리도, 경제와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시골과 숲을 무너뜨리는 못난 짓도, 그야말로 얼토당토않는 온갖 말썽거리도 술술 풀릴 수 있습니다. 어른은 숲을 가꾸어야 하고, 아이는 숲에서 놀아야 합니다. 어른은 숲을 가르쳐야 하고, 아이는 숲을 배워야 합니다.



..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따르는 방법 외에 진짜로 가르치는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도서관에서는 연령별로 격리된 아이들이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도서관은 독자들을 나이별 또는 독서 능력이라는 수상쩍은 기준으로 격리하지 않습니다 … 도서관은 학교처럼 공공연히 창피를 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좋은 독자와 나쁜 독자들을 등급을 매겨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써붙이지 않습니다 ..  (40, 148, 149쪽)



  《바보 만들기》는 한국에 1994년에 처음 나옵니다. 2005년에 새 옷을 입습니다. 이 책은 ‘지식으로 삼는 책’이 아닙니다. 길잡이로 삼는 책입니다. 삶을 짓는 길이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길잡이로 삼아서, 내가 스스로 나를 가르치는 길을 그릴 노릇입니다.


  내가 내 삶을 짓지 않으면 내 삶은 무너집니다. 내가 내 삶을 그리지 않으면 내 삶에 사랑이 깃들지 않습니다. 바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바보가 되면 됩니다.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꿈을 그려야 합니다. 바보를 만드는 사회와 학교에 아이를 맡기고 싶으면 그대로 맡길 일이고, 슬기로운 사랑둥이를 돌보면서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러운 슬기둥이가 되고 싶다면, 이제부터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스스로 ‘숲집’을 짓고 ‘숲노래’를 부르면서 ‘숲책’을 써야 합니다. 4338.4.12.불/4347.12.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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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이의 꽝복권 낮은산 작은숲 6
김정호 지음, 김병하 그림 / 낮은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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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어린이책



절름발이, 이웃, 사랑

― 현철이의 꽝복권

 김정호 글

 김병하 그림

 낮은산 펴냄, 2005.6.10.



  다친 이웃이 있어도, 아픈 벗이 있어도, 굶주리는 들짐승이 있어도, 집이 없이 한뎃잠을 자는 사람이 있어도 모르는 척 지나치는 삶이 되고 마는 요즈음 모습이지 싶습니다. 어쩌다 눈길을 닿기는 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내 삶으로 맞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오늘 내가 선 자리가 너무 바쁘거나 고단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으레 슬그머니 지나칩니다.


  이웃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내 삶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웃이 아픈 줄 모르기에 내 삶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 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내가 어떤 삶인지 모르니 내 이웃이 어떤 삶인지 모릅니다. 내 몸 어느 곳이 튼튼하거나 아픈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않기에 내 이웃이나 동무가 얼마나 즐겁거나 아픈지 하나도 모릅니다.



.. 옆구리를 걷어차인 듯 개가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끼이익!’ 하고 자동차가 급히 서는 소리와 함께 더 큰 비명이 들려왔다. 자동차는 피를 흘리며 몸부림을 치는 개를 두고 그대로 가 버렸다. 시장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어머, 불쌍해라. 많이 다쳤나 봐요.” 하지만 누구도 선뜻 앞에 나서질 않았다 .. (34∼35쪽)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찻길에서 죽는 목숨이 참 많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으레 사람 목숨만 헤아리지만, 사람 아닌 짐승이 길에서 참으로 많이 죽습니다. 길고양이나 멧토끼뿐 아니라, 다람쥐와 노루와 너구리도, 소쩍새와 참새와 제비도, 뱀과 개구리와 족제비도, 수많은 숲동무가 자동차에 받혀 숨을 잃습니다. 날마다 아주 많은 숲동무가 그만 목숨을 빼앗깁니다. 교통사고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그나마 보금자리를 빼앗겨 고단한 숲동무는 온갖 고속도로와 고속화도로에서 싱싱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제대로 하루를 누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자동차는 저희가 받은 짐승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백 킬로미터 넘게 달리면서 들이받은 짐승이니, 자동차를 멈출 수도 없을 테고 멈출 까닭도 없을 테지요. 뒤따르는 다른 자동차는 길죽음으로 이 땅을 떠난 숲동무 주검을 다시 밟습니다. 밟고 밟힌 주검은 어느새 오징어떡처럼 납작하게 바뀝니다.



..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어떤 여자 손님이 신고 왔던 거라오. 어느 병원에서 맞춘 거라는데, 교통사고로 발을 다친 사람이었지요. 이 신발을 처음 신을 때, 그 손님이 모양이 너무 안 예쁘다고 했더니 의사가 그러더래요. 그런 발에 뭘 예쁜 구두까지 찾느냐고…….” ..  (29쪽)



  시골에는 건널목이 없습니다. 시골을 들락거리는 자동차가 적으니 건널목을 놓기도 멋쩍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도시에는 어디에나 건널목이 있습니다. 자동차가 워낙 많기 때문에 도시사람은 건널목이 없으면 찻길을 가로지르지 못합니다. 그나마 건널목이 있더라도 신호를 기다리자면 한참 추위에 떨거나 더위에 땀흘리면서 기다립니다. 애써 기다렸어도 자동차는 푸른불에 곧바로 안 멈춥니다. 사람은 푸른불이 되어도 자동차가 멈추어야 비로소 길을 건넙니다.


  한국 도시에 있는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매우 짧습니다. 바퀴걸상을 굴린다든지 아기수레를 민다면, 푸른불 신호가 깜빡이다가 넘어갈 때까지 못 건널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어린이는 건널목을 다 건너기에 빠듯합니다.


  교통정책을 세우거나 교통신호를 다스리는 사람한테는 아이가 없을까요? 아프거나 늙은 어버이가 없을까요? 고단하거나 힘든 이웃이나 동무가 없을까요? 왜 건널목 푸른불 신호는 그처럼 짧을까요? 왜 건널목 푸른불 신호가 들어오기까지 사람들은 길에서 한참 기다려야 할까요?



..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는 순간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싫어서 현철이는 일부러 눈을 피했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전철 안이 비좁더라도 사람들은 현철이 옆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 ..  (68쪽)



  김정호 님이 글을 쓰고 김병하 님이 그림을 넣은 《현철이의 꽝복권》(낮은산,2005)을 읽습니다. 이 동화책에 나오는 현철이는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어머니는 없이 아버지하고 둘이 사는데,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집에서 라면으로 가까스로 끼니를 때우던 현철이는 아버지를 찾아나섰다가 그만 한뎃잠이처럼 전철에서 배를 쪼르르 굶으며 지내고 맙니다. 입성도 좀 허름하지만 한쪽 다리를 성하게 쓰지 못하는 현철이를 보는 둘레 사람들은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없고, ‘지저분한 거지 옆에 있다가 병이 옮지 말자’라든지 ‘괜히 옆에 있다가 엉뚱한 일에 휘말리지 말자’는 마음입니다.


  그러나저러나 현철이는 돈도 없이 집에서 나온 터라 쫄쫄 굶으며 전철에 있을 수만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전철에서 내려 아무 편의점에나 들어가 컵라면 하나를 사서 먹는데, 편의점 일꾼이 현철이한테 아주 쌀쌀맞게 굽니다. 옷이 지저분하고 다리를 저는 아이가 들어와서 라면을 편의점에서 먹고 가겠다고 하니 그랬을 테지요? 옷을 번듯하게 갖춰 입은 사람이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가겠노라 할 적에도 쌀쌀맞게 굴지 않을 테지요?



.. 할아버지, 무더운 날씨에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셨어요. 이제는 발도 아프지 않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 수도 있어 참 좋아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게 뭔지 아세요? 가장 좋은 건 비 오는 날, 우산을 쓸 수 있다는 거예요. 목발로 걸을 때는 비를 쫄딱 맞았거든요 ..  (58쪽)



  현철이는 오백 원짜리 두 닢으로 어렵사리 산 라면조차 제대로 못 먹고 편의점에서 쫓겨납니다. 이제는 골목을 떠도는 외로운 아이가 됩니다.


  현철이는 신문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치릅니다. 그런데 왜 신문을 훔쳤는지는 책에 안 나옵니다. 현철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둑이나 떠돌이가 된 흐름이나 까닭을 너무 싹둑 잘라서 보여줍니다. 아무튼, 현철이는 신문을 훔치다가 모진 일을 겪는데, 이때에 구둣방 할아버지가 아저씨를 말리며 현철이를 가까스로 풀어 놓아 줍니다.


  현철이를 도와준 구둣방 할아버지는 장애인이 신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장애인 신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쓴 뒤 무엇을 깨달아서 이녁처럼 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한테 빛이 될 만한 신발을 만들자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할아버지가 만든 신발을 받은 사람들은 ‘걷는 즐거움’을 되찾는다고 합니다.


  마음 착한 할아버지는 현철이한테 “같이 지내자”고 말합니다. 현철이는 집에 가도 다른 수가 없으니 그러기로 합니다. 할아버지는 교통사고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저는 개 한 마리도 따뜻하게 보살피며 한식구로 지냅니다. 그런데 이 개는 예전에 현철이네가 기르던 개라고 합니다. 한동안 집을 나갔던 현철이네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 집에 아이가 없는 줄 보고는 아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예전에 기르던 개가 구둣방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이 구둣방에 저희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더 크게 놀라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할아버지한테 편지 한 장을 남깁니다. 나중에 꼭 돈을 벌어서 아이를 되찾으러 오겠다고 하면서 아주 떠납니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편지를 읽다가, 현철이한테 이 편지를 보여줍니다. 현철이는 편지를 다 읽고 울먹이다가 나지막히 혼잣말을 합니다.



.. “아빠! 내가 아빠의 새 복권이 되어 줄게요. 절대로 꽝이 없는 복권요.” 그러고는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빠! 배짱 있게 살자…….” ..  (102쪽)



  돈을 많이 벌어야 삶을 즐겁게 누리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커다란 집에 깃들어야 식구들이 즐겁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웃고 노래해야 즐겁습니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삶을 누리면서 돈을 즐겁게 벌 때에 비로소 환한 사랑이 피어납니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두루 사랑을 받고 싶은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돈만 벌겠다면서 집에서 나오면 아이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아이가 잃은 나날은 누가 무엇으로 찾아 줄까요.


  동화책 《현철이의 꽝복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동화책은 ‘현철이’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정작 ‘현철이’ 이야기는 얼마 없습니다. 학교에서 현철이가 부대끼는 일은 고작 ‘꽝이 나온 복권’을 뒤지는 이야기 한 토막뿐입니다. 이야기 흐름으로 본다면,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지 못했을 아이고, 급식비조차 못 냈을 아이인데 밥은 어떻게 먹는지, 동무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마주하는지(살가이 지내면서 돕는지, 괴롭히는지 따위), 학교 교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웃집 사람들은 어떻게 마주하는지 따위가 하나도 없습니다. 고작 현철이가 집을 나왔을 때 편의점 여자 점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유, 저 병신!” 하고 매몰차게 구는 대목 빼고는 현철이가 이 사회와 어떻게 부딪히는지 다루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구둣방 할아버지 이야기가 《현철이의 꽝복권》에서 절반을 넘게 차지합니다. 아니 거의 모두 구둣방 할아버지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구둣방 할아버지와 현철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철이의 꽝복권》은 이야기 얼거리를 ‘장애인이 신는 짝짝이 구두’에 맞춥니니다. ‘꽝복권’ 이야기는 아주 조그맣게 한두 번 나오기는 하지만, 이야기 줄거리나 얼거리와 제대로 맞닿거나 이어지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픈 구석을 건드리는 작품이라 할 테고, 우리 사회에서 아픈 이웃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테며, 우리 사회가 짓밟거나 따돌리는 대목을 살피는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 짜임새가 좀 엉성합니다. ‘현실 보여주기’는 좋으나 ‘현실 보여주기’를 넘어서는 ‘문학다운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현철이는 ‘꿈’을 꾼 적이 없을는지 모르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끝자락까지 현철이가 제 나름대로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북돋우는 모습을 미처 못 그렸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아이가 아이인 까닭은 꿈과 사랑이 가슴에 있기 때문이니까요. 꿈과 사랑을 키우고 살려서 이 땅에서 씩씩하게 살고 ‘배짱’을 노래할 수 있는 아이일 테니까요.


  아무쪼록, 글을 쓴 김정호 님이 다음에 내놓을 작품에서는 이 책에 드러나는 여러 아쉬움을 슬기롭게 풀어내고 알뜰히 채우고 보듬어서, 이 땅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즐겁고 뿌듯하게 마음 깊숙하게 다가서는 이야기 하나를 베풀기를 바랍니다. 4338.7.7.나무/4347.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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