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깜장꽃 - 김환영 동시집
김환영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사랑하는 시 23

 


살아가며 노래하다
― 깜장꽃
 김환영 글
 창비 펴냄, 2010.11.25.

 


  닷새 동안 바깥마실을 한 뒤 고흥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시외버스가 서울을 떠날 적부터 들뜹니다. 이제 우리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즐겁습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외버스는 아파트하고 차츰 멀어집니다. 서울을 벗어난 시외버스는 아파트가 안 보이는 시골로 접어듭니다. 서울은 넓고 커다랗기에 한참 달려도 아파트와 건물이 끊이지 않기 일쑤이지만,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는 매캐한 바람을 쐬고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버스는 싱그러운 바람을 먹습니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조용합니다. 서울과 떨어질수록 나무가 춤을 추고, 나무마다 새와 벌레가 깃들어 노래합니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노래하지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기계가 소리를 내고, 텔레비전과 손전화 기계가 노래와 비슷한 소리를 냅니다.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노래할까요? 예전에는 시골에서 사람들이 노래했어요. 오늘날에는 시골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드물어요. 오늘날 시골에서 노래를 할 만한 사람은 다들 도시로 떠났고, 시골에 남은 이들은 텔레비전 연속극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경운기와 짐차 소리에 길들면서 스스로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골에는 노래가 흐릅니다. 경운기가 지나가고 난 뒤 고즈넉한 노래가 흐릅니다. 멧새와 풀벌레가 노래를 부릅니다. 개구리와 제비가 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사람이 스스로 노래를 잊었어도, 시골들과 시골숲에 사이좋게 노래를 부릅니다.


.. 집으로 들어오는 / 흙길 한가운데 / 질경이들이 새파랗다 ..  (질경이 도로)


  해 떨어진 깜깜한 저녁에 느즈막하게 시골집으로 들어섭니다. 고흥도 시골이지만, 우리 집은 고흥읍에서 한참 더 들어갑니다. 고흥읍에서 멀어지면서 창밖으로 별빛을 느낍니다. 군내버스에서건 택시에서건 별빛이 흐르는 밤하늘을 누리는 시골자락입니다. 택시를 얻어서 타건 군내버스를 잡아서 타건 풀벌레와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 시골마을입니다.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맨 먼저, 문가 장미나무한테 인사합니다. 장미나무 곁 동백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동백나무 곁 후박나무한테 인사합니다. 뒤꼍에 밤에도 하얗게 빛나는 매화나무한테 인사합니다. 흐드러진 매화꽃은 밤에 새삼스레 빛납니다. 옆밭 복숭아나무한테 인사하고, 우리 집 마당을 밝히는 풀한테 인사합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우리 이튿날 아침에 함께 놀아요.


  살며시 풀잎을 쓰다듬습니다. 가만히 나뭇가지를 어루만집니다. 밤새 포근한 기운이 집안에 감돕니다. 새로운 새벽과 아침에 멧새가 우리 집으로 찾아들어 노래를 들려줍니다. 마을고양이 몇 마리가 우리 집 옆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마을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 한쪽 쑥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합니다. 얘, 쑥밭에는 앉지 마렴. 우리 식구들 먹는 쑥이잖니.


.. 어둔 하늘 아래 / 어둔 산 // 어둔 산 아래 / 검은 숲 ..  (불빛)


  꽃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꽃을 바라봅니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을 이야기합니다. 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꽃내음이 풍기는 노래를 부릅니다.


  씨앗을 심고 싶은 사람은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은 흙을 어루만집니다. 흙을 어루만지는 사람은 흙내음이 풍기는 손길로 밥을 짓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사람은 자전거를 탑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두 다리를 믿습니다. 두 다리를 믿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듯이 씩씩하게 숲길을 걷고 멧길을 넘습니다.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싶으면 텔레비전을 바라봅니다. 할인매장에 가고 싶으면 할인매장에 갑니다. 자가용을 몰고 싶으면 자가용을 몹니다. 그러니까,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요.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을 나누지요. 돈을 바라기에 돈과 얽힌 삶을 누리고, 삼월에 삼월꽃을 꿈꾸지 않으니 삼월이 되든 사월이 되든 오월이 되든 꽃이 어디에 얼마나 피었는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 비가 와요 / 단비가 내려요 ..  (병아리 열두 마리)


  우리 시골집 곳곳에 온갖 봄꽃이 핍니다. 아이들은 꽃을 밟기도 하고 꽃을 꺾기도 하며 꽃내음을 맡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꽃은 서로 동무입니다. 놀이동무이고 삶동무입니다.


  꽃은 풀줄기가 내놓는 선물입니다. 풀줄기는 꽃이라는 선물을 내놓으면서 씨앗이라는 꿈을 톡톡 터뜨립니다. 풀씨는 바람과 빗물을 따라 곳곳에 퍼집니다. 사람이 애써 씨앗을 심어야 푸성귀를 거둘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는 풀은 무나 배추만이 아니에요. 질경이와 씀바귀도 사람이 먹어요. 꽃만 보는 유채가 아니라 줄기와 잎사귀와 꽃술까지 아삭아삭 먹는 풀밥입니다.


  김환영 님 동시집 《깜장꽃》(창비,2010)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바깥마실 마치고 고흥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읽으며 생각합니다. 김환영 님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서며 살아가던 어느 날 시가 저절로 터져나왔다고 해요. 온갖 이야기가 샘솟고, 갖은 노래가 피어났다고 합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누구라도 시골에서 살아가면 노래를 부릅니다. 풀노래를 부르고 꽃노래를 불러요. 하늘노래와 냇물노래와 숲노래를 부르지요. 그러면, 도시에서 살면? 서울이나 부산에서 살면? 도시내기는 노래를 부를까요, 안 부를까요?


  서울내기도 노래를 부릅니다. 서울내기는 서울노래를 부릅니다. 시골내기는 시골노래를 불러요. 인천내기는 인천노래를 부르고, 강릉내기는 강릉노래를 부릅니다. 저마다 제 삶자락에서 노래를 불러요. 이 노래가 더 사랑스럽거나 저 노래가 더 얄딱구리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더 좋거나 저 노래가 더 얄궂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프면 슬픈 노래요 기쁘면 기쁜 노래입니다. 고단하면 고단한 노래요 웃으면 웃는 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김환영 님은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골로 갔기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언제나 노래를 불렀는데 그동안 스스로 노래인 줄 못 느꼈을 뿐이에요. 이제서야 조금 느긋한 마음과 몸가짐이 되어 노래를 들여다보는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를 부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를 부르듯이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래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들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는 넋이요, 노래로 삶을 짓는 숨결입니다. 4347.3.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동시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창비시선 33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51

 


해님도 지구별을 좋아한다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글
 창비 펴냄, 2011.7.18.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재미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새벽을 여는 배달 일꾼이 아니고는 이무렵에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새벽 한두 시부터 자전거에 신문을 그득 싣고 바지런히 골목을 누비며 신문을 돌리면 3분쯤 지날 무렵부터 땀이 흐릅니다. 삼십 분이 지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고, 한 시간이 지나면 땀내음이 멀리까지 퍼지면서 볼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자칫 신문종이에 땀이 묻을까 봐 팔뚝으로 이마와 볼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신문을 쥐기 앞서 옷으로 땀을 닦습니다. 1990년대로 접어든 뒤부터 배달 오토바이가 차츰 퍼졌는데, 예전에는 으레 자전거나 두 다리로 신문을 돌렸어요. 두 시간쯤 신문을 돌리다 보면 손에 낀 실장갑까지 땀으로 옴팡 젖습니다. 세 시간쯤 신문을 돌리면 손에 묻은 땀을 옷에 닦아 신문을 넣자는 생각이 흐려집니다. 대문 안쪽에 놓인 신문에 엄지 자국이나 물기가 묻었다면, 이는 모두 배달 일꾼이 흘린 땀입니다.


..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  (발치)


  시골에서 맞이하는 새벽 세 시는 아주 고요합니다. 멧새도 모두 잠든 때입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개구리 노랫소리가 막바지에 이르는데, 여름날 새벽 네 시로 넘어설 즈음 개구리 노랫소리도 잦아듭니다. 그렇지만 풀벌레 노랫소리는 그대로 있어요. 시골에서 한여름 새벽 네 시 반 즈음부터 멧새 노랫소리가 퍼지고, 이제 풀벌레 노랫소리는 사라집니다. 멧새가 깨어나 돌아다닐 적에 풀벌레가 노래한다면, 멧새더러 나 잡아 드시오 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 나무야 네게 기댄다 /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 기댈 사람은 없었다 ..  (나무에 기대어)


  어린 두 아이와 지내는 낮 세 시는 무척 고단합니다. 아이도 고단하고 어른도 고단합니다. 아침부터 신나게 놀던 아이는 낮 두 시 즈음부터 살짝 졸음이 찾아오고 낮 세 시에는 그예 졸음덩어리입니다. 낮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힘든 나머지 골부림이 하늘까지 닿아요.


  세 시 즈음에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달래어 토닥토닥 안고 자리에 눕히려 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낮잠을 안 자려고 끝까지 버티고, 네 살 작은아이는 이내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를 재우려고 눕히고 토닥이다 보면 나도 작은아이 곁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때 큰아이는 혼자 슬그머니 일어나서 만화책을 펼치거나 혼자 소꿉놀이를 합니다.


..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 무엇을 잡으려고 푸른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 햇살 속에 내밀 때면 / 분꽃이 입을 열어 나팔소리를 들려주었다 ..  (꽃밭)


  봄이면 낮 다섯 시까지 빨래를 마당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낮 세 시를 지날 무렵 빨래를 집안으로 들입니다. 여름에는 낮 다섯 시를 지나고 여섯 시가 되어도 마당에 빨래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낮 네 시까지 빨래를 마당에 내놓고, 다섯 시가 되기 앞서 집안으로 들여요.


  빨래는 시계를 살펴 내놓거나 들이지 않습니다. 햇볕을 살피고 바람을 느낍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쬘 적에 빨래를 말립니다. 햇볕이 구름 뒤로 숨거나 멧등성이 너머로 사라지기 앞서 빨래를 걷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해와 바람을 살펴 때를 읽었어요. 해시계가 있어 시계가 아니라 해가 고스란히 시계입니다. 바람시계가 따로 있어 시계가 아니라 바람이 언제나 시계예요.


.. 폭발물 덩어리를 바닷가마다 세워놓고 저것을 녹색의 따뜻한 에너지라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은 스텔스 전폭기가 영변을 폭격하고 주전자 물이 다 끓기도 전에 대포동 미사일이 고리 원자로에 떨어져 사방 오십리 잿더미가고 방사능이 황사처럼 반도를 덮는 절멸의 날이 오면 어디에 잠자리를 정하고 어디서 어린 자식들을 키울 것인가 ..  (천변지이)


  도종환 님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2011)를 읽습니다. 도종환 님 마음자리에 가장 애틋하게 다가오는 한때를 그리는 싯말을 읽습니다. 세 시는 어떤 때인지 그리고, 다섯 시는 어떤 하루인가 헤아립니다. 그러고 보니, 낮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는 사진을 찍기에 좋은 햇살이기도 합니다.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는 마음을 가다듬거나 글을 쓰거나 밥을 짓기에 좋은 때입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글을 쓰면 맑은 마음이 되면서 무척 즐거워요. 예전에 새벽 세 시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날마다 맑은 마음이 되었어요. 오늘 이 시골집에서 새벽 세 시에 아이들과 달콤하게 잠들다가 다섯 시 언저리에 일어나 조용히 아침밥 차리려고 부산을 떨면 새삼스레 마음이 맑습니다.


  그렇다고 새벽 여섯 시에 마음이 안 맑지 않습니다. 아침 여덟 시나 저녁 일곱 시에 마음이 안 맑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새벽과 낮에 맞이하는 세 시와 다섯 시 사이는 하루 가운데 가장 고요하면서 차분한 때가 아닐까 싶어요.


..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  (연두)


  나무도 겨울눈을 좋아합니다. 풀도 새싹을 좋아합니다. 할머니도 아기를 좋아합니다. 해님도 지구별을 좋아하고, 우주도 태양계를 좋아합니다. 나이든 이들은 나어린 이를 좋아하고, 스승은 새내기를 좋아해요. 겨우내 시든 풀잎은 봄에 새로 돋아 피어나는 꽃송이를 좋아합니다.


  시는 무르익은 마음으로 쓰기 마련인데, 무르익은 마음이란 풋풋하며 싱그러운 빛을 읽고 아끼는 넋이지 싶어요. 시는 튼튼히 뿌리내린 나무와 같은 숨결로 쓰기 마련인데, 튼튼히 뿌리내린 나무는 늘 새잎을 틔우고 새 가지를 뻗으면서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으로 시를 읽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으로 시를 씁니다. 겨울을 새삼스레 누리면서 고요히 쉬는 몸가짐으로 시를 읽습니다. 4347.3.1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의 내용 창비시선 329
조정인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51

 


시와 꽃잎
― 장미의 내용
 조정인 글
 창비 펴냄, 2011.4.20.

 


  이틀 동안 봄비가 내립니다. 우리 집 뒤꼍 매화나무에는 아주 보드라운 꽃잎이 하나둘 벌어집니다. 아직 꽃망울이 조그마한 가지가 있고, 어느덧 활짝 꽃잎을 벌린 가지가 있습니다.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두 한 나무에서 뻗는 가지요, 다들 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입니다.


  빗방울을 머금은 매화꽃잎을 살살 만집니다. 예쁘구나 곱구나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쓰다듬습니다. 사진으로 몇 장 담고, 눈으로 한참 들여다봅니다.


  해마다 봄이면 고운 꽃잎을 드리우는 매화나무는 아주 상냥하며 반가운 동무입니다. 매화나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나무도 몹시 착하며 즐거운 동무입니다. 나무는 저마다 다른 잎사귀를 내놓고 꽃망울을 터뜨리며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저마다 씩씩하게 가지를 뻗고 줄기를 올리며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 더 살았다 //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  (문신)


  마당 한쪽에는 노랑붓꽃이 함께 살아갑니다. 노랑붓꽃은 알뿌리로 새 줄기를 곧게 뻗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시든 줄기를 툭툭 끊을 수 있지만, 굳이 사람이 시든 줄기를 끊지 않아도 됩니다. 새 줄기가 올라오면서 시든 줄기는 저절로 끊어집니다. 시든 줄기는 봄이 무르익으면서 어느새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는 여름을 앞두고 살살 꽃망울 맺고 꽃봉오리 터집니다.


  노랑붓꽃은 꽃잎이 노랗게 빛납니다. 꽃을 보며 참 곱네 하는 소리로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한 해에 꽃이 달린 날은 얼마 안 되어요. 꽃을 보는 날은 짧고, 꽃이 없이 푸른 줄기만 달린 날이 훨씬 깁니다.


  가만히 보면, 다른 꽃도 이와 비슷해요. 꽃송이가 오래도록 달리는 일이 드뭅니다. 꽃이 피기까지 오래 걸리고,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잎사귀로 지냅니다. 꽃이 지고 열매나 씨앗이 맺으면, 씨앗이 터지고 나서 천천히 시들어요. 이른봄부터 돋는 봄풀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거의 다 말라서 죽어요.


.. 고양이가 쓰레기봉지를 뜯다가, 세워둔 트럭 밑으로 / 몸을 숨긴다 바닥에 라면발이 흘러나와 있다 어둠속 / 겁먹은 허기가 고개만 돌려 내 쪽을 살핀다 ..  (탁발)


  꽃을 보려고 꽃씨를 심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이 곱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은 따로 꽃집에서 사고팔곤 합니다. 틀림없이 꽃은 곱습니다. 고운 꽃이 피는 목숨은 풀이나 나무입니다. 풀이나 나무는 고운 꽃을 피우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깁니다. 그러면,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살아가는 목숨일까요.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기는 보람 하나로 살아갈까요.


  나뭇잎은 으레 봄부터 가을까지 매달립니다. 늘푸른나무는 네 철 내내 잎사귀를 매답니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가 있어 나무다움을 뽐냅니다. 풀 또한 푸른 잎이 있어 풀다움을 자랑해요.


.. 자귀나무 분홍꽃은 여름저녁 꽃 // 자는 거야? 눈 좀 떠봐 / 아파? // 나무는 대답 대신 느리게 꽃을 흘렸다 망막을 스치는 꽃술을 따라 ..  (어둠이 성의처럼 내려졌다)


  매화꽃이 피는 둘레에 제비꽃이 번집니다. 우리 집 쑥밭 한쪽에 제비꽃 네 송이가 한꺼번에 터집니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은 일찌감치 터졌습니다. 코딱지나물꽃도 고운 빛으로 함께 터졌고, 냉이꽃과 꽃마리꽃도 함께 터졌어요.


  이웃집 밭에는 유채꽃이 오릅니다. 우리 집 밭에도 갓꽃이 곧 피리라 생각합니다. 동백꽃이 흐드러진 데가 있으나, 우리 집처럼 동백꽃이 느즈막하게 흐드러지는 데가 있습니다. 다 같은 꽃이면서 다 다르게 피어나고, 다 다른 꽃이면서 다 같은 꽃내음으로 시골마을과 시골집을 포근히 감쌉니다.


  조정인 님 시집 《장미의 내용》(창비,2011)을 읽으며 꽃잎을 헤아립니다. 꽃잎마다 다 다른 이야기가 서리고, 꽃잎마다 다 다른 빛이 감돕니다. 같은 매화꽃이더라도 다 다른 가지에서 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피어납니다. 어느 꽃은 해를 마주보고, 어느 꽃은 해와 등집니다. 어느 꽃은 위를 바라보고 어느 꽃은 아래를 바라봐요. 어느 꽃은 가지 끝에 매달리고, 어느 꽃은 줄기 가운데에 매달립니다.


.. 밥물이 끓는다 눈보라가 끓는다 능선이 솟는다 꽃잎으로 잦혀진다 ..  (어머니의 나무주걱)


  직박구리가 매화나무 끝에 앉습니다. 매화나무 굵은 가지도 아니고 퍽 가느다란 가지에 앉습니다. 참새나 딱새나 박새는 워낙 조그마한 새이니 가지 끝에 앉을 만하다지만, 직박구리는 꽤 큰 새인데 가지 끝에 잘 앉습니다.


  어느 날 보면, 까치나 까마귀도 매화나무 가지 끝에 앉아요. 큰 새가 앉으면 처음에는 낭창낭창 가지가 흔들리지만,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요. 작은 새도 큰 새도 가지 끝에서 즐겁게 노래합니다.


  어떤 힘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몸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넋일는지 궁금합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앉으면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는 새는 어떤 숨결로 나무를 사귀며 아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읽고 쓰는 시는 어떤 숨결이 될까요. 가지를 낭창낭창 흔드는 노래일까요. 가는 가지 끝에서도 굵은 가지 한복판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노래일까요.


.. 집을 비운 이틀 사이 히아씬스 구근이 실뿌리를 내렸다 글라스 가득 빈집이 내쉰 숨의 자취가 얼키설키 들어섰다 ..  (히아씬스와 나와 네안데르탈인의 원반 던지기)


  집을 비우고 나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뿌리에 실뿌리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늘 집에 있더라도 마주하지 않으면 알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집을 비우더라도 마음속으로 떠올리거나 그리면, 아하 오늘쯤 실뿌리가 퍼지겠네 하고 느낍니다. 늘 집에 있으면서 상냥하게 바라보고 따사롭게 보듬으면, 조그마한 알뿌리에 넉넉하게 사랑이 깃들면서 예쁜 싹이 틉니다.


  시 한 줄은 노래하면서 씁니다. 시 한 줄은 꽃잎처럼 피어납니다. 시 한 줄은 웃음꽃처럼 자랍니다. 시 한 줄은 사랑으로 맺는 씨앗 한 톨입니다. 4347.3.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집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말하는 시 50


시와 서울마실
― 자명한 산책
 황인숙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3.12.11.


  서울로 마실을 나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나옵니다. 우리 집 곁님은 아직 많이 아픈 사람이라 함께 마실을 다니기 어렵습니다.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나오든,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든, 나는 언제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먼길에 두 아이와 함께하며 생각합니다. 곁님이 아이들과 함께 다니지 못하니 늘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곁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으면, 나로서는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는 즐거움을 못 누립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챙깁니다. 아이들 입을 옷을 꾸립니다. 큰 가방에는 아이들 짐이 그득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시로 갑니다. 순천에서 인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 아이는 버스역 맞이방에서 한참 뛰놉니다.

  시외버스를 탄 아이들은 버스에서도 놉니다. 노래를 부르고 서로 얼크러집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날 무렵, 큰아이가 먼저 곯아떨어집니다. 이윽고 작은아이도 곯아떨어집니다. 두 아이는 서로서로 기대고, 나는 두 아이를 살며시 토닥이면서 재웁니다. 드디어 인천 버스역에 닿을 무렵 큰아이를 깨웁니다. 가방을 메고 작은아이를 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적에 큰아이가 일어나 주니 고맙습니다. 큰아이는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았어도 씩씩하게 걷습니다. 한손으로는 작은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큰아이 손을 잡습니다. 버스역 뒷간으로 가서 두 아이 쉬를 누입니다.


.. 빨간 신호등이 푸르러지도록 / 사람들은 무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  (무교동)


  버스역에서 전철역으로 갑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갑니다. 두 아이는 계단을 타니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시골집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온갖 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도시는 땅뙈기가 좁다면서 위로 높거나 아래로 깊습니다.

  계단놀이를 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전철역으로 들어서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계단이로구나, 도시에서는 늘 계단투성이가 되니 사람들이 승강기를 타고 싶겠구나.

  전철을 탑니다. 아이들과 전철을 탄 지 얼마나 되었나 돌아봅니다. 여섯 달쯤 되었던가. 큰아이는 손잡이를 안 잡고 서려 합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큰아이는 전철이 서고 달릴 적마다 비틀비틀 춤을 춥니다. 춤을 추는 전철이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두 아이는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너희한테는 어느 곳이나 놀이터가 되는구나.


.. 모진 소리를 들으면 /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  (모진 소리)


  전철을 내립니다. 저녁바람이 셉니다. 삼월을 갓 지난 인천은 아직 쌀쌀합니다. 고흥에서는 따순 바람이 불지만, 인천에 봄바람이 불려면 아직 멀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흥집을 나설 적에 덥다면서 겉옷을 안 입으려 하던 아이들입니다. 겉옷을 챙길까 말까 하다가 두고 나왔습니다. 너희가 추위를 한번 겪어야 너희 겉옷을 스스로 챙기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가방에 겉옷을 챙길 수 있으나, 늘 다 챙기지는 말아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일곱 살 네 살 나이는 아직 많이 어리지만,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어떻게 지내야 한다고 여길까요. 내가 좀 짓궂게 구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번 마실길에서 큰아이 새 겉옷을 장만하자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두꺼운 겉옷은 있으나 바람막이 같은 겉옷은 없거든요. 시골에서는 아이들 옷을 새로 장만하거나 얻기 힘들거든요. 큰도시로 마실을 나온 김에 아이들 옷을 살펴보자고 생각했어요.


.. 구름이 / 가만히 있다. / 가생이가 하얗게 / 햇빛을 쪼이면서. / 졸리운 돌고래처럼 ..  (르네 마그리트의 하늘)


  인천 지하상가에서 큰아이 웃옷과 바지 한 벌을 새로 장만합니다. 큰아이는 처음에 ‘안 추워. 안 살래.’ 하고 얘기했지만, 토끼 무늬 들어간 웃옷과 고양이 무늬 들어간 바지를 바라보며 ‘토끼 예뻐. 고양이 좋아.’ 하고 말합니다.

  큰아버지 사는 인천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튿날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전철길에서 큰아이는 큰아버지 보고 싶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며 웁니다. ‘얘야, 너 큰아버지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큰아버지하고는 안 놀았잖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나와서 운다고 돌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이모를 만나자고 했잖니. 너, 큰아버지도 보고 싶다 했지만 이모도 보고 싶다 했잖아. 이제는 이모를 보러 가자.’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눈물을 그치지 않습니다. 전철에서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를 오른어깨에 기대어 잠들도록 하고는 무릎에 큰아이를 앉힙니다. 등을 쓸면서 다독입니다. 큰아이는 품에 안긴 채 시무룩합니다.

  저녁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이레만에 얼굴을 봅니다.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큰아버지를 잊습니다. 밤에 택시를 불러 일산으로 갑니다. 택시에서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안고 업으며 이모네 집에 가니, 깊이 잠들던 아이들이 이모와 이모부 목소리에 살몃 눈을 뜨더니 얼굴에 웃음빛이 흐릅니다. 녀석들, 좋니? 즐겁니?


.. 바람의 축축한 혀가 /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 슬며시 눈을 뜯고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  (젖은 혀, 마른 혀)


  아이들 이모와 이모부는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섭니다. 두 분 모두 회사에 가서 일을 합니다. 아이들은 ‘빨리 와.’, ‘얼른 와.’ 하고 인사합니다.

  이부자리를 갭니다. 커텐을 걷고 창문을 여니 바깥에서 소리가 흘러듭니다. 어떤 소리가 이곳으로 스며드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 건물에서 뭔가 복닥이는 소리, 웃집이나 아랫집에서 물을 쓰는 소리,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들이 골고루 들어옵니다.

  삼월이 무르익는 일산인데, 멧새나 들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없습니다. 개구리가 깨어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풀벌레가 고개를 내미는 소리는 없습니다. 나비가 춤을 추거나 벌이 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봄바람 따라 봄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들꽃이 봄맞이를 하는 노래는 없습니다. 천천히 터지는 꽃망울이나 잎망울 속삭임은 없습니다.

  이 도시에는 어떤 소리가 있을까요. 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노래를 나눌까요.


.. 고양이가 운다 / 자기 울음에 스스로 반한 듯 / 부드럽게 / 고양이가 길게 울어서 / 고양이처럼 밤은 / 부드럽고 까실까실한 혀로 / 고양이를 핥고 / 그래서 고양이가 또 운다 ..  (밤과 고양이)


  황인숙 님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2003)을 읽습니다. 황인숙 님이 누린 나들이를 떠올립니다. 황인숙 님이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들으며 살결로 느낀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황인숙 님이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맞이한 삶은 어떤 빛인가 곱씹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춤을 추는 하루를 누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 눈을 감고 담쟁이는 / 한껏 사지를 뻗고 담쟁이는 / 온몸으로 모든 걸 음미한다 / 달콤함, 부드러움, 축축함, 서늘함, / 살랑걸림, 쓸쓸함, 따분함, 고요함, / 따사로움, 메마름, 간지러움, 즐거움 ..  (담쟁이)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와 함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걸레질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삶에 노래는 어느 만큼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노래가 어떤 빛깔과 무늬로 드리울까요. 우리 삶에서 노래는 얼마나 곱게 빛날까요.

  서울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꽃노래를 부르며 나들이를 즐길 수 있기를 빕니다. 회사원으로 지내든 집에서 살림을 가꾸든 다 함께 꽃춤을 추면서 웃을 수 있기를 빕니다. 시 한 줄은 한 발자국입니다. 시 두 줄은 두 발자국입니다. 시 석 줄은 세 발자국입니다. 천천히 거닐듯이 천천히 시를 씁니다. 즐겁게 걷듯이 즐겁게 시를 씁니다. 바쁜 사람은 바쁜 시를 쓰고, 아픈 사람은 아픈 시를 씁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시를 씁니다.

  서울 낮하늘도 파랗고, 서울 밤하늘도 까맣습니다. 서울 하늘에도 구름이 흐르고, 서울 보도블럭 틈바구니마다 갖가지 봄풀이 돋으며 푸른 숨결 나누어 줍니다. 4347.3.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4-03-07 19:10   좋아요 0 | URL
자연스러운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4-03-08 18: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읽어 주시는 분들이
언제나 늘 고맙습니다 ^^
 
상처의 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7
윤임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시 68

 


풀씨와 나무씨는 풀꽃과 나무꽃
― 상처의 집
 윤임수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5.9.26.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바라기를 하다가 왜가리를 봅니다. 마을 언저리 비탈밭에 앉았다가 날갯짓을 하는데 탁탁탁 소리를 냅니다. 저렇게 큰 새는 막 날아오를 적에 날갯짓 소리가 이렇게 크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멧비둘기나 까치가 날갯짓을 할 적에도 소리가 제법 커요. 제비나 딱새나 박새나 참새처럼 조그마한 새들도 날갯짓을 할 적에 소리가 퍽 큽니다.


  아침저녁으로 마루문 드나들 적에, 처마 밑 제비집에서 새들 날갯짓 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이 오면 제비가 돌아올 테니, 처마 밑에 슬그머니 또아리를 튼 딱새 두 마리는 자리를 비워야 할 텐데, 요 녀석들은 내가 마루문을 열고 마당을 드나들 적마다 화들짝 놀라면서 마당 한쪽 후박나무 품으로 안깁니다.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꼭 붕붕 소리를 내며 날아갑니다.


  큰 새는 큰 날개를 펄럭이며 탁탁탁 소리를 낸다면, 작은 새는 작은 날개를 잰 날갯짓으로 펄럭이며 붕붕붕 소리를 내요.


.. 왜관에서 대구로 가는 길 / 평탄한 국도를 두고 신동재가 있는 것은 / 아카시아 하얀 꽃길 때문 / 오월이면 어김없이 화들짝 피어나 / 굽이굽이 아름다운 펼치는 그 꽃길 때문 ..  (신동재)


  일곱 살 네 살 두 아이가 마당에서 놉니다. 아침볕이 따끈따끈 드리우면 마당에서 죽치고 놉니다. 아직 이월 끝물이지만, 봄을 코앞에 둔 이월 햇볕이 제법 따사롭습니다. 두 아이는 맨발로 흙밭을 뒹굴며 흙찜질을 합니다. 맨발로 마당을 가로지르며 뛰어놉니다. 종이인형을 들고 놀며,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휘휘 하늘을 날리면서 놉니다. 긴 빗자루로 비질놀이를 하고, 우산을 펼쳐 우산놀이를 합니다. 작대기로 후박나무를 살살 건드리며 놀기도 하고, 평상에서 펄쩍 뛰어내리면서 놉니다.


  아이들더러 이렇게 놀라느니 저렇게 놀라느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놉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찾아냅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새 놀이를 빚고, 새 놀이에 걸맞게 노래를 부릅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한테는 놀이공원이 덧없습니다. 때로는 놀이공원 같은 데를 가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굳이 놀이공원에 가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신나게 뛰고 달리고 구르고 드러눕고 까르르 웃고 싶습니다. 시골집에서건 아파트에서건 똑같아요. 그저 뛰고 구릅니다. 큰길에서건 논둑길에서건 똑같아요. 그저 달리고 노래합니다.


.. 명자나무 붉은 꽃이 / 따순 햇살에 환하고 / 탑리여중 순진한 소녀들이 / 단발머리를 자꾸 매만지며 / 철없이 깔깔거리고 있을 때면 좋겠다 ..  (탑리 오층석탑)


  풀씨는 풀 한 포기가 됩니다. 풀은 자라서 풀잎을 내놓고 풀꽃을 피웁니다. 풀꽃이 지면 천천히 풀씨를 다시 맺어요. 풀씨는 새삼스레 흙땅에 다시 드리우면서 새롭게 돋는 풀 한 포기가 됩니다.


  나무씨는 나무 한 그루가 됩니다. 나무는 아주 조그맣게 첫 싹을 틔우고 첫 줄기를 올립니다. 풀은 곧 꽃을 피우지만 나무가 꽃을 피우기까지는 퍽 오래 걸립니다. 나무는 오랜 나날 천천히 자라서 해맑은 꽃송이를 그득그득 피웁니다. 그러고는 어른나무처럼 새로 자라날 어린나무를 헤아리면서 나무씨를 흙땅에 떨구어요.


  풀은 싱그럽게 자랍니다. 풀은 풀내음을 나누어 줍니다. 나무는 푸르게 자랍니다. 나무는 나무내음을 베풀어 줍니다. 모든 숨결에는 빛이 있고 냄새가 있습니다. 냇물에는 냇물내음이 흐르고, 돌에는 돌내음이 감돕니다. 모래에는 모래빛이 있고, 구름에는 구름빛이 있어요.


  자동차에는 자동차에서 나는 냄새가 있습니다. 우라늄을 때는 핵발전소에서는 방사능 내음이 퍼집니다. 시멘트로 지은 집에는 시멘트에서 나는 냄새가 있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지은 집에는 흙내음이 있어요. 봄을 맞이해 캔 냉이로 끓인 국에서는 냉이 냄새가 솔솔 나요.


  어디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떤 냄새를 맡느냐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어떤 빛을 품느냐가 달라집니다. 어떤 집을 가꾸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누리느냐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랑을 속삭이느냐에 따라 어떤 꿈을 짓느냐가 달라집니다.


.. 시래깃국 자글자글 끓여 내놓고 / 막걸리 한 병 팔백 원 받으면서도 / 골목집 할머니 항상 미안하지요 ..  (이원 사람들 5)


  윤임수 님 시집 《상처의 집》(실천문학사,2005)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에 ‘상처’가 나오고 ‘집’이 나옵니다. 생채기가 있는 집이라는 소리일까요. 생채기를 내는 집이라는 소리일까요. 생채기를 보듬는 집이라는 소리일까요. 생채기가 아무는 집이라는 소리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게 읽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다달이 천만 원을 벌어도 모자라다 느끼고, 누군가는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도 넉넉하다 느낍니다. 누군가는 기저귀를 손빨래하면서 빙그레 웃어요. 누군가는 빨래기계를 쓰면서도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 직박구리 한 마리 운다 / 삐이요삐이요 / 여기도 사람이 사는구나 ..  (산 7번지)


  보름달이 뜹니다. 차츰 달이 이울어 반달이 됩니다. 어느덧 초승달이 됩니다. 이내 그믐달입니다. 깜깜한 밤이 이어지다가 새삼스레 초승달이 뜹니다. 어느새 달이 차서 반달이 돼요. 그러고는 다시 보름달이 환합니다.


  그믐달에도 보름달에도 별빛은 밝습니다. 구름이 끼더라도 별빛은 초롱초롱합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별빛을 느끼기 힘들 테지만, 우리 눈에 안 보인다 하더라도 별빛은 밝습니다.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느낍니다. 꿈은 눈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꿈은 마음으로 지어서 이룹니다. 삶을 눈앞에 있는 자동차나 재산이나 온갖 물건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삶은 오로지 마음으로 헤아리거나 돌아볼 뿐입니다.


.. 키 큰 미루나무 밑에 / 책가방으로 대신 줄 세워놓고 / 아이들이 고무줄을 넘는다 / 풋고추 딴다고 일찍 오라 했는데 / 고추 먹고 맴맴 늦겠네 폴짝 / 토끼풀도 뜯어야 하는데 / 복슬강아지 기다리겠네 폴짝 ..  (하굣길)


  자판기로 뽑지 않는 시 한 줄입니다. 자판기로 뽑을 수 없는 시 한 줄입니다. 저마다 즐겁게 꾸리거나 가꾼 삶에서 태어나는 시 한 줄입니다. 스스로 기쁘게 돌보거나 사랑한 삶에서 샘솟는 시 한 줄입니다.


  글쓰기 이론을 다룬 책을 읽거나 대학교를 다니거나 문학강좌를 들을 적에 시를 쓰지 않습니다. 저마다 도란도란 다스리는 삶에서 시 한 줄 살며시 태어납니다. 스스로 알콩달콩 보듬는 삶에서 시 한 줄 천천히 피어납니다.


  웃으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웃음을 시로 그립니다. 울면서 삶을 가꾸는 사람은 눈물을 시로 그립니다. 시는 웃음이기도 하고 눈물이기도 합니다. 웃음이기에 더 예쁘지 않습니다. 눈물이기에 더 아프지 않습니다.


..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 내가 즐거운 것은 / 그늘진 한세상이 갑자기 / 환해지는 것은 / 오래된 나무가 / 맑은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네 ..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풀씨는 그늘에서도 볕바른 데에서도 싹을 틔웁니다. 나무씨는 그늘에서도 볕바른 데에서도 뿌리를 내립니다. 작은 볕살을 먹으면서 풀꽃이 피어납니다. 살랑살랑 이는 봄바람을 마시면서 나무마다 겨울눈을 틔웁니다. 봄볕은 들판에 골고루 따순 기운을 나누어 줍니다. 봄바람은 나뭇가지를 고루 어루만지면서 봄꽃이 피어나도록 북돋웁니다.


  봄을 누리며 봄내음 물씬 나는 시를 씁니다. 봄을 기다리며 봄빛 꿈꾸는 시를 읽습니다. 봄을 바라며 봄노래를 부르고, 봄을 생각하며 봄길을 걷습니다. 마음속에 먼저 찾아오는 봄은 봄글 한 자락으로 깨어납니다. 4347.2.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