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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평점 :
시를 말하는 시 50
시와 서울마실
― 자명한 산책
황인숙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3.12.11.
서울로 마실을 나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나옵니다. 우리 집 곁님은 아직 많이 아픈 사람이라 함께 마실을 다니기 어렵습니다. 면소재지 우체국으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나오든,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마실을 나가든, 나는 언제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먼길에 두 아이와 함께하며 생각합니다. 곁님이 아이들과 함께 다니지 못하니 늘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곁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으면, 나로서는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는 즐거움을 못 누립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챙깁니다. 아이들 입을 옷을 꾸립니다. 큰 가방에는 아이들 짐이 그득합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읍에서 순천시로 갑니다. 순천에서 인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 아이는 버스역 맞이방에서 한참 뛰놉니다.
시외버스를 탄 아이들은 버스에서도 놉니다. 노래를 부르고 서로 얼크러집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날 무렵, 큰아이가 먼저 곯아떨어집니다. 이윽고 작은아이도 곯아떨어집니다. 두 아이는 서로서로 기대고, 나는 두 아이를 살며시 토닥이면서 재웁니다. 드디어 인천 버스역에 닿을 무렵 큰아이를 깨웁니다. 가방을 메고 작은아이를 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적에 큰아이가 일어나 주니 고맙습니다. 큰아이는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았어도 씩씩하게 걷습니다. 한손으로는 작은아이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큰아이 손을 잡습니다. 버스역 뒷간으로 가서 두 아이 쉬를 누입니다.
.. 빨간 신호등이 푸르러지도록 / 사람들은 무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 (무교동)
버스역에서 전철역으로 갑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갑니다. 두 아이는 계단을 타니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시골집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온갖 곳에 계단이 있습니다. 도시는 땅뙈기가 좁다면서 위로 높거나 아래로 깊습니다.
계단놀이를 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전철역으로 들어서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계단이로구나, 도시에서는 늘 계단투성이가 되니 사람들이 승강기를 타고 싶겠구나.
전철을 탑니다. 아이들과 전철을 탄 지 얼마나 되었나 돌아봅니다. 여섯 달쯤 되었던가. 큰아이는 손잡이를 안 잡고 서려 합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습니다. 큰아이는 전철이 서고 달릴 적마다 비틀비틀 춤을 춥니다. 춤을 추는 전철이 재미있다고 여깁니다. 두 아이는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너희한테는 어느 곳이나 놀이터가 되는구나.
.. 모진 소리를 들으면 /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 (모진 소리)
전철을 내립니다. 저녁바람이 셉니다. 삼월을 갓 지난 인천은 아직 쌀쌀합니다. 고흥에서는 따순 바람이 불지만, 인천에 봄바람이 불려면 아직 멀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흥집을 나설 적에 덥다면서 겉옷을 안 입으려 하던 아이들입니다. 겉옷을 챙길까 말까 하다가 두고 나왔습니다. 너희가 추위를 한번 겪어야 너희 겉옷을 스스로 챙기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가방에 겉옷을 챙길 수 있으나, 늘 다 챙기지는 말아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일곱 살 네 살 나이는 아직 많이 어리지만,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어떻게 지내야 한다고 여길까요. 내가 좀 짓궂게 구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번 마실길에서 큰아이 새 겉옷을 장만하자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두꺼운 겉옷은 있으나 바람막이 같은 겉옷은 없거든요. 시골에서는 아이들 옷을 새로 장만하거나 얻기 힘들거든요. 큰도시로 마실을 나온 김에 아이들 옷을 살펴보자고 생각했어요.
.. 구름이 / 가만히 있다. / 가생이가 하얗게 / 햇빛을 쪼이면서. / 졸리운 돌고래처럼 .. (르네 마그리트의 하늘)
인천 지하상가에서 큰아이 웃옷과 바지 한 벌을 새로 장만합니다. 큰아이는 처음에 ‘안 추워. 안 살래.’ 하고 얘기했지만, 토끼 무늬 들어간 웃옷과 고양이 무늬 들어간 바지를 바라보며 ‘토끼 예뻐. 고양이 좋아.’ 하고 말합니다.
큰아버지 사는 인천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튿날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전철길에서 큰아이는 큰아버지 보고 싶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며 웁니다. ‘얘야, 너 큰아버지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큰아버지하고는 안 놀았잖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나와서 운다고 돌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이모를 만나자고 했잖니. 너, 큰아버지도 보고 싶다 했지만 이모도 보고 싶다 했잖아. 이제는 이모를 보러 가자.’ 하고 말합니다. 큰아이는 눈물을 그치지 않습니다. 전철에서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를 오른어깨에 기대어 잠들도록 하고는 무릎에 큰아이를 앉힙니다. 등을 쓸면서 다독입니다. 큰아이는 품에 안긴 채 시무룩합니다.
저녁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이레만에 얼굴을 봅니다.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큰아버지를 잊습니다. 밤에 택시를 불러 일산으로 갑니다. 택시에서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안고 업으며 이모네 집에 가니, 깊이 잠들던 아이들이 이모와 이모부 목소리에 살몃 눈을 뜨더니 얼굴에 웃음빛이 흐릅니다. 녀석들, 좋니? 즐겁니?
.. 바람의 축축한 혀가 /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 슬며시 눈을 뜯고 /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 (젖은 혀, 마른 혀)
아이들 이모와 이모부는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섭니다. 두 분 모두 회사에 가서 일을 합니다. 아이들은 ‘빨리 와.’, ‘얼른 와.’ 하고 인사합니다.
이부자리를 갭니다. 커텐을 걷고 창문을 여니 바깥에서 소리가 흘러듭니다. 어떤 소리가 이곳으로 스며드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 건물에서 뭔가 복닥이는 소리, 웃집이나 아랫집에서 물을 쓰는 소리,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들이 골고루 들어옵니다.
삼월이 무르익는 일산인데, 멧새나 들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없습니다. 개구리가 깨어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풀벌레가 고개를 내미는 소리는 없습니다. 나비가 춤을 추거나 벌이 나는 소리는 없습니다. 봄바람 따라 봄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들꽃이 봄맞이를 하는 노래는 없습니다. 천천히 터지는 꽃망울이나 잎망울 속삭임은 없습니다.
이 도시에는 어떤 소리가 있을까요. 이 도시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노래를 나눌까요.
.. 고양이가 운다 / 자기 울음에 스스로 반한 듯 / 부드럽게 / 고양이가 길게 울어서 / 고양이처럼 밤은 / 부드럽고 까실까실한 혀로 / 고양이를 핥고 / 그래서 고양이가 또 운다 .. (밤과 고양이)
황인숙 님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2003)을 읽습니다. 황인숙 님이 누린 나들이를 떠올립니다. 황인숙 님이 눈으로 바라보고 귀로 들으며 살결로 느낀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황인숙 님이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맞이한 삶은 어떤 빛인가 곱씹습니다. 황인숙 님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춤을 추는 하루를 누릴까 하고 생각합니다.
.. 눈을 감고 담쟁이는 / 한껏 사지를 뻗고 담쟁이는 / 온몸으로 모든 걸 음미한다 / 달콤함, 부드러움, 축축함, 서늘함, / 살랑걸림, 쓸쓸함, 따분함, 고요함, / 따사로움, 메마름, 간지러움, 즐거움 .. (담쟁이)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길을 걷는 사람이 있어요. 콧노래와 함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걸레질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삶에 노래는 어느 만큼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노래가 어떤 빛깔과 무늬로 드리울까요. 우리 삶에서 노래는 얼마나 곱게 빛날까요.
서울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꽃노래를 부르며 나들이를 즐길 수 있기를 빕니다. 회사원으로 지내든 집에서 살림을 가꾸든 다 함께 꽃춤을 추면서 웃을 수 있기를 빕니다. 시 한 줄은 한 발자국입니다. 시 두 줄은 두 발자국입니다. 시 석 줄은 세 발자국입니다. 천천히 거닐듯이 천천히 시를 씁니다. 즐겁게 걷듯이 즐겁게 시를 씁니다. 바쁜 사람은 바쁜 시를 쓰고, 아픈 사람은 아픈 시를 씁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시를 씁니다.
서울 낮하늘도 파랗고, 서울 밤하늘도 까맣습니다. 서울 하늘에도 구름이 흐르고, 서울 보도블럭 틈바구니마다 갖가지 봄풀이 돋으며 푸른 숨결 나누어 줍니다. 4347.3.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