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내용 창비시선 329
조정인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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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1

 


시와 꽃잎
― 장미의 내용
 조정인 글
 창비 펴냄, 2011.4.20.

 


  이틀 동안 봄비가 내립니다. 우리 집 뒤꼍 매화나무에는 아주 보드라운 꽃잎이 하나둘 벌어집니다. 아직 꽃망울이 조그마한 가지가 있고, 어느덧 활짝 꽃잎을 벌린 가지가 있습니다.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두 한 나무에서 뻗는 가지요, 다들 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입니다.


  빗방울을 머금은 매화꽃잎을 살살 만집니다. 예쁘구나 곱구나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쓰다듬습니다. 사진으로 몇 장 담고, 눈으로 한참 들여다봅니다.


  해마다 봄이면 고운 꽃잎을 드리우는 매화나무는 아주 상냥하며 반가운 동무입니다. 매화나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나무도 몹시 착하며 즐거운 동무입니다. 나무는 저마다 다른 잎사귀를 내놓고 꽃망울을 터뜨리며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는 저마다 씩씩하게 가지를 뻗고 줄기를 올리며 푸른 숨결을 나누어 줍니다.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 더 살았다 //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  (문신)


  마당 한쪽에는 노랑붓꽃이 함께 살아갑니다. 노랑붓꽃은 알뿌리로 새 줄기를 곧게 뻗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시든 줄기를 툭툭 끊을 수 있지만, 굳이 사람이 시든 줄기를 끊지 않아도 됩니다. 새 줄기가 올라오면서 시든 줄기는 저절로 끊어집니다. 시든 줄기는 봄이 무르익으면서 어느새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는 여름을 앞두고 살살 꽃망울 맺고 꽃봉오리 터집니다.


  노랑붓꽃은 꽃잎이 노랗게 빛납니다. 꽃을 보며 참 곱네 하는 소리로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한 해에 꽃이 달린 날은 얼마 안 되어요. 꽃을 보는 날은 짧고, 꽃이 없이 푸른 줄기만 달린 날이 훨씬 깁니다.


  가만히 보면, 다른 꽃도 이와 비슷해요. 꽃송이가 오래도록 달리는 일이 드뭅니다. 꽃이 피기까지 오래 걸리고,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잎사귀로 지냅니다. 꽃이 지고 열매나 씨앗이 맺으면, 씨앗이 터지고 나서 천천히 시들어요. 이른봄부터 돋는 봄풀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거의 다 말라서 죽어요.


.. 고양이가 쓰레기봉지를 뜯다가, 세워둔 트럭 밑으로 / 몸을 숨긴다 바닥에 라면발이 흘러나와 있다 어둠속 / 겁먹은 허기가 고개만 돌려 내 쪽을 살핀다 ..  (탁발)


  꽃을 보려고 꽃씨를 심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이 곱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꽃은 따로 꽃집에서 사고팔곤 합니다. 틀림없이 꽃은 곱습니다. 고운 꽃이 피는 목숨은 풀이나 나무입니다. 풀이나 나무는 고운 꽃을 피우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깁니다. 그러면,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려고 살아가는 목숨일까요. 풀이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기는 보람 하나로 살아갈까요.


  나뭇잎은 으레 봄부터 가을까지 매달립니다. 늘푸른나무는 네 철 내내 잎사귀를 매답니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가 있어 나무다움을 뽐냅니다. 풀 또한 푸른 잎이 있어 풀다움을 자랑해요.


.. 자귀나무 분홍꽃은 여름저녁 꽃 // 자는 거야? 눈 좀 떠봐 / 아파? // 나무는 대답 대신 느리게 꽃을 흘렸다 망막을 스치는 꽃술을 따라 ..  (어둠이 성의처럼 내려졌다)


  매화꽃이 피는 둘레에 제비꽃이 번집니다. 우리 집 쑥밭 한쪽에 제비꽃 네 송이가 한꺼번에 터집니다. 별꽃이나 봄까지꽃은 일찌감치 터졌습니다. 코딱지나물꽃도 고운 빛으로 함께 터졌고, 냉이꽃과 꽃마리꽃도 함께 터졌어요.


  이웃집 밭에는 유채꽃이 오릅니다. 우리 집 밭에도 갓꽃이 곧 피리라 생각합니다. 동백꽃이 흐드러진 데가 있으나, 우리 집처럼 동백꽃이 느즈막하게 흐드러지는 데가 있습니다. 다 같은 꽃이면서 다 다르게 피어나고, 다 다른 꽃이면서 다 같은 꽃내음으로 시골마을과 시골집을 포근히 감쌉니다.


  조정인 님 시집 《장미의 내용》(창비,2011)을 읽으며 꽃잎을 헤아립니다. 꽃잎마다 다 다른 이야기가 서리고, 꽃잎마다 다 다른 빛이 감돕니다. 같은 매화꽃이더라도 다 다른 가지에서 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피어납니다. 어느 꽃은 해를 마주보고, 어느 꽃은 해와 등집니다. 어느 꽃은 위를 바라보고 어느 꽃은 아래를 바라봐요. 어느 꽃은 가지 끝에 매달리고, 어느 꽃은 줄기 가운데에 매달립니다.


.. 밥물이 끓는다 눈보라가 끓는다 능선이 솟는다 꽃잎으로 잦혀진다 ..  (어머니의 나무주걱)


  직박구리가 매화나무 끝에 앉습니다. 매화나무 굵은 가지도 아니고 퍽 가느다란 가지에 앉습니다. 참새나 딱새나 박새는 워낙 조그마한 새이니 가지 끝에 앉을 만하다지만, 직박구리는 꽤 큰 새인데 가지 끝에 잘 앉습니다.


  어느 날 보면, 까치나 까마귀도 매화나무 가지 끝에 앉아요. 큰 새가 앉으면 처음에는 낭창낭창 가지가 흔들리지만,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요. 작은 새도 큰 새도 가지 끝에서 즐겁게 노래합니다.


  어떤 힘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몸일까 궁금합니다. 어떤 넋일는지 궁금합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앉으면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는 새는 어떤 숨결로 나무를 사귀며 아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이 읽고 쓰는 시는 어떤 숨결이 될까요. 가지를 낭창낭창 흔드는 노래일까요. 가는 가지 끝에서도 굵은 가지 한복판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노래일까요.


.. 집을 비운 이틀 사이 히아씬스 구근이 실뿌리를 내렸다 글라스 가득 빈집이 내쉰 숨의 자취가 얼키설키 들어섰다 ..  (히아씬스와 나와 네안데르탈인의 원반 던지기)


  집을 비우고 나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뿌리에 실뿌리가 내리는지 안 내리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늘 집에 있더라도 마주하지 않으면 알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집을 비우더라도 마음속으로 떠올리거나 그리면, 아하 오늘쯤 실뿌리가 퍼지겠네 하고 느낍니다. 늘 집에 있으면서 상냥하게 바라보고 따사롭게 보듬으면, 조그마한 알뿌리에 넉넉하게 사랑이 깃들면서 예쁜 싹이 틉니다.


  시 한 줄은 노래하면서 씁니다. 시 한 줄은 꽃잎처럼 피어납니다. 시 한 줄은 웃음꽃처럼 자랍니다. 시 한 줄은 사랑으로 맺는 씨앗 한 톨입니다. 4347.3.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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