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4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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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7



이끼가 살 수 있는 바위와 바람을 불러

― 사과를 내밀다

 맹문재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11.21. 8000원



  요즈음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내가 어릴 적에는 능금을 나무로 짠 궤짝에 담아서 팔았고, 능금궤짝에는 겨가 가득 찼어요. 요즈음은 저온창고에서 능금을 오래 건사한다지만, 예전에는 으레 겨에 묻어서 오래 건사했어요. 능금뿐 아니라 배도 겨에 묻어서 다루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고, 이웃 어른들도 으레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이었어요.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능금궤짝을 장만해서 집에 들여서 먹을 적에는 집집마다 ‘텃밭’이나 ‘꽃그릇’에 겨를 뿌렸지요. 좋은 거름 구실을 했어요.


  겨로 가득한 궤짝에 손을 넣어 능금 한 알을 꺼내면 퍽 즐거웠습니다. 손에 닿는 겨 느낌이나 소리가 재미있고, 능금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으면서 재미있어요. 모든 열매를 고이 아끼던 지난날에는 능금 한 알뿐 아니라 한 조각조차 몹시 알뜰히 여겼습니다.



당숙이 나를 한 여자 앞에 앉혔다 / 소위 큰손이라는 이였다 /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있기에 / 이번 일을 잘하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 당숙은 시인을 모르면서 / 조카가 대단한 글을 쓴다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다고 / 몇 다리 건너 아는 여자에게까지 / 데리고 온 것이다 (시인)


이모님 댁에 왔다가 시골로 가시려는 어머니를 붙들었지만 / 상 한번 차리지 못했다 / 백 년 만에 처음이라고 텔레비전이 떠들어대듯 / 눈이 너무 오기도 했지만 / 직장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느라고 / 외식 한번 못 했다 (어머니를 울리다)



  맹문재 님이 빚은 시집 《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2012)를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에 마주한 능금궤짝을 떠올립니다. 손으로 짓는 살림을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하던 지난날을 되새기고, 손으로 가꾸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쉽게 만나던 지난날을 그려 봅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문명에서는 손으로 짓거나 가꾸는 흐름이 옅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문명은 그냥 문명이 아니라 기계문명인 셈이라고 할까요. 이와 달리 지난날은 손으로 짓는 살림인 ‘손살림’이었구나 싶어요.



농협장 선거에 돈이 뿌려진다고 이르신다 / 기름값이 너무 비싸 보일러를 뜯어야겠다고 이르신다 / 영달네가 자식 놈에게 맞았다고 이르신다 / 내가 쉬는 일요일 저녁에 이르신다 / 엊그제 이른 일을 또 이르신다 / 여든 살 아이가 되어 큰아들에게 이르신다 (아버지가 이르신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 한번 어기고 싶었다 (사과를 내밀다)



  기계문명이 널리 퍼지면서 ‘손빨래’나 ‘손글씨’라는 말이 새로 생기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으레 손으로 하거나 나누던 일이 이제는 손으로 거의 안 하는 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살림’만 잊히거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손일도 손놀이도 모두 잊히거나 스러집니다. 이러는 동안 손수 짓는 이야기도 잊히거나 스러지면서, 남이 지은 이야기가 널리 퍼집니다. 내가 손수 지은 집에서 살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집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내가 손수 지은 옷을 입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집이나 옷도 ‘남이 손으로 짓’지 않기 마련이에요. 기계를 써서 한꺼번에 똑같은 꼴로 엄청나게 찍어내요.



울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당숙이 / 작업반장 좀 혼내달라신다 / 폭행으로 목을 다쳐 육 주 진단이 나왔지만 / 본 사람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 근무하기 힘든 곳만 보낸다고 이르신다 (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



  시집 《사과를 내밀다》에 흐르는 이야기는 모두 맹문재 님이 손수 겪은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입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삶이 아닙니다. 그저 맹문재 님이 나날이 부대끼거나 마주하는 삶입니다. 더 좋거나 덜 좋은 살림이 아닙니다. 그예 맹문재 님이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는 살림입니다.


  우리가 기계문명을 누리더라도 손살림을 잊지 않을 수 있으면, 우리는 우리 사랑을 손수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기계처럼 글쓰기를 익혀서 멋져 보이는 글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다른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손길로 저마다 다른 살림을 지으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어요.


  내가 누리는 삶이 너하고 달라서, 내가 쓰는 글이 너하고 달라요. 네가 보내는 하루가 나하고 달라서, 네가 쓰는 시 한 줄이 내가 쓰는 시 한 줄하고 달라요.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불렀고 바위를 불렀고 옹달샘을 불렀다 풀을 불렀고 나무를 불렀고 바람을 불렀다 꽃을 불렀고 구름을 불렀고 햇살을 불렀다 물안개를 불렀고 새소리를 불렀고 물고기를 불렀다 (이끼를 담보로 잡히다)


부치려고 하는데 / 손안에 없다 // 집에 두고 왔는가? / 길에 흘렸는가? // 돌아가며 찾아보지만 / 어디에도 없다 // 안타까워 다시 쓰려는데 / 바람이 손을 잡는다 (오십 세)



  쉰 살 문턱을 넘어서면서 삶을 새삼스레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는 시집 《사과를 내밀다》입니다. 앞으로 맹문재 님이 걸어갈 예순 살 문턱 언저리에서는 그때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가꾸며 스스로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시 한 줄을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돌아보면서, 나는 노린재와 민들레와 제비가 함께 살 수 있는 바람을 불러 봅니다. 꽃과 구름과 햇살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헤아리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하고 곁님하고 나란히 미리내를 부를 수 있는 시골살림을 불러 봅니다.


  손수 지은 밥을 손수 밥상으로 차립니다. 손수 거둔 남새를 손수 갈무리해서 즐깁니다. 들마실을 할 적에 아이들이 으레 저희 작은 손을 내밉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커다란 손을 하나씩 뻗습니다. 두 아이를 왼쪽하고 오른쪽에 나란히 두고 서로 손을 잡으며 들바람을 쐽니다. 나긋나긋 나풀나풀 홀가분한 손살림은 손빛이 되고 손노래가 되고 손사랑이 됩니다. 2016.8.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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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정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3
김선향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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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8



네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 볼까?

― 여자의 정면

 김선향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6.6.27. 8000원



  나는 사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사내라는 몸을 입었으니 스물을 갓 넘길 무렵 군대라는 곳에 갔습니다. 군대라는 곳에 간 사내이기에 두 손에 총을 쥐면서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여겨서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주먹이나 발길로 때려서 죽이는 재주’를 익히는 솜씨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군대에 있어야 하던 사내로서 그때에 늘 생각해 보았어요. 왜 이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운 멧골에 막사를 세우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짓을 남녘이나 북녘 모두 바보스레 해야 할까 하고요. 남·북녘은 서로 돈이 얼마나 많기에 전쟁무기와 군부대에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부어야 할까 하고요.



엄마, 그거 알아? 난 노점상에서 떨이로 사온 귤 대신 고디바초콜릿이 먹고 싶었어. 단화를 신고 온종일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 같은 여자, 생리휴가도 없이 서서 피 흘리는 가장은 사절이야. (안녕, 엄마)


그녀는 늘 옆모습만 보여줬지 / 왼쪽이 웃는 듯해서 / 오른쪽을 보면 울고 있었어 / 왼쪽은 나를 사랑했고 / 오른쪽은 나를 증오하는 것 같았지 (그녀의 정면)



  흔히 ‘군부대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나라에 군부대가 없으면 저쪽에서 이쪽을 얕보고 쳐들어오리라 여기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한테도 고스란히 이어져요. 아이들은 어릴 적에 ‘호신술’을 익혀야 합니다. 골목마다 감시카메라를 달아야 합니다. 이웃사람을 ‘이웃’이 아닌 ‘수상한 사람’으로 바라보도록 길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렇게 온 사회에 전쟁이나 감시라고 하는 바람이 불도록 하면서, 막상 사회는 그리 평화스럽거나 아늑하지는 못합니다. 경찰이나 군대가 있으니 ‘이만큼 평화롭다’고 여길 분도 있을 텐데, 막상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웃사랑’이나 ‘마을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젊은 사내는 군대에서 ‘이웃을 나쁜 놈으로 여겨서 때려죽이는 재주’에 길들어야 하고요.


  평화를 가꾸는 평화교육이 아니라, 전쟁무기를 남보다 더 갖추어서 남을 윽박지르거나 꺾어누르는 ‘전쟁교육’을 시키는 사회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치·사회는 새삼스레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조용하고 한갓지면서 평화로운 시골마을에 ‘사드’ 같은 무시무시한 미사일을 들이겠다는 정책을 내놓습니다.



자장 자장 우리 엄마 자장 자장 잘도 잔다 // 기차 타고 전철 타고 마을버스 타고 / 양손에 어깨에 들고 메고 와서는 / 문전부터 딸년에게 핀잔만 들었구려 (엄마를 위한 자장가)


동네 오빠 아는 오빠 친구의 오빠 / 신세대들은 남편에게도 오빠라 부른다지 / 쥐꼬리 월급 어디에 다 썼냐고 잔소리해대는 남편 오빠 / 결혼하더니 남이 되어버린 피붙이 오빠 / 노래를 기차게 잘하는 오빠 / 오입질에 선수인 오빠 /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는 오빠 (오빠들)



  김선향 님이 빚은 시집 《여자의 정면》(실천문학사,2016)을 읽습니다. 이 시집은 오롯이 ‘가시내(여자)’ 목소리와 눈길과 숨결이 흐릅니다. 사내(남자)한테 눌리거나 밟히거나 치이거나 차이거나 꺾이거나 눌리거나 죽는 가시내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르는 가장 큰 금이라면, 가시내는 새로운 목숨(아기)을 몸소 낳습니다. 사내는 아기를 낳는 씨앗을 몸에 건사하기는 하지만, 몸소 새로운 목숨을 낳지 못해요. 가시내는 몸소 아기를 낳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다면, 사내는 먼발치에서 마치 남 일처럼 구경하거나 아예 모르기까지 하기 일쑤입니다. 이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사내는 젊은 나이에 군부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고,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잔뜩 억눌린 몸으로 ‘성욕해소’에 마음을 빼앗기지요.


  군부대 둘레에 있는 술집과 방석집을 떠올려 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조선 가시내를 비롯해서 중국과 아시아 가시내를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사로잡아서 노리개로 삼은 짓을 떠올려 봅니다. 전쟁무기를 손에 쥔 사내는 마음에 평화를 생각하거나 키우지 못해요.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군사훈련을 받는 사내는 평화롭거나 사랑스러운 마을을 즐겁게 짓는 길에 힘을 쓰지 못해요.



한국에 온 지 이태가 되어서야 /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프엉 씨 //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 호치민, 버스, 여덟 시간, 까마우, 더워 // 공부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열 개 남짓 / 하지만 모르는 게 없는 생선 이름들 (붉은 꽃, 흰 꽃)



  북녘에서 우리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는데 남녘에서도 북녘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야 하지 않느냐고 여길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아이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지 싶어요. 두 아이가 뭔가 어떤 일이 있어서 틀어져서 식식거리며 노려본다고 해 보셔요. 이 두 아이더러, “자, 신나게 싸워! 한 놈이 자빠져서 죽을 때까지 때려눕혀!” 하고 말해도 될까요?


  남녘뿐 아니라 북녘에서도 군부대를 줄이고 전쟁무기를 없애도록 정치 우두머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슬기로운 길을 찾은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한테 이런 전쟁무기가 있으니 우리한테도 저런 전쟁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전쟁무기에 들이붓는 짓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우리가 피땀과 같이 내놓은 돈(세금)은 바로 우리 삶터를 가꾸고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에 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가르치는 자리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아프고 슬픈 이웃을 따스히 보살피면서 북돋우는 길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아름다운 마을이 되고 아름다운 숲이 되며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곳에 피땀 같은 돈을 써야지요.



― 피임 같은 건 여자가 알아서 해야지 / ―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 // 흡반처럼 달라붙는 말들을 뜯어내 / 쓰레기통에 처넣지 못한 채 / 비디오방에 갔다 // 거기서 차승원, 설경구랑 놀았다 / 눈물이 쏟 빠지도록 웃다가 / 간이소파에 파묻혀 / 웅크리고 잠을 잤다 (도둑고양이)


너무 추워, 엄마. / 봄은 어디에 있어요? / 세 살 딸아이가 묻는다 (봄은 어디에)



  시집 《여자의 정면》을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읽는 모습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이 나라에서 이 땅에서 이 지구라는 별에서, 수많은 가시내가 사내한테 밟히고 눌리고 차이고 꺾이고 얻어맞고 노리개로 뒹굴어야 하던 발자국을 이 조그마한 시집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읽는 모습을 곰곰이 그려 봅니다.


  전쟁무기는 멈추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닌 평화로 나아갈 노릇입니다. 싸움은 그쳐야 합니다. 싸움이 아닌 어깨동무로 거듭날 노릇입니다. 참된 사랑이 되도록, 착한 이웃이 되도록, 고운 살림이 되도록, 이제 우리 보금자리하고 마을을 바라볼 때입니다. 내 이웃 코앞에 미사일을 들이대는 바보스러운 짓은 이처럼 똑같이 바보스러운 짓으로 우리한테 돌아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으로 돌아오고, 오로지 평화만이 평화로 돌고 돕니다. 2016.7.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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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목록 창비시선 381
김희업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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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9



바람을 마신 숨결을 내 몸으로

― 비의 목록

 김희업 글

 창비 펴냄, 2014.11.10.



  빵을 반죽하면서 효모를 넣어야 부푸는데, 나는 이제껏 몇 번이나 이를 빠뜨립니다. 왜 이렇게 효모를 빠뜨리는가 하고 돌아보면, 나는 아직 빵굽기가 몸에 익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마음을 기울여서 반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깨닫습니다. 국을 끓이면서 마치 간을 하나도 안 한 짓이랑 똑같다고 할 테니까요.



안 팔리는 꽃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 수직으로 뻗다 지루하면 수평으로 서서히 방향을 튼다 / 아주 조금씩 자라서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 주인 속 타는 줄 모르고 /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꽃들 (출생의 비밀)


잠긴 문 / 들끓는 어둠 / 맡긴 시간이 부패할 때까지 / 밖은 모를 것이다 / 누군가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물품보관함)



  코앞에 있는 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코앞에 꽃이 있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지 못합니다. 눈앞에 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앞에 아이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활짝 웃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합니다.


  김희업 님 시집 《비의 목록》(창비,2014)을 읽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삶을 바라보면서 느낀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인 둘레에 있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짓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전혁림미술관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 내 앞을 가로질러 가는 청바지 차림의 사내 / 페인트가 위아래로 묻어 있어 페인트공임을 알 수 있었다 (통영 2)


소녀의 공중비행을 우러러보던 지상의 유일한 목격자 / 화단의 꽃이 / 죽음을 애도하는지 / 고개를 반쯤 숙였다 /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비행법)



  《비의 목록》을 쓴 시인은 ‘화가’와 ‘페인트공’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고 묻습니다. 미술관에 깃들어야 ‘그림’이 된다면, 미술관에 깃들지 못한 채 페인트를 바르는 일을 하는 일꾼은 ‘무엇’을 하는 셈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숨을 끊은 어린 가시내를 떠올리면서, 이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을 꽃이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시인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 만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배우거나 알거나 깨닫는 하루를 누릴까요.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 바람이 풀 위를 밟고 지날 때마다 / 풀이 한입 가득한 소 / 그런 소를 덥석 먹어치워 / 풀의 피가 몸속 푸릇푸릇한 그는 과연 육식주의자인가?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당신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 어지간해서 나올 줄을 모른다 / 관 속의 당신 또한 나올 생각을 않는다 / 포근했던 호주머니 속 한때의 동전처럼 (호주머니)



  고기를 먹으면 고기가 내 몸이 됩니다. 한때 고기였던 짐승은 거의 풀을 먹던 짐승이었으니, 풀을 먹는 짐승을 이룬 살점은 거의 모두 풀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풀짐승 가운데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은 드물어요. 예부터 소는 풀을 먹었지만, 오늘날 소는 풀이 아닌 사료를 먹지요. 짚조차 못 먹고 항생제를 먹어요. 그러면 ‘사료 먹는 소’를 먹는 사람은 ‘풀로 이룬 살점’이 아닌 ‘사료로 이룬 살점’을 먹는 셈이 될까요?


  문득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이 모든 목숨은 이 별에서 다 같이 살면서 모두 똑같이 바람을 마셔요. 바람을 마시지 않는 풀이나 짐승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풀밥을 먹거나 고기밥을 먹을 적에 ‘잎이나 살점이 된 바람’을 나란히 먹는 셈이라고도 할 만해요. 깻잎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돼지 살점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맞아들여요.


  이리하여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으로 마음을 이룹니다. 나는 아이들이 오롯이 사랑을 물려받아 즐겁게 웃는 숨결이 되도록 살림을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 눈에 따라, 짓고 가꾸는 손에 따라, 삶을 돌보고 살림을 추스르는 생각에 따라, 오늘 하루는 늘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2016.7.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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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는 나의 힘 창비시선 281
황규관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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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8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그늘이 품어 주네
―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글
 창비 펴냄, 2007.12.14.

 

  나무가 선 곳에 새가 찾아듭니다. 새가 찾아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애벌레가 있습니다. 애벌레는 새한테 잡히기도 하지만, 새가 알아채지 못해서 씩씩하게 살아남기도 합니다. 새한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애벌레는 나비로 깨어나기도 하고 나방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나비나 나방은 바지런하면서 기쁜 날갯짓으로 꽃을 찾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꾸면서 잠만 자느라 몹시 배고프거든요. 이 꽃 저 꽃 수없이 찾아들며 꽃가루하고 꿀을 먹는 동안 나비나 나방은 어느새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가만히 보면 애벌레가 자라도록 해 준 나무는 나비나 나방이 깨어난 뒤에 즐겁게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어서 천천히 열매를 맺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나는 이승의 어떤 탐닉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 살이 얼었던 마음을 녹인다 / 살이 굳어버린 영혼을 살린다 / 강물 같은 살이 / 달빛 같은 살이 (흐르는 살)

 

아내가 사온 쌀은 여주쌀 /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사만팔천원이나 한다 //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깻잎무침 오천원어치 / 구운 김 삼천원어치 등등, 이렇게 / 나는 금방 장에서 돌아와 쌀을 푼다 (쌀을 푸다)

  황규관 님이 빚은 시집 《패배는 나의 힘》(창비,2007)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황규관 님으로서는 이녁 삶에 ‘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일터에서도 지고, 곁님한테도 지고, 아이들한테도 지고, 또 술벗한테도 지고, 여기에서도 지고 저기에서도 지고, 더욱이 어머니 병문안을 다녀오며 병원삯을 변변히 보태지 못하는 살림에도 진다고 해요.


  어제도 지고 오늘도 지는 바람에 앞으로 다가올 날에도 자꾸 지겠구나 하고 여긴다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지고 자꾸 지면서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 씩씩하지 못한 몸짓이라 하더라도 다시 아침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엽니다. 새 일자리를 찾으려고 기운을 내어 다시 이력서를 쓰고, 먼지를 수북히 먹은 자전거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 꿈을 되새깁니다.

왜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며 사랑을 해야 하나 / 봄비 그친 오늘 아침엔 / 마른 가지마다 어린잎이 입도 안 가리고 웃었다 / 그게 우주고 또 우리의 생활은 거기서 피어나는 것 (완전한 슬픔)

 

아침에 일어나 다시 뒷산을 걸어도 / 떡갈나무야, 나는 아직 아는 바가 없구나 / 분노보다도 슬픔에 익숙해진 이후라야 / 혼자 길을 갈 수 있을까  가난, 사랑, 바람, 잎사귀, 자벌레 / 이런 뭉게구름 같은 말들에 마음이 닿는지 / 옮겨적은 말씀이 가벼웁다 (금강경을 옮겨적다)


  새한테 잡아먹힌 애벌레는 얼핏 보기에 ‘삶에 진’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애벌레는 어느 모로 본다면 ‘새와 한몸이 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먹은 밥 한 그릇도 이와 같이 바라볼 수 있거든요. 내 몸이 되어 준 모든 밥, 모든 목숨, 모든 숨결, 모든 넋을 돌아본다면, 내 몸을 이루는 수많은 목숨과 숨결이란 언제나 나를 새롭게 이루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여길 만하다고 느낍니다.


아파트 복도에 자전거가 기대 서 있다 / 큰애가 내리자 작은애가 한때 / 즐겁게 달렸던 낡은 자전거 / 중학교 삼년, 자전거만 타면 /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 품어주고, (품어야 산다)

  뙤약볕에 지친 할머니를 느티나무 그늘이 지켜 주었다고 합니다. 지고 또 지는 삶에 지친 황규관 님한테도 이녁을 따사롭거나 시원하거나 너그럽거나 넉넉하게 지켜 주거나 돌보아 주는 느티나무 그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벚나무 그늘이나 구름 그늘이 있을는지 몰라요. 감나무 그늘이 있을는지 모르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기쁘게 그늘을 드리워 줄 수 있을 테고요.


  들판이나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비와 나방이 씩씩하게 깨어납니다. 조그맣고 수수한 빛깔인 나비와 나방도, 알록달록 곱거나 눈부신 무늬를 갖춘 나비와 나방도, 저마다 즐겁게 바람을 가르면서 아침을 엽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나무를 찾아듭니다. 우리도 저마다 새롭게 삶을 이루고 살림을 지으며 사랑을 꿈꾸면서 아침을 엽니다. 지고 지고 거듭 지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란 바로 우리 마음속에 꿈꾸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새처럼 노래하고 나비처럼 춤추는 마음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2016.7.11.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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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441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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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7



오래된 책을 잃어버린 시인

― 슬픔의 뼈대

 곽효환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1.10. 8000원



  똑같은 일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지만,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단한 일이 됩니다.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픈 일이 되지만,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프지 않은 일이 되어요.


  꽃이 지기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꽃이 지기에 ‘꽃이 지는구나’ 하고 여기기만 할 수 있어요. 꽃이 져서 더 꽃을 못 본다고 슬퍼할 만한데, 꽃이 지니 이제 열매를 맺고 씨앗이 새로 나오는구나 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한 사람을 보냈다 / 오랫동안 사랑했으나 /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부비고 / 더러는 행이었고 더러는 불행이었던 /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던 / 그를 보내고 오랫동안 아팠다 (한 사람을 보내다)


21세기가 열리고 10년이 더 지났어도 / 개발의 꿈은 그칠 줄 몰라 / 가장 넓은 길을 뒤로하고 광장이 된 광화문 세종로 / 길은 막히고 소통은 뒤엉켜 있어도 이벤트는 계속되지 (피맛길을 보내다)



  곽효환 님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2014)를 읽습니다. 살면서 슬픔으로 느끼거나 바라볼 만한 뼈대를 놓고 찬찬히 말을 엮은 노래가 흐릅니다. 틀림없이 슬픔이 되고, 틀림없이 슬픈 일이 되며, 틀림없이 슬픈 이야기가 되는 노래가 흐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슬픔은 늘 슬픔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모로 본다면 기쁨으로 볼 수 있고,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요. 슬플 적에 눈물이 날 만하지만, 슬프면서도 웃음으로 슬픔을 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날 보고 웃네요 / 찻잔 둘 덩그러니 놓여 있는 /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 오래전에 그랬듯이 / 당신, 여전히 날 보고 웃네요 / 어느새 창밖에는 눈발 가득하고요 (웃는 당신)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을 모릅니다. 이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거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글을 모를 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로 엮은 책’을 읽지 못하니, ‘글책 지식’은 없거나 얕아요. 다만, 글책 지식이 없더라도 ‘삶책 이야기’를 품기 마련입니다. 〈오래된 책〉이라는 시에서 나오듯이 곽효환 님 할머니가 물려주었다고 하는 ‘사람책’이나 ‘삶책’은 글이 아니라 삶을 지은 사람으로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아로새긴 책이에요.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오래된 책)



  글로 담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글로 새롭게 빚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는 도무지 빚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모든 이야기를 글로 빚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돌보며 누리는 살림을 모조리 글로 옮길 까닭이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구태여 몽땅 글로 옮겨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을 가꾸는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글이나 책이라는 꼴로 따로 묶이’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튼튼하게 깃들기 때문입니다.



바람 깊은 밤, 어느 골목 어귀 / 불 꺼진 반지층 창문을 본다 / 외등 아래 앙상한 몸통을 드러낸 플라타너스에게 / 무성했던 잎새의 기억을 물었지만 그네는 답이 없다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나뭇잎을 읽고 장마를 읽습니다. 옥수수를 읽고 콩꼬투리를 읽습니다. 쑥불을 읽고 구름을 읽습니다. 여름바람을 읽고 여름볕을 읽습니다. 장마철에는 빨래에서 퀴퀴한 냄새가 흐르는구나 하고 읽습니다. 얼른 이 비가 그치고 다시 해님을 마주하면서 옷가지를 보송보송 말리면서 햇볕내음을 먹이고 싶다는 꿈을 그립니다. 비와 해와 바람이 모두 싱그러이 어우러지면서 알맞게 함께 있는 삶일 때에 넉넉하며 즐겁다는 대목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남다른 말이 아닌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남달라 보이지 않더라도 이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자라납니다. 시집 《슬픔의 뼈대》가 조금 더 수수한 자리에서 조금 더 투박한 노래여도 재미났을 텐데 싶으나, 이 모습도 이 모습대로 재미난 노래일 만하겠지요.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시인인데,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으면 이제 새로운 책을 지어서 이녁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으면 됩니다. 2016.7.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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