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441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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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7



오래된 책을 잃어버린 시인

― 슬픔의 뼈대

 곽효환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1.10. 8000원



  똑같은 일을 두고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지만, 이 일이 누군가한테는 대단한 일이 됩니다.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픈 일이 되지만, 저 일이 누군가한테는 슬프지 않은 일이 되어요.


  꽃이 지기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꽃이 지기에 ‘꽃이 지는구나’ 하고 여기기만 할 수 있어요. 꽃이 져서 더 꽃을 못 본다고 슬퍼할 만한데, 꽃이 지니 이제 열매를 맺고 씨앗이 새로 나오는구나 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 한 사람을 보냈다 / 오랫동안 사랑했으나 /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부비고 / 더러는 행이었고 더러는 불행이었던 /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던 / 그를 보내고 오랫동안 아팠다 (한 사람을 보내다)


21세기가 열리고 10년이 더 지났어도 / 개발의 꿈은 그칠 줄 몰라 / 가장 넓은 길을 뒤로하고 광장이 된 광화문 세종로 / 길은 막히고 소통은 뒤엉켜 있어도 이벤트는 계속되지 (피맛길을 보내다)



  곽효환 님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2014)를 읽습니다. 살면서 슬픔으로 느끼거나 바라볼 만한 뼈대를 놓고 찬찬히 말을 엮은 노래가 흐릅니다. 틀림없이 슬픔이 되고, 틀림없이 슬픈 일이 되며, 틀림없이 슬픈 이야기가 되는 노래가 흐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슬픔은 늘 슬픔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모로 본다면 기쁨으로 볼 수 있고,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요. 슬플 적에 눈물이 날 만하지만, 슬프면서도 웃음으로 슬픔을 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날 보고 웃네요 / 찻잔 둘 덩그러니 놓여 있는 /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 오래전에 그랬듯이 / 당신, 여전히 날 보고 웃네요 / 어느새 창밖에는 눈발 가득하고요 (웃는 당신)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을 모릅니다. 이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거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글을 모를 뿐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글로 엮은 책’을 읽지 못하니, ‘글책 지식’은 없거나 얕아요. 다만, 글책 지식이 없더라도 ‘삶책 이야기’를 품기 마련입니다. 〈오래된 책〉이라는 시에서 나오듯이 곽효환 님 할머니가 물려주었다고 하는 ‘사람책’이나 ‘삶책’은 글이 아니라 삶을 지은 사람으로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아로새긴 책이에요.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오래된 책)



  글로 담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글로 새롭게 빚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는 도무지 빚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니, 모든 이야기를 글로 빚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돌보며 누리는 살림을 모조리 글로 옮길 까닭이 없어요.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구태여 몽땅 글로 옮겨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을 가꾸는 바탕이 되는 이야기는 ‘글이나 책이라는 꼴로 따로 묶이’지 않더라도 마음자리에 튼튼하게 깃들기 때문입니다.



바람 깊은 밤, 어느 골목 어귀 / 불 꺼진 반지층 창문을 본다 / 외등 아래 앙상한 몸통을 드러낸 플라타너스에게 / 무성했던 잎새의 기억을 물었지만 그네는 답이 없다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나뭇잎을 읽고 장마를 읽습니다. 옥수수를 읽고 콩꼬투리를 읽습니다. 쑥불을 읽고 구름을 읽습니다. 여름바람을 읽고 여름볕을 읽습니다. 장마철에는 빨래에서 퀴퀴한 냄새가 흐르는구나 하고 읽습니다. 얼른 이 비가 그치고 다시 해님을 마주하면서 옷가지를 보송보송 말리면서 햇볕내음을 먹이고 싶다는 꿈을 그립니다. 비와 해와 바람이 모두 싱그러이 어우러지면서 알맞게 함께 있는 삶일 때에 넉넉하며 즐겁다는 대목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남다른 말이 아닌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남달라 보이지 않더라도 이 수수한 말 한 마디에서 시가 자라납니다. 시집 《슬픔의 뼈대》가 조금 더 수수한 자리에서 조금 더 투박한 노래여도 재미났을 텐데 싶으나, 이 모습도 이 모습대로 재미난 노래일 만하겠지요.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시인인데, 오래된 책을 잃어버렸으면 이제 새로운 책을 지어서 이녁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으면 됩니다. 2016.7.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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