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4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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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7



이끼가 살 수 있는 바위와 바람을 불러

― 사과를 내밀다

 맹문재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12.11.21. 8000원



  요즈음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내가 어릴 적에는 능금을 나무로 짠 궤짝에 담아서 팔았고, 능금궤짝에는 겨가 가득 찼어요. 요즈음은 저온창고에서 능금을 오래 건사한다지만, 예전에는 으레 겨에 묻어서 오래 건사했어요. 능금뿐 아니라 배도 겨에 묻어서 다루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고, 이웃 어른들도 으레 시골에서 나고 자란 분이었어요.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능금궤짝을 장만해서 집에 들여서 먹을 적에는 집집마다 ‘텃밭’이나 ‘꽃그릇’에 겨를 뿌렸지요. 좋은 거름 구실을 했어요.


  겨로 가득한 궤짝에 손을 넣어 능금 한 알을 꺼내면 퍽 즐거웠습니다. 손에 닿는 겨 느낌이나 소리가 재미있고, 능금이 어디에 숨었는지 찾으면서 재미있어요. 모든 열매를 고이 아끼던 지난날에는 능금 한 알뿐 아니라 한 조각조차 몹시 알뜰히 여겼습니다.



당숙이 나를 한 여자 앞에 앉혔다 / 소위 큰손이라는 이였다 / 집을 수십 채 가지고 있기에 / 이번 일을 잘하면 기회를 잡는다고 했다 / 당숙은 시인을 모르면서 / 조카가 대단한 글을 쓴다가 사람들에게 자랑하다고 / 몇 다리 건너 아는 여자에게까지 / 데리고 온 것이다 (시인)


이모님 댁에 왔다가 시골로 가시려는 어머니를 붙들었지만 / 상 한번 차리지 못했다 / 백 년 만에 처음이라고 텔레비전이 떠들어대듯 / 눈이 너무 오기도 했지만 / 직장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느라고 / 외식 한번 못 했다 (어머니를 울리다)



  맹문재 님이 빚은 시집 《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2012)를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에 마주한 능금궤짝을 떠올립니다. 손으로 짓는 살림을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하던 지난날을 되새기고, 손으로 가꾸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쉽게 만나던 지난날을 그려 봅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문명에서는 손으로 짓거나 가꾸는 흐름이 옅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문명은 그냥 문명이 아니라 기계문명인 셈이라고 할까요. 이와 달리 지난날은 손으로 짓는 살림인 ‘손살림’이었구나 싶어요.



농협장 선거에 돈이 뿌려진다고 이르신다 / 기름값이 너무 비싸 보일러를 뜯어야겠다고 이르신다 / 영달네가 자식 놈에게 맞았다고 이르신다 / 내가 쉬는 일요일 저녁에 이르신다 / 엊그제 이른 일을 또 이르신다 / 여든 살 아이가 되어 큰아들에게 이르신다 (아버지가 이르신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 한번 어기고 싶었다 (사과를 내밀다)



  기계문명이 널리 퍼지면서 ‘손빨래’나 ‘손글씨’라는 말이 새로 생기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으레 손으로 하거나 나누던 일이 이제는 손으로 거의 안 하는 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살림’만 잊히거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손일도 손놀이도 모두 잊히거나 스러집니다. 이러는 동안 손수 짓는 이야기도 잊히거나 스러지면서, 남이 지은 이야기가 널리 퍼집니다. 내가 손수 지은 집에서 살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집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내가 손수 지은 옷을 입기보다는 남이 지어서 돈으로 사고파는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집이나 옷도 ‘남이 손으로 짓’지 않기 마련이에요. 기계를 써서 한꺼번에 똑같은 꼴로 엄청나게 찍어내요.



울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당숙이 / 작업반장 좀 혼내달라신다 / 폭행으로 목을 다쳐 육 주 진단이 나왔지만 / 본 사람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 근무하기 힘든 곳만 보낸다고 이르신다 (어떻게 혼낼 수 있을까?)



  시집 《사과를 내밀다》에 흐르는 이야기는 모두 맹문재 님이 손수 겪은 삶이요 살림이며 사랑입니다. 더 낫거나 덜 나은 삶이 아닙니다. 그저 맹문재 님이 나날이 부대끼거나 마주하는 삶입니다. 더 좋거나 덜 좋은 살림이 아닙니다. 그예 맹문재 님이 늘 지켜보거나 바라보는 살림입니다.


  우리가 기계문명을 누리더라도 손살림을 잊지 않을 수 있으면, 우리는 우리 사랑을 손수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기계처럼 글쓰기를 익혀서 멋져 보이는 글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다른 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손길로 저마다 다른 살림을 지으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어요.


  내가 누리는 삶이 너하고 달라서, 내가 쓰는 글이 너하고 달라요. 네가 보내는 하루가 나하고 달라서, 네가 쓰는 시 한 줄이 내가 쓰는 시 한 줄하고 달라요.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불렀고 바위를 불렀고 옹달샘을 불렀다 풀을 불렀고 나무를 불렀고 바람을 불렀다 꽃을 불렀고 구름을 불렀고 햇살을 불렀다 물안개를 불렀고 새소리를 불렀고 물고기를 불렀다 (이끼를 담보로 잡히다)


부치려고 하는데 / 손안에 없다 // 집에 두고 왔는가? / 길에 흘렸는가? // 돌아가며 찾아보지만 / 어디에도 없다 // 안타까워 다시 쓰려는데 / 바람이 손을 잡는다 (오십 세)



  쉰 살 문턱을 넘어서면서 삶을 새삼스레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는 시집 《사과를 내밀다》입니다. 앞으로 맹문재 님이 걸어갈 예순 살 문턱 언저리에서는 그때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가꾸며 스스로 노래하는 하루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시 한 줄을 쓸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끼가 살 수 있는 이슬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돌아보면서, 나는 노린재와 민들레와 제비가 함께 살 수 있는 바람을 불러 봅니다. 꽃과 구름과 햇살을 부르는 시인 마음을 헤아리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하고 곁님하고 나란히 미리내를 부를 수 있는 시골살림을 불러 봅니다.


  손수 지은 밥을 손수 밥상으로 차립니다. 손수 거둔 남새를 손수 갈무리해서 즐깁니다. 들마실을 할 적에 아이들이 으레 저희 작은 손을 내밉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커다란 손을 하나씩 뻗습니다. 두 아이를 왼쪽하고 오른쪽에 나란히 두고 서로 손을 잡으며 들바람을 쐽니다. 나긋나긋 나풀나풀 홀가분한 손살림은 손빛이 되고 손노래가 되고 손사랑이 됩니다. 2016.8.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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