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목록 창비시선 381
김희업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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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9



바람을 마신 숨결을 내 몸으로

― 비의 목록

 김희업 글

 창비 펴냄, 2014.11.10.



  빵을 반죽하면서 효모를 넣어야 부푸는데, 나는 이제껏 몇 번이나 이를 빠뜨립니다. 왜 이렇게 효모를 빠뜨리는가 하고 돌아보면, 나는 아직 빵굽기가 몸에 익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대로 마음을 기울여서 반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깨닫습니다. 국을 끓이면서 마치 간을 하나도 안 한 짓이랑 똑같다고 할 테니까요.



안 팔리는 꽃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 수직으로 뻗다 지루하면 수평으로 서서히 방향을 튼다 / 아주 조금씩 자라서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 주인 속 타는 줄 모르고 /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꽃들 (출생의 비밀)


잠긴 문 / 들끓는 어둠 / 맡긴 시간이 부패할 때까지 / 밖은 모를 것이다 / 누군가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물품보관함)



  코앞에 있는 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코앞에 꽃이 있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지 못합니다. 눈앞에 있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앞에 아이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활짝 웃어도 이를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합니다.


  김희업 님 시집 《비의 목록》(창비,2014)을 읽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삶을 바라보면서 느낀 이야기가 흐릅니다. 시인 둘레에 있는 여러 사람이 저마다 다르게 짓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전혁림미술관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 내 앞을 가로질러 가는 청바지 차림의 사내 / 페인트가 위아래로 묻어 있어 페인트공임을 알 수 있었다 (통영 2)


소녀의 공중비행을 우러러보던 지상의 유일한 목격자 / 화단의 꽃이 / 죽음을 애도하는지 / 고개를 반쯤 숙였다 /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비행법)



  《비의 목록》을 쓴 시인은 ‘화가’와 ‘페인트공’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고 묻습니다. 미술관에 깃들어야 ‘그림’이 된다면, 미술관에 깃들지 못한 채 페인트를 바르는 일을 하는 일꾼은 ‘무엇’을 하는 셈인가 하고 묻습니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숨을 끊은 어린 가시내를 떠올리면서, 이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을 꽃이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시인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 만할까요.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배우거나 알거나 깨닫는 하루를 누릴까요.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 바람이 풀 위를 밟고 지날 때마다 / 풀이 한입 가득한 소 / 그런 소를 덥석 먹어치워 / 풀의 피가 몸속 푸릇푸릇한 그는 과연 육식주의자인가? (그의 혈액형은 동물형이다)


당신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 어지간해서 나올 줄을 모른다 / 관 속의 당신 또한 나올 생각을 않는다 / 포근했던 호주머니 속 한때의 동전처럼 (호주머니)



  고기를 먹으면 고기가 내 몸이 됩니다. 한때 고기였던 짐승은 거의 풀을 먹던 짐승이었으니, 풀을 먹는 짐승을 이룬 살점은 거의 모두 풀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풀짐승 가운데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은 드물어요. 예부터 소는 풀을 먹었지만, 오늘날 소는 풀이 아닌 사료를 먹지요. 짚조차 못 먹고 항생제를 먹어요. 그러면 ‘사료 먹는 소’를 먹는 사람은 ‘풀로 이룬 살점’이 아닌 ‘사료로 이룬 살점’을 먹는 셈이 될까요?


  문득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이 모든 목숨은 이 별에서 다 같이 살면서 모두 똑같이 바람을 마셔요. 바람을 마시지 않는 풀이나 짐승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풀밥을 먹거나 고기밥을 먹을 적에 ‘잎이나 살점이 된 바람’을 나란히 먹는 셈이라고도 할 만해요. 깻잎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돼지 살점을 이룬 바람을 내 몸으로 맞아들여요.


  이리하여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으로 마음을 이룹니다. 나는 아이들이 오롯이 사랑을 물려받아 즐겁게 웃는 숨결이 되도록 살림을 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 눈에 따라, 짓고 가꾸는 손에 따라, 삶을 돌보고 살림을 추스르는 생각에 따라, 오늘 하루는 늘 새롭게 거듭나리라 느낍니다. 2016.7.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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