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진 시집
박성진 지음 / 소소책방(소소문고)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시를 노래하는 말 277



직행과 완행 사이에 애닳은 숨소리

― 숨

 박성진 글

 소소문고 펴냄, 2016.5.1. 8000원



  우리는 누구나 ‘숨’을 쉬고 삽니다. 숨을 쉬지 않는다면 곧장 ‘목숨’을 잃습니다. 사람도 숨을 쉬지만 푸나무도 숨을 쉬어요. 푸나무도 숨을 쉬지 않으면 곧바로 ‘숨결’을 잃어요.


  때때로 크게 짓는 숨인 ‘한숨’을 쉽니다. 걱정이 되어 한숨이요, 마음을 놓으며 한숨이에요. 마음이 무거운 나머지 한숨을 푹푹 쉬지만,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한숨을 폭폭 쉬기도 해요.


  그러니 ‘숨통’을 죄면 괴롭습니다. 숨통이 트이면 시원합니다. 숨통이 막혀서 고달픕니다. 숨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온힘을 다하면서 삶을 이으려고 해요.



다른 교생은 복사하러 가고 / 담임 선생도 자리 비운 사이 / 얼른 가방 열어 아이들이 남긴 / 우유 쑤셔 넣고 / 달아오른 얼굴 식히려 / 바라본 창밖 / 때마침 흘러가는 우윳빛 구름 (농협 우유)


엄마 눈 속에 내가 있네 / 세 살 아이가 / 완성한 첫 문장 // 엄마 뺨 양손으로 잡고 / 눈을 바라보다, 한참 (첫 문장)



  속초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성진 님이 선보인 시집 《숨》(소소문고,2016)에 흐르는 숨소리를 헤아립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나며 느낀 숨소리를 헤아리고,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깨달은 숨소리를 헤아려 봅니다.


  세 살 아이 눈에 어머니가 살아서 숨을 쉬듯이,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예순 살 어머니 눈에서도 아이가 살아서 숨을 쉽니다. 두 사람 눈에는 서로 아름다운 숨결이 살아서 빛나요. 따사로운 사랑으로 만나는 두 사람은 싱그러운 숨을 나누면서 하루를 지어요.



급식소로 가는 길 / 종원이나 성경이 실내화를 / 비 오는 운동장에 내던졌다 / 눈 깜짝할 사이였다 // 밥 남긴 적 없는 성경이 / 씩씩거리며 몇 숟갈 뜨더니 / 못 먹겠다며 일어선다 (눈 깜짝할 사이)



  숨 한 줄기는 바람이 되어 퍼집니다. 내가 오늘 마시는 숨은 네가 어제 마신 숨일 수 있습니다. 네가 어제 마신 숨은 그제 내가 마신 숨일 수 있습니다. 내가 마시는 숨 한 줄기로 작은 풀꽃이 자랄 수 있고, 작은 풀꽃이 자라며 마시는 숨 한 줄기로 내가 오늘 기쁘게 노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숨을 미처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가는 목숨이 있습니다. 난 곳이 무덤이 되는 목숨은 두 어버이한테 뼛속까지 사무치는 아픈 숨을 남깁니다. 저도 이렇게 여린 숨결을 두 차례 나무 곁에 묻은 적 있어요. 비록 열 달을 채우지 못했어도 우리한테 찾아온 고운 숨결이라고 여겨, 우리 집 나무 곁에 고이 묻어 주면서 앞으로 새로운 목숨을 받아 태어나기를 빌었지요.



새벽 욕실 앞 / 선 채로 아이처럼 우는 / 아내를 자리에 뉘였다 // 아내의 안 / 숨이 멎은 아이는 / 난 곳이 무덤 되었다 (숨)


어머니는 감 깎으러 이장 댁에 간 시간 / 티비 보려다 할머니가 깰까 봐 멈칫한다 / 하릴없이 시집을 뒤적이다 잠바 입고 / 뒤뜰에 쭈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하루)



  숨소리는 바람소리를 닮습니다. 바람소리는 숨소리를 닮습니다. 낮에 구름을 보면서 숨을 쉬다가, 밤에 별을 보면서 숨을 쉬다가, 우리 숨 한 줄기란 바람 한 줄기하고 똑같을 수 있겠다고 느끼곤 해요. 우리가 마시는 숨이란 ‘공기’인데, 이 공기란 ‘하늘’을 이루면서 흐르는 ‘바람’이기도 해요.


  어쩌면 숨쉬기란 바람쉬기요 하늘쉬기일 수 있어요. 숨을 쉬는 동안 바람을 쉬고 하늘을 쉴는지 모릅니다. 숨을 마시는 삶이란 바람을 마시면서 바람처럼 되고, 하늘을 마시면서 하늘처럼 되는 삶일 수 있어요. 그래서 예전에 어느 교사 시인은 “하늘숨을 쉬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읊은 적 있어요. 아이들은 그냥 여느 숨이 아니라 ‘하늘숨’을 쉰다고 했어요. 아이들을 낳거나 맡거나 가르치거나 보살피는 어버이나 어른이나 교사는 모두 아이들 곁에서 ‘하늘숨’을 함께 쉰다고 했어요.



원지에서 산청 가는 직행버스 / 할아버지, 다리가 아프니 댁 가차이 / 완행으로 내려달라 하신다 / 검표인이 올라와 완행 타시라 일렀지만 / 내릴 생각 않으시고 // 옛 길 위로 난 4차선 국도 / 시원스럽게 내달릴 즈음 / 입을 연 할아버지 다시 / 아픈 다리와 옛 길 이야기 / 젊은 버스기사 결국 핏대 세운다 (직행과 완행 사이)


내가 사는 이 시집 / 가물이 든 시인의 주머니에 / 백동전 몇 잎 피어나 / 주렁주렁 열매 맺으면 (내가 사는 이 시집)



  강원도 속초 시골자락에서 넌지시 깨어난 작은 시집 《숨》을 읽으면서, 전남 고흥 시골자락에서 읍내를 다녀오며 으레 타는 군내버스를 떠올립니다. 속초에서 시를 쓰는 교사인 박성진 님은 ‘직행과 완행 사이’ 이야기를 시로 그리면서 이녁이 깃든 시골자락에 놓인 길하고 얽힌 옛살림을 보여줍니다. 구불구불 작은 길이 사라지면서 뻣뻣하게 뻗은 너른 길로 바뀌는 사이, 시골 할매나 할배는 버스 한 번 타기 어렵습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한테는 직행도 완행도 그저 버스일 수 있어요. 더구나 ‘완행’이라 하더라도, 요새는 ‘한두 집만 남고 만 작은 마을’ 앞에서는 버스가 안 섭니다. 원지에서 산청 가는 버스를 탄 시골 할배는 완행을 타더라도 이녁 보금자리가 있는 마을에 서는 버스가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요.


  시 한 줄에 가늘게 숨소리가 흐릅니다. 시 두 줄에 가볍게 바람소리가 흐릅니다. 시 석 줄에 곱다라니 하늘소리가 흐릅니다. 겨울비가 지나간 하늘에는 한결 싱그럽게 열린 새파란 하늘빛을 닮은 숨소리가 흐릅니다. 고흥에서는 겨울비라면 속초에서는 겨울눈이었을 테지요. 같은 하늘 밑이지만, 어느 고장에서는 더 추운 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리고, 어느 고장에서는 더 따순 바람을 타며 빗발이 듭니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숨을 쉬는 마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침을 열고, 시집을 읽고, 아이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밥을 짓고, 호미를 손에 쥡니다. 2016.12.2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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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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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75



저절로 시가 되는 칠곡 할매들 말과 살림

―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칠곡 할매 119명 글

 삶창 펴냄, 2016.10.10. 9000원



  칠곡 할매 백열아홉 분은 얼마 앞서까지 이녁 이름을 손수 글로 못 썼다고 합니다. 할매 나이가 되도록 글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딸아들 모두 도시로 떠나고 손자를 맞이하는 할매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배운다고 해요.


  이제껏 흙을 만지고 물을 주무르며 살림만 하던 할매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연필을 처음으로 쥔대요. 호미랑 낫은 늘 쥐어 보았으나 연필만큼은 쥔 일이 없는데, 아주 서툰 손길로 연필을 쥐어서 더더욱 서툰 손놀림으로 이녁 이야기를 글로 쓰는 하루를 지낸다고 해요.



일주일 손녀를 보았다 / 엄마를 찾을줄 알았는데 / 잘놀고 순했다 / 밥을 잘 안 먹어서 힘들엇지만 / 그래도 좋다 / 넷살짜리가 말도 참 잘한다 / 재롱부리며 잘 노는 것을 보니까 / 참 행복하다 (손녀/김정자)


오늘은 큰딸 작은딸이 / 손자들 갓이 와서 동생내하고 / 소고기를 먹었다 / 참 맛나다 (참 맛나다/유순희)



  작은 시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삶창,2016)에는 백열아홉 할매마다 백열아홉 이야기를 백열아홉 빛깔로 그린 글이 흐릅니다. 백열아홉 할매는 저마다 글을 한 꼭지씩 썼습니다. 시가 무엇인지 몰라도, 글이 무엇인지 몰라도, 참말로 연필을 쥐고 종이에 뭔가 끄적이는 몸짓이 무엇인지 몰라도, 백열아홉 할매는 천천히 또박또박 참하게 글씨를 빚어서 이야기를 하나씩 선보였다고 합니다.



엄마를 일찍 여위고 사랑이란 단어를 /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 곳감이 프로포즈 할 때 / 편지로 사랑한다는 말 한 번밖에 없다. / 곳감한테도 딸 아들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말 / 우리 예뿐 며느리가 / 어머니 사랑합니다. / 그말을 듣는 순간 너무 너무 행복했다. / 아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우리 며느리 복덩이다. (우리 예뿐 며느리/이정란)



  ‘사랑’이라는 말을 곳감(영감)한테서 꼭 한 번 편지로 들었을 뿐, 더군다나 딸아들도 이 말을 들려준 적이 없다는데, 며느리가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고 나긋나긋 이야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고 이야기한 며느리는 꼭 한 번만 이 말을 들려주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할매를 뵐 적마다 틈틈이 이 말을 들려줄 테지요.


  조용한 시골집에서 시골살림을 일구는 시골 할매는 아주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이라 할 만한 말 한 마디 ‘사랑’을 들으며 가슴으로 북받치는 기쁨으로 웃고 노래를 하다가, 처음으로 익힌 한글로 이 이야기를 옮깁니다. 이리하여 며느리는 그냥 며느리가 아닌 “우리 며느리”예요. 우리 며느리는 그냥 우리 며느리가 아닌 “우리 예뿐 며느리”이고요.


  흔하거나 수수하다고 할 수 있는 한 마디 ‘사랑’인데, 이 말 한 마디로 할매가 웃고 며느리도 웃으리라 느껴요. 온 집안 사람들이 다 함께 웃는 살림이 되겠구나 싶어요.



봄 콩 숭가다 / 들에 쑥 뜨더다 / 집에 와서 이불 빨래해다 / 밭에 가서 도래밭 쪼사다 / 도래씨 흐터다 / 머리 염색도 해다 / 오늘 디기 바빠다 (봄 콩 숭가다/이순늠)


아침에 / 일어나 느티나무를 보면 / 기분이 좋습니다 / 가만히 보면 / 인물이 잘생긴 사람같습니다 / 나이 하루하루가 / 느티나무 그림자를 따라 / 즐겁게 돌아갑니다 (느티나무/노선자)



  칠곡 할매들은 이녁이 꾸리는 삶을 고스란히 옮깁니다. 군더더기를 붙일 일이 없습니다. 토를 달 일이 없고, 말꼬리를 늘어뜨릴 일이 없습니다. 할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고스란히 글씨로 옮겨요.


  표준 서울말이 아닌 칠곡말로 글씨를 그립니다. 글을 ‘쓴다’기보다 글씨를 ‘그린다’고 해야 걸맞을 칠곡 할매는 참말로 그림을 ‘그리’듯이, 꿈을 ‘그리’듯이, 사랑을 ‘그리’듯이 글씨를 그리면서 이야기를 하나하나 그려요. “콩 숭가”고 “쑥 뜨더”다가 “도래밭 쪼사”다가 “디기 바빠”맞은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투박하게 시 한 꼭지로 적어 냅니다.



어렸을 때는 여름이 되면 /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 시내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 버들가지 꺾어서 / 호땍이도 만들어 불며 / 재밌게 놀던 시절 / 언제나 그 시절이 다시 올까 (어린시절/장오희)



  칠곡 할매가 칠곡 이야기를 칠곡말로 그립니다. 정선 할매는 정선 이야기를 정선말로 그릴 수 있어요. 장흥 할매는 장흥 이야기를 장흥말로 그릴 만하고, 옥천 할매는 옥천 이야기를 옥천말로 그릴 만해요. 


  시골마다 시골 할매를 만나서 시골 할매 스스로 한글을 익혀서 시골 할매 이야기를 투박하지만 한 땀 두 땀 살뜰히 옮기는 글을 쓰시도록 북돋우면 참으로 아름답고 재미나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늘그막에 글을 새롭게 배우면서 삶을 새롭게 사랑하시도록 북돋운다면 ‘아기 울음소리’가 없어서 고요하다는 시골마을마다 새삼스레 웃음꽃이 피어날 만하지 싶어요.



웃고 지끼고 첨에는 / 이르미 삐딱삐딱 도라가디 / 이제 내 이름이 참마게 빈다 / 자꾸 쓰이 이름이 참매진다 / 내가 써도 글씨가 참하다 / 이름도 퍼떡 쓰게꼬 / 요래 이쁜 내 이름을 / 누구한테 자랑해보꼬 (글씨가 참하다/안윤선)



  “이름이”라고 못 적고 “이르미”라고 적어도 됩니다. “참해진다”라 못 적고 “차매진다”라고 적어도 돼요. 찬찬히 바느질을 하듯이, 찬찬히 호미질을 하듯이, 찬찬히 씨앗을 심어 찬찬히 거두듯이, 할매들 살림살이가 찬찬하면서 따사롭게 흘러서 ‘할매 이야기 시집’이 앞으로도 새록새록 태어나겠지요?


  우리 사랑이 비롯하고, 우리 꿈이 태어나며, 우리 숨결이 흐르는 시골노래가 아름답게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절로 시가 되는 칠곡 할매들 말과 살림이 참말로 온누리를 포근하면서 살가이 어루만져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6.12.14.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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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 문학의전당 시인선 239
이정자 지음 / 문학의전당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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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74



누군가 ‘사랑해!’ 하고 소리낼 적에

― 그윽

 이정자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6.11.11. 9000원



  깊숙하여 아늑하고 고요하다고 할 적에 ‘그윽하다’라는 낱말을 써요. 깊이 들어가지 않거나 아늑하지 않거나 고요하지 않다면 ‘그윽할’ 수 없어요. 깊지 않더라도 아늑하면서 고요하다면 포근할 수 있어요. 시끄러운 곳이라 하더라도 어버이가 아이를 아늑하면서 고요히 품거나 안아 준다면 이때에 아이는 포근하다고 느껴요. 하루를 마무리짓고 잠자리에 들어 아이를 새근새근 재운다면,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새롭게 그윽함을 느낄 만해요.


  호젓한 시골에서 아이들하고 달밤을 누리면서 살며시 마을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달빛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고이 잠을 자도록 이끈 뒤에 《그윽》(문학의전당,2016)이라는 시집을 찬찬히 읽어 봅니다.



햇살은 다, 이리로 소풍을 나왔는지 /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물빛이 / 가을빛을 닮아 맑고 깊다 / 얕아서 소란스런 물도 껴안고 가다 보면 / 고요해지는 것일까 / 꼬여서 삐딱한 물고기도 품어 안으면 / 푸른 지느러미 올곧게 출렁일까 (가을 호수)


메기는 어항을 사랑했다 /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 무리 지어 다니는 송사리떼도 / 어항을 사랑했다 / 먹이 앞에서는 서로 물고 뜯는 피라미도 / 어항을 사랑했다 (어항)



  시집 《그윽》은 시인 이정자 님이 붙인 이름처럼 그윽하게 삶에 깃든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만합니다. 수선스럽지 않고 왁자하지 않습니다. 북적이지 않고 시끌거리지 않습니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도, 승강기 소리나 쇳소리도, 비행기나 헬리콥터 소리도 이 시집에는 깃들지 않아요. 자그마한 삶자리에서 자그맣게 피어나는 그윽한 이야기가 작은 시집에 머뭅니다.



중앙탑 공원 / 민들레 소녀 조각상 손목에 / 토끼풀꽃 시계가 채워져 있다 // 이승을 돌아 돌아 만난 인연처럼 / 풀꽃 시계를 채워준 이는 누구일까 (풀꽃 시계)


어디에서 발원했을까 / 맑은 물소리에 귀를 씻고 /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는 / 고마리 꽃잎 이슬 한 방울에도 겸허해진다 (하늘재)



  때로는 너른 마당에서 시 한 줄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수많은 외침을 갈무리하는 시 한 줄이 자라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주 고요한 곳에서 시 한 줄이 태어납니다.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가장 그윽한 곳을 살펴 새로운 목숨을 받아내듯이, 더없이 고요한 자리에서 그윽한 이야기가 시 한 줄로 자라납니다.


  아이들은 여러 동무하고 마음껏 깔깔거리며 뛰놀곤 해요. 아이들은 아주 조용하거나 고요한 곳에서 깊이 꿈을 꾸며 잠들어요. 아이들은 쉴새없이 노래하면서 뛰놀아요. 이러다가도 모든 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꾸벅꾸벅 졸더니 픽 쓰러져 낮잠에 빠져들어요.


  어쩌면 가장 부산스러우면서 가장 그윽한 숨결은 어린이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가장 고요하면서 가장 기운찬 넋은 어린이일 수 있어요. 우리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자라는 동안 부산스러움이랑 그윽함을 어우르는 손길을 익힌다고 할 만해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면서 기운찬 마음으로 씩씩하게 자라기에 어른이 될는지 모릅니다.



간절한 것이 없어 / 절실한 것이 없어 // 나는 늙는다 (아이러니)


누군가 ‘사랑해!’라고 발음할 때 / 나무의 어딘가에 깃들었던 / 초록 눈이 새순으로 돋아나 / 팔랑이는 것만 같아서 / 가슴에서도 꽃이 피어나지, / 한 그루 푸른 나무로 출렁이지 // 입에서 나온 말이 귀로 들어와 / 가슴을 열게도 하고 닫게도 하는 힘은 / 초록 눈이 가지고 있지 (초록 눈에 꽃이 핀다)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한테 ‘사랑해!’ 하고 외치거나 속삭이면, 나무 어딘가에 깃들던 푸른 눈이 봄을 그리면서 곧 깨어나지 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살가운 곁님하고 서로서로, 반가운 이웃을 그리면서, 먼 곳에 사는 동무를 헤아리며, ‘사랑해!’ 하고 가장 흔하면서 가장 따사로운 말을 들려줄 수 있는 살림살이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 입에서 나와 이웃 귀로 들어갈 가장 멋진 말을 떠올려 봅니다. 가슴을 열어 줄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어깨동무를 하며 즐겁게 꿈을 꾸도록 북돋우는 말 한 마디를 ‘그윽’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려 봅니다. 2016.12.1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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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가 이쁜 문학의전당 시인선 221
전해선 지음 / 문학의전당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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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6



뒤가 이쁜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 한 자락

― 뒤가 이쁜

 전해선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6.1.27. 9000원



  부산에서 살며 시를 짓는 전해선 님은 《뒤가 이쁜》(문학의전당,2016)이라는 첫 시집을 선보입니다. 시집 이름이기도 한 ‘뒤가 이쁜’이라는 시는 자작나무 뒷모습을 보면서, 또 자작잎을 바라보면서, 이러다가 우리네 삶과 살림을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상냥한 마음이라고 봅니다. 얼핏 보면 수수하지만, 가만히 살피면 뒤도 이쁘고 앞도 이쁘며 옆도 이쁜 이웃이며 동무이고 숲이고 풀 한 포기랑 나무 한 그루예요.



쏙닥쏙닥 / 세 여자가 숭덩숭덩 쑥을 캔다 / 대바구니 대신 비닐봉지 속에 / 차곡차곡 쌓이는 아득한 이야기 속에 / 설핏설핏 나타나는 옛사람 / 몽당치마 저고리 앞섶 검댕도 따라 나오고 (쑥떡)


밥 짓는 여자의 웃음이 환합니다 /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는 / 자기 여자를 웃게 하는 남자입니다 (좋은 남자)



  쑥을 캐는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태어납니다. 오늘 이곳에서 쑥을 캐다가 아스라이 먼 옛날에도 쑥을 캤을 숱한 사람들을 그립니다. 옛사람 손길이 오늘까지 이르며 똑같이 쑥을 캐고 쑥내음으로 젖어드는 숨결이 시로 태어납니다.


  그저 수수하게 늘 하는 집안일 가운데 하나인 밥짓기를 놓고도 시 한 줄이 태어납니다. 밥짓기를 지겨워 할 수 있지만, 밥짓기를 웃음으로 할 수 있어요. 밥짓기를 가시내가 도맡을 수 있으나 사내한테 이 일을 넘길 수 있고, 아이들이 찬찬히 배우도록 이끌 수 있어요. 아무튼 밥짓기를 누가 하더라도 우리는 밥짓기를 알아야 해요. 내가 밥짓기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한테 밥짓기를 못 가르치거나 못 물려주거든요.



날선 칼은 무섭습니다 / 동작이 어정뜬 사람은 날선 것들 앞에 서면 / 주눅이 듭니다 언젠가 / 새 칼을 차마 쓰지 못하곡 / 헌 칼만 힘들게 썼드랬습니다 (무딘 칼날)


누군가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 자작자작 자작자작 자작자작 / 신명에 겨워 웃다가 자지러지고 / 뒤집어져야만 은빛으로 떠는 너는 (뒤가 이쁜)



  ‘무딘 칼날’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 집 부엌칼을 문득 떠올립니다. 참말로 무딘 칼날을 무덤덤하게 오래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뒤가 이쁜》이라는 시집을 빚은 분도 무딘 칼날을 힘겹게 썼다고 하는데, 이 시를 읽는 저도 한동안 무딘 칼날을 힘겹게 쓰곤 했습니다.


  날선 칼은 어느 모로 무섭다고 할 수 있어요. 날선 칼이니 손이 베이기 쉽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날선 칼이어야 배추도 무도 잘 썰어요. 날선 칼이어야 도마질이 수월해요. 숫돌로 날을 잘 세워서 부엌칼을 손에 쥐어야 억지스레 힘을 주지 않아도 도마질이 수월해요.



고동을 삶아 먹을 때 하시던 엄마의 말씀 / 가서 울타리 가시 좀 잘라 오너라 / 손가락에 박힌 가시 빼낼 적에 엄마는 / 그 나무가시로 살 속 가시를 빼내곤 하셨지 / 나무가시는 독이 없어 괜찮다며 / 밥상을 물리고 나면 다시금 / 가시 좀 잘라오라 하시던 (탱자나무)



  자작나무 잎사귀를 바라보다가 시 한 줄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고동 하나 삶아서 먹다가 어릴 적에 이녁 어머니가 탱자나무 가시를 잘라 오라고 이르던 말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탱자나무는 울타리도 되고, 하야말간 꽃을 베풀기도 하고, 향긋한 열매 냄새를 퍼뜨리기도 하는데, 이쑤시개 구실도 하면서 우리 곁에 있다는군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시를 쓴 전해선 님은 어릴 적에 ‘알맞게 작고 야무지게 단단한 노랗게 잘 익은 탱자알’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면서 흔히 놀았지 싶어요. 탱자알은 멋진 구슬이고, 재미난 놀잇감이며, 부드러우면서 살가운 숨결이거든요.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 언니 / 으응 /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는 말에 / 기다린 만큼의 실망 / 누가 똑같은 마음이라 말한 적 없어 /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순간 / 보고 싶었어, 라는 말이 / 유월의 햇빛에 바래다가 / 시간의 발길에 차여 너덜거린다 (어느 하루)



  뒤가 이쁜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 한 자락을 《뒤가 이쁜》에서 읽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뒤도 앞도 옆도, 위도 아래도 한복판도, 그러니까 겉모습뿐 아니라 마음속도 모두 이쁜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가 시집 하나로 새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에는 늘 함께 붙어다니며 놀던 언니 동생이지만, 나이가 들어 서로 제금을 나면서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보기도 어려운 먼 사이가 됩니다. 얼굴을 본대서 따로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저 그 얼굴 한 번 마주하면서 수수한 수다를 떨고 수수한 밥을 차려서 먹고 수수한 차 한 잔을 끓여서 마시기에 ‘어느 하루’는 따사로우면서 넉넉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마음이란 바로 ‘우리들 수수한 살림’을 그저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그예 사랑스레 녹여내어 이야기꽃 한 송이로 피우려는 뜻이로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 이야기도 네 이야기도 저마다 수수하면서 곱습니다. 우리 이야기는 언제나 모두 시라고 느낍니다. 2016.1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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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먼저 기사를 올렸습니다. 글은 지지난달쯤 처음 썼고, 기사는 이제 띄웠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간 기사는 제가 처음 붙인 이름하고는 조금 바뀌었는데... 그래도 고갱이는 같습니다. (굵은 글씨를 누르면 오마이뉴스 기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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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따라야"

십여년이 지나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상처받지 않을 권리 누구에게나 있어



중견 시인한테서 성폭력을 받은 적 있습니다

― ‘표현할 자유’하고 ‘상처받지 않을 권리’란?



2004년 뒷겨울에 겪은 어떤 일을 이제껏 마음 한구석에 꽁꽁 감춘 채 살았습니다. 그때에 저는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살며 이오덕 님 유고와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오덕 님이 남긴 시도 그러모아서 이 시를 시집 한 권으로 태어나도록 하려고 서울에 있는 여러 문학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원고를 건네주고 교정지를 주고받고 했습니다. 이때에 문학 출판사를 드나들면서 여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시인들은 훌륭한 어르신이 남긴 좋은 시집을 내려고 젊은이가 참 애쓴다면서, 또 시골에서 서울까지 먼길을 왔다면서, 저를 술자리로 데려가서 위로를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무렵 만난 시인들은 술자리를 빌미 삼아서 저한테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니, 성추행이라기보다 성폭력이라고 해야 맞다고 느낍니다. 술자리를 이끈 중견 시인들은 ‘문단 권력’과 ‘나이 권력’ 두 가지로 젊거나 어린 사람을 마구 부리려 했으니까요.


이무렵까지 저는 ‘시인’이라는 사람을 거의 책으로만 만났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분들을 얼굴도 모르는 채 그저 책으로만 마주했습니다. 이런 시인들을 일 때문에 만나서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폭력에다가 욕설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열 몇 해가 지난 일이지만 이를 되새기려니 매우 끔찍합니다. 소름까지 돋습니다.


중견 시인이라는 분들이 술자리라는 곳에서 보여주는 몸짓은 몹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이들 ‘어른 시인(이들 중견 시인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어른 시인’이라고 했습니다)’은 꼭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에 가야 한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 편집부에서는 이들 중견 시인을 이끌고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으로 모시곤 했습니다. 내로라하는 중견 시인들은 하나같이 ‘여자가 옆에 안겨 붙어서 술을 따라 주어야’ 한다고 늘 말했으며,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술을 따라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시인은 술기운이 올랐다는 핑계로 제 허벅지를 쓰다듬고 주무르고 허리를 안고 뽀뽀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무렵 제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여러 ‘어른 시인’들이 하나같이 ‘젊은 사내한테 추근거리니’ 소름이 돋을 뿐 아니라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제 허벅지를 주무르고 허리를 안고 뽀뽀를 해대는 시인을 물리치려고 하니, 앞에 앉은 다른 시인은 나더러 “왜 그래?” 하면서 외려 ‘어른 시인’이 나한테 해대는 성폭력을 감싸고 부추기기까지 했습니다. 참다못해 겨우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민중이나 진보를 말하는 시인이 어떻게 이렇게 더럽게 술을 마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중견 시인 한 분은 “니가 뭔데 ××야, 나이도 어린 게 입 닥쳐! 이 ×××야 얼른 자리에 앉아! 술이나 따라!” 하며 대꾸했습니다. “아니, 당신들이 어른이라면서요? 어른이라면서 이렇게 놀고 그렇게 욕할 수 있어요?” “왜? 뭐가 잘못됐어? 술은 이렇게 마셔야지!”


저는 어처구니없어서 이들한테 똑같이 욕으로 받아쳐 주고 일어섰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러니 이들 ‘어른 시인’은 “이 ×××아, 너 앞으로 문단에 나오기만 해 봐, 아예 문단에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어린 놈이 어디 건방지게 굴어!” 하고 대꾸했습니다. 그 뒤로도 온갖 욕을 퍼붓는데, 욕을 이렇게 잘해야 시인이 되는가 하고 싶더군요. 그러나 저는 귀도 몸도 더 더럽혀질 수 없기에 그 술자리를 박차고 나오려 하는데요, 제 몸을 더듬으며 추근대던 키 큰 시인이 내 팔을 억세게 붙잡더군요. “어디 가? 다시 여기 앉아서 술 대접 해! 어린 ××가 어른한테 술 대접도 안 하고 어딜 도망가려고 해!”


소름이 돋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기에 그 ‘어른 시인’ 팔을 팽개치고 달음박질을 쳤어요. 등 뒤로 들리는 욕지꺼리를 도리질치면서 내뺐습니다. 그 뒤로 그 출판사 언저리에는 되도록 가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술 대접을 하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오덕 님 시집 교정지를 주고받을 적에는 웬만하면 우편으로만 했고, 서울에 갔다가 중견 시인이라는 분들 얼굴을 스칠까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끔찍하고 싫은 짓을 겪어야 했던 ‘문단 성폭력 피해자’ 분들이 그분들 생채기를 털어놓으면서 여러 시인들 성추문 이야기가 불거졌습니다. 피해자인 그분들이 다시 피해를 안 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피해를 받은 분들이 피해 경험을 털어놓기는 무척 어렵다고 느낍니다. 사내인 저도 중견 시인들한테서 받은 성폭력을 털어놓기는 열 몇 해 만에 처음입니다. 그동안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고, 그저 가슴에 꽁꽁 묻어둔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생채기를 꽁꽁 묻어둔 채 살다 보니 저 스스로도 웃음이나 따스함이 자꾸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남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이들은 생채기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너무 모르거나 하나도 모르지 싶습니다.


제가 겪은 일을 돌아보면, 아무래도 그 ‘문단 권력자’한테서 ‘더 깊고 아픈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면서 이런 피해 사실을 못 밝히고 마는구나 싶습니다. ‘남자 시인이 젊은 남자한테 저지른 성폭력’도 꽁꽁 감추며 살 수밖에 없던 한국 문단 얼거리요 책마을이지 싶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일을 겪어야 한 이들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제는 이 응어리를 털고 싶어 몇 마디를 적습니다. 내 몸을 더듬고 문지르고 억지로 뽀뽀를 하던 시인 이름도, 그때 그런 지저분한 술자리를 벌이고 욕설을 쏟아내던 시인 이름도, 그들 이름을 제 입으로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그분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거듭나 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아로새겨진 생채기를 이렇게 글로 밝히는 까닭이 있습니다. 얼마 앞서 어느 ‘남성 미술평론가’ 한 사람이 “여고생의 속살 체모 상상을 글로 쓰는 표현의 자유”를 그분 누리사랑방에서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 ‘남성 미술평론가’는 “누구나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나이 어린 여자를 향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거듭 외칩니다.


이분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겠지요. 참말로 누구나 “표현할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는 이런 ‘남성 평론가나 작가’인 분들한테 한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표현할 자유”가 있듯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어떤 글이든 쓸 자유”가 있다면 누구나 “어떤 글로도 생채기를 받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지 싶어요. “표현할 자유”만 있고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자유는 무엇이고 권리란 무엇이며, 민주나 평화나 평등이란 무엇일까요? 누구한테나 “글을 쓸 자유”는 있을 터이나, “막글(막말)을 쓸 자유”까지 있지는 않을 텐데요? “성폭력을 할 자유”란 자유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주먹으로뿐 아니라 글로 일삼는 폭력은 ‘표현’이 아니라 오직 ‘폭력’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젊은 남자한테까지 성폭력을 일삼은 그 시인들은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난 이런 일을 다 잊어버렸을는지 모릅니다. 이 글에 그 시인들 이름을 밝힌다고 해도 하나도 기억을 못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가 그 시인들 이름을 굳이 밝히면 그 시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지난날을 뉘우칠까요? 아니면 그런 일은 없다면서 "증거를 대라"면서 발뺌을 할까요? 한 사람은 58년생 시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년생 시인이라는 대목까지만 밝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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