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에 먼저 기사를 올렸습니다. 글은 지지난달쯤 처음 썼고, 기사는 이제 띄웠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간 기사는 제가 처음 붙인 이름하고는 조금 바뀌었는데... 그래도 고갱이는 같습니다. (굵은 글씨를 누르면 오마이뉴스 기사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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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따라야"

십여년이 지나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상처받지 않을 권리 누구에게나 있어



중견 시인한테서 성폭력을 받은 적 있습니다

― ‘표현할 자유’하고 ‘상처받지 않을 권리’란?



2004년 뒷겨울에 겪은 어떤 일을 이제껏 마음 한구석에 꽁꽁 감춘 채 살았습니다. 그때에 저는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살며 이오덕 님 유고와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오덕 님이 남긴 시도 그러모아서 이 시를 시집 한 권으로 태어나도록 하려고 서울에 있는 여러 문학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원고를 건네주고 교정지를 주고받고 했습니다. 이때에 문학 출판사를 드나들면서 여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시인들은 훌륭한 어르신이 남긴 좋은 시집을 내려고 젊은이가 참 애쓴다면서, 또 시골에서 서울까지 먼길을 왔다면서, 저를 술자리로 데려가서 위로를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무렵 만난 시인들은 술자리를 빌미 삼아서 저한테 성추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니, 성추행이라기보다 성폭력이라고 해야 맞다고 느낍니다. 술자리를 이끈 중견 시인들은 ‘문단 권력’과 ‘나이 권력’ 두 가지로 젊거나 어린 사람을 마구 부리려 했으니까요.


이무렵까지 저는 ‘시인’이라는 사람을 거의 책으로만 만났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분들을 얼굴도 모르는 채 그저 책으로만 마주했습니다. 이런 시인들을 일 때문에 만나서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폭력에다가 욕설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열 몇 해가 지난 일이지만 이를 되새기려니 매우 끔찍합니다. 소름까지 돋습니다.


중견 시인이라는 분들이 술자리라는 곳에서 보여주는 몸짓은 몹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이들 ‘어른 시인(이들 중견 시인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어른 시인’이라고 했습니다)’은 꼭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에 가야 한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 편집부에서는 이들 중견 시인을 이끌고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으로 모시곤 했습니다. 내로라하는 중견 시인들은 하나같이 ‘여자가 옆에 안겨 붙어서 술을 따라 주어야’ 한다고 늘 말했으며, 여자가 없으면 ‘젊은 사내가 술을 따라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시인은 술기운이 올랐다는 핑계로 제 허벅지를 쓰다듬고 주무르고 허리를 안고 뽀뽀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무렵 제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여러 ‘어른 시인’들이 하나같이 ‘젊은 사내한테 추근거리니’ 소름이 돋을 뿐 아니라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제 허벅지를 주무르고 허리를 안고 뽀뽀를 해대는 시인을 물리치려고 하니, 앞에 앉은 다른 시인은 나더러 “왜 그래?” 하면서 외려 ‘어른 시인’이 나한테 해대는 성폭력을 감싸고 부추기기까지 했습니다. 참다못해 겨우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민중이나 진보를 말하는 시인이 어떻게 이렇게 더럽게 술을 마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중견 시인 한 분은 “니가 뭔데 ××야, 나이도 어린 게 입 닥쳐! 이 ×××야 얼른 자리에 앉아! 술이나 따라!” 하며 대꾸했습니다. “아니, 당신들이 어른이라면서요? 어른이라면서 이렇게 놀고 그렇게 욕할 수 있어요?” “왜? 뭐가 잘못됐어? 술은 이렇게 마셔야지!”


저는 어처구니없어서 이들한테 똑같이 욕으로 받아쳐 주고 일어섰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러니 이들 ‘어른 시인’은 “이 ×××아, 너 앞으로 문단에 나오기만 해 봐, 아예 문단에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어린 놈이 어디 건방지게 굴어!” 하고 대꾸했습니다. 그 뒤로도 온갖 욕을 퍼붓는데, 욕을 이렇게 잘해야 시인이 되는가 하고 싶더군요. 그러나 저는 귀도 몸도 더 더럽혀질 수 없기에 그 술자리를 박차고 나오려 하는데요, 제 몸을 더듬으며 추근대던 키 큰 시인이 내 팔을 억세게 붙잡더군요. “어디 가? 다시 여기 앉아서 술 대접 해! 어린 ××가 어른한테 술 대접도 안 하고 어딜 도망가려고 해!”


소름이 돋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기에 그 ‘어른 시인’ 팔을 팽개치고 달음박질을 쳤어요. 등 뒤로 들리는 욕지꺼리를 도리질치면서 내뺐습니다. 그 뒤로 그 출판사 언저리에는 되도록 가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술 대접을 하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오덕 님 시집 교정지를 주고받을 적에는 웬만하면 우편으로만 했고, 서울에 갔다가 중견 시인이라는 분들 얼굴을 스칠까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끔찍하고 싫은 짓을 겪어야 했던 ‘문단 성폭력 피해자’ 분들이 그분들 생채기를 털어놓으면서 여러 시인들 성추문 이야기가 불거졌습니다. 피해자인 그분들이 다시 피해를 안 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피해를 받은 분들이 피해 경험을 털어놓기는 무척 어렵다고 느낍니다. 사내인 저도 중견 시인들한테서 받은 성폭력을 털어놓기는 열 몇 해 만에 처음입니다. 그동안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고, 그저 가슴에 꽁꽁 묻어둔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생채기를 꽁꽁 묻어둔 채 살다 보니 저 스스로도 웃음이나 따스함이 자꾸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남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이들은 생채기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너무 모르거나 하나도 모르지 싶습니다.


제가 겪은 일을 돌아보면, 아무래도 그 ‘문단 권력자’한테서 ‘더 깊고 아픈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면서 이런 피해 사실을 못 밝히고 마는구나 싶습니다. ‘남자 시인이 젊은 남자한테 저지른 성폭력’도 꽁꽁 감추며 살 수밖에 없던 한국 문단 얼거리요 책마을이지 싶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일을 겪어야 한 이들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제는 이 응어리를 털고 싶어 몇 마디를 적습니다. 내 몸을 더듬고 문지르고 억지로 뽀뽀를 하던 시인 이름도, 그때 그런 지저분한 술자리를 벌이고 욕설을 쏟아내던 시인 이름도, 그들 이름을 제 입으로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그분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거듭나 주시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아로새겨진 생채기를 이렇게 글로 밝히는 까닭이 있습니다. 얼마 앞서 어느 ‘남성 미술평론가’ 한 사람이 “여고생의 속살 체모 상상을 글로 쓰는 표현의 자유”를 그분 누리사랑방에서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 ‘남성 미술평론가’는 “누구나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나이 어린 여자를 향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거듭 외칩니다.


이분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겠지요. 참말로 누구나 “표현할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는 이런 ‘남성 평론가나 작가’인 분들한테 한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표현할 자유”가 있듯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어떤 글이든 쓸 자유”가 있다면 누구나 “어떤 글로도 생채기를 받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지 싶어요. “표현할 자유”만 있고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자유는 무엇이고 권리란 무엇이며, 민주나 평화나 평등이란 무엇일까요? 누구한테나 “글을 쓸 자유”는 있을 터이나, “막글(막말)을 쓸 자유”까지 있지는 않을 텐데요? “성폭력을 할 자유”란 자유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주먹으로뿐 아니라 글로 일삼는 폭력은 ‘표현’이 아니라 오직 ‘폭력’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젊은 남자한테까지 성폭력을 일삼은 그 시인들은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난 이런 일을 다 잊어버렸을는지 모릅니다. 이 글에 그 시인들 이름을 밝힌다고 해도 하나도 기억을 못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가 그 시인들 이름을 굳이 밝히면 그 시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지난날을 뉘우칠까요? 아니면 그런 일은 없다면서 "증거를 대라"면서 발뺌을 할까요? 한 사람은 58년생 시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50년생 시인이라는 대목까지만 밝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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