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75



저절로 시가 되는 칠곡 할매들 말과 살림

―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칠곡 할매 119명 글

 삶창 펴냄, 2016.10.10. 9000원



  칠곡 할매 백열아홉 분은 얼마 앞서까지 이녁 이름을 손수 글로 못 썼다고 합니다. 할매 나이가 되도록 글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딸아들 모두 도시로 떠나고 손자를 맞이하는 할매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배운다고 해요.


  이제껏 흙을 만지고 물을 주무르며 살림만 하던 할매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연필을 처음으로 쥔대요. 호미랑 낫은 늘 쥐어 보았으나 연필만큼은 쥔 일이 없는데, 아주 서툰 손길로 연필을 쥐어서 더더욱 서툰 손놀림으로 이녁 이야기를 글로 쓰는 하루를 지낸다고 해요.



일주일 손녀를 보았다 / 엄마를 찾을줄 알았는데 / 잘놀고 순했다 / 밥을 잘 안 먹어서 힘들엇지만 / 그래도 좋다 / 넷살짜리가 말도 참 잘한다 / 재롱부리며 잘 노는 것을 보니까 / 참 행복하다 (손녀/김정자)


오늘은 큰딸 작은딸이 / 손자들 갓이 와서 동생내하고 / 소고기를 먹었다 / 참 맛나다 (참 맛나다/유순희)



  작은 시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삶창,2016)에는 백열아홉 할매마다 백열아홉 이야기를 백열아홉 빛깔로 그린 글이 흐릅니다. 백열아홉 할매는 저마다 글을 한 꼭지씩 썼습니다. 시가 무엇인지 몰라도, 글이 무엇인지 몰라도, 참말로 연필을 쥐고 종이에 뭔가 끄적이는 몸짓이 무엇인지 몰라도, 백열아홉 할매는 천천히 또박또박 참하게 글씨를 빚어서 이야기를 하나씩 선보였다고 합니다.



엄마를 일찍 여위고 사랑이란 단어를 /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 곳감이 프로포즈 할 때 / 편지로 사랑한다는 말 한 번밖에 없다. / 곳감한테도 딸 아들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말 / 우리 예뿐 며느리가 / 어머니 사랑합니다. / 그말을 듣는 순간 너무 너무 행복했다. / 아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우리 며느리 복덩이다. (우리 예뿐 며느리/이정란)



  ‘사랑’이라는 말을 곳감(영감)한테서 꼭 한 번 편지로 들었을 뿐, 더군다나 딸아들도 이 말을 들려준 적이 없다는데, 며느리가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고 나긋나긋 이야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고 이야기한 며느리는 꼭 한 번만 이 말을 들려주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할매를 뵐 적마다 틈틈이 이 말을 들려줄 테지요.


  조용한 시골집에서 시골살림을 일구는 시골 할매는 아주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이라 할 만한 말 한 마디 ‘사랑’을 들으며 가슴으로 북받치는 기쁨으로 웃고 노래를 하다가, 처음으로 익힌 한글로 이 이야기를 옮깁니다. 이리하여 며느리는 그냥 며느리가 아닌 “우리 며느리”예요. 우리 며느리는 그냥 우리 며느리가 아닌 “우리 예뿐 며느리”이고요.


  흔하거나 수수하다고 할 수 있는 한 마디 ‘사랑’인데, 이 말 한 마디로 할매가 웃고 며느리도 웃으리라 느껴요. 온 집안 사람들이 다 함께 웃는 살림이 되겠구나 싶어요.



봄 콩 숭가다 / 들에 쑥 뜨더다 / 집에 와서 이불 빨래해다 / 밭에 가서 도래밭 쪼사다 / 도래씨 흐터다 / 머리 염색도 해다 / 오늘 디기 바빠다 (봄 콩 숭가다/이순늠)


아침에 / 일어나 느티나무를 보면 / 기분이 좋습니다 / 가만히 보면 / 인물이 잘생긴 사람같습니다 / 나이 하루하루가 / 느티나무 그림자를 따라 / 즐겁게 돌아갑니다 (느티나무/노선자)



  칠곡 할매들은 이녁이 꾸리는 삶을 고스란히 옮깁니다. 군더더기를 붙일 일이 없습니다. 토를 달 일이 없고, 말꼬리를 늘어뜨릴 일이 없습니다. 할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고스란히 글씨로 옮겨요.


  표준 서울말이 아닌 칠곡말로 글씨를 그립니다. 글을 ‘쓴다’기보다 글씨를 ‘그린다’고 해야 걸맞을 칠곡 할매는 참말로 그림을 ‘그리’듯이, 꿈을 ‘그리’듯이, 사랑을 ‘그리’듯이 글씨를 그리면서 이야기를 하나하나 그려요. “콩 숭가”고 “쑥 뜨더”다가 “도래밭 쪼사”다가 “디기 바빠”맞은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투박하게 시 한 꼭지로 적어 냅니다.



어렸을 때는 여름이 되면 /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 시내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 버들가지 꺾어서 / 호땍이도 만들어 불며 / 재밌게 놀던 시절 / 언제나 그 시절이 다시 올까 (어린시절/장오희)



  칠곡 할매가 칠곡 이야기를 칠곡말로 그립니다. 정선 할매는 정선 이야기를 정선말로 그릴 수 있어요. 장흥 할매는 장흥 이야기를 장흥말로 그릴 만하고, 옥천 할매는 옥천 이야기를 옥천말로 그릴 만해요. 


  시골마다 시골 할매를 만나서 시골 할매 스스로 한글을 익혀서 시골 할매 이야기를 투박하지만 한 땀 두 땀 살뜰히 옮기는 글을 쓰시도록 북돋우면 참으로 아름답고 재미나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늘그막에 글을 새롭게 배우면서 삶을 새롭게 사랑하시도록 북돋운다면 ‘아기 울음소리’가 없어서 고요하다는 시골마을마다 새삼스레 웃음꽃이 피어날 만하지 싶어요.



웃고 지끼고 첨에는 / 이르미 삐딱삐딱 도라가디 / 이제 내 이름이 참마게 빈다 / 자꾸 쓰이 이름이 참매진다 / 내가 써도 글씨가 참하다 / 이름도 퍼떡 쓰게꼬 / 요래 이쁜 내 이름을 / 누구한테 자랑해보꼬 (글씨가 참하다/안윤선)



  “이름이”라고 못 적고 “이르미”라고 적어도 됩니다. “참해진다”라 못 적고 “차매진다”라고 적어도 돼요. 찬찬히 바느질을 하듯이, 찬찬히 호미질을 하듯이, 찬찬히 씨앗을 심어 찬찬히 거두듯이, 할매들 살림살이가 찬찬하면서 따사롭게 흘러서 ‘할매 이야기 시집’이 앞으로도 새록새록 태어나겠지요?


  우리 사랑이 비롯하고, 우리 꿈이 태어나며, 우리 숨결이 흐르는 시골노래가 아름답게 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절로 시가 되는 칠곡 할매들 말과 살림이 참말로 온누리를 포근하면서 살가이 어루만져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6.12.14.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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