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끈 애지시선 41
이성목 지음 / 애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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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5



늙은 소파가 노란 꽃을 피우다

― 노끈

 이성목 글

 애지 펴냄, 2012.9.27. 9000원



  실이나 삼이나 종이를 가늘게 비벼서 꼬아 길게 늘어뜨려서 ‘노끈’입니다. 종이를 꼬아 엮기에 ‘노’이고, 이 노로 그릇이나 바구니를 엮는 일을 ‘노엮개’라고 합니다. 아주 단단하지 않아도 제법 단단한 노끈이고, 이 노끈은 숲에서 자란 나무에서 비롯해요. 노끈을 손으로 만질 적에는 한결 보드라우면서 푸른 숨결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이성목 님 시집 《노끈》(애지,2012)을 읽으면서 노랑 노엮개랑 노끈을 새삼스레 떠올립니다. 이 시집에서는 노끈 이야기나 노나 노엮개 이야기는 흐르지 않습니다. 이 시집에서는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을 이야기합니다. 아주 단단하지 않으나 제법 단단하게 이어진 사람 사이 끈을 이야기합니다. 물에 젖으면 쉬 끊어질 수 있는 노끈처럼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도 아주 작은 일 하나로 끊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노끈)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은 천으로 짭니다. 천을 가만히 보면 수많은 실이 얼기설기 있습니다. 공장에서 화학섬유로 짠 옷이라 하더라도 모든 옷은 가느다란 실오리를 엮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얼핏 못 느낄 수 있는 실오리인데, 숲에서 온 실오리이든 석유에서 뽑은 실오리이든, 가느다란 실오리를 엮기에 비로소 옷이 태어나요.


  사람하고 사람 사이도 늘 이와 같다고 느껴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문득 보면 가볍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사이입니다. 가까이에 이어진 듯하고 멀리 떨어진 듯하기도 한 사이입니다. 우리는 서로 튼튼하게 잇닿은 사이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따로 떨어지며 멀어지는 사이가 될 수 있어요.



저, 몸을 함께 짜 맞춘 아비와 어미도 / 올 하나 풀어내지 못하였다 / 그는 매듭을 가졌다 몸속에 질긴 / 생이 올가미처럼 묶인 스무 살이었다 / 의사는 눈동자에 고인 검은 호수를 들여다보거나 / 일렁이는 수면에 청진기를 대 볼 뿐이었다 / 어미가 앞섶을 열어 헤쳐 꺼낸 / 돌덩이 같은 실몽당이 하나 / 아비는 실을 풀어주고 어미는 다시 옷을 짰다 (풀어 다시 짤 수 없는 옷)



  어버이는 아이하고 실오리가 엮입니다. 아이는 어머니 아버지하고 실오리가 엮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처음 나고 자라는 곳에서 수많은 동무나 이웃을 만납니다. 반가운 동무나 이웃이 있을 테고, 보기 싫은 동무나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가운 동무나 괴로운 이웃이 있을 수 있어요.


  때로는 구경꾼처럼 팔짱을 낍니다. 때로는 감정노동이라는 말처럼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띱니다. 때로는 억지스러운 웃음조차 없이 차갑거나 매몰찹니다. 때로는 모든 앙금을 털어내면서 환하게 노래합니다. 때로는 이도 저도 아니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팔순의 할머니를 아기처럼 무릎에 올려 앉히고 예순의 자원봉사 할머니가 흰밥 한 숟가락 퍼 올려 입에 댄다. 자아, 드세요. 입술만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다 마는 입맛에 게 왜 안 드세요? 말하고 한 숟가락 먹어보고, 맛있어요! (첫눈)


모든 육체는 목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품고 태어나는 것이다. 몸에서 시간이 비곗덩어리처럼 분리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킨 다음, 사내는 시간의 심복이 되었다. (새김꾼)



  여든 살 할머니 곁에서 밥을 떠먹이는 예순 살 할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아흔 살 할머니 곁에서 똥오줌을 치우는 일흔 살 할머니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스라한 지난날에는 서른 살 어머니가 열 살 아이를 돌보았을 테고, 한 살 아기를 보살폈을 테지요. 서로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돌보거나 보살피는 사이가 달라집니다. 천천히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끈으로 이어집니다. 또는 예전 끈이 끊어집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멀어지고, 아주 동떨어진 데에 있었지 싶은 사람이 가까이로 찾아옵니다.



소파가 꽃을 피우려는지 인조 가죽이 여러 갈래로 튼다. 갈라진 틈새로 노란 스펀지가 올라온다. // 의자는 몇 해 전에 이미 꽃을 피웠다. 굵고 탄력 있는 스프링 꽃대가 아직도 등뼈처럼 구부정하다. (이제 꽃피면 안 되겠다)



  늙은(또는 낡은) 소파가 노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폭신하던 걸상은 낡으면서 목숨이 다하여 이제 스러지려 한답니다. 사람은 늙고 살림은 낡습니다. 그런데 낡아서 스러지려고 하는 걸상은 어느 모로 보면 꽃을 피우는 모습 같다고 합니다. 용수철이 구부정한 등뼈처럼 보이고, 스펀지가 봄꽃처럼 노랗게 빛난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입은 옷은 보풀이 올라오고 해진 자리는 구멍이 납니다. 낡은 옷은 오물조물 조그마한 꽃이 잔뜩 피어나는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스무 해 즈음 입어서 해진 바지에 천을 대어 기우다가, 시집 《노끈》에 나오는 노란 꽃 피우는 소파 이야기를 읽다가, 꽃이란 무엇일까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꽃피우다’라는 말을 으레 젊은 사람한테 쓰는데, 어쩌면 ‘꽃피우다’는 나이가 젊은 사람한테만 쓰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꿈을 지어서 새롭게 깨어나려는 사람한테 쓰는 말이 아니랴 싶습니다.


  꽃이 피면서 한동안 눈부시지만, 이내 꽃이 지면서 씨앗을 맺어요. 꽃이 필 적에는 곧 꽃이 지며 씨앗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불꽃이 일기에 따스하다가 곧 불길이 사그라들어요. 나이가 들며 무르익는 사람도 살림도 천천히 거듭나는 사이가 되겠지요. 노끈에 서린 숲내음을, 사람 사이에 감도는 마음을 돌아봅니다. 2017.2.23.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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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동네 게시판 크레용하우스 동시집 1
박혜선 지음, 김정진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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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6



새봄에 깨어날 개구리를 기다리며 읽는 시

― 개구리 동네 게시판

 박혜선 글

 김정진 그림

 크레용하우스 펴냄, 2011.6.29. 9000원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까우면 몇 가지 그리우면서 반가운 님이 우리 곁에 새롭게 찾아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설렙니다. 첫째, 개구리가 곧 깨어나겠지 하고 생각해요. 둘째, 개구리에 이어 풀벌레도 깨어날 테지 하고 생각해요. 셋째, 겨울을 앞두고 이 땅을 떠난 숱한 철새가 다시 찾아오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박혜선 님이 빚은 동시집 《개구리 동네 게시판》(크레용하우스,2011)을 읽으며 새봄에 반가울 님 가운데 개구리를 떠올려 봅니다. 아, 개구리 노랫소리란! 개구리 뜀박질이란! 이슬 내린 풀잎에 앉아서 아침을 맞이하는 풀개구리를 보는 기쁨이란!



내가 아플 때 / 엄마 맘은 / 더 아프다 하셨다 // 개나리 엄마도 그랬을까? / 내가 노란 꽃 똑똑 따서 / 꽃비처럼 뿌리며 놀았을 때 (후회)


도장 콩, 찍는 대신 / 꽃잎 한 장 붙여 둔 / 개구리 동네 게시판 (개구리 동네 게시판)



  동시집 《개구리 동네 게시판》은 시골에서 사는 아이가 바라보는 모습이 잔잔히 흐릅니다. 오늘날 나오는 거의 모든 동시집이나 동화책은 도시 이야기가 바탕이에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도시에서 학교랑 학원 사이에서 맴돌이질하는 이야기만 지나치도록 넘치는 어린이문학이지 싶어요. 아무래도 시골에 사는 아이가 매우 적고, 거의 모든 아이가 도시에서 사니까, 이른바 ‘거의 모든 독자’ 눈높이를 맞추자면 시골 이야기보다 도시 이야기가 걸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한 마디를 묻고 싶어요. 그러면 시골 어린이를 헤아리는 동시나 동화는 없어도 될까요?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얼마 안 되는 독자’를 헤아리면서 이 시골 아이가 시골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아끼도록 북돋우는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은 없어도 될까요?



나보다 더 어렸을 때 / 엄마가 한 낙서 // 늙지도 않고 / 그대로 있다. (외갓집에 가면)


어스름한 저녁 / 엄마보다 먼저 / 대문을 들어서는 흙냄새 // 엄마가 자고 일어난 자리에 / 소르르 / 흙이 떨어져 있다. (우리 엄마)



  시골스러운 이야기를 시골스러운 목소리로 들려주기에 ‘시골 아이만 읽는 어린이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길어올린 시골 동시도 ‘도시 아이가 즐길 어린이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만해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도시사람이 늘 먹는 모든 밥은 시골에서 지어요. 시골이 있기에 밥도 나물도 뭍고기도 물고기도 먹어요. 시골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서 책걸상을 짜고 종이를 빚고 책을 엮어요. 시골에 아름드리 숲이 있기에 도시에서도 싱그럽고 푸른 바람을 마실 수 있어요.


  아무리 시골사람 숫자가 적더라도, 시골은 도시를 이루는 바탕이라 할 만해요. 아무리 시골 아이들이 아직도 빠르게 줄어들면서 도시로 빠져나가더라도 온누리 아이들은 시골스러운 숨결을 먹고 마시며 자란다는 대목을 놓칠 수 없어요.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는 게 아니라 / 텔레비전이 사람을 본다 // 말 한마디 없이 / 멀뚱멀뚱 자기만 쳐다보는 사람들 / 텔레비전은 참 우습다 (사람 보기)


빈 항아리 속에 떨어진 / 감 이파리 한 장도 / 따라간다 // 감 이파리 위에서 잠자던 / 달팽이 한 마리도 / 달팽이처럼 장롱 구석을 기웃거리던 / 왕귀뚜리 한 마리도 / 왕귀뚜리 눈처럼 까만 / 풀씨 몇 알도 / 빈 화분에 얹혀 (이사)



  차분하게 흐르는 동시를 읽습니다. 빠르게 내달리지 않는 삶결을 보여주는 동시를 읽습니다. 서로 나누는 살림을 드러내는 동시를 읽고, 철 따라 새롭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깃든 동시를 읽습니다.


  달력이나 손전화나 텔레비전 모두 내려놓고 생각해 보아요. 교과서를 들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달이나 날이나 철하고 동떨어져요. 국어 과목도 수학 과목도 사회나 과학이나 영어 같은 과목도, 막상 달이나 날이나 철을 헤아리지 않아요. 철 흐름이 안 담기는 교과서이고, 철 흐름을 살피지 못하는 교육 얼거리예요.


  겨울이 저무는 새봄이기에 들과 밭과 숲을 거닐면 푸릇푸릇 돋는 봄맞이풀하고 봄맞이꽃을 만날 수 있어요. 나무마다 곧 터지려는 조그마한 움을 찾을 수 있어요. 풀 한 포기가 교과서 노릇을 하고, 나무 한 그루가 참고서 구실을 해요. 멧새 한 마리가 교사 노릇을 하고, 풀벌레 한 마리가 강사 구실을 해요.



오월 한낮에 / 하얀 / 싸락눈 // 녹지도 않고 / 가지마다 조물조물 / 매달려 있다. (조팝나무)


전기톱이 / 나뭇가지를 땅으로 / 떨어뜨린다 / 잘려 나가는 / 그 가지 / 까치집일 수도 있는데 / 참새 놀이터일 수도 있는데 (가로수)



  《개구리 동네 게시판》에는 꽃잎이 붙는다고 해요. 사람 마을 게시판에는 무엇이 붙을까요? 개구리 마을에서는 냇바닥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일이 없을 테지요? 사람 마을에서는 아직도 냇바닥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일을 벌이고, 숲을 밀며, 오랜 골목마을을 부수는 일이 끊이지 않아요.


  도시에서 왜 가지치기를 해야 할까요? 나무가 무엇을 가리거나 막기에 그렇게 모질도록 줄기를 뭉텅뭉텅 베어야 할까요?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닦는 길보다, 사람이 아늑하게 거닐기에 좋은 길로 바꿀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교과서를 빨리 떼면서 시험성적이 잘 나오도록 하는 교육을 내려놓고는, 아이들이 숲바람을 쐬고 햇볕을 쬐면서 싱그럽게 자라도록 이끄는 새로운 배움맏당을 열 수 있을까요?



학교 가는 발걸음 / 바람의 입김이 보태지면 / 더 가볍다 / 체육 시간 / 땀 흘린 내 몸 / 바람이 스치면 / 금방 시원해진다 / 잠들 때도 / 창틈으로 달캉달캉 / 꽃내음 뿌려 주는 바람 (미안하다 바람아)



  새봄에 깨어날 개구리를 기다리며 시를 읽습니다. 새봄에 개구리랑 나란히 노래잔치를 벌일 풀벌레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시를 읽습니다. 새봄에 우리 집 처마 밑으로 제비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시를 읽습니다. 새봄에 흐를 흰구름을 꿈꾸면서, 새봄에 피어날 들꽃을 기다리며, 새봄에 터질 매화꽃이며 모과꽃이며 민들레꽃이며 앵두꽃이며 딸기꽃이며 기다리면서 시를 읽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작은 동시집을 가슴에 품고 즐거울 수 있기를 빕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도 작은 동시집을 두 손에 쥐며 너른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2017.2.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읽기/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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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을 주는 일 모악시인선 3
문신 지음 / 모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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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4



‘곁주기’하고 ‘겉주기’ 사이

― 곁을 주는 일

 문신 글

 모악 펴냄, 2016.9.23. 8000원



  시인 문신 님은 《곁을 주는 일》(모악,2016)이라는 시집을 내놓으면서 “곁을 주는 일”이란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이라고 읊습니다. 가늘면서 단단하게 읊는 “곁을 주는 일”을 곱씹어 봅니다. 누구한테는 ‘곁주기’가 ‘살부빔’일 수 있을 테지요. 누구한테는 곁주기가 ‘한마음’일 수 있어요. 누구한테는 곁주기가 ‘한눈’이나 ‘한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들아, // 속옷 바람으로 널 내쫓아놓고 애비는 처마처럼 두 귀가 얼어 네 울음을 듣는다. (동지)


잠이 가비얍다 낙엽이 진다 하늘은 어지럽고 아내는 살이 붇는다 달은 치마가 짧아지고 아들 녀석은 종아리 살이 단단하다 잠이 길어도 (입추)



  사내하고 가시내 사이에서 살을 부벼야만 서로 곁을 주는 일이 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살부빔은 수많은 곁주기 가운데 아주 조그마한 한 가지이지 싶어요. 살만 부비면서 머문다면, 살을 부비는 생각에서 멎는다면, 살을 부비고 끝낸다면, 이는 곁주기라기보다는 ‘겉주기’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친구의 이혼 서류에 보증인 진술서를 써 주고 온 날은 종일 맑았다 / 바람도 훈훈하였다 / 달력을 넘겨보니 어느덧 2월이었다 // 뒷담 그늘에 / 여중생 두 명이 쭈그리고 앉아서는 /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있었다 / 빨갛게 언 종아리를 와들와들 떨어대고 있었다 (지지난해)



  살아가는 하루를 시로 읊습니다. 살아가는 나날을 시로 그립니다. 살아가고픈 꿈을 시로 노래합니다. 살아가려는 몸짓을 시로 짓습니다. 시집 《곁을 주는 일》에는 문신 님 나름대로 용을 쓰고 악을 쓰며 이를 깨무는 살림이 흐릅니다. 감출 일이 없고 숨길 일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낼 살림이 흐릅니다.



곁을 주는 일이 이렇다 할 것이다 // 애초에 한 몸이었다가 홀연 등 떠밀린 것들 / 이만큼 /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 그러니 애인이여 / 우리 헤어져 / 둘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곁을 주는 일)



  밥물 안치는 곁님을 끌어다 앉혀서 눈을 함께 구경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밥물 안치는 곁님은 눈을 구경하도록 해 놓고서 아저씨 시인이 밥물을 마저 안쳐서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저씨 시인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비질을 하고 집살림을 건사해 놓고서 곁님더러 ‘살부빔’을 해 보자고 속삭였다면 어떤 이야기가 시로 드러날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눈 내린 아침, 밥물 안치는 아내를 끌어다 베란다에 앉혀 놓고, 저 눈의 무늬를 가늠해보라고, 눈 구경시킨다 (연애의 무늬)


아내와 다투고 침묵으로 하루를 보낸다 입을 닫으니 귀만 예민해진다 아내가 부엌에서 혼잣말하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 발가락 끝에서 핏줄 튀는 소리 그리고 고요 소리 고요도 이렇게 소란한 것을 (아내와 다툴 일이 아니다)



  사내가 쓰는 시에서 굳이 밥내음이나 물내음이 흘러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내가 쓰는 시에서 밥내음이나 물내음이 흐르지 않을 적에, 이른바 살가운 살내음이 살림살이에 젖어드는 이야기가 흐르지 않을 적에는, 어쩐지 겉주기로 그치는 ‘겉시’가 되지 싶어요.


  곁을 주는 일을 노래하려는 시라면 ‘겉시’보다는 ‘곁시’가 될 적에, ‘곁노래’를 부르는 ‘곁님’하고 하나가 되는 ‘곁마음’이 될 적에, 수많은 이야기가 곱게 살랑살랑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2017.2.1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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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65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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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3



천사한테서 몸을 꾼 시인은 빚에 시달리며

― 생물성

 신해욱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9.9.7. 8000



  아이들은 마을고양이한테 밥을 챙겨 줍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밥을 챙겨 줍니다. 나한테는 나를 낳아 돌본 어버이가 있고, 곁에서 지켜보는 살붙이가 있으며, 둘레에서 생각해 주는 이웃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숨결로 하루를 맞이하면서도 가만가만 이어지는 삶이지 싶습니다. 살아서 움직이기에 서로 얽히는 살림이지 싶습니다.


  신해욱 님이 빚은 시집 《생물성》(문학과지성사,2009)에서 흐르는 숨결을 헤아려 봅니다. 서로 얽힌 듯 만 듯 보이면서도 언제나 서로 가늘게 잇닿은 끈으로 맺는 모습을 시 한 줄로 읽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서며 스스로 말하는 목숨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 나는 내가 되어가고 / 나는 나를 /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축, 생일)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 내가 속한 시간과 / 나를 벗어난 시간을 / 생각한다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가지런히 두는 법을 배운 적 없더라도, 아이하고 함께 살며 가지런히 두는 법을 새롭게 배워서 가르칩니다. 더 맛나게 밥을 짓는 길을 배운 적 없더라도, 아이하고 함께 지내며 맛나게 밥상을 차려서 나누는 길을 새삼스레 배워서 물려줍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문득 돌아봅니다.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길을 새로 살핍니다. 둘레에서 저마다 다른 살림을 가꾸는 이웃을 품는 길을 하나씩 천천히 헤아립니다.



귀가 몇 개만 더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 물이 물에 녹는 / 소리 속에서 / 오래오래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귀)



  귀가 둘뿐이기에 소리를 더 적게 듣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귀가 둘이어도 소리를 더 넉넉히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귀가 열이나 스물이어도 아뭇소리를 안 듣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마을고양이가 배고프다며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택배 짐차가 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물 끓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나비가 번데기를 벗고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실은 내가 부러웠던 건 / 네가 아니라 / 너의 부드러운 손가락 . // 너의 손가락으로 / 내 손을 잡고 / 내 얼굴을 만지고 / 그리고 네 얼굴을 만지는 것. // 사랑은 왜 세 사람이 할 수 없을까. / 왜 세상에는 / 너와 밖에 없는 것일까. (손)



  시집 《생물성》에 흐르는 ‘생물성’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우리가 사람이라는 목숨으로서 어떤 숨결을 짓거나 이루거나 나누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 손하고 네 손가락이 얼크러지는 사이를 생각합니다. 네 얼굴하고 내 이마가 맞닿는 틈을 생각합니다. 바람 소리하고 구름 소리는 어느 만큼 벌어지는가를 생각하고, 풀잎하고 나뭇잎 사이에 어떤 소리가 흐르는가를 생각합니다.



한쪽 눈에 하얀 안대를 하고 / 하얀 마스크를 썼다. // 쥐에게도 개에게도 얼굴이 있다는 걸 생가하면 / 나는 터무니없이 부끄러워지고 / 풀이 죽는다. (생물성)


천사에게 / 몸을 꾸었다. // 부족하지 않을 만큼 나에게도 있었는데 / 시간과의 비례가 / 나는 아주 좋지 않은 경우였다고 한다. // 천사의 몸으로서 / 앞으로 나는 빚에 시달리게 된다. (빚)



  시를 쓴 신해욱 님은 천사한테서 몸을 꾸는 바람에 내내 빚에 시달릴밖에 없다고 합니다. 모자라지 않을 만큼 몸뚱이가 많았는데에도 천사한테서 새삼스레 몸을 꾸었다고 합니다.


  허울 같은 몸을 여럿 건사한다면 이 허울을 벗는 날부터 홀가분할 만할까요. 자꾸 새로운 옷을 꾸려고 하기보다는 내 낡은 몸이 오늘부터 새로운 몸이 되도록 가꿀 수 있을까요. ‘빚’하고 ‘빛’은 고작 삐침 하나가 다를 뿐이지만, 두 말은 아주 크게 벌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나’하고 ‘너’도 고작 삐침 하나가 엇갈릴 뿐입니다.


  빚을 지면서 빛을 바라고, 빛을 가꾸면서 빚을 텁니다. 나를 아끼는 손길로 너를 아끼고, 너를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나를 스스로 사랑합니다. 이제 시인은 나비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천사한테서 꾼 몸을 돌려주고 스스로 허물벗기를 하면서 나비로 깨어날 하루를 맞이할 만할는지요. 그동안 짊어진 빚은 참말 낡은 허물로 내려놓고서 스스로 새 몸이 되어 깨어날 수 있을까요.


  시를 읽는 사람은 싯말에 흐르는 숨결을 받아먹으면서 스스로 깨어나려는 꿈을 짓고 싶은 마음이지 싶습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바람이 천천히 바뀝니다. 뭍바람이 어느새 바닷바람으로 바뀌는 2월입니다. 2017.2.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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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생각 문학의전당 시인선 213
김성렬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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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1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 본전 생각

 김성렬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9.18. 9000원



  울산에서 살며 조용히 시를 짓는 김성렬 님은 《본전 생각》(문학의전당,2015)이라는 시집을 두 권째 내놓았습니다. 2008년에 첫 시집 《종점으로 가는 여자》를 내놓았다고 하는데 이 시집이 좀처럼 안 팔리면서 먼지만 뒤집어썼다고 해요. 읽히지 못하고 먼지만 먹는 시집이 너무 안쓰러워 그냥 둘레에 ‘나눠 줘버릴까’ 하고 생각했다는데, 차마 그냥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먼 곳에 사는 동무가 떠올랐고, 먼발치 동무한테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찬거리 사러 마트 갈 때마다 / 비싼지 싼지 구분 못해 / 일단 먹음직스럽다 싶으면 이것저것 주워 담았다가 / 낭패 보기 일쑤였던 할머니들 // 복지관 한글학교 다닌 뒤부터 / 진열대 앞에 붙은 금액 / 더듬더듬 읽고 / 찬거리 계산한 후 / 우수리까지 꼼꼼히 챙긴다 (문맹 탈출기)



  시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사는 동무는 시인이 보낸 시집을 받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시골 면소재지에는 책방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읍내에는 책방을 건사하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기’란 몹시 어려울 수 있어요. 아니,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먼지만 먹던 시집을 선물로 받은 시골 사는 동무들이 뭔가 주섬주섬 꾸려서 시인한테 보내 주었다고 해요. 바다에서는 바닷것을, 멧골에서는 멧것을 바리바리 보내 주었다지요.



먼지 뒤집어쓴 시집 바라볼 때마다 / 아무나 한 권씩 나눠줘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만데 싶어 /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들에게 한 권씩 보내주었다 // 어촌 사는 친구는 / 새벽에 출항해서 막 건져 올린 / 해산물 박스를 보내왔고 / 두메산골 벗은 / 아침에 들에 나가 저물 때까지 / 땀으로 딴 농산물 박스를 보내왔다 (물물교환)


옥탑방으로 이사한 날 아침 / 세탁기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 지하 단칸방 살 때는 / 해가 뜨는지 지는지 몰랐는데 // 옥탑방에는 해가 살고 있었다 (옥탑방)



  그나저나 대통령은 책을 읽을까요? 시장이나 국회의원은 책을 읽을까요? 책을 바지런히 읽던 살림을 오랫동안 잇다가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온갖 갈래 책을 두루 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책을 읽을 틈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인 이는 얼마나 될는지요?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느 때에 책을 거의 안 읽던 사람’들이 정치나 행정이나 문화나 경제나 복지나 교육을 주무르는 벼슬아치가 되도록 표를 주는 삶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책조차 안 읽는 사람’을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팔짱을 낀 채 우리 스스로도 ‘베스트셀러 몇 권’을 빼고는 막상 책을 안 읽지는 않았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새롭게 삶을 배우는 길로는 좀처럼 안 접어들지 않은 탓에, 대통령을 비롯해서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터무니없는 이들이 정치권력이나 문화권력을 주무르도록 내버려두었을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밖에 나가든 들어가든 / 웃을 일 없는 세상에 넌더리난 그는 / 책을 읽으며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았다 / 그러므로 책 속에 푹 빠진 그는 / 전철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마다 / 남들은 스마트폰 만지작거릴 때도 책을 읽는다 / 주말 저녁, 회사 동료들 끼리끼리 / 회사 근처 주점에 둘러앉아 고주망태 되도록 / 술잔 주고받으며 노닥거리는 동안 / 그는 일찍 퇴근해 / 책갈피 넘기며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 얘들아, 아빠 깨워라 아침 먹게 / 으이그,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 국, 찌개 식는데, 책 덮어놓고 / 빨리 밥 먹지 뭐하고 있어? 상 치워 (책 읽는 사람)



  시를 써서 시집을 내놓아도 먼지만 먹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꿋꿋하게 책을 읽습니다. 시인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되니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해요. 책 읽는 사람이 되면서 회사를 마치고서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루를 기쁘게 마무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한소리를 듣는다지요.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하고 말이지요.



막상 현역에서 은퇴하고 보니 / 하나같이 빈털터리 / 분가한 자식들에게 전화해도 다녀가기는커녕 / 소식조차 없자 섭섭한 아버지들 // 생애 최악의 재테크라며 후회했다, / 거기다 사별한 아버지들 말벗은 반려견뿐 / 아니면 TV밖에 없다 (재테크)



  시집 《본전 생각》에 흐르는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은퇴한 아버지들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빌린 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대목을 뒤늦게 알았다는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각혈〉이라는 시를 읽으며 문득 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에 낼 돈’을 빌리느라 무던히 머리를 조아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새는 ‘학교에 낼 돈’이 많이 줄었다고 할 만한데, 예전에는 툭하면 무슨 성금을 내라 무슨 기금을 내라 무슨 육성회비를 내라 … 그저 ‘돈 먹는 물뚱뚱이’인 학교였어요. 주마다 성금을 내야지요, 주마다 학교 새마을금고에 돈을 내야지요, 날마다 무슨 숙제 준비물을 사서 가야지요, 철마다 꽃그릇을 사라느니 뭐를 사라느니 하지요.



사립문 앞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신 어머니 / 사내놈이 울긴 왜 울어, 혼내시며 / 팔짱 낀 겨드랑이 주먹 속에서 / 꼬깃꼬깃 말아 쥔 돈 건네주셨다 / 그 돈은 / 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네 엄마, / 아버지 앞에 각혈 토하듯 머리 조아리며 / 빌린 돈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각혈)



  아득하며 아련하면서 아픈 이야기가 오늘 쓸쓸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구나 싶은 삶을 다독여 시 한 줄로 갈무리합니다.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시를 씁니다. 책을 읽으며 웃음을 되찾았다고 하기에 시를 짓습니다. 스스로 새롭고 싶기에 책을 읽고 시를 씁니다.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 즐거운 살림이 되려고 책을 곁에 두고 시를 짓습니다. 이 마음, ‘본전’을 바라는 생각보다 ‘살림’을 바라는 생각을 곱씹습니다. 2017.1.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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