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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생각 ㅣ 문학의전당 시인선 213
김성렬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9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281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 본전 생각
김성렬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9.18. 9000원
울산에서 살며 조용히 시를 짓는 김성렬 님은 《본전 생각》(문학의전당,2015)이라는 시집을 두 권째 내놓았습니다. 2008년에 첫 시집 《종점으로 가는 여자》를 내놓았다고 하는데 이 시집이 좀처럼 안 팔리면서 먼지만 뒤집어썼다고 해요. 읽히지 못하고 먼지만 먹는 시집이 너무 안쓰러워 그냥 둘레에 ‘나눠 줘버릴까’ 하고 생각했다는데, 차마 그냥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먼 곳에 사는 동무가 떠올랐고, 먼발치 동무한테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찬거리 사러 마트 갈 때마다 / 비싼지 싼지 구분 못해 / 일단 먹음직스럽다 싶으면 이것저것 주워 담았다가 / 낭패 보기 일쑤였던 할머니들 // 복지관 한글학교 다닌 뒤부터 / 진열대 앞에 붙은 금액 / 더듬더듬 읽고 / 찬거리 계산한 후 / 우수리까지 꼼꼼히 챙긴다 (문맹 탈출기)
시인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사는 동무는 시인이 보낸 시집을 받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시골 면소재지에는 책방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읍내에는 책방을 건사하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기’란 몹시 어려울 수 있어요. 아니, 시골에서 살며 책을 사서 읽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먼지만 먹던 시집을 선물로 받은 시골 사는 동무들이 뭔가 주섬주섬 꾸려서 시인한테 보내 주었다고 해요. 바다에서는 바닷것을, 멧골에서는 멧것을 바리바리 보내 주었다지요.
먼지 뒤집어쓴 시집 바라볼 때마다 / 아무나 한 권씩 나눠줘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 그동안 들인 공이 얼만데 싶어 /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들에게 한 권씩 보내주었다 // 어촌 사는 친구는 / 새벽에 출항해서 막 건져 올린 / 해산물 박스를 보내왔고 / 두메산골 벗은 / 아침에 들에 나가 저물 때까지 / 땀으로 딴 농산물 박스를 보내왔다 (물물교환)
옥탑방으로 이사한 날 아침 / 세탁기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 지하 단칸방 살 때는 / 해가 뜨는지 지는지 몰랐는데 // 옥탑방에는 해가 살고 있었다 (옥탑방)
그나저나 대통령은 책을 읽을까요? 시장이나 국회의원은 책을 읽을까요? 책을 바지런히 읽던 살림을 오랫동안 잇다가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온갖 갈래 책을 두루 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우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일이 바빠도 책을 읽을 틈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인 이는 얼마나 될는지요?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느 때에 책을 거의 안 읽던 사람’들이 정치나 행정이나 문화나 경제나 복지나 교육을 주무르는 벼슬아치가 되도록 표를 주는 삶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책조차 안 읽는 사람’을 대통령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팔짱을 낀 채 우리 스스로도 ‘베스트셀러 몇 권’을 빼고는 막상 책을 안 읽지는 않았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새롭게 삶을 배우는 길로는 좀처럼 안 접어들지 않은 탓에, 대통령을 비롯해서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터무니없는 이들이 정치권력이나 문화권력을 주무르도록 내버려두었을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밖에 나가든 들어가든 / 웃을 일 없는 세상에 넌더리난 그는 / 책을 읽으며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았다 / 그러므로 책 속에 푹 빠진 그는 / 전철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마다 / 남들은 스마트폰 만지작거릴 때도 책을 읽는다 / 주말 저녁, 회사 동료들 끼리끼리 / 회사 근처 주점에 둘러앉아 고주망태 되도록 / 술잔 주고받으며 노닥거리는 동안 / 그는 일찍 퇴근해 / 책갈피 넘기며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 / 얘들아, 아빠 깨워라 아침 먹게 / 으이그,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 국, 찌개 식는데, 책 덮어놓고 / 빨리 밥 먹지 뭐하고 있어? 상 치워 (책 읽는 사람)
시를 써서 시집을 내놓아도 먼지만 먹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꿋꿋하게 책을 읽습니다. 시인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 되니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해요. 책 읽는 사람이 되면서 회사를 마치고서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루를 기쁘게 마무를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한소리를 듣는다지요. “책 속에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하고 말이지요.
막상 현역에서 은퇴하고 보니 / 하나같이 빈털터리 / 분가한 자식들에게 전화해도 다녀가기는커녕 / 소식조차 없자 섭섭한 아버지들 // 생애 최악의 재테크라며 후회했다, / 거기다 사별한 아버지들 말벗은 반려견뿐 / 아니면 TV밖에 없다 (재테크)
시집 《본전 생각》에 흐르는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은퇴한 아버지들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빌린 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대목을 뒤늦게 알았다는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각혈〉이라는 시를 읽으며 문득 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에 낼 돈’을 빌리느라 무던히 머리를 조아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새는 ‘학교에 낼 돈’이 많이 줄었다고 할 만한데, 예전에는 툭하면 무슨 성금을 내라 무슨 기금을 내라 무슨 육성회비를 내라 … 그저 ‘돈 먹는 물뚱뚱이’인 학교였어요. 주마다 성금을 내야지요, 주마다 학교 새마을금고에 돈을 내야지요, 날마다 무슨 숙제 준비물을 사서 가야지요, 철마다 꽃그릇을 사라느니 뭐를 사라느니 하지요.
사립문 앞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신 어머니 / 사내놈이 울긴 왜 울어, 혼내시며 / 팔짱 낀 겨드랑이 주먹 속에서 / 꼬깃꼬깃 말아 쥔 돈 건네주셨다 / 그 돈은 / 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네 엄마, / 아버지 앞에 각혈 토하듯 머리 조아리며 / 빌린 돈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각혈)
아득하며 아련하면서 아픈 이야기가 오늘 쓸쓸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구나 싶은 삶을 다독여 시 한 줄로 갈무리합니다.
책을 읽어도 밥은 안 나온다지만 시를 씁니다. 책을 읽으며 웃음을 되찾았다고 하기에 시를 짓습니다. 스스로 새롭고 싶기에 책을 읽고 시를 씁니다.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 즐거운 살림이 되려고 책을 곁에 두고 시를 짓습니다. 이 마음, ‘본전’을 바라는 생각보다 ‘살림’을 바라는 생각을 곱씹습니다. 2017.1.2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