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랑 깨 - 권오삼 동시집
권오삼 지음, 안녕달 그림 / 창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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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7


코앞에 바쳐야 먹는 게으름뱅이는 누구지?
― 진짜랑 깨
 권오삼 글
 안녕달 그림
 창비 펴냄, 2011.12.20. 8500원


  할아버지 동시인 권오삼 님은 동시집 《진짜랑 깨》(창비,2011)에서 ‘게으름뱅이들’ 이야기를 슬며시 들려줍니다. 이 게으름뱅이는 능금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지만 정작 제 손으로 깎아 먹을 줄 모른다지요. 누가 깎아서 코앞에 갖다 바쳐야 비로소 잘 먹는다고 해요.

  능금 한 알을 손수 깎을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라면, 능금나무를 돌보면서 능금알을 손수 딸 줄도 모르겠지요. 능금뿐 아니라 다른 열매도 손수 딸 줄 모를 뿐더러, 손수 기를 줄도 모를 테고요.
  

게으름뱅이들은 절대로
제 손으로 사과를 깎아 먹지 않는다.
사과를 무척 좋아해도.

깎아서 코앞에 갖다 바치면
그제야 잘 먹는다.

그 게으름뱅이들은 주로
아빠라는 사람들이다. (게으름뱅이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게으름뱅이일 수 없습니다. 예부터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들일을 하고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고 연장을 깎고 …… 누구나 더없이 바지런히 살았어요. 이러면서 능금나무이건 배나무이건 감나무이건 알뜰히 돌보았지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그만 ‘게으름뱅이’가 되고 말았을까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능금 한 알조차 손수 못 깎는 버릇이 몸에 배고 말았을까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집안일이나 살림을 으레 어머니(곁님)한테 슬쩍 떠넘기는 게으름뱅이 굴레에 갇혔을까요.


선생님이 보시고는
둘 다 틀렸다고 하면서
7단과 8단을 다섯 번 쓰라고 했다.

연아가 나 때문에 틀렸다고
눈을 흘기며 종알종알
집에 갈 때까지 나하고 말도 안 했다. (구구단 시험)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데, 짝꿍이 내 시험종이에 적은 답을 베껴서 썼대요. 그러나 내 시험종이에 내가 적은 답은 다 틀렸기에, 내 시험종이를 베껴서 쓴 짝꿍도 함께 틀렸다는군요. 너나 나나 똑같은데 굳이 안 베껴도 되었을 텐데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시험을 치르면 될 텐데요. 무엇을 모르는지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 이 모르는 것을 제대로 배워서 알 수 있을 텐데요.

  몰래 베껴서 시험 점수를 잘 받으면 즐거울까요. 몰래 베껴서 시험 점수를 높인들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아이들을 닦달하는 터라 그만 아이들은 점수에 얽매여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떳떳하게 밝히면서 즐겁게 배우는 길하고 멀어질는지 모릅니다.


형은 중학생이 되고부터
학교 가기 싫다는 소리 자주 한다.
중학교에선
공부, 공부, 공부만 해야 한다고
숙제도 엄청 많이 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선배들도 무섭다고 한다. (우리 형)


  학교 밖에서 본다면 나이 한두 살쯤 아무것이 아닙니다. 서른 살이나 마흔 살, 쉰 살이나 예순 살, 일흔 살이나 여든 살이라는 테두리에서 볼 적에도 나이 한두 살쯤 아무것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학교 문턱만 넘어서면 나이 한두 살로 선배가 되고 후배가 되면서 높직한 울타리가 쌓인다고 해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나이 한두 살을 놓고서 윽박지르거나 괴롭히는 몸짓이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해요.

  아름답게 한 살을 먹고, 즐겁게 한 살을 먹으며, 사랑스럽게 한 살을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한 살을 더 먹는 동안 더 배운 만큼 고개 숙일 줄 아는 몸짓이 되면 좋을 텐데요.


새는 악보 안 봐도 노래할 줄 안다.

나비는 음악 없어도 춤출 줄 안다. (새와 나비)


  할아버지 동시인은 비랑 구름을 바라보다가 새랑 나비를 바라봅니다. 비록 요즈음 도시에서는 새나 나비를 느긋하게 만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시골이든 도시이든 새는 음악 수업을 안 받아도 노래를 한다지요. 나비는 노래가 따로 없어도 춤을 춘다지요.

  이와 달리 사람들은 따로 음악 교육을 받아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잘못 여기곤 합니다. 즐거운 살림이 될 적에 저절로 즐거이 노래가 나오는 줄 잊곤 해요. 따로 춤을 배우러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줄 잊지요. 저절로 어깨춤을 추고, 스스로 손짓 발짓 몸짓을 놀려서 춤을 누리면 되는 줄 잊고 말아요.


둥근 바퀴는 자전거 다리
자전거의 둥근 두 다리와
아이의 길쭉한 두 다리가
짝이 되어 짝꿍이 되어서
씽씽 쌩쌩 신나게 달리면
몸에 와 감기는 바람바람 (자전거 타기)


  아이도 어른도 몸에 와 감기는 바람을 쐬며 자전거를 달릴 수 있기를 빌어요. 싱그러운 바람을 맞이하며 자전거를 달리는 기쁨을 누려 본다면, 우리 사회는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내려놓고서 함께 자전거를 달리다 보면,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어요. 때로는 걷고 때로는 자전거를 달리면서 마을하고 학교를 알뜰살뜰 가꾸는 길을 헤아릴 수 있지요.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새랑 나비를 동무로 삼을 수 있다면, 이쁘게 깎아서 코앞에 내밀어야 먹는 능금 한 알이 아니라, 저마다 마당이나 텃밭을 가꾸어 능금나무를 돌볼 줄 알면서 도란도란 나누는 능금 한 알로 거듭날 만하지 싶어요. 바지런하게 살림을 지을 아버지가 아닌, 게으름뱅이가 되는 아버지로 길들이는 사회는 이제 그만 멈추도록 서로 따사로이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4.27.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읽기/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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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계보 문학의전당 시인선 142
배재형 지음 / 문학의전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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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0



꽃내음이 흘러 두 눈에 눈꽃

― 소통의 계보

 배재형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2.11.28. 8000원



  바람이 흘러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갑니다. 바람길이 막힐 적에는 숨길이 막혀, 어디에서건 숨을 못 쉽니다. 바람길이 뚫리기에 우리는 맑은 숨을 마시면서 하루를 지을 수 있습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이 마을을 스치고, 숲에서 부는 바람이 서울로 갑니다. 공장에서 부는 바람이 시골로 오고, 발전소에서 부는 바람이 바다를 덮습니다.


  배재형 님 시집 《소통의 계보》(문학의전당,2012)를 읽습니다. 서로 흘러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싯말을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소복 입은 구름은 밤늦도록

뭉게뭉게 하늘을 거닌다

할머니는 달 여행하러

우주선처럼 하늘로 날아가셨다 (월하의 공동묘지)


아침 햇살마냥 여관 뒷문을 나오다

버려진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겉으로는 멀쩡한 허우대 하나 

소리 없이 서 있다 (소통의 계보)



  할머니는 달마실을 가셨으면 할아버지는 별마실을 가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달을 거쳐 해로 마실을 할 수 있고, 이 해누리에서 벗어나 머나먼 별누리로 마실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구에 머물면서 고즈넉히 지낼 수 있겠지요. 이웃집에만 가볍게 마실을 하며 지구라는 별에 깃들 수 있어요.


  집하고 일터 사이를 흐를 수 있습니다. 때때로 다른 고장으로 볼일을 보러 가면서 여관에 묵을 수 있습니다. 버려진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조그마한 들꽃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보거나, 낮에 뜬 달을 볼 수 있어요.



창가가 어두워졌다

저녁의 나이를 물감으로 그릴 수 있다면

어떤 풍경이 될까

동네 유치원이 사라진 저녁은

먼지와 잿더미가 가득 찬

빈 공사장 풍경 사이로

푸른 자전거 하나 지나간다 (저녁풍경)



  어느 마을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문을 닫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미어터집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놀이터가 자취를 감춥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쇼핑센터가 들어섭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조용히 흐르는 바람이 머물고, 어느 마을에서는 번쩍거리는 등불이 춤추며 바람이 깃들 자그마한 틈조차 없습니다.



복권가게에 붙은 찬란한 전광판에서

목 빼고 기다린 당첨숫자들이 차례대로 지나간다

비싼 꽃 우리 식구 쌀 한 포대는 족히 된다며

핀잔이나 주지 않을까 (꽃집 앞)


아내의 복숭아뼈 벌겋게 부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시장 한 구석

무거운 시장바구니 들고 가던 아내

양손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아내의 복숭아 바라보았다 (복숭아꽃 아내)



  우리 마음에 꽃이 피어난다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도 이 꽃에서 향긋한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꽃이 안 피어난다면, 제아무리 값진 꽃다발을 품에 안더라도 향긋한 기운이 퍼지지 않습니다. 값진 꽃이나 비싼 꽃이기에 꽃내음을 퍼뜨리지 않아요. 따사로운 마음으로 손에 쥔 풀꽃송이에서 꽃내음이 퍼져요.


  곁님 다리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곁님 입술에서 앵두꽃이 피며, 곁님 볼에서 능금꽃이 핍니다. 우리 몸 어디에서나 마알갛게 꽃이 핍니다. 눈에서는 어떤 눈꽃이 필 만할까요? 마음에서는 어떤 마음꽃이 흐드러질 만할까요? 고이 흐르고 흘러 이야기가 될 노랫가락이 싯말 한 마디에 내려앉습니다. 2017.4.20.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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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무겁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05
최부식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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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6



무거운 봄비가 산뜻할 수 있도록

― 봄비가 무겁다

 최부식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6.17. 9000원



  겨울이 저물 즈음에는 제법 포근하구나 싶은 날씨가 찾아듭니다. 이러면서 이제 봄이로구나 싶을 즈음에는 거꾸로 제법 쌀쌀하구나 싶은 날씨가 찾아들어요. 어느 모로 보면 뒤죽박죽이네 싶으나, 땅으로 보고 들로 보며 숲으로 보면 제결이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철로 바람이 바뀐다고 미리 알리고, 추위가 곧 가시지만 섣불리 들뜨지 말라면서 된바람이 마지막으로 싱싱 몰아쳐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 눈물의 새벽기도 / 빼곡하다 // 돋보기안경 쓰고 베껴 쓴 / 언약의 눈빛들 / 모든 걸 지나가게 했다 (필사)


이른 봄밤, 아버지 밭둑의 매화 암향 맡으러 간 사이 엄마는 텃밭에 심을 한 해 찬거리를 꿈꾸었지요 냉이 캐다가 제비꽃 옮겨 심는 꼴 싫어 타박 놓고 고랑에 심은 꽃잔디 환히 번지자 호미로 캐내며 차라리 가지 심어 가지꽃 보자던 감자 심어 감자꽃향 맡자던 엄마의 텃밭이었어요 (텃밭 꽃밭)



  시집 《봄비가 무겁다》(문학의전당,2015)를 읽으면서 봄을 헤아리고 날씨를 돌아봅니다. 봄이지만 아직 섣부른 봄인가 싶도록 땅이 안 녹더군요. 이러다가도 어느 날부터 흙이 포실포실 부서지도록 녹고, 개구리가 깨어나요. 언제쯤 제대로 봄이려나 하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하루하루 지나다 어느 날 문득 ‘그래 봄이지’ 하는 소리가 절러 나옵니다. 개구리와 함께 뱀이 깨어나고, 풀벌레도 하나둘 깨어요.


  저마다 철을 맞추어 깨어납니다. 저마다 철에 따라 기지개를 켭니다. 깊이 잠들던 목숨붙이가 하나씩 눈을 뜨면서 온누리는 새로운 모습이 되어요. 지난해처럼 봄이고, 지지난해처럼 참말 봄이지만, 해마다 다른 봄으로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



인도네시아 어디쯤 / 한 해 두 번씩 쌀농사 짓는 친구들 / 오리 떼 몰고 노는 아이 남겨두고 / 시골 농장 온 지 세 해째건만 / 더듬는 말만큼 어둠도 여전히 낯설다 (귀가)



  봄은 어디에서나 봄인데, 고향이 아닌 곳에 선 사람한테는 똑같은 봄이기 어렵습니다. 봄은 늘 봄이지만, 즐겁게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입에 풀질을 하려고 등허리가 휘어야 하는 사람한테는 봄을 헤아리거나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이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오면 나아질 길이 있을까요. 여름을 바라기 앞서 이 봄부터 즐거운 시골살림으로 가꾸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는 시골살림을 이제라도 그치고, 시골 아이를 시골에서 키워 시골 흙지기로 북돋우는 시골살림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러면서 빽빽한 도시에서 도시 아이가 시골로 터전을 옮겨 새롭게 흙지기로 살아갈 길을 고이 품어 줄 수 있을까요.



생판 처음 돌구지 타고 월남 하늘에서 제초제를 퍼부었다 푸른 숲이 녹아내리고 말라 징글징글한 송천 논둑 잡초들 깡그리 없애는데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베트콩 시신 앞에서 폼 잡은 사진 들고 보릿짚 냄새 구수한 고향에 새까만 얼굴로 돌아왔다 (에이전트 오렌지)


길림에서 오신 오촌 당숙 돈 될까 갖고 온 약재들 / 쓸모없음 눈치채고 몰래 죄다 내다버렸다 / 그리움이 자본의 쓴맛으로 사그라질까 / 못내 푼 마음 다시 봇짐 싸 묶으신다 (길림에 가시거든)



  농기계를 들이고, 비닐을 덮고, 농약과 비료를 뿌리고, 농협에 짊어지고 가서 팔아야 하고, 이런 관행논은 이제 그만두고, 시골지기도 느긋하면서 넉넉하고 도시 이웃도 즐거우면서 새롭게 함께 할 만한 흙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무거운 봄비가 아닌 산뜻한 봄비로 맞아들일 수 있는 길을 꿈꾸어 봅니다. 돈으로 구르는 시골살림이 아닌, 따스한 사랑으로 흐르는 시골살림이 될 날을 바랍니다. 아마 그무렵에는 “봄비가 산뜻하다”고 하는 새 노래가 빛나고, “봄비가 싱그럽다”고 하는 새삼스러운 노래가 춤추리라 생각합니다. 2017.4.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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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시인동네 시인선 58
김효선 지음 / 시인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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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8


살구를 맛볼 수 없던 제주에서 자란 시인
―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김효선 글
 시인동네, 2016.6.29. 9000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에 설 적에 어떤 소리를 듣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구는 새벽 일찍 일어날 테고, 누구는 아침 느즈막하게 일어날 테지요. 일찌감치 하루를 열거나 길을 나서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밤새 고단하게 일하느라 아침에 비로소 몸을 쉬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살림을 짓습니다.

  오늘 저는 아침에 마당에 서서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아침이라 하면 으레 대여섯 시 무렵입니다. 새벽 두어 시 즈음부터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는데 아침 대여섯 시에도 휘파람새 노랫소리는 이어지더군요. 우리 마을에서는 올들어 삼월 십오일께부터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낮에는 노래하지 않고 저녁이 이슥해질 무렵 비로소 노랫소리를 들을 만한 휘파람새인데, 이 땅에 봄이 찾아왔네 하고 느끼면 어김없이 이 새가 멧자락을 고요히 울리는 노랫소리를 베풀어요.


나의 왼쪽 얼굴만 기억하는 당신 
나머지 반쪽을 떠나보낸 먹구름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진다는 소식이다 

‘나’라는 문장의 오류는 여전히
 ‘나’라는 환멸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름다운 환멸)

우리가 별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거리엔 별다방이 있다 음침한, 삼거리엔 삼거리별이 오거리엔 오거리행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우주는 늘 반짝거렸다 누워 있기 딱 좋은 방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비가 오는 날씨에 맞추어 씨앗을 심지 않았습니다만, 아이들하고 옥수수 씨앗을 심은 이튿날 사월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비가 오기 앞서 옥수수를 알맞게 심었네 하고 생각합니다. 이 비를 맞으며 해바라기 씨앗을 더 심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은 씨앗은 우리 집 둘레에 가만히 깃들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꿈을 키울 테고, 우리는 우리 손으로 심은 씨앗이 씩씩하게 싹이 터서 마음껏 크기를 바라요.

  이 봄날에 김효선 님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시인동네,2016)를 읽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제주를 떠날 날을 그렸다는 시인은 제주를 떠나 봄직했으나 다시 제주에 깃드는 삶이 되고, 제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해요.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에는 제주라는 고장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고 젊은 나날에 꿈을 키우던 한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이 가만히 드리웁니다.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연기자가
유명 출판사의 시집을 읽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사물은 잡았다 놓아버린 손목이다 
봄에 만난 제비꽃도 
여름 저녁의 로즈마리도 
시든 손목을 어쩌지 못하고 자꾸 
부서졌다 (시와 당신)

누가 내 손금을 보더니 
늦게 피는 꽃이라 했다 
마음 한 구석이 뽀로통해졌다 (늦게 피는 꽃)


  방송에 나오는 배우가 손에 시집 한 권을 쥐면 이 시집은 갑작스레 잘 팔린다고 합니다. 잘 읽힌다기보다 잘 팔린다고 해요. 시집이 잘 팔리는 일이 나쁘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다만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기는 합니다. 시집은 ‘잘 팔리기’만 해야 할까 하고 말예요. 시집은 ‘잘 읽힐’ 수 있을까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나온 이름난 시집을 방송에 나오는 배우가 손에 쥐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딱히 재미있거나 재미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해 볼 수 있어요. 연속극에 나오는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린드그렌을 읽거나 권정생을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젊은 사내나 가시내가 세월호 아픔을 담은 인문책을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이들이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는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라, 참말 책읽기에 사로잡혀서 기쁜 눈짓을 한다면?


십 대의 창문엔 멀구슬나무가 살았다. 
늙은 구렁이도 함께 살았다. 
멀구슬나무에 똬리를 틀고 
천천히 보랏빛 꽃을 뜯어먹었다. 
가끔 창밖으로 눈이 마주칠 때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멀구슬나무의 전생)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다섯 식구가 잠을 자던 때가 있었다. 불을 때지 않아도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방을 벗어나기 위해 밤마다 질 나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울 동안마저 소공녀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었다 (한 평의 세계)


  제주 시인 김효선 님이 그리는 멀구슬나무는 구렁이하고 함께 나옵니다. 저는 이 멀구슬나무를 전남 고흥에 깃든 뒤에 처음 만났습니다. 고흥읍에서 한 번 만났고,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건물 뒤쪽에서 새롭게 만났어요. 제주에서는 ‘멀구슬’ 말고 ‘먹구슬’이라는 다른 이름을 흔히 쓴다고 해요. 고흥에서도 ‘멀구슬’ 말고 다른 이름을 흔히 써요. 고흥내기는 이 나무를 두고 ‘멀꿀나무’라고 합니다. 서울 표준말은 ‘멀구슬’일 테지만 고장마다 다 다른 이름이 있는 나무예요.

  가만히 보면 이 봄에 누리는 나물을 놓고도 고장마다 이름이 달라요. 식물학자라면 아마 서울 표준말이나 학술 이름을 쓰겠지요. 그러나 경상사람은 그저 예부터 쓰던 ‘정구지’라는 이름을 써요. 전라사람은 그냥 예부터 쓰던 ‘솔’이라는 이름을 쓰고요.

  아침에 밥을 지으면서 큰아이를 불러 심부름을 맡깁니다. 처음에는 큰아이하고 우리 집 마당 한켠에 함께 쪼그려앉아서 솔을 톡톡 끊습니다. 이러면서 큰아이한테 말하지요. “자, 아버지는 이제 들어가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일 테니, 네가 솔 좀  끊어서 채반에 소복하게 담아 주겠니?”


살구는 너무 멀어서 가질 수 없었다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살구를 먹을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먼 곳에 있었으니까
섬은 그런 곳이다
살구를 모르는 곳
처음으로 살구를 사먹게 되었을 때
시지도 달지도 않은 그저 밍밍한 맛이었다 (섬)


  살구를 맛볼 수 없던, 살구를 그저 이름으로만 알고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만나면서 자라던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 평 남짓 되었던 방에서 다섯 식구가 올망졸망 밤잠을 이루었다던 어린 날을 떠올리는 어른은 이제 교수도 되고 시인도 됩니다. 예전처럼 살구를 맛볼 수 없는 제주가 아니라, 이제는 살구쯤 어렵잖이 사먹을 수 있는 제주입니다 여행객도 관광객도 많은 제주예요.

  이 제주에서 앞으로 어떤 시가 노랫가락으로 흐를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매화꽃이 지고 앵두꽃이 흐드러지는 이 사월 봄날에, 들딸기꽃이 하얗게 들이랑 숲을 밝히고, 모과꽃이 곧 터지려고 하는 이 사월 봄날에, 곧 찔레싹을 훑어 나물을 무칠 수 있는 이 사월 봄날에, “오늘은 어떤 사랑이고 모레는 어떤 날씨일까” 하는 생각을 품으면서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를 살며시 덮습니다. 2017.4.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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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방식 문학의전당 시인선 222
서정연 지음 / 문학의전당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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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8

 


돼지저금통을 깨 본 사람은 알지
― 목련의 방식
 서정연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6.2.12. 9000원

  돼지저금통을 깨 본 사람은 압니다. 돼지저금통을 깨면서 아주 살짝 숨통을 틀 수 있는 듯하지만, 곧 더는 깰 돼지저금통조차 없는 줄을. 비록 오늘 마지막 돼지저금통을 깨지만, 앞으로는 더 깰 돼지저금통이 없으니 어떻게든 이 바닥을 치고 일어나자고 생각합니다.


  어른인 내 돼지저금통을 깨면 그나마 나은데, 내 돼지저금통이 아니라 아이들 돼지저금통을 깬다면 겨우 숨통을 트더라도 마음이 이내 갑갑합니다. 어쩌자고 아이 돼지저금통을 깼나 싶고,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싶어 아찔하기도 해요.


  그런데 말예요, 아이들 돼지저금통마저 깨 본 사람은 알아요. 아이들은 다 받아들여 주어요. 아이들은 아낌없이 마지막 10원짜리 쇠돈까지 챙겨서 내밀며 어른을 걱정해 줍니다. 어른더러 얼른 기운을 차리라고 되레 북돋아 줍니다.


새는 걸어서 하늘을 날고 // 아기는 걸어서 샛길로 가고 // 나는 걸어서 (새야)

처마 끝에는 광주리가 매달려 있다. 광주리에서는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소리가 났다. 마당가를 비추던 햇살이 토방까지 와 닿았다. 아이는 광주리를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광주리에는 삶은 고구마와 열무김치, 보리밥인 새참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아이의 손은 광주리에 닿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풍경 소리)


  서정연 님 시집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2016)은 쉽게 읽을 만한 시집이면서 쉽게 읽기 어려울 만한 시집입니다. 아이들과 살림을 짓는 어머니로서 수수하고 쉬우며 따사로운 말씨로 시를 풀어내기에 쉽게 읽을 만합니다. 그런데 빚을 빛으로 여기는 아프면서 슬프면서 고우면서 너른 마음을 읽다가 자꾸 책을 덮어야 할 만큼 읽기가 어렵습니다. 한 줄을 함부로 넘기기 어렵고, 두 줄을 섣불리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새벽 꿈 사이로 길을 간다. 산길을 간다. / 아무도 없는 길. 한적한 길. / 주-욱 뻑은 길. 기다란 길. // 새 한 마리, / 나를 일으키는 새 한 마리. (새)

지키느라 / 죽는 줄 알았다 (가정)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쓴 시를 봅니다. “지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가난하고 가난하며 또 가난하고 자꾸 가난하다가 그예 끝없이 가난한 집살림이라면, 이 집안을 지키느라 얼마나 애가 닳고 숨이 타며 목이 잠길까요. 죽는 줄 알 만큼, 목숨을 걸고서 온갖 용을 짜낼 만큼, 참으로 기나긴 나날이 흐릅니다.


  그런데 그 숱한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놓자니 오히려 아찔해요. 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짤막하게 한 마디예요. “지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


나 / 가난하지만 / 많이 가난하지만 // 빚을 빛으로 여길 수 있는 / 눈물이 있어서 / 나, 풍요롭다 (눈물의 힘)

  시집 《목련의 방식》은 겨울이 저무는 길목에서 태어났습니다. 잎샘바람이나 꽃샘바람이 불면서 아직 시린 겨울 끝자락에 나온 시집입니다. 마침 때도 알맞게 나왔네 싶은 시집입니다.


  새봄에 새롭게 깨어날 목련 봉우리는 우리한테 어떤 말씀을 건넬 만할까요? 새봄을 맞이하더라도 아직 가난한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는 살림이라면, 이 봄날에 봄꽃이 얼마나 눈에 들어올 만할까요? 새봄에 새로운 봄꽃을 바라보는 즐거운 잔치를 못 누린다면 이 봄은 얼마나 시리거나 추울까요?


아이가 잠든 틈을 타 / 빨간 돼지저금통 배를 가른다 // 쏟아져 나온 동전으로 탑을 쌓아 헤아리고 / 구겨진 종이돈은 다림질하고 / 먹거리도 장난감도 아이 옷도 사야 한다 // 돼지저금통 배를 갈라 / 아이의 꿈을 훔친다 (돼지저금통)

  부디 낮은 곳에 햇살이 드리우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부디 모든 정치와 정책과 행정이 낮은 곳을 헤아리는 따스한 손길이 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들 손때가 묻은 돼지저금통을 깨는 일이 없도록 이 나라가 거듭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우리 힘을 내요. 오늘은 아이들 돼지저금통을 깼어도, 모레에는 아이들한테 새 돼지저금통을 건네어 주고, 앞으로는 돼지저금통을 깨지 않고 살뜰히 모아서 아이들이 찬찬히 꿈을 지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일어서요.


  아이들은 모두 안다고 느껴요.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돼지저금통을 깬 줄을 알고, 앞으로는 돼지저금통이 아닌 갑갑한 사회를 깰 날을 맞이할 줄을 알지 싶어요. 2017.3.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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