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시인동네 시인선 58
김효선 지음 / 시인동네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말 288


살구를 맛볼 수 없던 제주에서 자란 시인
―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김효선 글
 시인동네, 2016.6.29. 9000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에 설 적에 어떤 소리를 듣느냐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구는 새벽 일찍 일어날 테고, 누구는 아침 느즈막하게 일어날 테지요. 일찌감치 하루를 열거나 길을 나서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밤새 고단하게 일하느라 아침에 비로소 몸을 쉬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살림을 짓습니다.

  오늘 저는 아침에 마당에 서서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아침이라 하면 으레 대여섯 시 무렵입니다. 새벽 두어 시 즈음부터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는데 아침 대여섯 시에도 휘파람새 노랫소리는 이어지더군요. 우리 마을에서는 올들어 삼월 십오일께부터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낮에는 노래하지 않고 저녁이 이슥해질 무렵 비로소 노랫소리를 들을 만한 휘파람새인데, 이 땅에 봄이 찾아왔네 하고 느끼면 어김없이 이 새가 멧자락을 고요히 울리는 노랫소리를 베풀어요.


나의 왼쪽 얼굴만 기억하는 당신 
나머지 반쪽을 떠나보낸 먹구름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진다는 소식이다 

‘나’라는 문장의 오류는 여전히
 ‘나’라는 환멸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름다운 환멸)

우리가 별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거리엔 별다방이 있다 음침한, 삼거리엔 삼거리별이 오거리엔 오거리행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우주는 늘 반짝거렸다 누워 있기 딱 좋은 방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비가 오는 날씨에 맞추어 씨앗을 심지 않았습니다만, 아이들하고 옥수수 씨앗을 심은 이튿날 사월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비가 오기 앞서 옥수수를 알맞게 심었네 하고 생각합니다. 이 비를 맞으며 해바라기 씨앗을 더 심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은 씨앗은 우리 집 둘레에 가만히 깃들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꿈을 키울 테고, 우리는 우리 손으로 심은 씨앗이 씩씩하게 싹이 터서 마음껏 크기를 바라요.

  이 봄날에 김효선 님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시인동네,2016)를 읽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제주를 떠날 날을 그렸다는 시인은 제주를 떠나 봄직했으나 다시 제주에 깃드는 삶이 되고, 제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젊은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해요.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에는 제주라는 고장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고 젊은 나날에 꿈을 키우던 한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이 가만히 드리웁니다.


드라마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연기자가
유명 출판사의 시집을 읽고 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사물은 잡았다 놓아버린 손목이다 
봄에 만난 제비꽃도 
여름 저녁의 로즈마리도 
시든 손목을 어쩌지 못하고 자꾸 
부서졌다 (시와 당신)

누가 내 손금을 보더니 
늦게 피는 꽃이라 했다 
마음 한 구석이 뽀로통해졌다 (늦게 피는 꽃)


  방송에 나오는 배우가 손에 시집 한 권을 쥐면 이 시집은 갑작스레 잘 팔린다고 합니다. 잘 읽힌다기보다 잘 팔린다고 해요. 시집이 잘 팔리는 일이 나쁘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다만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기는 합니다. 시집은 ‘잘 팔리기’만 해야 할까 하고 말예요. 시집은 ‘잘 읽힐’ 수 있을까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나온 이름난 시집을 방송에 나오는 배우가 손에 쥐는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딱히 재미있거나 재미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해 볼 수 있어요. 연속극에 나오는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린드그렌을 읽거나 권정생을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젊은 사내나 가시내가 세월호 아픔을 담은 인문책을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이들이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읽는다’면? 연속극에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는다면? 그저 멋스러이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라, 참말 책읽기에 사로잡혀서 기쁜 눈짓을 한다면?


십 대의 창문엔 멀구슬나무가 살았다. 
늙은 구렁이도 함께 살았다. 
멀구슬나무에 똬리를 틀고 
천천히 보랏빛 꽃을 뜯어먹었다. 
가끔 창밖으로 눈이 마주칠 때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멀구슬나무의 전생)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다섯 식구가 잠을 자던 때가 있었다. 불을 때지 않아도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방을 벗어나기 위해 밤마다 질 나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울 동안마저 소공녀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었다 (한 평의 세계)


  제주 시인 김효선 님이 그리는 멀구슬나무는 구렁이하고 함께 나옵니다. 저는 이 멀구슬나무를 전남 고흥에 깃든 뒤에 처음 만났습니다. 고흥읍에서 한 번 만났고,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건물 뒤쪽에서 새롭게 만났어요. 제주에서는 ‘멀구슬’ 말고 ‘먹구슬’이라는 다른 이름을 흔히 쓴다고 해요. 고흥에서도 ‘멀구슬’ 말고 다른 이름을 흔히 써요. 고흥내기는 이 나무를 두고 ‘멀꿀나무’라고 합니다. 서울 표준말은 ‘멀구슬’일 테지만 고장마다 다 다른 이름이 있는 나무예요.

  가만히 보면 이 봄에 누리는 나물을 놓고도 고장마다 이름이 달라요. 식물학자라면 아마 서울 표준말이나 학술 이름을 쓰겠지요. 그러나 경상사람은 그저 예부터 쓰던 ‘정구지’라는 이름을 써요. 전라사람은 그냥 예부터 쓰던 ‘솔’이라는 이름을 쓰고요.

  아침에 밥을 지으면서 큰아이를 불러 심부름을 맡깁니다. 처음에는 큰아이하고 우리 집 마당 한켠에 함께 쪼그려앉아서 솔을 톡톡 끊습니다. 이러면서 큰아이한테 말하지요. “자, 아버지는 이제 들어가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일 테니, 네가 솔 좀  끊어서 채반에 소복하게 담아 주겠니?”


살구는 너무 멀어서 가질 수 없었다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살구를 먹을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먼 곳에 있었으니까
섬은 그런 곳이다
살구를 모르는 곳
처음으로 살구를 사먹게 되었을 때
시지도 달지도 않은 그저 밍밍한 맛이었다 (섬)


  살구를 맛볼 수 없던, 살구를 그저 이름으로만 알고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만나면서 자라던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 평 남짓 되었던 방에서 다섯 식구가 올망졸망 밤잠을 이루었다던 어린 날을 떠올리는 어른은 이제 교수도 되고 시인도 됩니다. 예전처럼 살구를 맛볼 수 없는 제주가 아니라, 이제는 살구쯤 어렵잖이 사먹을 수 있는 제주입니다 여행객도 관광객도 많은 제주예요.

  이 제주에서 앞으로 어떤 시가 노랫가락으로 흐를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매화꽃이 지고 앵두꽃이 흐드러지는 이 사월 봄날에, 들딸기꽃이 하얗게 들이랑 숲을 밝히고, 모과꽃이 곧 터지려고 하는 이 사월 봄날에, 곧 찔레싹을 훑어 나물을 무칠 수 있는 이 사월 봄날에, “오늘은 어떤 사랑이고 모레는 어떤 날씨일까” 하는 생각을 품으면서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를 살며시 덮습니다. 2017.4.5.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