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계보 문학의전당 시인선 142
배재형 지음 / 문학의전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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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0



꽃내음이 흘러 두 눈에 눈꽃

― 소통의 계보

 배재형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2.11.28. 8000원



  바람이 흘러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갑니다. 바람길이 막힐 적에는 숨길이 막혀, 어디에서건 숨을 못 쉽니다. 바람길이 뚫리기에 우리는 맑은 숨을 마시면서 하루를 지을 수 있습니다.


  들에서 부는 바람이 마을을 스치고, 숲에서 부는 바람이 서울로 갑니다. 공장에서 부는 바람이 시골로 오고, 발전소에서 부는 바람이 바다를 덮습니다.


  배재형 님 시집 《소통의 계보》(문학의전당,2012)를 읽습니다. 서로 흘러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싯말을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소복 입은 구름은 밤늦도록

뭉게뭉게 하늘을 거닌다

할머니는 달 여행하러

우주선처럼 하늘로 날아가셨다 (월하의 공동묘지)


아침 햇살마냥 여관 뒷문을 나오다

버려진 텔레비전을 바라본다

겉으로는 멀쩡한 허우대 하나 

소리 없이 서 있다 (소통의 계보)



  할머니는 달마실을 가셨으면 할아버지는 별마실을 가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달을 거쳐 해로 마실을 할 수 있고, 이 해누리에서 벗어나 머나먼 별누리로 마실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구에 머물면서 고즈넉히 지낼 수 있겠지요. 이웃집에만 가볍게 마실을 하며 지구라는 별에 깃들 수 있어요.


  집하고 일터 사이를 흐를 수 있습니다. 때때로 다른 고장으로 볼일을 보러 가면서 여관에 묵을 수 있습니다. 버려진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조그마한 들꽃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보거나, 낮에 뜬 달을 볼 수 있어요.



창가가 어두워졌다

저녁의 나이를 물감으로 그릴 수 있다면

어떤 풍경이 될까

동네 유치원이 사라진 저녁은

먼지와 잿더미가 가득 찬

빈 공사장 풍경 사이로

푸른 자전거 하나 지나간다 (저녁풍경)



  어느 마을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문을 닫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가 미어터집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놀이터가 자취를 감춥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쇼핑센터가 들어섭니다. 어느 마을에서는 조용히 흐르는 바람이 머물고, 어느 마을에서는 번쩍거리는 등불이 춤추며 바람이 깃들 자그마한 틈조차 없습니다.



복권가게에 붙은 찬란한 전광판에서

목 빼고 기다린 당첨숫자들이 차례대로 지나간다

비싼 꽃 우리 식구 쌀 한 포대는 족히 된다며

핀잔이나 주지 않을까 (꽃집 앞)


아내의 복숭아뼈 벌겋게 부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시장 한 구석

무거운 시장바구니 들고 가던 아내

양손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아내의 복숭아 바라보았다 (복숭아꽃 아내)



  우리 마음에 꽃이 피어난다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도 이 꽃에서 향긋한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꽃이 안 피어난다면, 제아무리 값진 꽃다발을 품에 안더라도 향긋한 기운이 퍼지지 않습니다. 값진 꽃이나 비싼 꽃이기에 꽃내음을 퍼뜨리지 않아요. 따사로운 마음으로 손에 쥔 풀꽃송이에서 꽃내음이 퍼져요.


  곁님 다리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곁님 입술에서 앵두꽃이 피며, 곁님 볼에서 능금꽃이 핍니다. 우리 몸 어디에서나 마알갛게 꽃이 핍니다. 눈에서는 어떤 눈꽃이 필 만할까요? 마음에서는 어떤 마음꽃이 흐드러질 만할까요? 고이 흐르고 흘러 이야기가 될 노랫가락이 싯말 한 마디에 내려앉습니다. 2017.4.20.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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