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랑 깨 - 권오삼 동시집
권오삼 지음, 안녕달 그림 / 창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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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7


코앞에 바쳐야 먹는 게으름뱅이는 누구지?
― 진짜랑 깨
 권오삼 글
 안녕달 그림
 창비 펴냄, 2011.12.20. 8500원


  할아버지 동시인 권오삼 님은 동시집 《진짜랑 깨》(창비,2011)에서 ‘게으름뱅이들’ 이야기를 슬며시 들려줍니다. 이 게으름뱅이는 능금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지만 정작 제 손으로 깎아 먹을 줄 모른다지요. 누가 깎아서 코앞에 갖다 바쳐야 비로소 잘 먹는다고 해요.

  능금 한 알을 손수 깎을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라면, 능금나무를 돌보면서 능금알을 손수 딸 줄도 모르겠지요. 능금뿐 아니라 다른 열매도 손수 딸 줄 모를 뿐더러, 손수 기를 줄도 모를 테고요.
  

게으름뱅이들은 절대로
제 손으로 사과를 깎아 먹지 않는다.
사과를 무척 좋아해도.

깎아서 코앞에 갖다 바치면
그제야 잘 먹는다.

그 게으름뱅이들은 주로
아빠라는 사람들이다. (게으름뱅이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게으름뱅이일 수 없습니다. 예부터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는 들일을 하고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고 불을 때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고 연장을 깎고 …… 누구나 더없이 바지런히 살았어요. 이러면서 능금나무이건 배나무이건 감나무이건 알뜰히 돌보았지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그만 ‘게으름뱅이’가 되고 말았을까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능금 한 알조차 손수 못 깎는 버릇이 몸에 배고 말았을까요. 어쩌다가 한국 사회 아버지는 집안일이나 살림을 으레 어머니(곁님)한테 슬쩍 떠넘기는 게으름뱅이 굴레에 갇혔을까요.


선생님이 보시고는
둘 다 틀렸다고 하면서
7단과 8단을 다섯 번 쓰라고 했다.

연아가 나 때문에 틀렸다고
눈을 흘기며 종알종알
집에 갈 때까지 나하고 말도 안 했다. (구구단 시험)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데, 짝꿍이 내 시험종이에 적은 답을 베껴서 썼대요. 그러나 내 시험종이에 내가 적은 답은 다 틀렸기에, 내 시험종이를 베껴서 쓴 짝꿍도 함께 틀렸다는군요. 너나 나나 똑같은데 굳이 안 베껴도 되었을 텐데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시험을 치르면 될 텐데요. 무엇을 모르는지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 이 모르는 것을 제대로 배워서 알 수 있을 텐데요.

  몰래 베껴서 시험 점수를 잘 받으면 즐거울까요. 몰래 베껴서 시험 점수를 높인들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르면서 아이들을 닦달하는 터라 그만 아이들은 점수에 얽매여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떳떳하게 밝히면서 즐겁게 배우는 길하고 멀어질는지 모릅니다.


형은 중학생이 되고부터
학교 가기 싫다는 소리 자주 한다.
중학교에선
공부, 공부, 공부만 해야 한다고
숙제도 엄청 많이 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선배들도 무섭다고 한다. (우리 형)


  학교 밖에서 본다면 나이 한두 살쯤 아무것이 아닙니다. 서른 살이나 마흔 살, 쉰 살이나 예순 살, 일흔 살이나 여든 살이라는 테두리에서 볼 적에도 나이 한두 살쯤 아무것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학교 문턱만 넘어서면 나이 한두 살로 선배가 되고 후배가 되면서 높직한 울타리가 쌓인다고 해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나이 한두 살을 놓고서 윽박지르거나 괴롭히는 몸짓이 사그라들지 않는다고 해요.

  아름답게 한 살을 먹고, 즐겁게 한 살을 먹으며, 사랑스럽게 한 살을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한 살을 더 먹는 동안 더 배운 만큼 고개 숙일 줄 아는 몸짓이 되면 좋을 텐데요.


새는 악보 안 봐도 노래할 줄 안다.

나비는 음악 없어도 춤출 줄 안다. (새와 나비)


  할아버지 동시인은 비랑 구름을 바라보다가 새랑 나비를 바라봅니다. 비록 요즈음 도시에서는 새나 나비를 느긋하게 만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시골이든 도시이든 새는 음악 수업을 안 받아도 노래를 한다지요. 나비는 노래가 따로 없어도 춤을 춘다지요.

  이와 달리 사람들은 따로 음악 교육을 받아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잘못 여기곤 합니다. 즐거운 살림이 될 적에 저절로 즐거이 노래가 나오는 줄 잊곤 해요. 따로 춤을 배우러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줄 잊지요. 저절로 어깨춤을 추고, 스스로 손짓 발짓 몸짓을 놀려서 춤을 누리면 되는 줄 잊고 말아요.


둥근 바퀴는 자전거 다리
자전거의 둥근 두 다리와
아이의 길쭉한 두 다리가
짝이 되어 짝꿍이 되어서
씽씽 쌩쌩 신나게 달리면
몸에 와 감기는 바람바람 (자전거 타기)


  아이도 어른도 몸에 와 감기는 바람을 쐬며 자전거를 달릴 수 있기를 빌어요. 싱그러운 바람을 맞이하며 자전거를 달리는 기쁨을 누려 본다면, 우리 사회는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내려놓고서 함께 자전거를 달리다 보면,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어요. 때로는 걷고 때로는 자전거를 달리면서 마을하고 학교를 알뜰살뜰 가꾸는 길을 헤아릴 수 있지요.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새랑 나비를 동무로 삼을 수 있다면, 이쁘게 깎아서 코앞에 내밀어야 먹는 능금 한 알이 아니라, 저마다 마당이나 텃밭을 가꾸어 능금나무를 돌볼 줄 알면서 도란도란 나누는 능금 한 알로 거듭날 만하지 싶어요. 바지런하게 살림을 지을 아버지가 아닌, 게으름뱅이가 되는 아버지로 길들이는 사회는 이제 그만 멈추도록 서로 따사로이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4.27.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동시읽기/동시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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