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무겁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05
최부식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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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86



무거운 봄비가 산뜻할 수 있도록

― 봄비가 무겁다

 최부식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6.17. 9000원



  겨울이 저물 즈음에는 제법 포근하구나 싶은 날씨가 찾아듭니다. 이러면서 이제 봄이로구나 싶을 즈음에는 거꾸로 제법 쌀쌀하구나 싶은 날씨가 찾아들어요. 어느 모로 보면 뒤죽박죽이네 싶으나, 땅으로 보고 들로 보며 숲으로 보면 제결이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철로 바람이 바뀐다고 미리 알리고, 추위가 곧 가시지만 섣불리 들뜨지 말라면서 된바람이 마지막으로 싱싱 몰아쳐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 눈물의 새벽기도 / 빼곡하다 // 돋보기안경 쓰고 베껴 쓴 / 언약의 눈빛들 / 모든 걸 지나가게 했다 (필사)


이른 봄밤, 아버지 밭둑의 매화 암향 맡으러 간 사이 엄마는 텃밭에 심을 한 해 찬거리를 꿈꾸었지요 냉이 캐다가 제비꽃 옮겨 심는 꼴 싫어 타박 놓고 고랑에 심은 꽃잔디 환히 번지자 호미로 캐내며 차라리 가지 심어 가지꽃 보자던 감자 심어 감자꽃향 맡자던 엄마의 텃밭이었어요 (텃밭 꽃밭)



  시집 《봄비가 무겁다》(문학의전당,2015)를 읽으면서 봄을 헤아리고 날씨를 돌아봅니다. 봄이지만 아직 섣부른 봄인가 싶도록 땅이 안 녹더군요. 이러다가도 어느 날부터 흙이 포실포실 부서지도록 녹고, 개구리가 깨어나요. 언제쯤 제대로 봄이려나 하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하루하루 지나다 어느 날 문득 ‘그래 봄이지’ 하는 소리가 절러 나옵니다. 개구리와 함께 뱀이 깨어나고, 풀벌레도 하나둘 깨어요.


  저마다 철을 맞추어 깨어납니다. 저마다 철에 따라 기지개를 켭니다. 깊이 잠들던 목숨붙이가 하나씩 눈을 뜨면서 온누리는 새로운 모습이 되어요. 지난해처럼 봄이고, 지지난해처럼 참말 봄이지만, 해마다 다른 봄으로 새로운 옷을 입습니다.



인도네시아 어디쯤 / 한 해 두 번씩 쌀농사 짓는 친구들 / 오리 떼 몰고 노는 아이 남겨두고 / 시골 농장 온 지 세 해째건만 / 더듬는 말만큼 어둠도 여전히 낯설다 (귀가)



  봄은 어디에서나 봄인데, 고향이 아닌 곳에 선 사람한테는 똑같은 봄이기 어렵습니다. 봄은 늘 봄이지만, 즐겁게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입에 풀질을 하려고 등허리가 휘어야 하는 사람한테는 봄을 헤아리거나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이 봄이 가고 여름이 찾아오면 나아질 길이 있을까요. 여름을 바라기 앞서 이 봄부터 즐거운 시골살림으로 가꾸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을 도시로 보내는 시골살림을 이제라도 그치고, 시골 아이를 시골에서 키워 시골 흙지기로 북돋우는 시골살림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이러면서 빽빽한 도시에서 도시 아이가 시골로 터전을 옮겨 새롭게 흙지기로 살아갈 길을 고이 품어 줄 수 있을까요.



생판 처음 돌구지 타고 월남 하늘에서 제초제를 퍼부었다 푸른 숲이 녹아내리고 말라 징글징글한 송천 논둑 잡초들 깡그리 없애는데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베트콩 시신 앞에서 폼 잡은 사진 들고 보릿짚 냄새 구수한 고향에 새까만 얼굴로 돌아왔다 (에이전트 오렌지)


길림에서 오신 오촌 당숙 돈 될까 갖고 온 약재들 / 쓸모없음 눈치채고 몰래 죄다 내다버렸다 / 그리움이 자본의 쓴맛으로 사그라질까 / 못내 푼 마음 다시 봇짐 싸 묶으신다 (길림에 가시거든)



  농기계를 들이고, 비닐을 덮고, 농약과 비료를 뿌리고, 농협에 짊어지고 가서 팔아야 하고, 이런 관행논은 이제 그만두고, 시골지기도 느긋하면서 넉넉하고 도시 이웃도 즐거우면서 새롭게 함께 할 만한 흙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무거운 봄비가 아닌 산뜻한 봄비로 맞아들일 수 있는 길을 꿈꾸어 봅니다. 돈으로 구르는 시골살림이 아닌, 따스한 사랑으로 흐르는 시골살림이 될 날을 바랍니다. 아마 그무렵에는 “봄비가 산뜻하다”고 하는 새 노래가 빛나고, “봄비가 싱그럽다”고 하는 새삼스러운 노래가 춤추리라 생각합니다. 2017.4.7.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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