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독사 창비시선 397
이병초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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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4



새소리로 부산스러운 시골 아침

― 까치독사

 이병초 글

 창비 펴냄, 2016.4.29. 8000원



  경기도 파주하고 전라북도 완주 사이를 오가는 틈틈이 시를 썼다는 이병초 님은 《까치독사》(창비)를 선보입니다. ‘선생질과 농사일’을 나란히 하면서 시를 길어올렸다고 합니다. 며칠은 가르치고 며칠은 배우는 살림을 이으면서 조용히 부른 노래가 시로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나는 이 시집을 새벽 너덧 시 즈음에 가만히 읽어 봅니다. 고즈넉한 마을에서 집집마다 차분히 하루를 여는 이무렵 뒷밭에 서서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지저귀는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시를 한 줄 두 줄 석 줄 읽어 봅니다.



들깨 갈아놓은 게 남았다길래 머윗대 껍질을 벗긴다 물을 잘박하게 잡으면 목에 시원할 것이다 잠 달아난 굴뚝새들이 목이슬을 터는지 탱자 가시에 잘게 긁히는지 울타리 안팎이 소란스럽다 (아침)



  시집 《까치독사》에도 나오는데, 시골 아침은 퍽 부산스럽습니다. 동이 틀 무렵 그야말로 온갖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노래합니다. 먹이를 찾는 어미 새가 날고, 어미 새를 부르는 새끼 새가 지저귑니다. 한쪽에서는 하늘에서 노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둥지에서 노래해요. 이러면서 이무렵은 밤새 복닥복닥하던 개구리 노랫소리가 잦아듭니다.


  비록 도시처럼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가 거의 없습니다만, 시골에서는 사뭇 다른 소리로 새벽이 부산스럽습니다. 나는 이런 새소리를 들으면서 호미를 손에 쥡니다. 아무런 기계가 없이 오직 호미를 손에 쥐고 땅을 쪼고 돌을 고르며 흙을 다스립니다.



꽃을 보면 꽃이 되고 / 벌이 되고 나비가 되던 시절을, /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아름다운 세상을 / 길바닥에 짜악 찌크러버리고 / 길 떠나는 후배가 장다리꽃 속에서 손을 흔드네 (빛나던 시절)



  한참 호미질을 하다가 밭자락에 폭 주저앉아서 호미는 한쪽에 내려놓고 하늘바라기를 하다 보면 더없이 아늑하다고 느낍니다. 무엇이 아늑하느냐 하면, 군더더기 없는 하늘이 아늑하고, 풀내음이 아늑합니다. 오월이 무르익으면서 흐드러지는 찔레꽃이 아늑하고, 찔레꽃 곁에서 막 돋으려는 감꽃이 아늑합니다.


  매화꽃이나 벚꽃이나 산수유꽃처럼 새봄에 눈부신 꽃은 없는 오월이지만, 바야흐로 들딸기가 빨갛게 익으면서 찔레꽃이 흰눈처럼 해맑아요. 찔레꽃이 흐드러지는 우리 집 뒷밭에 쪼그려앉아서 흙을 쪼다 보면 찔레꽃이 베푸는 꽃냄새만으로도 배가 부를 노릇입니다. 여기에 살포시 퍼지는 감꽃내음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꽃을 보면 꽃이 되고”라는 싯말처럼, 흙을 만지면 흙이 됩니다. 꽃내음을 맡으면 꽃내음 같은 마음이 됩니다. 새파란 하늘을 마시면 새파란 숨결로 거듭납니다. 무당벌레가 팔뚝에 내려앉아 볼볼 길 적에 일손을 멈추고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면, 나는 어느새 무당벌레하고 하나가 됩니다.



라디오가 나를 물고 직직거린다 / 개 짖는 소리뿐인 산중에 / 사락사락 눈이 내린다 / 하루를 딱 닫아건 오리나무숲께로 / 마음만 갔다가 솔가리 타는 냄새에 에둘리어 / 뒤도 못 캐고 눈을 맞는 밤 (답장)


눈비 들이치면 무를 못 먹는다기에 / 텃밭 귀퉁이를 판다 / 삽날에 찍혀 달아났다가 절뚝절뚝 되엉기는, / 덜 마른 시래기 타래에 튕겨나온 햇살이 / 무 구덩이 맨흙 위에 쏠린다 (입동)



  씨앗 한 톨은 얼마나 착한지, 땅을 잘 갈아서 고운 손길로 살포시 묻어 놓으면, 어느새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며 잎이 퍼집니다. 씨앗 한 톨은 얼마나 야무진지, 비바람이 세차고 몰아쳐도 꼿꼿하게 푸릅니다. 씨앗 한 톨은 얼마나 대단한지, 풀벌레가 여린 잎을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씩씩하게 새로운 잎을 내놓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착하고 야무지며 대단한 새싹을 바라보면서 김을 맵니다. 물을 주고 북을 돋웁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인사를 하면서 밭 언저리를 거닙니다. 이러면서 곰곰이 생각하지요. 먼먼 옛날, 아스라히 먼먼 옛날, 고즈넉한 터에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지은 사람들은 이녁이 지은 보금자리를 거닐기만 하면서도 가없이 아늑하고 고요한 나들이를 다니는 셈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심어봤자 돈도 안되는 거 또 심어놨다 / 안 심는다 안 심는다 해놓고도 / 빈 밭으로 묵히는 게 죄로 갈 것 같아서 / 기어이 심어버리고 만 고구마밭 둬마지기가 / 그게 무슨 일거리랴마는 / 마음 딴 데 두고 손짓하는 구름 / 상수리잎에 묻어 반짝이는 햇살이 / 구절초 꽃잎처럼 가슴에 적혀 / 가을은 고개 숙이고 땀을 식혔다 (가을)



  아이들이 묻습니다. “옥수수는 왜 심어?” 나는 빙긋 웃으면서 대꾸합니다. “너희들이 옥수수를 잘 먹으니까.” “그렇구나. 빨리 옥수수 먹고 싶어.” “그러면 날마다 이 싹을 들여다보면서 얘기를 나누면서, 흙이 말랐다 싶으면 물을 줘.”


  이병초 님은 “돈도 안되는 거”를 또 심었다고 하지만, 고구마는 “돈도 안되는 거”이기 앞서 ‘맛나며 넉넉한 먹을거리’요 ‘푸진 살림살이’이리라 느낍니다. 고구마 몇 자루를 내다판들 ‘선생질하는’ 이병초 님 말마따나 ‘돈이 안 되기’ 마련일 테지만, ‘농사일하는’ 시인 마음으로서는 ‘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니 자꾸자꾸 고구마를 심으리라 느낍니다.


  내가 먹고, 이웃하고 동무한테 나누어 주면 되거든요. 겨우내 먹고, 봄에 마저 먹으면서 ‘땅이 베푼 넉넉한 기쁨’을 누리면 되거든요. 예부터 시골지기는 돈을 벌려고 흙을 짓지 않았으니까요.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시골사람은 살림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삶을 지으려고 흙을 짓는 하루를 지었으니까요.

  호미로 콕콕 땅을 쪼듯이, 삽날로 꾹꾹 땅을 파듯이, 시골바람을 마시면서 태어난 자그마한 싯말을 혀끝에 얹어 또르르 굴리면서 새롭게 아침을 맞이합니다. 2016.5.1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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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민음의 시 220
여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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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15



호미 쥐고 밭자락에 서서 읽는 시

―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여정 글

 민음사 펴냄, 2016.1.29. 9000원



  마음이 어지러울 적에는 밭일을 하면 스르르 풀립니다. 왜 밭일이 마음을 풀어 주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호미를 쥐고 흙을 쪼다 보면, 풀을 뜯고 밭을 일구다 보면, 씨앗을 심고 북을 돋우다 보면, 어느새 어지럽던 마음은 보드랍게 풀리곤 합니다.


  시골에서 살기에 으레 밭자락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풀내음을 맡습니다. 예전에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살던 무렵에는 어떻게 ‘마음풀기(마음 가누기)’를 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흙을 만질 자리가 없던 지난날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엉킨 마음을 고요히 풀거나 얽힌 실타래를 조용히 풀 만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언제부턴가 방구석에 처박혀 구멍들을 헤아리고 있다. TV에서는 에너자이저 건전지가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두 물이 고여 있다. (0편, 혹은 구멍·外 1편)


도둑맞은 집 같은 그런 봄이 왔다 / 내 숨구멍을 하나씩 하나씩 열고 있는 봄 / 꽃의 향기가 내 눈꺼풀을 올리고 / 빛에 쏘여 눈이 아리다 / 눈이 밝아졌다 / 젠장 / 봄 (잠에서 깨어나다)



  여정 님이 빚은 시집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민음사,2016)를 가만히 읽습니다. 시를 쓰는 여정 님은 여정 님 마음자리에 깃든 실타래를 풀면서 시를 씁니다. 엉킨 것을 풀면서 시를 쓰고, 꼬이거나 뒤집힌 것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면서 시를 씁니다.


  때로는 방구석에 처박혀서 시를 쓰고, 때로는 그림을 그리며 시를 씁니다. 때로는 햇볕을 쬐거나 꽃을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때로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때로는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때로는 삶과 죽음을 아스라이 생각해 보다가 시를 씁니다.



모닝글로리 연습장에 오토펜슬2.0mm로 왼손을 그려 본다. 그리는 오른손보다 작고 어리게 그린다. 포즈를 취한 왼손이 허공에서 조금씩 떨려 온다. (떨리는 손의 소묘)


어머니는 참오동나무라 하는데 / 나는 그냥 나무라 한다 / 아버지는 은방울꽃이라 하는데 / 나는 그냥 꽃이라 한다 // 어머니는 자가용이라 하는데 / 형은 에스엠파이브라 한다 / 아버지는 반코트라 하는데 / 누나는 코데즈컴바인이라 한다 (그냥 일상, 2010피스 퍼즐)



  밭일을 하다가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습니다.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리고는 다시 밭으로 갑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들마실을 하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누워 가만히 쉬다가, 다시 밭일을 하다가, 부엌일을 하다가, 집안일을 하다가, 새롭게 아이들하고 놀다가, 이부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눕다가, 꿈에 빠져들다가, 새삼스레 아침을 맞이합니다.


  문득 이 삶을 돌아보니 지난날에는 누구나 밖에서 일하고 밖에서 놀았구나 싶습니다. ‘밖’이란 먼 바깥이 아니라, 들이거나 숲이거나 냇가이거나 바다였지 싶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으레 밭일이나 논일을 했고 나무를 했어요. 빨래터나 냇가에서 빨래를 했고, 냇가나 우물가나 샘에서 물을 길었어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집 안팎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지낸 살림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집안에만 있어도 ‘물 쓰고 전기 쓰고 컴퓨터 쓰고 뭐 하고’ 할 수 있던 삶이 아닌 지난날입니다.


  어쩌면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도 될 만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집 안팎에서 마주하는 숲과 들과 하늘과 바람과 냇물이 모두 책이었을 테니까요. 호미질이, 도끼질이, 지게질이, 괭이질이, 그야말로 모두 글쓰기나 책읽기와 같았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버지의 몸이 땅에 묻혔으니 / 이제 땅속에 뿌리를 두었다 // 돌아눕는 밤 (이제 나무)


하루살이 백수는 거듭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끄러운 양들의 침묵을 끄고, 가르멜 수녀원 담을 따라 돌고 돌던 그 산책길도 끄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도 끄고, 잘 태어나신 친구 분을 만나고 돌아오신 아버지도 끄고, 아버지도 끄고, (하루살이 백수→하루살이백수)



  여정 님이 빚은 시집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읽으면 두 갈래 시가 흐릅니다. 하나는 차분하거나 고요한 마음이 되어서 쓰는 시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끓거나 물결치는 마음이 되어 쏟아내듯이 터져나오는 시입니다. 차분하거나 고요한 마음으로 쓰는 시는 수수한 말로 수수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들끓거나 물결치는 마음이 되어 쏟아내듯이 터뜨리는 시는 ‘말을 조각조각 내어 부스러기를 줍듯이’ 엮습니다.



∥잘못키웠다…아버지는나이가너무드셨고·어머니는뼈마디가자꾸쑤신다…아내는좀처럼마음을잡지못하고·아이들은점점더이기적이다…생활용품은필요이상으로흘러넘치고·통장에는너무먼미래들이담겨있다…과거는너무너덜너덜하고·현재는그런과거들의재활용이다 (리셋증후군∥리셋, 케이블TV∥ 게임채널·99)



  새벽 다섯 시에 시골마을에 마을방송이 흐릅니다. 이장님이 오늘 하루 알릴 이야기를 마을 곳곳에 달린 스피커로 쩌렁쩌렁 울리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시골이니 새벽 다섯 시에 마을방송이 흐르지요. 도시에서라면 새벽 다섯 시 마을방송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여름에도 겨울에도 시골에서는 으레 새벽 네 시 즈음부터 하루를 열거든요. 어느 시골집이나 새벽밥을 짓고, 새벽빨래를 하며, 새벽일을 합니다. 동이 틀 무렵 모두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아침에 살짝 쉬고, 낮에 새로 기운을 내어 움직이다가 저녁에 해가 떨어지면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서 새 하루를 꿈꾸며 잠듭니다.


  수수하게 흐르는 하루를 돌아볼 적에는 수수한 이야기가 샘솟아서 수수한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수수한 시골살림이 아니라 밤낮없이 바쁘고 부산한 현대 사회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통신과 정보와 문명과 첨단을 마주할 적에는 이 같은 들끓음과 물결이 빚는 이야기가 새로운 현대문학으로 나타나겠지요.


  아침에 일찍 빨래를 하고 당근밭을 새로 갈자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덮습니다. 차분하게 하루를 열고,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호미를 쥐고 밭자락에 섭니다. 2016.5.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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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1
김일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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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2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는 새벽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김일영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9.5.11. 8000원



  아홉 살 큰아이하고 마실을 다니다 보면 큰아이한테 궁금한 것이 잔뜩 있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아버지더러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예전에 이 아이한테 막바로 이것은 무엇이요 저것은 무엇이네 하고 말해 주었는데, 요새는 이렇게 하지 않아요. 다시 아이한테 묻지요. “이것은 무엇일까? 참말 저것은 무엇일까?” 아이가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고서 이야기를 이끌지요.


  얼마 앞서 읍내로 마실을 다녀올 적에도 큰아이가 “아버지, 이 꽃은 무슨 꽃?” 하고 묻기에 “그래, 예쁜 꽃이네. 이 꽃은 무슨 꽃일까? 네가 한번 이름을 붙여 볼래?” 하고 되물었어요.


  이렇게 아이한테 되묻기를 하면서 내 어린 날을 돌아봅니다.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아이들처럼 우리 어머니한테, 그러니까 아이들 할머니한테 끝없이 묻고 다시 물었어요. 어머니는 지치거나 귀찮지도 않으신지 꼬박꼬박 알려주셨지요. 그렇지만 나는 늘 잊어버리고는 다시 물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이가 물어도 늘 상냥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가끔 나한테 되묻기도 하셨어요. 이렇게 되물으면 움찔 하고 놀라면서도 ‘어라, 그러게. 참말 뭘까?’ 하는 수수께끼가 내 마음속에 생기곤 했어요.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합니까 / 누군가 웃고 간 듯 공기가 간지럽습니다 (벙어리별)


바다를 떠돌다 만난 나뭇잎들은 / 너무 깊이 젖어 있어 서로를 부를 수 없겠지 (안개 속의 풍경)



  김일영 님이 빚은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실천문학사,2009)를 읽으면서 ‘삐비꽃’이 참말 뭘까 하고 궁금합니다. 이런 꽃이름을 들은 일이 없고, 아마 본 일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꽃이름만 들은 일이 없이 삐비꽃을 스쳐 지나가듯이 보았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집은 삐비꽃을 궁금해 하라는 시집은 아닙니다. 시인 김일영 님이 삐비꽃하고 얽힌 삶을 풀어낼 뿐 아니라, 삐비꽃처럼 김일영 님을 둘러싼 수많은 삶과 살림과 사람과 사랑을 두고서 ‘먼저 스스로(꽃이 피기 앞서)’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집이라고 할 만합니다.



나뭇잎들 떨어지는 무게가 아프다 / 흑백 초상화가 지켜보는 / 사진틀 밖에서도 / 어머니는 늘 해녀였다 / 검은 고무옷이 / 속살보다 부끄러웠다는 / 당신의 부은 손등 위에 / 어린 손을 얹으며 / 나무들은 나이테 속에 / 봄을 숨긴 채 겨울을 건너왔다 (가을 숲 속에서)


노란 박스 테이프로 / 정성 들여 감겨진 지팡이 (지팡이)



  김일영 님은 문득 묻습니다.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하느냐고 묻습니다. 움찔 놀라다가 가만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떻게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를 듣느냐고 대꾸할 일이 없이, 나뭇가지 움트는 소리는 어떠한 결이나 가락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러면서 더 헤아리지요.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라든지, 꽃잎이나 나뭇잎이 벌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나비가 번데기를 열고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비가 날개를 말리려고 팔랑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벌이 꽃가루를 찾아서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매화꽃잎이나 모과꽃잎이 바람에 떨어져 나부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런 수많은 소리를 내 삶에서 나 스스로 얼마나 듣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나한테 들려주는 소리를 얼마나 귀여겨듣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바람소리나 빗소리뿐 아니라, 아이들 목소리와 곁님 웃음소리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는 삶인가 하고 헤아립니다.



가지런히 늙은 고무신도 / 냇물에게 배운 말들도 두고 가야지 (얌전히 뜬 달도 깨끗이 씻어 걸고)


달빛 계곡 꿈을 꾸면 /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 앞장세워 돌아오듯 /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삐비꽃이 아주 피기 앞서 생각을 해야겠지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내가 스스로 마음을 가꾸고, 내가 스스로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야겠지요.


  어제는 하루 내내 비가 왔어요. 이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무엇인가를 느껴서 뒤꼍을 올랐어요. 뒤꼍에 올라 텃밭을 바라보니, 그제까지 안 돋았던 옥수수싹이 한꺼번에 올라왔더군요.


  비를 맞으며 한참 옥수수싹을 바라보았지요. 참말 하루 사이에, 아니 날마다 몇 차례씩 밭을 돌아보는데 ‘비 오기 앞서’ 싹이 하나도 안 돋던 아이들(옥수수씨)이 어쩜 이렇게 한꺼번에 싹이 돋을까 하고 생각하며 바라보았어요. 나는 옥수수싹이 땅을 비집고 솟은 소리를 제대로 들었을까요? 미처 못 들었다고 해야겠지요?


  삼월이 지났고 사월이 흐릅니다. 오월이 찾아와서 이 봄이 한껏 터지고 나면 어느새 여름 문턱입니다. 바람도 해도 비도 구름도 모두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소리나 몸짓이나 결로 들려주리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삶을 짓는 사랑스러운 식구들도 온갖 웃음과 노래와 몸짓으로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고요.


  제대로 귀를 기울이자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쏟아 귀를 열자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귀뿐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면서 이 아침을 새롭게 누리면서 온 하루를 즐거이 짓자고 생각합니다. 시집 한 권을 가슴에 대고 살살 문지릅니다. 2016.4.2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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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감자 - 박승우 동시집
박승우 지음, 김정은 그림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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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1



‘뿔 난 염소’도 아기 앞에서 얌전한데

― 생각하는 감자

 박승우 글

 김정은 그림

 창비 펴냄, 2014.11.15. 9000원



  박승우 님이 선보인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창비,2014)를 읽으면서 생각해 봅니다. 박승우 님이 동시에서 들려주듯이 ‘생각 안 하고 싹이 트는 감자’는 없으리라 느껴요. 감자도 동백나무도 시금치도 콩도 ‘저마다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 싹을 틔우고 새 가지를 내거나 꽃을 피운다고 느껴요. 모든 풀과 나무는 저마다 즐겁거나 기쁜 꿈을 가슴으로 품으면서 자라리라 느껴요.


  사람도 생각을 하지요. 날마다 새롭게 생각을 키우고, 언제나 새삼스레 생각을 북돋워요. 어제하고는 다른 하루를 생각하고, 어제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삶을 생각해요.



뿔 난 염소도 / 아기 염소한테 / 젖 먹일 때는 / 가만히 있는다 (염소 2)


어른 염소 두 마리가 / 머리 들이박고 싸웁니다 // 아기 염소 두 마리도 / 머리 들이박고 싸웁니다 (염소 6)



  그런데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를 연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제하고 똑같거나 비슷한 하루가 되리라 느껴요. 아무 생각도 없이 하루를 연다면,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즐겁거나 기쁜 일은 좀처럼 맞이하기 어렵겠구나 하고 느껴요.


  생각하는 아침이란 ‘하루를 여는 살림’을 생각하는 아침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스스로 생각을 지으면서 맞이하는 하루란 ‘오늘은 어제하고 다를 뿐 아니라 새롭게 피어나는 삶’이 되도록 씩씩하게 일어서려는 몸짓이라고 할 만하지 싶고요.



요즘 소는 뭐 했소 / 사료 먹었소 / 눈만 끔벅거렸소 / 심심하면 꼬리로 파리 쫓았소 / 살이 오르자 팔렸소 / 팔린 날 세상과 작별하였소 (소)


눈사람은 / 모두 다 눈사람 // 눈사람한테도 이름을 / 붙여 주고 싶어 // 내가 만든 눈사람은 / 찬우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 그 애가 만든 눈사람은 / 민지 (눈사람 민지)



  동시집 《생각하는 감자》에 흐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봅니다. “뿔 난 염소”도 아기한테 젖을 물릴 적에는 가만히 있는다는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염소한테는 뿔이 있습니다만, ‘뿔나다’는 ‘골나다’나 ‘성나다’ 같은 말씨이기도 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달래거나 다스릴 적에는 누구라도 ‘뿔·골·성’부터 먼저 차분히 달래거나 다스릴 수 있어야 해요. 아이한테 윽박지르면서 “밥 먹엇!”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아이들은 밥맛이 떨어지겠지요.


  머리를 들이박고 싸우는 “어른 염소”를 늘 보던 새끼 염소도 끼리끼리 머리를 들이박고 싸움질을 할 테고요. 아이들이 어른들 곁에서 본 몸짓이 싸움이라면 아이들도 싸움을 할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으로서 서로 아낄 줄 아는 몸짓이면 아이들은 ‘서로 아끼는 몸짓’을 고스란히 배워요. 우리가 어른으로서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눈길이면 아이들은 ‘서로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눈길’을 낱낱이 물려받아요. 뿔 난 염소도 새끼(아기) 앞에서는 얌전하다는 대목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감자가 무슨 생각이 있냐고? // 그럼 생각도 없이 / 때가 되면 싹 틔우고 / 때가 되면 꽃 피우나 (생각하는 감자 1)


엄마한테 혼나서 / 울고 싶은 날은 // 몸을 숨기고 / 기대어 울 수 있는 / 구석이 좋다 // 그때는 / 구석이 엄마 같다 (구석)



  큰아이하고 밭에서 모시풀 뿌리를 캡니다. 옥수수를 심으려고 땅을 가는데, 여러 해 묵은 모시풀 뿌리가 무척 깊고 굵어요. 처음에는 혼자 진땀을 빼며 뿌리를 캐는데, 어느새 큰아이가 호미를 챙겨서 내 옆에 앉더니 함께 뿌리캐기를 합니다. 걸레를 손에 쥐어 방바닥이나 마루를 훔칠 적에도 아이들은 어느새 옆에 붙어서 함께 걸레질을 하겠노라 합니다. 비를 들고 마당을 쓸 적에도 이와 같아요. 하나하나 가르쳐도 배우지만, 하나하나 보여주는 모든 여느 삶이 아이한테 ‘배움’이 되어요.


  ‘생각하는 감자’처럼 나도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어버이’로서 ‘생각하는 어른’으로서 하루를 일굴 줄 알아야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이한테 보여주는 몸짓도 생각하고, 아이한테 보여주는 몸짓이기 앞서 나 스스로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열려고 하는 새 아침이나 하루가 되는가를 생각해야겠다고 느껴요.


  생각하는 어른으로 하루를 살며 생각하는 아이를 돌볼 적에 바야흐로 ‘생각하는 어버이’가 되겠지요. 생각을 꽃피워 사랑으로 가꿀 줄 아는 어른으로 아침을 열 적에 비로소 ‘사랑스러운 어버이’로 거듭나겠지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날 일이요, 언제나 새롭게 웃음을 짓는 살림을 생각해 봅니다. 감자 한 알처럼, 동백나무 한 그루처럼, 구름 한 조각처럼, 바람 한 줄기처럼, 곱고 따스하게 생각을 빚자고 거듭거듭 마음을 기울입니다. 2016.4.1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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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482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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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0



‘버리는 사랑’을 생각하는 젊은 넋이 많은 나라

― 인간이 버린 사랑

 이이체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3.25. 8000원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엇을 맨 먼저 할까 하고 잠자리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몇 분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루를 그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미적거리려고 하는 몸짓이 아니라 하루를 길고 즐겁게 누리려는 몸짓이에요. 게으른 몸짓이 아니라 하루 살림을 새롭게 지으려는 몸짓이고요.


  어제는 여러 날 미룬 빨래를 잔뜩 하며 아침을 열었어요. 며칠 동안 사월비가 주룩주룩 내린 탓에 미룬 빨래였기에 꽤 많았어요. 빨랫감이 많구나 싶어 다 하지는 않고 좀 남겼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빨래를 하고, 밥을 지어서 먹인 뒤에는 살짝 등허리를 펴고는 온 식구가 들길을 걸었어요. 여러 날 사월비가 내린 들판은 유채꽃이 활짝 터졌거든요.


  그래서 들길을 한참 걸어서 면소재지까지 제법 먼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 4월 8일하고 9일에 걸쳐서 ‘미리 투표하기’를 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빨래를 하고 아침밥을 즐겁게 먹고는 옥수수 씨앗을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심자고 생각해 봅니다.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몸의 애인)


어떤 말을 하면 울고 난 것 같다 // 어린 개가 칭얼거린다, 간결하고 간절하게 (우상의 피조물)



  아이들을 이끌고 유채꽃 들길을 걷다가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인간이 버린 사랑》(문학과지성사,2016)이라는 시집을 살짝살짝 읽었습니다. 봄들마실하고 어울릴 만한 시집인지 아닌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이 버린 사랑’을 이 봄들에서 읽을 만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이 버린 사랑’이 있으면 어느 한 ‘사람이 새롭게 심는 사랑’이 있으리라 느껴요. 사랑은 버려질 수 없으리라 느끼기도 해요. 왜냐하면, 사랑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그이 목숨을 버리는 셈일 테니까요. 이 땅에서 더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 때에 그만 사랑을 버리고 목숨까지 내려놓는 셈일 테니까요.



육체는 빛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 / 누구보다도 죄를 잘 짓는다 (푸른 손의 처녀들)


기억으로 / 숲이 우거지면 / 다 / 잊혀진다. (부제―무제)



  1988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이이체 님은 한창 대학원을 다니면서 배움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이제 막 푸른 숨결로 새로운 살림을 짓는 젊은 손길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이이체 님이 우리한테 싯말로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는 ‘사람이 버린 사랑’입니다.


  다시 들길을 걷고, 또 다리쉼을 하고, 거듭 들길을 걷다가, 면소재지에 닿아 투표를 하고는, 다시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살짝살짝 시집을 더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새롭고 푸른 꿈이랑 사랑을 키울 만한 젊은 넋은 왜 ‘사람이 버린 사랑’을 자꾸만 마음속으로 그려야 할까요? 젊은 시인 이이체 님 마음자리에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직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을 짊어지거나 떠안아 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이러한 것들을 가슴 가득 품고서 ‘이웃사랑’을 헤아려 보고픈 마음일까요?



마음을 가진 자에게서, 사랑은 언제 죽을까 / 사랑을 모르던 때에 만났던 사랑을 /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피 흘리며 태어나는)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 모순은 완벽하다 (누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픔을 모르기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열흘 동안 몸져누운 채 꼼짝을 못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나날을 알기 어려워요. 여러 해 동안 몸져누운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든지, 또는 서른 해 남짓 아픈 몸을 이끌고 살림을 꾸려야 하는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면, 이러한 나날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기도 쉽지 않아요.


  ‘사람이 버린 사랑’을 알자면, 아무래도 스스로 사랑을 버려 보아야겠지요. 내가 사랑을 버리든, 내 곁에서 누군가 사랑을 버리든, 나와 네가 함께 사랑을 버리든, 또는 이 지구별 숱한 사람들이 사랑을 버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든 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버린 생각’을 몸으로 느낄 만하리라 생각해요.


  우리 사회는 젊은 넋한테 ‘짓는 사랑’이 아닌 ‘버리는 사랑’을 떠넘기는 얼거리는 아닌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우리 사회는 젊은 넋이 젊은 넋답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기보다는, 젊은 넋한테 수많은 짐덩어리를 얹는 얼거리일 수 있겠다고 헤아려 봅니다. 입시지옥이나 학원지옥뿐 아니라 교통지옥도 있고 취업지옥도 있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첨단문명이 눈부시기는 하지만, 어디에나 ‘이런 지옥’하고 ‘저런 지옥’도 잔뜩 있어요.



일 년이라는 것은 그저 계절들이 차례대로 미치는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 찬란한 물이 고체의 언어를 발음할 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기형에 짓밟힐 수 있었다 (살해된 죽음)


살을 섞고 삶을 나누던 기억 / 당신을 잊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 망각까지 잊을 수는 없다 (물의 누드)



  아침에 큰아이한테 옥수수 씨앗 여섯 톨을 건넵니다. 먼저 큰아이더러 혼자서 심어 보라고 얘기합니다. 네 온 사랑을 담아서 씨앗을 심으라고 속삭입니다.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 보금자리를 곱게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심으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함께 마음을 섞고 생각을 섞습니다. 우리는 이 보금자리에서 함께 손길을 나누고 꿈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이한테 건네는 손길을 늘 마음에 아로새깁니다. 아이도 어버이한테서 받는 손길을 늘 마음에 되새겨요.



당신이 나에게 말했다. / 바람은 늘 누군가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 같아 (편애, 사랑에 치우치다)



  봄바람이 붑니다. 따스합니다. 곧 여름바람이 불면 시원하겠지요. 이내 가을바람이 불면 상큼할 테고요. 다시금 겨울바람이 불면 추울 텐데, 추운 겨울에는 서로 옷을 나누어 입고 이불을 함께 덮는 살붙이가 있어서 포근합니다.


  바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합니다. 풀은 흙을 사랑합니다. 흙은 풀벌레를 사랑합니다. 풀벌레는 구름을 사랑합니다. 구름은 해님을 사랑합니다. 해님은 다시 바람을 사랑해요. 사람은 이 모든 사랑 사이에서 가만히 꿈을 지어서 살림으로 잇습니다.


  가볍게 부는 사월바람에 민들레 씨앗이 가볍게 꽃대에서 떨어져서 나풀나풀 날아오릅니다. 노란민들레씨도, 흰민들레씨도, 저마다 사뿐사뿐 바람을 타면서 이곳저곳 흩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새로운 들길이나 숲길을 걸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작은 시집을 덮습니다. 그리고 내 손에 새로운 시집 하나를 품고서 씩씩하게 이 봄을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2016.4.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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