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독사 창비시선 397
이병초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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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4



새소리로 부산스러운 시골 아침

― 까치독사

 이병초 글

 창비 펴냄, 2016.4.29. 8000원



  경기도 파주하고 전라북도 완주 사이를 오가는 틈틈이 시를 썼다는 이병초 님은 《까치독사》(창비)를 선보입니다. ‘선생질과 농사일’을 나란히 하면서 시를 길어올렸다고 합니다. 며칠은 가르치고 며칠은 배우는 살림을 이으면서 조용히 부른 노래가 시로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나는 이 시집을 새벽 너덧 시 즈음에 가만히 읽어 봅니다. 고즈넉한 마을에서 집집마다 차분히 하루를 여는 이무렵 뒷밭에 서서 수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지저귀는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시를 한 줄 두 줄 석 줄 읽어 봅니다.



들깨 갈아놓은 게 남았다길래 머윗대 껍질을 벗긴다 물을 잘박하게 잡으면 목에 시원할 것이다 잠 달아난 굴뚝새들이 목이슬을 터는지 탱자 가시에 잘게 긁히는지 울타리 안팎이 소란스럽다 (아침)



  시집 《까치독사》에도 나오는데, 시골 아침은 퍽 부산스럽습니다. 동이 틀 무렵 그야말로 온갖 새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노래합니다. 먹이를 찾는 어미 새가 날고, 어미 새를 부르는 새끼 새가 지저귑니다. 한쪽에서는 하늘에서 노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둥지에서 노래해요. 이러면서 이무렵은 밤새 복닥복닥하던 개구리 노랫소리가 잦아듭니다.


  비록 도시처럼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가 거의 없습니다만, 시골에서는 사뭇 다른 소리로 새벽이 부산스럽습니다. 나는 이런 새소리를 들으면서 호미를 손에 쥡니다. 아무런 기계가 없이 오직 호미를 손에 쥐고 땅을 쪼고 돌을 고르며 흙을 다스립니다.



꽃을 보면 꽃이 되고 / 벌이 되고 나비가 되던 시절을, / 남들 쉴 때 나도 쉬는 아름다운 세상을 / 길바닥에 짜악 찌크러버리고 / 길 떠나는 후배가 장다리꽃 속에서 손을 흔드네 (빛나던 시절)



  한참 호미질을 하다가 밭자락에 폭 주저앉아서 호미는 한쪽에 내려놓고 하늘바라기를 하다 보면 더없이 아늑하다고 느낍니다. 무엇이 아늑하느냐 하면, 군더더기 없는 하늘이 아늑하고, 풀내음이 아늑합니다. 오월이 무르익으면서 흐드러지는 찔레꽃이 아늑하고, 찔레꽃 곁에서 막 돋으려는 감꽃이 아늑합니다.


  매화꽃이나 벚꽃이나 산수유꽃처럼 새봄에 눈부신 꽃은 없는 오월이지만, 바야흐로 들딸기가 빨갛게 익으면서 찔레꽃이 흰눈처럼 해맑아요. 찔레꽃이 흐드러지는 우리 집 뒷밭에 쪼그려앉아서 흙을 쪼다 보면 찔레꽃이 베푸는 꽃냄새만으로도 배가 부를 노릇입니다. 여기에 살포시 퍼지는 감꽃내음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꽃을 보면 꽃이 되고”라는 싯말처럼, 흙을 만지면 흙이 됩니다. 꽃내음을 맡으면 꽃내음 같은 마음이 됩니다. 새파란 하늘을 마시면 새파란 숨결로 거듭납니다. 무당벌레가 팔뚝에 내려앉아 볼볼 길 적에 일손을 멈추고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면, 나는 어느새 무당벌레하고 하나가 됩니다.



라디오가 나를 물고 직직거린다 / 개 짖는 소리뿐인 산중에 / 사락사락 눈이 내린다 / 하루를 딱 닫아건 오리나무숲께로 / 마음만 갔다가 솔가리 타는 냄새에 에둘리어 / 뒤도 못 캐고 눈을 맞는 밤 (답장)


눈비 들이치면 무를 못 먹는다기에 / 텃밭 귀퉁이를 판다 / 삽날에 찍혀 달아났다가 절뚝절뚝 되엉기는, / 덜 마른 시래기 타래에 튕겨나온 햇살이 / 무 구덩이 맨흙 위에 쏠린다 (입동)



  씨앗 한 톨은 얼마나 착한지, 땅을 잘 갈아서 고운 손길로 살포시 묻어 놓으면, 어느새 싹이 트고 줄기가 오르며 잎이 퍼집니다. 씨앗 한 톨은 얼마나 야무진지, 비바람이 세차고 몰아쳐도 꼿꼿하게 푸릅니다. 씨앗 한 톨은 얼마나 대단한지, 풀벌레가 여린 잎을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씩씩하게 새로운 잎을 내놓으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착하고 야무지며 대단한 새싹을 바라보면서 김을 맵니다. 물을 주고 북을 돋웁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인사를 하면서 밭 언저리를 거닙니다. 이러면서 곰곰이 생각하지요. 먼먼 옛날, 아스라히 먼먼 옛날, 고즈넉한 터에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지은 사람들은 이녁이 지은 보금자리를 거닐기만 하면서도 가없이 아늑하고 고요한 나들이를 다니는 셈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심어봤자 돈도 안되는 거 또 심어놨다 / 안 심는다 안 심는다 해놓고도 / 빈 밭으로 묵히는 게 죄로 갈 것 같아서 / 기어이 심어버리고 만 고구마밭 둬마지기가 / 그게 무슨 일거리랴마는 / 마음 딴 데 두고 손짓하는 구름 / 상수리잎에 묻어 반짝이는 햇살이 / 구절초 꽃잎처럼 가슴에 적혀 / 가을은 고개 숙이고 땀을 식혔다 (가을)



  아이들이 묻습니다. “옥수수는 왜 심어?” 나는 빙긋 웃으면서 대꾸합니다. “너희들이 옥수수를 잘 먹으니까.” “그렇구나. 빨리 옥수수 먹고 싶어.” “그러면 날마다 이 싹을 들여다보면서 얘기를 나누면서, 흙이 말랐다 싶으면 물을 줘.”


  이병초 님은 “돈도 안되는 거”를 또 심었다고 하지만, 고구마는 “돈도 안되는 거”이기 앞서 ‘맛나며 넉넉한 먹을거리’요 ‘푸진 살림살이’이리라 느낍니다. 고구마 몇 자루를 내다판들 ‘선생질하는’ 이병초 님 말마따나 ‘돈이 안 되기’ 마련일 테지만, ‘농사일하는’ 시인 마음으로서는 ‘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니 자꾸자꾸 고구마를 심으리라 느낍니다.


  내가 먹고, 이웃하고 동무한테 나누어 주면 되거든요. 겨우내 먹고, 봄에 마저 먹으면서 ‘땅이 베푼 넉넉한 기쁨’을 누리면 되거든요. 예부터 시골지기는 돈을 벌려고 흙을 짓지 않았으니까요.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시골사람은 살림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삶을 지으려고 흙을 짓는 하루를 지었으니까요.

  호미로 콕콕 땅을 쪼듯이, 삽날로 꾹꾹 땅을 파듯이, 시골바람을 마시면서 태어난 자그마한 싯말을 혀끝에 얹어 또르르 굴리면서 새롭게 아침을 맞이합니다. 2016.5.15.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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