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민음의 시 220
여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115



호미 쥐고 밭자락에 서서 읽는 시

―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여정 글

 민음사 펴냄, 2016.1.29. 9000원



  마음이 어지러울 적에는 밭일을 하면 스르르 풀립니다. 왜 밭일이 마음을 풀어 주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호미를 쥐고 흙을 쪼다 보면, 풀을 뜯고 밭을 일구다 보면, 씨앗을 심고 북을 돋우다 보면, 어느새 어지럽던 마음은 보드랍게 풀리곤 합니다.


  시골에서 살기에 으레 밭자락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풀내음을 맡습니다. 예전에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살던 무렵에는 어떻게 ‘마음풀기(마음 가누기)’를 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흙을 만질 자리가 없던 지난날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엉킨 마음을 고요히 풀거나 얽힌 실타래를 조용히 풀 만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언제부턴가 방구석에 처박혀 구멍들을 헤아리고 있다. TV에서는 에너자이저 건전지가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구멍이란 구멍에는 모두 물이 고여 있다. (0편, 혹은 구멍·外 1편)


도둑맞은 집 같은 그런 봄이 왔다 / 내 숨구멍을 하나씩 하나씩 열고 있는 봄 / 꽃의 향기가 내 눈꺼풀을 올리고 / 빛에 쏘여 눈이 아리다 / 눈이 밝아졌다 / 젠장 / 봄 (잠에서 깨어나다)



  여정 님이 빚은 시집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민음사,2016)를 가만히 읽습니다. 시를 쓰는 여정 님은 여정 님 마음자리에 깃든 실타래를 풀면서 시를 씁니다. 엉킨 것을 풀면서 시를 쓰고, 꼬이거나 뒤집힌 것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면서 시를 씁니다.


  때로는 방구석에 처박혀서 시를 쓰고, 때로는 그림을 그리며 시를 씁니다. 때로는 햇볕을 쬐거나 꽃을 바라보면서 시를 씁니다. 때로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때로는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때로는 삶과 죽음을 아스라이 생각해 보다가 시를 씁니다.



모닝글로리 연습장에 오토펜슬2.0mm로 왼손을 그려 본다. 그리는 오른손보다 작고 어리게 그린다. 포즈를 취한 왼손이 허공에서 조금씩 떨려 온다. (떨리는 손의 소묘)


어머니는 참오동나무라 하는데 / 나는 그냥 나무라 한다 / 아버지는 은방울꽃이라 하는데 / 나는 그냥 꽃이라 한다 // 어머니는 자가용이라 하는데 / 형은 에스엠파이브라 한다 / 아버지는 반코트라 하는데 / 누나는 코데즈컴바인이라 한다 (그냥 일상, 2010피스 퍼즐)



  밭일을 하다가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습니다.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리고는 다시 밭으로 갑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들마실을 하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누워 가만히 쉬다가, 다시 밭일을 하다가, 부엌일을 하다가, 집안일을 하다가, 새롭게 아이들하고 놀다가, 이부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눕다가, 꿈에 빠져들다가, 새삼스레 아침을 맞이합니다.


  문득 이 삶을 돌아보니 지난날에는 누구나 밖에서 일하고 밖에서 놀았구나 싶습니다. ‘밖’이란 먼 바깥이 아니라, 들이거나 숲이거나 냇가이거나 바다였지 싶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으레 밭일이나 논일을 했고 나무를 했어요. 빨래터나 냇가에서 빨래를 했고, 냇가나 우물가나 샘에서 물을 길었어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집 안팎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지낸 살림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집안에만 있어도 ‘물 쓰고 전기 쓰고 컴퓨터 쓰고 뭐 하고’ 할 수 있던 삶이 아닌 지난날입니다.


  어쩌면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도 될 만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집 안팎에서 마주하는 숲과 들과 하늘과 바람과 냇물이 모두 책이었을 테니까요. 호미질이, 도끼질이, 지게질이, 괭이질이, 그야말로 모두 글쓰기나 책읽기와 같았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버지의 몸이 땅에 묻혔으니 / 이제 땅속에 뿌리를 두었다 // 돌아눕는 밤 (이제 나무)


하루살이 백수는 거듭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끄러운 양들의 침묵을 끄고, 가르멜 수녀원 담을 따라 돌고 돌던 그 산책길도 끄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도 끄고, 잘 태어나신 친구 분을 만나고 돌아오신 아버지도 끄고, 아버지도 끄고, (하루살이 백수→하루살이백수)



  여정 님이 빚은 시집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읽으면 두 갈래 시가 흐릅니다. 하나는 차분하거나 고요한 마음이 되어서 쓰는 시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끓거나 물결치는 마음이 되어 쏟아내듯이 터져나오는 시입니다. 차분하거나 고요한 마음으로 쓰는 시는 수수한 말로 수수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들끓거나 물결치는 마음이 되어 쏟아내듯이 터뜨리는 시는 ‘말을 조각조각 내어 부스러기를 줍듯이’ 엮습니다.



∥잘못키웠다…아버지는나이가너무드셨고·어머니는뼈마디가자꾸쑤신다…아내는좀처럼마음을잡지못하고·아이들은점점더이기적이다…생활용품은필요이상으로흘러넘치고·통장에는너무먼미래들이담겨있다…과거는너무너덜너덜하고·현재는그런과거들의재활용이다 (리셋증후군∥리셋, 케이블TV∥ 게임채널·99)



  새벽 다섯 시에 시골마을에 마을방송이 흐릅니다. 이장님이 오늘 하루 알릴 이야기를 마을 곳곳에 달린 스피커로 쩌렁쩌렁 울리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시골이니 새벽 다섯 시에 마을방송이 흐르지요. 도시에서라면 새벽 다섯 시 마을방송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여름에도 겨울에도 시골에서는 으레 새벽 네 시 즈음부터 하루를 열거든요. 어느 시골집이나 새벽밥을 짓고, 새벽빨래를 하며, 새벽일을 합니다. 동이 틀 무렵 모두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아침에 살짝 쉬고, 낮에 새로 기운을 내어 움직이다가 저녁에 해가 떨어지면 일찌감치 집으로 들어서 새 하루를 꿈꾸며 잠듭니다.


  수수하게 흐르는 하루를 돌아볼 적에는 수수한 이야기가 샘솟아서 수수한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수수한 시골살림이 아니라 밤낮없이 바쁘고 부산한 현대 사회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통신과 정보와 문명과 첨단을 마주할 적에는 이 같은 들끓음과 물결이 빚는 이야기가 새로운 현대문학으로 나타나겠지요.


  아침에 일찍 빨래를 하고 당근밭을 새로 갈자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덮습니다. 차분하게 하루를 열고,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호미를 쥐고 밭자락에 섭니다. 2016.5.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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