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8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지성사

 2016.9.22.



  군대에 들기 앞서 헌책집을 다니며 ‘손바닥책으로 나온 진중문고’를 곧잘 보았습니다. 정음사·을유문화사·삼성문화사·박영사·범우사 손바닥책 가운데 알찬 오래책(고전)을 진중문고로 삼는다고, 뒷주머니에 꽂고서 다니다가 담배짬에 살짝 펼칠 만하겠거니 싶었어요. 1995년 11월에 들어간 군대를 1997년 12월에 나오는데, 이동안 책을 한 자락조차 못 읽었습니다. 군대로 들어가는 저더러 잘 다녀오라고 어깨를 토닥인 책집지기 어른들은 “여, 자네도 이제 군대에 가면 진중문고를 읽겠네? 허허.” 하고 웃었습니다만, 총 한 자루 쥐고 묵직한 등짐을 짊어진 채 눈 덮인 멧골을 두 다리로 넘나드는 ‘여느 싸울아비(육군 소총수)’한테 담배짬은 터무니없더군요. 둘레에서는 ‘상병 6호봉’쯤 되고서야 ‘바깥에서 몰래 들여온 책을 숨겨서 읽는’구나 싶던데, 저는 ‘말년 병장’이 되도록 하루 두 시간조차 눈붙이기 힘들 만큼 뒹굴었어요. 1996년 어느 여름날 ‘대대에 들어온 진중문고’를 처음 구경하지만 중대에는 안 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자기계발’ 책이에요. 2008년에 처음 나온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2016년 진중문고로도 나온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요새는 ‘대중 시집’도 진중문고가 될 만큼 나아지거나 바뀌는군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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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78


《新生 英文法》

 류영기 엮음

 신생사

 1946.12.3.



  2020년을 넘어서도록 우리나라는 영어 낱말풀이를 우리 나름대로 못합니다. 아직도 영어를 ‘우리말’ 아닌 ‘일본 한자말이나 옮김 말씨’로 풀이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영어를 받아들여 가르칠 적에 일본책을 썼고 ‘일본에서 엮은 영일사전’을 곁에 두었거든요. 우리한테는 우리말이 있으나, 우리말로 낱말책을 짓기까지도 참으로 가시밭길이었고, 이 우리말꽃(국어사전)에 일본 한자말이 수두룩히 스며들었어요. 여태 이 부스러기를 떨구지 못합니다. 《新生 英文法》은 일본이 이 땅에서 물러가고서 나온 길잡이책입니다만, ‘우리말’이 아닌 ‘일본 한자말’만 가득합니다. 무늬는 한글이나 알맹이는 그저 일본말이에요. 참다운 온빛(해방)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살림을 짓고 나눌 적에 이룰 테지요. 그늘(일제강점기 영향)을 털고 온몸으로 햇빛을 누려야 비로소 빛납니다.


“우리말로된 좋은영문법이 벌서 전문가들의손을통하여 여러권 나왔으나 아직도 영문법이 더요구된다는 여러분들의 요청에따라 이문법을 내어놓는다. 이문법은 硏究社판 스쿨和英辭典의 附錄과 商務印書館판 英文典大全을참조하여 사계에취미를가진 宋正律, 韓相允 두청년학도의 역찬한것이다.” (序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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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55


《new prince readers 1》

 龜井寅雄·三省堂 編輯所

 三省堂

 1923.10.26. 1벌/1936.12.25. 8벌



  ‘산세이도(三省堂)’는 처음에는 책집이었다고 합니다. 1881년에 섰다지요. 1915년부터 책을 펴내고, 1922년에는 ‘콘사이스 사전’을 선보였대요. 일본에서 낸 ‘콘사이스 사전’은 우리나라에서 고스란히 베꼈습니다. 일본은 꽤 일찌감치 온갖 낱말책을 엮어냈는데, 그만큼 나라밖 살림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만, 이웃나라 살림빛을 배우려는 이가 퍽 많았다는 뜻이면서, 이처럼 두루 배운 이들이 제 나라에 이야기빛을 펴는 터전까지 제법 단단했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땀흘려 지은 책을 두루 팔고 알리는 몫을 하는 책집이 진작부터 있었기에 차곡차곡 책밭을 일구었구나 싶어요. 《new prince readers 1》는 1923년에 나온 ‘영어 길잡이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전남 순천 헌책집에서 만났는데, 이 책을 읽은 분은 ‘1930년대 무렵 순천에 있던 책집’에서 장만해서 읽었더군요. 1923∼1936년 사이는 아직 우리로서 ‘우리말꽃(국어사전)’조차 엮어내기 버거웠기에 영어사전은 엄두조차 못 낼 때요, 영어도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책으로 배웠겠지요. 책집이란, 책을 사고파는 터일 뿐 아니라, 책으로 살림빛을 나누는 징검다리요 쉼터라고 느낍니다. 골골샅샅 작고 알찬 마을책집이 더 늘고 북적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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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책 457

《冬の流行 婦人子供洋服の作方》
 編輯部 엮음
 主婦之友
 1933.12.

  겨울 한복판을 지나고 새봄을 앞둔 2021년 1월에 솜이불을 처음으로 장만했습니다. 포근한 시골자락에서 살며 솜이불까지 안 덮어도 되리라 여기다가, 막상 솜이불을 아이들 잠자리에 펴고 보니 매우 좋더군요. 왜 진작 안 갖추었을까 하고 뉘우쳤습니다. 두 아이를 낳아 돌보는 동안 언제나 ‘아이먼저’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옛말에 ‘어른먼저(장유유서)’가 있지만, 저는 밥도 옷도 살림도 늘‘아이먼저’를 살핍니다. 버스를 타고내릴 적에도 늘 ‘아이먼저’요, 아이가 먼저 즐겁고 홀가분히 뛰놀거나 노래할 터전을 헤아립니다. 《冬の流行 婦人子供洋服の作方》은 ‘主婦之友’ 곁책(부록)으로 1933년 12월에 나왔다는데, ‘主婦之友’는 ‘主婦の友’란 곳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나라로는 “주부의 벗·주부생활”로 퍼졌어요. “-의 벗·-생활”로 이름을 붙인 숱한 달책(잡지)은 하나같이 일본 달책을 베끼거나 흉내냈습니다. 그나저나 이웃나라에 싸움판을 벌인 일본인데, 싸움 한복판에도 ‘어린이한테 입힐 옷’을 헤아린 책을 꾸렸네요. 아무리 총칼질을 앞세우더라도 어린이가 ‘먼저’인 줄 조금은 생각했나요? 어린이가 배부르면 어른은 마음이 부릅니다. 어린이가 웃으면 어른은 기쁩니다. 어린이나라일 적에 아름나라이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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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471


《그게 무엇이관데》

 최불암 글

 시와시학사

 1991.11.1.



  인천 중구에 ‘신포시장’이라는 오랜 저잣골목이 있고, 한켠에 ‘치킨꼬꼬’란 이름으로 튀김닭집을 꾸리는 아재가 있어요. 아재는 예전에 뱃사람 살림밥을 짓곤 했다더군요. 2020년 겨울에 ‘치킨꼬꼬’로 찾아가서 아재한테 절하며 잘 지내시느냐고 여쭈니, 언젠가 최불암 씨가 이곳에 들러 ‘인천 뱃사람이 먹던 뱃밥’을 누린 적 있다고 말씀해요. 그 얘기가 〈한국인의 밥상〉에 나왔다더군요. “최불암 씨가 어릴 적에 인천에서 살았는데 몰랐나?” “오늘 처음 들었어요.” 단골가게 아재 말씀을 듣고 나서 《그게 무엇이관데》를 찾아 읽으니 최불암 님이 해방 언저리부터 인천 창영동에서 살며 신흥국민학교를 다닌 나날이 빼곡하게 흐릅니다. 골목빛에 골목나무에 우물에 아스라한 이야기를 여느 자리에서 갈무리했어요. 글에 조금 멋을 부리긴 했지만, 지나온 삶길을 투박하게 그렸기에 1940∼50년대 인천하고 1950∼70년대 서울을 새삼스레 헤아릴 알뜰한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습니다. 굳이 ‘역사’란 이름을 안 붙여도 좋아요. ‘자취’요 ‘길’이요 ‘살림’이요 ‘삶’이면 넉넉해요. 스스로 하루를 사랑하며 보낸 아침저녁이 두고두고 이야기꽃을 피울 사랑스러운 걸음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빛나는 발자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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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opinion/choibosik/2020/12/21/BTTRU4R26BBGVJAEKR2WYQDKUM/?utm_source=nave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naver-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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