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 식물의 언어로 전하는 유연하고 단단한 일상
김파카 지음 / 카멜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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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8.3.

인문책시렁 203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김파카

 카멜북

 2020.6.22.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김파카, 카멜북, 2020)를 읽다가 곳곳에서 갸웃갸웃합니다. 이를테면 37쪽 “식물도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왜 사는가, 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할 것이다”라든지 99쪽 “크게 자라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못생겨지는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라든지 “식물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은 물과 바람 그리고 흙이다” 같은 대목입니다.


  우리는 으레 사람 눈썰미로 보려 하기에 풀꽃나무나 들짐승이나 헤엄이가 ‘늘 생각한다’는 대목을 모릅니다. 어떻게 풀꽃나무가 생각할 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풀꽃나무나 애벌레한테는 “못생겨지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그저 사람 눈썰미인데, 사람 가운데에서도 틀에 박힌 서울내기 눈썰미입니다. 모든 풀꽃나무는 저마다 다르고, 모든 사람도 저마다 달라요. 다른 삶과 몸과 넋이기에, 누구는 잘나고 누구는 못나지 않아요.


  풀꽃나무는 사람이 아닌 터라 ‘식물의 인생’일 수 없어요. ‘인생 = 사람살이’입니다. ‘식물의 인생’은 틀린 말입니다. ‘풀꽃나무 한해살이’나 ‘풀꽃살이’쯤으로 바로잡아야겠는데, 풀꽃나무는 ‘물·바람·흙’이 아닌 ‘해·바람·비를 누리는 흙’을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사람도 같아요. 그냥 ‘물’이 아닌 ‘비’이지요.


  어느 풀꽃나무이든 그냥 물(거의 수돗물)을 주어서는 겨우 숨을 잇는다고 할 터이나, 싱싱하게 살아날 숨을 얻지는 못합니다. 예부터 마당이 아닌 그릇으로 풀꽃을 기르는 분들은 비가 오면 으레 그릇을 죄 비를 맞도록 바깥에 내놓았다가 들이기 바빴어요. 아무리 ‘사람이 손으로 물을 주어’도 ‘하늘에서 오는 비’만큼 풀꽃을 살리지 못하는 줄 알거든요.


  비란 무엇이기에 풀꽃나무를 그토록 싱그러이 살릴까요? 비는 구름이지요. 구름은 아지랑이지요. 아지랑이는 바다이지요. 바다는 냇물이지요. 냇물은 샘물이고, 샘물은 빗물입니다. 늘 온누리를 돌고도는 싱그러운 숨결이기에 ‘비’라고 합니다. ‘비 = 흐르는 물 = 삶물·살림물’이요, ‘그냥 물(수돗물) = 갇힌 물·고인 물 = 죽음물’입니다. 숱밭(농장)에서는 그토록 싱싱해 보이는 풀꽃을 집으로 가져오면 이내 시드는 까닭을 읽어내야 합니다. 숱밭에서는 싱싱해 보이며 버티도록 ‘그냥 물’을 주니, 풀꽃으로서는 그 모습을 악착같이 지킬 뿐입니다.


  그런데 풀꽃나무는 ‘해바람비흙’만으로 살아가지는 않아요. 해바람비흙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비록 그냥 물을 받고 햇볕조차 없는 데에 있더라도 사랑을 받는 풀꽃은 야무지게 살아납니다. 사람도 이와 같으니, ‘돈이름힘’이나 ‘옷밥집’이 모자라거나 적거나 없더라도 ‘사랑’을 받을 적에 싱그럽게 피어나요.


  마지막으로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는 내내 ‘햇빛’만 이야기하는데, 풀꽃은 ‘빛’이 아닌 ‘볕’을 먹습니다. “해가 잘 드는 곳”이란 “햇볕이 잘 드는 곳”입니다. 풀꽃이며 짐승이며 사람을 북돋우는 ‘해 기운’은 ‘햇볕’입니다. 햇볕이 적은 겨울은 풀꽃나무도 잠을 자지요. 빛만이 아닌 볕을 쬐는 풀꽃나무이기에, 그릇으로 풀꽃을 키우는 분이라면 으레 풀꽃그릇이 볕을 고스란히 받도록 헤아리면서 그릇을 자꾸자꾸 옮겨 줍니다. 해는 ‘빛·볕·살’을 온누리에 베푸는데, ‘빛·볕·살’은 또렷이 다릅니다.


  그리고 ‘반려식물’이 나쁘지 않습니다만 ‘곁풀·곁꽃·곁풀꽃’을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풀꽃을 ‘곁’에 둔다는 마음이 된다면, 해바람비에다가 흙하고 사랑을 곁에 두는 길을 늘 마음으로 읽어내리라 봅니다.


ㅅㄴㄹ


인생 첫 독립 후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 알게 되었다. 농장에서는 물만 줘도 잘 자라는 것 같던 식물들이 집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5쪽)


식물을 가장 잘 키우는 존재는 자연이다. 그 위대한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66쪽)


처음 간 모임에서 아무도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계속 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집에 갔는데 날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떠나고 싶을 것이다. (89쪽)


처음엔 햇빛과 환기가 그렇게나 중요한지 몰랐다. 며칠 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나가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나도 몰랐던 우울감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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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아빠 목소리 - 태교 동화를 읽는 시간.지혜를 배우는 아이 하루 5분 태교동화 시리즈
정홍 지음, 김승연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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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7.18.

인문책시렁 200


《하루 5분 아빠 목소리》

 정홍 글

 김승연 그림

 예담

 2014.11.20.



  《하루 5분 아빠 목소리》(정홍 글·김승연 그림, 예담, 2014)를 읽으며 살짝 아찔했습니다. 오늘날 숱한 사내(아버지나 아저씨)는 어린이하고 하루 5분조차 느긋이 어우러지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수다를 떨면서 살림을 보여주고 물려줄 틈을 못 내는구나 싶더군요.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은지, 아니면 하루 다섯 시간을 아이랑 마음껏 놀 만한 일거리를 찾고 살림길을 헤아리고 싶은지, 바로 오늘부터 갈무리해야지 싶습니다. 숱한 사내(아버지나 아저씨)가 얼마나 집 바깥으로 나돌면서 집안일에 게으르거나 등돌리기에 “하루 5분 아빠 목소리” 같은 말이 불거질까요? 이 5분이나마 느긋하게 누리려나요?


  그런데 이제는 사내뿐 아니라 가시내(어머니나 아줌마)도 아이 곁에서 5분을 느긋이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나누면서 생각을 빛내는 길하고 차츰 멀어진다고 느낍니다. ‘의사소통’이 아닌 ‘이야기’를 제대로 5분을 펴는지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마음을 빛내는 삶님으로 한집에서 함께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생각할 노릇입니다.


  제발, “무엇을 할 생각인가”부터 생각하기로 해요. 어떤 이야기여도 좋습니다. 아무 이야기나 하지는 마요. 거듭 말하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좋으나 ‘아무’ 이야기나 하지는 맙시다.


ㅅㄴㄹ


어쨌거나 넝마주이는 또 갈등하기 시작했어. 못 본 척하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게다가 집에 큰애가 아파 누워 있다잖아. 자기 아들처럼 말이야. (124쪽)


피에르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이반은 그것이 허황된 꿈이라며 잔소리를 해대기 일쑤였다. (210족)


그때까지만 해도 왕자는 호이병들 중 한 명이 자신을 구한 거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잠시 후 화살의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나자 깜짝 놀라고 말았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활을 들고 서 있는 그녀는 옛 화가들이 그린 명화의 인물처럼 신비로운 여신 그 자체였거든. (254쪽)


나는 씩 웃으며 도시락 뚜꼉을 열어 보았습니다. 애들 솜씨답지 않게 훌륭한 요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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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 저들은 대체 왜 저러는가?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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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6.22.

책으로 삶읽기 691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진중권

 천년의상상

 2020.11.11.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진중권, 천년의상상, 2020)를 읽었다. 책은 도톰하지만 비슷비슷한 줄거리로 흐르기에 이내 다 읽는다. 간추리자면 “민주당은 내로남불 끝판짓을 일삼아 스스로 무너지고, 따갑게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닌 님바라기(팬덤)에 사로잡힌 목소리에 스스로 갇혔다”이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쉽게 빗대어 말할 만하다. 어버이라면 모름지기 아이를 가없이 사랑한다. 그러나 아이가 남몰래 막짓이나 검은짓을 한다든지, 동무를 괴롭히거나 돈을 훔친다든지, 이웃을 괴롭히거나 풀꽃나무를 함부로 짓밟는다든지, 들고양이나 들개한테 돌을 던지거나 막말을 일삼는다면, 어버이로서 마땅히 아이를 따끔하게 나무라고 가르치겠지.


님을 바라는 마음은 안 나쁘다. 그런데 막짓과 검은짓과 잘못을 일삼는 님을 그저 따르고 높이기만 한다면 이 나라꼴이 어떻게 될까? 민주당이 저지른 잘못을 따지면 으레 “저짝(국민의 힘) 사람들 잘못은 왜 안 따져?” 하고 되묻더라. 아니, 저짝 잘못을 따지는 자리가 아닌 이짝(민주당) 잘못을 따지는 자리에서 웬 뜬금없는 소리일까? 더구나 민주당은 오늘 이곳에서 ‘권력자·지배자’요, 이 힘(권력)으로 잘못을 저질렀으니 검찰·언론·야당이 민주당을 얼마든지 나무라야 하고, 나무랄 만하며, 꼬치꼬치 파고들어서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이명박을 사슬에 가두었는가? 사람들이 왜 아직도 전두환을 손가락질하고, 노태우가 고개숙이고 뉘우치는 모습은 다르게 바라보는가? 문재인이나 문준용이라는 이름도 스스로 ‘권력자·지배자’이기 때문에 더 고개숙여야 하고, 더 심부름꾼 노릇을 해야 하며, 더 몸을 숙여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고 베푸는 몸짓이 되어야겠지.


우리나라는 힘·돈·이름이 있으면 싸움판(군대)에 들어가더라도 ‘땅개(육군 보병 소총수)’가 되지 않는다. 지난날에는 군대 취사병도 뒷힘이나 뒷돈으로 들어갔다. 요즈음 군대 취사병은 퍽 힘들다지만, 지난날 군대 취사병은 노닥거리면서 먹을거리(부식)를 많이 빼돌렸고, 훈련도 안 뛰고 점호도 안 했다.


글바치인 진중권은 이 나라 밑자락을 이루는 사람(서민·시민·국민·백성·민중·민초·대중)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워낙 글바치(지식인)이기에, 글바치로서 제몫을 하려고 이 나라 힘꾼(권력자)인 민주당을 따박따박 나무라는 말을 들려준다. 진중권이 펴는 말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옳다. 다만, 진중권이 펴는 말에도 하나가 빠졌다. “자, 그러면 내로남불을 일삼은 민주당과 구닥다리인 국민의힘, 아직도 헤매는 정의당·녹색당은 둘째치고, 여느 사람들이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살림을 사랑스레 짓는 아름다운 길은 무엇입니까?” 하는 말과 생각과 물음이 없다.


요즈막에는 잘잘못을 나무라는(비판) 목소리가 갑작스레 사라지고 파묻혀 버렸는데, 이런 판에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는 진중권은 여러모로 글바치 노릇을 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글바치가 참말로 글바치가 되려면, 낮에는 땅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몸짓으로 나아가야지 싶다. 글바치 진중권 씨한테 “전라도에서 세 해 살아 보기”를 여쭙고 싶다. 전라도 보성이나 고흥이나 해남이나 신안처럼, 외지거나 깊은 시골자락에서 세 해쯤 살아 보시면 좋겠다. 이러고서 경상도 시골, 이를테면 영양이나 예천이나 봉화 같은 고장에서 세 해를 살아 보시면 참 좋겠지.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불거지는 잘잘못을 파헤치거나 따지는 눈썰미를 이제는 ‘지자체 깊은 곳에 썩을 대로 썩다가 문드러져 구린내가 펄펄 나는 밑자락’으로 들어가서 살펴본다면, 이녁 글에 엄청난 날개 하나가 돋으리라 본다.


ㅅㄴㄹ


놀이하던 인간들이 언제부터인가 놀 줄을 모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노동요를 들을 수가 없다. (82쪽)


철학의 빈곤은 통치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발언에는 정작 국민이 듣고자 했던 이야기가 쏙 빠져 있었다. ‘윤미향의 거취를 어찌할 것인가?’ 여당은 범법만 없으면 문제없다며 판단을 검찰에 맡겼다. (224쪽)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이는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정상’이다. (256∼257쪽)


사실 민주화 세대는 그동안 꾸준히 보수화 해왔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급속히 체제에 포섭돼 아파트를 가진 중산층으로 변모한다. (271쪽)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지배층이 되었다. 그들이 조국 일가의 일을 제 문제로 느낀 것은, 같은 상류층으로서 계급적 이해를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 그들은 더 이상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그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282쪽)


박원순을 위해 성추행 피해자의 지위는 ‘피해호소여성’으로 변경되었다. ‘피해호소여성’이라는 표현은 곧 “나는 너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결연한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다 … 그(박원순)가 애써 세워놓은 원칙을 그들(조국과 민주당)은 그(박원순)를 위해 무너뜨렸다. 그러써 그가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마저 지워졌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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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시간 - 아픔과 진실 말하지 못한 생각
조국 지음 / 한길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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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6.22.

책으로 삶읽기 690


《조국의 시간》

 조국

 한길사

 2021.5.31.



《조국의 시간》(조국, 한길사, 2021)을 조용히 읽어 보았다. 글님 이야기로 바깥이 시끌시끌한 듯하지만, 서울이나 큰고장에서나 그러할 뿐, 시골에서 글님 이야기를 할 일이 없고, 할 사람도 없다. 오뉴월로 접어든 이즈음 시골은 아주 바쁜 일거리는 어느 만큼 마무르는데, 달개비꽃이 파랗게 올라온다. 오동꽃도 눈부시다. 오디가 조금씩 저물지만, 까마중잎이 새롭게 오른다.


이른봄에는 풀벌레가 소리쟁이를 훑으려고 달려든다면, 이른여름에는 풀벌레가 까마중을 갉으려고 달라붙는다. 풀벌레가 좋아하는 풀은 사람한테도 이바지한다. 뽕잎도 취잎도 풀벌레가 얼마나 잘 먹는지 모르고, 모싯잎도 풀벌레가 매우 좋아한다. 풀꽃나무하고 풀벌레하고 풀살림을 서울이며 큰고장에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아름길을 가리라 본다.


벼슬이나 감투를 얻은 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스스로 좁은 울타리에 갇혀서 종이꾸러미만 들여다보거나 셈틀맡에 앉아서 한숨을 쉬거나 하소연을 하는가? 아니면 그들 이름값·힘값·돈값을 고스란히 내려놓고서 맨몸으로 심부름꾼 노릇을 하겠다면서 소매를 걷어붙이는가?


책으로 갈무리한 이야기라면 모든 바깥소리를 끄고서 오롯이 책을 바라보면서 ‘글님이 글줄에 숨기거나 언뜻 비친 마음’을 우리가 스스로 읽으면 된다. 누가 쓴 어느 책을 읽든 그저 속내를 읽으면 된다. 글님 목소리만 읽는다면 님바라기(우상숭배)가 된다.


《조국의 시간》을 읽는 내내 “나와 내 가족이 아프고 힘들다”는 목소리가 줄잇는다. “나와 내 가족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검찰·언론·야당이 나쁘다”고 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알쏭하다. 검찰·언론·야당이 하는 일이란 지켜보기·지청구(권력감시·권력견제)이다. 민주당이 야당일 적에 하던 일을 오늘날 야당인 곳에서 할 뿐이요, 글님을 비롯한 민주당은 “오늘날 이곳에서 권력자·지배자인 줄 잊은” 듯하다. 누구라도 ‘권력자·지배자’ 자리에 서면 샅샅이 파고들면서 잘잘못을 가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켜보기·지청구(권력감시·권력견제)’를 할 수 있겠는가?


곰곰이 보니 글님은 타고나기를 ‘권력자·지배자’ 자리였고, ‘서민·시민·국민·백성·민중·민초·대중’ 같은 이름인 자리에는 하루조차 선 적이 없구나 싶다. 언제나 위에 서서 부리거나 내려다보는 길만 걸은 탓에, 맨몸으로 비바람을 맞이하면서 흙을 짓고 살림을 돌보고 아이를 사랑하는 집에서 살아 본 적도 없구나 싶다.


꼭 모든 사람이 배를 곯아 보거나 가난해 보아야 하지는 않다만, 감투나 벼슬을 얻는 자리, 더구나 높직한 감투나 벼슬을 얻는 자리에 서는 이라면, “가난한 사람(저소득층·빈민층)으로 살아 보기”를 적어도 석 달은 해봐야지 싶다. 자가용 아닌 두 다리하고 대중교통(이 가운데 지옥철)으로 일터를 오가고, 반지하 아닌 지하 삯집이나 하늘집(옥탑)에서 한겨울과 한여름을 지내 보고서야 감투나 벼슬을 받아야지 싶다.


또한 여름가을에 들일을 해봐야겠지. 낫으로 풀을 베고 나락을 거두어 보지 않고서야 벼슬아치가 삶을 알 수 있을까? 맨손으로 아기 똥오줌기저귀를 갈고서 자장노래를 부르고 젖떼기밥을 먹여 보지 않고서 살림을 알 수 있을까?


힘꾼(권력자·지배자)이기에 검찰·언론·야당을 탓하겠지. 수수한 사람들은 검찰·언론·야당을 탓할 일이 없다. 검찰·언론·야당 등쌀이 싫다면 감투와 벼슬뿐 아니라 돈·이름·힘을 모조리 내려놓고서 시골에 조용히 깃들어 흙살림을 하기를 빈다. “있는 사람”이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 모든 개혁은 저절로 차근차근 이룬다.


ㅅㄴㄹ


2019년 8월 9일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후 저와 제 가족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습니다. 검찰·언론·야당은 합작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위한 조리돌림과 멍석말이를 시작했습니다. 검찰이 정보를 흘리면 언론은 이를 기초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야당은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 저와 제 가족은 광장에서 목에 칼을 차고 무릎이 꿇린 채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5쪽)


검찰·언론·야당 카르텔에 비판적인 시민들은 ‘조빠’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카르텔의 강변과 주장이 세상에 가득 찼습니다. 살수(殺手)들은 신이 났습니다. 도끼를 내리쳤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활을 쏘고 창을 던졌습니다.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갈 때마다 쌍욕과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6쪽)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친애하는 벗과 동지들의 권유였습니다. 추후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2019년 8월 9일 이후 벌어진 사태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발간하는 것은 부담이지만, 검찰·언론·야당의 주장만이 압도적으로 전파되어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최소한의 해명은 해야 했습니다. (7쪽)


찔리고 베이고 부러진 상처가 너무 깊어 아무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이 고통의 시간이 어떻게 마무리되건, 그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 시민으로서의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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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 - 소설 속의 인천
양진채 지음 / 강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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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5.19.

책으로 삶읽기 682


《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

 양진채

 강

 2021.1.30.



《인천이라는 지도를 들고》(양진채, 강, 2021)를 읽으며 인천이라는 고장이 어쩐지 미덥지 못하기만 하다. 소설이라는 글에 나온 인천을 놓고서 이야기를 엮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퀴퀴하거나 어둡다. 어른글(소설)뿐 아니라 어린글(동화)에서도 매한가지. 인천을 사랑스럽거나 즐겁거나 환하게 그리는 글을 거의 못 보았다.


인천이라는 마을이 썩 안 사랑스럽고 안 즐겁고 안 환하다면, 어른글이든 어린글이돈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인천은 서울 바깥자리도 아니요, 인천에서도 이 마을이 저 마을 바깥자리가 아니다. 어디나 삶자리이다.


글쓴이는 아버지가 돈을 못 벌어 자꾸 ‘바깥(외곽)’으로 밀려갔다고 적는데, 삶자리에서 안도 복판도 바깥도 없다. 모두 삶자리일 뿐이다. ‘글이라는 눈’이 아닌 ‘삶이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굳이 인천을 소설에서만 찾아내지 않았을 테고, 소설에서도 사뭇 다른 길을 찾아내었을 테며, 알록달록 온갖 이야기를 길어올릴 만하다고 본다.


이제는 전남 고흥에서 살지만, 인천에서 나고 자란 몸이라서 인천을 다룬 책을 으레 들춰보며 살았는데, 여태 인천을 다룬 글 가운데 《민주 깡통을 아십니까?》처럼 인천을 사랑스럽고 즐겁고 환하게 잘 다룬 책은 못 보았다고 느낀다. 이 책은 인천을 높지도 낮지도 못나지도 잘나지도 않은 그저 삶자리라는 눈으로 바라본다.


글쓴이부터 “외곽에서 외곽으로 밀려났고(9쪽)”라 말하는 터라, “이상하게 서울에서 인천으로 갈 때 ‘내려간다’고 하고, 반대의 경우는 ‘올라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113쪽)”는 대목이 왜 아리송한가를 스스로 모른다. 옥련동이 바깥자리인가? 용현동이 바깥자리인가? 나는 아마 서른예닐곱 살까지 삯집에서 살았을 텐데, 시골로 터전을 옮기며 비로소 빈집을 1000만 원에 사들여서 집임자가 되었는데, 삯을 주고 깃들기에 어둡거나 꾀죄죄하거나 가라앉거나 못생긴 삶이었다고 느낀 적은 하루조차 없다.


이웃이 있다. 동무가 있다. 내가 있고 네가 있다. 인천사람이 서울만 보고서 ‘내려가다·올라가다’를 쓰지 않는다. 인천사람은 수원사람한테도 ‘내려가다’라 말하는걸? 인천사람은 안산사람한테도 ‘내려가다’라고 말하는데? 고흥 같은 시골뿐 아니라 전남 광주조차도 인천사람은 ‘내려가다’라 말한다. 아는가? 광주에서도 고흥이나 강진이나 장흥이나 담양 같은 시골로 ‘내려가다’라 말한다. 부산도 대구도 대전도 똑같다.


길그림(지도)도 길바늘(나침반)도 삶이라는 자리에 두어야 비로소 삶을 읽는 눈이 된다. 삶이 아닌 위아래나 높낮이로 보는 눈빛이라면, 소설이든 동화이든 시이든 어디에서든 높낮질과 툭탁질과 막질이 춤추는 이야기에서 맴돌다 끝난다.


ㅅㄴㄹ


몇 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실직으로 주안 신기촌에서 용현동으로, 다시 옥련동으로 집 평수를 줄여가며 외곽에서 외곽으로 밀려났고,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가 됐다. (9쪽)


동네 조그만 슈퍼들이 대형마트에 잠식되듯 2011년 송도유원지는 그렇게 사라졌다. 50년의 명맥이었다. (92쪽)


인천 사람들 중에 이상하게 서울에서 인천으로 갈 때 ‘내려간다’고 하고, 반대의 경우는 ‘올라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113쪽)


삶이 척박하다 보니 교육이니, 문화이니 하는 말들은 다 배부른 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인정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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