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어디로 갔을까? 1 바람의요정 윈디
김수정 지음 / 둘리나라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책읽기

책으로 삶읽기 616


《모두 어디로 갔을까? 1》

 김수정

 둘리나라

 2019.12.18.



“똥 만지는 연습, 기저귀 가는 연습, 업는 연습, 분유 먹이는 연습, 연습을 자꾸 해봐야지.” “엄마∼. 얘는 제 아기가 아니거든요. 동생도 아니고.” “동생이 별거냐? 너보다 어리면 동생이지.” (51쪽)


“대박!” 애린이 동조합니다. “안 돼! 저스틴의 정체가 탄로 나면 생명이 위험해.” 세라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왜?” “영화 못 봤어? 초능력자를 납치해서 나쁜 곳에 이용하는 거? 세계정복을 꿈꾼다거나, 유해물질을 운반 시킨다거나, 나중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없애려고 하잖아.” (179쪽)



《모두 어디로 갔을까? 1》(김수정, 둘리나라, 2019)를 읽으며 매우 힘들었다. 줄거리가 엉성하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종잡을 길이 없다. 우리나라 어린이가 아닌 캐나다쯤 되는 나라 어린이를 그리는구나 싶으나 막상 ‘우리나라 어린이’ 같은 짓을 한다. 글이랑 그림이랑 만화는 모두 다르다. 만화책으로 이 줄거리를 그린다면 그럭저럭 봐줄 만할는지 모르나, 글로 이 줄거리를 이만 하게 담는다면 도무지 못 봐준다. 밑그림(콘티)을 그냥 옮겨 놓은 셈이랄까. 김수정 님이 ‘판타지 동화’를 쓰고 싶은 꿈이 있는 줄은 알겠으나, 이 책은 영 아니다. 꿈을 그리지 않으면, 꿈길에서 슬기로이 사랑을 나누면서 새롭게 피어나는 눈부신 숨결을 그리지 않는다면, 겉무늬로는 ‘판타지 동화’여도 속내로는 멋부리기일 뿐이다.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이 행복해지기 위해 함께하는 세상 1
채인선 지음, 노석미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책읽기

책으로 삶읽기 613


《행복이 행복해지기 위해》

 채인선 글

 노석미 그림

 뜨인돌어린이

 2017.4.12.



교육부 장관의 얼굴에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웬 수선인가 하는 기색이 비쳤다. 대책 회의라며 왜 일반인들을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통령이 간단히 잘라 말했다. (17쪽)


그의 말에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을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의 교육 모토가 ‘행복 교육’입니다. 정부도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특별히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19쪽)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행복이 가 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행복과 함께 떠나겠습니다.” (34쪽)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혼란을 넘어서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재앙은 아무도 수습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가장 자신 없는 모습입니다.” “내가 행복을 받아들이면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삶을 부정하는 꼴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55쪽)



《행복이 행복해지기 위해》(채인선, 뜨인돌어린이, 2017)를 읽은 지 이태가 지난다. 곰곰이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한테 읽힐 글이 아닌 어른한테 읽힐 글이다. 어린이는 ‘기쁨이(행복)’라는 사람이 마을을 떠나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어린이 스스로 기쁨이란 숨결인걸. 어린이는 스스로 빛나면서 기쁨이요, 어른이란 사람도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란 몸으로 살았기에, ‘어른 = 스스로 기쁨이인 줄 잊은 사람’이라 할 만하다. 이 대목을 여러모로 짚으려고 한 이야기책이지 싶은데, 어린이가 읽기에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말씨가 많다. 그리고 어린이 스스로 기쁨이란 삶을 놀이로 찾고 누리면 될 노릇인데, 좀 어른 눈길로 틀을 지으려 하고, 대통령이나 교육부장관이라는 정치를 굳이 끌어들였으며, 스님 한 사람을 지나치게 치켜세우기도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기쁜 웃음을 짓고 나눌 적에 비로소 보람을 누린다고 할 테지만, 그러자면 이 나라 입시지옥이며 전쟁무기 같은 대목을 반드시 짚어야겠지. 입시지옥으로 짓누르며 스스로 평화와 평등뿐 아니라 기쁨하고 등질 뿐 아니라, 어린이한테서 놀이를 빼앗았는걸. 전쟁무기에 돈을 엄청나게 쏟아부으면서 나라살림이 거덜나는 판이지. 게다가 전쟁무기를 ‘국방산업’이란 이름을 들씌워 숱한 어른은 이 국방산업으로 돈을 버는 일자리를 누리기까지 한다. 기쁨이는 우리 스스로인데, 우리 바깥에 있는 어떤 기쁨이가 떠날 수 있지 않다. 우리 스스로 기쁨이인 줄 잊기에 이 나라가 찌들거나 무너지는 길을 갈 뿐이다.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을 여는 창 언어 인류의 작은 역사 5
실비 보시에 글, 메 앙젤리 그림, 선선 옮김, 김주원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어린이책

책으로 삶읽기 612


《내일을 여는 창, 언어》

 실비 보시에 글

 메 앙젤리 그림

 선선 옮김

 푸른숲주니어

 2007.11.25.



《내일을 여는 창, 언어》(실비 보시에·메 앙젤리/선선 옮김, 푸른숲주니어, 2007)는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썼다는데, ‘말’하고 ‘언어’ 두 가지 말을 섞는다. 어린이한테 이런 두 말을 써도 좋을까? 왜 말을 ‘말’이라 않고 ‘언어’라고 해야 할까? ‘말’을 프랑스말로 어떻게 옮기려는가?



실제로 한국어에서 순 토박이말은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해요.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말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면 아주 불편할 거예요. (99쪽)



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말을 얼마나 알기에 이런 글을 썼는지 아리송하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책에 흐른다. 어느 나라이든 이웃나라 말이 흘러들어서 뿌리내린다. 그 나라에 없는 살림을 다루는 말이라면 그 살림하고 말이 함께 들어온다. 그런데 이때에 이웃나라 말을 고스란히 쓰기도 하지만, 모든 겨레나 나라는 그들 나름대로 바깥말을 가다듬거나 손질해서 쓰기도 한다.


우리말은 중국을 섬기던 옛임금에다가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은 먹물붙이가 수두룩한 탓에 중국 한자말하고 일본 한자말이 끼어들려고 했다. 오늘날에는 영어하고 번역 말씨가 끼어들지. 조선 임금이 중국을 섬기면서 그들 벼슬아치가 쓴 중국 한자말을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은 이들이 끌어들인 일본 한자말을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해방 뒤로 밀물결을 치는 영어를 우리말이라고 해야 할까?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한다면 아주 불편할 거예요(99쪽)” 같은 말은 더더욱 어린이 넋을 좀먹을 만한 대목이다. 어느 누가 “순 토박이말”만 써야 하는가? 우리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서 나눌 말’을 쓸 뿐이다. ‘우리 삶을 찬찬히 밝혀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말’을 쓴다. 이러면서 더 어리거나 여린 사람을 헤아리면서 말결을 가다듬어야겠지. 어린이가 알아듣지 못할 뜬금없는 프랑스말이나 영어나 중국 한자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씨가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쉽고 즐거우며 사랑스러운 우리말을 어른들이 찾아내고 캐내고 가다듬고 엮고 지어야 할 테고.



어떤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어요.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지 단어와 문법을 외우는 것이 아니거든요. (109쪽)



  ‘바깥말만 낱말하고 말틀 외우기가 아니’지 않다. 우리가 이 땅에서 쓰는 말도 낱말하고 말틀만 외워서는 못 쓴다. 삶을 그리는 말이니 삶말을 쓴다. 살림을 드러내니 살림말을 쓴다. 사랑하고 싶은 하루이니 사랑말을 쓰지.



세상과 만물이 생길 때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지닌 창조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요. (21쪽)



《내일을 여는 창, 언어》는 한글로 적은 책이지만 무늬만 한글이다. “말이 지닌 창조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일 테지요”는 무슨 소리일까? 이런 번역 말씨로 프랑스말을 옮겨서 어린이책을 내놓으면 어린이는 어떤 말씨를 읽으면서 배우라는 뜻일까?


→ 온누리 모두가 태어날 적에 말이 있었어요. 새로 짓는 말힘을 이야기한답니다.


말짓기란 생각짓기이다. “순 토박이말로 고쳐쓰기”를 하는 길이 아닌, “우리 스스로 생각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도록 새로 지으려는 마음으로 말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우리 손으로 짓는” 길이다.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삶이 있으며, 삶이 있으면 사랑이 있다. 사랑이 없다면 삶이 없을 테고, 삶이 없다면 말이 없겠지. ‘말·삶’을 나란히 헤아려야 할 텐데, 여기에 하나를 얹어 ‘말·삶·넋’으로, 하나를 또 얹어 ‘말·삶·넋·빛(사랑)’으로 바라보아야 비로소, 말이 왜 새날을 여는 길인가를 밝힐 만하리라.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책읽기

책으로 삶읽기 607 - 낡은말로는 갈아엎지 못한다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2.1.



최근 부르주아 경제학은 아예 ‘가치’는 빼고 ‘가격’만 말한다. 가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26쪽)


자본주의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들을 방어하는 방법은 ‘사회화’다. 부의 사유화를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제 본디 모습을 부정하는 요소들을 도입하여 제 모순을 해결하였다. (60쪽)


현대의 고급 노예들도 마찬가지다. 임금과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신이 다를 바 없는 임금 노예라는 사실을 잊는다. (76쪽)


세상이 거시적이기만 하다거나 미시적이기만 하다는 식의 생각은 정상 범주의 사람들에겐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실제 현실의 삶을 살 일이 거의 없는, 언제나 책으로만 둘러싸여 ‘지식 과잉’ 상태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이다. (193쪽)


기존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혁명이 성공했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로소 ‘혁명의 시작’이다. 혁명은 인민이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유지하며, 엘리트와 관료를 견제하고 부리며, 자신을 포함하여 사회 전 분야의 제도와 관습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는 ‘자기해방’ 과정이다. (210쪽)



《혁명노트》(김규항, 알마, 2020)는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두벌을 찍었다고 한다. 김규항이라는 이름을 믿거나 따르거나 반기는 손길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녁은 새책을 선보이면서 〈중앙일보〉하고 만나보기를 했고, 이 만나보기는 매우 크게 실렸으며, 이녁은 〈중앙일보〉에 글을 꾸준히 싣기로 했다고도 한다.


‘자본주의’하고 ‘부르주아’를 그토록 날선 목소리로 까대는 글을 쓴 김규항이라면 〈중앙일보〉랑 만나보기를 할 뿐 아니라, 이곳에 글을 쓰는 까닭이나 뜻을 먼저 이녁 누리집에 밝힐 노릇 아닐까? ㅈㅈㄷ 가운데 〈중앙일보〉는 이제 부르주아도 자본주의도 아니기 때문인가. 이 신문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뉘우치면서 참길을 걷겠다고 밝혔는가.


《혁명노트》를 읽는 내내 왼길은 언제나 오른길하고 만난다는 대목을 한결 새롭게 느꼈다. 왼길하고 오른길은 서로 다르면서 으레 으르렁거린다고 여기곤 하지만, 곰곰이 보면 왼길하고 오른길은 늘 만난다. 더 왼길일수록 더 오른길이랑 만나고, 더 오른길일수록 더 왼길하고 가깝더라. 《혁명노트》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말씨로 혁명을 노트’한 꾸러미이다.


우리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말씨로도 얼마든지 새판을 짜거나 새물결을 일으키거나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말씨이기에 이 썩어문드러진 나라를 갈아엎는 이야기를 못 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손에는 낫이나 쟁기나 호미를 쥐고서, 다른 손에는 붓이며 종이를 쥔 일꾼이나 살림꾼이나 사랑꾼이라면, 이제는 달리 생각할 노릇이라고 여긴다.


새로 담근 술은 새 자루에 담아야 한다. 새로 끓이는 국은 새 그릇에 담아야지. 밥을 새로 지으려고 하는데 설거지조차 안 한 지저분한 솥에다가 짓는가? 새로 밥을 지어서 차리는데, 행주로 자리를 안 닦고 지저분한 수저랑 그릇을 올리는가? 새로 빨래하거나 마련한 옷을 입으려는데 몸을 안 씻고서 걸치는가? 온누리를 새롭게 가꾸고 싶은 꿈을 들려주려는 이야기라면, 이제는 우리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여느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하는 말씨를 새삼스레 배우고 가다듬어서 쓸 노릇이라고 본다. 더더구나 김규항은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잡지를 엮는 일꾼인걸. 어린이한테 ‘인문교양’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라. 부르주아 자본주의 말씨 그대로 ‘인문교양’을 어린이한테 집어넣지 말아라. 어린이한테는 오직 ‘놀이살림·이야기소꿉’이면 된다.


돈길(자본주의)이 스스로 거스르는 길로 나아가면서 스스로 잘못을 풀어낸다면, 돈길이 아닌 삶길을 외치는 이들은 언제쯤 스스로 잘못을 풀거나 허울을 벗고서 새 모습이 되려는가? ‘녹색당·녹색평론·녹색연합’처럼 먹물붙이는 ‘녹색’이란 일본 한자말을 사랑한다. 이들 먹물붙이는 ‘풀빛’이라는 푸른 낱말은 도무지 안 쳐다본다. 이들은 ‘풀’을 먹으면서도 언제나 ‘채식’이나 ‘야채·채소’만 외칠 뿐이고, 요새는 ‘그린’이란 영어에 ‘워라벨’에 어지럽다.


《혁명노트》란 책에 적은 말이야말로 ‘먹물잔치(지식과잉)’이지 않은가. 얼어죽을 ‘미시적·거시적·정상 범주의 사람’ 같은 말은 싸그리 집어치우자. ‘실제 현실의 삶을 살 일’이란 뭔 소리인가? 제발 ‘삶말’을 쓰자.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쓰는 ‘살림말’을 생각하자. ‘혁명 + 노트’란 먹물붙이 스스로 씻지 않고 털지 않고 거듭나지 않는 낡아빠진 일본 말씨 + 번역 말씨이다.


‘인민’이란 말을 사랑하는 김규항. 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국민·시민·백성·민중·대중’ 모두 우스꽝스럽다. 그 어느 말도 사람들 사이에 없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람·사람들’이다. 사람을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면서 갈아엎기(혁명)를 할 수 있을까? 갈아엎고 싶다면 괭이를 들라. 갈고 싶다면 호미를 쥐라. 괭이랑 호미하고 동떨어진 채 자가용 손잡이를 거머쥐기만 하는 그들은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똑같다. 자전거를 탈 적에도 더 천천히, 무엇보다 여느 때에 늘 두 다리로 마을을 차근차근 아이들 발걸음에 맞추어 거닐 때라야, 비로소 갈아엎든 갈든 바꾸든 고치든 하겠지.


일본 한자말이나 번역 말씨가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데 우리말을 새롭게 배울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이 일본 한자말하고 번역 말씨에만 물들거나 길든 채, 이 말씨를 곧이곧대로 붙잡는다면, 스스로 어떤 생각이 될까?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수수한 살림살이에서 어질거나 슬기로운 생각을 길어올려 마음에 새롭게 씨앗을 심는 길을 아이한테 보여주고 물려주는 사람이리라. 《혁명노트》에 담은 줄거리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지만, 이 책도 다른 먹물붙이하고 매한가지로 먹물잔치이다. 이놈이나 저분이나 한통속 먹물판이다. 이이나 저치나 서울에 또아리를 틀고서 서울 떡고물에 매여서 산다. ㅅㄴㄹ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책읽기

책으로 삶읽기 602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남해의봄날

 2017.2.10.



열 살 꼬마는 어느새 사십 대 중반이 되었지만, 건장했던 서른다섯 아버지의 따스한 등에서 들리던 기분 좋은 심장 소리를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19쪽)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아들 실내화를 사 들고 가게를 나왔다. 돌아오는 여름에는 다시 서해, 그곳에 가고 싶다. (85쪽)


처음 가게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 초반 해도 30년 이상 된 가게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무로 된 미닫이문, 이끼 낀 빛바랜 붉은빛의 기와지붕, 나무로 된 낡은 장식장 등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간직한 진한 생활의 공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속삭였다. (176쪽)


1970년 이후 이곳의 시계추가 멈춰 섰나 보다. ‘간첩신고 113’ 옛 푯말이 그대로 걸려 있고 좁고 길쭉한 툇마루 옆 두어 계단 위의 작은 나무 미닫이문은 옥빛 페인트가 반쯤 벗겨졌다. (190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미경, 남해의봄날, 2017)을 넘기면 인천이란 고장이 환하게 떠오른다. 다른 어느 곳보다 삽질이 적은 큰고장이 바로 인천이다. 영종섬하고 용유섬을 메워 하늘나루를 때려짓기도 한 인천이요, 갯벌에 흙이며 시멘트를 들이부어 억지섬을 만들어낸 인천이지만, 오랜 골목마을은 오늘도 꽤 넓게 그대로 있다. 서른 해라면 ‘어리다’ 싶은, 쉰 해나 예순 해를 훌쩍 넘은 마을가게가 참 많은 고장이 인천인데, 인천은 마을이며 골목에 나무가 퍽 많고 골목밭도 아름답다. 큰고장 한복판인 옛마을을 보노라면 꼭 시골스러운 데가 인천이랄까. 인천에서 벼슬아치·구실아치는 이 골목마을을 눈여겨보면서 보듬는 손길이 되려나. 인천뿐 아니라 나라지기나 고장지기쯤 되는 일꾼은 온나라 마을살림을 어느 만큼 어루만지는 마음길이 될까. 지나가거나 흘러간 모습이 아닌, 오늘도 어김없이 이 터전을 이루는 이웃이다. 다만, 나는 어릴 적에 군것질을 아예 안 하다시피 살며 ‘10원이며 50원 쇠돈 하나를 아끼고 건사하’곤 했다. 버스조차 안 타고 걸어다녔다. 적은 쇠닢으로 ‘즐겁게 누리던 구멍가게’가 나한테는 없었다고 할까. 어느 한때 모습이기에 아름답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가 깃들기에 아름답게 바라볼 만하겠지. 나는 구멍가게보다는 골목밭이며 골목나무를 바라볼 뿐이고, 골목길에서 누리던 골목놀이를 떠올릴 뿐이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맞아들일 들놀이·숲놀이를 헤아린다. 더 짚어 본다면, 옛자취는 ‘간첩신고 119’만 있지 않다. 웬만한 골목집이나 골목가게 어귀를 살피면 ‘조그마한 갖가지 알림판’이 수두룩하고, ‘이름판’에 깃든 오랜 숨결도 읽을 만하다. 1970∼80년대만 애틋이 여기는 ‘추억’도 나쁘지는 않지만, 어쩐지 조금 숨이 막힌다. 그 한때를 넘어서는 숨결이며 발자취이며 손길이 온마을에 함께 감돌 텐데.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