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길 1. 큰 출판사와 싸우다
― 이오덕 님 책과 한길사·창비·보리
내가 걷는 길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 말할 만한가 하고 헤아려 본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시골에서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한테, 따로 어디에 몸을 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한테, 이름도 힘도 돈도 없을 테니, 내가 걷는 길 이야기란 대수롭지 않을 만하다. 내가 걷는 길 이야기는 내가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들을 아버지 살아온 이야기이다.
2003년 8월 31일을 끝으로 나는 출판사 일에서 손을 뗀다. 1999년 8월 8일에 보리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출판사에 첫발을 뗐고, 이곳에서 2000년 6월 30일까지 일했다. 이해 11월 30일까지 전화기를 끈 채 조용히 책만 읽으면서 살았고, 2001년 1월 1일부터 보리 출판사 계열사인 토박이 출판사에서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만드는 편집장 일을 했다.
처음부터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갈 적에는 통역사나 번역가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내 전공 외국말을 너무 엉터리로 가르치는 바람에, 통역사 꿈도 번역가 꿈도 모두 접었다. 대학교는 다섯 학기만 다니고는 그만두었다.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까웠다. 통역사와 번역가 되는 공부를 하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배웠다. 다만, 나한테 한국말을 가르친 스승이나 교사는 아무도 없다. 오직 혼자서 수백 권에 이르는 국어사전과 수천 권에 이르는 국어학 책을 살피고 뒤지고 읽고 하면서 스스로 가르치고 배웠다.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제대로 배우면서 한국말을 한국말대로 제대로 익혀야 통역사나 번역가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국말 배우는 길이 끊어졌다. 얼결에 한국말 공부만 그대로 했고, 이 공부가 오늘날 내가 하는 일이 된다.
나중에 토박이 출판사에서 일할 적에 들은 이야기인데, 처음 보리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뽑힐 적에, 윤구병 선생이 나를 한 해만 책마을 현장과 실무를 겪게 한 뒤, 이듬해에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했다. 새로운 ‘어린이 국어사전’을 만들자면, 대학 학벌에도 어떤 편견이나 주의주장에도 물들지 않은 젊은 사람이 편집장이 되어 자료를 모으고 갈무리하고 엮어야 한다고 했다.
국어사전 만드는 일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아직 섣부른 길이었을까. 더 배우고 갈고닦을 배움길이 있었을까. 토박이출판사 사장인 윤구병 님 옆지기 님하고 세 차례 실랑이가 있었다. 토박이출판사 사장을 맡기로 한 윤구병 님 옆지기 님은 회사 관리만 맡겠다 하셨으나 자꾸 편집 일을 넘보셨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며 두 차례 실랑이가 지나가고 세 차례 실랑이가 생기자, 나어린 내가 그만두어야겠다고 깨달았다.
나이로 치면 책마을에서 더 일할 수 있지만,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어린이도서연구회 간사 자리로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또 전화기를 끈 채 한 달을 살았다. 전화기를 다시 켠 날,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전화 한 통 왔고, 이튿날 충주 무너미마을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이오덕 님 큰아들인 이정우 님을 처음 만났고, 이 자리에서 “아버지 글을 맡아 줄 수 있겠나?” 하는 말씀을 들었다. “저는 실업자라서 벌이가 없어 이곳을 오가는 찻삯이 없어요. 버스삯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다.
무너미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서울로 돌아갔다. 사흘쯤 서울 시내 헌책방들 다니면서 무척 오랫동안 책만 읽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려 했지만, 갈피가 잡히지 않아, 무턱대고 온갖 책을 읽고 살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돌아가신 이오덕 님이 지내던 방에서 일을 했다. 이오덕 님이 지내던 방과 책을 둔 방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처음 일한 때부터 석 달 즈음, 먼지를 닦고 쓸며 치우는 일만 했다. 책에 묻은 곰팡이를 닦고 햇볕에 말렸다. 축축하고 눌러붙은 원고를 모두 바깥으로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켰다. 어릴 적부터 코가 나빴는데, 하루 내내 먼지를 마시다 보니 코가 더 나빠졌다. 그래도 시골바람 마시면서 코와 몸을 달랠 수 있었다.
한창 먼지와 씨름하면서 이오덕 님 남긴 글과 책을 갈무리하던 11월 10일, 갑자기 큰 일이 하나 터졌다. 큰 출판사 한길사에서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몰래 함부로 내놓았다. 가을걷이를 마쳤으나, 다른 일이 아직 많은 시골인데, 이정우 님은 열 일을 젖혀 놓아야 했다. 충주에서 안동까지 여러 차례 오가면서 권정생 님과 이야기를 하고, 또 전화로도 한참 이야기를 했다. 나도 원고 갈무리는 멈추었다. ‘말썽을 일으킨 한길사에 보낼 내용증명’을 쓰느라 여러 날 걸렸다. 내용증명을 쓰고 나서 권정생 님한테 전화를 걸어 이대로 할까요 고칠 곳 있나요 하고 여쭈었다. 내용증명을 다 쓰고 나서, 매체에 알릴 기사를 썼다. 기사를 다 쓰고 나서는 권정생 님을 찾아가서 보여 드렸다. 몇 군데를 손질해서 올리기로 했다. 오마이뉴스라는 데에 기사를 올리고, 다른 언론사에 보도자료로 띄웠다.
이때부터 여러 날 격려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비방선전도 들어야 했다. 내(최종규)가 이오덕 님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고서 ‘잘난 척’한다는 비방선전이었다. 윤구병 님한테서 사랑을 받아 ‘보리 어린이 국어사전 편집장’이 되더니, 이번에는 ‘이오덕 원고 정리 책임자’가 되어, 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분다’는 비방선전이 뒤따랐다. 이런 비방선전은 내 귀로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정우 님이 이녁한테 이런 비방선전을 알리는 전화가 온다고 말씀해 주었고, 책마을에 있는 선배들이 술 한잔 사 주겠다고 하면서 ‘누가 말했는지는 알려 하지 말고 이런 뒷소문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한길사가 저지른 말썽은 열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출고정지 안 하겠다’고 닷새를 버티었고, ‘출고정지 하겠다’고 했어도 닷새를 더 책을 팔았다. 이정우 님은 짐차를 손수 몰아 파주로 달려가서, 출고정지를 해서 창고에 그대로 남은 책을 짐칸에 싣고 돌아왔다. 이 책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려고 하다가, 권정생 님이 “정우야 태우지는 말아라. 책이 불쌍하다.” 하고 말씀해서 태우지 못했다. 이정우 님은 “그러면, 무너미에 아버지 생각하며 찾아오는 손님한테 한 권씩 드릴까요?” 하고 여쭈었고, “그렇게 해라. 그 책을 팔지는 마라.” 하고 말씀했다.
말썽은 가라앉았지만, 책마을에서 나를 두고 입방아 찧는 엉뚱한 소문에 시달렸다. 게다가, 한길사 말썽이 가라앉은 뒤 ‘창작과비평사(창비)’ 말썽이 터졌다. 이오덕 님이 공책에 남긴 일기책을 어느 날 커다란 상자 하나에서 찾아냈는데, 이 일기책을 살피다가 창작과비평사에서 이오덕 님이 낸 ‘아이들 글모음’이 ‘인세 계약’이 아닌 ‘매절’로 낸 책인 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어느 해부터인가 창작과비평사는 《우리 반 순덕이》며 《이사 가던 날》이며 《웃음이 터지는 교실》이며, 모두 다섯 권에 이르는 책 간기(판권)에 저작권을 아예 ‘창비’라 적고, ‘이오덕’이라는 이름까지 지워 없앴다.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로구나 하고 느껴, 저작권심의협의회에 정식으로 여쭈었다. 창비 출판사에서 ‘인세 계약’ 안 한 잘못 하나, ‘저작권 표시 의무 위반’ 잘못 둘, ‘미지급 인쇄 소급 적용’ 안 한 잘못 셋, 이렇게 세 가지로 저작권법을 어겼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창비 어린이책 책임자로 있는 김이구 님한테 내용증명을 보냈다. 이러한 일이 있으니 바로잡기를 바란다고 알렸다. 이때까지 지급을 하지 않은 인세를 지급할 것, 이제까지 몇 권 팔았는지 자료를 보낼 것, 이오덕 님한테서 저작권리 물려받은 이정우 님과 새 계약서 쓸 것,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창비 김이구 님은 ‘창비는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법정에 소송을 걸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글쓰기연구회 교사들과 둘레 사람들이 ‘죽은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면서 법정 소송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무엇이 먹칠일까. 잘못을 그대로 안고 가는 일이 먹칠일까, 잘못을 밝혀 바로잡는 일이 먹칠일까. 글쓰기연구회 교사들은 한길사에서 낸 책을 절판시킨 일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분들은 ‘잘못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한 번 나온 책은 그대로 유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 달이었나 두 달이었나 석 달이었나, 이오덕 님 글 갈무리하는 일이 자꾸 뒤로 밀리면서 엉뚱한 소송글과 내용증명을 써야 하니 답답했다. 나는 이렇게 큰 출판사와 싸우려고 무너미마을에 오지 않았는데, 그동안 큰 출판사들이 이오덕 님 책을 놓고 벌인 잘못이 자꾸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맺고 풀 적마다 내 뒤에서 나를 나쁘게 말하는 소문이 커진다.
창비 출판사는 드디어 편지를 보냈다. 인세 미지급금으로 500만 원을 주고, 새 계약으로 인세 3퍼센트를 주겠다고 말했다. 잘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너무 하잘것없는 보상금과 인세율을 말했기에, 이정우 님은 “그렇게 할 바에는 아버지 책을 모두 절판시키시오. 이제 창비에서 아버지 책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하고 말했다. 창비아동문고는 이오덕 님이 기획해서 염무웅 님과 함께 만들었지만, 어느새 이오덕 님 이름이 창비아동문고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모두 창비 출판사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서 이런 책들을 기획하고 어린이문학작가들 글을 모으거나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일하기도 한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이오덕 님 책 가운데 이오덕 님이 ‘출판사 편집부가 내(이오덕) 원고를 허락 안 받고 엉뚱하게 고친 곳이 200군데가 넘으니 바로잡으라’고 보낸 글과 ‘바로잡을 곳을 빨간 볼펜으로 적바림한 책’을 찾았고, 이 글을 바탕으로 보리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편집부 차장과 편집자 한 사람은 내 전화를 비웃으면서 ‘그렇게 안 하겠다’고 했다.
보리 출판사는 아직도 그 책 그 글을 출판사 편집부에서 임의로 고친 대로 낸다. 나는 많이 지쳤고, 큰 출판사하고 싸울 힘도 마음도 사라졌다. 이정우 님도 나더러 “이러다가 평생 출판사하고 싸우기만 하겠다”고 해서 이오덕 님이 남긴 글과 책을, 무너미마을에서 조그맣게 만들어서 ‘책방에는 배본을 안 하고’ 읽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보리 출판사는 이 책 말썽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책을 이정우 님 허락을 안 받고 계약서도 안 쓴 채 몰래 펴냈다(처음에는 보리 출판사에서 이 책을 내는 일을 허락하고 계약서를 썼지만, 출간약속을 오래도록 지키지 않아 계약파기를 했다. 계약파기를 한 뒤에 이정우 님이 자비출판으로 작은 책을 만들었는데, 보리 출판사에서 갑자기 무단출간을 해서 책방마다 배본을 했다).
한길사가 무단출간 말썽을 일으킨 지 한 해가 채 안 되었는데,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를 네 권으로 나누어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방학이 몇 밤 남았나》, 《꿀밤 줍기》, 《내가 어서 커야지》를 내놓았다. 보리 출판사 정낙묵 사장은 책을 내놓고 배본까지 다 끝낸 다음, 책을 들고 무너미로 왔다. 책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잘 만든 책이니 아이들한테 읽혀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훌륭한 글을 바탕으로 잘 만든 책이니 읽힐 값어치가 없다 할 수 없다. 그러면, 제대로 허락을 받고 계약서를 쓸 일이다. 계약파기를 하기 앞서 책을 잘 만들어서 내놓을 일이었다. 책에 실은 그림도 ‘이런 그림을 싣겠습니다’ 하고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이오덕 님이 아이들 가르치면서 그리도록 한 그림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그림을 이 책에 끼워넣었다. 정낙묵 사장은 이정우 님한테 ‘우리는 출고정지도 절판도 안 합니다’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길사는 출고정지와 절판을 시켰지만, 보리 출판사는 오늘(2013년)까지도 이 책들을 출고정지는커녕 절판조차 시키지 않는다.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멋대로인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떨치는 책마을이라면, 다시는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탔다. 모든 일을 다 잊고 자전거를 탔다. 충북 충주부터 서울까지 자전거를 탔다. 한 주에 한 번씩, 자전거로 서울로 갔다가, 다시 자전거로 충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꼭 한 해를 이렇게 지냈다. 나는 내가 살아갈 길을 다시 그려야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4346.11.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