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늦가을나무 (2023.11.7.)

― 순천 〈책방 심다〉



  여수 어린이하고 만나면서 말꽃(문해력 증진)을 나누는 자리를 꾸리려고 이른새벽에 길을 나섭니다. 두다리나 두바퀴(자전거)로 다니는 몸이기에, 고흥에서 여수로 건너가려면 길에서 한나절(4시간)을 너끈히 보냅니다. 돌고돌아서 여수에 가는 길보다, 고흥에서 서울 가는 길이 한결 빠릅니다.


  모든 길을 서울로 빠르게 뚫기에, 아주 빠르게 시골이 텅 빕니다. 길삯만 치르면 누구라도 쉽게 ‘시골끝 + 서울로(脫 시골 + in 서울)’을 이룹니다. 어느덧 석 달째 여수 어린이를 만나면서 ‘살림씨앗’을 한 톨씩 나누어 줍니다. 나고자란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배우기를 바라고, 서둘러서 으뜸자리에 오르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모든 곳에서 말씨앗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들려줍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천에서 내립니다. 늦가을볕을 누리면서 걷습니다. 서울에서도 시골에서도 큰고을에서도 두다리를 즐기는 이웃은 드뭅니다. 몸닦기(운동)를 하려고 따로 걷거나 달리는 사람은 많아도, 저잣마실을 하거나 바깥일을 보려고 걷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따로 걸으려 하기보다는, 일하거나 살림하는 길에 걸어야 몸이 튼튼합니다. 하루가 느긋할 적에만 책을 읽기보다는, 빠듯하거나 바쁠 적에 쪽틈을 내어 읽어야 마음이 빛납니다. 쉼날에만 아이하고 논다면 어버이가 아니에요. 이레 내내 아이하고 놀고 수다를 떨고 집살림을 함께 일굴 적에 비로소 어버이입니다.


  〈책방 심다〉에 닿습니다. 순천마실을 하는 분이 자주 들르는 듯합니다. 책손님이 붐빌 적에는 찰칵이를 손에 쥐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안 찍으려’고 하더라도 ‘찰칵이 탓에 책을 못 보’는 분이 있어요. 지난날에는 살림찍기(스냅사진)로 찰칵 한 자락을 얻고서 책집에 빛꽃(사진)을 맡겨서 ‘찍힌 책손님’한테 건네곤 했지만, 요사이는 책집손님을 찰칵 찍을 수 없습니다.


  얼굴빛(초상권)은 꼭 지킬 노릇입니다. 여기에 살림빛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담으려 하는지 살피지 않는다면, 글·그림·빛꽃은 모두 후줄근합니다. 좋아 보이는 빛이 아니라, 살림하는 사랑을 옮길 적에 비로소 빛나요.


  이야기를 그리기에 ‘빛(창조)’입니다. 이야기는 뒷전인 채 줄거리만 내세우거나 목소리만 높이거나 껍데기를 꾸미면 ‘빚’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한 이웃한테 베풀어야 아름답지 않습니다. 돈을 안 벌더라도 따스히 나누는 손길이면 아름답습니다. 책을 덜 읽더라도 아이 곁에서 살림을 사랑하는 손길로 빙그레 웃는 어른이라면 아름답습니다. 늦가을볕이 늦가을나무 가지마다 고이 내려앉습니다.


ㅍㄹㄴ


《순면과 벌꿀》(슬로보트, 어떤우주, 2023.7.20.)

《서점의 시대》(강성호, 나무연필, 2023.10.31.)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길 한복판에서 찍은 사진은,

자전거를 달리면서

문득 찰칵 담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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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0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숲노래님의 헌책방 책을 가지고 순천의 형설서점을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근데 헌책방이 사라지는 요즘 순천에 또다른 헌책방이 생긴것을 보니 무척 반갑네요^^

숲노래 2025-03-02 18:07   좋아요 0 | URL
<책방 심다>는 헌책집이 아닌 새책집입니다.

순천에는 마을책집이 여럿 싹텄고
헌책집으로는 <책마실>이라는 곳이 있어요.

헌책집이 꼭 사라지기만 하지는 않아요.
닫는 곳이 있지만 여는 곳이 있고,
모두 다르게 빛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