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길을 모르겠어도 (2024.7.1.)

― 서울 〈동네서재 아롬답다〉



  누구는 “셋 가운데 둘은 책을 안 읽는다”처럼 말하지만, 저는 “셋 가운데 하나는 책을 읽는다”로 여깁니다. “버스·전철에서 책을 쥐는 사람은 1/10000밖에 안 된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버스·전철에서 책을 쥐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밝게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굳이 “안 하는 사람”을 쳐다볼 일이 없습니다. 한 해에 한 자락조차 안 읽는 사람이 수두룩할 수 있으나, 서너 해나 열 해에 한 자락쯤 들추는 사람이 있기에 반갑습니다.


  밝고 싱그러운 한여름에 서울 자양동 안골을 걷습니다. 살림집이 옹기종기 모이던 오래마을에는 으레 마을가게가 서면서 마을책집이 열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마을책집은 그리 크지 않고 책시렁이 많지 않지만, 마을사람이 살랑살랑 가벼이 이는 바람처럼 언제라도 드나들며 책빛을 누리는 쉼터 노릇입니다. 얼추 스무 해 만에 자양동 골목을 헤아리지만 어느새 웬만한 골목은 사라지고 높다란 잿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골에서 〈동네서재 아롬답다〉를 만납니다.


  천만 사람 가운데 만 사람이 책을 곁에 두어도 아름답습니다. 십만이나 백만에 이르는 사람이 책을 곁에 두면 사랑스러울 테지만, 작은씨앗이 아주 느긋이 차분히 싹을 틔워서 숲으로 나아가듯, 바로 한 사람이라는 씨앗 한 톨부터 마을에 깃들면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안 읽어도 됩니다. 내가 읽으면 됩니다. 네가 안 걸어도 됩니다. 내가 걸으면 됩니다. 네가 시골로 안 떠나도 됩니다. 내가 시골로 떠나면 됩니다.


  스승은 스스로 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어질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는 알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시내는 갓(봉우리)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머스마는 머리를 써서 일할(머슴) 사람입니다. 아직 길을 모르겠으면 좀 헤매면 됩니다. 그래도 길이 헷갈린다면 더 떠돌면 됩니다. 곧장 길을 낼 수 있고, 열 해나 서른 해를 들여서 천천히 길을 닦을 수 있습니다.


  억지로 붙잡으면 “안 읽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안 읽”습니다. 추키지 않아도 “읽는 사람은 스스로 기쁘게 사랑으로 피어나면서 살림을 푸르게 짓는” 눈빛으로 읽어요. 걸음씨앗과 놀이씨앗을 심습니다. 책씨앗과 살림씨앗을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책읽기란, 들숲과 밭자락에 씨앗 한 톨을 심는 일입니다. 책씨앗을 가만히 심고서 즐겁게 지켜보고 기다리면서 이 삶을 가꾸는 길을 함께 생각하면서 열면 됩니다. 놓아야 할 적에는 놓으면서 가볍게 놀기에 새롭게 기운이 솟습니다.


ㅍㄹㄴ


《남양군도》(우영철 글·우원규 엮음, 부크크, 2023.4.28.)

《‘기억’과 살다》(도이 도시쿠니/윤명숙 옮김, 선인, 2022.10.24.)

《집에서 쫓겨났어》(구구단 청소년출판팀, 니은기역, 2024.1.6.)

《멍청한 백인들》(마이클 무어/김현후 옮김, 나무와숲, 2002.4.1.첫/2003.4.21.고침2벌)

《1日1冊》(장인옥, 레드스톤, 2017.11.15.)

《쾌락독서》(문유석, 문학동네, 2018.12.12.첫/2019.9.16.6벌)

《性愛論》(마광수, 해냄, 1997.7.25.첫/1997.8.25.3벌)

《욕 시험》(박선미 글·장경혜 그림, 보리, 2009.3.31.)

《꼬마 유령들의 저녁 식사》(자크 뒤케누아/이정주 옮김, 미디어창비, 2018.6.29.)

1997.12.20. 사계절

#Jacques Duquennoy #Le Diner Fabtine (1994년)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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