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에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판을 친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었던 매카시즘을 배경으로 하는 필립로스의 '미국 3부작' 중 두번째 책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읽었다. 첫번째 책인 [미국의 목가]가 베트남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했으니 그보다 더 과거로 흘러간 셈이다. 하지만 화자인 네이선 주커먼의 입장에서 보면 내내 60대의 관점이다. 작가의 분신인 60대 작가 주커먼의 입장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인 베트남 전쟁을 먼저 다루고 그 다음 10대 시절의 매카시즘을 다룬 것이다. 필립 로스의 책을 두번째로 읽다보니 [미국의 목가]보다는 더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갔다. [미국의 목가]에서  미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 신화였던 유대인 '스위드(시모어 레보브)'를 통해 '미국적'이라는 말의 환상을 꼬집었다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통해서는 한 인간의 삶이 그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보다 [미국의 목가]가 더 어려웠던 것은 필립 로스를 처음 만난 소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미국적인 것 외에는 생각을 하지 못해 미국적인 것 자체를 잘 모르는 내겐 주제 의식 외에는 크게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아이라 린골드의 굴곡진 삶을 통해, 그리고 그 삶을 전하는 머리 린골드와 네이선 주커먼의 입을 통해 미국 너머의 보편적인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소설의 주인공인 아이라 린골드(아이언 린)의 우여곡절 인생사를 읽으면 뭔가 남의 이야기 같다 싶다가도 형인 머리 선생님의 말을 읽으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가령 소설 막바지에 주커먼에게 아이라의 마지막을 전하면서 하는 말 "내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책과 대학과 학교였고, 너의 길은 오데이와 당이었다. 난 너의 길에 찬성하지 않았어. 반대했다. 하지만 둘 다 합법적이었고, 둘 다 효과가 있었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인간답게 사는 길은 여러 길이 있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며, 그 선택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선택지가 합법적이라고 늘 성공적일 수 없다는 것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중 아이라의 선택지는 비록 합법적이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미국이라는 시스템을 건드렸기에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 비참함을 한 작가의 상상이라고만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지 않은가? 당시 미국에서는 그것이 매카시즘이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매카시즘일 수도 있고, 그 무엇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문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시스템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약자들을 이용하는 시스템은 매 한가지 아닐까? 1950년 대의 미국이 공산주의자를 이용했듯, 1920년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이용했듯, 2020년 대 대한민국이 각종 프레임을 서로에게 씌우듯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힘은 무엇일까? 내가 미래 세대를 크게 걱정하는 편은 아닌데, 요즘 자극적 미디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학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선다. 사회 시스템은 개인의 삶을 봐주지 않는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선택을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제2의 아이린 린골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앞설 때마다 머리 린골드의 말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대담함에는 목적이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값싸고 안이하고 저속해질 뿐이야. (54쪽)

분노는 널 유리하게 해주는 거란다. 그게 분노의 생존 기능이다. 그 때문에 너에게도 분노가 주어진 거란다. 그런데 분노가 널 불리하게 만든다면, 그 분노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한다.(136쪽)

사람은 저마다 매일같이 반대하고 저항해야 해. 아이라 같을 필요는 없지만, 하루하루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야 하네.(272쪽)

성년기의 새 부모는 ----(중략)--- 그들은 저마다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유산을 남기고 사라져야만 하는, 그렇게 해서 내가 완전한 고아 신세, 즉 완전한 성년으로 진이하도록 길을 터준 존재였다. 그렇게 성년이 되고 나면 나는 이 세상에 완전히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364쪽)


아무래도 이 책은 한 번 더 읽게 될 것 같다. 좋은 글들이 많고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불완전한 상태의 인물 관계도를 첨부해 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필립로스의 미국3부작을 카페에서 각잡고 읽는 중이고, 집에서는 음핳하하 데미지를 읽는다..

내 20대 초반을 사로잡은 영화 두 편은
데미지
그리고
라 빠르망.

데미지는 그 파격성에.
라 빠르망은 구성에.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배우들에게 빠졌었다.

아들의 여자를 미친 듯 갈구하는 남자
도덕적 타락에 멈칫하는 것은 찰나, 욕망을 이길 수 없는 남자. 아들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아버지.

안나, 그 욕망의 대상.

그런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녀를 욕망하고 구속하고 캐묻지만
아들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고 함께 한다.
이것만 봐도 아들이 이긴 게임 같은데,
결말이 불현듯 생각났지만 아직은 절반만 읽었으므로 여기까지만 말하련다.

오랜만에 데미지를 읽는 기분
뭔가 짜릿하긴 하다^^



마틴은 질문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둬요.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맞다. 가디언은 1위부터 100위까지 선정했다. 그런데 그 목록에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나라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고. 하지만 이런 순위를 모른 척 하기는 어려운 성격인 터라 나는 어떻게 이 목록을 정리해볼까 궁리해봤다.


 1위부터 10위까지만 정리해볼까? 아니다, 비록 지금의 나는 유행을 따르려는 뱁새가 된 사람이지만 왕년의 나는 베스트셀러는 일부러 피한 반항심이 있는 인물이었으니 1위부터 10위라는 목록은 달갑지 않다. 그럼 내가 읽은 책만 골라볼까? 아,,,, 기억력이 미천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85위부터 100위까지의 목록이다. 일단 앞에서부터 보라고 하면 일부러 뒤부터 눈길을 주던 나의 성격에 맞기도 하고 85위부터 하면, 85위인 한강 작가의 책을 1위에 올려놓을 수 있으니까? 이건 뭐 정신승리도 아니고 사춘기 궤변도 아니지만 남을 괴롭히는 자유가 아니니 그냥 내 맘대로 하련다. 


그리하여 1위는 <채식주의자>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몇 권의 한강 작가 소설을 읽었는데 <소년이 온다>는 엉엉 울면서 읽었지만 <그대 차가운 손>은 도무지 소화가 어려워 알라딘에 팔기까지 했다. 이후 용기내어 <채식주의자>를 읽고는, 난해하지만 어쩐지 공감이 가서 애껴뒀었다. 어쩌면 이 책이 한강작가를 말하는 책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다음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내게 한강 작가는 뭔가 대작가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가깝지는 않다. 그래서 설명서도 샀는데 아직은 읽지 않았다. 


2위부터 5위까지는 난 제목도 못 들어본 책이다. 나사는 못 친구 나사겠지? 미항공우주국은 아니겠지? 거의 이런 수준이다. 나사는 회전하고 선은 아름답고 왼손은 어둡구나....래그타임이라는 말 자체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19세기 후반 유행한 미국의 음악으로 재즈의 전신이라고 한다. 





























6위는 버지니아 울프의 <제이콥의 방>
















내가 읽은 버전은 왼쪽의 노란 표지 양장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육아 우울증에서 벗어나 버지니아 울프를 인생 작가로 결정한 후 처음 선택한 책이 [제이콥의 방]이었는데 선택의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뚜렷이 기억 나는 건, 내가 이 작가의 소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대로], [파도] 등을 읽었고, 버지니아 울프를 여전히 사랑한다. 


7위, 10위, 12위, 15, 16위는 제목은 커녕 작가 이름도 들어보질 못했다. 역시 영국은 나랑 멀다. [사랑의 메신저]는 국내 번역본이 없으나 영화는 들여왔나 보다. 내가 중학교 때 사랑의 메신저였는데,,, 연애편지 대필.....

 





























8위, 9위, 11위, 14위는 공교롭게도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올라왔다. 가디언 선정 기준 1위부터 10위까지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던데, 이쯤 되면 책을 읽기 보단 사는 걸로 100위 목록을 체크하면 훨씬 비율이 높을 것 같다. 실제로 계산하니 읽은 작품은 21, 소장한 작품은 45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책장을 바라보며, 읽은 책도 이제는 읽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되새겨본다. 아마 민음사 패밀리세일 때 사둔 책들이었으니 그것만 해도 벌써 10년이 넘지 않았을까???


 




























13위는 토머스 하디의 [귀향]인데, 우리가 아는 [테스], [이름없는 주드]가 아니라 [귀향]이 유일하게 순위에 올랐다. 제목만 보고 집에 있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책인 줄 알았는데 책 정보 넣으려다 보니 표지가 달라 확인하니 토머스 하디.... 이거? 아무래도 이 작품은 당분간 소장도 독서도 어려울 것 같다. 

















소설 100권을 그것도 영어 소설 100권을 특정 기관이 선정한 건데도 이렇게 듣도보도 못한 책이 많으니 세상에 얼마나 책이 많다는 뜻인가...그러니 내 책이 안 팔리고 안 읽혀도 너무 서운해 말자. 나는 우선 독자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6-06-0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가디언 선정 85-100위라는거죠?
나사의 회전, 어둠의 왼손 다 꽤 유명한데... 차라리 1위-16위면 아는 소설이 많았을지도.

중국 소설 드라마를 많이 아시니까 영국 소설 좀 몰라도 어때요.

근데 귀향 표지 왜 저렇....

그렇게혜윰 2026-06-07 22:53   좋아요 0 | URL
네 85위부터 ㅎㅎㅎ 재미삼아! 귀향은 영어학습용으로만 번역된 모양이에요. 이 기회에 누가 번역 좀 제대로 하면 좋겠네요. 우리에겐 덜 알려진 하디 작품이니!
 

프로젝트 헤일메리
그러니까 앤디위어
나만 재미없나요?
마션도 영화는 재밌던데 소설은 포기
이건 그래도 읽긴 하는데 아주 재밌다고는....
그냥 와 이 작가 완전 똑똑하다 그러나 문체 때문에 나는 그 똑똑함도 한 발짝 늦게 느껴지고...
열심히 읽었는데 아직 450쪽....앞으로 250쪽이 더 남았어요 ㅠㅠ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건수하 2026-05-19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ㅎㅎ 근데 좀 많이 길더라고요. 재미는 마션이 더 있었던 것 같아요. 짧기도 하고?

그렇게혜윰 2026-05-19 21:14   좋아요 0 | URL
읽은 사람은 다 재밌다고 ㅋㅋㅋ 이걸 더 좋게 평가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영화를 봐야겠다는 의지로 읽고 있어요!

건수하 2026-05-20 13:19   좋아요 0 | URL
사실 전 이게 더 재밌었는데.. 너무 길어서요. 다른 사람한테 권할 땐 마션을 권할 것 같아요 ㅋㅋ
 
기억으로 가는 길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자미 드 레모! 라는 인사말로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이 책은 지난 1월 프랑스문학 출판사 레모에서 모집한 북클럽에서 내가 고른 첫번째 책이다. 그러니까 나는 1월부터 지금까지 다른 책들을 고르는 것도 미루고 이 책도 읽다 덮다 반복하다 4개월을 끌어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책의 잘못이 아니고, 순전히 나의 문제이다. 올해는 유난히 책을 읽는 속도도 양도 예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쁜 탓인지 게으른 탓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올해는 그럴 모양이다.....하지만, 잊을만 하면 보내주는 레모 출판사의 대표이자 이 책의 번역가인 윤석헌 대표의 메일이 쌓여갈수록 이 책은 내 마음에서 점점 떠올라 드디어 이 달 초에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사실 내용도 두께도 읽기에 어려운 책은 아니라 집중만 하면 앉은 자리에서도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몇 번을 되돌려 다시 읽기 시작하여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그런 덕분인지 이 책이 주는 여운만큼은 길게 남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게으르게 읽는 것도 독서의 괜찮은 한 방법이 아닐까? 지금 읽는 [프로젝트 헤일메리] 역시 앞부분을 몇 번을 갔다오는지....


파트릭 모디아노는 널리 알려지다시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고, 나 역시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할 무렵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샀던 기억이 있다. 읽었을 지도 모르지만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그냥 산 것까지만 인정하자. 이 책 [기억으로 가는 길]은 노년이 된 작가 보스망스가 슈브뢰즈라는 지명을 듣고 떠오른 50년 전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 기억 속에서 그는 카미유, 마르틴 헤이워드의 안내로 한 무리의 남자들을 만나고 그 무리들을 통해 그보다 15년 전인 유년의 기억까지 끌어올리게 되는 오로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목 참 솔직하다. 


이 소설은 작은 디테일들이(작다고 하기엔 사건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범상치 않지만) 불러오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년 시절에 보았던 어떤 장면,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아 잊고 지냈던 어떤 기억에 대한.  만약 보스망스가 유년으로부터 15년이 지난 때에 앞서 말한 무리들(책에서는 '얼간이들'이라고 표현한다.)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년의 기억은 그저 내면 깊숙이 자리할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또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그 무리들 중 한 사람을 스치지 않았다면, 또 그로부터 15년 후 오퇴유를 가 보지 않았다면, 또 지금 대화 중에 슈브뢰즈를 거론하지 않았다면 기억은 드러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지만 반복되는 되새김질에 우리의 기억은 망각이라는 거대한 담요를 걷어내고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다 결국은 한 순간 모든 것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좀 무섭기도 하다. 


근래 들어 자주 생각하기를, 나는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많아서 뇌가 알아서 효율성을 추구하느라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기억 자체를 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것에는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을 하여 주변 사람들이 놀라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전혀 기억을 못해서 나만 단둘이 만나는 망각의 신이 따로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무려 65년 전의 기억이라니, 내 기준에서는 가능한 이야기같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도 불현듯 끌어내는 매개가 있다면 모조리 끌려나올 수 있다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봐도 무섭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뭐였더라?


학교 다닐 때 교과 내용을 엄청 열심히 듣는 아이는 아니었지만(주로 자느라) 신독이나 평상심이나 전진교 같이 꽂히는 개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다. 듣자마자 내적 친밀감을 느꼈는데, 그 이후론 망각이라는 말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이라는 곡을 무한 반복 청취한 적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간 망각하고 있었던 그 망각이란 녀석이 생각났다. 망각의 깊은 늪에서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 그 기억에 디테일(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이 더해지면서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 과정이 비록 유쾌하지 않아도 시작된 후에는 다시 망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지막엔 싫든 좋든 복원된 기억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과정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다면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도 같다.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기억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가 인생의 한 고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아, 나에게 만약 그런 기억이 있다면 아무 것에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고 복원되지 말기를, 기억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싹 지워버리고 싶다. '나를 잊지 말아요.'가 아니라 '나를 기억하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예전부터 기억되기 보단 기억되지 않기를 원했기에 보스망스가 보물을 찾았건 못 찾았건 상관없이 난 그가 전혀 부럽지 않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천착해온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뭔가 있어보이는 제목의 소설도 좋지만, 대놓고 [기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이 소설을 파트릭모디아노의 첫 소설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