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밝힐 까닭이 없다 할 테지만,
내 알라딘서재 이웃은
거의 '아줌마'이다.
아줌마 아닌 아저씨가 쓴 글은
참 따분하며 읽을 맛이 안 난다고 느낀다.
요 한동안 알라딘서재에서 이루어진 논쟁에
한 마디를 붙인다.
아줌마(또는 아줌마 나이인 여자)를 괴롭히거나
엉뚱한 샛길로 빠지는 모든 아저씨들 읽으라는 뜻에서,
또 아줌마들은 아줌마들대로 아줌마 삶을 사랑하는
예쁜 글을 아껴 주십사 하는 뜻으로,
이 글을 바친다.
......
아줌마 글, 아저씨 글
금을 긋자는 얘기가 아니라, 나는 아줌마가 쓴 글이 아저씨가 쓴 글보다 한결 재미나고 반가우며 좋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모든 아줌마가 다 그러하지는 않을 테지만, 이 나라이든 옆이나 다른 나라이든, 지구별 아줌마들은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일을 거의 도맡거나 아주 도맡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나라이든 이웃한 나라이든, 지구별 아저씨들은 집안에서 나눌 숱한 일을 거의 안 하거나 아예 안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글은 삶이다. 말도 삶이고 책도 삶이다. 저마다 제 삶에 걸맞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며 책을 읽는다. 살아가는 결이 글을 쓰는 결이다. 살림을 꾸리는 무늬가 글을 쓰는 무늬이다. 집안일을 하거나 바깥일을 하는 빛깔이 고스란히 글을 쓰는 빛깔이다.
집에서 살아가며 맡아야 할 일을 맡는 아줌마가 쓰는 글이란 ‘살림글’이기 일쑤이다.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으레 맡는 아저씨가 쓰는 글이란 ‘지식글’이기 일쑤이다.
지식글은 언뜻 보기에 대단하거나 놀라울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식글은 목숨이 짧다. 지식글은 한때 조회수가 높을는지 모르나, 이런 조회수는 반짝 하고 그친다. 살림글은 언뜻 보기에 하찮거나 흔해빠졌다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살림글은 목숨이 한결같으며 오래오래 고이 이어진다. 살림글은 조회수가 높든 낮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나라 어느 사람이 읽더라도 가슴을 적시고 마음을 움직인다. 조회수나 이런저런 껍데기나 겉치레하고 동떨어진다.
아줌마들이 떠든다는 수다는 시끄럽다고들 깎아내리지만, 아줌마들 수다는 귀를 기울일 만하다. 다만, 모든 아줌마 모든 수다가 귀를 기울일 만하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내몰면서 학원이나 시험공부 따위 이야기로 날을 지새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따분하고 슬프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들 돌보는 삶을 이야기한다면, 이 이야기는 언제 누구한테서 들어도 솔깃하며 재미나다. 서로서로 웃고 떠들 만하다. 아저씨들 수다라 하더라도 이렇게 ‘집일’과 ‘아이돌보기’를 놓고 수다를 떤다면 되게 재미나다.
이와 달리, 오늘날 여느 아저씨들이 떠든다는 수다는 조용하거나 차분하다 하더라도 졸립다. 군대에서 공 차는 이야기이든, 정치 이야기이든, 회사나 공무원 이야기이든, 하나같이 골이 아프고 따분하다고 느낀다. 지식이나 정보로 흘러넘치는 이야기라 하면, 언제나 더 새로운 지식이나 더 돋보인다 싶은 정보로 빠지기 마련이다. 어제 한 이야기를 오늘 못 하고, 오늘 한 이야기는 글피에 할 수 없는 틀이 바로 아저씨들 이야기이자 글이라고 느낀다.
아줌마들 이야기는 어제와 오늘과 글피가 ‘같은 이야기감’이라 하더라도 늘 새롭다고 느낀다. 아줌마들 글은 어제나 오늘이나 글피나 ‘같은 이야기거리’라 하더라도 언제나 새삼스러우면서 싱그럽구나 싶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아이들 밥상을 차리며, 아이들 씻기고 입히며 재우는 아줌마들은 아이들과 하루 스물네 시간을 꼬박 붙어서 살아낸다. 집안에서 하루 내내 이것저것 돌보고 추스르며 살아낸다. 곧, 아줌마들 이야기나 글이란, 아줌마들 스스로 느끼든 못 느끼든,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꿈과 빛을 새록새록 차근차근 담기 마련이다.
아저씨는 아기한테 젖을 물리지 못할 뿐더러, 아기나 아이한테 밥을 차려 주는 일조차 드물 뿐 아니라, 빨래를 해서 옷을 입히거나 날마다 틈틈이 씻기고 놀아 주고 하는 일이 드물다.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글’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꿈꿀 때에 비로소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나눌 때에 비로소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아줌마들은 아줌마들 삶을 빛낼 책을 홀가분하게 즐기며 읽으면 된다. 괜히 ‘아저씨들이나 기웃거릴 지식조각 책’을 어깨너머로 넘겨볼 까닭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 동화책과 그림책과 만화책을 함께 읽으면 즐겁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동화책과 그림책과 만화책을 읽으라 하고, 아줌마들은 아줌마들대로 잡지책을 읽든 뜨개책을 읽든 문학책을 읽으면 즐겁다.
아저씨들은 동화책도 그림책도 읽지 않으니 따분하다. 아저씨들이 어쩌다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더라도 ‘지식 어린 눈길과 손길’로 마주하니까 더더욱 따분하다. 게다가 아저씨들이 좋아한다는 만화책은 얼마나 지저분하고 자질구레한가.
오직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듯, 오직 사랑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오로지 사랑이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 있듯, 오직 사랑이 책을 감싸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아저씨들은 참 모른다. 오늘날은 아줌마들도 제법 모른다 싶은데, 지식이나 정보를 글에 담거나 이야기에 실으려 하면 참말 지겹고 어수선할 뿐이다.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정보를 주워섬긴대서 아이들이 따르겠나. 아이들한테 고운 사랑과 맑은 꿈을 들려줄 때에 아이들이 좋아한다. 아줌마들은 아줌마들 가슴속 사랑과 꿈을 기쁘게 꽃피우면 된다. 아저씨들은 가슴속에 사랑과 꿈이 없는 만큼, 스스로 사랑과 꿈을 북돋우거나 가꾸거나 일구도록 땀을 흘려야 한다. 아저씨가 아줌마보다 ‘힘살이 단단히 붙는 까닭’은 마음으로는 깨우치지 못하니까 몸으로 깨우치라는 뜻이다. 아저씨들은 돈벌이 바깥일에 덜 힘을 쓰고, 사랑살이 집일에 더 힘을 쓰면서 글을 쓰고 얘기를 나누며 책을 읽어야 아름답다. (4345.6.2.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