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 공유합니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파멜라 투르슈웰'의 《프로이트 콤플렉스》


두권입니다. 해당하는 두 권을 다 읽는 것이 10월의 목표입니다.


11,12월 도서는 보부아르의 제2의성 재독을 하려하였으나, 아마도 다른책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확정되면 안내하겠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우리.. 푸코 읽을 것 같다? 움화화화핫.


참여하실 분은 말머리로 책 제목 붙이시고 읽으시면서 글 쓰시면 됩니다.

물론, 참여하신다고 상품이나 상금이나 어떤... 그 뭣이냐.....뭐 .. 이익은 전혀 없고요.

이 책을 읽었다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은 찾아올 수 있겠네요.

10월에는 사람,장소,환대와 프로이트 콤플렉스가 서재 내에 자주 노출될 예정입니다.

참고하세요.



자, 10월도 열심히 읽어봅시다.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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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9-29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샤!

다락방 2020-09-29 15:14   좋아요 0 | URL
홧팅!!

막시무스 2020-09-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주의 책읽기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열독을 응원합니다!ㅎ

다락방 2020-09-29 15:14   좋아요 1 | URL
응원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 연휴 잘 보내세요! :)

수연 2020-09-29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에도 아자아자!

다락방 2020-09-29 15:14   좋아요 0 | URL
열심히 달려봅시다. 우리의 목표(쉿!)를 향하여!!
 
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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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초면 내게는 또 한명의 조카가 생긴다. 여태 이모의 삶을 살다 이제 고모의 삶도 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조카가 태어날 거란 소식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이모도 될 수 있고 고모도 될 수 있나, 감동했다. 새 조카를 맞이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 작은 아가가 태어나서 목을 가누지 못할 때부터 나는 지켜보겠지. 다른 조카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성장과정 하나하나 눈이 부시게 바라볼 것이다. 목을 가누지 못하던 아이를 품에 재우면 폭 안겨들고 내게 기대겠지. 아, 그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리고 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랄 것이고, 뒤집을 것이고, 길 것이고, 걸을 것이고, 언젠가는 고모, 하고 부르게 될 것이다. 매순간 나는 얼마나 사랑이 커져갈까. 아가의 손과 발을 보는 것은 기쁨일 것이고, 매일 커지는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가 축복에 가깝다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가도 불쑥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에 대해 미안해진다. 나는 이만큼의 인생을 살아왔고,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만났다. 그러나 이 아가는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엄마, 우리 조카 어떡해,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이야, 어떡해.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슬프고 아프다. 갓 태어난 아가는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을 것이고,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까. 아가가 자라면서 바깥에 자유롭게 나가게 되었을 때, 그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어있을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에게, 어른들이 잘못했어, 어른들이 미안해,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태어나자 마자 이런 세상이라서 정말 미안해, 라고 자꾸 말한다. 지금 초등학생인 조카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것도 너무 가슴이 아픈데,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일 조카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어쩌지를 못하겠다. 미안해 아가야, 잘못했어 조카야. 어른들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자연을 너무 많이 파괴했어. 어른들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깊숙이 들어갔어. 그러면 안되는거였는데 너무 많은것들을 건드려놔서, 그래서 이런 세상이 되었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의 혐오에 익숙해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되는 것을 방치했다. 내가 직접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파괴하자고 도끼들고 나무를 벌목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행위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감으로써, 동조했다. 나는 혐오자였다.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일컬은 것처럼, 에코사이드의 조력자였다. 조카가 태어날 세상을 코로나 세상으로 만든 건 나였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먹고 싶은 걸 사먹고 입고 싶은 옷을 사 입는 그 모든 행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 모든 행위는, 환경을 파괴하고 있었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혐오로 도배된 문명속에 나는 구성원이었다. 조카에게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할 때는 나 자신을 포함해야 했다. 저기 저 먼데에서 다른 어른들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카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를 거쳐가며 친구와 선생님들을 만날 것이었다. 직장에 가면 동료들을 만날 것이고. 그 시간들 속에 언제나 텔레비전도 있을 것이고, 설사 조카가 직접적으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환경을 만든다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조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대중매체를 소비하는 대중일테니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혐오를 만날 것이다. 외모를 비하하는 광경을 수도없이 맞닥뜨릴 것이고, 강요된 미모에 억압받을 것이다. 여성차별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될것이고 세상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자신이 먹는 것이 동물을 죽이는것이라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설사 조카가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성차별은 안되는거야, 인종차별은 안되는거야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것이다. 봐라, 네가 보고있는 저 뉴스들은 성차별 혹은 인종차별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세상은 그런 혐오들이 존재한단다, 우리는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해, 인간은 평등하단다, 피부색이 무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차별해서는 안되는거야, 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말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면 외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노예제와 수많은 인종학살이 벌어진 전쟁들에 대해서, 그 안에서 무수히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그 기록을, 데릭 젠슨은 보기 싫으면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숫자들을 봐가면서, 태초부터 이 문명은 혐오로 세워졌어, 하는 것을 내가 조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아니,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다 무어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 숫자를 찾아볼 생각도 않았는데. 인종차별도 저기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는걸. 눈 앞의 혐오만 알려주기도 벅찬데 보이지 않는 혐오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 혐오들을, 그러니까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디서 왔는지, 음식들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그 구체적인 모습들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지하고 알려주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또한,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도, 그건 네가 자라면서 알아서 보고, 보는만큼 알아서 공부하고 행동하렴,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자본주의와 민주화(정말?)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이것들을 그간 내가 모르고 살았다고 해서 이제부터 알면서 무언가 행동하게 될것인가. 나는 그러기에 돈 버는 것을, 돈을,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마구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지 않나.


내가 하는 일, 먹고 사는 일에 대해 나도 종종 생각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해 통장에 노동에 대한 대가가 들어오는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선태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내가 먹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니까.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돈을 버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꿈꾸는 소박한 미래가 있고, 그 미래에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일인데, 거주할 집이 필요하고 먹을 음식이 필요하고 읽을 책이 필요한데, 그것에는 돈이 든다. 돈을 쓰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돈 버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인데, 그런 한편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언젠가 친구에게도 말한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나를 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한거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사회에 혹은 지구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이 일이 과연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의문을 갖는다. 내게는 돈이 필요하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세계를 한바퀴 돌겠다, 같은 것을 나는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 조직에 몸담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어떤가? 그 일들은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면 어디에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는 것의 그 필요는 누구에게 그렇단 말인가? 데릭 젠슨은 이 책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적으로 쓸모있는 일인가(p.512)' 의문을 갖는데, 그렇다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산다는 것인가. 이럴 때 구체성에 눈을 돌려야 하나. 건너고 건너면 나 역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일로부터 돈을 벌고 있는게 아닌가.


데릭 젠슨은 백인 남자이며 교육받은 중산층이다. 그런 그는 제노사이드와 에코사이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환경과 노예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인상깊지만, 그가 포르노를 보고 그의 달라진 인식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도 놀라웠다. 포르노를 보기 전에 그는 여자들을 볼 때 어떻게 말을 걸까를 생각했다면, 포르노를 보고난 후의 그는 여자들을 보면 그 여자의 신체 일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서 빨리 자신이 대화를 원하던 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는 포르노에서 여자들이 조각조각 신체로 보여지는 것, 그러니까 한 명의 여자사람으로 인식되기 보다, 성적 대상화 되는 추상화라는 것을 인지한다.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직접적으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일들, 과거에 일어났던 인종들의 대학살, 땅을 빼앗는 것, 추방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그것의 구체성, 그 사람들의 구체성을 보기보다는 그 모든 '사람'들을, '자연'들을 추상화 시키기 때문이라고.


결론은 당연히 우리가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인이 아니라, 포르노속의 여체가 아니라, 소모할 자원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하나 생명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지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혐오를, 멸시를, 파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이 얼마나 구체적인 해결방법인가. 구체성을 자각하자는 것은, 구체적 해결방법인 것이다.



현상과 숫자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아니,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내가 가진 의문도 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지구 절반에 있는 408개 도시를 태워버릴 수 있는 잠수함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읽다가, 아니, 도대체 408개 도시를 태울만한 잠수함이 왜 필요한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에 "감히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p.506) 가 나오는 식이다. 질문과 답이 모두 들어있는 책인데, 그것이 결코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지구를 망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구하려고 하는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그저 관료주의에 충실해 자기 몫의 일을 하면서 혐오와 파괴에 한몫하고 있다면, 그것이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이라고 일깨워주는 사람도 이렇게 어딘가에 있다. 읽고 알고 보는 것이 바로 어떤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기 전과 알고난 후는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것이다.


부디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혐오로부터 멀어져있기를 바라본다.







인디언들의 경험은 인디언들이, 여성의 경험은 여성이 해석하도록 남겨두려 한다. 내게-나와 같은 백인 남자들에게-남겨진 일은 나의 인종과 성별에 속한 사람들의 혐오 경험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것을 멈추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 P10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의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대대적이고 극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위계질서의 상층에 위치한 이들을 위해 다시 노동을 제공하도록 예전 노예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위계질서의 상층에 위치하는 것은 당연히 그들 자신이라 여긴다. 이렇게 겁을 주는 행동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 또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건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P15

좌파든 우파든 자기가 자라고 살아온 사회적 조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P15

교도소 안에서 보면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 권력 불균등에서 나온 범죄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남자만 있는 교도소에 여성이 없다는 것은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을 만들게 한다. 즉 종속적인 계급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남성다움에 대비되는 여성다움, 그들의 공격성에 대비되는 수동성, 그들의 삽입을 받아들일 성교 상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P48

교도소에서 남자가 강간당하는 비율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여자가 강간당하는 비율보다 낮다는 것이다. - P49

인터넷에서 ‘강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다른 범주(성폭력 상담 전화, 지지 그룹, 학분적 분석, 역사, 뉴스 등)에 대한 정보보다 포르노 사이트가 훨신 더 많이 뜬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포르노그래피가 강간 관련 사이트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검색어가 섹스나 누드가 아니었다는 것, 질, 페니스, 좆, 씹 같은 것이 아니라 강간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신체기관이 아닌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도.- P50

진실을 말하자면 인종차별적 사이트중 그 어떤 것에서도 이런 포르노 사이트에서와 같은 뚜렷하고 거칠고 노골적인 폭력의 100분의 1도 본 적이 없다. 인종차별 사이트가 해롭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많은 문제점을 낳는다. 가장 명백한 문제이기도 한 첫 번째 문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그린 사진 등이 왜 혐오 선전물로 간주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 P51

한 집단의 특권이 다른 집단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면 특권층 집단은 그러한 특권 중 일부를 잃어버리는 데 대해 위협을 느낀다.- P75

어떤 인종이나 계급의 사람들을 그들 뜻에 반하여 예속 상태로 있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된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경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P79

담배를 재해바는 것은 혐오범죄인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어떤 물질이 사람들을 죽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에 중독되도록 하려면, 내가 앞서 노예제에 대해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멸시가 필요하다. - P99

"상업 매체의 첫 번째 과제는 공포를 파는 거야. 왜냐하면 공포가 불안감을 키우기 때문이야. 그러면 소비문화는 우리에게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수도 없이 내놓지. 그러나 일시적인 방법뿐이야. 매체는 우리 외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잔뜩 심어주었지. 뿌루퉁한 입술, 불룩 솟은 가슴, 강철같이 단단한 궁둥이, 영원한 젊은 같은 것 말이야."
"거기다 흰 피부"하고 내가 덧붙였다.
그는 계속 말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정해주는 이런 이미지들을 보고 또 보면서 내면화하다 보면 자기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내 인성의 가장 기초적인 것을 바꾸어놓지. 성적 욕구, 성 의식도 비틀어놓잖아."- P120

몇 년 전 텔레비전 비판가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말했다. "대본을 대부분 남자가 쓰기 때문에, 텔레비전은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 남자가 대부분의 역할을 하는 세상을 보여주지. 텔리비전과 영화는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비추고,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지속시키고 그것이 정상으로 보이게 하고 그것만이 할 만한 일인 듯, 그것만이 이야기하고 생각할 만한 일인 듯 보이게 해. 시청자들이 일단 어떤 유형의 이야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누군가 그것을 바꾸려 할 때 엄청난 당혹감을 느끼게 되지.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스팅을 하지 않고 그것을 바꾸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여자가 권력을 휘두르고 여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이야기가 되겠지. 그런데 그 경우에 그게 왜 그런가를 설명하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할 수가 없어."- P123

"왜 여자가 명예롭지 않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가 돌아가야 하거든. 남자가 할 때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일인데도 말이야.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대중의 감수성이 혼란을 일으킨다는 거야."
텔레비전이 우리 문화의 대표라는 의미냐고 내가 조지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건 권력 구조를 대변하는 거지. 문화가 아니고. 권력 가진 자들이 텔레비전에 너무 많이 나온다는 뜻이야. 그들은 성공할 확률이 더 높고 그들은 폭력을 당하기보다 폭력을 행사할 확률이 더 높아."
"그렇다면 권력 구조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쥔 자들의 판타지라는 말이로군." 내가 말했다.- P124

"사병이 지휘관과 섹스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는 답을 듣고 싶어 물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휘관이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맥락으로 보건대 그의 요점은 친밀성이 아니라 삽입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에게 삽입을 하면, 우월하던 자는 그때부터 우월하지 않게 된다. 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온 것을 그제야 이해했다. 우리 체제 안에서 섹슈얼리티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씹을 하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이 자신을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문화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삽입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표시다.- P154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떤 여자가 해준 이야기였다. 자기랑 같이 사는 남자가 자기한테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종종 밤에도 침실에 있다 말고 서재로 갔다. 여자는 그가 일을 하러 가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따라가보니 그가 포르노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 있는 여자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와 경쟁해서 이길 방법이 없었어. 그 여자는 말을 안 하니까." 여자는 관계를 끝냈다. 관계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P158

포르노는 나의 무의식적인 공상까지 바꾸어놓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나의 판타지는 대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즉 어떤 여성을 봤는데 관심이 간다면, 즉시 ‘저 여자에게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창조적이고 열띤 대화를 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포르노를 보았을 뿐인데도, 가끔 여자를 보면 저 여자의 음모는 무슨 색일까, 성기는 어떤 모양일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질색이다. 나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다. 곧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P179

혼동에 빠져서 객체가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슬픈 일일 뿐이다. 그래서 벌거벗고 유혹하는 여자 사진들이 내 욕망을 자극하기보다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객체를 주체로 착각하는 정도가 심해서-모든 객체를 주체로 착각할 정도로-망상이 심해진 사람들은 때때로 병원에 수용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존재를 객체로 혼동하는 것은 슬프기보다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훨씬 더 슬프고 훨신 더 가엾은 건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망상에 사로잡혀서 나무, 인간, 살아있는 지구를 보지 않고 그 대신 돈다발, 노동자, 자원으로만 보게 되면,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는 커녕 돈과 명예를 갖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느새 기업의 최고 경영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P181

15년 전쯤에 나는 네바다 주 북동부에 살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엘코 군에서는 곰이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 아마 반세기 동안은 곰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곰 한 마리가 아이다호에서 엘코 군으로 넘어왔다. 곰은 겁에 질려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목장 주인이 곰을 쏘아버렸다. 다른 곰이 또 넘어온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곰들이 그 지역에 살지 않는 것은 곰들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P204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도구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나는 내가 서 있는 곳, 즉 문명의 중심에서 문명에 더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즉 인류에게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굶주리는 인도네시아 아이에 비해, 제3세계의 도시에서 여러 명의 아이를 기르는 가난한 아버지나 어머니에 비해, 그런 일을 하기가 훨씬 쉽다. 내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그런 특권을 더 가지려고 얘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힘있는 자리에 접근하기 위해 점점 더 심한 타협이라는 미끄러운 비탈로 내려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특권-나의 성별, 피부색, 태어난 나라, 교육 정도에 기초한 특권-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으로 인해, 그런 특권의 기초를 흔들거나 뿌리뽑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는 뜻이다.- P211

지구를 노예화하고,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것은 흑인 남자들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프리카 문화가 아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백인들의 서양 유럽 문명이다.- P237

나는 백인이다. 교육을 받았다. 중상층계급에서 자랐다. 기독교인으로 컸다. 나는 흑인이 아니다. 원주민이 아니다. 히스패닉이 아니다. 나는 남자다.- P238

나는 내가 속하는 집단을 이해하고 싶고 우리의 공통된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
흑인이 백인을 린치한 것이 아니라 백인이 흑인을 린치했다. 흑인이 백인을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백인이 흑인과 다른 백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인디언들이 백인을 절멸시키려 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였다. 이 모든 것을 낳은 사회적·문화적 심리학을 이해하고 싶다.- P238

포르노그래피처럼 아주 명백하게 대상화하는 것을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많은 그보다 더 미묘하고 그보다 더 끊임없이 되물이되는 메시지, 우리가 보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더 많이 영향을 받을까? 의문시되지 않은 가정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까? 우리가 어떤 말을 선택할지 결정하게 하는 이야기, 우리의 학교 교육을 지금처럼 만든 이야기, 영화, 책, 신문,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
만약 이 이야기들이 한 가지 폭력만 폭력이라고 말하고 다른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고(즉 ‘변태‘라거나 ‘사업‘이라거나 ‘과학‘이라거나 ‘국익 보호‘라고)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믿게 될 것이다. - P262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노동의 열매인 안락과 고상함을 즐기게 되어 있다고 이 이야기들이 말한다면, 우리는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사회 계약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자기 삶을 바치게 될 것이다.- P263

우리 문화는 우리 모두를 어떤 생각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고, 우리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우선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가 묶인 줄의 끝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개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날들을 살아왔다.- P305

"여러분 중에는 내가 성 노동자로 남기를 택했으므로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당신들의 사회, 나의 사회, 내 조국 캄보디아가 나쁘다는 겁니다. 나 같은 소녀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나와 내 여동생들 같은 어린 여자를 강간한 남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남자들이 나 같은 여자들의 서비스를 찾고 요구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다고 봐요. 힘있는 자들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해 우리가 노예가 되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해요. 우리 가족이 그토록 가난한 것, 더욱 가난해지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해요. (…) 우리를 착취하고 우리의 품위와 돈을 빼앗아가고 때로는 우리 목숨까지 앗아가는 사람드은 자기 가족과 잘 살고 있어요. 왜죠?" (디나 찬)- P317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제한된 선택지 가운데서 합리적으로 하나를 고른다. 그러나 비인도적인 체재가 제시한 비인간적인 선택지들을 거부하고 인간처럼 살기 시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호레이쇼 앨저 이야기의 기본 전제는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부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는 살펴보지 않으며 물론 그 답이 주어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부를 축적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가난에서 나온 것일 뿐 아니라 지구의 황폐화에서 나온 것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19세기 노예주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부유함이 타인들의 불행에 기초하고 있음을 때때로 인정하는 정직함과 품위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P322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자-이 상상 속 풍경이 황당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웃지는 말기를. 경찰이 파업을 깨기 위해서 총을 쓰는 것이 아ㅣ라 회사 측이 협상에 나오도록 하는 데 힘을 쓰면 우리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기업 최고경영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시애틀 경찰이 고무 총탄과 최루탄을 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세계무역기구(WTO)와 다양한 이른바 자유무역 협약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미국의 통치권을 다국적 기업으로 넘기는 배신을 저지른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스왓(SWAT)팀이 워렌 앤더슨(전 유니언 카다이드 사 회장-옮긴이)의 집 현관문을 깨부수고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또는 골프 코스의 후반을 돌고 있는 그를 스왓팀이 기습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P353

가리폴리 전투, 사앗아 50만 명. 카르파티아 160만 명. 베르 160만 명. 솜 강 120만 명. 아루타. 샹파뉴. 루스. 여기까지 읽고, 그 이름과 숫자와,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려버릴 수 있으니까. 으깨진 몸뚱이에 다리가 겨우 매달려 있는 남자는 아마도 내가 평생 잊지 못할 괴로운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이야기는 여전히 추상적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P380

"역사를 통틀어 전쟁은 정복과 약탈을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간단명료한 본질입니다. 언제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지배계급이었고 그 전쟁에 나가 싸운 것은 피지배계급이었습니다. 판결을 받기 전에 뎁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래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고 내가 지구상의 가장 미천한 존재보다 조금도 더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말한 것처럼 하층계급이 있는 한 저는 하층계급에 속합니다. 범죄가 있는 한 저도 범죄자 중 하나고, 감옥에 한 명의 영혼이라도 있다면 저도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진 뎁스)- P388

두보이스(Dubois, 미국의 흑인운동 지도자 겸 저술가-옮긴이)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계를 착취하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호상(豪商)이나 독점 귀족이 아니고 고용주 계급도 아니다. 그들은 국가, 즉 단합된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다."- P397

"대안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자본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더욱 더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의 경제 제도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체제예요. 세계 사람들 절대 다수는 이 제도에서 이익을 전혀, 또는 거의 얻지 못해요."
"이익을 얻기는 고사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많지요." 내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만 1990년대의 엄청난 경제 팽창 동안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쌓았지만, 대다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러면 이 모든 것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누구일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 이 체제를 지배하는 사람들, 이 체제의 주식을 소유한 사람들, 그들이 이익을 얻어요. 미국의 신화 중 하나-우리 코드의 일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는 자본주의에 이로운 것이 나라에도 좋다는 겁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말에서 자본주의 대신 문명을 넣어 생각하고 나라 대신 민중을 넣어보았다.(리처- P463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회적 목표를 정할 때(그 목표에는 수익 극대화가 포함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생산 극대화가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목표에 대해 너무 깊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단지 가능한 한 매끄럽게 사회의 목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할 때, 그 문화는 끝없이 잔학 행위를 매끄럽게 저지를 것이다. 화물 위치를 옮겨서 앞 차축에 부담을 줄이는 것으로 기여를 하든, 땅속에서 석유를 더 효율적으로 짜내는 데 기여하든, 도서 유통회사나 출판 재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책을 쓰는 것으로 기여를 하든 마찬가지다. 관료주의 사회가 매끄럽게 움직이려면 우리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P493

그(램지 클라크)가 트리이던트 핵 잠수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잠수함 하나면 지구 절반에 있는 408개 도시를 없앨 수 있다.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계예요. 어떤 머리가 그런 기계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 잠수함의 존재에 대해 어떤 정당화 논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감히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P506

"미국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에요."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끔찍한 오해고 민주주의에 대한 중상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금권정치 체제예요. 부자들의 정부지요. 부자가 멋대로 하는 나라예요. 부의 집중과 빈부 양극화에서 미국을 따라올 곳이 없어요. 우리가 칭찬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봐요.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록펠러와 모건 집안 사람들,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 도널드 트럼프 같은 부자들이에요. 매년 1,000만명의 유아가 굶어 죽는 대에 도덕적인 인간이 몇십억 달러를 모으고 싶을까요? 내 시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이 그것일까요?"- P506

1990년 전 세계가 2.5시간 동안 군사비에 쓴 돈이면, 천연두가 1970년대에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B1 폭격기 한대 값이면, 즉 2억8,500만 달러면, 대충 계산해도 전세계 5억 7,500만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 등 기본 예방 주사를 맞힐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매년 2,50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비교는 강력하고 생상한 효과를 주기는 하지만, 그 돈이 폭격이에 쓰이지 않으면 좋은 데 쓰일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어요. 그러나 만약 B1이나 B2가 취소되더라도 우리 정부는 그 돈을 예방 주사에 쓰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비전의 일부가 아니거든요. 그 아이들에게 예방 주사를 맞히는 것은 미국의 무역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램지 클라크)- P507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하는 일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적으로 쓸모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벌을 키울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적어도 그때 그 해가 끝났을 때에는 누군가가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살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우리가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안 해도 될 일을 만들어 하는 것, 뭔가 일이 필요해서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되는가?- P512

이 책은 서구 사회의 혐오에 대한 탐구로 시작해서 지구 위 삶의 끝과 함께 끝난다. 문제는, 구체보다 추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생명보다 생산을 높이 평가하는 것, 인간이든 강이든 북극곰이든 생명체보다 경제 제도(그 외 다른 제도)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문화적·개인적 역사를 전부 갖춘, 욕구와 희망과 두려움을 가진 이 흑인 남자, 이 중국인 여자, 이 아일랜드 남자로 보는 대신 검둥이나 중국 놈이나 아일랜드 놈은 어떠하다고 보는 선입견이다. 문제는, 여자들 자체보다 여자들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 여자의 존재 젗네, 여자의 몸과 마음과 슬픔과 기쁨보다 여자의 몸만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가보다 무엇을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능력에 대해 조각난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관계 속에서 기쁨을 얻을 사람들로 보는 대신, 사용해야 할 도구로 보는 것이다.
- P531

추상화의 우세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구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체와 사랑에 빠지길 부추기는 반체제를 나는 지지한다. 이 특정한 구체적인 나무, 이 구체적인 사람, 잠자리 날개에서 반짝이는 이 특저한 햇빛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한 한에서 우리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를 주체로 인식하기 위해서.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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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요즘 가장 나를 흥분시키는 건 뭐니뭐니해도 책이다. 얼마전에도 기다리던 책의 복간 소식에 흥분하면서 아아, 나는 역시 책으로 흥분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는데, 그런 일이 오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퇴근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친애하는 ㅁ 님의 글을 읽게 된다. ㅁ님의 페이퍼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이름 옆에 나란히 '메리 맥카시'란 이름이 등장해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아무것도 작품이 떠오르질 않는걸 보면, 그저 들어본 이름일뿐 내가 읽었던 책들의 작가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한나 아렌트와 나란히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흥분하기 시작했고, 뭐든 읽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알라딘에 검색했는데, 뭔가 이렇다할 번역서가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거다. 그렇다면 내가 이 이름이 왜이다지도 익숙한가, 했더니, 그건 아마도 영화배우 '멜리사 맥카시' 때문인가 보았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와 나란히 언급될 정도라면 분명 작품이 있을 것이고, 어딘가에서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해서 나는 네이버 창에 메리 맥카시를 검색했고, 아아,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다.


20세기의 매력적이고 논쟁적인 여섯 여성 지식인을 다룬 책이다. 독특한 신학과 정치학을 개진했던 철학자 시몬 베유, 20세기 최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 소설가이자 당대 지성계에서 독보적 여성이었던 메리 매카시,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수전 손택, 사회적 주변인들을 작품에 담았던 천재적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 2005년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조앤 디디온. 이들은 어떤 단일한 전통도 따르지 않으며, 단순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다.


하지만 저자 데보라 넬슨에 따르면 그들은 문체와 철학적 관점에서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로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난히 ‘강인한’ 마음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터프함’은 그간 여성의 미덕처럼 여겨져 온 감정 표현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작가의 윤리적 입장과 미학적 접근방식을 결정하는 ‘비감상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알라딘 책소개 중


메리 매카시의 저작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와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시몬 베유까지. 여성 지식인을 다룬 책이라는 게 아닌가. 아아, 너무 흥분돼. 내가 요즘 최고 관심 가진 한나 아렌트와 우엇 도대체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게된 메리 매카시가 한 권에 들어있다니. 대체 이거 뭐야, 이거 뭔데 내가 몰라? 왜 이제 알았지? 이런 책있네? 하면서 나는 흥분한거다. 이 책의 저자는 '데보라 넬슨'이라는데 아아, 이름부터 너무나 훌륭함의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급격하게 흥분 모드가 되었다. 아아, 흥분돼. 누구아, 뭐야, 이거 뭔데, 누가 어디에서 이런 책 쓰고 있었던 거야, 꺅.


나는 급한 마음에 얼른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사자 싶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마저 읽어야 하고 사실 지금 당장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사고 싶었던 거다. 교보문고에 검색해보니 마침 교보문고 우리 동네 지점에 이 책의 재고가 있었다. 좋아, 퇴근하고 고고씽, 사는거야, 사러 가자!


그러나,



치킨을 먹고 싶었던 내 마음... 뜨끈뜨끈한 치킨... 집에 가서 씻고 금요일 밤, 와인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치킨 먹으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던가. 엄마, 저녁에 치킨 시켜먹을까, 물었더니 엄마는 네 마음대로 하렴, 했어. 그러니 집에 일찍 가서 치킨을 먹어야 해. 그렇지만 나는 책도 사고 싶은걸. 그럼 둘다 하는건 어때? 라고 평소의 합리적인 내가 제안한다. 그러나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집에 가면 치킨을 먹는 시간이 뒤로 늦춰진다. 나는.. 취침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늦게 먹으면 곤란해. 그렇다면 치킨을 포기하자, 그리고 책을 사자. 저녁을 포기하고 책을 사고 그리고 일찍 잠에 들면, 책에 대한 욕망 해소, 간헐적 단식 성공, 다이어트로 가는 지름길! 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치킨을 택했다. 그것이 나의 최종 선택. 나는 이 책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이용하여 서점에 가 사가지고 오기로 한다. 흥분돼...



그렇게 집에 와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우앙 맛있다, 하고는 엄마와 뉴스를 보고 수다를 떨다가 잠깐 북플을 들어갔는데, 아닛, 친애하는 ㄷ 님의 글이 올라와 있는거다. 심지어, 무려, 주제가 '내 인생의 책'이야. 아니, 우리 이런거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요? 나는 ㄷ 님의 인생책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ㄷ 님은 뭐 하나 딱히 골라내지 못한 채로 페이퍼를 끝맺었지만, 오오, 이 책이 인생책일줄 알았는데 갈등하시네, 오오, 그 책이 리스트에 없네? 하면서, 사람은 역시 타인을 잘 알 수 없는 것이구먼, 하게 되었고, 아아, 그렇다면 나의 인생책은? 하고 내게 묻게 되었다. 그래, 



나의 인생책은 무엇인가?



일전에 무인도에 책 세 권을 가져갈 수 있다면, 이라는 물음에도 답하기 힘들었는데, 나의 인생책 역시 답하기 힘들구나. 좋은 책이 뭐가 있냐 물으면 대답할 책들이 많고-나는 레미제라블을 말할 것이다- 추천해줘, 라고 누가 내게 요청한다면 또 이것저것 추천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의 인생책은? 물으면, 아아, 모르겠다. 심지어 내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소중한 한 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책들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 어느 한 권을 말해야 할지, 어떤 한 권을 말해야 할지. 사실, 제일 먼저 생각한 건, 당연히,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책이었다.

















너무 좋아서 영어책으로도 그리고 독일어 원서로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심지어 독일어는 읽을 줄도 모르면서 그저 가지고 있어. 어쩜 좋아. 매해 다시 읽는책. 그러나 이것을 나의 인생책이라 불러도 될까? 아아, 나는 좀더 신중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중한 한 칸 앞에 가 섰다. 거기에는 줌파 라히리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꽂혀 있었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지옥 천국>을 정말 여러번, 여러번 읽었다. 순전한 기쁨인 프라납 삼촌이 등장하는 지옥 천국은 나의 페이버릿 단편이다. 한편, [축복받은 집]에 실린 단편, <섹시>도 엄청 좋아한다. 누군가 어느 작가처럼 쓰고 싶냐고 물어보면 줌파 라히리라고 대답했던 시간들이 길었다. 아아, 어쩌면 좋아. 올리브 키터리지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것도 재독 이상을 했다. 한 번은 다정한 친구와 같이 읽기한 책이기도 하다. 너무나 특별한 책,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책. 나는 올리브 키터리지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집을 조금 수그러뜨리고 친구 혹은 연인을 새로이 사귀게 되는 장면을 몹시 사랑한다. 무지개처럼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던 순간을- like a rainbow-, 정말, 정말 사랑한다. 



모르겠다. 샤론 볼턴이 너무 좋은데 인생책으로는 아직 오르지 못하는가. 모르겠다. 컷 글라스 보울 좋아하는데 핏츠제럴드도 아닌건가. 모르겟다. 나의 독서앱 IReadItNow 를 엵고 책들의 목록을 훑는데 너무나 좋은 책들이 많지만, 인생책인가? 를 물으면 아니야, 부족해, 하게 된다. 뭔가 더 대단한 것을 위해 그 자리를 자꾸 넘기고 넘기게 되는데, 아아, 이러다 인생책은 없는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ㄷ 님은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도 고르셨다. 정희진 쌤은, 시간이 갈수록 나랑 다른 부분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여성학자다. 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앞으로도 다 읽고 싶다. 비록 앞으로 읽을 글들에서도 나는 나와 의견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각오해야 겠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책들 중에서는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게 뭐가 있을까?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는 밑줄긋기 공간이 없어서 다 못옮겼을만큼 밑줄이 많았다. 작가가 삶의 매순간순간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다. 그녀는 그녀 인생의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다 알아차렸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고 그걸 글로 풀어냈다. 그만큼 글을 쓰는 과정은 아팠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야만 했으니까. 내가 겪었던 고통을 글로 쓰다보면 그 고통의 시간을 한 번 더 살게 된다. '사유'라는 게 어떤건지 '성찰'이란게 어떤건지 알게 해주는 책이다.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를 하며 좋은 여성주의 책들을 아주 많이 만났지만, 나는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같다. 의식을 통째로 뒤엎어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포르노에 대해 날카롭게 관찰하고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 너무 좋았다.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를 읽으면서,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 뿐만이 아닌, 남자들과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여자들도 포르노를 살고(live) 있다는 처절한 현실을 알게해준 책이었다. 포르노랜드가 최근 책이라면,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서린 매키넌의 책들도 같이 반포르노 삼종셋트라고 묶어 불러도 좋겠다. 이 책들이 진짜 너무 좋다. 페이드 포, 여자도 인질이다, 포르노랜드 는 나를 쥐고 흔들다 못해 넘어뜨리고 다시 일으켜세운 책들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세 번 읽었다. 그렇다면 인생책이라 불러도 좋지 않은가? [채링크로스 84번지] 를 읽고 런던에 가 그 곳을 찾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맥도날드로 변했지만, 런던까지 가서 그 주소 앞에 서성이며, 여기가 혹시 채링크로스가 84번지의 그 서점이 아니냐고 묻게 만들었던 책이 인생책이어야 하지 않나. 순전히 쌀국수를 먹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게 만들었던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에도 인생책이란 타이틀을 붙여줘야 하지 않나. 처음 갔던 하노이, 그리고 홀로 떠나는 처음. 나는 이 책을 들고 거리를 헤매이며 국숫집을 찾았다. 어떤 국수를 먹고 싶은지 체크해두었던 바, 읽지 못하는 베트남어를 더듬어가며, 아아 여기에 분보남보를 판다, 하고 들어가 내 인생 첫 베트남 첫 국수를 눈물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 그렇다면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되어야 하지 않나.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야 말로 내 인생책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에 살지도 않으면서, 절판된 이 책을 읽고 싶다는 나의 SNS 를 보고 수소문해 이 책을 찾아 보내주었던 다정한 연인의 기억 때문에라도 나는 이 책을 인생책이라 불러야 하지 않나.


인생책은 무엇인가, 인생책은 한 권이어야 하나. 인생책은 몇 권을 고를 수 있나. 인생책은 그 책의 본래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인생책이 되는가, 그 책에 담긴 나의 사연 때문에 인생책이 되는가.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 역시 이 밤, 내 인생책을 고를 수가 없구나.




가끔 내 책들을 네이버 검색창에 넣고 검색해 리뷰들을 읽어본다. 알라딘에서도 마찬가지. 첫 책을 내고 쏟아졌던 축하 메세지와 선물 때문에 감동받아 울던 기억이 여전히 선하다. 지금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검색해보았다가 한 책모임 멤버의 글을 보게 됐다. 그 날은 각자 자신이 위로를 받았던 책을 한 권씩 들고 만나는 거라 하였는데, 그 중에 한 멤버가 가지고 나온 책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였다. 나는 그게 몹시 좋았다. 누군가를 위로하겠어, 작정하고 쓴 글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니, 위로 받은 책, 이라는 주제에 들고나가다니. 아아, 인생 진짜 잘 살고 있어. 너는 글로 덕을 쌓았어, 라고 한 지인의 말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는 내 책도 인생책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러기엔 너무나 작고 미미하지만, 그러나 인생책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리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으앗, 어떤게 내 인생책이지, 하고 책장 앞에 섰다가, 내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사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걸 언제 샀대? 안그래도 부활도 사서 읽어봐야지 하던 참이었는데...너 왜 거기있어? 게다가 1권은 첫째줄에 2권은 둘째줄에 있다. 왜때문에 그런거야? 알 수 음슴..



이 많은 책들중에 인생책이라 꼽을만한게 없다니!! 하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그렇다면 인생책도 아닌데, 다 팔아버려도 되지 않나? 나 자신에게 물었고 또다른 나는 '그건 아니지'라고 나를 말렸다. 이쪽 나가 잘한 건지 저쪽 나가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야, 나랑 싸우지말자. 싸움은 싫어싫어요...




어제는 <5월의 당신은>을 오랜만에 흥얼거리다가, 어라? 이번 5월엔 이 노래를 안들은것 같네? 생각했다. 오늘은 <소중한 사람>을 흥얼거리다가, 이거 가사가 뭔데 내가 지금 생각나? 하다가 가사를 보고, 아 그래.. 했다.


그러니까 언젠가의 가을에, 지하철 안에서 통화하다가, 상대로부터 "알았어"라는 말을 듣고, 그가 보지도 않는데 환하게 웃던 생각이 났다. 너무 좋아서. 알았어, 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알았어, 라는 말 너무 좋지 않나. 나는 언제나 그 말을 좋아했다. 알았어, 그럴게, 그렇게 할게, 응. 이 짧은 말들은 언제나 와서 가슴에 그대로 푹 꽂혀버려 내 심장을 어택하는 너의 알았어... 오늘은 그 알았어, 가 생각나서, 그 때의 그 목소리와 말투와 우리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다 생각이 나서, 내가 그 때 다시 반하면서, 아아, 이러니까 내가 좋아했지, 라고 다리가 무너질 것 같았던 생각이 나서 한참을 애가 탔다. 오랜만에 만년필을 꺼내 사각사각 일기를 썼다. 알았어, 라는 말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될까?





와인을 아예 미치도록 퍼부었어야 되는데, 괜히 두 잔만 마셔가지고 감정은 이빠이 오를 대로 올라버렸어... 나는 오늘밤 잠들 수 없는 것이다.

괜찮다. 취하자, 내 감정에 취하자. 괜찮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지금은 밤이니까.



건드리면 울어버리겠다 으르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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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2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모두가 다 인생책이죠. 세상에 이렇게나 책이 많은데, 그 책들이 다 어떻게든 나의 소중한 시간을 함께했을텐데 말이죠. 당연히 우리는 고를수 없어요. ㅎㅎ

다락방 2020-09-26 20:04   좋아요 0 | URL
제가 앞으로 어떤 책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인생책을 뭐라고 지금 정의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또 어마어마한 책을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생책은 그래서 정하기도 어렵지만 바뀔 가능성도 많은 것 같아요. 앞으로 만나게 될 책들을 생각하면 흥분으로 가슴이 뜁니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9-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여전히 건재하군요. 줌파 라히리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도요.
우리 같이 또 따로 페미니즘 책을 읽어왔지만, 다락방님은 자신이 젤 좋아하는 책을 잘 알고 있고 또 그걸 계속 이야기하셨던 거 같아요. 모두 맞췄습니다^^ 다락방님 인생의 책들은 크고 작은 사연들이 있어서 더 좋은 거 같아요. 런던에도 베트남에도 추억이 남아 있는 책들이네요.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랑 [잘 지내나요?] 같은 명저는 왜 책 링크를 안 하셨나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예전에 소설가 김영하가 <말하다>라는 책에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여기 오신 분들은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니 이런 느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특정한 어떤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합니다. 때로는 이런 작가를 사랑했으나 곧 다른 작가에게 빠져듭니다. 프랑스 소설을 막 읽다가 일본 소설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소설은 안 읽고 역사서만 읽기도 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영화 대사도 있지만 변해야 사랑입니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평생 한 작가 혹은 특정 작품만 줄창 읽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179쪽)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하죠. 어찌 보면 인생책도 바뀌는 것 같고요. 전 필립 로스 말고 또 다시 이렇게 사랑하게 될 작가가, 제 평생 없을 줄 알았거든요. 아니더라구요. 대프니 듀 모리에를 사랑합니다. 필립 로스만큼이요.
좋은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치킨은 사랑이고 책도 사랑인데, 태그가... ㅠㅠ 히잉 ㅠㅠ

다락방 2020-09-26 20:09   좋아요 0 | URL
제가 이 페이퍼를 써놓고 잠깐 등록을 망설였어요. 써놓고 나니 늘 했던 말을 또 하고 있더라고요. 오랜시간 제 서재를 찾았던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걸 다시 읽는셈이 되겠더라고요. 뭐야, 나란 인간 왜이렇게 짐작이 쉽고 뻔한것이냐... 라고 생각해서 이걸 등록해 말어, 하다가 그래도 썼는데...하고 등록을 눌렀습니다. ㅎㅎ

맞아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자꾸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된 이들이 제 말들에 지겨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요. 바로 이 페이퍼에 대해서 등록하길 망설였던 것처럼요. 저는 제가 좋아했던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도 계속 하고 싶은데, 이제 모두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는 마음이 될 것 같아서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한테 좋다고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니까요. 제가 자제하려고 해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자꾸 말하고 또 말하게 돼요. 단발머리님의 인생책 페이퍼는 오 그렇구나 오 그건 없네, 라는 식의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제껀, 음, 했던 말 또 했구나..의 느낌이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는 단발머리님이 필립 로스를 사랑하는 것도 좋았어요. 제가 필립 로스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단발머리님이 필립 로스를 사랑하고 그의 책을 자꾸 읽고 자꾸 글을 쓰고 하는 게 진짜 좋았어요. 어떤 작가를, 책을 사랑하는 걸 보는건 저한테 큰 기쁨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이 있으니 자꾸 쓸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대프니 듀 모리에를 좋아하신다니 그것도 너무 좋아요. 단발머리님, 앞으로도 꾸준하게 좋아하시고 수시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뀌어도 좋아요.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게 너무 좋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저는 제 페이퍼에서 태그까지 읽어주시는 소수의 몇몇분들을(단발머리님, 잠자냥님) 정말 사랑합니다.

2020-09-26 0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6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7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7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7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매이고 있었다. 핸드폰의 지도를 보고 가만있자, 3번 출구라고 해서 3번으로 나왔는데 그 다음 어느 쪽으로 가는거야.

지도를 보고 가려면 지도에 그려진대로 나를 맞춰야했다. 이 건물과 저 건물 사이의 골목길로 핸드폰의 방향을 일치시켜야만 내가 목적지를 향해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왼쪽으로 가야할 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제는 지도랑 내가 서 있는 곳을 일치시켜 방향을 잡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뭐여..그러니까 이게 여기라는거여 저기라는거여..핸드폰을 요케요케 바꾸고 있는데,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한 친구가 어쩐 일인지 뒤를 돌아보다가 길바닥에 멈춰서 핸드폰을 요케요케 돌려가며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고, 나는 그렇게 친구가 가리키는 대로 쫄쫄 뒤따라가서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는 지도를 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기 전에 와봤어? 친구는 아니라고 했다. 아까 지도 봤잖아, 라는게 친구의 대답이었는데, 아니,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지도 한 번 보고 끝내버리는가... 대단하다.........


나는 지도를 볼 수 있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지도를 보고 길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냥 지도보다는 네비게이션을 걷는 모드로 해놓고 따라가는 게 좀 더 쉬운데, 왜냐하면 그 경우에는 네비게이션 상에서의 내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목적지가 왼쪽에 있는데 내가 그쪽을 향해 가는지 아니면 반대쪽으로 걷고 있는지 금세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정된 지도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단 내가 어디 서있는지 파악해야 하고 그 다음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야 한다. 내가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기 위해서는 긴 시간 지도를 들여다보고 주변 건물을 보면서 아, 그렇다면 지도의 방향이 이렇게 되는구나, 지도의 방향과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치시키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지도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중간중간 오케오케, 여기 맞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주 많이, 으이크, 왜 여기까지 왔지? 목적지랑 전혀 상관없는데? 하는 일이 벌어져버려, 나는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제의 친구처럼, 일단 지도를 한 번 스윽- 보면 방향을 제대로 찾아내는 친구들이 있다. 나랑 같이 여행을 다니는 친구는 지도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 그게 똭 새겨지는 모양이었다. 한 번 보고나면 여기서 저기로 가서 저기로 가라고 나오는데, 이 골목으로 가면 좀 더 빠를것 같아, 막 이런게 돼? 칠봉이도 그랬다. 목적지까지 내가 지도를 보며 안내하고 있는데 가도 가도 안나오는 것 같고, 아아 나는 또 헤매이는가, 쪼그라들어 있으니 줘봐, 하고 지도를 보고서는 맞게 가고 있네, 하면서 성큼성큼 가버려...



대전의 수목원에 갔을 때였다. 그 때의 동행과 나는 수목원을 걷다 나와서 버스를 타기 전까지 한두정거장을 좀 걷기로 했는데, 우리가 가는 방향에 맞춰서 나는 핸드폰을 자꾸 고쳐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가면 네비게이션 안의 나도 앞으로 가야 하는거야. 가리키는 방향이 뒤쪽인데 내가 앞으로 가고 있으면 내 사고가 응용을 못해. 그걸 보고 동행이 막 웃었다. 너 똑똑한데(이 친구는 나를 되게 똑똑하다고 생각해준다. 좋은 사람 ♡) 지도는 못보는 거 너무 웃겨, 하면서. 본다니까? 다만, 방향을 일치시켜야 할 뿐이야...



뉴욕에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식당에 갔는데 밥을 다 먹고 나서 나가야 할 때, 출구가 아닌 커다란 유리창 앞에 가서 문이 왜 안열리지? 갸웃 거리고 있었던 것. 그러자 동행이 빵터져서 '너 거기서 뭐하나 했어, 우리 여기로 들어왔잖아' 하며 다른 문을 가리키는 거다. 나는 한 번 간 곳, 처음 간 곳에서는 너무나 헤매인다. 들어갔던 문으로 나가는 것도 못해... 내 여행친구와 칠봉이는 며칠을 함께 묵던 호텔에서조차도 객실 밖을 나서면 엘리베이터가 어디있는지 방향을 알려줘야 했다. 문밖에 나오는 순간 나는 난 누구 여긴 어디? 이렇게 되어버려. 나와 함께 낯선곳에 자주 갔던 이들은 걍 으레 그렇듯이 나를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인도한다. 자연스럽게. 어깨를 잡고 혹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표시하면서.



오늘 아침에 갑작스레 이런 일들이 떠오르면서,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과정이, 그러니까 목적지에 가기 전에 주변에 뭐가 있나 살피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다 가면서도 수시로 내가 맞게 가고 있나 혹은 틀리게 가고 있나를 들여다보는 그런 과정들이, 내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도를 보고 목적지로 가는 것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다, 라고 모두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비슷하다. 특히나 자꾸 수시로 멈춰 내가 맞게 가는가, 길을 잘못들진 않았는가 살피는데 있어서는 더 그렇다. 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 앞에서 내게 몇 번이나 되묻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시간을 돌려도 다시 그 선택인가?' 또 멈춰서기도 하니까.


다른게 있다면 어제의 친구처럼, 내 여행친구처럼, 내가 길을 찾지 못한다는 걸 알고 누군가 도와주는 것은, 정말로 지도를 보고 길을 찾을 때 뿐이라는 거다. 여행지에서도 나는 서투른 영어로 길을 묻고 낯선이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딱히 방향에 있어 도움을 받게 될 일이 없어.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앞으로 착착 나아가고 또 누군가 끌어주거나 밀어주거나 방향을 가리켜 줄 수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런 식의 방향에 대한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마도 남들보다 더 느리지 않나, 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된다. 여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다 내가 찾아냈고 내가 들여다보고 내가 멈춰서고 내가 걸어서 왔으니까. 앞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여기로 가면 어때, 이건 어때 라는 식으로 수많은 인생의 방향에 대해 알려주었다면 나는 전공을, 직업을, 취미를 다르게 갖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서있는 이 자리를 싫어한다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나에게 수시로 물었던만큼 내가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하고 또 많은 선택들에 있어서 정말 잘했다고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기도 한다. 다만,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다면 조금 더 빠르게 갔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는거다. 인생에 있어서 기쁜 순간 행복한 순간 평온한 순간들이 찾아온다면, 그건 좀 더 빨리, 가급적 더 이른 나이에 찾아오는게 좋지 않을까. 순간의 판단 실수로 어떤 관계에 대해서 혹은 어떤 실적에 대해서는 '하, 그때 그러지 말걸, 내면에서 하는 말을 애써 무시하지 말걸' 하는 후회도 당연히 찾아오지만, 대체적으로는 잘 온 것 같다. 그간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나는 머리로 하는 생각도 중요하지만 내 감각이 말하는 게 더 중요하고 더 옳은 방향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과 감각은 전혀 동떨어진 게 아닌, 서로 연결된 것이지만. 내 마음과 감각이 '그러지마' 라고 하는 것을 때때로 머리가 '괜찮아' 하고 억지로 시키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내 감각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지만 앞으로 더 나아져야 해. 나는 나를 괴롭히는 결정을 하지 않겟다.




거의 40일만의 외식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함께 밥먹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반가웠다. 세 명이서 각자 다른 음료를 앞에 두었다. 한 명은 소주, 한 명은 맥주, 한 명은 콜라... 하하하하하하하하. 외계인과 섹스해서 지구를 구한 나의 과거의 꿈에 대해 얘기했다가 '너는 한 번이라도 외게인과 섹스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거야!'라는 얘기를 듣고 아냐, 아냐, 그럴리 없어! 열심히 나를 변호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로이트 까기 전에 프로이트를 좀 알아야 할 것 같아, 얘기했고, 우리 푸코 같이 읽으면 어떨까, 얘기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어느새 집에갈 시간이 되었는데, 약속장소에서 집이 가까웠단 말야. 지하철 역으로 모두 합쳐 열정거장도 안될텐데, 집까지 한시간 이상 걸렸다. ㅠㅠ

일단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게 8분쯤 되었고 ㅠㅠ 그다음 오금에서 5호선을 기다린게 15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강동역에 도착했더니 마천행이 들어올 예정이래. 상일동행은 안내판에 언제 올지 뜨지도 않아 ㅠㅠ 집에 오니 열한시가 넘어있었고 기진맥진했다.



목적지에 간다는 게 이렇다. 내가 혼자 결정하고 혼자 걸어가는 이 길, 알던 길이라도, 지하철의 아다리가 안맞으면 이렇게 시간이 곱 이상으로 들어버려. 빈번하게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목적지로 가다가 멈춰 서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길을 잃고 헤매여야 한다.

오늘도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고, 내 수면시간은 그로므로 극히 짧았고, 바로 몇시간전에 머물렀던 역들을 다시 거쳐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편도 한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십년쯤 이걸 반복하다보니, 내 앞으로 남은 직장생활은 얼마일까, 남은 동안이라도 좀 편하게 다니자, 하는 마음이 불쑥 생겨서, 얼마전에는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가장 싼 집을 알아보았다. 월세를 내서라도 회사 앞에서 다니고 싶다, 그러면 얼마나 편할까, 일어나서 샤워하고 문밖을 나서면 바로 회사야. 그래, 돈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1,2년이라도 편하게 다니자! 하고 알아보았는데, 모텔같은 원룸, 아주 작은 원룸, 현관문을 열면 바로 그냥 룸 하나만 딸랑 펼쳐진 그 곳이 월세 90만원이었다. 호기롭게 월세가 얼마든 내겠어! 하였지만 90이라는 구체적인 가격을 보자 아니다.... 하게 되었다. 이번 생에서 편한 삶은 이 직장을 관둬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태어나야지.




좋아하는 다정한 친구가 일전에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를 추천해주어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어제 이 책의 개정판 소식을 들었다.

















표지 너무 좋구먼... 이걸로 새로 살까?



궁금한 신간들도 쏟아져나왔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매번 사두고 안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왜냐하면 이것이 지난주이므로...




그러므로 책 안사, 안사, 안살거야, 안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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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을 속속들이 잘 몰랐었네요. 전 다락방님이 지도 보고 길을 무척이나 잘 찾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외국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같이 있을 때도 길을 잘 찾으셔서.... 지도 한 번 보고 길 찾는 친구들이 있긴 있더라구요. 전 친구랑 같이 있을 때는, 그 친구가 어떤 친구든지, 핸드폰을 아예 안 꺼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친구 따라가면 되니까요. 며칠을 묵던 호텔방을 나오면 전 반드시 엘리베이터 반대방향으로 돌진합니다. 체크아웃 하는 그 순간까지도요. 저 자신을 믿지 말아야겠나요?

결심과 반대로, 당신은 이번주 내로 또 책을 주문하게 될 것입니다.


다락방 2020-09-25 11: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외국에 가서도 사람들한테 엄청 길 물어보고 다녀요. 요즘 구글지도가 잘 되어 있어서 너무 편하고 좋긴한데 그래도 또 어딘가에서는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야만 하게되고 그렇습니다. 커다란 빌딩 안에서 상점 찾는게 더 힘들기도 해요. 도대체 어디 붙어있다는 것이여...하고 말이지요. ㅎㅎㅎㅎ
아니, 어떻게 그렇게 호텔바을 나오면 반드시 엘리베이터 없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걸까요? 몇 번 들락날락 했으면 안그래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어김없이 또 그럴까요? 사실은 침대에 있고 싶다는 잠재의식 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 사면 인증하겠습니다. (안됏!)

수연 2020-09-2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보고 저 혼자서 대꾸했습니다. ˝진짜루?!˝ 즐거운 시간 보내셨다고 하니 좋습니다. 귀가하는 여정은 너무 고되었지만 -_-

다락방 2020-09-25 11:03   좋아요 0 | URL
진짜에요, 진짜라구욧!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실 저도 진짜인지..잘 모르겠어요?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blanca 2020-09-2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완전 지독한 심한 길치라 완전 공감해요. 책탑은 ㅋㅋㅋ 난 정말로 11월달에 주문할 거예요. 그렇지만 존 버거의 <결혼식 가는 길>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겠습니다.

다락방 2020-09-25 11:02   좋아요 0 | URL
아주 그냥 방향 감각도 없어서 돌아버리겠어요. 그래서 저는 초행길은 예상시간을 좀 넉넉히 잡는답니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헤맬지 몰라..
그나저나 존 버거 저 책은 이미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또 사고 싶어서 돌아버리겠네요. 으으으.
혹시 읽게 되시면 꼭 감상 들려주세요, 블랑카님!!

잠자냥 2020-09-25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 외계인 어떻게 생겼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5 11:01   좋아요 0 | URL
에일리언(20%)+프레데터(80%) ......................................


자성지 2020-09-2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라방 님 알라딘 활동은 미미한 편이라 먼저 댓글 달기를 저어했는데 제 서재에 들러줘 감사합니다.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농익은 다락방 님의 글을 보면서 공감하며 지냈습니다. 저도 방향감각을 잃고 헤맬 때가 많은데 위로가 되네요.

다락방 2020-09-25 13:28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갱년기 관련 글을 보면 너무 공감이 되어서.. 뭐랄까,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막 초조해지고 그러거든요. 뭘 알아야 제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시간이 흐르면 나이드는 건 자연스런 일이지만 시간을 붙잡고 싶어지고 그래요 ㅠㅠ

난티나무 2020-09-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엘리베이터 반대방향파인데 반가워요.^^
폰의 구글 지도를 보면서 헤매는 거도 똑같고요..ㅠㅠ
그나저나 에일리언 프레데터 라니@@ 우왓 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09-25 13:29   좋아요 0 | URL
엘리베이터 반대방향 왜이렇게 많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어딜가도 엘리베이터랑 꼭 반대방향으로 나갈까요? 그것참 신기하네요. 엘리베이터의 자기장이랄까, 뭐 그런게 저를(우리를) 밀어내는가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님, 지금 이렇게 지구에서 즐겁게 지내시는 건 다 제가 외계인과 그것을 하는 희생을 무릅썼기 때문임을 잊지마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0-09-2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향치.. 찌찌뽕입니다. ㅎㅎ
살다가 길때문에 가장 난감했을 때가 해외나가서 시골에서 버스를 잘못내렸어요. 구글이 일반적이지 않을때라 지도와 머릿속에 넣어둔 기억들을 가지고 찾아가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온거죠. 도대체 거기가 어딘지 알수 없으니... ㅎㅎ 저도 사람들한테 잘 물어보는데 거기 너무 시골이라 사람이 한명도 없는거예요. ㄱ있는거라곤 고양이 한마리 강아지 1마리... 얘들아 여긴 어디니 하고 있었죠. ㅎㅎ

다락방 2020-09-25 22:49   좋아요 0 | URL
아니, 바람돌이님! 해외..시골..버스.... 너무 어려운 삼중어택인데요? 게다가 주변에 사람도 없엇다니.. 저는 주변에 사람 없으면 일단 불안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인간을 좋아하고 신뢰하는가 봅니다. 사람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에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고양이와 강아지 뿐이라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래도 바람돌이님 잘 헤쳐나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알라딘에서 이렇게 댓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흑흑. 잘 헤쳐나오셔서 다행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기서 만날 운명이었는가 봐요... 데스터니.......(와인 두 잔 함)

바람돌이 2020-09-25 22:56   좋아요 0 | URL
그럼요 한 30분쯤 헤매다 마지막 수단으로 예약했던 호텔에 전화걸었어요. 영어가 안돼서 애먹었지만 어쨌든 나 길 잃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뭐라 쓰여져 있는 간판 하나 있네. 제발 날 구해줘. 뭐 이렇게요. ㅎㅎ 정말 헬프 미 연발!!! 호텔에서 차 가지고 구하러 와줬어요. 호텔도 쬐끄만 호텔이었는데 엄청 고마워서 딴데 가서 밥 안먹고 그 집에서 끼니 다 해결했어요. ㅎㅎ

다락방 2020-09-26 20:26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를 못해서 전화로 그 상황을 해결해야 했으면 아오 스트레스 받았을 것 같아요. 제가 실제로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는 거면 손짓발짓 눈빛으로 어떻게든 되는것 같은데 그런거 전혀 없이 전화 통화만으로는 잉글리쉬가 네버 네버 안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 ㅋㅋㅋㅋㅋㅋㅋㅋ 호텔에서 구하러 와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바람돌이 님이 헬프미 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바람돌이님, 이곳에서 우리 다정하게 오래오래 잘 지냅시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들을 다 헤쳐나갑시다. 빠샤!!
 
















얼마전에 체호프의 소설을 읽으면서 러시아에서는 소설 천재들이 탄생하는가, 러시아는 소설을 위한 땅인가 생각했는데,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책을 읽으면서 오오, 역시 러시아!! 했다. 이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겠지만, 그러나 러시아 작가들 왜이렇게 글 잘쓰는것인지...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천재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빅토리아 토카레바를 만나기 전까지는 모두 남자였다. 체호프도 도스트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모두 남자였잖아. 흑흑. 그런데 러시아는 소설 천국이구먼, 할 때 이제 떠올릴 여자 작가가 있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기쁘다. 게다가 현존하는 작가인 것이야! 만세!



이 책은 단편 다섯개가 실려있는데 <티끌 같은 나>와 <이유>는 중편에 가깝다.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는 가수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보겠다고 시골 집을 떠난다. 술만 퍼마시는 아빠와, 알코올중독 때문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소 치는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에 가 오디션을 보았지만 떨어지고, 그녀는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다행히 주인집 여자는 영화계로 발이 넓어서 안젤라에게 오디션의 기회를 마련해주는데, 가까스로 피디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자, 피디는 그녀의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서 너의 노래가 필요하니 작곡가에게 곡을 사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그럼 작곡가에게 돈을 내야 하는 쪽은 나와 선생님 중 누구인가요?" 안젤라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어떨 것 같은데?" 마에스트로가 지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돈으로 곡을 사서 노래도 내가 부를 거라면 선생님은 왜 필요한 거죠?" 안젤라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르트노프카 사람들은 다 아가씨 같은가?" 마에스트로가 심문하듯 질문했다.

"선생님은 어떤 분인데요? 머릿속에 온통 쩐 생각뿐이잖아요. 재능이라는 것도 있는데 말이죠……. 커다란 경기장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는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죠."

"아가씨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아가씨 자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스타스가 끼어들었다.

"왜 선생님들은 되고 나는 안 되죠?" 안젤라가 다시 물었다.

"부탁하러 온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니까."

"그럼 들어온 것처럼 다시 나가 드리죠." 안젤라는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문을 나가기 전에 뒤돌아서서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땐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겁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호언장담을 했다. -<티끌 같은 나>, P.34-35



안젤라는 티비에 나와서 유명해지고 싶었고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가난한 동네를, 집을 떠나서 도시로 왔다. 그러나 오디션을 볼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오디션을 보고 노래 실력을 인정받는다 해서 바로 가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는수없이 그녀는 이 집 저 집의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 작곡가에게 곡을 살 돈이 필요하고 시디로 제작할 돈이 필요하니까. 그녀의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 보란듯이 성공하는 꿈은 자꾸만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늙은 부자 남자를 만난다. 자신의 아내에게 질려버린 오십세의 남자가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안젤라에게 반한 거다. 그는 안젤라와 함께 동거하면서 그녀에게 필요한 집과 밥을 마련해주고 그녀의 애인이 된다. 그가 영화감독을 만나 제작비도 후원해주겠다고 안젤라를 출연시켜달라 하고 안젤라에게 집을 사주기도 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안젤라는 '성공한'걸로 보인다. 부자 남자...




"너 잘나가잖아. 그러니까 나눌 줄도 알아야지. 성경의 십일조처럼 말이야. 성공에 대한 보수라고나 할까."
"내가 성공하다니요?" 안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말이야……."
"아……." 안젤라는 영혼 없이 '아'를 길게 발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성공을 원했다. <티끌 같은 나> -P.122



안젤라의 꿈은 '부자 남자를 만나 손 하나 까딱않는 삶'이 아니었다. 안젤라의 꿈은 자기 노래 실력으로 가수가 되는 것이고, 자기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들 덕에 자기가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자기 자체로 성공하는 삶.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성공했다 말한다. 젊은 여자가-이제 고작 스무살이 됐을 뿐이다- 쉰 살의 늙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돈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아아, 너는 성공했구나! 라니. 그것을 성공이라고 한순간도 생각해본 적 없고, 스스로의 성공을 원했던 안젤라에게는 당황스러운 말이다. 안젤라의 꿈은, 안젤라가 생각하는 성공은 부자 늙은이 만나 팔자 고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하는 삶이었지. 다른 사람의 성공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른 사람의 돈이 도대체 왜 내 성공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자기의 성공을 원한다한들, 삶이 그녀의 뜻대로 펼쳐지질 않는다.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도 그녀가 원하는 식의 배역도 아니었고, 보란듯이 성공해 자신을 무시했던 피디 앞에 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사랑을 찾았지만 그 불같은 사랑과 열정도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다. 부자 남자의 돈은 그녀에게 평생 살 수 있는 안락함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인가 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가있지 않은 한 대체 그 돈은 다 어떤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삶이란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가수가 되고 싶어서 왔지, 늙은 유부남의 정부가 되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가수가 되지 못하고 늙은 남자의 정부가 되었더니 왜 성공했다고 하는거야.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스무살의 안젤라는 도시에 와 깨닫게 된다. 삶이란 것이 그렇게 내가 마음 먹었다고 그대로 나아가지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거다.

그러나 그녀는 젊다. 깨달은 만큼 성숙할 것이고 성숙한 만큼 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그녀가 가보지 않은 멀고도 먼 길이 쭉 뻗어 있다. 그 길에서 무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안젤라의 늙은 애인인 니콜라이의 아내, '레나'는 어떤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남편은 젊은 여자에게로 가 자기에게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만, 그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만을 아프게 깨달을 뿐이다. 그 큰 집에 혼자 머물면서 그녀는 외롭다.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애인이라 사귀면서 보란듯이 자랑하고 다니는데, 왜 나는 젊은 남자를 만나면 안된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직원과 섹스를 한다. 그러나 젊은 남자와의 섹스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양팔을 뻗어서 팔베개를 했다. 겨드랑이에서 말 오줌 냄새가 났는데, 고약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약초 비슷한 냄새가 강렬했다.<티끌 같은 나> P.145



아아, 하필 섹스한 남자가 겨드랑이에서 말 오줌 냄새 나는 남자란 말인가... 그녀의 연애는, 그녀의 뜻대로 되질 않는데, 왜냐하면 사실 남자란 게 다..그모양이기 때문이다. 함께 스키장에 가서 없는 객실 나도 다오, 실랑이를 한참 하고났더니, 이 젊은 남자는 다른 사람과 실컷 놀고 있는게 아닌가. 왜 이 돈을 쓰는 것도 이 고생을 하는 것도 나여야 하지? 그녀는 그 호텔에 그를 두고 그냥 가버린다. 말 오줌 냄새 났을 때 그냥 버리지 그랬어요.....






첫번째 단편 <티끌 같은 나>가 '안젤라'의 젊고 찬란한 어느 한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유>는 '마리나'의 전 생을 보여준다. 부모님의 무관심속에 동네 마당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거쳐 훤칠한 미남의 '옆에 있던 친구'와 결혼한 젊은 시절을. 그러나 남편은 마리나에 대해 계속 알고 싶어하면서 아이만 낳게 하고 돈을 벌어오지 않았어.. 마리나가 자꾸 돈 벌어오라고 하자 남편은 바람을 핀다. 결국 돈 버는 것도, 가사노동도, 육아도 모두 마리나의 몫이었고, 그런 마리나가 빡쳐서 섹스를 안해주자 남편은 다른 여자 찾아 집을 나가버려. 아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런 그녀의 앞에 오오, 인생사랑이 등장하니... 마리나의 입을 빌면 '흰 셔츠에 하얀 이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P.194)', 오마 샤리프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반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 이 둘의 관계는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된 것인데, 그렇게 통화하다가 만나기로 하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야 하잖아? 그래서 마리나는 숄을 두르고 있기로 한다.



"이렇게 하죠. 저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도트 무늬가 있는 숄을 두르고 있을 겁니다. 만약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지나가세요." 마리나가 상황을 정리하여 제안했다. -<이유>, P.193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와 사랑한다.

오오 그의 이름 루스탐.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아제르바이젠 남자인가요. 루스탐과 마리나는 뜨겁게 사랑한다. 아주 뜨겁게 사랑한다. 겁나 뜨겁게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냐면, 교사로 근무하는 마리나의 학교에 수업 시간에도 찾아가서 마리나의 얼굴을 본다니까?



루스탐은 트렌치 코트를 낚아채듯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가서는 전차에 올라탔다. 20분 후에는 그녀의 학교 근처였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들고 시선을 2층에 고정했다. 마리나가 창가로 다가왔다. 루스탐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시선을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들의 시선이 만나는 자리에 엄청난 양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전기장에 모기나 딱정벌레가 앉는다면 그대로 죽어서 떨어질 것이다.
마리나는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교장 눈밖에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리나는 그들의 사랑과 아무 연관도 없는 아이들에게 '새 한 마리 그리기'같은 과제를 주곤 했다. '나는 어떻게 여름을 보냈는가?'라는 주제로 작문을 쓰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창가로 가서 그대로 붙박이곤 했다. 딱정벌레가 그들의 사랑이 만든 전기장에 걸려들면 죽어서 떨어지곤 했다. -<이유>, P.197



아니, 둘 사이에 너무나 뜨거운 전류가 흘러서 모기도 죽을 수 있을 정도라는데, 대체 왜 학교에 찾아가는거야 이 밥통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일을 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토록이나 뜨거운 열정을 품게한 남자가 교실 밖에 있는데 안에서 내가 어떻게 수업에 열중하냐 이 빵꾸똥꾸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는 집에서 네 일을 해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잖아? 너무 사랑하잖아? 불같은 사랑이잖아? 이당시에 마리나가 애가 둘 있는 여자였지만 총각 루스탐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당연히 루스탐의 어머니는 마리나늘 싫어한다. 애가 있는 여자라서이기도 하지만 아제르바이젠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루스탐의 어머니는 루스탐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는데, 또 이 여자도 나쁘질 않아? 그래서 루스탐은 그녀와 결혼을 하고(네?) 두집 살림을 산다. 이런 염병할..그러면 죽을 죄를 지었다, 내가 너 몰래 결혼을 했어, 엄마가 시켰지만 어쨌든 했지, 이제 우리는 못만나 굿바이, 하고 작별인사를 해야 하잖아? 그러나 그는 마리나를 속인다.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한 적 없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 번만 마리나를 찾아오면서...그렇게 이 연애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연애도 끝나고. 마리나는 늙어가고 자식들은 다 자라서 뿔뿔이 흩어지고, 그런데 자식들이 또 엄마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까, 저 사람하고 결혼해서 돈 많게 좀 지냈으면, 했지만 자식들도 다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서 가난하게 살아. 똥꼬가 찢어진다. 마리나는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두면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쓰지를 못해. 그래서 돈을 내가 벌면 내가 쓰면서 살아야 한다니까? 다 모아봤자 내 고생은 지속되면 이것이 뭐여, 이것이 인생이여?




마리나가 오갈 데 없이 되었고, 그런 마리나가 생각한 해결방법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 머물 곳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긴다. 그러니 누군가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래, 만나자, 만나보자. 그녀는 그 남자와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기로 한다. 그 옛날 젊은 시절 루스탐을 만났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떻게 알아볼까요? 남자는 양손에 신문을 들고 있겠다고 한다. 자, 가자, 고고씽. 누구든 상관없어!




마리나는 전에 루스탐을 만나러 갈 때처럼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도트 무늬 숄 대신 절반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가릴 요량으로 베레모를 썼다.

마리나는 기차역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갔고, 도착하기가 무섭게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씨를 발견했다. 그는 회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큰 키에 필통처럼 직사각형 같은 사람이었다. 흰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뒤로 넘겼으며 회색빛 얼굴에 콧날이 오똑했다. 꼭 고인 같았다. 전화로 약속한 것처럼 양손에 신문을 쥐고 있었다.

마리나는 멈춰 서지 않았다. 걷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옆을 지나갔고, 플랫폼까지 걸어가서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바로 출발했다. 마리나는 뒤따라오는 사람을 따돌린 것처럼 기뻤다.

기차에서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스토리는 과거와 완벽하게 일치하면서도 완벽하게 반대였다. 과거에도 만나기 전에 전화 통화로 목소리부터 들었다. 손에 신문을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운명이 바뀌기를 기대한 것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손을 잡고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뛰었다. 하지만 지근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씨는 세로로 세워 둔 관처럼 서 있었다. 얼굴도 관처럼 핏기가 없었다. 오마 샤리프, 도대체 어디 있는 건가요? 당신은, 내 젊은은, 내 도시는 어디 있는 거죠?

마리나는 새끼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울었다. -<이유>, P.260-261




오..마리나여...누구든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누구든 상관없다며. 그런데 왜 도망가, 왜. 왜 그냥 지나쳐, 왜. 왜 루스탐이 아닌 남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거야. 왜, 왜, 왜, 왜... 왜 지나쳐, 왜. 왜 도망가. 그 남자는 뭐가 돼 그러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흑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나 슬픈 이야기.



아니, 생각해봐.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나 역시 상대를 모르는데, 내가 생수 두 통을 들고 서있을게요, 하고 서있는데, 그런데 나를 알아본 상대가 나를 보고서는 으힉, 이를 어째, 나 아닌척 지나가자, 하는 건데, 이거 너무 슬프잖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일전에 페이퍼 쓴 적 있지만, 저 도망가는 마음 뭔지 너무 잘안다, 진짜. 나도 도망갈라 그랬어. 물론 내가 도망간 이유는 상대의 외모에 실망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여자인줄 알고 나갔는데 남자가 있어가지고, 도망가자, 하고 그대로 나 아닌척 지나쳐서 지하철역으로 쏘옥- 들어가버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기에 대해서는 이 페이퍼에 자세히..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1831915 )



마리나, 도망갔네요. 도망갔어요. 결혼한 사실 얘기하지 않고 두집살림한 남자 그리워하느라, 도망갔어요. 그렇지만 만약 루스탐이 아무리 그립다고 했더라도, 그 때 양 손에 신문을 들고 서 있었던 남자가 다니엘 헤니 같았다면... 마리나도 내려서 그의 앞에 서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인생 드럽구나 내가 갈 곳은 없구나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고 난민이 되고 갈 곳이 없어 외롭다 주변에 사람도 없어 자식도 없고 손주와도 함께살 수 없고 나는 모두에게 민폐구먼, 나는 이제 어쩌나,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은 그녀에게 비슷한 또래의 부자 여자 닥터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렇게 마리나는 그녀의 집안 일을 봐주면서 또다시 돈을 벌고 먹고살 수 있게 된다. 마침 닥터도 외로웠던 터라 퇴근 후에 누군가 음식을 차려주는 것도 참 좋아. 그런데 마리나, 그녀는..좋긴한데.. 외로움도 달래주고 수고했다고 따뜻한 음식도 차려주기는 하는데, 도통 남의 물건을 사용할 때 허락을 받을 줄을 몰라...허락 좀 받고 사용하라고 말하면, 너는 많은데 이게 아까워? 이러고 있다.. ㅠㅠ 마리나여...



"나한테 먼저 허락을 구할 생각은 못 하나 보지?" 안나가 살짝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게 아까운 건 아니죠? 사모님한테는 이런 상자가 발에 밟히잖아요." 마리나는 정말로 놀란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서였다. - <이유>, P.294



마리나여, 많게 가지고 적게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손을 댄다면 손을 대기 전에 미리 물어야 합니다. 허락을 구해야 해요. 마리나는 살면서 한 번도 많이 가진 적이 없어서 누군가가 허락을 받고 마리나의 물건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니 허락을 구하고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런데 이렇게 여태 살아왔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거쳐 중년의 삶을 살고 있어.



마리나의 이야기 혹은 삶이 여기서 끝나는가 하면 아아,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나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렇게 기다렸던 사람과의 재회, 한번쯤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비. 밀. 그녀와 왜, 어떻게 재회했는지도 비. 밀. 그것은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로맨스 코메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인생의 어쩔수 없음, 비루함,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썼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이쯤하자.




좋은 소설을 읽으면 읽으면서도 좋지만 다 읽고 나서도 너무 좋고 짜릿하다. 얼마전에 친구의 글이 좋아 '오늘 네 글 좋네' 했더니, 친구가 읽은 소설을 언급했다. 그 소설 읽었더니 이런 글을 쓰고 싶어졌어, 라고. 역시 소설 만만세다, 라고 내가 결론 내렸는데,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 속의 이야기에 흠뻑 빠지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게 다른 곳의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기에 나 역시 이곳에서의 내가 사는 삶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다른 것들 그리고 나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어릴적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화목하게 온 가족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사는 삶이 평범한 삶인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그게 평범한 삶일거라고 짐작한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항상 그런 식의 가족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나 어린 시절을 거쳐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내가 생각했던 그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평범과 멀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것 자체도 순탄하게 되지 않을 뿐더러,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도 사랑인지부터 되물어야 한다. 사랑이란 이름을 쓴 다른 관계가 아닌지. 혹시 폭력을, 억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설사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게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그 다음은? 이라고 물으면 그 다음도 역시 꽁냥꽁냥 행복하다, 하는가도 또 다른 문제다. 가사노동과 육아가 여성에게 집중되면서 그 안에서의 삶은 평등하게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만나 아이들을 낳고 부족함 없이 사는 삶이야말로, 이상향에 가깝다. 안나 까레니나의 첫구절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 니까.



이 책의 책 소개에는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되어있는데, 정말 그렇다. 평범한 여성은 세상을 쉬이 살아가지 못한다. 물론 모든 인간이 쉽게 살 수 없겠지만, 내 꿈은 여러차례 내 의도와 다르게 좌절되고,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보다는 내 육체라는 여성성이 사람들의 눈에 부각되며, 내가 여성이라는 육체로 돈을 벌기를 사회가 강요한다. 사랑이라고 찾아오는 남자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원하는 건 자기만 생각하는 삶이고, 내가 아무리 이 남자를 사랑한다 해도 순간순간 '이건 아니잖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럴때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도 이정도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넘겨가고 있고. 사실, 나는 이제 이런 거 그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평범한 여성들의 쉽지 않은 삶.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자꾸 태클 걸리는 삶.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좋을듯하다. 오래전 알라딘이라면, 이런 책이 나왔을 때 머릿속에서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사람들 떠올리며, 누구누구누구가 이 책 좋아할 것 같다, 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후훗, 이 책에 대해서라면 소설을 좋아하는 누구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굳이 타겟을 정하자면, 징구 좋아했던 사람, 러시아 소설 좋아하는 사람, 로맨틱 코미디는 영화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 정도가 되겠다. 음화화핫.



나는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너무 좋아서, 오호라, 좋군, 하면서 씐나는 마음으로 토카레바의 소설을 한 권 더 장바구니에 넣었다. 찾아 읽을 작가가 있다는 것은 몹시 짜릿해. 만세만세 인생만세다.




















그녀는 두 부류의 남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돈 많은 남자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은 아내한테 붙어서 살아간다. 그러면 여자는 둘이서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힘든 일이다. 반면 돈 많은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무례하며 결국은 아내를 버린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당나귀로 살 것인지, 자기를 마구 짓밟고 척추를 부러뜨려도 참고 살 것인지 선택은 자기의 몫이다. 물론 지조와 성공 두 가지를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잏는 법이다. <티끌 같은 나>- P96

니콜라이는 안젤라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돼요?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안젤라가 부탁했다.
"자기는 조금 있으면 스무 살이잖아. 앞으로 기회가 얼마든지 많지만 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알았어요……."
안젤라는 한숨을 쉬고 나서 그가 원하는 자세로 누웠다. 속으로는 ‘인도적 지원이라 치자. 적십자.‘라고 생각했다. <티끌 같은 나>- P129

레나는 마음속 깊이 니콜라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삶도 바다 위 두 개의 얼음 덩어리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었으며,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질 뿐이었다. 이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뛰어 건널 거리를 넘어섰다. 게다가 이젠 그들의 가정사가 담장을 넘어버렸다. 사실은 가장 속상한 일이었다.<티끌 같은 나>-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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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 정말 천재 작가 많죠. 정말 그래요.. 아 러시아란 무엇인가.... 무엇이 이렇게 소설 잘 쓰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인가... 암튼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동시대 여성이라 더 좋습니다요. 앞으로도 번역 많이 되면 참 좋겠어요-
전 지만지에서 나온 토카레바 단편집도 전자책으로 사놨는데요, 읽고 나면 좋은지 알려드릴게요. 뭐 당근 좋겠지만 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3 11:40   좋아요 2 | URL
너무 좋아요, 잠자냥 님. 인생이 뜻대로 살기 힘든 거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기에 끔찍한 범죄가 끼어들진 않잖아요. 잔인한 폭력을 보여주는게 아닌데도 여성들에게 삶이 그 자체로 후려칠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거라서 너무 좋아요. 토카레바 알게된 건 잠자냥 님 덕입니다, 감사해요! 그렇지만 그런 잠자냥 님 서재를 내가 찾아냈고 내가 즐찾했고 내가 리뷰를 읽었고 내가 책을 샀지. 결국 제가 잘나서 이런 책을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세!! 앞으로도 잠자냥 님 서재 자주 방문할테니 좋은 책 읽고 리뷰 많이 많이 써주세요. 저는 토카레바를 알게 되어서 씐나요. 소설은 정말 짱이에요. 소설이 최곱니다. 저도 지만지에서 나온 것까지 같이 살까, 하다가 일단 눈사태만 사려고 합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20-09-23 11:46   좋아요 0 | URL
아 미쳐 증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났어 증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3 11: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잘난척 대마왕입니다. 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