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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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머리라고 놀린다고 했다. 내가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단어에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언니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되풀이했다. 귤머리. 그런 단어가 있냐고 되물으니까 말 그대로 머리가 귤같이 노랗다고 해서 귤머리란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조카는 언니를 닮아서 머리카락 색깔이 옅었다. 이건 우리 집 내력인데, 언니뿐만 아니라 우리 자매들은 모두 머리카락 색깔이 옅다. 어두운 데서 보면 그냥 짙은 갈색인데 햇빛을 받으면 빛바랜 갈색이다. 자매들 중에서는 특히 내가 제일 심해서 어느 동네 미용실에 가도 염색한지 얼마나 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하튼 반 친구들 눈에는 조카의 머리색깔이 튀었는지 귤머리라는 해괴하고도 직관적인 신조어를 만들어 놀려대는 모양이었다. 타고난 머리색을 어쩌랴 싶지만 아이에게는 그게 꽤 큰 스트레스였는지 잔뜩 울상이었다. 이모도 저 만할 때 친구들이 그렇게 놀렸느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난감했다.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민감하게 찾아내서 집요하게 배척하는 것일까? 때로는 어른들보다도 아이들이 더 무정하고 잔인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노골적이지 않아서 그렇지 어른들도 그러지 않은가? 세 사람만 모여도 파벌이 생기고 왕따가 나온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 자체로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가 아니면 내쫓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야. 그렇게 설명하면 귤머리 아이는 조용히 납득할까? 원래 그런 거라고.

 

착한 쥐들이 사는 마을에 하얀 아기고양이가 버려진다. 지미를 키우고 있는 더거씨는 차마 버려진 고양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평화로운 쥐 마을에 천적인 고양이가 업둥이로 거둬진 일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아기고양이 낸시는 너무도 귀여웠고 쥐 마을의 쥐들은 귀여운 낸시를 내칠 만큼 모질지 못한 착한 쥐들이었다. 그렇게 낸시는 자연스럽게 마을에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을 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보는 내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그림은 몽실몽실하고 텍스트에서는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감정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작가가 나쁜 건 하나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이야기 내내 뻔한 갈등이나 어디서 본 것 같은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다 할 위기나 스릴도 없다. 평화로운 쥐 마을의 유일한 고민거리는 다만 저가 쥐인 줄로만 알고 있는 낸시가 사실은 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충격을 어찌 감당하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뿐이다.

 

교육용 교재도 아닌 만화를 보며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화를 읽어주며 현실을 미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이야기가 마냥 기분 좋고 때로는 코가 찡하기도 했지만 조카를 생각하면 한편으론 속이 상했다. 얘야, 넌 낸시가 될 수 없을 거야. 네 친구들은 착한 쥐들이 아니거든. 물론 너도 귀여운 낸시가 아니지. 책을 덮으면서,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느낌 같은 미묘한 찝찝함이 있었다. 귤머리 아이에게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했을까?

 

내가 조카만 한 나이였을 때부터 귀에 인이 베이도록 들어온 말이 있다. 우리 딸 머리는 백만 불짜리 머리야. 나중에 할머니가 되서도 하얗게 세지 않을 거야. 아빠는 이미 마흔 전에 백발이 되셨으니 아빠를 닮은 내 머리가 나중에 셀지 안 셀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어린애도 아닌데 엄마는 염색하러 가시는 날마다 아직도 내게 그런 말을 하신다. 네 머리는 나중에 세지 않는 머리야. 그러니 얼마나 특별하냐고.

 

어릴 때 나는 그 애정이 담긴 도돌이표 멘트를 들을 때 마다 내가 다른 애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름이 나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오히려 가끔은 특별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다르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님을, 때로는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어린 조카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리라. 나중에 하얀 머리가 덜 난다는 말은 들은 들 아이가 기분 좋게 생각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귤머리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줬어야 했을까? 어쩌면 정답은 이 책의 254쪽에 있는 그 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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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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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들에 비해 형제가 많은 나는, 아니 우리는 대부분의 물건을 공유하면서 자랐다. 옷을 물려 입고, 가방을 돌려쓰고, 욕실용품이나 위생용품 같은 자잘한 소비성 생필품들은 물론 하다못해 주전부리마저도 같은 것을 소비했다. 엄마는 장을 보면 디자인 보다는 용량에 신경을 썼고, 우리는 그냥 있는 대로, 주는 대로 군말 없이 썼다. 우리들 중에 누구도 유별나게 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기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문제로 말을 보태는 것은 투정으로 부리는 것이고,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그런 무난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줄, 어른스러운 사람인 줄 알았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거다. 내면에서는 고집하고 싶은 것, 특별히 좋아하는 것, 절대로 뺏기기 싫은 것 같은 짙은 마음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더라도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강력하게 어필하지 않을 뿐인 거다. 왜 좋고 싫은 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을 보면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아이 같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나는 항상 어른스럽고 싶었고,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투정 부리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싫었다. 철없는 애라고 여겨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우라라가 책장에 깊숙이 숨겨둔 만화책 박스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장면이 나왔을 때, 휙휙 넘기던 책장을 잠시 멈췄다. 엄마도 모르고 소꿉친구도 몰랐으면 하는 우라라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중으로 만들어진 책장 안쪽 깊은 곳에 있다.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좋아한다고 말도 못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싸매놓은 마음이 어떤 건지 왠지 알 것 같았다.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드러냈을 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지가 말이다.

 

나는 우라라의 태도가 이해가 갔지만(그냥 저 나이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내심 안쓰럽고 뜨끔할 정도였다) 온갖 덕후들이 난무하는 요즘을 사는 사람들은 좀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덕질하기 좋은 세상이고 덕질이 곧 개성인 시절이니까 말이다. 너도 나도 개성을 뽐내고 있는데 왜 혼자서면 눈치를 보고 있을까 싶었겠다. 반면에 이치노이 할머니는 좀 더 대담했다.

 

예정에 없이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그저 예쁜 그림에 홀려 집어든 BL 만화책은 그녀의 일상에 새로운 활력이 된다. 남편과 사별하고 낡은 집에서 서예교실을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일상은 파도 없는 바다처럼 단조롭기만 했다. 그런 일상에 끼어든 만화책의 위력은 엄청났다. 친구가 생겼고, 날짜를 꼽아 기다리는 일이 생겼고, 젊을 때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됐다. 연재주기로 인생의 남은 날을 헤아려 보고 한권의 연재물이라도 더 보기 위해 무병장수를 다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그녀의 일상은 물론 그녀 자신도 크게 변화한다.

 

만화가 이치노이 할머니의 일상을 변화시켰듯이, 우라라도 이치노이 할머니를 만나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전보다 시야가 넓어졌고, 항상 타인에게 한 발짝 떨어져서 관조하는 듯한 태도에서 벗어나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고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특히 소꿉친구 츠무구와의 관계에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지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만화를 그리겠다는 마음을 먹고 창작자이자 판매자로서 이벤트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막연하게 남들보다 뒤쳐져 있다고 느끼며 심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아이가 한발 앞으로 내딛는 모양세라서 뭔가 찡했다. 뒷이야기는 다음 권에서 다뤄질 것 같지만.

 

좋아한다는 감정에 대해서 순수하게 그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여서 순수하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내심 부러워하기도 했고, 철없다고 매도하기도 했었다. 좋아하는 마음 한끝에는 쓸데없이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항상 공존했다. 남의 눈치를 살피는 성격 탓인가 싶어서 스스로에게 짜증을 느끼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데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거리낄 것이 없을까 싶은 것이다. 이 만화에서 마치 이치노이 할머니와 우라라가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막연하게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음이 있을 줄 알았지만 다음은 없다는 걸아는 사람의 차이일까?

 

우라라가 이치노이 할머니와의 회동 후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고는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나이면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아무 때나 지금 해도 괜찮은 거구나 싶어서’. 어쩌면 성격이 그렇다느니, 어릴 때부터 그래와서 그렇다느니 하는 건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냥 막연하게 다음을 기약하며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네글자는 영영 미래의 어느 날에 두고,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내뱉어지지 못한 마음이 뿌옇게 흐려져 이내 흩어져 버릴 때 까지 그냥 그렇게 무디게만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좋아한다고 말해보고 싶어지는 이야기다. 우라라와 이치노이 할머니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 같은 나는, 그 둘처럼 무언가를 강력하게 덕질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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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27
이마 이치코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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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권씩 나오는 백귀야행. 예약판매 걸렸을 때 아주 반갑게 구매했다. 좋아하는 시리즈라 열심히 사 모으고 있는데, 권수가 벌써 30권에 가까워지는지라 작가가 언제 완결을 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지만, 최대한 길게 길게 연재해 줬음 싶은 마음이다. 26권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고, 그 캐릭터가 27권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걸 보니 작가도 금방 완결을 내버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여튼 기대했던 27권이다.

5개의 일화가 실려 있는데, 앞에 3개의 에피소드가 26권 마지막 에피소드와 이어지는 거라 26권을 다시 꺼내 읽었다. 26권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에서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이지마 리쓰를 꼭 빼다 박은 사카모토 카이라는 어린애. 리쓰처럼 쓸데없이 능력이 뛰어나지만 곁에서 지켜주고 인도해줄 보호자가 없는 탓에 요마에 속절없이 휘둘려지는데, 그 때문에 의도치 않게 이이지마 일족에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 사카모토 카이가 결국 리쓰와 연결되면서 안 그래도 험난한 주인공의 인생에 혹이 더 들러붙게 됐다.

 

개인적으로 시리즈 중간 중간 소개되는 이이지마 가규의 이야기들을 참 좋아했는데, 그때 양념처럼 소개됐던 이이지마 집안의 사정이 메인스토리에서 다뤄진다. 이이지마 집안의 저주받은 능력으로 인해 생이별했던 가규의 유일한 혈육 이이지마 미오와 그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가규는 누나인 미오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류를 끊고 세대가 바뀌도록 남보다 못하게 지내왔다. 손자인 리쓰 대에 와서는 완전히 연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소름끼치는 가족의 비밀도 드러나고 이래저래 복잡하고 충격적인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이이지마 카이를 잇는 (그보다 더한) 새로운 트러블메이커가 등장했고, 리쓰가 과연 그의 보호자가 되어줄 것인지 스승이 되어줄 것인지 혹은 그의 의지대로 계속 도망 다닐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의 전개가 흥미 진지해 졌다.

 

호법신을 잃은 리쓰의 수난은 한층 심해졌고, 아오아라시의 비중은 미미해 졌다. 리쓰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라 강력한 방패가 생겼으면 싶은데 작가님은 리쓰를 고생시키는 게 좋은 건지 아오아라시를 잘 활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건 좀 아쉬운 부분이다. 권수가 늘어날수록 이형의 것들로 인해 사람이 해를 입는 것을 넘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나가고, 사람이 저지르는 악행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권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하며 읽었다.(전편도 무섭기는 했는데..)

 

여튼, 리쓰는 자연스럽게 5학년이 되었다고 한다. 작가가 졸업은 시켜줄 생각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지만, 리쓰가 졸업하고 대학원도 가고 직장인도 될 때까지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다음 권은 좀 더 빨리 만나봤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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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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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나누면 배가 되고, 불행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는 하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보건데 행복을 나눈다고 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불행을 나눈다고 불행이 반절이 되진 않더라. 환절기라 부쩍 코도 맹맹하고 목도 칼칼한 것이 감기가 오는 것 같다고 무심히 한마디 던졌다가 나 아는 누군가는 감긴 줄 알고 약국 약으로 몇 주를 버텼는데 알고 보니 간염이었다더라. 그래서 병원에 며칠을 입원을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부지 아는 친척 누구의 며느리는 감긴 줄 알았는데 급성 백혈병이어서 손도 못써보고 갔다더라. 그런 얘기를 들었다. 생각보다 가까운데서 온갖 불행이 만연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물건은 나눈다고 반절이 되진 않는다.

 

명일이라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오빠들 언니들이 저녁에 거실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는데, 나는 낄 주변머리가 없어서 조용히 방에서 김영하의 단편집을 읽고 있었다. 지난달에 미용실에 머리하러 갔다가 서점에 들러 아무생각 없이 집어 들고 나온 책이라 단편집인줄도 몰랐는데, 표제작인 오직 두 사람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날 머리하며 재밌게 읽고는 한동안 던져놓은 책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미국으로 날아간 남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잔망스런 여직원의 덫에 걸린 사장의 푸념을 읽다가 문득 바깥에 귀를 기울이니, 아기를 못 낳는 그 언니는 결국 이혼을 했다더라 는 소리가 들린다. 미혼모 얘기를 읽다가 그런 소리가 들려와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이쪽은 소설이고 저쪽은 현실인데 소설 같지도 현실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나를 잠시 헷갈리게 해서 현실에서 붕 떠버리게 만들었는지 에구, 결국 그렇게 됐구먼해버렸다. 뻔한 통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무덤덤하다가 이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뒤표지에 문구. 우리는 모두 잃으며 살아간다. 여기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그 이후의 삶이 있다.”

 

김영하의 소설은 몇 권 읽어본 것이 다이지만,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한다. 어느 날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만나는 얘기나 바닷가를 거니는데 모래에 묻혀 목만 내밀고 있는 남자를 만나는 얘기 같은 것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데 묘하게 현실인 것 같은 상황과 그 상황에서 예상 밖의 행위로 대처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유쾌했다. 어쩌면 내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친 어떤 상황들, 황당하거나 신기하거나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는 일들이 지나쳐 흘러가는데, 작가가 그 일들을 붙잡아 여봐란 듯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신의 장난은 어떠한 희망도 갖질 못하고 미래조차도 거세된 청년들을 이야기 하고, 아이를 찾습니다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 사는 소시민을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 무자비한 전개는 읽는 사람마저도 힘이 빠지게 할 정도로 잔인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침표가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 같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수렁 속에 내몰렸습니다. 가 아닌 그들은 그렇게 수렁 속에 내몰리는데…….이런 느낌 이었다는 것.

 

하필이면 신의 장난이 마지막 이야기여서 다 읽고는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작가의 말을 읽었다. 나는 왠지 수십 년을 벽만 보다가 득도한 노승처럼 해탈한 듯 개운한 기분이 됐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때는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 그 말이 위로가 됐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면 마치 인생이 고민덩어리인게, 삶이 고달픈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그럭저럭 불평 없이 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다 누군가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말 그래도 행운을 얻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하나같이 고달픈 게 아니었나, 싶어서 누군지도 모를 존재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불행을 들으면 그나마 나는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남이 힘들다고 내가 힘든 게 덜해지는 게 아니고, 쟤가 잘됐다고 내가 기쁠 일은 딱히 아니라는 것. 행복이든 특히 불행이든, 함께 할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다는 걸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우연히 행복하고 우연히 불행한데, 그건 오롯이 본인의 몫이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리는 그걸 그저 담담하고 고독하게 견뎌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다.

 

쟤들은 저렇게 좋은데 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보다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구나가 사실은 더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아는 것 말이다. 삶은 덜 억울해 하고, 덜 괴로워하고 다만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뜻밖에 위로가 됐다. 하지만 너무도 무참한 이야기들이 있어 두 번은 읽지 않을 것 같아 책은 언니에게 선물했다.

 

 

 

 

접어놓은 문장들.

 

 

다들 충고들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 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39. 오직 두 사람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업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71. 아이를 찾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줄줄이 다가왔다 뒤로 사라지는 가로등 불빛들의 흐름을 보았다. 가로등들은 그가 하마터면 살 수도 있었을 인생처럼 보였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인아와 결혼해 살아가는 인생이 지나갔고, 사체 유기에 가담해 인아의 공범이 되어 길에서 경찰만 마주쳐도 벌벌 떠는 인생도 지나갔고, 겨우 의식을 회복한 남편을 인아를 대신해 죽인 뒤 살인범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도 지나갔다. ‘불륜 주부, 내연남과 공모, 남편 살해 후 실종 신고같은 신문 기사의 제목도 떠올랐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하자 비로소 인아의 삶이 떠올랐다. .... 그러나 이제 와서 인아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104. 인생의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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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클릭 매입 중고 가방 (구매금액 환불, 책 20권까지 포장 가능) 알라딘 중고 상품 포장팩 2
알라딘 이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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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 시켰는데 한 개에 케이블타이가 붙어있지 않아서 곤란했습니다.
그리고 최대 20권 포장 가능입니다. 두꺼운 책 몇 권 넣으면 아무리 우겨넣어도 열 댓권 정도밖에 포장이 안돼요. 구매하실때 참고 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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