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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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잠깐 읽기 35]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 책이름 :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 글 : 김선주
- 펴낸곳 : 삼인 (2009.5.18.)
- 책값 : 11000원



 (1) 교회와 우리 삶터


 우리 나라에 예배당이 많다고 느낀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제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하던 때가 처음입니다. 서울에 있던 작은아버지 댁에서 숨을 거둔 할아버지 주검을 충남 당진에 있는 시골집 산등성이로 어른들이 힘겨이 상여 메고 올라가던 그날 밤 늦게 버스를 타고 인천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른 어른들은 모두 지치고 힘들어 곯아떨어지셨지만, 저는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 어두운 밤길을 창밖만 내다보면서 왔습니다. 그때 스쳐 지나간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만, 깊디깊이 어두운 밤에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예배당 빨간 십자가가 몹시 많았던 일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저승사람으로 바뀐 할아버지 생각이 겹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무렵 학교 선생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 그리고 밤마다 빨간 불을 켜 놓는 모습도 보기 나쁘다’ 하고 읊조렸기에 그 말을 떠올리며 ‘그래, 선생님 말이 맞네. 교회 참 많네. 구역질 나게 많네.’ 하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 그는 또 다른 설교에서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에서 지울 거야”라고 했다.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는 권리를 하느님이 아닌 목사가 행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교 섞인 설교의 테크닉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다. 어느샌가 목사가 하느님의 자리에 선 것이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그들의 정신과 영혼까지 장악하려는 권력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보다 눈에 보이는 담임 목사에게 신앙의 구체적 지향점을 찾으려는 신도들의 미숙한 정신을 목사가 올바로 인도하지 못할 때, 목회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 ..  (19∼20, 33쪽)


 그 어릴 적, 우리 나라 구석구석에 예배당이 아주 많음을 불현듯 느낀 뒤로는, 버스를 타고 어디 간다든지, 또는 부모님 따라 시골집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든지,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빨간 십자가 숫자를 세어 보곤 합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고등학생 때에도 고속버스에 탄 저는 빨간 십자가 숫자를 세곤 했습니다.

 요즈음은 깊은 밤에 골목마실을 하면서 십자가 숫자를 셉니다. 인천 옛 도심지인 중구와 동구에는 예부터 이름난 큼직큼직한 예배당이 꽤나 많습니다. 답동성당이나 내리교회나 내동성공회성당 같은 데야 워낙 오래되고 역사책에까지 이름이 실릴 만한 곳입니다만, 이런 예배당을 빼고도, 그리 높은 산이 있지 않은 인천임에도 언덕받이마다 예배당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당은 하나같이 동네를 굽어살핍니다. 요사이야 아파트가 예배당보다 높이 올라선다 하지만, 스무 해쯤 앞서만 하여도 예배당보다 높이 치솟은 건물은 하나도 없던 인천입니다. 언덕받이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달동네 지붕낮은 골목집을 우쭐우쭐 내려다보던 예배당이었습니다.


.. 자유당 정권과 유신, 5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반공 노선에 한국 교회와 목사들이 인권 탄압을 묵인하거나 도리어 앞장서서 주도한 것은 중대한 범죄다. 이것은 역사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짓밟는 행위다. 교회가 하느님의 정의에 배치되는 특정 집단이나 사상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이념과 정치 대립의 장에 깊숙이 개입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 1966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김준곤 목사에 의해 ‘대통령 조찬 기도회’가 시작됐다. 연중행사로 열리는 이 모임의 첫 번째 기도에서 김준곤 목사는,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2회 때는 “우리 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 하는가 하면 …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이 5ㆍ18학살의 공로로 대장 진급을 하던 날,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개신교 지도자 2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가 열렸다. 정진경 목사는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  (52, 57쪽)


 예전부터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징검돌 노릇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뿌리내리며 살던 사람들 집에서는 딸이며 아들이며 서울로 대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아 서울에서 홀살이방을 조그맣게 얻다가는 조금씩 전세값을 모아 아예 서울에 뿌리내리곤 합니다. 이러면서 인천은 늙은 엄마 아빠가 할매 할배가 되도록 조용히 남는 땅으로 바뀌어 갑니다. 서울과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탓이라 할 테지만, 아직 인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젊은이를 빼고 스스로 인천에서 오래오래 살아가고자 하는 젊은 식구는 그리 안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아니라 한다면. 젊은 식구는 그나마 인천 옛 도심지를 벗어나 부평이니 관교동이니 연수동이니 또 송도니 청라이니 하는 비싼 아파트(서울과 견주면 반값쯤 되거나 훨씬 더 싸지만)로 옮겨 갑니다.

 이러면서 저절로 ‘예전부터 많았던 예배당에 들락거릴 사람’ 숫자도 줄어들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많은 예배당 가운데 문을 닫는 곳은 아직 한 군데도 못 봅니다. 오히려 모두들 새로운 사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며, 골목골목 ‘새 신도를 환영합니다’ 하는 글월이 적힌 전단지가 뒹굴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계산동이나 부개나 부평 둘레에는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못지않은 엄청난 교회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때로는 더 크다 싶은 교회 건물마저 숱하게 지어집니다.


.. 재미난 사실 하나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결혼 적령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신앙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소망교회를 찾는 경우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망교회가 시쳇말로 ‘물 좋은’ 교회로 알려지면서 ‘집안 좋은’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위해 소망교회 청년부와 대학부에 등록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 참모진, 그리고 내각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이 소망교회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소망교회는 권력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  (138쪽)


 예배당 건물을 바라보면서 절집 건물을 생각합니다. 절집도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세우는 예배당 건물과 마찬가지인 종교 시설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지난날 불교 절집 또한 ‘우리들 낮은자리 여느 사람’ 주머니에서 돈을 거두어들이고 품을 그러모으면서 으리으리하게 건물을 올려세웠습니다. 이제는 불타고 없다는 황룡사 높직한 나무탑을 헤아려 보든, 다른 수많은 이름난 절집을 떠올려 보든, 그 절집을 짓는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짜야 했을까 싶어 적잖이 쓸쓸합니다.

 오늘날 큰 교회 건물이라면, 뭐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돈을 거둬내지는 않습니다.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주머니에서 돈이 나올 테지요. 그런데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왜 당신들 교회가 새 건물을 번쩍번쩍 높직높직해지는 데에만 돈을 낼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서? 예수님 믿음을 이 땅에 널리 퍼뜨리고 싶어서?

 그러면 하느님 사랑이란 무엇이고, 예수님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느님한테서 사랑을 받고프다면 어떤 사랑을 어떻게 받고 싶은가요. 예수님 믿음을 나누고프다면 어떤 믿음을 누구한테 어떤 매무새로 나누고 싶은가요.

 집없어 떠도는 숱한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이나 예수님 믿음을 받을 만한 몸이 못 되는지 궁금하고, 비싼 집삯에 허덕이는 낮은자리 사람들한테는 하느님 사랑이든 예수님 믿음이든 와닿을 구석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 한국 교회의 큰 어른 노릇을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악어의 눈물로 보이는 회개 이벤트를 한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다 … 국민들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실은 대국민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또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검찰까지 합세하여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무더기로 구속하는가 하면, 심지어 유모차를 끌고 나와 먹을거리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시민들까지 ‘아동학대방지법’이라는 엉뚱한 법을 들이대어 처벌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러한 위선은 그의 개인적 기질이나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신앙 패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쉽게 반성하고 또다시 쉽게 범죄하는 싸구려 감상주의식 회개가 한국 교회와 신도들에게 만성화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회개할 때는 눈물콧물 다 빼다가도 그 순간을 벗어나면 또다시 세속적 명리와 가치를 좇게 만드는 이벤트성 예배에 익숙한 사람이 장로가 될 때까지 경험한 영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  (224∼226쪽)


 서양사람 믿음인 천주교가 이 땅에 온갖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으면서까지 뿌리를 내리며 널리 퍼졌습니다. 천주교가 서양에서 보여주는 얄딱구리한 모습을 나무라면서 개신교가 태어났고 성공회가 태어났으며, 이러한 서양사람 믿음도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동안 죽어나는 꼴’을 가만히 살핀 다음 이 나라 권력자 눈치를 살피면서 살금살금 들어와서 두루 퍼졌습니다(이 이야기는 기독교회 역사를 갈무리한 책에 거짓과 숨김 없이 잘 적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네 개신교회가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이 천주교회가 어마어마하게 순교자를 내며 쫓겨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면서, 낮은자리 사람한테 참사랑과 참믿음을 나누는 흐름으로 들어와서는 같은 꼴이 난다고 깨달아 처음부터 권력자한테 빌붙는 꼴로 들어와서 오늘날과 같은 잘잘못을 낳게 되었다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이 모두 옳지는 않을 터이나 여러모로 잘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천주교회가 한국땅에 자리잡은 모습이랄지, 천주교회에서는 예배당에서도 설과 한가위 잔치를 한달지, 천주교회 집안에서는 내남없이 제사를 지낸달지, 신부와 수녀라는 자리는 남녀로 갈리지만 남녀 푸대접을 많이 가셔냈달지 하는 대목은 서양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천주교회를 나무라면서 새로 가지를 낸 믿음 가운데 개신교회만큼은 오히려 어마어마한 건물을 수없이 때려짓습니다(새로 짓는 천주교회도 돈을 참 많이 들이는구나 싶더군요. 서울에서 이문동성당 짓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찹니다). 하느님 사랑이나 예수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말을 길거리에서 일삼습니다. 한국 문화를 저주하다시피 깔보면서 장승과 솟대를 자르고 불사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 만세’ 같은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습니다. ‘미국 = 하느님’이 아니요, ‘하느님 = 미국’이 아님에도 목사님 스스로, 또 교회에 나가는 분들 스스로, 참사랑과 참믿음을 자꾸자꾸 잃거나 잊어 가면서 뒤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맙니다. 더군다나 몇몇 개신교회 파에서는 남녀 푸대접을 대놓고 저지르는가 하면, 이런 남녀 푸대접이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성경 구절을 대면서 둘러대기까지 합니다.

 사랑스러운 종교요 믿음직한 종교라 한다면, 아직 이 종교가 나누려는 아름다움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더 마음문을 열면서 따뜻하고 너르고 넉넉하고 살가워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수다스러운 종교가 아니라 반가운 종교여야 하지 않느냐 싶고, 떠벌이는 종교가 아니라 다소곳한 종교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굳이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할아버지’인 권정생 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교회가 없어도 됨을 깨닫고 너른 믿음을 나눈 ‘우찌무라 간조’한테서 여러모로 앎을 얻은 이오덕 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이이들도 교인이요 신도인데 나이 서른을 넘어갈 무렵부터는 예배당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분들은 당신 온삶과 삶자락으로 ‘종교가 걸어갈 길’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합니다. 말마디가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종교요, 글줄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종교라고 느낍니다.

 말끝마다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믿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성경풀이나 예수전 같은 책을 내지 않더라도, 우리가 온몸으로 기쁘고 신나고 살갑게 함께할 사랑과 믿음은 어디에나 그득히 있다고 느낍니다. 인도 캘커타에만 데레사가 있지 않고 한국땅 서울에도 데레사가 있으며, 제 삶터인 인천에도 데레사가 있습니다. 어떤 거룩한 사람 몇몇이 데레사가 아니라,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한테 데레사 넋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데레사가 되어야 합니다. 떠받드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 우러나는 하느님이요, 모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가 몸소 되어야 하는 예수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2)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라는 책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교회가 저질렀다는 잘못이 꼭 일곱 가지뿐일까 싶지만, 아무튼 일곱 가지 굵직하다는 잘못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잘못을 들어서 밝히는 글이 그리 깊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틀림없이 일곱 가지 잘못을 쏠쏠히 갈무리해서 차분히 풀어내기는 했지만, 지난 2007년부터 권력을 잡은 이명박 대통령 둘레 사람들 꾸지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이명박 장로로서 얄딱구리하고 안쓰러운 모습을 여러모로 보여주고 있는 탓에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에서도 이 대목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꾸짖는다고 할 테지만, 이렇게 하자면 책이름을 고쳐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한국 교회를 망가뜨리는 일곱 가지 죄악’쯤으로.


.. 전도가 안 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세속인들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부패한 교회 구조와 목회자의 오만한 권위주의 때문이다 … 한국 교회는 이단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와 부패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 성경과 복음의 진정성을 상실한 교회가 어찌 세상을 향해 예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  (42, 74, 135쪽)


 그렇지만,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은 이명박 장로 같은 분이 왜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지를 학자 된 글쓴이 나름대로 슬기롭게 풀어내어 보여줍니다. 이명박 장로가 처음부터 ‘나쁜 놈’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 틀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얄궂은 매무새에 길들도록 이끄는 나쁜 뿌리’를 단단히 뻗어 놓고 있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지난날에는 뜻있고 값있는 일을 해 오던 믿음직한 분들이 안타깝게도 ‘하느님 사랑’을 들먹이면서 뜻을 버리거나 값을 내팽개치는 까닭도, 당신들 스스로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교회 짜임새가 사람마다 제 믿음을 고이 간수하기 어렵도록 뒤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 설교자가 ‘학벌 권하는 사회’의 구조에 편승하여 학벌 없는 동료 목사나 청중들에게 열등감을 조장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가짜 학위를 과시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진짜 설교인지 의심이 드는 것은 학워 문제가 아니라 설교자 이전의 인간의 진정성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 때문일 것이다 … 부자들의 위장 전입과 불법적 투기 행위가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한국적 풍토와 관행상 상류층 인사들이 문서 조작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냥 눈감을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일반화된 사건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가 부동산 투기의 당사자라면 문제가 다르다. 특히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엄격한 윤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세속사회가 기독교인에게 요청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  (118, 203쪽)


 옆지기 식구들이 사는 일산에 와서 살펴보아도, 우리 집이 있는 인천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빨간 십자가를 봅니다. 서울 나들이를 할 때에도 빨간 십자가는 눈에 밟히도록 봅니다. 통계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한국땅에서 예배당 숫자는 구멍가게 숫자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방 숫자하고 견주면 아마 열 곱이나 스무 곱, 아니 백 곱쯤 예배당 숫자가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언젠가 헌책방 아저씨가 푸념처럼 이야기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책을 참 안 본다고. 종교책이 들어올 때에는 한 차 가득 들어오는데 팔리는 책은 거의 없다고. 교회에서 때때로 뭉치로 천 권 이천 권을 사들여 한쪽에 도서관처럼 꾸며 놓는다고 하지만, 다들 읽으려고 놓는 책이 아니라 자랑하려고 갖추기만 하는 책일 뿐이라고.


.. 세상은 교회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 때문에 망한다. 예수 이름만 있고 예수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 때문에 망하고 교회도 망하는 것이다 ..  (257쪽)


 우리보고 지키라 하는 ‘열 가지 다짐’ 가운데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다짐이 있습니다. 이 ‘우상’이 무엇인지는 알쏭달쏭하지만, 오늘날 한국땅 어디에나 지어져 있는 큼직한 예배당이야말로 우상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곤 합니다. 어두운 밤에도 빨간 불을 밝혀 놓아 전기를 먹는 십자가, 예배당 건물을 예쁘게 보이도록 밤새 켜 놓는 갖가지 등불이야말로 둘도 없는 우상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곱씹어 보곤 합니다. 늘 잠겨 있는 뒷간 문, 어느 나그네도 다리쉼을 할 수 없게끔 닫아건 예배당 문이며 울타리, 자전거 설 자리와 아이들 뛰놀 흙마당은 없어도 자가용 댈 자리는 넘쳐나는 앞마당, …… 우리는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과 따뜻한 믿음을 어떤 종교로든 나눌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때면 가슴 한쪽이 무겁고 서늘하고 먹먹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하고,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합니다. 작은 사랑이 아름다우며 작은 믿음이 아름다운 가운데 작은 교회가 아름답습니다. (4342.5.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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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0 21:21 
    평일에는 자주 찾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주말에는 사볼 수가 없다. 동네 편의점 등에서 갖다 놓질 않기 때문이다(아니면 너무 적게 갖다놓거나). 해서 오늘자 리뷰란에 실린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에 뒤늦게 올라온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삼인, 2009)에 대한 것이다. 김규항의 <예수전>과 함께 얼마전에 읽은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김영사, 2008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한무영 지음 / 그물코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06 - 착한 사람은 빗물을 받아 먹는다
 : 한무영,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 책이름 :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 글 : 한무영
- 펴낸곳 : 그물코 (2009.5.10.)
- 책값 : 1만 원


 (1) 비를 생각하다


 엊저녁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 멎습니다. 말끔하게 갠 하늘이지만 해는 나지 않습니다. 해까지 나면 빨래를 해서 널 텐데, 빨래를 해서 밖에 내다 넌다 하여도 비가 오나 안 오나 마음이 쓰일 만한 하루입니다.

 낮나절에 방송국에서 취재 나온 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참에 새로 낸 책을 읽고 방송 풀그림에 내보내고 싶다 하십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묻다가 마지막에 ‘요즈음 살면서 좋았던 일이 무엇이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갑작스런 물음이지만, 제 느낌 그대로 “아기 기저귀를 빨아서 햇볕 쨍쨍할 때 빨랫줄에 탁탁 털어서 널면 아주 짜릿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이 두루뭉술해서 밖에 내다 널지는 못할 듯하네요. 이따가 해가 살짝이라도 비춰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이야기합니다.

 방송국 리포터 되는 분은 ‘손빨래를 하는 짜릿함’이 가슴에 뭉클하게 느껴진다며, 당신께서 집으로 돌아가서 한번 손빨래를 해 보아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양말이라도 빨아 보시면 다르게 느끼실지 몰라요.” 하고 한 마디 붙입니다. 마음속으로 ‘참 고맙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 아이들에게 날마다 주스와 요구르트를 주면서 산성을 걱정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음료수보다 훨씬 산성도가 약한 빗물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은 왜일까요?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  (19쪽)


 비 갠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잠깐 휘 돌았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사진찍는 모임’ 분들이 서울에서 스무 분 남짓 인천을 찾아왔습니다. 이분들이 오기 앞서 먼저 슥 돌았고, 제 일터인 도서관으로 잠깐 돌아와서 몇 가지 볼일을 본 다음 다시 이분들과 어울릴 텐데, 빗물을 머금은 골목꽃은 한결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다른 날에도 빗물 머금은 골목꽃과 골목풀은 더욱 싱그럽다고 느꼈습니다. 낡은 스티로폼 상자도 버리지 않고 잘 간수하여 꽃그릇으로 쓰는 골목 이웃인데, 비가 오면 큰 통을 골목 한켠에 놓아 두고 빗물을 받곤 합니다. 집에서 수돗물을 호스로 이어 물을 주는 분들도 많지만, 빗물을 받아 물을 주는 분도 제법 많습니다.

 큰 통에 받은 빗물은 꽃이 먹는 밥이 되기도 하지만, 골목길을 쓸고 닦을 때에 쓰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비가 오면서 저절로 골목길 물청소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물청소가 되고 며칠 지나면서 자동차들이 내뿜고 흩날리는 온갖 먼지로 다시 더럽혀지면, 이 더럽혀진 골목을 씻어내는 데에 쓰인다고 할까요.

 한 동네에 온삶을 바쳐 살아온 골목 이웃들은 으레 빗물을 받아서 씁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당신이 처음 태어나거나 자라던 시골마을에서도 마땅히 빗물을 받아서 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떨어지는 빗물을 아깝다고 여겼으며, 이 통 저 그릇 온통 마당에 내놓고는 빗물을 받느라 부산했다고 생각합니다. 하기는, 아파트가 아니고서야 어느 골목집이든 예나 이제나 빗물을 받느라 바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인천 골목길은 ‘서울로 올려보낼 물건을 만드는 공장들’마다 내뿜는 먼지와 연기 때문에 퍽 매캐하고 먼지가 많다 하여도.


..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심 거리는 어디나 할 것 없이 온통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된 도로뿐입니다. 풀 한 포기 자라거나 흙 한 줌 날리는 땅을 보기가 힘든 것이 우리 나라 도시의 모습입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도시의 홍수 피해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그 빗물이 포장도로 밑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하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쳐 홍수 피해를 더하는 것이지요 … 나무가 클수록 뿌리가 깊듯이 건물이 높을수록 지하도 깊어지겠지요. 깊어질수록 지하층 방수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흔히 사용하는 공법은 지하 벽면 둘레를 막고 지하수를 한 곳에 모아 뽑아내 하수도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에 건물이 한두 채입니까. 거의 모든 건물에서 이런 식으로 지하수를 뽑아내 버리니 지하수위가 내려가고 하천이 메마르며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하수라인은 도시에서 가장 깊은 건물의 바닥과 같은 높이가 되어 버립니다. 즉 도시의 모든 지하수위가 떨어지는 것이지요. 도시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눈에 보이는 스카이라인을 해치는 것은 신경을 쓰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수라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  (33, 67쪽)


 요즈음은 아기를 돌보느라 빗길 자전거질은 잘 안 합니다. 빗길을 신나게 달리다 자칫 고뿔이라도 걸리면 아기를 돌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다 아기한테 고뿔이 옮을 수 있고요.

 빗길을 한참 달리면 자전거도 망가집니다. 빗길을 달린 다음에는 자전거에 묻은 흙탕을 잘 닦고 말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빗속을 자전거로 달리는 맛이란 맑은 날 달리는 맛하고 사뭇 다릅니다. 빗속을 우산을 받고 거니는 맛하고 빗속을 맨몸으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거니는 맛하고 사뭇 다르듯이.

 생각해 보면, 우리 형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우산을 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뽀르르 달려가 우산을 받쳐 주기라도 할라치면 걸음을 재게 놀리며 우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냥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저도 우산을 안 챙긴 날은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방에 든 책까지 적신 적이 잦지만, 책도 말리고 몸도 말리고 옷도 말리면 그만입니다. 어쩐지 비가 올 때에는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느냐고 몸으로 느꼈다고 할까요. 형한테 옮았는지 모르지만.


.. 댐을 높인다면 얼마나 더 높여야 하며, 그때 지역주민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하천의 본류에만 댐을 만들면 하천 이외의 지역이나 지천에서 일어나는 작은 규모의 하수도 침수는 또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 많은 지자체들이 하천을 복원할 때 청계천을 본보기로 삼고 싶어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천을 복원하고 관리하는 데는 민과 관이 힘을 합하여 돈이 적게 들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60∼61, 82쪽)


 나중에 신문배달 일을 할 때에는 비를 새삼스레 느낍니다. 자전거 타고 신문을 돌리는데 우산을 받고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 몸은 옴팡 젖어들어도 신문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장마철만 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느 날보다 두 시간씩 일찍 일어나서 두 시간씩 늦게 일이 끝나 죽을맛이었고, 신문사지국에는 비 냄새로 가득했는데, 맑은 날 신문 돌리던 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비오는 날 신문 돌리던 일은 이제까지 하나도 안 잊힙니다.

 새벽 네 시까지는 비소식이 없어 느긋하게 돌렸는데 여섯 시 즈음부터 갑자기 쏟아져서, 애써 돌린 신문이 죄 젖는 바람에 다시 돌린 일. 지하에 있던 신문사 지국에 물에 잠길 뻔한 일. 지국장 님 댁을 비롯해 이문동 반지하집이 모조리 물에 잠겨서 지국장 님 댁에 있던 가구며 옷이며 지국으로 옮겨다 놓고 대피하던 일. 허리춤까지 잠긴 물길을 자전거로 헤치면서 신문을 돌리던 일. 비가 오면 가뜩이나 신문으로 무거운 자전거가 브레이크도 잘 안 들어 비탈길에서 내려오며 조마조마하던 일. …….

 옆지기가 아기를 배기 앞서 둘이 장대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한 시간 남짓 골목마실을 하던 일도 떠오릅니다.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면서도 빗길을 느끼며 걷는 골목 맛은 다른 그 어느 날 느끼던 골목 맛하고 견줄 수 없었습니다. 온몸 가득 빨려들고 스며드는 빗줄기로 몸과 마음과 눈을 한꺼번에 씻어내곤 했습니다.
 





 (2) 물을 생각하다


 이달부터 옮겼는데, 우리 살림집과 도서관이 깃든 오래된 건물은 수도가 샙니다. 이리하여 물값이 삼사만 원 훌쩍 넘게 나오곤 했습니다. 집임자는 줄줄줄 새는 물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달삯에서 이 애먼 물값을 덜어 주지도 않습니다. 고쳐 주기는커녕, 물값을 덜어 주기는커녕.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인가 싶으면서도, 돈이 많아서 이 모양이라기보다 사람된 길을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싶었습니다. 참 사랑을 나누고 참 믿음을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랴 싶었습니다.

 당신 사는 아파트에서 물이 샌다면 어찌 했겠습니까. 그 애먼 물값이 어찌 되는지 얼마나 가슴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물값만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 물값이야 내주지요 뭐. 사만 원? 아주 짜증스러운 값이지만 내주지요 뭐. 그렇지만, 이 물값보다도 ‘애써 수도국에서 걸러낸 물이 아무 보람 없이 버려진다’는 데에서 안타깝고 슬픕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전기로 수도물을 끌어와서 흘려버리는 일하고 똑같잖아요. 아무 데에도 안 쓰고 흘려보낼 물을 뭣하러 수도국에서 걸러내어 수도관을 타고 흐르게 합니까. 물 자원이 아깝게 버려지는 일을 그치게 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밖에는 물 한 모금 없어서 목말라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건물임자는 떼부자이면서도 ‘새는 물관’ 고치는 몇 푼에 돈을 들이지 않으니, 달삯을 얹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손을 쓰나요.


.. 빗물 이용은 빗물이 더러워지기 전에 받아서 사용하자는 것이고, 빗물 ‘재이용’은 더러워진 빗물을 정수 처리한 다음에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더러워지기 이전의 빗물을 이용하는 데는 거의 돈이 들지 않습니다 … 우리 나라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 물 관리를 잘 못하는 나라라고 해야 맞습니다 … 환경부의 관련법은 수질이나 물 절약과 관련된 문제들을 중심에 놓고 다루고 있지만, 가뭄이나 산불 방지, 홍수는 다루지 않습니다. 건교부의 관련법에서는 홍수만을 위주로 다룰 뿐, 하천 환경을 좋게 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특별법 역시 자연재해만을 한정시켜 다루고 있지요. 그것과 연관된 다른 사안들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  (29∼30, 37, 53쪽)


 저는 늘 손빨래를 합니다만, 손빨래를 하면 물을 아주 조금만 써도 넉넉합니다. 비누거품 헹군 물을 잘 갈무리해서 걸레를 빨아도 되고, 새로 나온 빨래를 담가 놓은 다음 애벌헹굼을 할 때에 쓰면 됩니다. 그렇게 애벌헹굼을 조금씩 하면서 새 빨래 비누거품을 가시고, 세벌이나 네벌헹굼쯤 될 때에 새 물을 받아서 헹굽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벌이나 네벌쯤 되는 헹굼물은 다시 갈무리해서 다음 빨래를 할 때에 씁니다. 어떻게 보면 버려지는 물이 하나도 없는 셈이라 할 텐데, 이렇게 헹군 물로는 씻는방 바닥이나 벽을 닦은 다음에 개수구로 흘려보냅니다. 또는 씻는방 거울을 닦는다든지.

 정 몸이 힘들다면 세탁기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힘들지 않으면서 세탁기를 쓰는 사람은 죄를 짓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물을 허투루 내버리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더욱이, 기계 아닌 우리 몸을 써서 빨래를 하면 손발 운동이 착착착 잘 됩니다. 따로 헬스클럽 같은 데에 돈 갖다 바치면서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헹굼물로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고 집치우기를 하면 더더욱 운동이 잘 됩니다. 집에서 빨래 한 가지만 하여도 우리 몸에는 군살이 붙지 않아요. 여기에다가 자전거로 일터나 학교를 오간다면 우리 몸매는 아주 날렵하고 훌륭히 가꿀 수 있을 테지요.

 저는 자전거를 타니 자전거를 닦습니다만, 차를 닦는 분들은 어마어마하게 물을 써대며 차 껍데기를 번쩍번쩍 빛나게 합니다(자전거를 닦을 때에는 물이 거의, 아니 한 방울도 안 듭니다). 그런데 차 껍데기는 왜 번쩍번쩍 빛나도록 닦아야 하나요. 비오면 알아서 닦이는 차 껍데기 아닌가요. 애먼 물을 따로 들여서 써야 하나요. 차 껍데기를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고, 우리는 수도물을 얼마나 많이 써야 하나요.


.. 빗물을 모으고 관리하는 이유는 내 필요와 목적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을 위해, 즉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만일 내 집 지붕에 떨어진 빗물을 모으지 않으면, 하류에 있는 다른 사람 집은 넘치는 빗물로 잠겨 버릴 것입니다 ..  (49쪽)


 우리 나라는 기술이나 과학이나 또 무엇무엇이나 거의 ‘가장 앞(최첨단)’을 달린다고들 합니다. 온 나라에 새로 짓는 아파트를 보면 갖가지 전자시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시설 가운데 ‘전기 없이 쓸’ 수 있는 시설은 무엇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기름 없이 쓸’ 만한 시설은 한 가지라도 있는가 알쏭달쏭합니다. 계단을 타는 사람도 없는데 20층 30층까지 계단을 놓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옥상이든 벽이든 창문 어디에든 햇볕을 받아들여 전기를 뽐아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집집마다 들어갈 전기까지는 아니라 하여도 승강기나 골마루 등불쯤은 햇볕전지판으로 갈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이라는 책에도 얼핏 나오지만, 아파트 옥상에 ‘빗물 모음통’을 마련해, 집집마다 뒷간 물 내리는 데에 쓴다면 물이며 자원이며 전기며 한껏 줄이거나 아낄 수 있습니다.


.. 우리 나라는 여름에 잠깐 집중해서 비가 오는데 여기에 맞춰 크고 비싼 시설을 만드는 것이 과연 좋은 모습일까요? … 대개, 계속해서 물에 잠기는 지역에 거대한 빗물 펌프장을 만드는데 이때 돈이 수백억 원이나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을 들인 시설을 일 년에 며칠이나 사용합니까? … 비워 두는 날이 많은 댐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댐을 짓기 위해 살던 곳이 물에 잠기게 된 주민들의 원망을 듣습니다 … (117, 131∼132쪽)


 그렇지만 나 몰라라처럼 되어 있습니다.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짜여 있습니다. 내 돈 내가 쓴다는 생각으로 굳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맙니다. 아예 등을 돌리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나요. 귀를 막아 버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데 어찌 손짓 발짓 하나요. 돈이 넘쳐서 펑펑 쓴다는데 어떻게 말리는가요.
 





 (3)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이라는 책


 서울대학교에서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로 일하며 빗물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한무영 님이 책 두 권을 한꺼번에 펴냈습니다. 하나는 《빗물을 모아쓰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이고, 다음 하나는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입니다. 한무영 님은 그동안 《수돗물의 미생물학》과 《WHO 음용수 수질 가이드라인》과 《정수시설의 종합설계 및 유지관리》와 《하수와 우수의 관리를 위한 환경친화적 기술》 같은 책을 펴내 왔습니다.

 저는 이분이 해 온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빗물을 살피는 학자가 있음도 처음 알았는데, 한무영 님이 낸 책 두 가지를 읽으면서 ‘지구 물 문제’에서 빗물 문제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겠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빗물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은 물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이며, 물을 제대로 알아갈 때 우리 삶터를 좀더 또렷하게 받아들이거나 알아챌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빗물이 깨끗한 물인지, 깨끗하지 않다면 왜 깨끗하지 않은지, 빗물이 지저분하다면 왜 지저분한지, 그리고 지저분하면 얼마나 지저분한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살아왔다고 느꼈습니다.


.. 서울대학교에 새로 지은 기숙사에는 200톤 규모의 빗물 저장 시설을 본보기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 5개월 동안 날마다 6톤 정도의 물을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1000톤의 물을 화장실 물로 사용해 수도요금을 크게 줄였습니다. 사무용은 1톤에 1100원을 부담하므로 달마다 22만 원으로 쳐서 5개월 동안 11만 원을 절약한 것이지요. 만약 이 물을 수도요금이 1.6배 정도 비싼 가정용으로 사용했다면 약 200만 원 정도 줄어든 셈입니다 … 수돗물을 아끼면 개인은 수도요금을 적게 내는 이득이 있는데, 사회는 더 큰 이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즉 빗물을 이용하면 댐의 취수량이 줄고, 물을 정수 처리하는 양이 줄어 그 비용 또한 절감되며, 운반비용 역시 줄일 수 있습니다 ..  (86∼87쪽)


 오늘날 삶터에서는 무엇이든지 ‘자원’이라 하고, 자원은 ‘관리’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정부에서는 사람도 ‘자원’으로 다루려고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으로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놓고 적잖은 사람들이 거세게 나무랐지만 말마디 나무람으로 그치고 더 크게 나아가지 못했으며,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이름이야 어떻게 붙든 큰 일은 아닙니다. 얄딱구리한 이름이 붙어 있더라도 교육 행정을 옳고 바르게 할 수 있으면 되니까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닦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스레 바라보고 껴안고 어깨동무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터전을 세우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을 자원으로 여기며 다루는 우리 나라는 교육 기틀을 제대로 다스리고 있는 나라라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부터 사람답게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 사람 아닌 숱한 자원은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즐기고 돌보고 가꾸는 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 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83밀리리터 정도인데 대부분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름에 전체 강수량의 약 35퍼센트인 400억 톤의 빗물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지요. 이 아까운 빗물만 잘 모아 두어도 섬과 산간 지역의 물 부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반면 독일은 연평균 강수량이 700밀리리터이지만, 평소에 독일사람들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비가 일 년에 걸쳐 고르게 오기 때문이며, 이를 충분히 모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물은 늘 넉넉하게 흐르고 지하수 또한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요. 독일의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쓰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입니다 ..  (42쪽)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들 하루하루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매무새를 돌아봅니다. 여느 사람들 집부터 일터까지, 학교와 관공서까지, 골목과 큰 찻길까지, 우리들 살림살이는 어찌 이루어져 있는가 돌아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와 마을을 어떻게 추스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독일에서는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쓰는 모습이 아주 ‘흔한 삶으로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독일사람은 빗물 받아서 쓰기에서만 ‘훌륭한 삶매무새’를 보여주지는 않을 테지요. 다른 자리에서도, 다른 삶자락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매무새를 보여주고 있을 테고요.

 그리고, 우리 나라는 빗물 받아서 쓰기에서만 젬병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는 다른 자리에서도, 다른 삶자락에서도 젬병입니다. 거의 날마다 터지는 비정규직 문제나 이주노동자 문제만 보아도 쉬 알 수 있습니다. 입시지옥을 보아도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돈에 따라 계급이 갈리고, 가방끈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사회 얼거리를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빗물을 알뜰히 받아서 쓰기 앞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먼저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빗물이야 마땅히 알뜰히 받아서 쓰고자 애쓰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4342.5.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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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할아버지 사계절 그림책
장주식 글, 최석운 그림 / 사계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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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런데 ……
 [그림책이 좋다 64] 장주식+최석운, 《강아지똥 할아버지》



- 책이름 : 강아지똥 할아버지
- 글 : 장주식
- 그림 : 최석운
- 펴낸곳 : 사계절 (2009.5.1.)
- 책값 : 9800원


 (1) 돌아가신 넋을 기리는 일이란


 2007년 5월 17일, 그러니까 꼭 나흘이 지났습니다만, 이날은 어린이문학을 해 온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날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지 벌써 이태가 되었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할아버지 이름은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또렷하게 마음과 머리에 새겨 놓습니다. 앞으로 우리들 이름은 하나둘 잊힐 테지만, 할아버지 이름은 더욱 또렷이 살아남으리라 봅니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니요, 할아버지가 써낸 책이 많이 팔려서는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 ‘이름 안 알려진 여느 사람’ 마음자리 그대로 살아가면서 우리 이야기를 조곤조곤 글로 남기면서 즐거이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 《강아지똥》이나 《몽실 언니》나 《하느님의 눈물》 들을 높이 추어올립니다만, 할아버지 삶과 삶자락과 삶결을 헤아린다면, 추어올려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렇게 추어올려야만 비로소 참뜻이 살아난다 생각한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데,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당신이 거룩하거나 훌륭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 삶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당신 삶을 고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곰삭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할아버지라 해서 안 아프지 않으며 안 힘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올 때면 으레 들려주던 “내 대신 아파해 달라”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고무호스를 몸에 끼워 오줌을 빼내야 하는 아픔을 여러 열 해에 걸쳐 견디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란 섣부른 엄살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 몸에 꽂는 고무호스 때문에 아프지만, 당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남과 북으로 갈리며 미워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 총을 들이밀거나 칼부림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서로 돈을 더 움켜쥐며 빼앗으려고 주먹다짐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도무지 아파할 일이 없을 듯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대고 더 몸부림치고 더 발버둥치고 더 용을 쓰다가는 제풀에 겨워 고꾸라지고 자빠지고 엎어집니다. 그러면서 울부짖습니다. 정작 아파 죽을 노릇인 사람은 홀로 골골대고 있는데, 돈 때문에 이름 때문에 힘 때문에 또 뭣 때문에 아프다는 까닭을 대며 시골집 단칸방 할아버지한테 찾아와서 이야기를 여쭙니다.


.. “베지 말아요! 이 대추나무를 베지 말아!”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어. “허 참.” 사람들이 톱질을 멈추고 혀를 끌끌 찼지.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꼭 끌어안고 버티니 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결국 대추나무는 살아남았지.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 ..  (10쪽)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마냥 답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아파하건 이름 때문에 아파하건 힘 때문에 아파하건 아픈 사람들이니까요. 몸뚱이는 더없이 튼튼하고 주머니는 그지없이 두둑하면서도 마음은 가없이 가난한 이네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이이들한테는 다른 어떤 도움말보다 마음밥이 되는 도움말을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갈무리하면서 당신 삶을 꿰뚫는 아픈 생채기를 들추고 헤집고 쑤시면서 적바림하는 이야기꽃으로 태어나도록 했습니다. 





 《꽃님과 아기양들》이니 《사과나무밭 달님》이니 《까치 울던 날》이니 《벙어리 동찬이》이니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이니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니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이니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니 《바닷가 아이들》이니 《점득이네》이니는 이와 같이 새빛을 얻었습니다.

 아파할 까닭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 몸에 깃든 아픔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끼면서도 내 몸이 얼마나 아프냐고 다시금 생각하지만, 아파 죽겠다고 까무러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나이에 꼴까닥 하고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은 이렇게 아프다 하여도 안 죽고 더 오래 살고 있으니 당신 몸에 찾아와 떨어지지 않는 아픔이란 참말 보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다시금 힘을 내어 《무명저고리와 엄마》이니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이니 《우리들의 하느님》이니 《한티재 하늘》이니 《깜둥바가지 아줌마》이니 《밥데기 죽데기》아나 《비나리 달이네 집》이니 《죽을 먹어도》이니를 써내거나 고쳐 냅니다. 마지막으로 《랑랑별 떼떼롱》을 내놓고 나서는 손을 놓으셨습니다만, 할아버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느꼈다면 아무런 글줄을 적어 내려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신 스스로 아픈 가운데, 당신마냥 아프다 하는 숱한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있던 까닭에, 내 아픔과 사람들 아픔을 곰곰이 되새기고 들여다보면서 당신 마음을 달래고 이웃사람 가슴을 달랠 이야기보따리를 주섬주섬 여미어 냈구나 싶습니다.


.. 할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밝고 우스운 말도 참 잘 했어. 그런데도 슬픈 이야기를 많이 쓴 건, 할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였어. 지구 저쪽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났다거나 어린아이들이 포탄에 맞아 다쳤다는 기사를 보면 할아버지는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곤 했지. 죽어가는 동물이나 식물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했어. 사람들이 욕심껏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쓰느라 동물들과 식물들 몫을 다 빼앗는다고 말이지. 할아버지는 ‘나라도 덜 쓰며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헤진 옷 한 벌도 몇십 년 동안 누덕누덕 기워 입었어 ..  (30쪽)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찾아뵌 2004년과 2005년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언제나 글로만 만나던 분을 두 눈과 온몸으로 부대낄 수 있다니 설레는 한편으로, 몸이 아파 고단한 분을 찾아가는 일은 썩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픈 할아버지를 귀찮게 할 마음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 몸은 어떠셔요? 오늘은 밥 맛있게 드셨어요?” 하는 인사 한 마디 나눌 수 있다면 할아버지도 가끔 말문을 트면서 “오늘 햇볕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든지 “집 뒤 나무에 열매가 가득 열렸는데 하나도 따먹을 수가 없어” 같은 이야기를 웃음어린 목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만나자’가 아니라, ‘책을 읽으며 마음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마주보며 마음으로 만나자’가 될 때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아도 좋고 마주보지 못한 채 책과 책으로 이은 만남으로만 남아 있더라도 좋습니다.

 두 번 찾아뵈며 찍어 놓은 사진 몇 장을 오랜만에 더듬어 봅니다(제가 찾아간 까닭은, 다른 분들이 찾아갈 때 할아버지 사진을 찍어서 남겨 놓아야 한다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진기자로 따라간 셈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당신 얼굴은 찍히고 싶지 않다고 넌지시 손사래를 치면서, 그보다는 다른 데로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이 머리를 써서 기막히게 만들었다는 ‘만년 빨래집게(굵은 전기줄을 알맞게 잘라서 꼬아 놓은 것)’를 찍으라는 둥, 박하풀을 찍으라는 둥, 주전자를 찍으라는 둥 ……. 





 그무렵뿐 아니라 다른 분(어른)들이 찾아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으레 비슷비슷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게 보면 안 돼요.” 하는 말씀을 자주 했는데, 동화 할아버지를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하게 볼” 구석이 없다기보다, 동화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며, 동네 할아버지와 매한가지인 사람임을 느끼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이 세월 저 세월 견디고 부딪히고 부둥켜안아 오면서 머리카락 한 올 두 올 빠지고 허옇게 세어 버린 다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곱씹습니다. 스스로한테 주어진 삶을 고맙게 사랑하고 반갑게 끌어안을 때에는 누구나 동화이든 소설이든 빛고운 문학을 맺을 수 있고, 굳이 책이라는 물건으로 담아내지 않더라도 이웃이나 식구나 동무하고 오순도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헤아립니다.


 (2) 권정생 할아버지를 말하는 그림책이란


.. 예순 살쯤 되었을 무렵에 할아버지는 세상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어. 그동안 동화를 여러 편 써 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을 좋아했거든. ‘몽실 언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황소 아저씨’, ‘비나리 달이네 집’ 같은 동화들이 다 할아버지가 쓴 이야기들이야. 슬프고도 아름다운, 뭐랄까 …… 말하자면 찬란한 슬픔 같은 이야기들이지 ..  (23쪽)


 권정생 할아버지 삶자락을 기리는 뜻으로 그림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강아지똥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 첫 책 이름이 《강아지똥》이고,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강아지똥〉이었기에 이처럼 이름을 붙였구나 싶습니다. 또, 다른 작품보다도 그림책 《강아지똥》은 아이들한테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넘기는 동안 ‘왜 강아지똥 할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강아지똥이 뭐 어때서? 강아지똥이 뭐 어떻다고?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서 자주 나오는 몇 가지 짐승이 그림책에 함께 나옵니다. 이를테면 강아지라든지, 토끼라든지, 누렁소라든지, 새앙쥐라든지. 그리고 난남이를 업은 몽실이까지.

 그렇지만 이 짐승들 모습이 그리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 나오는 그 강아지’ 같지 않습니다. 강아지라고 그렸으나 강아지조차 아닌 ‘도사견’으로 느껴집니다. 갑자기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무서운 얼굴이요 눈매요 몸집입니다. 토끼라 하면 으레 ‘흰토끼’를 그리는 우리들이 되었겠습니다만, 멧토끼가 이처럼 눈처럼 새하얀 토끼였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누렁소는 논밭을 갈며 굵은땀 흘리고 제 새끼 잃어 서글픈 누렁소가 맞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른들이 돈 놓고 돈 먹겠다 하는 싸움소가 아닌가 싶어 몇 발자국 뒤로 떨어지고픈 느낌입니다. 누렁소 등판에 올라탄 새앙쥐는 새앙쥐가 아닌 새끼돼지 같아 보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도 그릴 수 있’고 ‘저렇게도 그릴 수 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나오는 짐승들은 ‘그림 그리는 분들 생각과 눈썰미와 마음밭에 따라 다 다르게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그림책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강아지똥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번 판처럼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장주식 님이 말하는 대로 “찬란(燦爛)한 슬픔” 같은 이야기가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이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거듭 생각해 보아도,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맑은 눈물’과 ‘따뜻한 웃음’을 담은 ‘옆집 할아버지 살아온 이야기’였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과 동무 할매 할배한테까지도 구수하게 나눌 수 있는 글줄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우리가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하늘나라에서 느긋하게 쉬셔요. 할아버지네 엄마가 살고 있을 그 먼 나라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피눈물도 괴로움과 따돌림도 싸움도 없이 언제나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과 어깨동무만 있을 테지요.’ 하는 마음을 담아내려 한다면, 이참에 나온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어딘가 바람이 빠지거나 곁길로 샜거나 한눈을 팔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11쪽 그림을 보면, 권정생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베지 말라며 부둥켜안았다고 하는데, 옆에 붙은 글에는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라 되어 있으나, 11쪽 그림 어디에도 흉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부둥켜안은 자리가 톱날로 벤 자리라 가려졌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에 드러누운 할아버지 젊을 적 모습(5쪽) 또한 여러모로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일부러 엉성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 우듬지가 이 그림책과 같은 모습일는지 궁금하고, 할아버지 몸이며 발을 보면서 왜 이렇게 그리려 했을까 싶어 궁금합니다. 7쪽에 나오는 풀빛 새를 보면서도 깜짝 놀랍니다. 몸빛이 풀빛인 새가 있었던가요? 글쎄.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풀빛 깃털인 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었었는가요? 다른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책에 나오는 ‘복실이’란 강아지는 하나도 복실이답지 않아서 징그럽습니다. 그린이께서 ‘나라밖에서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셨는지 모릅니다만,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름 안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책입니다. 할아버지를 알고 있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되새기도록 이끌어 줄 그림책이며, 할아버지를 아직 모르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도 할아버지 따순 사랑과 믿음을 조곤조곤 보여주고 들려줄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이루는 글은 ‘글쓴이가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며 《어린이와 문학》이라는 데에 실었던 글’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기림글(추모글)로 기림책(추모 그림책)을 엮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책은 얼마나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릴 수 있을까요. 어느 대목에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림책 사이에 끼워진 쪽지(출판사에서 마련한 홍보쪽지)에는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에게 귀한 정신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 겁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 옳은 말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고마운 마음밥을 얼마나 받아먹으면서 책이라는 열매로 다시 꽃피워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좋은 책 하나 엮으려 했던 일꾼들한테 씁쓸한 말씀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책은 올해가 아니라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다음해가 아니라 그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이태가 되는 올해에만 만들어야 하지 않고, 세 해째 되는 해, 또는 열 해째 되는 해, 또는 스무 해째 되는 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섣부른 생각을 앞세우는 책이 아니라, 참된 마음에서 솟아나는 싱그러운 풀기운에 따라 즐거이 나누는 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4342.5.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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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쓴’ 책이지만, ‘가슴에는 안 남는’ 책
 [잠깐 읽기 34] 어슐러 K.르귄, 《날고양이들》



- 책이름 : 날고양이들
- 글 : 어슐러 K.르귄
- 그림 : S.D.쉰들러
- 옮긴이 : 김정아
- 펴낸곳 : 봄나무 (2009.4.15.)
- 책값 : 1만 원


 (1) 잘 쓴 작품이면서 ‘가슴에는 안 남는’ 작품


 지난날 《날개 달린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나 모두 나오지는 못했다고 하는 ‘어슐러 K.르귄’ 님 책이 《날고양이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옮겨졌습니다. 판이 끊어진 예전 책이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분이 많았을 테며, 르귄 님 작품은 널리 사랑받고 있는 터라, 이 책 《날고양이들》 또한 두루 사랑받는 작품으로 우리 품에 안깁니다.


.. 뭔가 생각하던 셀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는 좋은 손을 만나면 다시는 사냥 나갈 필요가 없다고 그랬어. 하지만 나쁜 손은 개보다도 못하다고 했어.” … 해리엇이 오빠 제임스에게 속삭였습니다. “야아, 아이들 손길이 따뜻하고 기분 좋아.” ..  (38, 49쪽)


 어린이책(판타지 동화)으로 갈래를 나눌 《날고양이들》은 책날개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르귄은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보석 같은 책을 썼다(퍼블리셔스 위클리)’라든지 ‘이 시대의 것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이야기, 타인과의 차이에서 오는 자긍심과 소외감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부드럽게 일깨워 주는 책(뉴욕타임즈 북리뷰)’이라든지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로 쓰여진 매력적인 책이다. 쉰들러는 섬세한 펜선과 수채화 기법으로 아름답고 진지한 판타지 속의 날고양이들을 보여 준다(북리스트)’라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이렇게 짤막하게 적힌 추천글이 아니더라도 《날고양이들》은 금세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이야기흐름이 빠릅니다. 글은 단출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양이’를 내세워 우리 삶터를 구석구석 살피거나 훑는 눈매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나와 남이 어떻게 다른가를 돌아보는 한편, 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삶터를 어떻게 이루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살며시 느끼게 합니다. 사람 스스로도 사람 삶터인 도시에서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있는 가운데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얕고 안타까운 발자국을 걱정하는 가운데, 우리가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은 누가 어떻게 찾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펼쳐 보입니다.


.. 하늘을 나는 얼룩고양이들을 처음 본 순간, 아이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철창에 가두거나, 서커스나 애완동물 쇼에 내보내거나, 실험실로 보내거나, 돈벌이에 이용하거나, 아예 팔아넘길까 봐 겁이 났거든요 ..  (55쪽)


 틀림없이 《날고양이들》은 우리한테 빛줄기 가득 담긴 구슬 같은 책이 아닌가 느낍니다. 우리 모습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앞날을 찬찬히 헤아리도록 이끄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홀딱 읽고 난 이 책을 다시 펼쳐서 살피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어, 벌써 이야기가 다 끝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뒤끝이 없는 깔끔한 작품이기는 한데 왜 이리 허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르귄이라고 하는 분이 굳이 ‘날고양이’라는 판타지로 이 작품을 써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판타지를 쓴다 하여 달라질 대목이 없으리라 느끼고,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그예 ‘걷기만 하는 사람’ 이야기를 펼친다 하여도 《날고양이들》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느낍니다.


.. “아아, 우리 아기 고양이는 떠나야 한단다. 아기 고양이가 무사하다는 것도 알았고, 너희들이 잘 돌봐 주리라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아기 고양이의 안전뿐이란다. 날개 달린 고양이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이 도시에는 없어. 얘들아, 그건 너희도 알지?” … 하늘 높이 날던 제인이 개들 가까이로 내려가면, 개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사팔눈이 될 때까지 짖어댔습니다. 꽤 재미있었습니다만, 제인은 아무 데서도 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인은 생각했습니다. ‘날개가 있으면 외톨이로 지내야 하는 걸까?’ 날개 달린 고양이 제인은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들은 날개가 있었지만, 날개 달린 고양이를 보고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올빼미와 매는 위험했어요 ..  (94, 163∼164쪽)


 문득, 만화책 《기생수》가 생각납니다. 만화책 《기생수》나 동화책 《날고양이들》이나 빼어난 생각힘으로 놀랍게 펼쳐내는 줄거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만화 《기생수》는 내 둘레 고마운 분한테 여덟 권 한 질(44000원)을 선물한 적이 있고, 앞으로도 그처럼 선물하고프다’는 쪽이지만, ‘동화 《날고양이들》(1권 마무리, 책값은 1만 원)은 굳이 선물해 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무엇이 두 작품을 이처럼 다르게 느끼게 하는지, 왜 두 작품을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 궁금합니다. 내 눈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작품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외곬로 기울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씹습니다.

 다른 이들은 ‘더없이 좋다’거나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책을 나 혼자 ‘그리 시덥잖은데?’ 하고 느끼는 마음그릇은 아닌가 곱씹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다음에 마음 한구석을 쩌렁 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책이었는걸요. 크게 쩌렁 울리지 않더라도 살짝 통통 울리지도 못한 책이었는걸요.


.. 제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왜 있는지 알아!” 셀마가 물었습니다. “왜 있는데?” 제인이 소리쳤습니다. “하늘을 날라고 있지요!” 제인은 곧장 하늘 위로 날아올라 두 번 옆으로 구르고, 한 번 앞으로 구른 다음, 잠시 날갯짓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알렉산더의 잔등 위로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 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는데, 왜 아무 데도 가지 않지? 어디로든 날아가서 무엇이든 볼 수 있을 텐데?” 오빠 로저가 말했습니다. “에이, 제인, 너도 왜 그런지 알잖아.” 언니 해리엇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날개 달린 고양이를 발견하면, 동물원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오바 제임스가 말했습니다. “아니면 실험실 철창에 가둘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맏언니 셀마가 말했습니다. “남과 다르면 살기 어려워. 남과 다르면, 아주 위험할 때도 있어.” ..  (156∼157쪽)


 그러고 보면, 만화 《20세기 소년》을 보다가 뒷권으로 갈수록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짙게 느끼던 때하고 비슷합니다. 좀 묵은 작품이지만 《Z 마징가》를 보던 때에는 참 재미있다고 느끼며 여러 번 다시 보았고, 《초인 로크》나 《바벨 2세》 같은 작품 또한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보았습니다. 모두들 ‘터무니없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를 다루고, ‘놀랍다’고 느낄 만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나 글감이나 만화감을 ‘터무니없거나 놀랄 만한 데’에서 잡아챘다고 해서 ‘훌륭하거나 가슴 찡하거나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멋지거나 좋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뛰어난 붓솜씨를 보여준다고 해서 뛰어난 그림이 되지 않는 셈입니다. 뛰어난 짜임새며 눈길로 잡아챈 사진이라고 해서 뛰어난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입니다. 글씨를 곱게 잘 쓴 글이라고 해서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는 셈이고요.


 (2) 가슴에는 안 남으나 ‘되새기는’ 이야기


 그렇지만 글쓴이 르귄 님은 우리한테 아낌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쉽게 놓치거나 언제나 잃고 있는’ 삶자락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사이사이 톡톡 건드리듯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 모두 곱게 잘 커 준 아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인 부인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남몰래 속을 태웠습니다. 이 동네의 환경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자동차 바퀴와 트럭 바퀴가 온종일 지나다녔습니다.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굶주린 개들이 어슬렁거렸습니다. 신발과 장화가 끝도 없이 걸어가고, 뛰어가고, 짓밟고, 걷어찼습니다. 안전하고 조용한 곳은 점점 사라졌고, 먹을 것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참새들은 오래 전에 다른 데로 이사갔습니다. 시궁쥐는 난폭한 데다 위험했고, 새앙쥐는 비쩍 마른 데다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 도시 비둘기 한 쌍이 먼지 구름을 보고 날아왔다가 한 마디씩 하고 날아갔습니다. “빈민가를 또 철거하는구나.” “이게 발전이란 거야.” ..  (12, 67쪽)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고,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다움을 지키는 길이란 아주 쉽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터전을 가꾸는 길 또한 참으로 수월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알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쉬워도 안 하는 일이요, 수월하여도 껴안으려 하지 않는 일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여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다 함께 뜻을 모아 할 수 있는데, 혼자서도 안 하고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할 마음조차 없는 일이기조차 합니다.


.. 보드라운 땅, 이상야릇한 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사 남매가 알던 땅은 포장도로, 아스팔트, 시멘트뿐이었습니다. 마른 흙, 젖은 흙, 죽은 나뭇잎들, 풀, 나뭇가지들, 버섯들, 벌레들, …… 이런 땅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냄새가 났습니다. 작은 샛강도 있었습니다 ..  (23쪽)


 어쩌면, 아무래도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르귄 님 작품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더없이 낯익으면서 쉽게 받아들여 읽을 수 있었는데, 언제나 이와 같은 매무새로 살아가고 있는 터라 굳이 이런 작품을 읽지 않아도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또한, 우리 둘레 여느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을 알고 있으나 ‘먹고살기 바쁜데 어떻게?’라고 핑계를 둘러대기에 바쁩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 작품조차 눈여겨보지 않고 가슴에 새기지 않습니다. 아예 읽을 마음조차 없어요.

 그러니, 이 작품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 하여도 허전합니다. 두루 읽히고 팔린다 하여도 씁쓸합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새책방 책시렁에서 새로운 책손을 만날 수 있다 하여도 허거픕니다.


.. 사라 (할머니)는 제인의 목에 감겨 있던 자주색 리본을 풀어 휴지통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저런 거 없어도 예쁘단다.” ..  (195쪽)


 출판사에서는 애써 펴내 주었고, 글쓴이 르귄 님 마음도 가없이 푸근하다고 느낍니다만, ‘판타지 옷’을 안 입어도 괜찮고 ‘이름난 작가 작품’을 우리한테 나누어 주지 않아도 괜찮으며 ‘깔끔하고 예쁘장한 작품’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투박한 글이어도 괜찮고 어설픈 그림이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모자라거나 어설픈 작품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어리숙하거나 얕은 눈길이라도 재미가 없지 않아요.

 길은 지름길로만 가야 하지 않으며, 반드시 가장 빨리 거쳐가야 하지 않습니다. 100미터를 10초에 끊어야만 하겠습니까. 초중고등학교를 차근차근 밟아 대학교를 네 해 만에 마무리해야만 하겠습니까. 무슨 자격증이 있고, 어떤 예쁜 얼굴과 몸매가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 스스로한테든 우리 어버이한테든 넉넉한 돈이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없어도 괜찮고, 외려 없으니 즐겁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지없이 깔끔하고 아름답다 할 만한 《날고양이들》가 아닌, 수수하고 곱지 않은 ‘길고양이들’이어도 반갑습니다. (4342.5.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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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님 책 가운데 내 책꽂이에 꽂힌 책을 살펴본다. 《장길산》이나 《모랫말 아이들》이나 《무기의 그늘》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들이 보이지만, 이런 책은 일찌감치 끈으로 묶어 구석진 자리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지 오래. 내 책꽂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황석영 님 책은 오직 하나, 1985년에 형성사에서 펴낸 《객지에서 고향으로》.

 묵은 책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닦아내어 오랜만에 펼쳐든다. 내가 이 책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만난 때는 1998년이니 열한 해가 지났다.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던 그무렵에도 황석영 님을 놓고 여러 말이 많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과 함께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우리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살며시 건네는 책이라고 느끼며 곰곰이 새겨 읽었다.


.. 구공탄은 연탄공장의 기계가 찍어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깊숙한 땅속에서 캐어져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처럼 단순한 사실을 연탄집게로 집어올릴 적에 단 한 번이라도 되새겨 본 사람들은 드물 것이리라. 마치 하늘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다는 도회지의 바쁜 월급장이의 깨달음처럼, 이 뒤늦은 고마움은 어딘가 슬프기까지 한 것이다 ..  (31쪽/1973년)


 나로서는 열한 해 만에 펼치는 책. 그러나 열한 해 앞서 이 책은 판이 끊어져 있었다. 1985년에 처음 나온 책이었으니 1990년대가 저물녘에는 판이 끊어질 만도 하지. 그런데 황석영 님 다른 책은 수없이 다시 찍고 거듭 찍고 새로 나오고 하는 가운데, 오직 이 녀석 《객지에서 고향으로》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왜일까? 왜 이 책은 되살리지 않았을까? 너무 옛날 옛적 이야기라서? 이제는 황석영 님 생각하고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아서? 스스로 내버리는 책이라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가는 황석영 님 삶이요 문학이며 생각이요 넋이라서?


.. 확실한 것은 그들이 파괴된 환경 속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인가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가 많이 누리는 게 있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돌려주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자각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보편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집단적인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야말로 진정한 근대화이며, 사회적 진보였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73쪽/1973년)


 빛바랜 갱지로 된 책장을 만지작거린다. 빛바랜 옛책에 담긴 이야기는 그야말로 예스런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오늘’을 살아가려는 황석영 님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지난날’을 살았다는 황석영 님을 내세우는 이야기는 되고, 훈장처럼 가슴에 달아 놓는 이야기는 될 터이나,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이웃하고 소담스레 나눌 이야기는 못 될는지 모른다.

 어쩌면, 황석영 님은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을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구경하기는 했어도, 당신 몸을 내맡겨 당신 둘레 가난한 이웃하고 ‘함께 살아가기’는 안 하지 않았을까. 낮은자리 이웃하고 손을 마주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뜨겁게 얼싸안거나 뒹굴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을까. 어느 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서 글만 쓰고 있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이 너머로는 손뼘 하나만큼도 넘어갈 뜻이 없지 않았을까.

 독재에 무너지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나쁜법에 옥죄이며 제도권교육에 목졸리는 가운데 사회 푸대접과 따돌림에 앓고 있던 사람들하고는 아주 ‘다른 곳’에서 살아가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돈에 밟히고 이름값에 눌리며 힘에 밀려난 사람들하고는 사뭇 ‘다른 나라’에서 지내던 황석영 님은 아니었을까.


.. 힘센 아이가 그네를 독차지하면 저 혼자 실컷 타도록 버려 두고, 그네에서 벗어나서 다른 놀이를 창조해 내자. 그 아이의 힘을 통해 이익을 보려 하지 말자. 제일 힘없는 꼬마를 잊지 말자. 그와 언제나 같이 있자. 그러는 가운데 구슬과 고리는 보배로 변할 것이다 ..  (99쪽/1983년)


 말이란,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모음이 아니다. 글이란, 손으로 끄적이는 기호모음이 아니다. 내 삶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말이요, 내 삶에서 샘솟는 외침이 글이다. 돈을 바라면서 할 수 없는 말이요, 이름을 바라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힘을 얻자고 할 수 없는 말이며, 한자리 차지하자면서 쓸 수 없는 글이다.

 사랑이 스미도록 하는 말이다. 믿음이 깃들도록 하는 글이다.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말이다. 믿음으로 껴안는 글이다. 나한테 있는 모든 힘을 바쳐 사랑스러운 손길을 내미는 말이고, 내가 낼 수 있는 젖먹던 힘을 용을 쓰듯 짜내어 나누는 믿음직한 몸짓이다.


.. [황석영] 어떤 형태로든 민중을 신비화하는 것에는 저도 반대합니다. 제가 해남에서 경험한 것이지만, 농민들이 어떤 때는 더 영악하고 현실에 순응적입니다.
[황지우] 우리가 병든 만큼 민중도 병들어 있어요.
[황석영] 그렇지만 민중은 운동의 힘줄입니다.
[황지우] 힘의 저장소로서의 민중에 대한 신뢰를 저도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운동에는 지식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야 합니다. 《장길산》에서의 김기와 같은 예외적 존재도 있지만, 대체로 선생님의 지식인에 대한 태도는 불신이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더군요.
[황석영] 제가 지식인을 혐오한다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저도 지식인의 한 종자인데요. 다만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  (188쪽)



 그런데 1985년에서 스물네 해를 훌쩍 지난 2009년에 다다른 황석영 님은 우리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시인 황지우 앞에서 “그들의 기회주의적 포즈가 싫었읍니다” 하고 힘주어 말하던 그 황석영 님은 사람들 앞에서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황석영 님 옆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있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있는가. 황석영 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웃으로 보이는가. 황석영 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동무로 보이는가.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다시 펼쳐 읽는 동안, 소설쓰는 황석영 님은 틀림없이 예나 이제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 어김없이 예나 이제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우리한테 건네는 말마디와 글줄은 똑같지 않다고 느껴진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탓일까. 내가 책을 제대로 못 읽은 탓일까. 책에 담긴 이야기가 거짓말이었을까. 책이란 세월이 지나면 빛이 바래고 슬어 버리는가. 흘러간 책에 담은 이야기는 쓰레기통에 내던져야 하는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이어오면서 우리한테 ‘참된 목숨 하나 고맙게 받으며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거룩한 사람 길’을 찾고 느낄 책이란 이 세상에 없는가.

 한숨 한 번 쉬고 물 한 잔 마시면서 《객지에서 고향으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인다. 둘레에서 적잖이 내다 버리기도 하고 불사르기도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차마 내다 버리지도 못하겠고 불사르지도 못하겠다. 오히려 더 꽁꽁 붙잡아 두고 간직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책을 내다 버리거나 불사를 때마다 이런 분들은 더더욱 말바꾸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며 핑계를 둘러댈 테니까. 뜬소리와 뜬생각과 뜬몸짓으로 우리 눈을 홀리고 귀를 어지럽힐 테니까.

 나는 《월간 조선》 1980년대치와 조갑제 님 책과 이문열 님 책, 그리고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책 옆에 황석영 님 책을 나란히 꽂아야겠다. (4342.5.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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