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성작가 읽기의 보강으로 딩옌의 <설산의 사랑>을 읽었다. 1990년 간쑤성 출생 작가. 본강의 마지막 작가가 츠쯔젠(1964년생)이어서(벌써 60대 작가다) 젊은 세대 작품을 읽고 싶었다. 단지 세대적 의미만 갖는 건 아닌데 딩옌은 중국 서북부 간쑤성의 소수민족(이슬람교를 믿는 둥샹족) 출신이어서 츠쯔젠과는 또다른 소수민족문학의 양상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강의에서는 두 작가가 (<어얼구나강의 오른쪽>과 <설산의 사랑>을 근거 삼아서) 각각 은유적 변방성(중심과의 양립불가능성)과 환유적 변방성(양립가능성)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변방성과 변방문학의 특질에 대해서 정리해본 것이 츠쯔젠과 딩옌을 같이 읽은 덕분에 얻은 성과다.

표제작 ‘설산의 사랑‘은 마전과 융춰,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마씨 집안 가게에서 일어난 화재로 점원으로 일하던 융춰의 오빠가 사망한다. 마씨 집안에서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가게의 전소로 형편이 되지 않자 일단 막내아들 마전을 융춰 집으로 보낸다. 일종의 볼모 내지 인간 담보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융춰가 할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집에 마전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둘은 불편한 사이이고 불평등한 관계다. 가해자-피해자이면서 채무자-채권자 관계여서다. 게다가 마씨 집안이 회교도인데 반해서 융춰네는 불교 신자다.

이러한 차이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 남녀는 이런저런 계기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가까워진다‘는 말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심리적 거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예술에 대한 공통의 관심(융춰는 티베트불교의 불화, 탕카를 그린다)을 매개로 둘은 무언의 교감까지 나누게 된다. 서로 종교가 다르지만 예술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와 이슬람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종교적 교리과 예술적 비전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하지만 교감과 융합은 여전히 예술에 한정된다. 아래 인용문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마전은 융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다가 멈춘다. ˝마전은 두 사람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뻗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설산의 사랑이란 설산에 가로막힌 사랑이다.

딩옌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건 한국어판(2025)이 처음인 듯싶다. 위화와 옌롄커의 추천이 중개자 노릇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중단편에 주력하고 있는 과작의 작가가 과연 두 걸출한 선배 작가의 기대대로 중국의 대표작가로 부상할 수 있을까. 짐작에 올해 루쉰상을 수상하느냐가 척도가 될 수 있다고 나는 강의에서 말했다. <설산의 사랑>(2023)과 그 이후작들이 4년마다 시상되는 루쉰상의 올해 후보작이 될 것 같아서다. 물론 위화처럼 옌롄커나 츠쯔젠과 달리 루쉰상 수상자가 아니어도 간판작가가 될 수 있지만, 그건 장편작가에게서나 기대해볼 수 있는 일이다. 딩옌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내가 여기 있다고 작업 환경에 구속받지 마세요. 예술은 자유롭게 표현해야 하는 거니까요."
융춰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조각상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푸른 연무가 피어올랐다. 마전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다시 멈춰 섰다. 융춰는 겉으로는 고집스러워 보여도 내면은 몹시 민감한 여자였다. 늘 침묵했고, 늘 자신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마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예술은 개성의 교류에서 비롯돼요. 예술에는 한계가 없고 예술 앞에서 사람들의 감정은 다 똑같아요. 마치..."
그는 잠시 생각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마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일을 하고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생명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과 같죠."
융춰는 그를 등진 채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과 대항의 기류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이성적인 의식보다 더 진실한 무언가가 마전을 지배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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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마지막 소설 <코스모스>(1965)를 어제 강의에서 읽었다.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네 편의 소설 가운데(소설로 한정하면 개정증보판까지 낸 한권의 소설집과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한권이 더 있다. 우리말로는 희곡집도 번역돼 있고 봄학기에 읽을 예정이다) <트랜스아틀랜틱(대서양 횡단)>(1957)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라 현재로선 <페르디두르케>(1937)와 <포르노그라피아>(1960), 그리고 <코스모스>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곰브로비치 소설의 전부다.

탄생 100주년 되던 해(2004년)에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작가여서 곰브로비치와의 만남은 이제 20년 남짓 되었다. 하지만 뭔가 오래된 듯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쿤데라의 에세이들에서 호명됐던 이름이어서일 것이다.쿤데라를 통해서 우리가 소개받은 3대작가가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브로흐와 함께 곰브로비치였던 것이다(모두 쿤데라 기준 중유럽 작가들이다).

거기까지가 읽기 전 곰브로비치라면, 읽은 후의 곰브로비치는 또다른 존재감을 뽐낸다. 쿤데라의 소개대로 가장 철학적인, 더 정확히는 문학과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만남의 사례가 되는 작가가 곰브로비치여서다(쿤데라는 사르트르와 비교하면서 곰브로비치의 오른손을 치켜올린다).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를(가령 형식과 미성숙의 대립이라는 주제) 이토록 흥미롭게 변주하면서 기발한 에피소드로 그려나간 작가를 또 떠올릴 수 있을까?(‘철학적인 작가‘로 1960년대 나란히 주목받은 보르헤스와 베케트가 비교될 만하다).

무의미 철자들이라고 할 <페르디두르케>와 달리 <포르노그라피아>와 <코스모스>는 정확하게 제목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세 작품이 삼부작으로 묶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만 따로 합본되기도 한다). 비톨트란 이름의 인물이 각각 조연 화자와 주인공 화자로 등장한다는 점도 연결고리다. <포르노그라피아>가 중년 남자들이 자기들의 고정관념(각본)을 젊은 남녀에게 억지로 들씌우려다가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다면(시간배경은 엄중하게도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3년의 폴란드다), <코스모스>는 무질서한 자연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려는 강박증적인 시도를 소재로 삼는다. 희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점도 공통점.

아래 인용은 이야기의 초반 화자(비톨트)의 형이상학적 강박이 노출되는 장면이다. 아직 학생 신분인 나(비톨트)는 부모와의 불화를 잠시 피하고자, 시험도 보류하고 폴란드의 여름휴양지 자코파네로 향하는데 도중에 역시나 상사와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처지에 휴양지에 온 푹스와 동행하면서 같은 숙소에 묵게 된다. 이들은 숙소에 이르기 전에 숲속에서 철사에 목 매달린 채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참새를 보고 놀란다. 그리고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궁금해한다. 이런 발단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 매우 궁금한가? 당신은 곰브로비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독자다...

달도 없이, 놀랄 만큼 많은 별들로 가득 채워진 밤하늘, 그별 무리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별자리들이 나타났다. 북두칠성, 큰곰자리, 그 별자리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내가 알지못하는 다른 별자리들 또한 중요한 별자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자취를 감춘 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선을 이어 가며 모양을 연결하려고 애써 보았다... 하지만 모양을 식별해 내고, 별자리를 그리는 일에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이곳에서도 또다시 너무 많은 대상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굴뚝과 파이프, 부서진 배수관, 처마의 돌림띠, 작은관목, 아니면 더욱 복잡하고 골치 아픈 조합체들, 이를테면 꺾어졌다가 사라져 버리는 오솔길이라든지, 그림자의 리듬과 같은 것들이 금방 나를 지치게 했다... 역시 여기서도 마지못해 형태와 패턴을 찾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겨웠고, 참을 수가 없었으며, 변덕이 났다. 그러다 문득 이것들이 내 주의를 끌게 된 궁극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의 뒤에‘ 혹은 ‘~의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의 ‘뒤에 있다는 사실, 굴뚝 뒤에 파이프가 있고, 부엌의 귀퉁이 너머에는 담벼락이 있고, 그건 마치...마치...마치… 카타시아의 입술이 레나의 작은 입술 뒤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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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바다‘의 셋째 권 <새벽의 사원>의 주인공은 환생자인 태국 공주 잉 찬이 아니라 앞선 두 권의 관찰자이자 조연 혼다 시게유키다.잉 찬은 혼다의 사랑의 대상이자 관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대상으로서 잉 찬은 혼다에게 보여지는 부분과 보여지지 않는 부분, 혼다가 볼 수 없는, 혼다의 시선 바깥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칸트 철학에서 현상과 물자체에 대응하겠다). 여기에 혼다의 딜레마가 있다(미시마 자신의 딜레마로 봐도 좋겠다).

혼다는 잉 찬에게서 궁극적인 것(비상하는 잉 찬)을 보고자 하나, 그가 볼 수 있는 건 그저 관음적 대상으로 전락한 잉 찬이다(사랑의 불가능성 공식의 미시마 버전이라고 하자). 이런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 혼다에 대해 미시마는 이렇게 적는다. ˝인식자의 자살이라는 의미가 혼다의 마음 속에서 무게를 가진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403쪽) <새벽의 사원>이 ‘풍요의 바다‘의 변곡점이라는 것은 ‘인식자의 자살‘이라는 화두가 무겁게 제시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혼다의 인식의 사냥개는 극히 기민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한도의, 보는 한도의 잉 찬은 거의 혼다의 인식 능력에 부합한다고 봐도 된다. 그 한도의 잉 찬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혼다가 가진 인식의 힘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잉 찬의 알몸을 보고싶은 혼다의 욕망은 인식과 사랑의 모순에 양다리를 걸친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이미 인식의 영역이고, 설령 잉 찬이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그때 책장 안쪽 빛의 구멍으로 엿본 순간부터 이미 잉 찬은 혼다의 인식이 만든 세계의 주민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보자마자 오염되는 잉찬의 세계에는 혼다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보지 않는다면다시 사랑은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상하는 잉 찬을 보고 싶으나 혼다가 보는 한도의 잉 찬은 비상하지 않는다. 혼다의 인식 세계의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한 잉 찬이 이 세계의 물리 법칙에 반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꿈속을 제외하고) 잉 찬이 벌거벗고 공작새에 올라타 날아가는 세계는 그러기 일보 직전에 혼다의 인식 자체가 흐림이 되고 티끌이 되어 하나의 미미한 톱니바퀴에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로 그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고장을 수리하고 톱니바퀴를 교체하면 될까? 그것은 혼다를 잉 찬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제거하는 것, 즉 혼다의 죽음을 뜻한다.
이제 분명한 점은 혼다의 욕망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 그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그가 없는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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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독본>은 미시마의 소설론만을 모아놓은 유익한 선집이다.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건 ‘풍요의 바다‘ 집필 시기에 별도로 연재한 ‘소설이란 무엇인가‘인데, 특히 <새벽의 사원> 탈고 직후에(1970년 초반쯤) 밝힌 소회는 그의 문학관을 잘 엿보게 해준다. 핵심은 문학(작품 내 현실)과 현실(작품 밖 현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소설가의 자유‘라는 것.

이 선택의 보류가 바로 ‘쓰는 일‘(소설쓰기)인데, ‘풍요의 바다‘ 마지막권 <천인오쇠>를 끝낸 날, 마침내 이 보류를 중단한다. 곧 선택의 자유를 행사한다(일본 자위대를 찾아 헌법개정을 위한 결기를 외치고 할복자살). 그런데 그 선택은 문학과 현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문학과 현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작품의 종지부를 찍으며 자신의 생에도 똑같이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미시마의 응답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명인 기질을 가진 예술가 이미지는 작품 내의 현실에 몰입하느라 작품 밖의 현실을 이탈하는 예술가의 모습이고, 앞에서 언급한 발자크의 일화는 미담이 된다. 그러나 두 가지 현실 중 어디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않고 두 현실의 대립과 긴장에서 창작 충동의 원천을 발견하는 나 같은 작가에게, 쓰는 일은 비현실적인 영감에 계속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자유의 근거를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 자유란 흔히 말하는 작가의 자유가 아니다. 내가 두 종류의 현실 중 어느 하나를 언제 어떠한 시점에서든 결연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의 감각 없이는 나는 계속 쓸 수가 없다. 선택이란 간단히 말하면 문학을 버리느냐, 현실을 버리느냐이며, 그 아슬아슬한 선택의 보류를 통해서만 나는 계속 쓰고 있는 것이며, 어느 순간 자유류 확인하면 비로소 ‘보류‘가 결정되고, 그 보류는 즉 ‘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자유도 없고 선택도 없는 보류라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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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앞서 나간 자들

6년 전 페이퍼다. 완독은 못한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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