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 할아버지 사계절 그림책
장주식 글, 최석운 그림 / 사계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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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런데 ……
 [그림책이 좋다 64] 장주식+최석운, 《강아지똥 할아버지》



- 책이름 : 강아지똥 할아버지
- 글 : 장주식
- 그림 : 최석운
- 펴낸곳 : 사계절 (2009.5.1.)
- 책값 : 9800원


 (1) 돌아가신 넋을 기리는 일이란


 2007년 5월 17일, 그러니까 꼭 나흘이 지났습니다만, 이날은 어린이문학을 해 온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날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하늘나라 사람이 된 지 벌써 이태가 되었다니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할아버지 이름은 잊히지 않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또렷하게 마음과 머리에 새겨 놓습니다. 앞으로 우리들 이름은 하나둘 잊힐 테지만, 할아버지 이름은 더욱 또렷이 살아남으리라 봅니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니요, 할아버지가 써낸 책이 많이 팔려서는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 ‘이름 안 알려진 여느 사람’ 마음자리 그대로 살아가면서 우리 이야기를 조곤조곤 글로 남기면서 즐거이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 《강아지똥》이나 《몽실 언니》나 《하느님의 눈물》 들을 높이 추어올립니다만, 할아버지 삶과 삶자락과 삶결을 헤아린다면, 추어올려서는 안 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이렇게 추어올려야만 비로소 참뜻이 살아난다 생각한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인데,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당신이 거룩하거나 훌륭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 삶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당신 삶을 고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미워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곰삭이기 때문에 쓸 수 있던 글월입니다.

 할아버지라 해서 안 아프지 않으며 안 힘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올 때면 으레 들려주던 “내 대신 아파해 달라”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고무호스를 몸에 끼워 오줌을 빼내야 하는 아픔을 여러 열 해에 걸쳐 견디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란 섣부른 엄살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당신 몸에 꽂는 고무호스 때문에 아프지만, 당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남과 북으로 갈리며 미워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 총을 들이밀거나 칼부림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서로서로 돈을 더 움켜쥐며 빼앗으려고 주먹다짐을 하느라 아파합니다. 도무지 아파할 일이 없을 듯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나대고 더 몸부림치고 더 발버둥치고 더 용을 쓰다가는 제풀에 겨워 고꾸라지고 자빠지고 엎어집니다. 그러면서 울부짖습니다. 정작 아파 죽을 노릇인 사람은 홀로 골골대고 있는데, 돈 때문에 이름 때문에 힘 때문에 또 뭣 때문에 아프다는 까닭을 대며 시골집 단칸방 할아버지한테 찾아와서 이야기를 여쭙니다.


.. “베지 말아요! 이 대추나무를 베지 말아!”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어. “허 참.” 사람들이 톱질을 멈추고 혀를 끌끌 찼지.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꼭 끌어안고 버티니 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결국 대추나무는 살아남았지.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 ..  (10쪽)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마냥 답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아파하건 이름 때문에 아파하건 힘 때문에 아파하건 아픈 사람들이니까요. 몸뚱이는 더없이 튼튼하고 주머니는 그지없이 두둑하면서도 마음은 가없이 가난한 이네들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이이들한테는 다른 어떤 도움말보다 마음밥이 되는 도움말을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갈무리하면서 당신 삶을 꿰뚫는 아픈 생채기를 들추고 헤집고 쑤시면서 적바림하는 이야기꽃으로 태어나도록 했습니다. 





 《꽃님과 아기양들》이니 《사과나무밭 달님》이니 《까치 울던 날》이니 《벙어리 동찬이》이니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이니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니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이니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니 《바닷가 아이들》이니 《점득이네》이니는 이와 같이 새빛을 얻었습니다.

 아파할 까닭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 몸에 깃든 아픔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끼면서도 내 몸이 얼마나 아프냐고 다시금 생각하지만, 아파 죽겠다고 까무러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나이에 꼴까닥 하고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당신은 이렇게 아프다 하여도 안 죽고 더 오래 살고 있으니 당신 몸에 찾아와 떨어지지 않는 아픔이란 참말 보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다시금 힘을 내어 《무명저고리와 엄마》이니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이니 《우리들의 하느님》이니 《한티재 하늘》이니 《깜둥바가지 아줌마》이니 《밥데기 죽데기》아나 《비나리 달이네 집》이니 《죽을 먹어도》이니를 써내거나 고쳐 냅니다. 마지막으로 《랑랑별 떼떼롱》을 내놓고 나서는 손을 놓으셨습니다만, 할아버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느꼈다면 아무런 글줄을 적어 내려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신 스스로 아픈 가운데, 당신마냥 아프다 하는 숱한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있던 까닭에, 내 아픔과 사람들 아픔을 곰곰이 되새기고 들여다보면서 당신 마음을 달래고 이웃사람 가슴을 달랠 이야기보따리를 주섬주섬 여미어 냈구나 싶습니다.


.. 할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밝고 우스운 말도 참 잘 했어. 그런데도 슬픈 이야기를 많이 쓴 건, 할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였어. 지구 저쪽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났다거나 어린아이들이 포탄에 맞아 다쳤다는 기사를 보면 할아버지는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곤 했지. 죽어가는 동물이나 식물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했어. 사람들이 욕심껏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쓰느라 동물들과 식물들 몫을 다 빼앗는다고 말이지. 할아버지는 ‘나라도 덜 쓰며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헤진 옷 한 벌도 몇십 년 동안 누덕누덕 기워 입었어 ..  (30쪽)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찾아뵌 2004년과 2005년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언제나 글로만 만나던 분을 두 눈과 온몸으로 부대낄 수 있다니 설레는 한편으로, 몸이 아파 고단한 분을 찾아가는 일은 썩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픈 할아버지를 귀찮게 할 마음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사랑하고 아끼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 몸은 어떠셔요? 오늘은 밥 맛있게 드셨어요?” 하는 인사 한 마디 나눌 수 있다면 할아버지도 가끔 말문을 트면서 “오늘 햇볕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든지 “집 뒤 나무에 열매가 가득 열렸는데 하나도 따먹을 수가 없어” 같은 이야기를 웃음어린 목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책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만나자’가 아니라, ‘책을 읽으며 마음으로 만나던 사람을 눈으로 마주보며 마음으로 만나자’가 될 때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아도 좋고 마주보지 못한 채 책과 책으로 이은 만남으로만 남아 있더라도 좋습니다.

 두 번 찾아뵈며 찍어 놓은 사진 몇 장을 오랜만에 더듬어 봅니다(제가 찾아간 까닭은, 다른 분들이 찾아갈 때 할아버지 사진을 찍어서 남겨 놓아야 한다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진기자로 따라간 셈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당신 얼굴은 찍히고 싶지 않다고 넌지시 손사래를 치면서, 그보다는 다른 데로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이 머리를 써서 기막히게 만들었다는 ‘만년 빨래집게(굵은 전기줄을 알맞게 잘라서 꼬아 놓은 것)’를 찍으라는 둥, 박하풀을 찍으라는 둥, 주전자를 찍으라는 둥 ……. 





 그무렵뿐 아니라 다른 분(어른)들이 찾아갈 때에도 할아버지는 으레 비슷비슷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게 보면 안 돼요.” 하는 말씀을 자주 했는데, 동화 할아버지를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하게 볼” 구석이 없다기보다, 동화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며, 동네 할아버지와 매한가지인 사람임을 느끼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이 세월 저 세월 견디고 부딪히고 부둥켜안아 오면서 머리카락 한 올 두 올 빠지고 허옇게 세어 버린 다 같은 사람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는가 곱씹습니다. 스스로한테 주어진 삶을 고맙게 사랑하고 반갑게 끌어안을 때에는 누구나 동화이든 소설이든 빛고운 문학을 맺을 수 있고, 굳이 책이라는 물건으로 담아내지 않더라도 이웃이나 식구나 동무하고 오순도순 나눌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헤아립니다.


 (2) 권정생 할아버지를 말하는 그림책이란


.. 예순 살쯤 되었을 무렵에 할아버지는 세상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어. 그동안 동화를 여러 편 써 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들을 좋아했거든. ‘몽실 언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황소 아저씨’, ‘비나리 달이네 집’ 같은 동화들이 다 할아버지가 쓴 이야기들이야. 슬프고도 아름다운, 뭐랄까 …… 말하자면 찬란한 슬픔 같은 이야기들이지 ..  (23쪽)


 권정생 할아버지 삶자락을 기리는 뜻으로 그림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강아지똥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 첫 책 이름이 《강아지똥》이고,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 〈강아지똥〉이었기에 이처럼 이름을 붙였구나 싶습니다. 또, 다른 작품보다도 그림책 《강아지똥》은 아이들한테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넘기는 동안 ‘왜 강아지똥 할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강아지똥이 뭐 어때서? 강아지똥이 뭐 어떻다고?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서 자주 나오는 몇 가지 짐승이 그림책에 함께 나옵니다. 이를테면 강아지라든지, 토끼라든지, 누렁소라든지, 새앙쥐라든지. 그리고 난남이를 업은 몽실이까지.

 그렇지만 이 짐승들 모습이 그리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에 나오는 그 강아지’ 같지 않습니다. 강아지라고 그렸으나 강아지조차 아닌 ‘도사견’으로 느껴집니다. 갑자기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무서운 얼굴이요 눈매요 몸집입니다. 토끼라 하면 으레 ‘흰토끼’를 그리는 우리들이 되었겠습니다만, 멧토끼가 이처럼 눈처럼 새하얀 토끼였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누렁소는 논밭을 갈며 굵은땀 흘리고 제 새끼 잃어 서글픈 누렁소가 맞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른들이 돈 놓고 돈 먹겠다 하는 싸움소가 아닌가 싶어 몇 발자국 뒤로 떨어지고픈 느낌입니다. 누렁소 등판에 올라탄 새앙쥐는 새앙쥐가 아닌 새끼돼지 같아 보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도 그릴 수 있’고 ‘저렇게도 그릴 수 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나오는 짐승들은 ‘그림 그리는 분들 생각과 눈썰미와 마음밭에 따라 다 다르게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그림책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강아지똥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번 판처럼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쓴이 장주식 님이 말하는 대로 “찬란(燦爛)한 슬픔” 같은 이야기가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이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거듭 생각해 보아도, 권정생 할아버지 작품은 ‘맑은 눈물’과 ‘따뜻한 웃음’을 담은 ‘옆집 할아버지 살아온 이야기’였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과 동무 할매 할배한테까지도 구수하게 나눌 수 있는 글줄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우리가 ‘권정생 할아버지 고마워요. 하늘나라에서 느긋하게 쉬셔요. 할아버지네 엄마가 살고 있을 그 먼 나라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피눈물도 괴로움과 따돌림도 싸움도 없이 언제나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과 어깨동무만 있을 테지요.’ 하는 마음을 담아내려 한다면, 이참에 나온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어딘가 바람이 빠지거나 곁길로 샜거나 한눈을 팔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11쪽 그림을 보면, 권정생 할아버지가 대추나무를 베지 말라며 부둥켜안았다고 하는데, 옆에 붙은 글에는 “밑둥치에는 톱날에 베인 흉터가 남았고”라 되어 있으나, 11쪽 그림 어디에도 흉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부둥켜안은 자리가 톱날로 벤 자리라 가려졌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에 드러누운 할아버지 젊을 적 모습(5쪽) 또한 여러모로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일부러 엉성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참나무 우듬지가 이 그림책과 같은 모습일는지 궁금하고, 할아버지 몸이며 발을 보면서 왜 이렇게 그리려 했을까 싶어 궁금합니다. 7쪽에 나오는 풀빛 새를 보면서도 깜짝 놀랍니다. 몸빛이 풀빛인 새가 있었던가요? 글쎄. 할아버지 동화 작품에 풀빛 깃털인 새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었었는가요? 다른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책에 나오는 ‘복실이’란 강아지는 하나도 복실이답지 않아서 징그럽습니다. 그린이께서 ‘나라밖에서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셨는지 모릅니다만, 이름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름 안 드높은 그림을 그리든, 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는 책입니다. 할아버지를 알고 있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 할아버지를 애틋하게 되새기도록 이끌어 줄 그림책이며, 할아버지를 아직 모르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도 할아버지 따순 사랑과 믿음을 조곤조곤 보여주고 들려줄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를 이루는 글은 ‘글쓴이가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리며 《어린이와 문학》이라는 데에 실었던 글’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기림글(추모글)로 기림책(추모 그림책)을 엮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책은 얼마나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릴 수 있을까요. 어느 대목에서 권정생 할아버지를 기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림책 사이에 끼워진 쪽지(출판사에서 마련한 홍보쪽지)에는 “강아지똥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에게 귀한 정신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 겁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 옳은 말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고마운 마음밥을 얼마나 받아먹으면서 책이라는 열매로 다시 꽃피워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좋은 책 하나 엮으려 했던 일꾼들한테 씁쓸한 말씀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만, ‘책은 올해가 아니라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다음해가 아니라 그 다음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이태가 되는 올해에만 만들어야 하지 않고, 세 해째 되는 해, 또는 열 해째 되는 해, 또는 스무 해째 되는 해에 만들어도 됩니다. 섣부른 생각을 앞세우는 책이 아니라, 참된 마음에서 솟아나는 싱그러운 풀기운에 따라 즐거이 나누는 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4342.5.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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