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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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글이 내 삶이 되어야 태어나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6] 곽아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12월 1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선 나무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발걸음을 늦추고 올려다보니,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조그마한 전구가 달린 줄을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날 저녁 다시금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걷던 몇몇 사람이 “이야, 예쁘다!” 하면서 ‘아직 불을 넣지 않고 전구만 달아 놓은 나무 모습’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12월 2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또 지나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광화문 둘레 나무들은 여느 때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사람들 담배 연기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십이월과 일월을 맞이할 때까지 ‘예수나신날 맞이 불밝히기’에 시달려야 합니다.


..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 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속 풍경으로 간직된다 ..  (머리말)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과 나무가 뒤집어쓴 전깃줄에서 눈을 뗍니다.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책에 눈을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서울에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일 텐데, 저로서는 서울에 쉴 곳과 마음 둘 곳과 사랑 나눌 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람한 건물과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과 끝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흙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없고 바람에 씨앗을 날리는 들풀과 들꽃이 내려앉을 땅이 없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구름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입니다. 버스 택시 짐차 오토바이 자전거 모두 몰려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다리로 느긋하게 오가면서 둘러볼 터전이 없는 서울입니다.

 서울마실을 다루는 책이 곧잘 나오고, 서울 시내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다니며 만난 예쁜 맛집과 멋집을 다루는 책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넓고 크며 사람 북적이는 서울에서 ‘책에 몇 군데 모아 놓아야’만 하도록 맛집과 멋집이 적은가요. 굳이 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 책에 담을 수 없도록, 어느 곳에 깃들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알찬 서울은 될 수 없는지요.

 엊그제 혜화동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인천과 견주어 안주값이 두 곱이 비싼 차림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킨 안주가 나왔을 때에는, 이 안주값이 인천과 견주어 두 곱이나 되지만 부피는 반이 안 되고 맛은 더 떨어집니다. 다시금 크게 놀랍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천과 견주어 이곳 서울 혜화동 술집 자리값은 몇 곱이나 비쌉니다. 제가 드나드는 인천 술집은 가게를 꾸미는 데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인테리어비로 몇 억이니 권리금으로 몇 천만 원이니 또 무엇무엇에 얼마니 하면서 들이붓습니다. 이렇게 들이부은 곳은 물건값도 높을 테지만 내어주는 밥상 부피도 작을밖에 없습니다.


..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토지)들을 뽑아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 간 권도 있다. 계집아이다운 허영심이 강했던 어릴 때는 여주인공 최서희에 끌렸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미인에다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머슴과 결혼하고 마는 여자 … 나는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남자를 지배할 줄 아는 것이 대놓고 으르딱딱대어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  (20, 112쪽)


 인천은 제 고향마을입니다. 그러나 제 고향마을이라 해서 다른 데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입니다. 예부터 인천사람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고, 으레 서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인천에 머물거나 남는다든지, 저처럼 서울로 나아갔다가 거꾸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바보나 멍텅구리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리보기로 여겨 버릇합니다. 한 번 서울로 나아갔으면 두 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없어야 하고, 인천에서 무슨 일거리나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을 인천에서 할 때와 서울에서 할 때에는 다릅니다. 받는 일삯이 서울에서 훨씬 높고, 받는 대접이 서울에서 훨씬 넉넉합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인천에서는 아무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작품을 그러모아 책을 내거나 전시마당을 마련하기는 벅찹니다. 그만큼 서울이 눈높이가 높다 할 텐데, 이렇게 서울만 홀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천은 인천다움을 잃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천은 부천다움을 잃고 수원은 수원다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광명에서 광명다움을 찾기 어렵고, 안양에서 안양다움을 읽기 힘듭니다. 과천에는 어떤 과천다움이 있을까요? 성남에는 무슨 성남다움이 있을는지요? 고양은? 파주는? 남양주는? 군포는? 안산은? 시흥은? 구리는? 김포는?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답고 어여쁘며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하게 반갑고 멋지며 믿음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 흐름을 돌아보면 사람이 사람값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맛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험성적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학교이름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학교를 다 마치면 은행계좌 크기로 차례를 매깁니다. 이러는 동안 옷차림과 자가용 크기와 아파트 넓이를 놓고 차례를 매깁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숫자가 되어 서로 치고박으며 죽도록 다툼질을 해야만 하는 터전입니다.

 이는 보수나 수구라는 쪽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질이 아닙니다. 진보나 개혁이라고 하는 쪽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툭탁질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듯이 ‘같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가 서로 엇갈린 모임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숫자는 나날이 늘고, 교사 대접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공무원이 여느 사람 앞에서 온몸을 바친다든지,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참 가르침을 펼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늘 한결같이 들을 길이 없습니다.


..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溫氣도 느껴 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54쪽)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


 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


 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


 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4342.1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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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책도 엉터리로 읽지만, 글도 엉터리로 쓴다. 내가 좋아하고 더러더러 만나는 번역가 형은 알라딘서재에 글을 바지런히 올리다가 '덧없는 댓글 다툼'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고 '제대로 된 흐름을 못 잡는 샛길 빠지기'인가를 느끼며, 그동안 올렸던 모든 느낌글을 지우고, 댓글을 다 막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번역가 형처럼 그런 '덧없음'을 알면서도 '댓글 막기'는 하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까닭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덧없는 댓글싸움을 벌이는 이들 스스로 부끄러운 노릇 아닌가? 왜 바보들은 스스로 바보인 줄을 깨닫지 못할까? 

 

이렇게 글을 쓰는 나는 바보이다. 나는 나대로 바보이고, 덧없는 댓글을 다는 이들은 그들대로 바보이다. 저마다 제가 꾸리는 삶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외곬로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삶에 따라 바라보는 매무새이다. 

 

자가용에 매여 있는 사람한테 자전거 이야기를 해 보아야 무엇 하리? 

국어사전 한 번 제대로 펼쳐서 꼼꼼히 읽고 새긴 적 없는 이한테 우리 말 이야기를 한들 무엇하리? 

책삶을 깊이 파헤치지 않는 사람한테 책 이야기를 들려준들 무엇하리? 

새책방과 헌책방과 도서관이 어찌 얽혔는가를 살피지 못하는 이한테 헌책방 이야기가 무슨 쓸모? 

우리가 먹는 밥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데, 무슨 생태고 환경인가? 

 

귀가 있으면 듣는다고 했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 얼마나 귀가 뚫려 있을까? 눈 안 달린 사람이 없을 텐데, 다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알라딘서재를 기웃거린다든지, 나 같은 책바보가 끄적이는 바보스런 글에 매달려서 왈왈 멍멍 컹컹 짖는 그 철없는 댓글싸움을 건다든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조선일보를 보며 스스로 멍텅구리가 되는 삶보다, 바보 최종규가 쓰는 글을 읽으며 '넌 참 바보로군' 하고 들먹이는 삶이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다. 

 

바보 최종규조차 칭찬할 만한 책을 내도록 애쓸 노릇이지, 댓글로 이러쿵저러쿵 해 보았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며칠째 '팔리 모왓'이 쓴 <잊혀진 미래>를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띄어쓰기 맞춤법 교정교열이 어마어마하게 엉터리이지만, 책에 담은 줄거리는 더없이 훌륭하다. 그런데, 지지난주인가 느낌글을 올린 <청춘을 읽는다>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교정교열을 놓고는 몇 군데 잘못을 빼고는 참 잘 엮었다. 그러나 줄거리에서는 몹시 안타까웠다. 

 

우리는 왜 겉꾸밈처럼 속가꾸기는 못할까? 우리는 어이하여 겉차림처럼 속다지기는 안 할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지만, 나는 보기 좋은 떡은 먹지 않는다. 속내가 좋은 떡이라야 먹는다. 보기만 좋은 떡은 빛깔과 냄새로도 엉터리인지를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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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즐기다
이자와 고타로 지음, 고성미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을 즐기는 내 삶은 아름답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8] 이자와 고타로, 《사진을 즐기다》



- 책이름 : 사진을 즐기다
- 글 : 이자와 고타로
- 옮긴이 : 고성미
- 펴낸곳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3.15.)
- 책값 : 11000원



 (1) 내 삶에 있는 사진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한테는 눈이 둘도 없는 보배입니다. 손목아지가 부러져도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지만, 눈이 감기면 사진도 그림도 영 부질없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그이한테 눈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사람 삶에서 눈이란 ‘본다’를 넘어서 ‘산다’를 나타내는 큰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 같은 피사체를 오랜 기간 동안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추어의 특권이다 ..  (127쪽)


 그러나 눈이 감겨서 아무것도 못 본다 하는 삶이라 해서 어둡다고만 느끼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제 눈은 활짝 뜨고 있으니 눈을 감은 나날을 생각조차 못할 뿐인데, 갑작스레 눈이 감기더라도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눈이 감기면 감기는 대로 내 삶을 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눈이 감기고 나면 눈이 감긴 삶으로 새롭게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이 감겼어도 저한테는 목숨줄이 있기 때문에 눈보다 아름다운 선물인 목숨줄을 될 수 있는 대로 튼튼하게 붙잡으며 가꾸고 싶습니다. 아픔과 생채기일 뿐이라 하더라도 악착같이 붙들면서 일구고 싶습니다.

 아마, 이렇게 악착스레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느끼겠지요. ‘악착스러움이란 무언가? 왜 난 이렇게 망가지면서까지 더 살아야 하느냐?’ 하고. 이처럼 느끼던 그때에는 ‘한 번 주어져서 즐겁게 누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이 삶인데 악착같이 매달리느라 정작 내가 기쁘게 맞아들일 웃음과 눈물을 놓치지 않았나?’ 하고 뉘우치리라 봅니다. 이와 같이 뉘우친 다음에는 ‘돈이 없을 때에는 돈이 없는 대로 잘 살아왔으니, 눈이 감긴 때에는 눈이 감긴 대로 잘 살아가면 되지 않나?’ 하면서 바야흐로 새 삶길에 눈을 뜨리라 봅니다.

 참말 이렇게 살아가리라 봅니다. 헤아려 봅니다. 생각해 봅니다. 어림해 봅니다. 느껴 봅니다. 이야기해 봅니다.


.. 내 경우만 하더라도 사진전 등에서 “어떤 사진을 살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면 평소의 평론가의 눈과는 달라진다 ..  (162쪽)


 한석봉 어머님은 캄캄한 방에서 떡을 썰었다고 하는데, 저는 캄캄한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세발이를 쓰지 않고 선 채로, 또는 벽에 기댄 채로, 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또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몇 초 동안 꼼짝을 않고 숨을 멈추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몇 초에 걸쳐 담아낸 사진은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아주 드물게 아무런 떨림이 없는 사진을 얻곤 합니다.세발이를 받치면 걱정없이 더 나은 사진을 더 많이 찍었을 텐데, 저로서는 세발이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세발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괜히 세발이까지 챙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사진을 찍는데, 떨림 사진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려 떨림 사진이 깊은 밤 사진에 걸맞지 않겠습니까?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는 깊은 밤인데, 밤을 잊고 새벽을 열며 신문을 넣고 우유를 넣는 사람이 있는 어두운 골목인데, 떨림 사진이란 스스럼이 없고 살가운 눈길이요 눈맞춤이 아니겠습니까?

 집에서도 몇 초 동안 사진기를 붙들고 있곤 합니다. 때때로. 드물게. 일부러. 아주 깊은 밤 곯아떨어진 옆지기와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3초나 5초쯤 사진기를 무릎에 받치고 찍습니다. 감도를 1600으로 맞춘 다음 두 장쯤 담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두 사람 모습이 사랑스러우니 깊은 밤나절 모습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한두 장쯤 남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뛰노는 아기도 사랑스럽고 칭얼대는 아기도 사랑스러우며 웃는 아기도 사랑스럽습니다. 아파하는 옆지기도 사랑스럽고 아픔을 씻은 옆지기도 사랑스러우며 아파 죽겠다는 옆지기도 사랑스럽습니다. 제 둘레에는 온통 사랑스러움투성이라, 저는 사진을 찍으며 언제나 사랑 한 점 톡 떨어뜨리듯 사진 한 장 찰칵 찍습니다.

 헌책방이 왜 꾀죄죄함입니까? 헌책방이 왜 칙칙함입니까?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는 왜 헌책방을 ‘낡아빠진 사라지는 곳’으로만 여깁니까? 도무지 언제까지 이런 고리타분하고 낡아빠진 생각으로 헌책방을 마주합니까?

 왜냐하면, 기자나 작가라는 이름을 걸친 이들은 헌책방 한 곳부터 이렇게 엉터리로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다른 자리 다른 사람 앞에서도 이네들 속내와 속알맹이와 속살과 속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다루든 경제를 다루든 운동경기를 다루든, 이들 속에 깊이 또아리를 튼 고갱이를 확 끄집어내야지요. 뽀얀 속살이든 때에 절은 속살이든 꾸밈없이 느끼고 받아들이고 삭여내어 당신들 슬기로움으로 보듬으며 우리 앞에 내놓아 주어야지요.

 우리는 사진 찍는 기계가 아닙니다. 자판기처럼 척척 찍어 대는 기계가 아닙니다. 쇠돈 한 닢 넣으면 좔좔좔 쏟아 놓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멋지구려 사진’을 판박이처럼 따라하는 못난이가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찾아야 할 우리가 아닙니다. ‘잘 꾸리는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나부터 좋아할 사진 한 장’을 찾아야 합니다.

 사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손에 쥔 다름아닌 나한테 있습니다. 나한테 있는 사진인데 나를 못 보고 있는 탓에 자꾸만 대학교를 떠돌고 사진교실을 떠돌며 인터넷을 떠돌다가 비싸구려 장비에 몸을 팔고 마음을 빼앗기며 바보 멍텅구리 얼간이 같은 사진기계로 굴러떨어집니다.


 (2) 무얼 즐기라는 《사진을 즐기다》일까?


 일본 사진평론가 이자와 고타로 님이 쓴 《사진을 즐기다》를 읽습니다. 얇은 책이기는 한데, 30분 만에 읽고 책을 덮습니다. 고작 30분 만에 다 읽어낸 다음 ‘내가 잘못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책을 펼치지만 더 읽을 만한 건더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이 삐었나? 내가 잘난 체를 하자고 이 책을 얕보는 셈인가?’ 하고 뉘우치면서 다시금 책장을 넘기지만, 207쪽짜리 이 책에서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열 줄쯤 찾기조차 힘이 듭니다. 더욱이 207쪽짜리 책이라 하지만, 부록과 찾아보기 따위가 꽤 길게 차지하며 빈자리가 많아서, 속알맹이는 160쪽을 조금 넘는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난주에 읽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하고 견줍니다. 이 책은 이 책대로 좋고 저 책은 저 책대로 좋습니다만, 알맹이가 없어 되읽지 못하도록 하는 사진 이야기라 한다면, 이 같은 사진책은 누구한테 이바지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밭에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한테? 사진밭에 발을 디딘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사진을 제대로 못 즐기고 있는 사람들한테? 사진밭에 오래 몸담고 있으나 잘난 척하고 젠 체하는 사진쟁이한테?


.. 사진전을 권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사진가들의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많은 경우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어쩌면 사진가는 그 우연마저 불러들이는 능력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  (16, 124쪽)


 《사진을 즐기다》라는 책이 허술하거나 모자라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책한테는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 책한테는 “사진을 즐기고 싶은 이한테”라든지 “사진나라에 들어오고 싶은 분한테”라든지 “사진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한테” 같은 이름이 어울리겠다고 느낍니다.

 새내기도 즐길 수 있는 사진이요 헌내기 또한 즐길 수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을 내걸며 얼마든지 당신 깜냥껏 ‘사진 즐김’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궁금합니다. 사진평론이라는 길을 서른 해 넘게 걸어왔다는 글쓴이는 무슨 마음으로 “사진을 즐기다”라는 이름을 내걸면서 ‘가벼운 입문서’를 내놓았을까요? 더욱이, ‘일본땅 사진 입문자 길잡이책’으로 나온 이 책을 한국말로 옮겨 한국 사진쟁이 앞에 선 보인 출판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사진을 즐기다”가 아닌 “사진 평론을 즐기다”인 글쓴이 이자와 고타로 님입니다. ‘사진 평론 즐기기’도 어김없이 “사진을 즐기는 또 다른 길”이라 할 텐데, ‘사진 평론 즐기기’를 수많은 사진쟁이한테 선물처럼 내어주면서 “여러분도 이렇게 사진을 같이 즐겨 보아요” 하고 손짓을 할 수 있을 텐데,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시큰하고 책을 덮은 뒤로 가슴 한켠이 쓰라립니다.


.. 사실 일본의 사진 상황을 보면, 이 부분이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을 위한 도구와 기술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무엇을 어덯게 표현하고자 사진을 찍는가라는 중요한 핵심이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 굳이 비싼 1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장만할 필요도 없이 휴대용 카메라로도 충분하다.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만나는 장면들을 담아 그대로 셔터를 누르면 된다 ..  (103, 109쪽)


 사진은 틀림없이 우리 삶에 있습니다. 저한테는 제 삶에 걸맞게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을 즐기다》를 펴낸 이자와 고타로 님한테도 당신 삶에 알맞게 사진이 있습니다. 배병우 님 같은 분은 배병우 님 나름대로 사진이 있고, 노순택 님 같은 이는 노순택 님 깜냥대로 사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저 마음그릇대로 사진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가 즐기는 사진그릇이 더 낫다 할 수 없으며 더 부끄럽다 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즐기는 사진그릇이 더 나쁘다 할 수 없으며 더 훌륭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사진책은 ‘사진을 즐기려면 우리가 우리 마음과 눈길과 몸을 어떻게 다스리면 더 좋은가’ 하는 이야기를 틈틈이 들려줍니다. 곰곰이 생각할 만하고 깊이 돌아볼 만하며 차분히 되새길 만합니다.

 다만, 생각할 만한 이야기는 담겼되, 가슴을 적실 만한 넋은 담기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되짚을 만한 이야기는 실렸되, 가슴을 울릴 만한 얼은 실리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 늘 신선한 기분으로 촬영에 임하라. 그런 사진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하게 전해진다 … 세월이 흐른 뒤 (내가) 사진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새겨 보면서 결과적으로 사진가가 되기 위한 자질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부터 서술할 ‘매케니즘을 활용하는 능력’, ‘분위기를 컨트롤하는 능력’, ‘지속적으로 촬영하는 정열’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다 ..  (104, 122쪽)


 사진 한 장으로도 웃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울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이야기 한 줄로도 웃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진 이야기 한 줄로도 울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사진을 즐기다》는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주는 책일는지요. 이 책을 읽은 사진쟁이는 당신들 가슴을 어떻게 다독이거나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는지요.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쓴 일본 사진평론가 이자와 고타로 님은 얼마나 뿌듯하고 기쁘고 보람차고 즐거운 마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같은 피사체를 똑같이 촬영하면 지겨울 뿐 아니라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의 묘미는 바로 이 점에서 비롯된다. 언뜻 보기에는 같은 피사체이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  (125쪽)


 저는 ‘사진은 내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삶이라고 느끼는 사진은 아름답다고 받아들입니다.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싶으며 제 모자란 깜냥과 재주껏 아름답게 갈고닦고 있으니, 내 사진이 이럭저럭 어줍잖거나 어설프지만 이러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작가로 이름을 내거는 분들 작품을 보면서 이분들 이름 때문에 사진이 더 우러러보이지 않다고 느끼며, 사진작가 이름이 없는 분들 작품을 보면서 이분들 이름 때문에 사진이 더 낮아 보이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진작가 작품 가운데 허접한 녀석이 퍽 넘치고 있으며, 사진작가 아닌 이들 작품 가운데 눈물젖게 하는 님이 꽤 많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즐기다》라는 책 하나는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수하게 당신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에 이 이름, “사진을 즐기다”를 쓰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걸림돌은 아니지만 징검다리 노릇은 힘들다고 느낍니다. 안쓰럽습니다. (4342.11.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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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엄마! 마음이 자라는 나무 21
유모토 카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엄마가 내려준 ‘고운 목숨’ 선물을 깨닫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9] 유모토 가즈미, 《고마워, 엄마》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그리 안 많습니다. 좀더 오래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고 느끼지만, 어떻게 보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그리 안 많기 때문에 한 마디 두 마디 오래오래 되새기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한 마디 두 마디 더욱 곰곰이 돌아보고 한결 깊이 가슴에 새기고자 하지 않나 하고도 느낍니다.

 제 고향이며 삶터는 인천이기 때문에 웬만한 볼일을 보자면 서울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저는 운전면허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면허를 딸 생각이 없고 자동차 장만하거나 굴릴 주머니가 없으니 자전거로 시잉씽 달리거나 전철을 탑니다. 혼자 지낼 때에는 으레 자전거를 달렸고, 옆지기와 함께 살면서는 전철을 즐겨 탑니다.

 옆지기와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갈 때는 으레 출퇴근 발걸음으로 붐비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에서 살짝 벗어난 때이곤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은 많기만 했는데, 요 몇 달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때에 움직이니 그야말로 옴쭉달싹 못하면서 사람들한테 시달립니다.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고달프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제가 시달리는 만큼 제 옆에 선 다른 사람들도 다 다른 느낌과 크기와 세기로 시달리고 있으니, 서로서로 매한가지이거든요. 다만 하나, 서로를 들볶는 사람들 매무새가 고달프고 괴롭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얕거나 모자란 움직임과 몸짓에 치이고 밟힐 때에 쓰라리고 슬픕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저나 형을 따끔하게 나무라던 말 가운데 하나를 요사이 아주 뼛속 깊이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 앞을 지나다니면 안 돼.”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어디로 가려고 할 때 앞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이 앞으로 지나가지 말고 뒤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어기면 따끔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좁은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마루에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으시면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안절부절이었습니다. 쉬가 마려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야 했고, 제발 어른이 제가 안절부절 어디로도 못 가고 있음을 느껴 주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바랐습니다.


.. 나는 물론 아빠의 장례식을 지켜보았으며, 관 속에 누워 있는 아빠의 얼굴에서 살아 있을 때와는 다른 뭔가를 느끼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 엄마도 나도 언젠가는 아빠처럼 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너무도 밝고 힘차서, 내가 두려워하는 그런 어두운 구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 그럭저럭 학교에 도착하고 나면 엄마가 걱정이었다. 아빠처럼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 이 시각에 나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  (22∼25쪽)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탈 때,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타려고 달려듭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어느새 달음박질로 빈자리를 하나씩 꿰찹니다. 실랑이를 벌이기 싫고, 갑작스레 새치기하는 사람하고 다투기 싫어 으레 그냥 서서 갑니다. 용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할 때에도 내리는 사람들은 우르르 쏟아지며 달음박질인데 저 같은 사람은 손쉽게 밀치고 밟으며 ‘먼저 자동계단에 타려’고 애씁니다. 저는 자동계단을 안 타고 돌계단만 밟으니 어차피 자동계단 쪽으로 가지 않으나, 옆이고 뒤고 제 앞으로 휙휙휙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시청역에서 내려 표를 끊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람들 매무새는 무시무시합니다.

 이 같은 아침저녁 전철길에 모질게 시달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옆지기와 아기를 다시 만날 때 잔뜩 절고 지치고 힘이 없습니다. 쉬 짜증을 부립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고 차가워지고 쌀쌀맞고 맙니다.

 경쟁을 바라지 않고 경쟁을 하기 싫으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살고 싶기에, 제아무리 큰돈을 선물로 준다 할지라도 이렇게 뭇사람 물결에 휩쓸리는 일은 힘듦을 넘어 가슴이 아립니다. 왜 이렇게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듯 뜀박질을 하며 ‘내가 더 먼저’와 ‘내가 더 빨리’와 ‘내가 더 많이’가 되어야 할까요. ‘나와 네가 함께’나 ‘나와 네가 나란히’나 ‘나와 네가 즐겁게’로 거듭나기는 어려운가요.

 모두들 똑같은 ‘어머니’한테서 아름답고 맑은 목숨 하나 선물로 받은 몸일 텐데, 우리는 왜 내 몸이나 네 몸을 아름답게 여기지 못하나요. 왜 우리 몸을 서로서로 맑게 돌아보거나 건사하지 못하나요.


.. 나는 다림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편지를 내밀었다. “오사무네 엄마, 아기가 새로 태어나니까 오사무는 필요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기가 죽었다고 오사무더러 가지 말라니, 정말 너무해. 오사무가 너무 불쌍해.” 나는 세탁비누 냄새와 탕약 냄새가 밴 할머니의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눈물과 콧물과 침을 묻혔다. 얼마 후, 내가 얼굴을 들어올리자 할머니는 밤이 든 양갱을 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마구 뒤섞여 있던 목 안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양갱이 넘어가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  (115쪽)


 우리 어머니라고 안 서두르며 살지는 않았으나 ‘괜찮아!’ 하고 짧게 내뱉으며 우리 몫을 덜 가지는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몫이 더 있다고 해서 우리가 더 배부르지 않음을 넌지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우리와 견주어 훨씬 배부른 데에도 우리 몫까지 얌체처럼 가로채더라도 ‘괜찮아!’ 하고 아쉬움 없는 한 마디를 뱉어냈습니다.

 우리 옆지기를 돌아봅니다. 우리 옆지기는 ‘괜찮아!’를 꺼내지 않으나 ‘됐어!’를 꺼냅니다. ‘우리가 안 가져도 돼!’를 꺼냅니다. 우리 두 손에 든 몫은 거의 없거나 텅 비었음에도 ‘됐어!’를 꺼냅니다.

 저는 옆에서 허전하다고 느끼며 ‘뭐여? 굶으라고?’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래, 조금 굶는다고 우리는 죽을 일이 없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우리 살림에 은행계좌 숫자가 늘어날 턱이 없으나 그 밑바닥하고 이마를 맞대는 얼마 안 되는 숫자마저 선선히 털어내어 (우리보다 그 돈푼을 바라는 자리에 있는 고운) 이웃한테 어느새 다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 예전에 엄마와 내가 살고 있던 그리운 그 방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좁고 이렇게 천장이 낮은 방에서 살았던가 하고. 그렇지만 덜거덕거리는 덧문을 열자 포플러는 변함없이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턱에 자그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나의 모습과 식탁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  (158∼159쪽)


 지난주에 제 새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이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오고, 다음주에 또다른 새 책이 하나 나옵니다. 석 주에 걸쳐 세 가지 책이 나옵니다. 그동안 밀려 있던 책입니다. 이 세 가지 책을 한꺼번에 그러모아 음성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보낼까, 아니면 세 번에 걸쳐 따로따로 보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전화를 자주는커녕 가끔도 잘 안 하는 주제이니, 세 번 따로따로 편지와 함께 책을 부쳐야 옳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체국에 갈 겨를이 거의 없으나, 가방에 책 담은 편지꾸러미를 늘 넣어 놓고는 낮나절에 길을 지날 일이 있으면 얼른 우체국에 가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다짐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들내미 새로운 책을 얼마나 기쁘게 맞아들이며 즐겁게 읽어 주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어머니가 아들내미 책을 놓고 이런저런 느낌이나 생각을 꺼내어 본 적이 없으니, 잘 썼다고 여기는지 엉터리라고 여기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즐겁고 흐뭇하게 편지 몇 줄을 적어 보내려 합니다. 따로 말씀이 없어도 저 스스로 잘 쓴 책이라면 잘 썼고, 잘못 쓴 책이라면 스스로 잘못 썼음을 깨달아야 할 노릇이겠지요.

 책에 적힌 이름은 제 이름 석 자이지만, 제 이름 석 자가 책 하나에 새겨지기까지는 내 어버이가 쏟고 들인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땀과 피와 사랑과 믿음을 돌아본다면, 제가 쓴 책은 제가 쓴 책이라기보다 제 몸뚱아리와 손길을 빌어 내 어버이와 내 어버이를 낳은 또다른 어버이와 또다른 숱한 어버이들이 빚은 열매요 보람이라고 느낍니다. 저로서는 이 피와 땀과 사랑과 믿음을 제 책들에 알알이 담았는가 못 담았는가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이가 든 다음에, ‘그때는 참 젊었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단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살아야 해.” 평소 욕심 많고 질투심 많고 독설가였던 할머니가 그런 가슴 찡한 말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 외증조할머니의 딸이다. 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가 정해 준 상대와 얌전하게 결혼하여 자식 넷을 키웠는데, 역시 그 할머니에게도 마음껏 다 살지 못한 자신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  (글쓴이 뒷말/182쪽)


 이야기책 《고마워, 엄마》를 읽습니다. 어머니가 ‘작품 주인공’ 만한 어린 날부터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음을 ‘작품 주인공’은 ‘당신이 어린 날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작품 주인공이 보낸 어린 나날에 주인공네 어머니가 ‘어린 주인공이 앓고 겪고 부대끼는 슬픔과 생채기’가 덧나지 않도록 하려고 오래도록 말없이 참고 기다리고 헤아리고 있었음을 ‘주인공이 어머니가 된 다음은 아니고, 주인공이 어머니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시나브로 깨닫도록 마련해 놓고 있는 줄을 깨닫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옆지기는 딸이 아닌 어머니가 되어 무엇을 깨닫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두 사람은 우리 딸아이한테 무엇을 느끼거나 깨닫도록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 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 보낸 삶이 먼 뒷날 우리 딸아이가 ‘제 엄마 아빠 나이’로 다가설 즈음 무엇을 느끼도록 할까요. 우리 삶자락이, 우리 삶자취가, 우리 삶결이 우리 딸아이 앞날에 어떤 이야기로 다가설 수 있게끔 일구거나 가꾸거나 보듬거나 껴안고 있을까요.

 엄마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딸이 있습니다. 딸한테는 엄마가 있으며 뒷날 스스로 엄마가 됩니다. 스무 해이든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어느 만큼 햇수를 살아내면서 차근차근 ‘목숨 선물’을 사랑과 믿음을 실어 물려줍니다.

 틀림없이 아침저녁으로 지치는 몸이 되고, 지치는 몸에 따라 지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히유 한숨 한 번 몰아쉬면서 새삼스레 이맛살 주름을 문질러 지우고 곰곰이 되씹습니다. 나를 들볶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누군가한테 ‘아이’요 모두들 ‘어머니’가 있는 고운 목숨임을 느끼고자 합니다. 아직 이이들 스스로 누군가한테 ‘아이’요 ‘어머니’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지만, 언젠가 모두들 제자리를 깨닫고 고운 목숨이 무엇인지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엄마는 엄마이기에 고맙고, 나는 나이기에 고맙습니다. (4342.11.25.물.ㅎㄲㅅㄱ)


 ┌ 《고마워, 엄마》(푸른숲 펴냄,2009)
 ├ 글 : 유모토 가즈미 / 옮긴이 : 양억관
 └ 책값 :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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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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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 사진은 세상을 모르는 만듦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7] 박태희 옮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 글(이야기) : 필립 퍼키스, 막스 코즐로프, 존 브레이버맨 리바인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09.9.27.)
- 책값 : 8000원


 (1)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진


.. “당신은 왜 그토록 선생 말을 믿는가요?” ..  (8쪽)


 세상에 나온 지 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이제 말을 하려는지 혼자 종알종알댈 때가 잦습니다. ‘엄마’와 ‘아빠’ 같은 말은 아주 또렷하게 합니다. 다른 말도 곧잘 따라합니다. 아직 자주 넘어지지만 집에서고 밖에서고 쉬지 않고 뛰고 엉덩방아 찧고 합니다. 옆지기는 슬슬 걱정합니다. 이 아이한테 앞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딱히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옆지기한테 미안합니다. 그러나 굳이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 결대로 살아갈 때가 가장 좋으니까요.

 다만, 아이가 아이 결대로 살아가기에 지금 우리 세 식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름답거나 좋으냐입니다. 아이가 이웃집에서 또래동무를 사귄다든지 동네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배울 이야기가 있느냐입니다. 아이가 흙을 밟고 만지고 뒹굴면서 걱정없이 놀 수 있느냐입니다. 풀을 알고 나무를 알며 새를 알고 들짐승을 알 수 있느냐입니다. 꽃이든 곡식이든 푸성귀이든 손수 심고 기를 수 있느냐입니다. 이런 테두리에서는 아이를 그대로 두면서 아이 결에 따라 아이 스스로 배우고 부대끼며 살아가도록 놓아 줄 수 없습니다. 따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를 따지고 둘을 살피면, 큰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작은도시라 하여도 아이를 키우는 데에 썩 좋기는 어렵겠구나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살림살이로 갈 만한 시골이 있을까 잘 모르겠고, 시골이라고 해서 가장 나은 길이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흙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뭇목숨이 고르게 어울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즐거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단단한 가방끈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높은 이름값보다 더 믿음직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옆지기와 저는 서로서로 날마다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터를 어디로 옮기든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든 재개발이 안 되는 가난한 동네를 찾아내고 새집을 얻어 지낼 수 있으면, 이 도시에서도 슬기롭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음악(재즈)이 들렸어요. 나도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 예술은 늘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지향합니다.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인들》을 통해서 그의 내면과 더불어 1950년대 미국의 현실을 동시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사진이 워커 에반스의 사진보다는 더 파격적입니다.” “35mm 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고 낭만적이며 생생함이 살아 있지요. 블루스, 재즈의 느낌입니다 … 숨소리가 들리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지요.” ..  (21∼22쪽)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을 때 빛살이 좋은 곳이 어디인가를 여쭙는 글을 읽습니다. 깊은 새벽에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또박또박 댓글을 달아 놓습니다. ‘골목길 빛깔을 제대로 느끼고 싶으시면, 제가 몇 군데 적바림한 동네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셔요. 그러면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하루 내내 해가 어떻게 걸려 있고 소리와 바람과 빛살과 사람이 어떻게 복닥이며 섞이는가를 그저 온몸으로 껴안아 보셔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느끼고 나서 사진기를 찾아들고 걸어다니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고스란히 예술입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아주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그저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늘 제가 다니는 곳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1992년부터 다닌 헌책방에서는 단골이나 손님이 아닌 그예 ‘헌책방 이웃’이요 ‘헌책방 동무’입니다. 우리 아버지 또래 아저씨들이 일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이웃’입니다. 저하고 열 살 안쪽으로 나이가 벌어진 분들이 꾸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동무’입니다. 아버지 또래하고 동무 또래 사이에 있는 분들이 가꾸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길벗’입니다. 오래도록 헌책방에서 나란히 숨을 쉬었고, 같이 책을 만졌으며, 서로서로 어울렸습니다. 제가 헌책방을 담는 사진은 작품이 아니고 예술이 아니며 그저 삶입니다. 제 삶이며 헌책방 일꾼 삶이고 헌책방이라는 책쉼터 삶입니다.

 지난 2007년에 돌아온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골목길을 사진에 담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는 저 스스로 제 삶터가 골목동네이고 제 모든 동무들은 골목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이제 숱한 동무들은 골목동네를 떠나 아파트나 빌라에서만 삽니다. 아직까지 골목동네에 남은 어릴 적 동무는 몇 안 됩니다.

 저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거나 충북 충주에서 살 때에 늘 작은 집이나 방에서 지냈습니다. 제 터전은 작았고, 제가 건사하는 책을 놓을 자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제 터전’보다 훨씬 넓은 자리를 책한테 내주며 지냈습니다. 인천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세 식구 지내는 살림집은 따로 조촐하게 마련했습니다. 지난겨울과 지지난겨울에 살던 곳은 겨울이면 집안에서도 물이 어는 썰렁한 옥탑집이었고, 올겨울을 나는 곳은 추위에도 제법 따뜻한 오래된 벽돌집입니다. 올겨울을 앞두고 이 집에서는 글을 쓰거나 밥을 할 때에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겨울까지 살던 살림집에서는 집안에서도 두툼한 겉옷을 껴입고 언손을 호호 녹이며 지내야 했습니다. 지난 1995년부터 부모님 집을 나와서 살림을 한 뒤로, 저로서는 처음으로 ‘안 추운 겨울’을 맞이하겠다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지냈던 제 살림집에서는 겨울이면 집안 온도가 영 도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 “무엇보다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이 좋습니다 …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면 그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선 정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묻고 있는 사람에게 귀 기울일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이 어떨지 감을 잡을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나요? 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나요? …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야 합니다. 셔터를 누를 때, 그저 관찰자로서 편견을 버리고 최대한 대상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  (35, 40∼42쪽)


 흔히 일컫기를 헌책방은 어둡고 낡고 퀘퀘한 곳입니다.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을 이웃집 삼아 드나드는 제가 느끼기로 헌책방은 어두울 때에는 어둡지만 밝은 구석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낡을 때가 있으나 새로울 때가 나란히 있는 곳입니다. 퀘퀘할 때가 있으나 싱그러울 때가 골고루 있는 곳입니다. 어두우나 어둡지만 않고 밝으나 밝지만 않습니다. 두 얼굴을 즐겁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헌책방을 사진으로 옮길 때에는 두 얼굴을 함께 느끼면서 기쁘게 바라봅니다. 낡은 모습을 담는 한편 새로운 모습을 담으며 뿌듯하다고 느낍니다. 퀘퀘한 모습을 찍는 가운데 싱그러운 모습을 찍는 동안 가슴속 깊이 사랑과 믿음을 키웁니다.

 으레 이야기하기를 골목길은 사라지는 곳이요 재개발로 밀어붙여 아파트로 바꾸어야 할 ‘주거환경개선 지구’입니다. 웬만한 사람들(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목길을 추억이나 옛날 옛적 터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이 되어 골목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골목집(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골목길을 사라지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공무원이나 아파트 주민이 보기에는 주거환경개선 지구일지라도, 우리와 같은 이곳 골목이웃은 스스로 ‘고향마을’이요 ‘삶터’입니다.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곳이며, 내 어버이가 나를 낳아 기른 곳입니다. 복닥이면서 하루하루 살림을 이어온 곳이고, 넉넉하지 않다지만 우리 식구 밥벌이를 이루도록 해 준 일터입니다. 이리하여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을 때에는 바깥에서 골목을 바라보는 대로 드문드문 ‘주거환경개선 지구’다운(?) 모습을 찍어 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눈길로 골목길을 담지 않습니다. 골목길 나들이를 하면서 추억어린 모습을 살풋살풋 찍을 수 있습니다만, 저한테는 골목길이 삶이요 현실이기 때문에 추억어린 모습은 한 장조차 찍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보기에는 참 비좁고 우중충하다 싶은 제 살림집인데, 이런 살림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옆지기와 아기를 사진으로 담으면서 우리 삶이 우중충하다거나 꾀죄죄하다거나 어둡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아기가 웃으면 웃는 대로 울면 우는 대로 우리한테 고맙고 기쁘며 거룩한 삶입니다. 신나고 재미나고 놀라운 하루하루입니다. 밥숟갈을 들듯 사진기를 듭니다. 밥그릇을 비우듯 필름을 쓰고 메모리카드를 채웁니다.

 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제 사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부대끼는 삶입니다.


 (2) 살아가는 눈으로 살아가는 목소리를 뽑아내기


.. “인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원래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진이 우울하고 어둡거나 입자가 거칠다면 실제로 그곳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원래 보았던 것을 그대로 옮길 뿐입니다 … 먼저 셔터를 누릅니다. 자기 표현에 대한 생각은 부차적입니다. 자기 표현은 저절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  (24, 25, 28쪽)


 지난 2005년 2월에,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눈빛)라고 하는 얇은 책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얇은 책 하나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책방 〈이음아트(이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빈자리 많고 사진 몇 점 안 담았으면서 150쪽으로 엮었고 책값은 7500원씩이나 붙였다고 투덜거리면서 이 책을 사들었습니다. 하루 아닌 한 시간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다 읽은 뒤 한 번 더 읽었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삭이면서 좀 비싸게 붙인 책값이 그리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이라 한다면 비싸구려 책값이지만, 두 번 볼 뿐 아니라 거듭거듭 되읽으면서 책꽂이에 오래도록 꽂아 놓을 책이라 한다면 알맞춤한 책값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올 2009년 9월에,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라고 하는 또다시 얇은 책이 나옵니다. 이번 얇은 책은 고작 94쪽이며 책값은 8000원이고 사진은 석 장 담깁니다. 이번에도 서울 혜화동 〈이음아트〉에서 이 책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이 얇은 책뿐 아니라 《The Sadness of Men》(Quantuck Lane Press,2008)이라고 하는 도톰한 사진책 하나를 함께 만납니다. 2005년 필립 퍼키스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박태희 님이 옮긴 둘째 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인데, 박태희 님은 아예 출판사 ‘안목’을 등록해서 이번 얇은 책 하나를 내놓고,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 하나를 정식수입해서 한국에서 이이 작품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습니다.

 책 두께와 책값을 살피고는 빙긋 웃습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사람한테 군더더기 말을 길게 늘어놓는다고 사진을 더 잘 읽거나 더 잘 느끼거나 더 잘 찍거나 더 잘 나누겠나?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들으며 새길 말만 새겨도 되지.’ 8000원짜리 가냘픈 책을 사듭니다. 오만 몇 천 원짜리 사진책까지 함께 살까 하다가, 비닐이 뜯긴 모습을 보며 ‘다음주에 와서 사자’고 생각합니다. 비닐이 뜯긴 책이니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분 사진책을 이 책방에 들를 때에 구경해 보도록 놓아 주고 싶습니다. 〈이음아트〉 일꾼은 책손이 ‘비닐 감긴 책’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면 서슴지 않고 비닐을 북북 뜯어서 얼마든지 구경해 보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어쩐지 미안해서 저는 꼭 살 책만 살핀 다음 책값을 치러고야 비닐을 뜯습니다. 이번 이 책은 어차피 살 생각이지만, 제가 사고 나면 비닐 뜯긴 책은 없어질 테니, 이렇게 열려 있을 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보면 좋겠다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 “요즘 학생들의 사진은 달라요. 사진이 정보에 가깝습니다. 디지털 매체는 당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내지요. 정보의 양이 많아진다고 풍부한 감성이 담기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감정의 톤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선 디지털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제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8×10뷰 카메라와 삼각대를 스고 싶지는 않아요. 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지금의 사진은 90프로가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아이디어로 끝납니다. 사진가는 아이디어를 갖고 주제를 찾아나서거나 아이디어를 완성해 냅니다. 나머지 10프로의 사진들만이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로 가서 눈앞에 있는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본 결과물이지요 … 거의 모든 것이 계획된다고 보면 됩니다 … 지금 우린 방안에 앉아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지 못한 실제는 어디에도 없어요.” ..  (31∼33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었는데,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그야말로 군말 한 마디 섞지 않습니다. 알짜 말만 펼칩니다. 그런데 알짜 말만 펼친다고 해서 딱딱하다거나 따분하다거나 골때리지 않습니다. 생채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더도 덜도 먹지 않고 꼭 알맞춤하게만 풀을 먹듯, 필립 퍼키스 님은 우리 마음밭에 피가 되고 살이 될 말만 콕콕 집어서 들려줍니다. 책을 마무리하며 옮긴이 박태희 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프랑스 요리를 생각해 보세요. 결코 손님을 배불리 먹이지 않습니다. 좀 부족한 듯 느껴지면 아쉬움이 들고 손님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반면 미국 요리는 배가 터질 만큼 많은 양으로 쉽게 질려 버리지요.(89쪽)” 하고 당신 삶을 보여줍니다. 이에 옮긴이 박태희 님은 “그래도 전 배부른 편이 좋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필립 퍼키스 님은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저도 이 대목을 끝으로 책을 덮으며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그러면서 차분히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건대, 제 삶에는 ‘군말 없이 알짜 말만 콕콕 집어서 펼칠’ 때가 있는 한편, ‘군말 알짜 말 가리지 않고 배터지게 늘어놓는’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때 가운데 어느 때가 더 낫다고는 따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저 두 모습은 모두 제 모습이라고 느끼며 어느 쪽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삶은 군더더기 없는 대로 좋고, 군더더기 믾은 삶은 군더더기 많은 대로 좋습니다. 가끔은 떡이 되도록 술을 퍼부으며 몸을 괴롭히며 마음을 달래니까요. 날마다 더도 덜도 말고 꼭 알맞게만 한두 잔을 즐기면 하루 마무리가 흐뭇하지만, 때때로 좀 넘치는 날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때때로 아무것도 안 먹고 조용히 지나가도 괜찮고요.


..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변화와 다양함은 형식에 있기보다 내용에 있습니다 …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오로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행위에 모든 의미와 모든 예술과 모든 감정들이 일어나도록 나를 맡기는 겁니다 … 그야말로 위대한 사진들은 ‘나’의 능력만으로는 나올 수가 없어요.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  (44, 47, 76쪽)


 사진책 《The Sadness of Men》를 처음 집어들었을 때에는 후루룩 넘겼습니다. 두 번째로 사진을 볼 때에는 조금 더디 넘깁니다. 세 번째로 사진을 살필 때에는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그러고 네 번째로 더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먼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라고 하는 얄팍한(얇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책을 읽어내고 이 사진책을 펼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말을 보아도 좋으나, 말을 보고 사진을 보아도 좋으니까요.

 어느 사진쟁이 작품을 살필 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먼저 보고 그 사진쟁이 삶을 귀담아 들어도 좋지만, 그 사진쟁이 삶을 먼저 들여다본 다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들여다보아도 좋습니다. 저는 으레 뒤쪽 길로 갑니다. 작품이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 사진쟁이 삶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피거나 돌아봅니다. 그 사진쟁이 삶자리를 가만히 짚고 그 사진쟁이가 걸어간 발자국을 곰곰이 톺아봅니다.


.. “나이가 들고 죽음에 다가갈수록 내 자신은 줄여 가려고 노력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사진을 배웠던 안셀 에덤스가 내게 남긴 교훈입니다. 그는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사진 속에 집어넣고자 했어요 … 사진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매체라는 것입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입니다 …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73, 81, 82쪽)


 어느 문화 갈래와 예술 갈래가 안 그렇겠습니까만, 늘 살아 있는 눈이어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나를 보고 너를 보며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옳고 즐거운가를 느껴야 합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내 작품으로 담아내고, 내 작품에 담아낸 내 삶을 내 이웃들하고 오순도순 나누려는 매무새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사진으로 돈을 벌든 사진 아닌 일로 돈을 벌든, 무엇보다도 사진이 내 삶이어야 합니다. 돈이야 어떻게든 무슨 일을 해서든 법니다. 살림이야 어떻게든 꾸립니다. 제가 살림을 잘 못 꾸리면 옆지기가 고단할 테지만 옆지기가 당신 몸을 바치며 짊어집니다. 사진하는 사람은 당신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묻어날 뿐 아니라, 당신 삶이 그예 사진일 수 있게끔 가다듬고 맞추어야 합니다. 글쟁이한테도 그림쟁이한테도 책쟁이한테도 노래쟁이한테도 춤쟁이한테도 연극쟁이한테도 영화쟁이한테도 기자쟁이한테도 정치쟁이한테도 회사쟁이한테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저마다 제 일로 삼고 길로 여기는 한 가지를 제 삶으로 추슬러 내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이름쪽을 내밀 수 있어요. 아니,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름쪽을 내밀지 않아도 맞은편에서, “아,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군요.” 하고 알아보면서 꾸벅 절을 합니다.


..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할수록 작업이 더 형편없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성공하면 계속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그 음식을 다시 먹고 싶은 것과 같아요. 하지만 두 번째 먹을 때는 첫 번째보다 맛이 덜하고 세 번째 먹을 땐 슬슬 지겨워져요 … 유명해진 후에도 작업이 발전한 예술가의 이름을 자신 있게 대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최근에 예술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졸업과 동시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도록 장려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로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상업적인 작가 양성에 혈안이 된 거지요 … 절대 학생들의 비전을 바꾸려고 시도해선 안 됩니다.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판단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84∼86, 87쪽)


 사진책 《The Sadness of Men》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이 뚝뚝 묻어 납니다. 글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은 알알이 배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살피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쪽에서 가슴울림을 느끼든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려고 이이 책을 우리 손에 쥐느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 이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사진찍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느냐입니다.

 먼저 내 몸가짐을 다소곳하게 매만져야 합니다. 먼저 내 매무새를 얌전하게 고쳐야 합니다. 먼저 내 넋과 얼을 아름답게 돌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The Sadness of Men》하고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립니다. 이렇게 하면 이 두 책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사랑노래가 내 가슴팍에 꽂힙니다. 이렇게 하면 이 책장 글줄과 사진 마디마디에 깃들어 있는 눈물과 땀과 웃음과 꾸덕살을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에, 내가 외롭지 않도록 내 사진길을 북돋우며 나 또한 그이를 북돋울 수 있는 좋은 사진동무가 손을 흔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진밭은 온통 ‘세상을 모르는 만듦사진’뿐이지만, 이 만듦사진 울타리를 훌훌 떨쳐내면서 해맑은 ‘삶사진’을 씩씩하고 다부지게 이루어 갈 내 애틋한 사진길을 홀가분하게 내디딜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쁨이요 슬픔인 내 삶입니다. 사진찍기는 눈물이요 웃음인 내 삶자락입니다. 사진쟁이는 바보이면서 일꾼입니다. (4342.11.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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