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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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글이 내 삶이 되어야 태어나는 책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6] 곽아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12월 1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선 나무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발걸음을 늦추고 올려다보니,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조그마한 전구가 달린 줄을 나뭇가지에 촘촘하게 걸어 놓고 있습니다. 이날 저녁 다시금 광화문 앞길을 걸어서 지나가다가 제 앞에서 걷던 몇몇 사람이 “이야, 예쁘다!” 하면서 ‘아직 불을 넣지 않고 전구만 달아 놓은 나무 모습’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12월 2일 아침에 광화문 앞길을 또 지나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무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광화문 둘레 나무들은 여느 때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사람들 담배 연기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십이월과 일월을 맞이할 때까지 ‘예수나신날 맞이 불밝히기’에 시달려야 합니다.


..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다가 거기에 걸맞은 그림들을 대입해 내계內界의 깊숙한 곳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는 것은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이다. 삶이 버겁고 힘든 날이면 고요히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 구석에 웅크린 채, 쌓여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 하나씩 내면의 스크린에 비춰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삶을 견뎌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외계外界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강도로 압력을 가해 올 때, 그 버거운 삶의 순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어떤 책들은, 그림이 되어 마음속 풍경으로 간직된다 ..  (머리말)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과 나무가 뒤집어쓴 전깃줄에서 눈을 뗍니다. 길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책에 눈을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서울에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곳일 텐데, 저로서는 서울에 쉴 곳과 마음 둘 곳과 사랑 나눌 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람한 건물과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 등불과 끝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이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흙에 뿌리내리는 나무가 없고 바람에 씨앗을 날리는 들풀과 들꽃이 내려앉을 땅이 없으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구름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입니다. 버스 택시 짐차 오토바이 자전거 모두 몰려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다리로 느긋하게 오가면서 둘러볼 터전이 없는 서울입니다.

 서울마실을 다루는 책이 곧잘 나오고, 서울 시내를 자전거나 두 다리로 다니며 만난 예쁜 맛집과 멋집을 다루는 책이 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이 넓고 크며 사람 북적이는 서울에서 ‘책에 몇 군데 모아 놓아야’만 하도록 맛집과 멋집이 적은가요. 굳이 책에 담지 않아도 되도록, 아니 책에 담을 수 없도록, 어느 곳에 깃들고 어디를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알찬 서울은 될 수 없는지요.

 엊그제 혜화동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가 인천과 견주어 안주값이 두 곱이 비싼 차림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킨 안주가 나왔을 때에는, 이 안주값이 인천과 견주어 두 곱이나 되지만 부피는 반이 안 되고 맛은 더 떨어집니다. 다시금 크게 놀랍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습니다. 인천과 견주어 이곳 서울 혜화동 술집 자리값은 몇 곱이나 비쌉니다. 제가 드나드는 인천 술집은 가게를 꾸미는 데에 따로 돈을 들이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인테리어비로 몇 억이니 권리금으로 몇 천만 원이니 또 무엇무엇에 얼마니 하면서 들이붓습니다. 이렇게 들이부은 곳은 물건값도 높을 테지만 내어주는 밥상 부피도 작을밖에 없습니다.


.. 틈이 날 때마다 한 권씩 그 책(토지)들을 뽑아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여러 번 읽은 권도 있고, 한 번 읽고 지나쳐 간 권도 있다. 계집아이다운 허영심이 강했던 어릴 때는 여주인공 최서희에 끌렸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미인에다 영리하고 자존심 강한,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머슴과 결혼하고 마는 여자 … 나는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실질적으로는 교묘하게 남자를 지배할 줄 아는 것이 대놓고 으르딱딱대어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  (20, 112쪽)


 인천은 제 고향마을입니다. 그러나 제 고향마을이라 해서 다른 데보다 더 낫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고향입니다. 예부터 인천사람은 인천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았고, 으레 서울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인천에 머물거나 남는다든지, 저처럼 서울로 나아갔다가 거꾸로 인천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바보나 멍텅구리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어리보기로 여겨 버릇합니다. 한 번 서울로 나아갔으면 두 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일이 없어야 하고, 인천에서 무슨 일거리나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일을 인천에서 할 때와 서울에서 할 때에는 다릅니다. 받는 일삯이 서울에서 훨씬 높고, 받는 대접이 서울에서 훨씬 넉넉합니다.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인천에서는 아무 티가 나지 않을 뿐더러 작품을 그러모아 책을 내거나 전시마당을 마련하기는 벅찹니다. 그만큼 서울이 눈높이가 높다 할 텐데, 이렇게 서울만 홀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천은 인천다움을 잃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천은 부천다움을 잃고 수원은 수원다움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광명에서 광명다움을 찾기 어렵고, 안양에서 안양다움을 읽기 힘듭니다. 과천에는 어떤 과천다움이 있을까요? 성남에는 무슨 성남다움이 있을는지요? 고양은? 파주는? 남양주는? 군포는? 안산은? 시흥은? 구리는? 김포는?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답고 어여쁘며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하게 반갑고 멋지며 믿음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삶터 흐름을 돌아보면 사람이 사람값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맛을 찾기 힘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시험성적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학교이름으로 차례를 매깁니다. 학교를 다 마치면 은행계좌 크기로 차례를 매깁니다. 이러는 동안 옷차림과 자가용 크기와 아파트 넓이를 놓고 차례를 매깁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사람이 숫자가 되어 서로 치고박으며 죽도록 다툼질을 해야만 하는 터전입니다.

 이는 보수나 수구라는 쪽에서만 벌어지는 싸움질이 아닙니다. 진보나 개혁이라고 하는 쪽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툭탁질입니다. 이제는 누구나 알듯이 ‘같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가 서로 엇갈린 모임이 되었습니다. 공무원 숫자는 나날이 늘고, 교사 대접은 나날이 나아지는데, 공무원이 여느 사람 앞에서 온몸을 바친다든지, 교사가 아이들 앞에서 참 가르침을 펼친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늘 한결같이 들을 길이 없습니다.


..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溫氣도 느껴 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54쪽)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


 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


 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


 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4342.1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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