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의 땅 - The Unrooted - 1991-2005, 성남훈 사진집
성남훈 지음 / 눈빛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9] 성남훈, 《유민의 땅》



- 책이름 : The unrooted 1991-2005, 유민의 땅
- 사진 : 성남훈
- 펴낸곳 : 눈빛 (2005.12.29.)
- 책값 : 5만 원



 (1) 필터 하나 값과 사진책 한 권 값


 2005년 12월에 1쇄를 찍은 사진책 《유민의 땅》은 2007년 11월에 2쇄를 찍습니다. 나라안 사진책이 2쇄를 찍는 일이 드문데, 《유민의 땅》은 고작 이태 만에 2쇄를 찍었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추켜세울 뿐 아니라, 이름이 제법 높은 분 사진책임을 헤아린다면, 흔한 말로 ‘필터 하나 값’밖에 안 되는 5만 원짜리 사진책 《유민의 땅》이 2쇄밖에 못 찍은 일은 슬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만한 필터는 5만 원뿐 아니라 7만 원도 하고 10만 원이 넘기도 합니다. 필터 아닌 다른 부속이나 장식품은 훨씬 비싸곤 합니다. 저로서는 사진기하고 필름 두 가지만 사지 다른 어떠한 부속이나 장식을 더 사지 않으니 잘 모릅니다만, 곁따르는 물건이 제법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살핀다면, 사진책이 참 안 팔리는 모습이 슬픕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장비를 사고파는 누리집하고 가게만 있지, 사진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책방이 없는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진책이라 한다면 ㄱ문고나 ㅇ문고 같은 책꽂이뿐 아니라 웬만큼 큰 사진관 한켠에 책시렁을 마련해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을 보아야 사진 찍는 눈썰미’를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만, 사진 한 장으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사진 한 장으로 우리 마음을 따뜻히 감싸안을 수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사진을 더 즐겁고 알차게 가꿀 수 있거든요.


.. 앞으로 5년 정도 저널리즘에 천착하고자 한다면 분명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진집 《유민의 땅》이 출간되는 시기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5년 간 단 한 순간도 인간과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최소한 5년 간 분명한 사진의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 《유민의 땅》은 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290쪽)


 택시 탈 일이 거의 없는 제 삶인데, 어찌하다 보니 서울에서 인천으로 몇 번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만 돌아다니면 지하철이 늦게까지 있으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일찍 끊깁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달리니 4만 1천 원 안팎이 나옵니다. 택시삯을 치르며 ‘이 돈이면 책이 몇 권인가?’ 하고 되뇌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데,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유민의 땅》 같은 사진책을 한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헌책방마실을 하며 ‘世界の文化史蹟’ 가운데 하나로 나온 《マヤの神殿》(講談社,1968) 하나를 장만했습니다. 1968년에 나온 책값으로 2500엔인데, 헌책방에서는 고작 1만 5천 원에 팔았습니다. 자그마치 마흔 해가 묵은 사진책입니다만 인쇄 품질이나 사진결이나 얼마나 대단한지, 1만 5천 원이든 2500엔이든(예전 값이지만) 더없이 값싼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진책이 헌책방에 자주 들어오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장만해 놓고 있는데, 택시삯 4만 원이면 몇 푼 얹으면 이만한 놀라운 사진책을 세 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서울 혜화동에는 〈이음책방〉이라고 하는 인문예술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가면 ‘PHAIDON’에서 펴낸 손바닥 사진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습니다. 자그마한 판으로 퍽 값싸게 묶은 이 사진책들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달린 택시삯으로 네 권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꽤 괜찮은 필터 하나 사는 데에 들이는 값이면 좋은 사진책 하나를 살 수 있기도 하지만, 필터를 사지 말자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요사이는 필름값이 무척 올라서, 제가 쓰는 필름(일포트 델타 프로페셔날 400)은 한 통에 7500원씩 합니다. 제가 쓰는 필름으로 치자면, 이 필름 여섯 통 값이면 《유민의 땅》 한 권이 나옵니다. 필름 여섯 통을 덜 사면 좋은 사진책 한 권을 마련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한 해가 끝나는 요즈음 크고작은 갖가지 술자리가 많다는데, 웬만한 술자리 한 번 치르며 나가는 돈은 몇 만 원씩 됩니다. 예부터 익히 떠도는 말인데, 술자리 한 번 줄이는 값이면 《유민의 땅》에다가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 한 권을 더 장만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이래저래 나가는 돈을 줄여서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이래저래 나가는 대로 돈을 쓰면서도 사진책을 하나 더 장만하려고 용쓰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그 어느 데에도 돈을 안 쓰면서 사진책만 장만하는 일이 좋을까요, 사진책은 꿈같은 소리로 여기며 눈을 감는 일이 좋을까요, 아니면 집하고 가까운 도서관에 사진책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면서 도서관마실을 하며 사진책을 읽는 일이 좋을까요.


.. 다른 사람들도 제 사진에 ‘변화’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앵글의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요즘 제 사진에 대한 문제점과 그 원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가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작업 과정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저도 제가 가는 길과 제가 얻으려 하는 사진에 대해서 많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좀더 저널리즘 쪽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  (290쪽)


 보름쯤 앞서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눈빛,2007)을 장만했습니다. 2007년에 2만 원 값으로 나온 책인데 2009년 눈높이로 돌아보자니 책값 2만 원은 퍽 싸다고 느꼈습니다. 2005년에 나온 전민조 님 사진책 《섬》(눈빛,2005)은 책값이 1만 5천 원입니다. 2005년에 이 사진책을 살 때에도 그리 비싸다고는 느끼지 않았으나 이무렵 1만 5천 원에 나온 사진책이 요즈음에는 3만 원을 달고 있습니다. 더욱이 《섬》은 156쪽인데 《낙동강》은 110쪽입니다.

 사진책을 ‘어떠한 사진이 어떻게 담겨 내 마음을 건드리느냐’가 아닌 돈값과 쪽수와 크기로만 따지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사진책도 똑같은 책인 만큼 이런 생각도 한 번 해 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사진책 값이 퍽 비싸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이 사진책들이 참으로 비싼지, 비싸다면 얼마나 비싼지를 곰곰이 따져 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책은 한 번 슥 훑고 그치는 책이 아닙니다. 내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한다는 사진책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100번은 다시 넘기는 책입니다. 참 좋았던 사진책이라면 1000번을 되읽습니다. 그지없이 훌륭한 사진책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종이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추다가는 나중에 ‘깨끗하게 간수할 판’으로 하나 더 사 놓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섬》 사진책이 두 권 있습니다. 전몽각 님이 담은 《윤미네 집》도 두 권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포토넷’ 출판사에서 새로 찍는 《윤미네 집》까지 주문해 놓았습니다. 이들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주머니가 한꺼번에 아주 얇아진다고 느끼지만, 주머니가 얇아져 살림돈이 바닥나 버리더라도 제 가슴에는 뭉클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가득 넘치기 때문에 기꺼이 거듭거듭 장만해서 새로 보고 새삼 보며 새록새록 되새기며 봅니다.


 (2) 성남훈 님이 사진으로 담은 삶


 2005년에 《유민의 땅》을 내놓은 성남훈 님은 1993년에 《꿈꾸는 들녘》을 내놓았고, 1996년에 《소록도》를 내놓았으며, 2000년에 이상엽 님과 함께 《No War No Cry》를 내놓은 다음,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을 내놓습니다. 2005년에 내놓은 《유민의 땅》은 그동안 일군 사진 열매를 한 자리에 그러모은 작품이라 할 수 있어, 예전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많이 다시 실었습니다. 다만, 《유민의 땅》에 실린 ‘달동네 아이들’ 모습은 따로 묶어 놓은 작품들이 아닌데, 성남훈 님이 당신 나름대로 바라본 낮은자리 달동네 사람들 삶자락을 앞으로도 좀더 꾸준히 담아서 한 자리에 그러모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요즈음에는 ‘연화지정’이라는 사진감을 잡아서 동티베트땅에서 불교를 배우는 비구니를 사진으로 담고 있습니다.


.. 파리로 곧장 가지 못하고, 파리 근교의 지방도시에서 어학원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특히 이국적인 풍경을 접하면서 순수풍경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루빨리 파리로 들어가 사진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더군요. 점점 마음에서 패션 사진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파리로 가서는 브레송, 드와노의 사진 같은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도회지풍의 전형적인 프랑스 사진이 마음에 자리잡았습니다 ..  (287쪽)


 사진책 《꿈꾸는 들녘》부터 《유민의 땅》까지 두루 살피면, 《소록도》 한 권과 《유민의 땅》에 실린 이 땅에서 떠돌이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 삶 몇 칸을 빼놓고, 성남훈 님은 늘 나라밖 떠돌이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추고 있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나라안 떠돌이보다 나라밖 떠돌이가 더 많습니다. 세계가 한울타리라고 하는 물결에서 나라안팎을 굳이 따지는 일은 덧없습니다. 성남훈 님은 나라밖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아내지만, 이들 떠돌이 발자취는 ‘우리 나라하고는 아무 끈이 안 닿는’ 사람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 삶이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와 다를 바 없었고, 오늘날 나라밖 떠돌이가 이렇게 살아가게 된 까닭에는 우리 나라 흐름도 알게 모르게 이어져 있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 못나거나 게으르거나 잘못했기에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겠습니까. 이리 휩쓸리고 저리 쫓겨나는 까닭이 당신들 스스로 애쓰지 않은 탓이겠습니까. 프랑스 파리 변두리 루마니아 난민은 어쩌다가 제 고향마을이 아닌 파리 변두리에서 목숨줄을 잇고 있습니까. 아프가니스탄과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은 왜 제 집자리를 잃거나 빼앗기며 서로 총을 들고 싸워야 하겠습니까. 이들이 손에 쥔 무기는 누가 만들었고, 이들이 조용하게 살던 터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고, 아프가니스탄에 또다시 군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엇을 노리고 나라밖으로 군대를 보내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나라가 나라밖에 군대를 보내는 일에 얼마나 눈을 두거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 나라 안에는 수없이 많은 전투경찰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무기를 갖추어 든 채 한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전투경찰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남녘과 북녘은 수십만 군인을 서로 총부리를 겨눈 채 다툼질을 하도록 부추기는데, 남북녘 젊은이들은 왜 낯모르고 이름모르는 한겨레한테 총부리를 겨누면서 서로를 윽박질러야 하겠습니까.


.. 제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나 깊은 성찰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어떤 사진가의 사진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 사진가가 암병동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도 연극이나 영화처럼 충분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  (288쪽)


 성남훈 님 《유민의 땅》은 제 삶터를 잃거나 앗긴 사람들이 어느 땅에 어떻게 서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꾸밈없이 보여주지는 않고 ‘꾸며진’ 대로 보여줍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억지스레 꾸미는 삶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내쫓거나 들볶으면서 이들한테 ‘꾸며진’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 땅을 잃거나 앗겨야 하는 사람들이 낯설고 물선 땅에서 무엇을 꿈으로 삼으며 목숨줄을 이어야 하는가를 갈피 잡기 어려운 삶을 성남훈 님 눈길이 넌지시 곁눈질을 하면서 담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떠돌이가 아닌 ‘떠돌이를 찾아다니는 성남훈’ 님입니다. 그래서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입니다. 그러나, 곁눈이라고 하여 어설피 스쳐 지나가는 눈길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자리에서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로 바라보는 눈길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떠돌이하고 똑같은 눈길일 수 없는 성남훈 님 눈길입니다. 성남훈 님 눈길은 곁눈으로 떠돌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왜 이들은 떠돌이가 되어 제 터전이 아닌 자리에서 이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지켜봅니다. 그리고,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제 삶터가 아닌 데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을 깨닫습니다. 떠돌이가 된 사람들한테 눈물도 많으나 웃음도 많고, 고단함과 아픔도 많으나 즐거움과 사랑스러움도 깊음을 배웁니다.

 사진기를 들고 단추를 누르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사진기 앞에 서며 찍히는 사람이 더 즐거운 삶일까요?

 어느 쪽이 더 즐거운 삶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고단한 삶일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둘 모두 아름다운 삶이고, 두 쪽 모두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틀에 넣는다면 성남훈 님 사진은 틀림없이 다큐사진이라 일컬을 수 있을 텐데, 다큐사진에 이르는 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다루었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살펴보았거나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제프 쿠델카나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다큐사진작가라고 하는데, 이들 또한 다큐사진을 한다고 일컬을 수 있으나, 이들 사진은 다큐사진이라는 틀에 굳이 집어넣어야 할 까닭이 없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진은 그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맡은 몫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기 좋게 다큐사진이니 상업사진이니 패션사진이니 보도사진이니 예술사진이니 가르지만, 어느 갈래 어떤 사진이라 하더라도 우리 삶을 내 눈길과 눈높이에 따라서 얼마나 살뜰히 담아서 보여주느냐로 이야기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내가 생각하는 사진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흐름이어야 하고,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 앞서 내가 함께 살아가는 님들과 나란히 서 있는 넋이어야 하며, 사진을 종이에 옮길 때에는 누구보다도 내 가슴을 철렁 울리는 발자국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우연히 파리 근교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보게 되었고, 집시 사진을 찍게 되었죠. 그러면서 주제뿐만 아니라 그런 사진들이 나의 정서와도 일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사회의 주류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작업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생각을 키우기는 했어도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집시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보다는 프랑스 안에서의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정도였습니다 ..  (288쪽)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오늘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우리 둘레에서 누가 떠돌이가 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읽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가 된 사람들을 이 모습으로 내몬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성남훈 님은 떠돌이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당신 삶은 어떠한 빛깔과 모습으로 일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제 사진학과 교수님이 된 성남훈 님은 당신이 처음 사진을 배울 때에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사진을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궁금하고,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당신 제자한테 ‘사진하는 마음’을 어떤 눈썰미로 들려주는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열일곱 해를 이어온 사진 한길을 앞으로도 꿋꿋하게 걸어가시겠지요. 이 사진 한길에서 좀더 많이 흔들리고 더욱 크게 소용돌이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쟁이 성남훈 님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성남훈’이니, 성남훈 사진을 힘차고 다부지게 이어나가면 좋겠습니다. 다큐사진이든 그냥 ‘사진’이든 어떤 사진감을 잡느냐보다도 사진으로 무엇을 하느냐를 더 속깊이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하는 맛과 멋을 차분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내가 일구고 있는 삶 그대로입니다. (4342.12.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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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개념어 사전
어니스트 칼렌바흐 지음, 노태복 옮김, 박병상 감수 / 에코리브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사람으로 곱고 맑게 살아가는 길이란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8] 어니스트 칼렌바크, 《생태학 개념어 사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해야 하던 일을 그친 지 스무 날이 넘었습니다. 스무 날이 넘는 동안 새 살림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싶었으나, 그동안 몸이 더 나빠진 옆지기를 돌보고 아이를 함께 보살피느라 어디로도 다니지 못한 채 거의 집에서만 붙어 지냈습니다. 이러느라 서울마실은 한 주에 한 번 살짝 할 뿐이었는데, 모처럼(?)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안 타다가 지옥철을 다시 한 번 타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날은 겨울이라 사람들 옷은 두툼해지니 자리에 앉아도 훨씬 비좁을 뿐더러, 다리를 벌리거나 신문을 쫙 펼치는 남자들 매무새가 짜증스럽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찡기며 책장을 펼칠 때에도 밀치고 밟는 몸가짐은 매한가지라서 고단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을 돌보고 쉬는(?) 동안에는 이맛살을 찌푸릴 일이 드물었는데, 고작 하루 지옥철을 다시 타면서 자꾸자꾸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책읽기로 마음닦기를 하기보다 한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비비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느낍니다. 이 지옥철에서는 나 홀로 고달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 지옥철에서는 나 혼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타고내릴 때에 새치기를 하거나 불쑥 끼어들며 밀쳐대는 숱한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이 지옥철을 타는 사람들은 으레 ‘고단하다고는 안 느끼지’ 모른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당신들 삶으로 여기면서 ‘혼자 빨리빨리’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남이야 어찌 되든 제 몸만 느긋하면 괜찮은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겠다고.


..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옳고 적합하며 아름답고 만족스러운가에 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삼는다 … 집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휴가 기간에 당신이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법이다 … 장거리 여행은 당신의 ‘생태적 발자취’를 크게 남긴다. 음식 공급 체계를 비롯한 여러 사안과 마찬가지로, 관광에도 ‘지역으로 돌아가기’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주요 책무는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 자동차가 차지하던 땅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더욱 푸르게 만들 수 있다 … 보존 운동이 우리 자연 유산이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교육ㆍ정치ㆍ법률적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도로 포장과 오염과 벌목이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주요한 동물 종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을 보존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  (17, 39, 58, 90쪽)


 ‘일상(日常)’이라는 한자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자말을 쓸 일이 없으나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바로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서울 둘레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 또한 ‘일상’이로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일상’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늘 같은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글피가 같으며, 글피와 모레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이 같으며, 오늘날과 앞날이 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삶이 아이 삶하고 같고, 이 아이 삶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낳아 기를 아이 삶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삶이란, 경쟁과 학벌과 이름과 돈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여행이라는 똑같은 틀거리에 맞춘 한결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지 않으면서 아이한테도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면서 아이한테도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도록 내몹니다.

 제아무리 헌법에 ‘인권과 기본권과 시민권’이 적혀 있다고 하여도 이 나라 푸름이한테는 어떠한 인권도 기본권도 시민권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짧게 맞추어야 하고, 치마길이와 치마통을, 옷차림과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지식을, 그 어느 한 가지 자유와 민주와 창조와 평등에 걸맞게 가다듬을 수 없습니다. 교육감이 무슨무슨 틀거리를 새로 짜야 하는 ‘청소년 머리길이’가 아닙니다. 법에 따라 어찌어찌 적어 놓어야 할 ‘체벌 규칙과 높낮이’가 아닙니다. 헌법에 따라 마땅히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아껴 주는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시민권이어야 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 자동차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한 운전자로만 만들 뿐 관심을 가져야 할 시민으로 대하지 않게 한다 …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은 상당 부분, 생명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양식 물고기나 유전자 조작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음식을 생산하려면 인공적인 먹이와 화학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  (30, 57, 112, 143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낳아 키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다운 권리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깨끗한 터전에서 오순도순 어울리며 즐겁게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제 은행계좌 숫자가 높아지고 제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며 제 자가용 크기가 커지기만을 꿈꿉니다. 내 은행계좌에 높아지는 숫자를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한테 기꺼이 베푸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구세군 냄비에 넣는 돈을 떠나, 소리와 소문이 없이 늘 기꺼이 나누며 삶을 꾸리는 어른은 얼마나 있는가요?

 지옥철을 타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까닭은 오늘 하루 몸이 몹시 고달파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옥철이 되도록 서로서로 깎아내리는 이 터전을 비롯하여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내 밥그릇만 단단하게 붙잡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초를 안 기다리고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는 새치기를 안 할까요? 밀고 밟으며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며 골목을 달릴 때에 마구마구 빵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내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 데에나 침을 뱉는 일은, 옳지 않은 법이 자꾸 생겨나도 나 몰라라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한 번 쓰고 나서 쓰레기로 버리는 물건을 끝없이 쓰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거나 보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참다운 진보라면 마땅히 이 땅 터전을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곱게 지키는 일에 온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참된 보수라면 누구나 이 나라 삶터를 알차고 슬기롭고 맑고 어여쁘게 가꾸는 일에 온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 이 나라에서 진보요 하고 외는 사람과 보수요 하고 나서는 사람치고 ‘참 자연사랑’으로 삶자락을 추스르는 분은 몇이나 됩니까.


.. 미국에서 처음에 야생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대부분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산업 시설이나 교외 주택단지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버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계속 돌고 돈다. 우리가 환경이며 환경이 우리인 셈이다 ..  (150, 210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앎’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마르크스를 알든 공병호를 읽든, 대학 졸업장이 있든 대학원 학위가 있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밑슬기’를 먼저 닦아 놓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내 집이 어떻게 마련되었으며, 내 밥이 어떻게 밥상에 놓이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머리통에 지식을 가득 채운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며, 지식인이라는 이름은 가방끈으로 붙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몹시 슬픕니다.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어 더없이 슬픕니다. 이 책은 ‘생태환경 갈래를 모르는 새내기’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는 책인데, 생태환경 갈래 이야기를 이 나라 웬만한 지식인들은 한줌 지식으로조차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읽어 머리속에 넣어 놓을 지식을 담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구나 마땅히 시나브로 깨우치면서 몸뚱이로 익히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소비 자본주의가 부흥하는 내내 서구인들은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종교와 문화는 부차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 성숙한 도시일수록 유지 보수에 쓰는 에너지가 더 많으며, 도시 자체의 성장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 우리 인간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땅을 점령해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어지럽힌다 ..  (18, 56, 113쪽)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길잡이책입니다. 아니 ‘길잡이책을 알아보는 길에 한 번 들추어 보는 읽을거리’입니다. 이 땅과 사람과 목숨붙이 이음고리를 헤아리는 길잡이책이라 한다면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이나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나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이나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이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나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이나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이나 《너를 부른다》(이원수)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책을 먼저 차근차근 곱새겨 읽고 내 온몸으로 바르고 곱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낸 다음에 비로소 집어들면서 ‘이론을 갈무리해’ 보도록 거드는 《생태학 개념어 사전》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른 삶을 꾸리고 있을 때에 앞으로 더욱 즐겁고 힘차게 이 길을 씩씩하고 튼튼히 걸어가도록 돕는 길잡이책입니다. 길잡이책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맨 처음 읽는 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쥐어들며 읽는 책은 ‘배움책’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배움책으로 삼는다면 생태와 환경을 놓고 ‘지식 쌓기’는 할 수 있으나, ‘삶 다스리기’는 할 수 없습니다. 생태와 환경 이야기란 지식을 쌓으려고 알아보는 갈래가 아닌 만큼, 지식을 쌓으려는 배움책으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만나려 한다면, 차라리 이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합니다.


.. 우선순위의 방향을 경제에서 생태로 전환해야 한다 … 땅 일부를 야생 지역으로 남겨 두면,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언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190, 206쪽)


 그런데,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책이라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번역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며, 우리 말법과 말투에 알맞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쉽고 바르게’라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 삶터에 발맞추는 말과 글이 못 되었으며, 우리 겨레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돌아보도록 돕는 말과 글이 아니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 하나만 번역이 아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책들은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지 않고 쏟아집니다. 외국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모르나 우리 말은 너무도 형편없이 못하는 분들이 번역일을 하고 있느라, ‘참 좋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참 좋은 모양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책에 담긴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을 살리는 좋은 말로 풀어내기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힘든 노릇일까요. 좋은 책을 좋은 말로 엮어내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어깨동무하기란 우리 터전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일까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우리네 지식인들이 우리 땅과 삶과 사람과 목숨에 걸맞는 ‘생태환경 이야기책’을 즐겁고 알차게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4342.12.24.나무.ㅎㄲㅅㄱ)


 ┌ 《생태학 개념어 사전》(에코리브르,2009)
 ├ 글 : 어니스트 칼렌바크 / 옮긴이 : 노태복
 └ 책값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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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선집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번역이 너무 형편없어서 별 하나를 깎고 싶지만, 책이 좋기에 별 다섯을 그대로 살려 놓는다. 번역하는 분들은 제발 우리 말 좀 배우고 나서 일을 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그리고 2쇄부터는 오탈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내가 출판사에 알려준 오탈자는 마흔 곳쯤 되는데, 한 번 알려주고 나서 예순 군데를 더 찾았다. 히유... 띄어쓰기 문제가 아닌 '오탈자' 문제이다... 그리고 고흐가 살던 곳은 '네덜란드'인데, 화가 이름이나 지역 이름을 '네덜란드 말대로 읽기'가 아닌 '영어대로 읽기'로 적어 놓은 대목이 많아서, 책을 읽으며 몹시 언짢았다. 네덜란드사람이 한국사람 이름을 일본 말투대로 엉뚱하게 읽어서 적어 놓으면 기분이 좋을까?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 문화와 우리 나라 문화 또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하지 않다면, 제발 번역가라는 이름은 달고 다니지 말아라...)  

(글 사이사이 곁들인 그림은, 출판사 '아트북스'에서 보내 주었기에 붙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이 책을 엮어낸 출판사 분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긴다. 앞으로도 꾸준하게 힘내어 주시면 좋겠다...)


 이 책 하나 130 ― 문화를 먼 나라에서 찾을 까닭이란 없다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책이름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 글ㆍ그림 : 빈센트 반 고흐
- 옮긴이 : 박홍규
- 펴낸곳 : 아트북스 (2009.5.14.)
- 책값 : 26000원



 (1) 내가 꾸리는 삶은 고스란히 예술


 제 삶은 남들이 보면 부지런히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하루하루입니다. 혼자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하루가 온통 골목마실이나 자전거마실을 거쳐 헌책방이나 동네새책방에 드나든 다음 집으로 돌아와 글쓰기로 채워졌습니다. 옆지기와 살아가면서 자전거마실과 책방마실은 많이 줄었고, 아기를 낳은 뒤로는 자전거마실과 책방마실은 웬만하면 엄두를 못 내지만, 한 주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책방마실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책을 꼭 읽어야 하거나 새로운 책을 꼭 사야 하지는 않으나, 저 스스로 우물에 빠진 생각밭이 되고 싶지 않은 한편, 아직 새로 배울 이야기가 많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마련해 둔 책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도 되고, 이제까지 읽은 훌륭한 책을 거듭 되뇌어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훌륭한 책을 바탕으로 새롭게 일군 ‘내 손길을 기다릴 또다른 훌륭한 책’이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고 느끼기에 책방마실을 꾸준히 이으려고 합니다. 아픈 옆지기와 함께 살며 아기를 함께 키우자면 바깥마실이 힘들어 집에서 인터넷을 또닥거리며 책을 장만할 수 있지만, 책은 제 발품을 팔아 찾아다닌 책방에서 제 손품을 팔아 살피면서 장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장만한 책은 너무 무겁거나 다른 짐이 많지 않다면 한겨울에도 땀 뻘뻘 흘리며 제 큼지막한 가방에 가득 채우고 끈으로 꽁꽁 묶어서 낑낑대며 집으로 나르고 싶습니다. 손발을 쓰지 않으며 책을 만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2009년 12월 오늘 이 자리에서 돌아보면 지난 1992년 8월부터 열여덟 해에 걸쳐 날마다 3킬로그램 남짓에 이르는 책을 장만해 왔습니다. 충북 충주에서 살며 자전거마실로 서울을 오가며 책을 사던 2006년 한 해에는 봄부터 겨울까지 자전거수레와 가방과 자전거 짐받이에 70∼80킬로그램에 이르는 책을 나누어 싣고 한 주에 한 번씩 오갔습니다. 지난 2008년과 올해에는 책을 좀 적게 샀는데, 2006년까지 책을 장만해 온 흐름을 줄잡으면 날마다 10킬로그램이 됩니다. 요새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데, 아무래도 열여섯 해 동안 몸을 지나치게 많이 부린 탓이 아닌가 싶고, 요 이태에는 책방마실을 자주 못 다닌다고 하여도 집일을 많이 맡으면서 스스로 힘겨워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손발톱을 깎아 남들 눈에 안 뜨이게 되었지만, 올 2009년 첫머리부터 제 손톱은 한쪽이 갈려 있었습니다. 곯아떨어진 어느 날 겨우 잠에서 깨어 일어났지만 잠자리에 누운 채 문득 손을 들어서 들여다보다가 손톱 끝이 갈려서 없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는데, 왜 이렇게 갈린 줄 몰랐습니다. 며칠 앞서 드디어 ‘손톱이 갈린 까닭’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아기 옷가지 빨래와 걸레 빨래에 들이는 품이 퍽 많아, 쉼없이 비빔질을 해대느라 손톱 끝이 한쪽으로 갈려 없어진 셈이더군요. 날마다 기저귀를 서른 장씩 빨 때에는 이러하지 않았고, 저와 옆지기 옷을 빨며 살 때에도 이러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아기가 젖을 차츰 적게 먹고 밥갈이와 오줌가리기를 하려는 요즈음 이렇게 손톱이 갈립니다. 





 언제인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으나, 1980년대 가운데무렵쯤, 아버지 어머니 형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열세 평 오층짜리 아파트에 살던 때에 빨래기계를 처음 들여오던 날이 생각납니다. 네 식구 옷과 이불까지 모두 손빨래를 하던 어머니한테는 빨래기계가 그야말로 ‘손품 더는 혁명’과 같지 않았으랴 싶은데, 이무렵 빨래기계 값은 요즈음 빨래기계 값하고 거의 맞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어쩌다가 빨래기계 장만할 생각을 다 하셨는지 궁금하지만, 빨래기계를 쓰며 어머니 손이며 손톱이며 조금은 수월해지셨겠지요. 그러나 빨래기계를 쓴다고 집일은 줄지 않습니다. 집일을 나누어 맡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큰일입니다. 형과 저는 어릴 적부터 으레 어머니를 거들며 집일을 함께했고, 양말과 신발은 마땅히 스스로 빨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주말에는 걸레를 빨아 방바닥 훔치는 일을 도왔고요.

 빨래기계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빨래를 개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하는 집일을 물끄러미 살펴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집일은 언제나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빨래와 청소가 마무리되면 아침 낮 저녁 세 끼니 밥을 마련하는 데에 바쁘고, 끼니를 마련하자면 날마다 저잣거리 마실을 다녀야 했고, 찬거리 손질이며 쌀을 일고 씻고 안치고 하는 일에다가 상차림이며 나중에 설거지와 갈무리까지 ……, 입으로 읊으면 짧지만 몸으로 움직이면 겨울날에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고단하고 바쁜 하루하루입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니며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 가운데 떠오르는 대목이 거의 없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운 지식조각 가운데 생각나는 대목 또한 몇 가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곁에서 늘 바라본 어머니 집일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아주 많은 모습이 떠오르고 생각납니다. 아니, 떠오른다기보다 늘 떠올리며 삽니다. 생각난다기보다 노상 생각하며 삽니다. 오늘 하루 내 집일을 맡아 하면서 어린 날 어머니는 어떻게 했고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돌아봅니다. 내 국민학생 때 어머니는 바로 오늘 제 나이쯤 되었을 텐데, 그무렵 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들여다본 어머니 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제 손은 얼추 비슷합니다. 어린 날 제 손은 말랑말랑하고 뽀얀 모습이었지만 어머니 손은 누리끼리하며 굳은살이 마디마디 박혀 있는데다가 손톱도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머니 지난날 손 모양을 제가 물려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제 저녁 혼자서 제 손톱 모양을 사진으로 한 장 남기면서, 우리 아이가 앞으로 서른세 해를 더 살아낸 다음 스스로 제 손을 들여다볼 날이 있다면 제 아버지(나 어머니) 손을 담은 사진을 돌아보면서, 제 어버이와 제 어버이를 낳고 기른 어버이와 그 어버이를 낳고 기른 어버이를 가만히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그 어느 책에도 이 같은 이야기는 다루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굳이 어떠한 책에서 이 같은 이야기를 다루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느끼고 읽고 삭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교육이나 정치나 경제가 꽃피운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깨닫고 내 이웃 삶을 톺아볼 줄 알 때에 바야흐로 내가 걷는 한길이 얼마나 고맙고 싱그럽고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까지는 제 사진감 가운데 하나인 ‘헌책방’ 한 가지 사진을 날마다 열 장쯤 찍으면서 살아왔다면, 올해에는 제 사진감 가운데 하나인 ‘골목길’ 한 가지 사진을 날마다 60장쯤 찍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진들 가운데 추리고 추려 보니 얼추 3650장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 스스로 제 마음에 아주 들어서 덜고 빼고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제 삶터 골목동네 사진을 날마다 열 장쯤 찍었다고 하겠습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텐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십이월 막바지에 이르며 곰곰이 되돌아봅니다. 그만큼 집식구와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집식구와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좀더 걸음을 잘 걷고 조금 더 자란다면 몸 아픈 옆지기는 집에서 쉬더라도 둘이 골목마실을 할 수 있을 테고, 몸이 조금 괜찮은 날에는 셋이 골목마실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이 고향동네 삶터가 오로지 아파트만 때려짓는 재개발을 멈추지 않아 어쩌는 수 없이 우리 식구 조그마한 보금자리마저 밀려나야 한다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게 함께 골목마실을 할 만큼 큰 다음이라 하여도 서로 웃으며 조용조용 골목마실을 즐길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즐거운 마실은 꿈으로만 그치지 않을까 근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꿈으로 그친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이 또한 제가 걸어갈 길이라고 느낍니다. 가난이, 더 밑으로 내려가는 가난이, 날마다 오늘 끼니를 어떻게 이을까 걱정하는 가난이 저한테 주어진 길이라 한다면, 찍고픈 사진과 쓰고픈 글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우리 삶터 흐름 또한 저한테 주어진 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달게 받아들이되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꾸밈없이 삭여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어떤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킬 수 없다고 느끼는데, 이를테면 헌책방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묶는다든지, 골목동네 삶자락을 글과 사진으로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은 조금도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요사이 문화예술밭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아카이브’ 또한 아닙니다(저로서는 ‘아카이브’가 도무지 무엇인지 아직도 알 노릇이 없습니다만). 저는 그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헌책방을 좋아해서 즐겨 찾아다니며 듣고 보고 느끼고 담았습니다. 골목길 또한 있는 그대로 이곳에서 살아가니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몸뚱이와 눈썰미로 사진을 찍고 글을 썼습니다. 잘나지 않은 주제이나 못나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저 있는 깜냥 그대로입니다. 저보다 가난한 골목이웃이 있으나 이들이 저보다 못살거나 꾀죄죄하거나 불쌍하거나 안쓰럽지 않습니다. 저보다 가멸찬 골목이웃이 있지만 이들보다 제가 못살거나 꾀죄죄하거나 불쌍하거나 안쓰럽지 않습니다. 모두 제 깜냥대로 제 삶길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삶길대로 골목길을 두 다리와 자전거로 돌아다니면서 이 길을 걸었던 지난 1975∼1995년 자취를 오늘과 맞대며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것이라 더 좋을 수 없고 새것이라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옛것은 옛것대로 좋고 새것은 새것대로 좋습니다. 옛삶은 옛삶대로 모셔야 하고 새삶은 새삶대로 아껴야 합니다. 옛길은 옛길대로 고즈넉하고 새길은 새길대로 싱그럽습니다. 다 다른 마디와 고비와 대목이 깃든 길과 삶과 사람과 넋입니다. 다 달리 곱고 즐겁고 애틋한 길이요 삶이요 사람이요 넋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사진기 하나 들고 동네마실을 하는 동안 따로 ‘취재’를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헌책방마실을 거의 날마다 하고 살던 때에도 따로 ‘취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날에는(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헌책방에서 ‘살았’습니다. 헌책방에서 살아온 그대로 헌책방을 사진과 글로 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골목길에서 ‘살고’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살고 있는 그대로 골목길을 사진과 글로 담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교육 따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문화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교육이든 있다면 바로 ‘삶’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삶으로 받아들여 내가 맡은 아이들을 내 식구요 동무요 이웃으로 여기며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에서는 어떠한 이론이 없어도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내 삶으로 껴안으며 시이든 산문이든 희곡이든 수필이든 적바림할 때에는 마땅히 문학이 이루어집니다. 글이 대수입니까? 그림이 대수입니까? 사진이 대수입니까? 춤이 대수입니까? 노래가 대수입니까? 몸짓이 대수입니까? 대수란 바로 삶입니다.

 삶을 알면 사람을 압니다. 사람을 알면 넋을 압니다. 넋을 알면 길을 알고, 길을 아니 이제 시나브로 말을 알 수 있어, 저절로 말이 샘솟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를 하고 예술을 하고 문학을 하고 학문을 한다는 숱한 사람들은 저절로 말이 샘솟도록 ‘제 길을 살아내지’ 않고 있습니다. 억지로 말을 뽑아냅니다. 우물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다가 관정기를 쑥 집어넣고 물을 억지로 빼냅니다. 관정기로 땅을 팔 돈을 어버이한테서 얻든 스스로 일해서 벌든 하고 나서는 억지로 물자리를 알아보고 끊임없이 빼냅니다. 스스로 물길을 트지 않으며, 제절로(저절로) 꾸준히 물이 샘솟을 때까지 스스로를 갈고닦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책만 판다고 학문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학교를 오래 다닌다고 학문이 이룩되겠습니까. 훌륭한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학문이 빛을 보겠습니까. 아닙니다. 학문 또한 삶이기 때문에, 제 삶을 제 발로 디뎌야 합니다. 먼저 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거나 즐기는 세계명작이란 다름아닌 ‘글쓴이 삶이 무르익어 열매로 터져나올 그때까지 조용히 힘을 쏟은 끝에 이루어진 빛’입니다. 억지로 우물파기를 해서 이룬 전기불이 아닙니다.

 나라안에 이름 높은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그림쟁이가 억지로 우물파기를 했을까요. 나라안에 이름 거룩한 김유정이나 이원수나 최명희나 박경리가 어거지로 우물파기를 했는지요. 우물파기로는 ‘우물 파는 데에 들인 돈’만큼 다시 본전치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본전치기가 삶이 되나요?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듯이 대학교 졸업장에 얽매이고 큰회사 높은 연봉에 얽매이는 매무새가 삶이라 할 수 있나요? 큰 차와 넓은 아파트가 삶일 수 있습니까? 영어 일찍 배우도록 하려고 나라밖으로 보내거나 영어마을을 돈으로 때려짓는 일이 삶이 됩니까?

 틀림없이 이 나라에는 영어 ‘천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는 ‘아름답고 해맑게 영어로 제 넋과 꿈을 빛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책방마다 ‘글쓰기 다루는 책’이 넘칩니다. 요즈음 글쓰는 사람 아주 많습니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많이 팔리고 읽히는’ 글ㆍ그림ㆍ사진ㆍ노래ㆍ춤ㆍ몸짓을 넘어, ‘우리 문화와 예술을 빛낸다고 할 만한’ 글ㆍ그림ㆍ사진ㆍ노래ㆍ춤ㆍ몸짓은 얼마나 될는지요?

 아무개 님 책이 수십만 권 팔린다고 하여 아무개 님 책이 우리 삶을 빛내는 문화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개 님 사진이 수천만 원에 팔린다고 해서 아무개 님 사진이 우리 삶을 비추는 예술이라 할 수 있겠는가요.

 내 주제를 알고 내 길을 다스리며 내 삶을 사랑하는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어머니는 나한테 당신 삶을 그 어떤 말로도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일러 주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내 어머니가 보낸 풋풋하고 싱그러운 스물∼서른 나이에 두 손이 누리끼리해지고 손톱 끝이 갈린 해쓱한 얼굴인 채, 제 서른 줄 나이를 보내는 오늘 하루가 고맙고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한 시간을 주물러도 풀리지 않는 어머니 어깨와 다리와 팔다리 뭉친 힘살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몸소 겪고 있는 제 나이값이 반갑고 흐뭇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제 삶결을 그저 그대로 글로 옮기고 사진으로 싣고 책으로 묶습니다. 저로서는 달리 재주가 없기도 하며, 달리 재주가 없어 기쁘기도 하고, 달리 재주가 없는 까닭에 ‘다큐’나 ‘리얼리즘’하고는 처음부터 끈이 맞닿지 않았습니다. ‘문화’니 ‘예술’이니 ‘문학’이니 하는 얼굴하고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예 저한테 주어진 결대로 살아내는 하루하루요, 이 하루하루가 글과 사진이라는 모습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2) 당신이 꾸리는 삶 또한 고스란히 예술


 799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백 군데 남짓 되는 ‘오탈자’를 보고는 끔찍하다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펴낸 곳에서 낸 다른 책을 떠올리면서, 엮음보다는 옮김에서 저으기 아쉬울밖에 없었다고 느낍니다. 아무래도 반 고흐(네덜란드말로 하자면 ‘환 호흐’)라고 하는 사람이 동생과 둘레 사람들하고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묶어내자면, 더없이 만만하지 않은 부피에 눌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나타날밖에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아쉬움이 눈에 자주 뜨여도 책을 읽으며 그리 거리끼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한길을 가는 것이야(111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나는 조용히 한길을 걸어가야 할 뿐이야”로 새깁니다. “사람들은 보는 방식이나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하듯이 책읽는 방법도 배울 필요가 있어(115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나 세상을 사는 길을 배워야 하듯이, 책읽기도 배워야 해”로 받아들입니다.

 제 도서관 한켠에 얌전하게 꽂아 두고 있던 조그마한 책 《고호의 편지》(정음사)를 끄집어 냅니다. 1974년에 벌써 우리 말로 옮겨져 있던 이 책은 이때 뒤로 한 번 더 옮겨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노릇이나 여러 차례 더 옮겨졌는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1974년에 나온 작은 책 하나로도 넉넉했기에, 굳이 다른 새 옮김판을 찾거나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는 그림쟁이 고흐 님이 쓴 편지글을 꽤 많이 실어 놓았습니다. 아쉽게도 모든 편지글을 담은 책으로 여미지 못했으나, 이만큼이라도 만날 수 있는 일은 그지없는 기쁨입니다. 책마을 일꾼이 책과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베풀어 준 좋은 선물입니다.

 책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라고 붙였습니다만, 그림쟁이 고흐 님이 쓴 편지한테는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꾸밈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편지글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는데, 고흐 님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지 않았거든요. 고흐 님 당신이 그릴 수 있는 ‘꾸밈없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바랐습니다.

 우리 나라는 일본 다음으로 ‘반 고흐 그림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로 손꼽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에서 제대로 엮었다 할 만한 ‘고흐 읽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흐 님이 편지글에 손수 쓰기도 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읽는 동안 어렵잖이 깨달을 수도 있는데, ‘감상에 지나치게 젖거나 사상에 지나치게 기울며’ 잘못 읽고 읊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이 그림(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거야. 나는 그런 그림이라고 확신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이는 농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가장 맞는 것을 찾으면 돼. 나로서는 농민을 조합한 그대로 그리는 쪽이, 그들에게 상투적인 감미로움을 갖게 하는 것보다 길게 보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믿어(334쪽).” 같은 말마디처럼 고흐 님 그림에 담긴 넋을 찬찬히 읽으며 이렇게 읽은 이야기를 내 삶으로 담아내고자 애쓰는 분들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좋은 그림에 담긴 좋은 넋을 내 삶으로 담는 분’들은 이름과 소리소문이 하나도 없이 조용히 당신 길을 꿋꿋하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겠지요. 굳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되쓰거나 책으로 낼 일은 아니라 하겠지요.

 그림쟁이 고흐 님은 남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당신한테 주어진 길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면서 당신 깜냥과 주제에 걸맞게 삭여내면서 스스로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그림을 남기거나 대단한 편지를 남긴 고흐 님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답고 좋은 삶을(반가운 쪽으로든 얄궂은 쪽으로든) 꾸린 하루하루이고, 이 하루하루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살아낸 발자취이기에 고흐 님이 오늘날 널리 사랑받거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당신 그림과 편지는 더없이 아름다울밖에 없습니다.

 전시장에 걸리는 그림이어야 아름답거나 훌륭한 작품이겠습니까. 집에서 손수 그려 집 벽에 걸어 놓거나 그저 스케치북에만 모셔 두는 그림이라 하여 떨어지거나 모자란 그림이겠습니까.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고 알뜰살뜰 꾸리고 있다면 누구한테나 당신 삶은 고스란히 문화이고 예술이며 문학입니다. 미국을 다녀왔다고 문화가 되지 않고, 유럽마실을 해 보았다고 예술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키나 마리를 읽었다고 문학이 될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에 담긴 고흐 님 편지글은 우리한테 깃들어 있으나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하여 우리 스스로 일으켜세우지 못하는 숱한 문화와 예술과 문학 실마리를 우리 스스로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애타는 목소리와 애끓는 이야기가 가득가득합니다. 다만, 이 같은 애탐과 애끓음이란 느끼려는 가슴일 때에 비로소 느낍니다. 느끼려는 가슴이 아니라면 그저 ‘아, 나도 고흐쯤은 읽었다구!’로 그쳐 버립니다.
 





 (3) 되읽고 곱읽는 글월


 지난 유월부터 처음 읽어 두 달에 걸쳐 조금씩 곱씹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덮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오래도록 곰곰이 되돌아보았습니다. 느낌글이야 얼마든지 짤막하거나 단출하게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 마음으로는 이 같은 편지글을 짤막하거나 단출하게 섣불리 적바림하기 싫었고, 제가 좋아하는 대로 곁에 놓고 찬찬히 되씹고 싶었습니다.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며 새로 삭이고 거듭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 몇 가지를 간추려서 옮겨적어 봅니다. (4342.12.22.불.ㅎㄲㅅㄱ)


[56∼57, 82, 114, 115, 145∼147, 203, 236쪽]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도록 하렴. 그것이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연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단다 … 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처럼 펜도 종이를 따라야 하는 거야 … (예술은) 사람들이 옳게 이해하고, 사물을 왜곡하지 않는 경우에 한정되고, 그 사람의 인격의 참모습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어 … 사람들은 굴뚝 위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오는 것을 볼 뿐, 그대로 지나쳐 … 예술가는 언제나 처음에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게 마련이지. 그러나 자연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런 저항에 기가 꺾이기는커녕, 자극으로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자연과 성실한 예술가는 하나가 되는 거야 … 모든 주의를 그 나무에 집중하여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노력한다면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저절로 만들어진단다 … 만일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고 그냥 그대로 계속한다면 현상에 머물거나 답보하면서 후퇴하겠지 … 생명이 있는 존재를 소묘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정말 어렵지만 멋진 일이지 …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은 화가들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야.

[58, 64, 80, 95 177, 236쪽]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 사람들이 멋지고 소박한 눈을 가졌다면, 그 눈 속에 수많은 대들보가 없다면 말이야 … 삶에서 우리의 몫이 신의 나라 속의 가난한 자, 즉 신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인지 물어 보자 … 아우야, 낙담과 병과 분쟁을 만날 때마다, 이러한 시간을 우리에게 내린 신에게 감사하도록 하자. 그리고 온화한 마음을 잃지 말도록 하자 …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살기 때문이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마케도니아 사람 같은 인간, 괴로운 생활을 보내는 노동자에게 힘을 주고 위로하며 계몽할 수 있는 주님이기 때문이라고 … 성직자들이 말하는 신은 나에게 완전히 죽었어 … 예술은 끈질긴 작업,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 작업, 그리고 끝없는 관찰을 요구하는구나. 끈질기다라는 말은 무엇보다 쉼 없는 노동을 뜻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해. 





[100, 126∼127, 211, 246, 412쪽] 갱부들과 사귀려면 그들의 심정을 알고, 그 기분을 나누어야 해. 다라서 교만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는 금물이야 … 광부나 방직공은 아직도 다른 노동자나 직공들과는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고,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단다. 언젠가 이들의 모습을 그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 점점 이 가난하고 슬픈 노동자들, 소위 최하층 인간들, 가장 경멸받는 사람들, 보통사람들이 전혀 근거 없이 마치 범죄자나 악당처럼 생각하는, 그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감동적인 무엇, 비통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어 … 신 앞에서 정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해. 옳은 일을 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는 거야 … 나는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저질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 … 그러나 옛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새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104, 137, 203, 235, 325, 413쪽] 나는 대학에서 죽을 각오로 공부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수명을 다하고 죽는 편이 좋아. 가끔 독일인 계절노동자에게 배우는 것이 그리스어 수업보다 더 도움이 돼 … 나는 반드시 땅을 파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경작하는 남녀를 쉬지 않고 그려야 해 … 이제 나는 화상이나 화가들을 쫓아다니지 않기로 했어. 그들이 누구라도 말이야. 내가 쫓아다녀야 할 사람은 모델뿐이야. 모델 없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래 …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야 …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스러운 사람, 불쾌한 사람일 거야 … 그래, 좋아,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언젠가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괴팍한 사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의 가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겠어. 그것이 내 야망이야. 그것은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하고, 열정이 아니라 평온한 느낌에 근거하는 거야 …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막신을 신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말, 즉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에서 농민이 만족하는 정도에 자신도 만족한다는 점이야. 밀레는 그것을 실천했고, 사실 그밖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이는 이스라엘스나 모베처럼 꽤나 사치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이 보여주지 않은 길을, 밀레가 인간으로서 화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해 … 네가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놀랐어. 아니야, 사랑하는 어린 누이야, 차라리 춤을 배우고, 공무원이든 장교든 간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렴. 요컨대,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더 많은 바보짓을 하렴. 공부란 사람을 둔하게 만드는 것 외에 어떤 목적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 





[110, 178, 195, 261, 324, 410쪽] 너도 잘 알 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 나도 그걸 알고 있고, 내 꼴이 충격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러나 생각해 봐. 그것은 내가 외모를 꾸미는 일에 환멸을 느낄 뿐더러 그런 데 쓸 돈이나 재산이 없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것은 자신의 공부에 깊이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해 …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삶은 정말 경이로운 거야 … 내가 아버지에게 진실을 말씀드렸다고 해서, 심지어 이성을 잃고 신랄하게 말씀드렸다고 해서 내가 아버지를 적으로 본 것은 아니야. 단지 아버지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뿐이지 … 작은 바다 스케치에는 황금색의 부드러운 효과가 있고, 숲 스케치는 더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야. 인생에는 두 가지 모두 있다는 게 기뻐 … 나는 밀레가 “나는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가 그 자신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 …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에게도 싹을 틔우는 힘이 있어. 따라서 자연스러운 생활이란 싹을 틔우는 거야. 곡식의 싹을 틔우는 힘이란, 우리에게는 바로 사랑에 해당하지.

[113, 155, 169, 175∼176, 280, 493쪽]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기란 정말 어려워. 지금 내가 직장을 잃고, 몇 년 동안 직장 없이 살고 있는 이유의 하나는 자신들과 생각이 같은 자들에게만 일자리를 나눠 주는 신사들과 생각이 달라서야 …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 너나 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냥 사랑하는 것이고, 그게 전부가 아니겠니? 그러니 실의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불과 빛을 끄지 말고 머리를 맑게 유지하도록 하자 … 당신도 언젠가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어. 그럴까, 교수도 사랑에 빠질까? 성직자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까? …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새벽녘에도 곁에 친구가 있음을 발견하면, 세상살이가 더 즐겁지 않겠니? 그것은 성직자들이 사랑하는 교훈적인 일기나 교회의 흰 벽보다도 훨씬 즐거운 것이야 … 구빈원 노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들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비록 이스라엘스가 그들을 완벽하게 그렸지만,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는 것이 놀라워. 여기 헤이그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세계가 존재하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야 … 어떤 사람은 색채의 뛰어난 관현악법을 알고 있으나, 사상이 결여되어 있네.

[266∼267, 311, 353, 388쪽] 실패를 거듭한다고 해도, 가끔은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해 … 중요한 것은 행동이지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점이야. 나는 원칙이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인정될 수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 원칙만 나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칙으로부터도 얻을 게 전혀 없지만, 네가 말한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마음을 다잡고 사려 깊게 산다면, 위대한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 위대한 일은 우연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야 … 나는 우리가 자연 자체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또 자연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틀리에 작업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네 … 나는 “밭갈이하는 농부에게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 농부는 진짜 농부여야 하고, 밭 가는 사람은 밭을 갈아야 그 그림은 진정으로 현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이야 … 그 누구보다 평온했던 코로는 봄을 깊게 느꼈고, 평생을 노동자처럼 간소한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타인의 불행에 언제나 민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297, 333∼335쪽] 사람은 왜 평범하게 되는가? 그건 세상이 시키는 대로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순응하고 타협할 뿐, 결코 세상에 반대하지 않고 그 의견에 얌전히 따르기 때문이야 … 나는 램프의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의 감자를 먹는 그 손으로 대지를 팠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어. 따라서 그 그림은 손 노동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양식을 정직하게 얻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나는 우리들 문명화된 인간들의 생활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어. 따라서 나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도 모른 채 감탄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아 … 언젠가는 이 그림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거야. 나는 그런 그림이라고 확신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이는 농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가장 맞는 것을 찾으면 돼. 나로서는 농민을 조합한 그대로 그리는 쪽이, 그들에게 상투적인 감미로움을 갖게 하는 것보다 길게 보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믿어 … 만일 그 소녀가 귀부인의 옷을 입는다면 본래 개성은 사라져 버릴 거야. 농민은 일요일, 신사용 코트를 입고 교회에 갈 때보다 무명옷을 입고 들판에 있을 때가 더 멋지거든. 마찬가지로, 나는 농민화를 상투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 … 농민화에 향수 냄새가 나서는 안 돼 … “웬 쓰레기 같은 그림야!”라는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지만, 그것은 각오해야 한다. 나 자신도 그렇듯이. 그래도 우리는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해 … 농민을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들 자신과 같이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려야 해.

[326, 339, 345∼346, 348쪽] 밀레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쓰는 이유는, 도시 화가들이 그린 농민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역시 파리 근교의 농민을 생각나게 할 뿐이라고 네가 지난번 편지에서 썼기 때문이야. 나도 같은 인상을 받았어. 이는 그 화가들이 인간적으로 농민생활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밀레는 또 말했지. 예술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 아무리 견고한 기초를 다진 신앙이나 종교도 결국은 썩어 버리고 말지만, 농민들의 삶과 죽음은 언제나 똑같이 이어진다는 거야 … “천사를 그린다니! 흥, 누가 도대체 천사를 보았지?”라는 쿠르베의 말에 남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계속 말하고 싶어. “〈하렘의 재판〉이라니! 흥, 도대체 누가 하렘의 재판을 보았지?”라고 … 그 모든 역사화들이, 보지도 못한 것을 계속 높이거나 넓혀 온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모두 무엇을 위해 그런 그림을 그렸는가? 그것들은 대개 몇 해가 지나면 진부하고 재미도 없으며 더욱더 따분한 것이 되어 버릴 텐데 말이야.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그림을 잘도 그렸으니,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하겠지 … 나는 그 모든 이국적인 그림이 아틀리에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 밖으로 나가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모든 일이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어 …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농가에 살면서 농민처럼 들판에 나가야 한다는 거야. 여름에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 겨울에는 눈과 서리를 참아 가며, 실내가 아닌 툭 트인 야외로 나가, 잠시 산책하는 게 아니라 하루 진종일 농민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야. 





[371, 492, 520, 535∼536쪽] 현실의 삶 자체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지. 나는 길거리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귀부인보다 하녀가 흥미롭고 더욱 아름다워. 그런 평범한 남녀 속에서 기력과 활력을 발견한단다. 만일 그들을 그 특유의 성격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확고한 붓놀림과 간단한 기술로 그려야 해 … 정확한 소묘, 정확한 색채를 추구하는 건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색이나 무엇으로 정착시키려고 해도,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사진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야 … 수확을 그리는 동안, 내 일은 수확하는 농부들보다 더욱 힘들었어 … 이곳에 온 어느 날, 어떤 화가가 이렇게 말하더군. “이런 걸 그리기는 너무 지리할걸.”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네. 이 풍경이 너무나 훌륭했기에 그 바보 녀석을 야단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지.

[414∼415, 571, 608, 662, 773쪽] 책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하렴. 그림을 그리렴. 생명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생한 인간이어야 해 … 가능한 많이 즐기고, 가능한 한 재미를 느끼렴 …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 마라. 그것은 독창성을 고갈시킬 뿐이야 … 파리에는 나막신 그림이 전혀 없어 유감이야 … 파리에서 나는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밖에 배우지 못했어 … 마치 자신이 꽃인 듯이 자연 속에 사는 그런 일본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아닐까? 더욱더 즐거워지고, 더 행복해지며, 인습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나 노동과는 반대로,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일본 미술을 연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 모든 게 인상주의인 인상주의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 돼. 결국 다른 무엇인가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는 안 돼. 확실히 색채는 인상주의를 통해 진보했어. 비록 길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이미 그들 이상의 경지에 이르렀어. 그리고 거의 색채를 갖지 않은 밀레는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지! … 나는 조카녀석을 자주 생각한단다. 모든 신경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아이를 키우는 쪽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지만, 발길을 돌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바라기에는 지금 너무 늙어 버렸다고 느끼고 있어. 





[504, 663, 707쪽] 도대체 언제쯤 나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는 그 그림을? … 화가는 자신이 본 대로 그리면 위대한 인간으로 남아 …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는 것은 좋은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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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2-2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 글은 언제 읽어도 좋은데 의외로 알라딘에선 오시는 분이 드므신것 같아요.참고로 전 프리첼 시절부터 된장님 글을 많이 읽었읍니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 서른 살, 사회과학을 만나다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5
손석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뒷걸음치는 지식인과 뒤로 가는 우리 삶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17] 손석춘과 일곱 사람, 《후퇴하는 민주주의》



 어제는 아침부터 여러 시간 찬바람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느라 손가락과 발가락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일터인 도서관으로 돌아와서도 삼십 분 넘게 손발가락이 안 녹아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아파 했는데, 겨우 손가락을 녹이고 나서도 저녁나절까지 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도 힘들고 고되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오늘 아침에는 여느 날보다 두 시간쯤 늦게 일어났습니다.

 이리하여 일요일 아침에 골목마다 하얗게 드리운 솜털 같은 눈밭을 뒤늦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어제 괜히 실장갑 하나만 끼고 자전거로 마실을 나왔다가 몸을 축낸 탓에 오늘은 좋은 모습을 많이 놓치고 말았는데, 아쉽게 놓친 모습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금 눈발이 솔솔 날리며 이 아쉬움을 씻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몸을 잘 건사하면서 살아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래도 눈송이가 고이 내려앉은 샛골목을 찾아다니며 두 시간쯤 돌아다닙니다. 아픈 다리를 쉬려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겨울 골목 풍경’을 촬영기에 담는 방송국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인 일로 방송국 분들이 이렇게 후미진(?) 골목까지 다 찾아왔는지 궁금합니다만,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결에 “저기 김 나오는 모습 찍어.”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들이 골목 한켠에 자리잡고 찍느라, 굳이 이 골목으로 돌아오며 사진으로 담으려던 한 가지 모습을 못 찍고 가야 합니다. 뭐, 저야 모레이고 글피이고 다시 찾아와서 다시 찍으면 되기는 합니다. 늘 다니는 골목길이요, 언제나 하는 골목마실이니까요. 다만, 오늘 이 골목을 찾아온 방송국 분들한테는 바로 오늘 본 이 모습이 당신들 눈에 비칠 뿐 아니라 당신들 가슴에 새겨지는 골목 풍경이 되겠지요. 오래도록 꾸준히 지켜본 눈길이 아닌, 바로 오늘 한 번 와 본 취재길이니까요.


.. 텔레비전 화면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화려한 집안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의 아들딸은 건방지지만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꼭 가난한 누구와 사랑을 나누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 젖어들어 자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적대감을 해소시켜 가고 있습니다 ..  (손석춘/19쪽)


 ‘로모’ 사진기로 사진을 퍽 오랫동안 즐겨찍는 선배하고 만나 사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배한테서 ‘렘브란트 빛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 더없이 햇빛이 좋을 때를 가리키는 빛살이라고 한다는데, 저 또한 골목마실을 하면서 이러한 빛살을 느낍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철마다 어느 때에 빛살이 더없이 고운 줄 느낍니다.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어느 때에 빛결이 그지없이 맑은 줄 느낍니다. 1일부터 31일까지 날마다 어느 때에 빛무리가 참으로 예쁜 줄 느낍니다.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하루 동안 빛줄기가 어떻게 달라지며 그때그때 어떤 이야기로 나한테 다가오는지를 늘 새롭게 느낍니다.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저한테는 ‘빛이 가장 좋은’ 때란 없습니다. ‘빛이 가장 나쁜’ 때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때그때 다른 이야기가 있기에, 빛이 더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이야기를 엮어 내는 빛’인지를 살필 노릇입니다. 저로서는 ‘어떤 이야기가 깃든 빛’인가를 느낄 노릇입니다.

 로모 사진을 찍는 선배는 “종규 씨하고 골목마실을 한 필름을 찾고 보니, ‘사는 사람’이 아니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말을 알겠어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날은 빛이 썩 좋지 않을 때였어요. 겨울에는 해가 일찍 떨어지니까 그때에는 사진을 거의 못 찍거든요.” 하고 대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꺼내는 말은 저 스스로 앞뒤가 어긋납니다. 저한테는 빛이 좋고 나쁠 때가 없다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빛이 좋고 나쁠 때가 있다고 했으니까요. 왜냐하면 저는 이 동네에 늘 살면서 늘 모든 이야기를 몸으로 삭이는 사람이고, 선배는 어렵게 한 번 먼 마실을 하면서 돌아다닌 사람이거든요. 어렵게 한 번 찾아왔는데 까르띠에 브레송이 담은 ‘바로 이때’ 같은 빛살을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동지날이 가까와 오는 12월에 접어든 날은 한낮인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아야 빛살이 퍽 곱고 예쁜데, 이때를 놓친 채 골목마실을 했기에 겨울골목 고운 빛줄기를 함께 느끼지 못했거든요.


.. 진짜 행복을 가지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뽑힌 이유는 참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짭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이명박을 뽑은 것이지요 … 지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인 것처럼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이명박, 작은 이건희인 우리에게 성찰 없는 분노는 카타르시스죠 … 남보다 잘살고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불편해하는, 같이 가고 연대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혁명입니다 ..  (김규항/46, 52, 56, 60쪽)


 사진 선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문득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수첩에 몇 글자 끄적입니다. 선배는 ‘지식인들이 왜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쓸까?’ 하고 묻는데, 제 깜냥으로 오늘날 우리 지식인을 돌아볼 때에 ‘지식인다운 밥그릇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생각있는 대학생들이 졸업논문을 쓸 때에 쉽고 바르고 깨끗한 말을 쓰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쉽고 바르고 깨끗한 우리 말로 논문을 쓰면 논문심사에서 떨어진다’면서, 교수들이 바라는 대로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한자말이 가득가득한 논문을 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나마 생각있다는 대학생들이 이처럼 논문을 쓰는 일은 논문 하나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논문을 쓰는 동안 생각있던 대학생들은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말로 마음밭을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다스린 마음밭에 따라 동무나 식구나 이웃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으레 ‘어렵고 딱딱하고 얄궂고 뒤틀린’ 말이 튀어나옵니다.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애써 털어내거나 씻어내려고 해도 좀처럼 털어내지 못하며 도무지 씻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도권교육은 이 같은 길들이기를 노리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말을 쓰면서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생각을 가꾸다가는 맑고 쉽고 바르고 알맞춤한 삶을 꾸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는 속셈인지 모릅니다.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까지. 아니, 대학교에 들어간 머리 좀 똑똑하다는 이들이야말로 제도권에 확 틀어박히도록 길들어 놓고자 이러한 길을 걷는지 모릅니다. 지난날 실학자 가운데 몇몇 사람만 겨우 ‘한글’로 함께 글을 썼지만, 거의 모든 지식인은 양반 사대부끼리 알아먹는 한문으로만 글을 썼습니다. 농사꾼은 한글도 잘 몰랐다고 할 테지만, 이 나라 낮은자리 여느 사람하고 주고받을 만한 글을 쓴 지식인은 지난날에 1%가 안 됩니다. 이 흐름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독재정권이 짓누르고 있던 때에도 썩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늘날이라고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10년을 앞두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쉽고 바르고 깨끗하며 싱그럽고 알차고 알맞춤한 우리 말’로 글을 쓰고 말을 하며 책을 내놓는 지식인을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까. 저잣거리 일꾼이 알아먹을 책을 인문사회과학책으로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이 됩니까? 이마트 일꾼뿐 아니라 골목동네 작은 가게 일꾼들이 즐겁게 받아 읽을 문화예술책을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 있습니까? 아이 키우느라 바쁘고 고된 어버이한테 손쉽고 신나게 읽힐 교육책이나 정치책이나 경제책을 써내는 지식인이 몇 사람 있습니까?


.. 집이 몇 채건, 갖고 있는 집 가격을 합쳐서 7억 5천만 원이 넘는 사람이 38만 가구입니다 … 집값이 7억 5천만 원은 안 되지만 그래도 집을 한 채 이상 갖고 있는 ‘집은 있는 놈’이 두 번째 계급이에요. 이런 분들은 836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절반이 넘는 54퍼센트 정도 돼요 … 500만 가구 가까이, 전체 국민의 3분의 1정도 되는 분들은 전월세 보증금이 5천만 원도 안 돼서 집값이 설령 반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자기 집을 장만하는 것이 쉽지 않은 분들이에요. 이들이 5계급이에요 ..  (손낙구/99∼101쪽)


 잡지 ‘작은책’ 강의를 그러모은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읽습니다. 강사로 나온 분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외칩니다. 우리 나라 민주주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고. 뭐, 말장난이 아니라 참말 우리네 민주주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 할 만한데, 강의에 나선 분들 가운데 ‘뒷걸음’을 말하는 분은 없습니다. 모두 ‘후퇴(後退)’를 들먹입니다. 따지고 보면, 책이름부터 ‘후퇴하는’이지 ‘뒷걸음치는’이나 ‘뒤로 가는’이 아닙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잡지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이 손쉽게 사서 손쉽게 들고 다니며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먹물깨나 드신 분들이 이 잡지에 쓰는 글은 ‘손쉽지’ 않았습니다만, 손쉽게 읽히고 손쉽게 글쓰기를 나누고자 무척 애써 왔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잡지 하나가 이토록 애쓰고 몸부림치는 동안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애쓰거나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까요. 이 나라 민주주의가 뒤로 가고 있는 동안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얼마나 몸을 바치고 마음을 쏟고 있었을까요. 민주주의를 이루는 뿌리나 바탕이나 알맹이가 뒤로 가지 않도록 이 나라 지식인들은 얼마나 땀을 쏟았을까요.

 말은 지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책은 지식으로 엮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지식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말은 삶으로 나눕니다. 책은 삶으로 엮습니다. 사진은 삶으로 찍어 이룹니다.

 우리 식구들한테 곱고 따순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밥을 하기에 집밥이 맛있습니다. 집밥을 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밥집은 집밥을 먹듯 맛있어 맛집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우리 식구들하고 똑바르고 올바로 생각을 나누고 싶으며 글을 쓰기에 살림글(생활글)이 싱그럽고 재미있고 눈물겹고 웃음이 묻어납니다. 살림글을 쓰는 매무새로 학문을 하고 철학을 펼치며 문화와 문학을 이루고자 힘쓰기에 이 같은 손품이 담긴 책은 오래도록 꾸준히 읽힙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좋아할 수 있도록 찍기에 사진 한 장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디에 내보이거나 공무전에 붙으려는 작품이기 앞서, 나한테 가장 살가운 사람부터 반길 수 있도록 찍는 사진이라면 사진잔치를 안 열고 사진책으로 묶지 않아도 널리널리 아름다움을 퍼뜨리며 함께합니다.


.. 어디 가서 나하고 같은 학교 나온 사람 만나면 그때부터 말 놓고, 그냥 완전히 집에서 하듯이 퍼집니다. 그리고 아닌 사람들 만나면 괜히 이질감 느끼고, 위화감 느끼고. 이 때문에 공공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 대학 와서 전공 학문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데 어떻게 대학 교육이 정상적일 수 있습니까? 작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서울대 출신 가운데 법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절반을 넘습니다 ..  (김상봉/136, 142쪽)


 여덟 사람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펼친 《후퇴하는 민주주의》는 우리 삶터가 어느 길을 따라서 흐르는가를 잘 짚고 다룹니다. 여덟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당신들 깜냥껏 애쓰고 힘쓰는 모양새가 책 갈피마다 잘 스며 있습니다. 내세우는 책이 아니라 나누는 책임을 이 조그마한 책은 알뜰히 보여줍니다.

 참 야무지다 할 만합니다. 퍽 쏠쏠하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책을 덮으며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어딘가 허전합니다. 목소리는 다 옳고 맞구나 싶은데 활활 타오르는 심장 한복판을 찌르는 말마디는 찾기가 어려워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하나같이 알차고 다부지구나 싶은데 뜨겁게 샘솟는 눈물방울을 느낄 만한 글줄은 보이지 않아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겨울을 더욱 춥게 느끼면서 이 추운 겨울날 몹시 추위를 타면서 지낼 이웃이 누구인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에도 이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통계 숫자’만 달라진 채 다시금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지식인들이 뒷걸음을 친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아니 우리네 훌륭한 지식인들이 뒷걸음을 친다고는 보이지 않으나, 아무래도 앞걸음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스스로 한 가지 허울 두 가지 껍데기 세 가지 얼굴 네 가지 탈 다섯 가지 이름조각 여섯 가지 지갑 일곱 가지 자동차 여덟 가지 아파트 아홉 가지 가방끈을 내려놓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가지 굳은살 두 가지 손품 세 가지 다리품 네 가지 자전거 다섯 가지 작은 보금자리 여섯 가지 낮은 어깨동무 일곱 가지 품앗이 여덟 가지 함께살기 아홉 가지 눈물웃음을 얼마나 붙잡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마침 그무렵 김문수 씨와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만나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름대로 설명을 했어요. 그런 사람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 사람이 아마 이러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논리와 세계관을 이렇게 합리화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설명을 했더니 그 노동자가 “아휴, 난 뭐 단순하고 무식해서 그렇게 복잡한 이야긴 잘 이해가 안 되고요.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십니까? 배운 놈은 다 똑같다, 그런 생각밖에 안 납니다. 여기 구로동에 있는 운동 공간들 가 보세요. 그게 다 학생운동 출신들이 와서 만든 공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운동 출신들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지 보세요. 노동자들만 남아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몇 번 겪었어요. 그러면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전에 ‘똑같지 않은 놈이 한 놈 정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하종강/207쪽)


 우리가 아름답게 설 수 있는 길을 이야기로만이 아닌 몸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참다운 지식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민주주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스럽게 손잡을 수 있는 길을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들려줄 때 바야흐로 참된 지식이요 슬기이며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고운 몸짓과 맑은 눈길로 어우러질 수 있는 길을 글쪼가리 아닌 꾸덕살로 펼쳐 낼 때 시나브로 참말이고 참앎이며 왼날개와 오른날개가 다 다르게 빛나는 민주주의가 되리라 믿습니다. (4342.12.20.해.ㅎㄲㅅㄱ)


 ┌ 《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2009)
 ├ 글 : 손석춘, 김규항, 박노자, 손낙구, 김상봉, 김송이, 하종강, 서경석
 └ 책값 : 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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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으로 모두 빼앗겨도 다시 사랑을 꿈꾸는 사람
 [살가운 만화 51] 데즈카 오사무, 《아돌프에게 고한다 1∼5》



- 책이름 : 아돌프에게 고한다
- 글ㆍ그림 : 데즈카 오사무
- 옮긴이 : 장성주
- 펴낸곳 : 세미콜론 (2009.9.28.)
- 책값 : 한 권에 9000원씩



 (1) 명품이 떠도는 나라에서


 요즈음, 그러니까 2010년을 코앞에 둔 요 몇 해 사이에 새로 문을 연 가게가 많은 골목을 거닐 때에는 ‘걷는 맛’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1990년대부터 문을 연 가게가 많은 골목을 거닐 때에도 ‘걷는 맛’은 잘 못 느낍니다. 1980년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간 가게가 깃든 골목에서는 어느 만큼 ‘걷는 맛’을 느낍니다. 1970년대나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가게와 집이 깃든 골목에서는 발걸음을 아주 늦추면서 ‘걷는 맛’을 그지없이 느낍니다.

 1950년대나 이에 앞선 일제강점기부터 이루어진 골목을 거닐 때에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걷는 맛’이 아닌 ‘사는 맛’을 느낍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들 땀내음과 손자국이 깊이 배인 터전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고작 쉰 해나 서른 해밖에 안 된 길과 집을 만나면서도 가슴이 뿌듯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무를 바라볼 때에도 스무 해나 서른 해쯤 키가 자란 나무를 보면 가슴이 뿌듯한데, 우리는 숱한 전쟁과 식민지와 봉건제도 탓에 백 해뿐 아니라 즈믄 해나 두 즈믄 해를 살아낸 나무를 껴안기 몹시 힘듭니다. 기껏 만난다고 해 보아야 천연기념물이라 하여 줄기를 만질 수 없는 나무뿐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받아들일 오래된 나무가 없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요, 온삶이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동네가 없는 이 나라 한국입니다.


..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은 비천한 민족이라며 박해당한다던데, 일본도 똑같아요. 전 일본인이 되려고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싸워야 해, 아돌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단다. 울상 짓고 멈춰 있으면 안 돼. 차별과 탄압에 맞서서 싸워야 해.” ..  (1권 146쪽)


 제가 태어나고 어린 나날을 보냈으며 오늘 하루도 옆지기와 아이하고 살림을 꾸리는 인천이라는 곳은 ‘명품도시’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품도시’라는 이름은 인천만 내걸고 있지 않더군요. 창원, 구미, 아산, 수원도 내거는 한편, 서울 서초구와 새만금명품복합도시까지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는 구청임에도 스스로 명품도시라고 내세우는 모습이 남다르다고까지 할 텐데, 그만큼 쓸 돈과 쓰는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나라 곳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명품도시란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어떠한 곳을 두고 명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도시는 명품이 되어야 할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어떠한 도시가 되어야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가운데 명품이라는 이름이 붙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서 명품이라고 내거는 곳치고 예부터 이어온 문화나 역사나 예술이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는 곳은 없다 할 만합니다. 아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높직한 주상복합 아파트나 건물을 올려세우는 도심지가 있는 곳이 명품도시인 듯 여깁니다. 돈으로 올려세우면 명품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돈을 발라 놓으면 명품도시가 이룩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가꾸는 명품이란 없다고 여기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일구는 명품도시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명품’이라고 할 때에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살아숨쉬는 아름다움이 아닌 돈을 많이 들인 값어치에 치우쳐 있으니, ‘도시를 가리켜 명품이라 하는 자리’에서도 똑같을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다부진 속알을 살피지 않는 우리 삶인데, 공무원과 개발업자들이 겉치레로 명품을 외치는 일은 나올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 “여긴 부랑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오래 계실 필요 없습니다.” “잠깐 멈춰요. 좀 걷고 싶은데, 안 될까요?” “무슨 말씀을, 여긴 극히 위험한 곳입니다! 부랑자들이 우글거립니다!” ..  (2권 116쪽)


 그렇지만 나라밖 마실을 나가는 사람들은 유럽땅을 비행기로 밟으면서 ‘역사 깊은 모습’에 입을 쩍 벌립니다. ‘역사 깊은 골목’과 ‘역사 깊은 집’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합니다. 수없이 사진으로 찍고 글을 쓰며 서로서로 느낌을 나눕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어느 도시이건 시골이건 이 땅에 걸맞게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에는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는 이들이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ㅅㄱㅇ대학을 나왔다손치더라도 옳은 길을 가지 못한다고 나무라는 우리 스스로, 수수하고 투박할지라도 옳은 길을 가고자 힘을 모두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 모습을 사진으로 꾸밈없이 담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 이 땅 삶과 사람을 꾸밈없이 글로 담아내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치지만 우리 스스로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적게 벌고 적게 쓴느 작은 사람으로는, 아니 굳이 많이 쓰고 자시고 할 까닭 없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쓰며 알맞게 나누는 사람으로는 살아내지 못합니다.


..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그 정도로 철저하게 교육하면 좋겠어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을 한 명도 남김없이 쫓아내려면, 아이들한테도 유대인을 죽이는 것 정도는 가르쳐야 해요.” “흥, 그런 식으로 교육했으니까 나처럼 형편없는 살인자가 나온 거야!” “당신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죠? 그놈들은 냉혹하게 부녀자들을 살해했어요, 수백 명이나. 유대인을 죽이는 건 올바른 일이에요.” ..  (5권 220쪽)
 





 (2) 경쟁이 떠도는 나라에서


 두 살이 된 아기는 곧 세 살이 됩니다. 세 살이 되면 네 살이 다가오고 머잖아 다섯 살이 될 테며, 여섯 살과 일곱 살도 금세 찾아오리라 봅니다. 벌써부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다음을 걱정할 일은 없다 할 만하지만, 걱정할 일은 없어도 생각할 일은 많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우리 식구는 예방주사를 맞히지 않을 생각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맞힐 텐데 어떡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앞서 제도권학교를 보내느냐 마느냐를 생각해야 하며, 아이한테 어떤 말을 가르쳐야 하는지와 아이한테 영어를 언제 어느 만큼 가르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 또래는 죄 학원에 가고 없을 텐데 또래를 어떻게 사귀거나 어울리도록 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안학교에 넣을 생각이라면, 마땅하고 알맞춤한 대안학교가 있는 동네로 우리 살림을 아예 옮겨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해야 합니다.


.. “잘 들어라, 아돌프. 히틀러 소년단에선 유대인이 세상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 쓰레기인지 낱낱이 가르쳐 준단다.” “우리들의 우정을 갈라 놓지 마세요, 제발!” “……” “교장 선생님, 아돌프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아돌프 아버지는 이미 저 아이의 아돌프 히틀러 슐레 입학 수속을 끝냈습니다. 일단 입학하고 나면 유대인 친구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겁니다.” ..  (1권 204∼205쪽)


 나중에 아이 스스로 바란다면 제도권학교라도 얼마든지 보낼 생각입니다. 아이 스스로 아무런 학교를 바라지 않는다면 아무런 학교로도 보내지 않을 생각이며, 다만 대안학교를 알아보고 한번 겪어 보도록 한 다음 그만두더라도 그만두라고 할 생각입니다.

 대안학교라 할지라도 경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도권학교라 할지라도 경쟁이 조금이라도 없으면 한번 보낼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나 옆지기가 나온 예전 학교를 비롯하여 앞으로 우리 아이가 다닐 학교라 한다면 ‘배우는 곳’, 이른바 ‘배움터’여야지, 싸우는 곳인 ‘싸움터’나 ‘겨룸터’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이야기는 서로 겨루라는 지식이 아닌 서로 도우라는 앎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깨동무를 하라는 배움터여야지, 나 홀로 잘되거나 이름을 높이라는 겨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왼손은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못 쓴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럼, 앞으로도 쭉 전쟁터에 안 나가도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에코 씨1 손을 못 쓴다는데 기뻐하란 말입니까?” “죄송해요. 그치만 전쟁터에 끌려가면 왼손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목숨을 건진 셈이잖아요. 도게 씨, 아버지처럼 덧없이 목숨을 버리시면 안돼요.” ..  (3권 75쪽)


 그러나 우리 세 식구 살아가는 오늘 하루에도 숱한 겨룸과 다툼이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집에서 서로 복닥복닥 지내고 있으니 바깥일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할 만하지만, 오늘도 새벽부터 지옥철은 끝없는 사람물결로 악다구니판이 이루어졌을 테며, 서울을 한복판에 놓고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여느 노동자는 여느 노동자대로 온몸이 지치도록 시달리고 있겠지요.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시험점수로 시달리며, 대입 턱걸이인지 미끄러짐인지를 놓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테고, 새로 입시지옥에 뛰어들 아이들은 다가올 겨울방학이 방학 같을 수 없습니다.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닌, 더 돈을 버는 삶을 바라고 있거든요. 더 사랑스러운 삶이 아닌, 더 이름값을 높이는 삶을 바라고 있거든요. 더 빛나는 삶이 아닌 더 큰 힘(권력)을 바라고 있거든요.


.. “애국심이 왜 싫어요?” “아니, 그건 오로지 전쟁을 위해서 이용당하는 개념에 불과해. 일본인이 함부로 떠드는 ‘야마토다마시’란 말을 듣고 만주인들이 얼마나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난 몇 번이나 목격했어. 남들한테 경멸당하고 미움받는 애국심 따윈 질색이야!” ..  (4권 44쪽)


 곰곰이 따지면, 명품이 있기에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기에 전쟁이 터집니다. 전쟁을 부르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치고박고 겨루면서 제 밥그릇을 더 키우려는 움직임이 있고, 제 밥그릇을 더 키우려는 곳 어디에서나 명품 가꾸기에 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가용을 버릴 수 있는 삶을 꾸려야 이라크파병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우리 스스로 자가용을 버릴 수 있는 삶이란 내 몫이 적거나 거의 없어도 흐뭇하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내 앞가림에 앞서 어깨동무를 생각하는 삶이며, 나 혼자 잘 되자는 삶이 아니라 다 함께 잘 되자는 삶입니다. 석유뿐 아니라 전기를 덜 써야 하는 삶이라기보다 석유를 비롯한 지구자원을 쓰기는 쓰되 알맞게 쓸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이고, 자가용을 아예 안 타야 한다는 소리라기보다 자가용을 타려면 타되 알맞게만 타고 넘치게 타거나 쓸데없이 타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을 뽐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지 않으면서 내 마음밭을 가꾸려는 삶이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내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고 다른 이 터전인 골목동네를 밀어붙이지 말며, 내 일자리가 정규직이기를 바라면서 다른 이들은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에 얽매인 채 고달프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목숨을 받아먹으며 내 목숨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 땀방울이 있기에 내 삶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 터전이 있기에 이곳에서 먹을거리 입을거리 쓸거리를 고맙게 얻습니다.
 





 (3) ‘데즈카 오사무’가 남긴 만화


 만화책 《아돌프에게 고한다》 다섯 권을 읽었습니다. 한 권에 9000원짜리로 나온 판이기에 다섯 권이면 퍽 비싸다 할 값입니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 님이 이 만화책에 담은 넋과 뜻이 있기에 사만오천 원이라는 책값을 기쁘게 치르며 장만합니다. 또한, 인터넷책방에서 십 퍼센트 눅은 값으로 장만하지 않고 동네책방에서 온돈을 다 치르고 장만합니다.


.. “하지만 당신은 변했어요.” “변하다니, 어떻게?” “나치당에 들어간 다음부터 예전하고는 달라졌어요.” ..  (1권 211쪽)


 1989년에 세상을 떠나기 앞서 몇몇 작품은 미처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다고 하는 데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그래서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당신이 당신 손으로 마무리를 지은 마지막 작품이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낸 목소리라 할 만합니다. 이 작품으로 만화상을 받을 때는 1986년이고 이무렵 당신은 쉰일곱 나이입니다. 1928년에 태어나 갓 철이 들 무렵 일본이 일으킨 숱한 전쟁을 몸소 지켜보거나 겪었으며, 그 뒤로 일본이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을 떨칠 때에도 부지런히 만화를 그렸습니다.


.. “기죽지 마라, 당연한 거야. 나도 내가 처음으로 죽인 시체를 보고 토했단다. 지난번 전쟁 때, 난 지원병으로 전선에 나갔지. 열여덟 살 때였어. 그러고는 곧바로 프랑스 병사를 죽였단다. 태연하게 적을 죽일 수 있게 되기까지 1년도 안 걸렸어. 너도 곧 익숙해질 거다.” ..  (3권 148∼149쪽)


 다섯 권에 이르는 만화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채기가 늘 되풀이되기 때문에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았’고 ‘내 둘레 젊은 넋이 이런 생채기에 휘둘리기 쉬운 이 나라 흐름이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말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군대란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가르치는 곳이거든요. 아니, 군대란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도록 내모는 곳이거든요. 아니, 군대란 계급 높은 이들이 어디에선가 무전으로 명령을 내리면 내 목숨을 걸고 다른 이 목숨을 빼앗든지 내 목숨을 내버리도록 짓밟는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군대란 곳은 남을 죽이고 나도 죽는 곳입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죽이고 다른 이 마음을 죽이는 곳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어버이와 식구와 동무 모두 슬퍼할 텐데, 다른 이가 죽을 때에도 다른 이 어버이와 식구와 동무 모두 슬퍼합니다. 그러나 군대라는 곳에서는 어느 누가 죽어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한 마디를 외칩니다. ‘나라사랑’.


.. “이 집이고 저 집이고 온 나라 사람들이 전쟁통에 소중한 걸 잃어버렸어요. 그런데도 무언가를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가죠. 인간이란 참 멋져요.” ..  (5권 201쪽)


 이제 와 돌아보면, 군대에 끌려가서 강원도 양구 민통선 안쪽에서 이태 넘게 지내야 했을 때 ‘왜 나는 아무개처럼 총을 안 들겠다고 다짐하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군대에서 지내는 세월보다 조금 더 오래 영창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세월이 더 아깝다고 느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은 더러워지고 나빠졌으니까요. 거꾸로 보면 여러모로 배우기도 많이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에서 군대를 겪어냈기에 군대에서 얼마나 많은 젊고 푸른 넋이 주눅들고 짓밟히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나중에는 누구나 그동안 받은 만큼 ‘고참’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새내기를 주눅들게 하고 짓밟는지 느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군대를 마친 뒤에는 사회에서 선후배 사이를 깍듯이 지킵니다. 내 밑사람한테는 빈틈없이 반말이요 주먹이 오가고, 내 웃사람한테는 어김없이 높임말이요 굽신굽신입니다. 더욱이, 입시지옥뿐 아니라 취업지옥인 이 나라에서 내 이웃이건 동무이건 더 밟고 더 높이 올라서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야 맙니다. 아니, 아주 마땅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눔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깃들지 못합니다. 믿음이란 처음부터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군대란 평화를 지키는 모둠이 아니라, 평화를 꺾는 모둠입니다. 다른 이한테서 무언가 빼앗을 건덕지가 있기에 무기를 갖추어 으르렁거리는 모둠입니다. 군대에 끌려가거나 스스로 들어가거나 이곳에서는 바보가 되고야 마는데, 우리는 스스로 바보가 된 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한, 군대를 떠나고 난 다음에도 우리 마음이 어떻게 바보가 되고 우리 몸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바뀌었는지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군대를 겪었어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물게 있습니다. 이 같은 군대를 겪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납니다.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고 꽃처럼 아름답고자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만, 이 못난 사람으로서 못난쟁이한테도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이 아예 없지는 않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어요.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마무리지은 데즈카 오사무 님이 5권이 끝날 무렵 넌지시 들려주는 말마디, “인간이란 참 멋져요.”처럼 우리 사람들은 참으로 멋없고 못난 길로만 빠져들거나 굴러떨어지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조그맣게 다시 키우기에 “멋져요”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삶자락이지만 믿음을 자그맣게 새로이 가꿉니다. 멀디먼 길이지만 사랑할 노릇이요, 아득하디아득한 길이지만 믿을 노릇입니다. 사람은 참 멋지다고. 전쟁통에 모두 잃거나 빼앗겼어도 다시금 사랑하고 믿는 목숨붙이가 바로 사람이라고. (4342.12.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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