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세월
윤주영 / 눈빛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기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2] 윤주영, 《어머니의 세월》


- 책이름 : 어머니의 세월
- 사진 : 윤주영
- 펴낸곳 : 눈빛 (1997.11.7.)
- 책값 : 2만 원 






 (1) 사진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천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문화재단들은 저마다 제 고장을 빛낼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원사업이 있는 줄 안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알고 난 다음에는 지원서류 쓰기가 퍽 까다롭고 골치가 아파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골치가 아프더라도 한 번은 써 봐야 하지 않느냐 싶어, 인천골목길을 찍은 사진을 놓고 지원금을 신청해 보았습니다. 제가 인천골목길을 두루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책으로 엮은 다음, 제가 사진으로 담은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분들한테 하나씩 선물로 나누어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골목이웃한테 당신들 삶자리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한두 장씩 드리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당신들이 가꾸는 이 보금자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하고 말씀을 건네지만,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들 ‘저 젊은이가 그냥 입발린 소리로 읊는 인사치레’로 여깁니다. 그래서 인천골목길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사진책을 하나 마련해 한 집씩 찾아다니며 선물로 드리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꿈을 이루자니 돈이 없는 저로서는 꿈 같은 소리입니다. 그예 꿈입니다. 살림돈 한푼도 모자란 주제에 무슨 사진책을 내겠습니까. 찍은 사진은 더없이 많고, 오늘도 바지런히 찍으러 돌아다닐 테며, 앞으로도 찍겠지요. 사진 몇 장 만들어서 나누어 드리는 일이야 어느 만큼 한다 치더라도 책으로 드리기는 몹시 버겁습니다. 집삯과 도서관삯 내기에도 빠듯한 살림이니까요.

 지원사업 공모에 붙을는지 안 붙을는지 모르나, 붙든 안 붙든 내 보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 모르지만 인천문화재단에서 면보기 하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지난주에 찾아갔습니다. 면접관은 “제(면접관)가 인천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이런 지역 특성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면 전시하는 공간을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이런 물음은 도무지 걸맞지 않을 뿐더러, 면접관 스스로 ‘인천에서 인천골목길 사진을 전시하고 책으로 엮어서 나누는 뜻’을 읽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참말 모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저 스스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몸이지만,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골목동네가 고향이라고 밝히는 사진작가 가운데 골목동네를 가끔이나마 사진으로 담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삶터로 여기며 꾸밈없이 골목 사진을 즐기고 나누려는 몸짓을 보여주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다고 느낍니다. 아니, 적어도 인천에는 없습니다.

 저는 인천골목길을 굳이 제 사진감으로 삼을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자주 찍으니 괜히 저까지 인천골목길을 안 찍어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인천골목길을 찍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른 데’에서 놀러오는 사람들이고, 인천이라고 하는 터전을 사랑하든 아끼든 들여다보든 헤아리든 하는 마음가짐이나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골목동네 주민으로서 퍽 짜증스럽고 어이없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그 좋은 장비를 쓰면서 이 따위 엉망진창 사진을 찍느냐? 그러면 차라리 내가 찍어서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남주 시인이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에 실린 시를 읽다가 ‘이만한 시가 시라면 나도 시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시길’을 걸었는데, 제가 김남주 시인 같은 그릇은 못 됩니다만 이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제 값싼 장비로 골목 삶터가 왜 골목 삶터인지를 말하는 사진을 담아내어 조용히 동네 이웃하고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면접관이 저한테 한 마디 물은 뒤’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 엉켰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앉아만 있으면 안 되기에 헛기침을 하고 나서 몇 마디를 줄줄줄 풀어놓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떠할는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동네 골목길이 참 예쁘다고 느껴요. 그래서 골목길 사진을 찍는데, 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그 집에 다시 찾아가서 우체통에 사진을 넣든 앞에서 인사하고 드리든 하면서 ‘집이 참 예쁘고 좋아서 찍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골목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는데, 이렇게 동네 주민으로서 골목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사진을 찍으며 다니다 보면 동네사람들이 ‘뭐 하러 사진 찍어요?’ 하면서 따져요. 인천시에서는 오래된 동네를 빨리 허물고 아파트로 재개발하려고 하는데, 이러면서 오래된 골목동네가 꾀죄죄하고 낡고 못났다는 생각을 심거든요. 그러면서 일부러 낡고 꾀죄죄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공무원들이 돌아다니기도 하고요. 동네사람이 그렇게 물으면 ‘집이 예쁘잖아요’ 하고 말씀드리는데, 다들 웃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곳에 뿌리내리며 살아오는 분들이 집과 동네를 참 예쁘고 곱게 꾸미고 있는데, 당신들 스스로 이 동네가 얼마나 예쁘고 고운 줄을 모르셔요. 제가 괜히 집이 예쁘다고 말하는 줄 생각하셔요. 음, 이 같은 골목길 모습을 다른 지역에 보여주는 일도 틀림없이 뜻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분들 스스로 당신 보금자리가 얼마나 곱고 예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난 다음에 서울이든 다른 지역이든 이 사진을 들고 가서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해요. 동네사람들한테 자부심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어요.”

 지난주에 여러 차례, 그제와 그끄제 잇달아 ‘골목마실 길잡이’가 되어 사람들한테 인천골목길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면서 오래오래 걷는 나들이를 합니다. 지난 2007년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뒤 홀로 조용히 골목마실을 해 오며 혼자서(또는 옆지기와 아기하고) 사진찍기를 해 왔는데 요 보름 사이에 갑자기 ‘골목마실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인천에 뿌리를 둔 가톨릭환경연대에서 해마다 벌이는 ‘청소년 환경기사단’ 강사 노릇까지 어쩌다 보니 덥석 맡아, 2010년 올해에 인천 중ㆍ동구 푸름이들하고 동네 골목길 나들이를 함께하면서 사진찍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요사이는 도서관에 가만히 있기 추워서, 사진을 좋아하는 손님이 찾아왔으면 “괜찮으시면, 구경해 보기 어려운 골목길 나들이 해 보시겠어요? 알려지지 않은 인천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하고 넌지시 말씀을 여쭈며 함께 길을 나서곤 합니다. 따로 길잡이가 되거나 탐방해설가나 그런 이름을 붙이는 나들이가 아닌, 조용히 몇몇 사람이 뚜벅뚜벅 골목을 거닐면서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도록 이끄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이런 골목마실이란 몇 해에 걸쳐 온 골목을 수없이 밟고 또 밟았기 때문에 이제서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될 테지요. 골목동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저 스스로 눈을 뜨고 생각을 열면서 골목마실을 해 온 여러 해가 밑거름이 되며 저절로 발걸음이 떨어지는 일일 테지요.

 제 사진감인 ‘헌책방’을 처음으로 찍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1999∼2000년에 헌책방 사진을 처음 찍으며 2001∼2002년에 바야흐로 손놀림을 익혔고, 이렇게 찍은 사진을 헌책방 일꾼들한테 드리면서 ‘이런 사진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런 사진은 썩 안 좋아하시네.’ 하고 느꼈습니다. 사진을 받으실 때에 얼굴빛이 다르기에, 반갑거나 좋게 여기는 사진을 눈여겨보고, 썩 달갑잖게 여기는 사진을 곱씹습니다. 헌책방 일꾼들 입맛과 눈맛에만 맞추는 사진이라기보다, 헌책방 일꾼들 스스로 흐뭇해 하고 반길 수 있으면서도 제 손길을 트고 눈길을 열 수 있는 사진찍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헌책방에서 사진찍기’가 열두 해째입니다. 열두 해째 되고 보니, 헌책방에서 책방 일꾼 얼굴 사진을 슬쩍 한두 장 찍는 일이 아무렇지 않습니다. 찍히는 사장님들이 허허 웃으면서 “그동안 그렇게 찍고 뭘 또 그렇게 찍어요?” 하고 손사래를 치시면, “예전에는 예전 모습이고 지금은 또 지금 모습이니까요. 찾아올 때마다 한 해 두 해 쌓이는 세월과 모습이 다른걸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참말, 저로서는 헌책방이든 골목길이든 한두 번 왕창 찍어내며 ‘일 끝내기(작업 종료)’를 할 수 없습니다. 저한테 목숨이 붙어 있고, 제 손아귀에 힘이 남아 있으며, 제 낡고 값싼 사진기가 마지막까지 움직여 주는 그날까지 찍어야 할 사진감이라고 여깁니다. 앞으로 예순 살까지 살 수 있다면, 스물네 해를 더 찍을 수 있는 헌책방이며 골목길입니다. 앞으로 일흔 살까지 살 수 있다면 헌책방을 놓고는 마흔 해 남짓 찍는 셈이고, 골목길을 놓고는 서른 몇 해를 찍는 셈입니다.

 지난 2008년 여름부터는 아이 사진도 찍습니다. 아이와 늘 지내고 있으니 아이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2007년 여름부터는 옆지기 사진을 찍었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아이와 옆지기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하겠습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나중에 어떤 사진책을 꾸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좋은 벗님들이요 길동무이니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저한테 헌책방이라는 사진감은 저 멀리 동떨어진 세상사람들 터전이 아닌, 바로 내 삶터요 이웃 모습입니다. 저한테 골목길이라는 사진감은 남다르거나 애틋한 추억이 어린 곳이 아닌, 바로 내 보금자리요 이웃들 어우러진 삶자락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진쟁이들이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마침내 ‘삶을 담는 삶사진’에 이르고야 만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그 훌륭하고 거룩한 사진쟁이들은 예술사진이었든 상업사진이었든 기록사진이었든 무슨 사진이었든 하나같이 ‘당신들 삶으로 녹여내고 받아들인 삶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도 삶사진이고, 김기찬도 삶사진입니다. 살가도나 쿠델카도 삶사진이며, 조선희나 한영수도 삶사진입니다. 한영수 님은 아예 《삶》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진책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사진길을 걷는 사람이 바야흐로 만나면서 당신들 사진 불꽃을 활활 불태우면서 곱디고운 사진꽃으로 피어나는 자리란 바로 ‘삶사진’이라고 느낍니다.
 











 (2) 삶을 담으려고 하는 사진으로


 옆지기도 한번 보라고 《어머니의 세월》이라는 사진책 하나를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함께 놀던 옆지기가 “아빠가 엄마 보라고 사진책을 가지고 왔네.” 하면서 주욱 펼치다가는 “뭐야, 이 사진은? 이 사진에서 할머니들은 찍히고 싶지 않은 얼굴이잖아.” 합니다. 무슨 사진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어 슬쩍 건너다보니, 장터에서 국수를 자시는 할머니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얼굴이며 손이며 온통 주름진 할머님들 매무새가 잘 드러난 사진입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할머님들은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밥먹는 자리에서 저 양반 뭐 하는 짓이여?’ 하는 눈빛입니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옆지기는 사진쟁이 이름을 모르고, 사진쟁이 발자국을 모릅니다. 이분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모르며, 이 사진책에 어떠한 뜻이 담겨 있는가를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옆지기를 섬깁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었는가를 알아야만 그 사진쟁이 사진을 읽어낼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과 책쟁이 한 사람이 무슨 뜻으로 사진책 하나를 엮었는지를 알아야만, 이들이 묶어낸 사진책에 담긴 사진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옆지기는 지아비가 쓴 글이나 사진을 놓고도 알차게 못 쓴 글이나 제대로 못 찍은 사진을 놓고 “뭐야, 이 글은? 뭔데, 이 사진은?” 하고 한 마디 톡 쏘거나 거듭니다. 당신하고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가 아닌, 당신 가슴으로 스며들 만한 글이냐 그림이냐 사진이냐를 헤아리는 눈썰미입니다. 더없이 고마운 옆지기입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그동안 《어머니》(눈빛,2007), 《그 아이들의 평화》(생각의나무,2004), 《석정리역의 어머니들》(솔,2003), 《장날》(현암사,2001), 《행복한 아이들》(현암사,2001), 《중국》(눈빛,1999), 《안데스의 사람들》(눈빛,1999), 《일하는 부부들》(눈빛,1998), 《어머니의 세월》(눈빛,1997), 《베트남 전후 20년》(타임스페이스,1995), 《탄광촌 사람들》(사진예술사,1994), 《동토의 민들레》(호영출판사,1993),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조선일보사,1990), 《내가 만난 사람들》(열화당,1987) 같은 사진책을 펴냈습니다. 열네 권 가운데 아직 네 권은 사지 않았으나, 사지 않았을 뿐이지 책방에서 모두 보았습니다. 네 권은 따로 안 사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안 샀는데, 이제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모두 갖추어 놓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1928년에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를 마치고 중앙대학교에서 일곱 해 동안 정치학 교수로 일했습니다. 1961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어 이태 동안 신문을 만듭니다. 그 뒤 정계로 나아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열여섯 해 동안 민주공화당 대변인과 사무처장과 무임소장관과 칠레대사와 문화공보부장관과 국회의원을 두루 거쳤습니다. 1979년에 정치판을 떠난 다음 사진판으로 뛰어드셨는데, 중남미며 네팔이며 인도며 부탄이며 파키스탄이며 터어키이며 그리스이며 이집트이며 모로코이며 튀니지아이며 유럽이며를 골고루 다니며 사진찍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태껏 펴낸 사진책에서도 알 수 있듯, 윤주영 님은 1993년에 《동토의 민들레》라는 작품으로 러시아 사할린에서 고향나라를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발자취를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1994년에는 《탄광촌 사람들》이라는 작품으로 탄광마을 일꾼 발자국을 사진으로 여미었습니다. 《베트남 전후 20년》은 말 그대로 전쟁 피해자 뒷삶을 좇은 사진책입니다. 《행복한 아이들》은 입양되는 아이들 삶을 좇은 사진책입니다.

 윤주영 님은 무엇보다도 ‘어머니(할머니)’ 사진을 많이 자주 찍었습니다. 《어머니의 세월》이든 《일하는 부부들》이든 《장날》이든 하나같이 ‘어머니 되는 분’이 사진 주인공입니다. 다만, 윤주영 님한테는 ‘어머니’이지만, 저한테는 ‘할머니’입니다. 마땅한 소리이겠지만, 어느덧 여든 줄 나이로 접어든 할아버지 사진쟁이 윤주영 님한테는 ‘당신한테 어머니라 할 분은 그야말로 할머니’이겠지요. 윤주영 님 사진을 보면서 느끼지만, 윤주영 님이 가장 잘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감은 바로 ‘나이 든 여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윤주영 님부터 흰머리 할아버지인 만큼, 할머니들 앞에서 서로 동무가 되기도 하고 누나로 삼기도 하며 동생으로 만나기도 할 테지요. 스스럼없이 사진기를 들 수 있고, 사진기를 들기 앞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저는 윤주영 님 ‘어머니 사진’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할아버지가 되면 아주 저절로 ‘나로서는 아버지이고 내 뒷사람한테는 할아버지로 보이는 아버지’ 사진을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러한 사진찍기는 퍽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새롭게 눈을 뜨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은 만큼 ‘젊은이가 다가서기에 아직 어려운 사진감을 담아내는 솜씨’를 보여주면서 뒷사람을 가르친다고 할까요.

 그런데 윤주영 님 사진책을 보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탄광촌 사람들》을 뒤적일 때마다 《김재영(글),김종성(사진)-검은 산 검은 하늘》(눈빛,1991)이 떠오르고, 《동토의 민들레》를 뒤적일 때마다 《이토 다카시-사할린 아리랑》(눈빛,1997)이 떠오르며, 《장날》을 들출 때마다 《양해남-우리 동네 사람들》(연장통,2003)이 떠오릅니다. 똑같이 탄광을 사진감으로 삼았지만 윤주영 님 사진책에서는 웃음과 눈물을 살피기 어렵구나 하고 느낍니다. 광부 삶을 담은 사진책으로 《신병태-광부, 그 묻혀진 얼굴》(호영,1999)이 또 있는데, 《광부, 그 묻혀진 얼굴》에서도 ‘광부라고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얼굴’은 드러나지만 삶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는 윤주영 님 사진에서도 비슷합니다. 《장날》이나 《행복한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의 평화》에서 ‘넉넉한 구도’와 ‘아름다운 화면’은 이루어지지만, 이러한 구도와 화면에 어떠한 이야기를 따스하게 담는지까지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눈물을 보여야 하는 사진에서 눈물을 보이기 힘들고, 저절로 ‘아!’ 하는 마음이 샘솟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걸어가며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고 온갖 자리에서 온갖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골고루 만나고 있는 윤주영 님은 우리 세상 온갖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모습’을 담는 가운데 온갖 ‘이야기’까지 엮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다루는 사진감은 많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모습으로 그치고 이야기로 뻗어가지 못하는 사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삶자락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지는 못하는 사진이 아니랴 싶습니다. 삶결을 건드리지만 삶자리 깊숙하게 스며들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사진으로는 새로 태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일하는 부부들》과 《어머니의 세월》이라는 사진책을 여러 해 동안 사진밭 선배한테 빌려 준 적 있습니다. 선배는 《일하는 부부들》은 잃어버리고 《어머니의 세월》은 돌려주었습니다. 한 번 잃어버린 《일하는 부부들》은 헌책방에서도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선배한테 이 사진책을 빌려 줄 때에 선배한테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저보다 사진 솜씨가 좋고 사진 찍히는 사람들한테 스스럼없이 잘 다가서는 선배야말로 ‘이 땅에서 낮은자리에서 부둥키고 얼크러지는 이웃이자 바로 이러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일하는 부부들’하고 ‘어머니가 보낸 세월’을 사진으로 담아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진일은 한두 해로 이룰 수 없고, 적어도 열 해나 스무 해에 걸쳐 해야 할 텐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배가 제 도움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 잊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선배한테 도움말을 했듯 저는 저 스스로한테도 제 둘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서 사진으로 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저한테는 ‘일하는 사람들’이란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일 테지요. 그리고 저한테 ‘어머니가 보낸 세월’이란 바로 우리 아이를 키우는 옆지기가 젊음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 살아내는 발자취일 테고요.

 얼핏설핏 윤주영 님이 새 작품을 내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한 작품을 어떠한 빛깔로 내놓으실는지 궁금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주영 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 스스로 ‘여든이 되든 아흔이 되든 사진길을 걸어가며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창작을 선보이는’ 좋은 이슬떨이가 되어 주고 있거든요. 윤주영 님은 한 해 두 해 사진길을 걸어가면서 당신 사진밭을 조금씩 갈고닦으며 가다듬고 있다고 느낍니다. 비록 윤주영 님 당신이 벗어나지 못하는 틀과 굴레가 있지만, 제아무리 틀과 굴레가 있다 하여도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은 사진으로 말하면 됩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세월》은 1997년 작품입니다. 2007년도 아닌 2010년이라면, 《어머니의 세월》에서 엿보인 아쉬움들을 말끔히 털어내었을 수 있겠지요. 또는, 2017년에도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차근차근 가다듬거나 추스를 수 있을 테고요.

 구도와 화면으로도 얼마든지 곱고 멋진 사진을 일굴 수 있지만, 이야기와 삶을 담아낼 때에는 ‘흔들린 사진’이든 ‘빛이 모자라거나 넘치는 사진’이든 사람들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사진이 되거나 따뜻하게 감싸안는 사진이 됩니다. 사진이 사진으로 마무리되는 대목을 한결같이 되새겨 주시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4343.1.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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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커 토우마 1 - 안개 속
가나리 요자부로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 도시에는 어떤 ‘숲 발자국’이 있을까
 [살가운 만화 52] 노마 로쿠, 《토우마》 1∼3권



- 책이름 : 토우마 1∼3
- 그림 : 노마 로쿠
- 글 : 카나리 요자부로
- 옮긴이 : 김은명
- 펴낸곳 : 서울문화사 (2009)
- 책값 : 한 권에 4200원씩


 (1) 오늘


 며칠 동안 뭇사람들하고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골목마실이란 다름아닌 ‘내가 살아가는 이 동네에 어떤 이웃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느끼거나 만나려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일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달릴 수 있으나 두 다리로 더욱 슬금슬금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골목 한켠에서 오래도록 둘러볼 수 있고, 동네이웃하고 만나는 자리에서는 한참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떠나면서 나라밖 사람하고 부대끼며 더 너른 세상을 만나고 배우듯, 골목마실을 할 때에도 내 삶터 가까이나 둘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새롭게 부대끼면서 더 너른 세상을 만나고 배웁니다.

 저는 늘 다니는 골목마실이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고 철과 때와 날씨에 따라서 골목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새삼스럽지 않다 할 만한 모습이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모두 새삼스럽습니다. 어릴 적 태어나서 살던 골목을 만나든, 여태까지 한 번도 겪거나 본 적이 없는 골목을 거닐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손자국과 발자국을 만납니다.

 오래된 문패를 쓰다듬고, 굵직하게 박혀 있는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집니다. 오래된 골목동네에는 으레 나무전봇대가 남아 있습니다. 시멘트전봇대를 박으러 시설이나 차를 몰고 들어올 수 없어 이대로 잘 살아남아 있곤 합니다. 해마다 찾아오는지는 알 길이 없는 제비집을 올려다보고, 이제는 거의 안 쓰는 예전 유리문을 들여다봅니다. 올록볼록 무늬가 새겨진 유리문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마련한 유리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유리문에 붙인 판박이가 스무 해나 서른 해, 때로는 마흔 해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보기도 합니다.

 토박이가 없다는 인천이라 하지만, 외려 이제는 토박이가 많은 인천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웬만한 도시이든 시골이든 이렇게 세월 손때가 구석구석 남은 살림집과 골목집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쉰 살 먹은 살림집들로 온 골목이 가득가득한 동네가 우리 나라에 몇 곳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부산쯤? 목포쯤?


.. “젠장, 이틀 동안이나 아무런 단서를 못 잡았잖아.” “당연하죠, 형사님. 이렇게 넓은 산에서 겨우 한 사람을 찾는 거니까요. 자연을 너무 쉽게 보면 안 됩니다.” … “내가 무섭지 않았나요?” “예.” “!!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나요?” “발자국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짜 당신은 자연을 사랑하는 착한 마음의 주인입니다.” … “영우라는 동물은 멋지게 왼발, 오른발을 나란히 걷거든. 그래서 발자국이 이렇게 한 줄로 난 거란다. 그래서 발자국이 이렇게 한 줄로 난 거란다. 어때 재미있지? 이 여우는 이쪽에서 이쪽을 보면서 걸어왔어. 신중하게 주위를 신경쓰면서, 아주 천천히 걸어왔어.” … “아무 소리가 없다. 너무 조용해서 귀가 아프다! 내 청력 때문인가?” “숲도 살아 있습니다.” ..  (1권 6쪽, 31, 50, 71쪽)


 추운 겨울날 온몸이 얼어붙으며 골목마실을 하다가 문득문득, ‘두껍게 껴입는 옷과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면 겨울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이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95%쯤 되는 정보를 눈으로 받아들이거나 느낀다고 하는데, 눈을 감고 코나 살갗이나 귀로 느낄 수 있는 겨울 살림살이와 매무새는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휘휘 둘러볼 때에, 골목동네라는 곳에서든 아파트숲이라는 곳에서든 얼마나 겨울다움을 남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흙 한 줌 느긋하게 길바닥에 엎어질 수 없는 도시입니다. 골목길이라고 해서 흙길이 아닙니다. 골목사람이 흙을 짊어지고 와서 조촐하게 골목밭을 일구고 골목꽃그릇을 가꾸니 흙내음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을 뿐입니다. 흙내음을 싣고 흐르는 바람결이 없고, 꽃내음을 담아 오가는 바람물결이 없습니다.

 흙이 없으니 지렁이가 없습니다. 풍뎅이도 없습니다. 나비도 없고 벌도 없습니다. 골목밭을 알뜰살뜰 일구는 동네 외딴 구석에서는 가끔가끔 벌나비를 만나지만, 도심지에서 벌나비를 만날 길이란 없습니다. 벌나비뿐 아니라 잠자리도 없고 사마귀와 메뚜기도 없습니다. 소금쟁이와 물방개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렁이나 조개를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인천 앞바다 드넓은 갯벌은 국제공항 닦는다며 모조리 덮고 메우는 바람에, 또 예부터 항구를 넓히고 공장을 세우며 아파트를 박는다면서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강을 타고 흘러드는 쓰레기물에다가 인천 앞바다를 빙 둘러 세운 숱한 중화학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쓰레기물이 겹치며 갯벌이 죄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참말로 이런 도심지 골목길에서 느끼는 봄이란, 여름이란, 가을이란, 겨울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이런 도심지 골목길에서 우리 삶을 이루는 자연을 어느 만큼 맛보거나 느낀다고 할 수 있을까요.

 뭉게구름 없고 무지개 없는 이 땅인데. 소나기 없고 눈부시게 맑은 햇살 사라진 이 땅인데. 살랑바람도 꽃바람도 죽어 버린 이 땅인데. 이 땅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목숨붙이가 되어 서로 부대끼면서 복닥복닥하고 있는가요.


.. “도시의 규칙은 너무 복잡하죠. 때로는 단순한 규칙 따윈 보이지 않게 되죠. 일어서지 못할 정도까지 걷고 난 후에는,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쉬면 됩니다.” … “하지만 생물은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활동하기 위해서, 더 생산해 내기 위해서. 그 사실은 오늘 숲에서 배웠습니다. 전 이제 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저를 해고하신다고 해도!” … “정말 찾을 수 없게 되는 건 그렇게 말하고 포기할 때입니다.” … “이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약자는 항상 강자의 그림자에 겁을 먹으며 살아가야 해. 하지만 그런 약자도, 가끔 목숨을 걸고 강자에게 도전할 때가 있단다. 자신이 소중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승산이 없는 상대라 해도 말야! 넌 제비꽃을 피해서 걷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더구나.” ..  (1권 74, 78, 125, 156∼157쪽)


 골목마실을 함께하는 분들하고 동네 만두집에 들어갑니다. 지난날 오성극장이 있을 때에 극장 앞에서 만두를 굽거나 쪄서 팔던 길가 만두집입니다. 따뜻하게 구운 만두를 씹어먹는데, 만두집 라디오에서 ‘연봉 100억이 넘는 사람 …… 연봉 1억이 넘는 사람 ……’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식이 흘러나옵니다. 라디오이든 방송이든, 또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온누리에 퍼지는 소식은 하나같이 돈하고 얽혀 있습니다. 이 땅 우리들이 만들어 내는 소식과 정보는 온통 돈과 얽혀 있을 뿐 아니라, 돈을 다루기만 합니다.

 돈이 아닌 삶을 다루는 소식과 정보는 참으로 드뭅니다. 돈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소식과 정보는 더없이 드뭅니다. 지식과 학식을 뽐내는 책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책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돈맛과 돈바람이 아닌 따순바람과 너른바람을 고이 담고 있는 책을 찾아 읽기도 어렵습니다. 나날이 수없이 쏟아지는 책인데, 이 책들 가운데 바람내음과 구름내음과 비내음과 눈내음과 바다내음과 땅내음을 고이 싣고 있는 책은 손가락 몇 개로 꼽아야 할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는 이는 책을 읽는 이대로, 책 아닌 인터넷이나 방송에 기대는 이는 이들대로, 머리속을 꽉꽉 채우는 지식보따리만 큽니다. 사람다움과 목숨다움을 살리는 이야기는 거의 눈꼽만하다 싶을 만큼 초라하게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 “이 자연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요.” … “큰소리나 메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단다. 상대의 호흡, 체온의 온기, 심장의 박동.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건 말과 문자만이 아니란다.” ..  (1권 166, 211∼212쪽)


 오늘을 살아간다지만, 도무지 오늘 무얼 하며 살아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알 길이 없는 주제에 날마다 길을 나섭니다. 골목길을 나서고, 책길을 찾습니다.
 





 (2) 어제


 오늘은 사진기를 들고 골목길을 누빕니다. 오늘은 아기를 한손에 안은 몸으로 사진기를 목에 걸고 골목길을 누빕니다.

 어제는 자전거 짐바구니와 짐받이에 신문을 가득 싣고 골목길을 누볐습니다. 외딴 골목이나 다세대주택이나 아파트에서는 들머리나 어귀에 자전거를 세우고 겨드랑이에 신문뭉치를 낀 다음 후다닥 달리며 신문을 돌렸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실장갑 하나를 낀 채 신문딸배(신문배달)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형과 동생은 모두 오토바이를 탔지만 저는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자전거로 달리면서도 오토바이 딸배보다 먼저 일을 마쳤고, 맨 먼저 일을 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와서 형들하고 함께 먹을 아침을 차렸습니다.

 왼손으로는 무거운 자전거를 붙잡으며 달립니다. 짐바구니에는 쉰 부, 짐받이에는 백칠십 부를 실은 자전거입니다. 제가 돌린 ㅎ신문은 그나마 신문 두께가 얇았고, 다른 이들이 돌린 신문은 두께도 두껍고 부피도 많았습니다. ㄷ신문 딸배 아저씨는 단단하고 굶은 쇳가락을 용접해서 짐바구니를 둘 달고도 짐받이에는 머리 높이까지 올라오도록 신문을 싣고 달리곤 했습니다. 이웃 우유딸배 아주머니는 우유상자를 일곱 개 자전거에 붙이며 골목을 누볐습니다.

 신문딸배들은 누구나 왼손으로 손잡이를 버티고, 오른손으로는 바구니에서 신문 한 부를 슥 꺼냅니다. 이윽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놀려 신문을 꿴 다음 오른허벅지에 탁 치며 반으로 접고, 다시금 엄지와 검지를 놀려 신문을 꿰어 오른허벅지에 또 한 번 탁 치며 다시 반으로 접습니다. 그러고는 손아귀로 슥 움켜쥐고 손목힘으로 휙 날리면 골목집 대문 안쪽으로 종이비행기처럼 시잉 날아가서 골목집 신발 놓는 섬돌에 톡 하고 떨어집니다.

 골목집은 집 모양이 모두 다른 까닭에, 어느 집은 이렇게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탄 채로 ‘한손 접기(한손으로 신문을 그 자리에서 접기)’를 하며 넣지만, 대문에 걸치는 집이 있고 우유주머니에 넣는 집이 있으며 창문을 살짝 열고 끼워 놓는 집이 있습니다. 2층에 사는 분이라면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어깨와 팔뚝힘을 써서 휘익 하고 던져 넣고 지나갑니다. 자전거를 멈추고 신문을 넣으면 그만큼 시간을 잃기 때문에, 웬만하면 자전거에 탄 채로 한손으로 휙휙 넣고 다른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나중에 신문딸배 일이 익숙해진 뒤에 3층집에 신문을 넣을 때에도 자전거에 탄 채로 가끔 해 보았는데, 3층집까지 자전거에 탄 채로 넣자면 여느 내기로는 퍽 힘듭니다. 저도 두 번 가운데 한 번은 실패해서, 엉뚱한 데에 떨어진 신문을 다시 주워 넣느라 시간을 더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좀더 익숙한 사람들은 4층집뿐 아니라 5층집까지 신문을 잘 접어서 던져 넣습니다. 접는 매무새가 여느 종이접기하고는 많이 다른데, 제대로 접지 않으면 잘 날아가지 않을 뿐더러, 갓 나온 신문이 구겨집니다. 날아갈 때에도 잘 날아가고, 독자네 문에 톡 부딪히며 바닥에 착 펼쳐질 때에 구김살이 사라지도록 옳게 접을 줄 알자면 신문딸배 다섯 해는 되어야 합니다.


.. “자신이 유괴되면서도 범인인 엄마의 마음을 배려했었으니까요. 그래요, 언제나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건 어른이고, 어린이는 그런 어른을 보면서 어른 이상으로 잘 자라는 겁니다.” … “왜 이렇게 모두들 열심히 수색하는 거죠?” “누구라도 한 번쯤은 미아가 된 경험이 있겠죠?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섭고, 누구라도 그런 힘든 생각을 하고 있다면, 빨리 구해 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숲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2권 54, 151쪽)


 신문딸배를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날씨읽기를 배웠습니다. 신문딸배들은 날씨읽기를 방송이나 신문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냥 길을 가면서 느끼고, 집안에서도 밥을 먹으며 느낍니다. 빨래를 하고 널면서 느끼고, 신문값 걷으러 다닐 때에 느낍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앞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끼고, 밤골목에 가만히 서서 밤바람을 살갗으로 맞으면서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유딸배한테는 비가 오더라도 우유가 젖어서 못 쓸 일이 없지만, 신문딸배한테는 비가 와 신문이 조금이라도 젖으면 죄다 못 씁니다. 여느 비 안 오는 날에도 뜻하지 않게 젖을 수 있고 찢어질 수 있습니다. 골목집에서 기르는 개가 쉬를 눈다든지 물어뜯을 수 있으니까요. 잠자리에 들기 앞서 이튿날 비가 올는지 안 올는지를 가늠하고, 비가 오면 언제쯤 얼마나 올까를 헤아립니다. 신문을 돌릴 무렵에 비가 올 때하고 신문을 다 돌리고 나서 비가 올 때에는 신문돌리기가 다릅니다. 비가 쏟아질 때와 질금질금 흩뿌릴 때에도 신문돌리기가 다릅니다. 신문딸배가 먹고사는 일인 사람은 날씨방송이나 날씨기사가 아닌 내 몸과 느낌으로 날씨를 알아채야 합니다.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느끼며 바람과 햇살에 실린 물기가 어떠한가를 느껴야 합니다.


.. “너무 피곤해요. 당신 질문에 대답하는 게 힘들 정도로.” “숲속에서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 일은 그 정도의 중노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아를 찾아도 표정을 지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 당신을 찾아 주셨던 분들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어둡고 넓은 숲속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니면서 몇 시간씩이나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건 우리처럼 매일 그 일을 하는 사람들로도 힘든 작업인데, 갑자기 불려나온 익숙치 않은 자원봉사자들이면 더더욱 그렇죠.” ..  (2권 158쪽)


 신문딸배로 먹고살던 지난날은 벌이가 영 시원찮을 뿐더러, 신문값 떼어먹고 내빼는 사람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러나, 도심지에 살면서도 도시에서 어떻게 자연을 느끼는가를 배웠습니다.

 도심지에서도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길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서 아파트 난간에 기대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든지, 달동네 오르막에서 홀로 자전거에 기댄 채 새벽 햇살을 느낀다든지 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술이 얹혀 꺽꺽대는 사람들까지 모두 잠든 깊은 새벽에 조용히 홀로 일어나 내 자전거 페달 소리와 골목길을 내닫는 발자국 소리를 가만가만 울리는 하루하루는 기뻤습니다. 언제나 잠들어 있는 도시 골목길에서, 늘 맑게 깨어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갓 찍어 잉크냄새 짙은 신문이 내 몸과 옷과 손에 짙게 배어드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3) 글피


 아기는 힘을 알맞게 맞추며 손놀림을 하기에 아직 이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잎사귀가 아야 해. 잎사귀는 살그머니 대면서 귀여워 해야지.” 하고 넌지시 일러 주면, 아기는 이 말귀를 잘 알아들으면서 꽃잎사귀를 살그머니 쓰다듬거나 아주 천천히 손끝으로 톡 갖다 댑니다.

 그런데 갓난쟁이가 아닌 다 큰 어른들은 “그렇게 마구 다루면 어떡해?” 하고 일러 주어도 한귀로 흘리거나 “내 맘이야!” 하면서 나무를 차고 밟고 꽃잎사귀를 후두둑 잡아당겨 뜯습니다. 갓난쟁이들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삶터 목숨붙이들을 고이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곧잘 알아듣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연 삶터에서 태어난 또다른 목숨붙이이고 푸나무와 우리는 동무요 이웃이라고 일러 주면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머리통 굵은 우리 어른들은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알아들을 마음조차 없습니다. 흔히 일컫는 대로 우리 어른들은 돈한테 노예가 되어 끄달리고 휩쓸린 채 살아갑니다.


.. “거리에서의 난 너무나 무력하다. 범인의 낌새도 알아차릴 수 없는 상태다. 도시는 내가 살아가는 숲과는 완전히 다르다. 자연은 전부 아스팔트로 덮혀져 발자국도 남지 않는다. 이곳에 트래커인 내가 있을 곳은 없는가?” ..  (3권 68쪽)


 만화책 《토우마》 1권, 2권, 3권을 읽습니다. 《토우마》는 꼭 세 권으로 마무리된 짧은만화입니다. ‘토우마’는 《토우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이 토우마는 숲에서 사람들한테 숲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나들이길을 알려주는 길동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우마라는 사람은 ‘발자국사람(발자국을 좇으면서 정보를 얻는 사람. 영어로 하면 트래커)’입니다. 발자국사람이기 때문에 발자국을 살피면서 이 발자국을 남긴 목숨(사람과 사람 아닌 뭇목숨)들이 어디로 걸어가는지, 걸으면서 어떤 마음인지, 언제 걸어서 지나갔는지를 읽어냅니다.

 토우마는 처음부터 숲길동무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찰이었습니다. 경찰 가운데 발자국으로 범인을 찾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경찰로 당신 삶을 꾸리면서 오래오래 당신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경찰일을 하면서 겪은 큰 아픔 하나를 씻어내고자 숲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숲은 토우마 마음에 남겨진 생채기를 고이 얼싸안으며 쓰다듬었고, 토우마는 당신을 살려주고 보듬은 숲을 사람들한테 제대로 알려주면서 숲사랑이 바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숲을 찾아온 사람들’은 토우마가 들려주거나 보여주려고 하는 숲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니,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느끼지 못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숲사랑을 느끼려 하지 않으니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저 어쩌다 찾아온 숲이요, 공원이라고 마련한 숲이니 숲인가 보다 할 뿐입니다. 도시에서는 술이며 담배며 자가용이며 노래방이며 오락기이며 파친코이며 갖가지 재미난 놀거리와 즐길거리가 넘쳐나는데, 굳이 다리 아프게 숲을 거닐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권력을 좇으면서 달려가는데,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어 그리 대수이느냐고 합니다.


.. “그보다도 과장님! 보셨어요? E포인트 지점요!” “어?” “역시 산위는 아래와 계절이 다른 느낌이더라구요. 벚꽃이 지금도 활짝 피어 있어 너무 멋져요. 못 보셨으면 꼭 한 번.” “필요없어.” ..  (3권 113쪽)


 만화책 《토우마》를 보려면 내 삶이 어디에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한결 아름답게 가꾸고픈 마음이 있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나부터 우리 식구와 동무와 이웃들하고 오순도순 어우러지고픈 뜻이 있는가를 곱씹어야 합니다. 내 주머니에 담기는 기쁨을 찾으려는 삶인지, 내 손과 발을 힘껏 움직여 나와 이웃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거울 길을 찾으려는 삶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발자국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루는 지식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거나 잊은 자연을 찾자는 가르침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고단한 물질문명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는 만화가 아닌 《토우마》이기 때문입니다.

 가슴으로 느낄 만화요, 가슴으로 받아들일 만화이며, 가슴으로 살아낼 이야기를 함께 찾자는 만화입니다.


.. “네? 감사장요? 수사에 협력해 줘서 표창한다고요. 저어, 어느 오오카미 토우마 씨에게 전화 거신 건가요? 우리 사무실의 오오카미 토우마는 자연을 사랑하는, 표창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런 가이드입니다.” ..  (3권 182쪽)


 만화책을 덮으며 돌아봅니다. 우리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우리 터전은 어떠한 삶터인가 하고.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되면, 우리 아이는 이 터전을 어떻게 일구거나 보듬으면서 살아갈까 하고.

 우리 아이가 살아갈 우리 나라 터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만한 터전인지 궁금합니다. 사람하고 다른 뭇목숨이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다 함께 흐뭇할 만한 우리 나라 터전일는지 궁금합니다. (4343.1.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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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이제야 비로소 이 책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참 오래 걸렸다...) 

 


 이 책 하나 120 ― 백두 살 할머니한테서 읽는 삶
 : 오드리 설킬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책이름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글 : 오드리 설킬드
- 옮긴이 : 허진
- 펴낸곳 : 마티 (2006.5.25.)
- 책값 : 2만 원



 (1) 주부습진에 걸리며 읽는 삶


 아기는 엎드려 자기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아기는 한참 자다가 슬슬 몸을 돌리며 엄마아빠하고는 거꾸로 엎드려 있습니다. 자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기를 눕히지 않으면 언제나 이 방 끝 저 방 끝까지 굴러가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지 않으나, 아마 저도 우리 아기하고 똑같이 어렸을 때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잠을 잤으리라 봅니다.

 지난주부터 제 두 손을 제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접히는 자리가 쩍쩍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쥘 때마다 따끔하고 물잔이나 병을 손아귀로 쥐기 힘듭니다. 새끼손가락이 다칠 때에도 무슨 물건을 쥐기 어려웠는데, 이 자리가 갈라져도 참 힘듭니다. 그러나 집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픔을 견디면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엊그제 알아보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갈라지는 일은 주부습진입니다.

 주부습진이라니. 주부습진인가. 주부습진이구나. 무언가 다른 데가 아파서 이러나 하고 걱정했는데, 주부습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집일은 조금도 줄 턱이 없는데, 이제부터 주부습진이면 어찌 견디면서 살아가나 근심입니다.

 하기는, 날마다 두 시간 남짓 아기 옷가지 빨래를 하는 삶을 열아홉 달째 꾸리고 있으니 주부습진에 안 걸릴 수 있겠습니까. 안 걸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주부습진에 안 걸렸을까요.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래 물을 만지며 더 많은 집일을 했으니 저보다 더 어렸을 때에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데가 없었을 테며, 손이며 발이며 온통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겠지요.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을 떠올려 봅니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던 날부터는 손빨래가 줄었다지만, 오로지 맨손으로 여름이며 겨울이며 이불과 옷가지를 주물러댄 나날이 어머니 손에 오롯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이 어떠한 손이었던가는, 저 스스로 우리 어머니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삶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딱히 빨래기계를 안 쓰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굳이 내 옷가지를 빨래기계를 써 가며 빨아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서, 스물한 살에 혼자 집을 나와서 살아갈 때부터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물예닐곱 살까지는 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리는 살림살이에 빨래는 그리 안 많아, 주부습진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산 뒤에도 두 사람 몫 빨래는 얼마든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이때에도 주부습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빨랫거리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아기를 낳아 키우며 비로소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키우기는 빨래만이 아니니까요. 오줌을 싸거나 똥을 지리면 그때그때 치우고 씻기도 닦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먹이고 입 닦고 하면서 하루 내내 잠잘 때를 빼놓고는 손이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키우기를 온통 어머니한테만, 그러니까 여자한테만 맡기고 살고 있으니, 남자들이 주부습진에 걸려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나라 글쓰고 사진찍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으레 남자요, 예술이나 문화 한다는 여자들 또한 여느 남자와 매한가지로 집일은 돌보지 않거나 집일은 남한테 맡기며 예술하고 문화에만 모든 힘과 품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들한테서도 주부습진 때문에 ‘창작하며 힘들어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예술인 과학인 체육인 연예인 …… 들은 주부습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이 주부습진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추거나 영화로 찍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습진뿐이겠습니까? 빨래하기를 시로 쓰고 소설로 쓰며 영화로 찍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아이키우기를 동화로 쓰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동시로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인다거나 아기한테 죽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지요? 기껏(?) 나온다는 창작품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그리는 모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자리를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삶으로 받아들일 틈이 없으니까요.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을 할 때에 ‘집일 이야기’를 반드시 그려내거나 담아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네 창작밭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네 창작꾼들 삶과 눈길이 너무 한쪽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밥을 안 먹고는 못 살고 물을 안 마시고는 못 살며 바람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고는 못 사는데, 사람이라는 목숨이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을 헤아리면서 그려내거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키운 삶과 손길을 못 보고, 또 내가 키우는 삶과 손길을 못 봅니다.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곧바로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머리로 지어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보고 느끼고 담아내어 펼치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프랑스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멀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도 우리 동네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만나’거나 ‘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맙게 얻으면서 누리는 목숨인가를 느낄 수 있으면, 늘 즐겁고 신나게 일하며 놀 수 있습니다.


 (2)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읽기


 1902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레니 리펜슈탈은 2003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 살에다가 두 살을 더한 삶을 꾸린 이이는 처음에는 춤꾼이 되고자 했으나 다리를 다쳐 춤꾼이 되는 꿈을 접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감독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습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 걷던 길은 독일 정치권력을 붙잡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소용돌이를 거치며 송두리째 가로막힙니다. 유럽을 불태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찍은 영화 필름이며 집이며 사회활동이며 모조리 잃거나 빼앗깁니다. 전쟁통에 여러모로 아끼며 돌봐 주던 사람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이름에 얽히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빚과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가느다란 삶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하나만큼 다를 뿐이라 하는데, 날마다 죽고픈 마음이었을 텐데 갑갑하고 슬퍼서라도 죽을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마음속에는 뜨거움이 늘 솟구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촬영기를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 사진기를 쥐어든 레니 리펜슈탈은 ‘촬영기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사진기로 풀어내는 응어리’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레니 리펜슈탈한테는 지난날과 똑같은 ‘짓궂은 뭇칼질로 범벅된 글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도 짓밟히는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 터이나, 이러한 ‘죽음보다 못한 삶’에서도 삶자락을 붙잡습니다. 이리하여, “90대가 된 지금(1990년대)도 레니는 다이빙을 즐긴다. 레니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고령 다이버일 것이다. 무언가에 매혹되는 능력과 더 나은 사진을 향한 노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 그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 길고 날씬한 다리를 보면 (아흔을 넘긴) 레니는 아직도 소녀 같다. 레니는 처음 다이빙을 한 이후로 수년간 해저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다. 또다시 사라져 가는 존재를 기록할 운명이 주어진 듯했다. 그래서 레니는 열렬한 환경보후주의자이자 자크 쿠스토의 지지자이며 그린피스의 회원이 되었다(530∼531쪽).”고 합니다.

 우리 이웃동네에 여든일곱 나이로 수채그림을 그리는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할머님 댁을 찾아뵈며 인사를 올리고 말씀을 귀담아듣곤 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딸아들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걱정 없이 마지막 삶을 이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할머님으로서는 ‘당신이 손을 놀리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움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다면서, 여든일곱 나이로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면서, 이 가르침삯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예술쟁이로 한삶을 마감한 레니 리펜슈탈 님과 이웃동네 그림할머님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뭇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 다른 넋으로 예술(영화나 사진하고 그림)을 붙잡기도 했지만, 한 분은 예술길에 어린 날부터 젊음과 늙음을 모두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어머니로서 살림살이 꾸리기를 예순 넘어까지 한 끝에 비로소 느즈막하게 당신 예술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하게 당신들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 뜻과 길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돌아본다면,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당신이 세상살이와 세상흐름을 옳고 바르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거나 이끌 만한 길동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쏟거나 바칠 만한 짝꿍은 있었으나, 이 짝꿍들 가운데 레니 리펜슈탈이 한창 뜨거운 젊음을 불사를 때에 슬기롭고 눈밝도록 거든 사람은 없었구나 싶습니다. 따끔하게든 부드럽게든, 히틀러가 움켜쥐던 그무렵 독일 삶터를 바르게 읽고 바르게 도와줄 벗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지 않고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잽싸게 얼굴과 몸짓을 바꾸면서 레니 리펜슈탈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새롭게 살아남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건 일을 하건 했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헤아리면, 다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사람 얼굴과 이름에 기댈 뿐, 레니 리펜슈탈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 삶터를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길로는 접어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니 리펜슈탈도 나이 예순을 넘긴 다음 만나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간 길동무가 있었기에, 늘그막에는 당신 젊은날 매무새에서 한껏 거듭나며 새로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끊이지 않는 뭇칼질에도 견디어 내는 힘이나, 끝없는 손가락질을 살며시 흘려보내면서 빙긋 웃을 수 있는 느긋함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머나먼 나라 사람이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기에, 참말로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분이 늘그막에는 느긋하며 한결 즐겁게 마지막 삶을 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6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이 아닌 우등불 같은 뜨거움을 늘 가슴속에 담으면서 활활 태운 레니 리펜슈탈이었다고 느낍니다. 이 뜨거움이 있기에 히틀러 나치당 정권에서는 ‘사회와 정치를 읽지 못한 바보’였으면서도 영화예술 새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쓴 오드리 설킬드 님은, 두툼한 책 마무리를 지으며,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577쪽)?” 하고 묻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세상을 못 읽고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있겠으나, 레니 리펜슈탈한테만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여느 세상사람들은 레니 리펜슈탈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조용히 뉘우치면서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새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저 영화예술 하나에만 온힘을 바친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당신이 일군 창작은 창작 그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한편, 이러한 창작은 훌륭하지만 이러한 창작 뒤켠에는 또다른 삶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으시오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이처럼 넓고 푸근하게 껴안으면서 부드러이 일깨워 주는 어르신은 우리 사회에도 몇 사람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기만 하거나 잘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터전이 아니라, 처음에는 얄궂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며 미웁기도 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깨닫고 배우면서 우리 터전을 일구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넌 잘못했어. 넌 나빠.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해.’ 하는 말마디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 이 일은 이렇게 되었구나. 다음 일은 다르게 해 보자.’ 하면서 부둥켜안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 님을 감싼다거나, 마음씨는 짓궂고 눈썰미는 형편없으며 친일부역을 했지만 문학은 아름답다며 누군가를 우러르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되자는 소리입니다.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일 때에, 농사꾼이 이 논밭을 그냥 내버려 둘까요? 그예 내팽개칠까요? 참 농사꾼은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을 기름진 논밭으로 돌려놓으려고 여러 해에 걸쳐 땀을 흘리고 흙을 갈고 풀을 심고 갈아엎기를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대여섯 해, 길면 열 몇 해에 걸쳐 바보밭이나 묵정밭을 기름지며 좋은 밭이 되도록 힘씁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따스한 사랑과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는 금긋기가 아닌, 모두 아름다우며 고운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지 싶습니다.

 왜 초등 여섯 해, 중고등 여섯 해, 모두 열두 해에 걸쳐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겠습니까. 대학교에 보내려고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목숨이 올바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고 차근차근 섬돌을 디디듯 가르치고 일깨웁니다. 이 열두 해 동안 한 아이는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샛길로 접어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흔들리거나 떠돌 때에 우리 어른들은 지긋이 바라보며 포근히 감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손을 맞잡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켜보며 팔짱낀 채 지켜보지 말며, 어깨동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삶이란, 이이를 헐뜯는다든지 추켜세운다든지 깎아내린다든지 섬긴다든지 하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받아들이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은 어떤 모양 어떤 몸짓인가를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는 어떠한 뜨거움이 어떠한 크기로 어느 때에 있는지를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삶을 우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지나온 발자취뿐 아니라 바로 오늘과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흐트러지거나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다스리며 다독이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발자국을 찬찬히 짚으며 내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는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춤사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몸짓을 가만히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땀방울을 오롯이 살피며 내 땀방울은 어떠한가를 오롯이 살핀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간기를 살피니,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 나라에는 2006년에 옮겨졌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은 2003년에 죽었습니다. 당신이 아흔다섯 살일 때에 나온 책인데, 레니 리펜슈탈 할머님은 당신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되짚으면서 다룬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나서, 당신 마지막 일곱 해는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일구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다루는 평전이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써서 함께 읽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웃동네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 난날을 기리면서 ‘당신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스콧 니어링도 그렇고 레니 리펜슈탈도 그렇고 우리 이웃동네 그림할머님도 그러한데, 모두들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를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당신들 모두가 고마운 이슬떨이요 스승이요 길동무입니다.


 (3) 길디긴 이야기 꾹꾹 눌러담기


 2006년에 읽은 책을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읽고 다섯 해 만에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2006년 무렵, 이 책을 펴낸 ‘마티’ 출판사에서 다른 책을 내놓았는데 오탈자가 다섯 군데 나오는 바람에 애써 찍은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고 다시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느낌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오탈자를 스물다섯 군데 찾았는데, 자그마치 650쪽이 넘는 책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새로 찍는다면, 1인 출판을 하는 사장님이 알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650쪽짜리 책에 오탈자 스물다섯 군데라면 퍽 적게 나온 셈입니다.

 드디어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쓰는구나 하고 지난 다섯 해를 돌아봅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썼다면 아무래도 ‘다섯 해만큼 덜 배우고 덜 깨닫고 덜 생각한’ 채로 느낌글을 썼으리라 봅니다. 다섯 해가 지난 오늘이라 해서 더 배우고 더 깨닫고 더 생각하며 느낌글을 쓴다고 내세우기 힘들지만, 다섯 해를 곰삭일 수 있는 세월이 고맙습니다. 아마, 앞으로 다섯 해를 더 곰삭인 다음 이 책을 새로 돌아본다면, 그만큼 저 스스로 ‘오늘은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그때에 읽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 맞이할 다섯 해를 생각하면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제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든 대목을 하나하나 눌러담아 봅니다.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도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이 책을 마주하고 싶은 분이라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인데, 며칠 만에 다 읽으려 하든지 한두 달 만에 끝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기고 돌아보면서 1900년대 첫무렵부터 1900년대 끝무렵까지 우리 세상 이야기를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낸 한 사람 발자취이자 20세기 인류문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43.1.28.나무.ㅎㄲㅅㄱ)


[18∼20, 118, 129쪽] 여기서 리펜슈탈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장비와 최고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리펜슈탈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서 각 촬영기사들이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 레니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직접 그런 영화를 위한 발라드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용을 할 때처럼 말이다 … 레니는 마을 여관에 방을 잡고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계획을 털어놓자 여관 주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 하지만 레니는 겁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레니는 하루 종일 거리나 산허리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고, 특히 여자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차가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고, 레니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여주자 곧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보려고 애썼다.

[32∼35쪽] 리펜슈탈은 그동안 스포츠 고위 관리들 모두와 한 사람씩 모두 돌아가며 싸운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레니는 높이뛰기 경기장에는 구멍이 두 개,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삼단뛰기 경기장과 100미터 트랙 결승선 끝에는 각 하나씩의 구덩이를 확보했더 … 레니 자신은 운동선수에게든 영화 관객에게든 운동과 영화의 관계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굳게 믿었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과 ‘구성에 대한 관심’이 바로 레니의 동력이었다. 물론 리펜슈탈은 개인의 의지로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개념도 좋아했지만, 이와 같은 경쟁의 중심에 있는 우정도 좋아했다 … 리펜슈탈은 또 “나는 매우 현실적인 것, 삶을 그대로 잘라낸 부분,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특이한 것, 특별한 것만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건강한 것, 즉 살아 있는 것에 매료된다. 나는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마음만 먹으면 리펜슈탈의 발언에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섬뜩한 울림이나 초월적인 질서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기란 매우 쉽다. 하지만 제3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은 의혹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삶을 양식화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전범재판이 연달아 열렸으나 레니는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그녀의 작품 활동을 막았다. 레니는 결코 영화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레니의 다큐멘터리를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녀의 영화가 공개적으로 상영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무삭제로 방송된 적은 없었다. 영화사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심지어 여엉의 업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리펜슈탈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리펜슈탈은 거의 전 세계적인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을 구분할 방법이나 구분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34∼135, 146, 286∼287, 349∼350쪽] 몽블랑의 방랑자 야보르스키는 리펜슈탈과 함께 영화를 만들던 힘든 나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 단 한 쇼트를 찍기 위해서 장비를 전부 등에 짊어지고 8시간 동안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케이블카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장비를 모두 등에 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사랑해야 하지요.” … 리펜슈탈은 할리우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스튜디어가 원하는 이름, 그것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고된 환경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찍을 능력이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거절하면 할수록 영화사는 점점 더 높은 출연료를 제시했다. 리펜슈탈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결국 레니는 영화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지만, 돈 때문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레니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중한 동료들과 다시 한 번, 어쩌면 마지막이 될 모험을 할 기회였기 때문이다(1932년 무렵) …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끌어내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려면 반드시 한 사람이 편집을 해야 한다며,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편집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 리펜슈탈은 직접 꼼꼼하게 정찰하여 최상의 카메라 위치를 찾아냈고, 또한 정확히 어떤 앵글을 원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며, 심지어는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까지 직접 결정했다. (1936년 올림픽에서) 각기 다른 경기에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추구해야 했다 … 리펜슈탈은 각기 다른 경기를 모두 다르게 다루면서 각 경기에 알맞은 속도와 스타일을 적용했고, 능숙한 편집 솜씨로 이런 각 경기를 근사하게 하나로 엮어 전반적인 리듬감을 완성했다.

[149∼150, 452, 458∼459쪽] 레니는 〈푸른 빛〉 작업에 몰두하느라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다면, 독일 경제가 가라앉고 있으며 실업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니가 별 걱정을 하지 않는 사이, 아버지는 사업 규모를 줄이고 전 직원의 60퍼센트를 해고한 후 어머니와 함께 자그마한 아파트에 세를 얻어 이사해야 했다 … 레니가 전쟁에 활발하게 참여한 기간은 채 3주도 안 됐지만, 이 경험은 몇 십 년 동안이나 레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 레니는 전쟁 기간 내내 〈저지대〉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동료 촬영기사들과 조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레니가 야보르스키에게 말했다. “최대한 몸을 사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요. 살아남는 데만 신경 쓰라고요.” 물론 레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151∼153, 233, 236, 277쪽] 레니는 히틀러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히틀러라는 존재 자체와 그가 청중을 사로잡는 방법에 매료되었다 … 레니는 강한 인상을 받으면 누구든 어느 때든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 레니는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었다 … 민주주의는 죽었다. 리펜슈탈은 베르니나와 베른 알프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만 독일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레니는 5월 10일 베를린 대학 맞은편 보리수 거리에서 ‘반독일적’인 사상을 담았다고 판단되는 저술은 모두 불태웠던 분서 사건도, 최초의 유대인 추방 사건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 리펜슈탈은 수많은 작가와 음악가, 화가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계의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렸다 … 괴벨스의 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멀어진 것은 레니의 주장보다 훨씬 뒤였다. 또한 괴벨스는 레니 리펜슈탈이 스위스 알프스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똑똑한 여자’ 레니 리펜슈탈과 몇 번이나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1주일 후인 5월 17일에 괴벨스는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 히틀러가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부분에서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찍었다. 연단 주변에 설치해 둔 원형 트랙을 따라 히틀러의 주변을 ㅊ너천히 돌면서 밝은 조명 아래에 선 이 민중 선동가를 낮은 앵글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260, 263, 274∼275, 276쪽] 히틀러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국민계몽선전부는 계약을 최종 호가인해 주지 않았고, 정부 영화 부서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리펜슈탈에게 촬영기사나 필름을 제공할 권한이 없었다. 리펜슈탈이 공식적인 협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했으니 가장 쉬운 방법은 패배를 자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리펜슈탈의 타고난 집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리펜슈탈이 히틀러에게 느끼는 의무감에도 맞지 않았다 … 리펜슈탈의 회고에 따르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의 거물들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매우 만족한 듯했지만, 리펜슈탈 자신이 보기에는 제대로 된 플롯도 대본도 없는 미완성작에 지나지 않았다. 리펜슈탈은 “이미지를 조합해서 시각적인 리듬과 다양함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토록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낸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괜찮은 연습이었던 셈이었다 … 전당대회가 끝난 후에 발행된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책을 보면, 전당대회 준비가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준비와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리펜슈탈은 전당대회는 그녀가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았든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자신은 이 장대한 행사와 그 준비과정을 단순히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사진과 설명은 그녀의 주장과 달리 리펜슈탈이 실제 전당대회 연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로 종종 제시되었다 … 어느 쪽이 진실이든 리펜슈탈은 자신이 역사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며 기록 대상이 무슨 행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1933년 전당대회를 기록한 〈신념의 승리〉,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의지의 승리〉, 독일군에 대한 좀더 짧은 다큐멘터리 〈자유의 날〉을 만들기 전에도 전당대회를 기록한 뉴스 영화는 존재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이렇게 예술적으로 연출된 나치당 전당대회에 바쳐진, 혹은 정말로 마침내 집권한 히틀러에게 바쳐진 ‘장편’이었을 뿐이다.

[309, 312, 314∼317쪽]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환상적인 분위기다. 초창기에는 그녀의 연기에서 이런 요소를 엿볼 수 있으며, 나중에 연출을 하게 되면서 특징은 더욱 뚜렷해졌다. 리펜슈탈은 일상적인 관심사나 평범한 메커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양식화된 세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 그녀는 결코 프로파간다를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의 의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 히틀러는 전당대회 다큐멘터리를 왜 하필이면 리펜슈탈에게 맡기겠다고 그토록 고집했을까? … 그녀의 역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정황을 접어두어야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이 제6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거절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인가? … 리펜슈탈은 그 걸림돌로 인해 자신이 영영 영화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녀는 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조각 자료들과 그토록 진부한 아이콘을 가지고 걸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전후 비평가들은 리펜슈탈이 이 영화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독일인의 90퍼센트가 히틀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응수했다. 이 영화에서 나치 정당의 교조는 별로 드러나지 않으며 나치의 악질적인 인종차별적 교조나 정치적 박해를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당대회 자체가 그랬던 것이지 리펜슈탈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리펜슈탈은 최면과 같은 의식을 공들여서 훌륭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다.

[367, 369, 433∼434, 447쪽] 리펜슈탈은 확보한 필름 약 400킬로미터를 보는 데만도 10주가 걸렸다. 레니처럼 전설적인 질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 레니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마라톤 주자들의 내면적인 감정”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독한 피로나 빨리 경기가 끝나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감정 말이다. 주자의 무거운 다리는 아스팔트에 들러붙는 것 같지만 의지력이 그를 이끌어 간다 … 지금 이 영화를 역사 다큐멘터리로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에서 엿보이는 나치당 지도자들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지 모른 채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준다 … 레니는 시와 영화가 비슷한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시와 영화는 언제나 ‘교류 전기’처럼 일종의 파동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또한 관객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관객은 시퀸스의 표현력에 의해 절정에 이끌렸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상승하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473, 488∼489쪽]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부터 슈네베르거 부부(전쟁 때 레니는 슈네베르거 부부를 숱하게 도와서 목숨을 여러 차례 건져 주었다)는 레니 리펜슈탈을 멀리하려 했다. 그들은 그날 밤 칠레르탈 계곡 꼭대기의 작은 호텔에 레니를 버려둔 채 떠났다. 다음날 레니가 두 사람을 쫓아서 마을 위 언덕에 있는 한 가족 임대별장에 갔지만, 기젤라가 차갑게 레니를 쫓아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젤라가 소리쳤다. “이 나치 계집 같으니라고!” 한스 역시 따뜻한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눈벼룩은 몇 주 전만 해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원하는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레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리펜슈탈의 자산과 권리, 자유는 모두 강제된 채였다 … 리펜슈탈과 히틀러가 친밀한 관계였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총통의 측근들이 증언한 기록은 많았다 … 리펜슈탈은 또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히틀러식 경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491, 492, 509쪽] 레니는 끝도 보이지 않는 빚과 소송에 시달렸다 … 법정은 레니의 전쟁범죄 혐의를 풀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적의는 1947년 출판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독일 영화 심리분석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와 같은 새로운 해설이나 리펜슈탈의 소송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더욱 부추김을 받았다 …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후 한 번도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의 진창’을 뒹구는 기분이었다. 감금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으며, 심문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인터뷰’의 탈을 썼을 뿐이었다.

[520∼521, 524쪽] 레니는 이들(메사킨 퀴사이르 누바족)의 순진함과 때 묻지 않은 관습을 사랑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 레니 리펜슈탈은 아프리카에 열 달 간 머무르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했는데, 대부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 레니는 차도 텐트도 없이 주로 바깥에서 잠을 잤다(1962년 무렵). 이제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여졌고 뱀에 물려죽은 전사의 장례식에까지 초대받았다. 이곳에서 레니는 어디에든 갈 수 있었고 혼자 있을 때도 두렵지 않았으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레니는 지난 몇 년 간 독일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모욕을 참아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친구들로부터 환영받자 짐심으로 행복했다 … 이번에는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누바족의 영화를 찍으리라 … 레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바족에게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벌집 같은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526, 569, 571∼573쪽] 이때쯤(1968년) 레니의 사진이 유명해졌다. 아프리카 사진을 모은 첫 사진집 《최후의 누바족》이 뉴욕에서 1974년에 출판되었고, 2년 후에는 《카후 사람들》이 나왔다. 레니가 수단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1982년에는 《레니 리펜슈탈의 아르피카》가 출판되었고, 곧이어 《사라지는 아프리카》가 나왔다. 이제 사실상 레니가 알고 레니가 사랑했던 누바족은 사라지고 없었다. 레니의 표현대로 ‘문명의 파괴적인 손’은 누바족에게 누더기옷과 정체성의 위기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돈, 술 그리고 문을 잠글 자물쇠를 가져다주었다. 관광객들이 누바산으로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는 이국적인 정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춤과 싸움의 의식은 수많은 렌즈 앞에서 돈을 받고 치러졌다. 레니는 그녀의 사진이 이런 변화에 일부 책임이 있다든지, 그녀는 단지 ‘환상에 사로잡힌 백일’일 뿐이라는 비난에 반박했다. 누바족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예의 집착과 숭배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는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레니는 깊이 절망했다. 레니가 사진을 찍기 전에 다른 사람들도 누바족의 사진을 찍어 발표해 왔다. 단지 그녀는 사라지는 순간의 목격자이자 기록자가 되는 특권을 누렸을 뿐이다. 레니는 부패해 가는 천국을 보았다 … 리펜슈탈의 사진은 가장 완벽한 인간 육체를 아무 부끄러움 없이 찬미한다. 수전 손택은 《우율한 열정》에서 리펜슈탈이 그려내는 “곧 멸종될 누바족은 리펜슈탈이 만든 나치 작품의 연장”이라고 비난했고 몇몇 비평가들 역시 손택을 따랐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리펜슈탈이 찍은 수단 사람들의 감각적인 초상에 굉장히 기뻐하며 리펜슈탈이 여행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점점 더 친절해졌다. 1975년 니메이리 대통령은 리펜슈탈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수단 시민권을 수여했다. 리펜슈탈은 그런 영광을 누리는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 지적이고 정열적인 탐구로 유명한 손택은 “생각을 자라게” 하는 글로 유명했는데, 리펜슈탈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오히려 많은 독자들의 생각을 고정시켜 버렸고, 거의 30년 전의 크라카우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리펜슈탈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어쩌면 제일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손택의 글이 전혀 다른 두 작품에 대한 평이라는 점이다. 손택은 짓궂게도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제목 하에 레니의 아프리카 사진집을 《SS 제복》이라는 책과 함께 묶어서 평한다 … 손택은 리펜슈탈이 누바족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이런 류의 사진에 대한 손택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손택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리펜슈탈에 대한 이미지가 사진을 보는 눈을 흐렸을 수도 있다. 다른 예술가들 또한, 리펜슈탈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리펜슈탈에게 영감을 준 조지 로저는 1948년과 1949년에 씨름을 하는 누바족 사진을 찍었다. 로저의 사진은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로저의 사진을 파시스트적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손택은) 리펜슈탈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두 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고” 어쩌면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중 가장 위대”할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야누스와 같은 관점이다! … 손택은 리펜슈탈에게 언어적인 공격을 퍼붓지만, 그 방식은 프로파간다라는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 레니는 언제나 누바족을 관찰하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파시스트적이란 말인가?

[577, 594쪽]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 … 우리는 리펜슈탈을 비난하지만, 리펜슈탈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 하지만 무엇을 믿든 간에, 사회가 리펜슈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의지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나치 현상과 나치 현상의 힘(신비화와 볼거리를 통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묶어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금만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 반세기나 지난 상황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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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133 ― ‘서울에 핵발전소를!’ 하고 외치는 마음
 : 히로세 다카시, 《체르노빌의 아이들》



- 책이름 : 체르노빌의 아이들
- 글 : 히로세 다카시
- 옮긴이 : 육후연
- 펴낸곳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06.9.6.)
- 책값 : 8000원



 (1) 어린이책을 안 읽는 어른


 아파트에 살지 않을 뿐더러 아파트에서 살 생각이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을 다닌다든지 이웃 동네를 다닌다든지 하다 보면, 자그마한 집이 송두리째 내몰리거나 사라진 다음 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을 봅니다. 큰 도시이든 작은 도시이든 온통 아파트밭이고, 깊이깊이 들어가는 시골이 아니고서야 아파트 자락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 나라 터전이라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많이 살고 있으며, 새 아파트는 꾸준히 올라섭니다. 아파트마다 이름이 다르고, 새롭고 더 멋스럽다고 하는 이름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환경운동 하는 분들이나 환경정책 내놓는 공무원이나 우리 말보다는 영어를 조금 더 좋아해서 ‘에코’라는 말마디가 나날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에코’를 어디까지 쓰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려고 누리그물에서 찾아보니 에코하우스, 에코샵, 에코뮤지엄, 에코프랜즈가 줄줄이 나옵니다. 그리고 ‘에코메트로’가 나옵니다. 지하철공사가 ‘지하철’이라는 낱말보다 ‘메트로’를 좋아하고 있기에 철도공사가 무슨 환경정책을 내놓았나 싶어 더 들어가 살펴봅니다.

 저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 몰랐다 할 테고, 아는 분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에코메트로란 아파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에코메트로라는 아파트에는 ‘에코 영어마을’이 있고 ‘에코파크’가 있으며 ‘에코브릿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하고 담을 쌓으며 살아가는 내 하루하루는 아닐 텐데, 세상사람들이 쓰는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말이 더없이 골치아픕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말이 몹시 어지럽습니다. 우리는 수수하게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어떤 물결을 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꾸밈없이 어깨동무하는 삶이란 머나먼 이야기요 까마득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는지요.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를 맞이한 요즈음은 책마을에서 어린이책 목소리가 조금 더 높습니다. 2020년을 맞이하면 어린이책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리라 봅니다. 그런데, 어린이책 목소리가 높아지는 다른 한켠에서 보면 푸름이책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분들이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기는’ 책은 ‘갓난아기부터 초등학교 6학년’ 사이에서 맴돕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사이에서 읽힐 푸름이책은 몇몇 사람들만 만들거나 읽히거나 쓰거나 옮깁니다. 더욱이, 제도권학교에 깃들지 않는 푸름이를 헤아리는 책은 훨씬 적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한테 맞춘 책은 꽤 있으나, 대학생이 되지 않으며 세상과 부대끼는 젊은이한테 맞춘 책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어린이책 갈래를 놓고 동시와 동화, 또 판타지와 생활동화, 또 어린이글과 무엇무엇 들을 자잘하게 가르기도 하며, 이제는 웬만큼 눈높이를 다진 어린이문학 비평을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 여느 흐름으로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어른문학 비평’에 견주어 낮은 자리이고, ‘어린이문학 이야기나 창작’은 ‘어른문학 이야기나 창작’과 견주어 눈높이가 낮은 듯 여깁니다.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고 소설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나 영업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으나, 어린이책을 즐겨읽지 않으며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 편집자와 영업자가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까지 어린이책 하나 차근차근 살피는 어른이 드물고, 아이한테 어린이책을 읽히려고 할 때에도 스스로 먼저 깊이깊이 읽으면서 옳고 바르고 알맞고 즐겁고 따스하고 사랑스레 골라서 읽히는 어른은 더욱 드뭅니다.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교사 가운데 ‘어린이책을 즐겁게 읽으며 넉넉히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중고등학교 교사 가운데 ‘청소년책을 신나게 읽으며 두루두루 안다’고 할 만한 분이 얼마나 있는지요.

 저부터 어린이일 때에 마땅한 어린이책을 읽지 못하고 컸던 일을 깨달은 나이는 스물세 살 무렵입니다. 어릴 적에 읽지 못한 좋은 어린이책을 읽자고 다짐한 나이는 스물너덧입니다. 아름답게 여민 어린이책을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에 비로소 손에 쥐면서 ‘어린이책을 어린이일 때에 읽지 못하면 마음밭이 이렇게 가난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린이일 때에 어린이책을 읽지 못했다면 어른이 된 다음에라도 읽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었으니 어린이책을 안 읽는다고 하면 ‘어른으로 살면서도 어른다움을 떠올리거나 추스르기 어렵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가 읽는 책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읽는 책입니다. 또한 어린이책은 어린이를 비롯한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어린이책은 누구보다도 ‘어린이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면서 ‘어린이를 널리 아우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거이 읽을 수 있게끔’ 일구어 낸 문화요 선물입니다.


 (2)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어린이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었습니다. 2006년 가을에 나온 책을 책상맡에 오래오래 올려놓고 지내면서 야금야금 읽었습니다.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깊이 파헤치면서 부드럽고 포근하게 감싸안은 어린이문학인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환경사랑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마땅히 가야 하는 바른 길을 마땅히 안 가면서 마땅하게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한테 마땅한 사랑과 믿음이란 무엇이고, 마땅한 삶과 사람이란 어떠한가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번역이 너무 얄궂고 엉성해서, 이 반갑고 좋은 책을 오래오래 묵혀 두었습니다. 아니, 처음 반 해 동안은 엉성한 번역을 한 줄 한 줄 모조리 고쳐쓰면서 읽었는데, 이렇게 반 해 동안 더디더디 글다듬기를 하며 읽자니 힘들어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잃어버린 숲》(레이첼 카슨)을 읽을 때에도 너무 어설픈 번역 때문에 도무지 책을 읽을 수 없어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며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번역이란 나라밖 말을 잘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 번역가들은 나라밖 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몰라도 우리 말은 너무도 못합니다. 나라밖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도 깊고 넓게 헤아리는 한편, 우리 문화와 삶터와 이야기를 깊고 넓게 헤아려야 하는데, 슬기롭고 따스하게 어우르면서 번역길을 가는 분은 생각 밖으로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어른책이 아닌 어린이책입니다. 《잃어버린 숲》이야 처음부터 어른책으로 나왔기에, 웬만한 어른들은 어설픈 번역을 읽으면서도 글쓴이 마음을 어느 만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설픈 번역으로 어린이책을 옮겨내면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지요? 아이들 눈높이에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 마음밭을 일그러뜨릴 걱정이 있는 낱말과 말투로 번역을 하면 어찌하지요? 쉽고 깨끗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테두리로 되는 번역이 아닙니다. 쉽고 깨끗한 말이란 밑바탕입니다. 알맞고 올바르며 슬기로운 말을 찾아야 합니다. 창작을 하는 분들이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들인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번역을 하는 분들 또한 한 줄 두 줄 옮겨내면서 땀과 품과 마음과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이는 책느낌글을 쓰는 비평가한테도 마찬가지인 대목입니다. 창작하는 사람 마음이 되어 번역을 하고, 창작하는 사람 매무새 그대로 비평을 해야 합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쓴 히로세 다카시 님이 ‘아줌마다운 힘’으로 이 책을 써냈다고 적었습니다만, ‘아줌마다운 힘’이란 ‘아이 엄마로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보여주는 힘’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아줌마’란 말마디는 얄궂거나 나쁜 쪽으로 흔히 쓰이지만, ‘아줌마다운’ 삶이란 더없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삶입니다. ‘어머니다운’ 삶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목숨 하나 보듬으며 지낸 삶에다가 이 목숨 하나를 기나긴 나날에 걸쳐 키워내는 보람이 어머니 삶입니다. 아줌마 삶은 할머니 삶으로 이어지기 앞서 아이 스스로 무럭무럭 크면서 또다른 어른이 되면서 새로 아이를 낳아 키우도록 이끌어 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이란 바로 목숨을 아끼는 삶이고, 목숨을 사랑하는 삶이며, 목숨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처럼 ‘우리 글 바로쓰기’를 알뜰살뜰 잘 이루어내야만 좋은 문학이나 창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란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한테 밑바탕입니다. 때로는 잘못 쓰거나 아직 잘 몰라서 어설피 쓰는 대목이 있을 수 있을 터이나, 말이 말다웁도록 가다듬고 글이 글다웁도록 보듬는 일이란 창작하거나 번역하는 사람한테는 밑바탕입니다. 이 밑바탕이 되면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밑바탕으로 히로세 다카시라고 하는 아줌마 한 사람이 어떤 넋과 몸가짐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이 땅 아이들하고 어른들한테 선물로 베풀어 놓았는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분들은 익히 알 텐데, 원자력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전기를 만들어 내면서 환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쓰는 전기를 얻어내자면 그만큼 환경을 망가뜨려야 합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도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나무베기로 그치지 않고 물과 기름을 많이 써야 하며, 벤 나무를 실어나르고 종이공장을 돌리고 또 무엇무엇을 하는 데에 드는 자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는 공장을 돌리자면 마땅하게도 전기를 써야 합니다. 다 만든 책은 책방에 놓이기까지 짐차에 실려 가는데, 짐차를 만들 때에도 적잖은 자원과 전기를 썼겠지요. 책방에 놓인 다음에도 전깃불을 켜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요.

 소련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졌고, 미국 드리마일에서 원자력발전소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숫자로 치면 몇 안 된다 할 텐데, 몇 안 되는 원자력발전소인데 이 몇 가지만으로도 온누리 사람들이 벌벌 떱니다. 화력발전소가 터졌을 때에도 벌벌 떨 테고,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흘러넘쳤어도 소름이 돋지만, 원자력발전소 하나 터지거나 말썽나는 일에 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체르노빌의 아이들》 맨 끝쪽에 글쓴이가 밝히듯, “도쿄에 핵발전소를!”이거나 “뉴욕에 핵발전소를!”이거나 “서울에 핵발전소를!”이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데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서울입니다. 서울에 사는 부자들만 전기를 쓸까요? 서울에 사는 가난뱅이들은 전기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발전소를 지어야 하면 어떠한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지부터, 전기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 살림살이는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터전인 우리 자그마한 동네부터 ‘지금 이대로 꾸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거나 좋은가?’를 되새기자고 하는 이야기책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아무런 주의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넌지시 푸근한 이야기로 이와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함께 깨닫고 아이들로 살아가는 그 나이부터 우리 삶과 목숨과 사랑을 싱그럽고 곱게 되새기면서 푸른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 《체르노빌의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우리 아이가 어느 만큼 큰 다음에 읽히고 싶고, 아이한테 읽히고 싶은 마음에서 한 줄 한 줄 글다듬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다만, 저도 아직 글다듬기를 훌륭히 해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힘껏 애쓰고 마음을 쏟아서, 아이가 열 살이 될 때쯤에는 빈 공책에 이 책을 손글씨로 하나하나 새로 옮겨서 적어 놓고 싶습니다.


 (3) 아쉬운 대로 되읽는 책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삶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좀더 나은 말과 글을 주고받을 수 있게끔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삶을 꿈꾼다면,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말과 글을 나눌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번역은 여러모로 아쉽지만, 아쉽다고 느끼는 번역이라면 아이들 앞에서 이 책을 ‘어떻게 새로 읽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더 좋은 마음으로 더 오래오래 즐기고 싶어서,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하나하나 적어 봅니다. (4343.1.25.달.ㅎㄲㅅㄱ)


[12쪽] 창밖으로 보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점점 불길이 거세져 일 미터가량 되는 높이의 불꽃이 상공에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계속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믿어 왔던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였단 말인가요?”

[22쪽]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건 안드레이는 가속페달을 밟으려다 문득 땅바닥을 훑어보았다. 땅에 떨어진 새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는 꿈틀거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이반과 이네사가 이 공기 속을 그냥 걸어나온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다녔을 새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5쪽]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본 지가 얼마만인가. 이반이 어렸을 때에는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안드레이는 어리석게도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자식을 끌어안고서 행복을 맛보고 있었다.

[52쪽] “엄마!” 이반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타냐가 모르겠다고 하자, 이반은 말을 이었다. “혼자 죽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이네사도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다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무서워요. 엄마는요? 어떻게 해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폭발 이후로 내 방에 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아빠도 없고, 학교도 없어요. 전부 사라졌어요. 강해진다는 것,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그러나 우습지 않아요? 숨만 붙어 있는 것이 새로운 인생이라니, 그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는 만약 아빠가 …….”

[82, 83쪽] 농민들은 스트레리초프라는 사람을 내세워 군인들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원자로가 폭발했기 때문에 대피하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과 소는 어떡하란 말인가? 온 정성을 기울여 키운 이 가축들은 농민들에겐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가축들을 모두 버려두고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것도 총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밭은 또 어떡하란 말인가? 마음속으로 ‘올해는 제발 알차게 열매 맺기를’ 기도하면서 불알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땅을 갈고, 또 해가 뜨기도 전에 들로 나가 종자를 뿌리고 비료를 주곤 했던 그 밭을 어떻게 두고 떠나란 말인가? 농민들에게 소와 양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밭작물도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스트레리초프와 농민들에게는 생명이자 삶 자체였던 것이다 … 군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군중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군인들에게는 최고 능력이자 군인된 보람이었던 것이다. 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농민들의 저항은 무산되었고, 별 수 없이 군인들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4∼115쪽] 사실상, 의사나 간호사보다 아이들의 공포심이 백 배는 더 컸다. 이 병원으로 오기 전에 어떤 아이는 동물의 시체를 밟았고, 어떤 아이는 눈앞에서 부모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또 농민들이 강제로 피난하는 모습도 보았고, 검문소에서는 잔인하게도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한꺼번에 이런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된 아이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감옥 같은 병원 안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17쪽] 이네사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와 병실 안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네사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감독관은 탈진 상태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이네사를 보고 있으면서도 상태가 어떤지 가까이 다가와 살펴보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이네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는 아이들만이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기도했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신의 몸 위에 드리웠음을 느끼고 있었다.

[154, 157쪽] “저도 각오는 돼 있어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라.” 마르쿠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몸이 좀 이상해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제게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어요, 선생님. 이젠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손도 발도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몸이 제 몸 같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렇게 약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한 번 똑똑히 봐두고 싶었어요. 인간이 죽을 때는 이렇게 되는군요. 이젠 각오가 돼 있어요. 아파서 괴로워할 때는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느꼈었는데 …….” … 이반의 시체는 거센 바람만이 불고 있는 황야에 매장되었다. 그곳에는 꽃다발도,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160쪽] 타냐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남편 안드레이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했다. 타냐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반과 아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글쓴이 말/165∼168쪽] 그제서야 나는 ‘내 생각이 틀림없다’ 확신하고, 팸플릿을 만들어 번화가에서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팸플릿을 받아든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스리마일섬에서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원자력 발전소를 염려하지 않았다. 때문에 ‘양식 있는 인간이 일본에는 이다지도 없는가’ 낙심하면서 돌아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이 책은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될지도 모를 현지에서는 관심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대도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장의 생계활동과 큰 상관없어 보이는 핵의 위험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건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엔 에너지 문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대도시 문제인데, 정작 대도시 사람들이 그런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도쿄에 핵발전소를!》이라는 책이다. 제아무리 대안 부재를 내세우며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을 논하더라도, 그런 핵발전소를 도쿄에 세울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ㆍ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일 뿐이다 … 나는 현재의 어른들이 정말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길 바란다 … 절망적인 상황을 모르고는 참 희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어른들이 주는 허무감은 퇴폐를 향해 간다. “어른들을 본받지 마라”는 것은 그러한 무의미한 허무와 냉소를 거절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새 희망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 원자력 발전소의 물질적 피해 등은 수치로 나타내면 그뿐이지만,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 하나뿐인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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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노나리 지음 / 에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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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땅에 있는 ‘푸른누리(그린란드)’를 찾자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0] 노나리,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엊저녁 서울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부터 아기하고 씨름하던 옆지기는 축 처졌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서울 볼일을 봐야 하는데 몹시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다음달 첫머리까지 해야 하니 어쩌는 수 없습니다. 이 어쩌는 수 없다는 굴레가 참 고단합니다. 아픈 사람을 놓고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란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서도 몸과 마음이 나란히 고단하고 괴로운 노릇인데, 어디 하소연할 데란, 아니 어디 도움을 바랄 데란 없습니다. 우리 삶터는 ‘장애’라고 하면 팔이나 다리가 똑 부러졌다거나 한쪽 팔다리가 짧다거나 하는 ‘정상인이라 하는 사람하고 견줄 때에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팔이 부러지지 않았다든지 말을 못한다든지 눈이 멀었다든지 하지 않으면 ‘그깟 장애야 뭐 대순가?’ 하는 세상 흐름입니다.

 새벽부터 바지런히 글 몇 자락 써 놓고 신나게 빨래를 한 다음 밥이나 죽을 끓여 놓습니다. 허둥지둥 길을 나서야 하니, 어제 해 놓은 빨래를 갤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헐레벌떡 길을 나서며 전철역까지 달음박질을 칩니다. 겨우겨우 전철을 잡아 타고 떠나도 늘 서울 일터에 늦습니다. 늘 늦어도 무어라 한소리를 안 하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해 주어야 참으로 고맙다고 느낄 텐데, 이런 뜻을 내비치면 손을 떼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일자리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 스스로 바라는 일자리가 아니더라도 저쪽에서 바라면서 일을 맡긴다고 한다면 얼씨구나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저처럼 어서 그만둘 수 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일은 배부른 소리로 여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참말 집에서 집식구를 돌보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이제 열아홉 달에 접어든 아이하고 어울릴 또래 동무를 찾아보고 싶으며, 아이가 또래 동무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조용하면서 바람과 물이 맑은 동네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아이는 아이대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랄 테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아픈 몸과 마음을 차근차근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요.


.. 마구잡이 개발 우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게 한국 환경문제의 현주소다. 자칫 그린란드가 한국과 비슷한 노선을 밟게 될까 봐, 그래서 그린란드 환경파괴가 자립이라는 명목 아래에 정당화될까 두렵다 … 그린란드 북동부 도시 우페르나박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 떠 있던 거대한 쓰레기섬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휴지조각에서부터 폐차까지 한데 얽혀 덩어리진 그 섬을 보는 순간, 그린란드에 머물렀던 50여 일 동안 단 한 번도 분리수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29쪽)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도 옆지기는 무겁고 힘든 몸으로 집안에서 아이하고 홀로 놀며 어울리며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그지없이 무겁습니다. 흔히 일컫는 작은식구(핵가족)일 때에는 아이가 없이 둘만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할는지 모르나, 아이를 키우는 삶일 때에는 큰식구가 아니면 서로서로 버거움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꼭 아이키우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살아가며 배우고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눈썰미와 슬기를 주고받을 수 있자면, 작은식구가 아닌 큰식구로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또는 살붙이들이 서로 가까이 담장을 맞대고 지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동체마을이든 공동육아이든 달리 대단한 뜻이나 거룩한 얼이 모인 모둠살이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큰식구로 올망졸망 복닥이며 아이나 어른이나 어리든 늙든 숱한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고 마주하고 살을 섞으면서 사람살이를 배우는 터전을 스스로 잃은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 스스로 이러한 사람살이를 되찾으려는 조그마한 몸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붙이가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고루 어우러져 있던 우리 터전을 우리 스스로 버린 다음, 좀더 많은 돈을 나 홀로 벌겠다는 마음이 하루이틀 불거지면서, 이렇게 우리 스스로 어린이집을 찾고 보육원을 찾으며 따로 누리모임(인터넷 동호회)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다른 자리’를 찾아나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면서 우리 삶을 이렇게 바꾸기만 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기도 했겠지만, 어릴 적부터 받은 제도권 교육이 이러한 길로 이끌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도권 교육에 길들거나 익숙한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삶굴레를 고스란히 물려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밝고 맑은 쪽으로 나아지도록 하겠다는 진보나 개혁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놓치거나 잃거나 잊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면서 ‘사랑’을 참다이 나누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찾을 아름다움이란, 또 사랑이란, 어느 별나라나 달나라 이야기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우리 식구 삶을 사랑스레 보듬으며 이웃하고 동무들과 살가이 어울리는 터전을 갈고닦고 보듬는 일이 바로 진보요 개혁이 되어야겠지요.


.. 일 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간다. 일각고래가 나타날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캠프를 옮겨 봐도 별 소득이 없다. 여정 초반, 사흘 안에 일각고래를 잡겠다며 큰소리 쳤던 닐스와 일랑우악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만 철수하잔다 … 한국에서 소가 그러하듯, 그린란드인들에게 일각고래는 어디 한 구석 버릴 부위 없는 동물이었다. 옛 이뉴이트들은 껍질과 고기 내장은 모두 먹고, 뼈는 집을 지을 때 골조로 쓰거나 개썰매의 날을 만드는 데 썼으며, 수염은 엮어서 바구니를, 폐의 세포막으로는 북을 만들고, 기름은 불을 밝힐 때 썼다 ..  (85, 88쪽)


 오늘 하루 집을 나선 다음 해야 할 일과 집으로 돌아와서 붙잡아야 할 일을 곱씹으면서 능금 한 알을 우걱우걱 씹어 먹습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 분을 지나는데, 아이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새벽 여섯 시가 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납니다. 지난밤, 아이는 젖을 안 주는 엄마한테 젖 달라고 낑낑대면서 몇 시간이고 울고불고 했습니다. 그러다가는 엄마 머리맡에 드러누워 두 손에 인형 하나씩 쥐고 쉴새없이 종알종알 옹알옹알대었습니다. 이른새벽이 될 때까지 그리 낑낑대고 놀았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겠지요. 간밤에 그리 치대었기에 아침에 안 일어나는 아이한테 고맙다고 여겨야 할까요? 애 아빠는 이 아침나절을 홀로 바쁘게 보낼 수 있으니까 반갑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침에 씹어먹는 능금은 엊저녁 신포시장 분식집 아주머니한테서 얻었습니다. 날이 풀려 모처럼 아이를 안고 시장 나들이를 갔더니, 아이가 귀엽다며 분식집 아주머니가 아이 손에 능금 한 알을 덥석 쥐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 번 물어뜯고는 능금을 던져 버렸고, 엄마하고 아빠가 ‘아이가 물어뜯으며 놀다가 버린’ 능금을 나누어 먹습니다.

 오늘은 능금을 씹어먹으면서 반으로 갈라 먹지 않고 통으로 먹습니다. 저는 반으로 갈라야 씨앗 한 톨까지 씹어서 먹고, 반으로 가르지 못하면 깡지를 못 먹어 버릇했는데, 오늘은 용케 통으로 먹으면서도 씨앗 한 톨 한 톨에다가 깡지까지 모두 우걱우걱 씹어서 먹습니다. 요즈음 아주머니들은 능금을 이렇게 먹지 않겠지만, 옆지기가 가끔 저한테 들려주는 말마따나 ‘아줌마가 된’ 셈인가 싶어, 꼭다리 하나만 남긴 채 다 먹고 나서 가만히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서울 볼일 보러 길 나서는 제 옷차림을 보고 ‘아줌마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헌옷 싸게 파는 데에서 1500원 주고 산 청바지 차림새가 아줌마 차림새라고 말하며 웃습니다. “뭐, 애 키우는 아빠는 아줌마하고 똑같지.” 하고 대꾸를 하는데, 그야말로 저는 아줌마 같은 아저씨가 되어 살아가는가 봅니다. 이 집에서는 아빠요 옆지기로서, 제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았을 때에는 제가 갓난아기요 어린이였을 때에 저를 돌보고 키운 어머니로서, 이제 이 같은 길을 걷는구나 싶습니다.

 책으로 익힌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인 삶입니다. 책에서 배운 이야기가 아니라, 손바닥이 온통 갈라지고 꾸덕살 판이 되면서 느끼는 삶입니다. 뜨거운 밥그릇을 맨손으로 쥐어도 뜨겁다고 안 느끼는데, 어제 낮 서울 일터 사람들하고 낮밥을 함께 먹을 때에 펄펄 끓는 냄비 손잡이를 맨손으로 쥐어 보는데, 참말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 밥그릇으로 먹는 나이가 아닌, 이렇게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녹아나는 삶을 어느 결엔가 옴팡 짊어지고 나서부터는 그예 아줌마 삶이구나. 이 나라 아줌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 아줌마가 되어서 배우며 지내는구나.’ 하고 속으로 되뇝니다.


.. 이뉴이트들의 정신을 은근히 말살하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이었다면, 이뉴이트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신문물’의 몫이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왕립 그린란드 무역청’을 세웠고, 이뉴이트들은 곧 무역청에서 구할 수 있는 술, 커피, 담배, 설탕 등의 사치품에 빠져들었다. 이는 이뉴이트들로 하여금 교역소 근처에서 반영구적으로 정착하여 살게끔 부추겨, 사냥하고 유목하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의 구심점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까지 추진중인 오늘날마저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2의 탐사 광풍의 조짐이 보인다 할 만큼 북유럽을 비롯해 세계 강대국들로부터 과학자, 개발자 군단들이 이 섬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린란드 지하자원 개발 이권 다툼에 여념이 없다.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수준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뿐 제국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 유일한 (군사기지요 미군기지인) 툴레 기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1953년 덴마크는 기지 증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그 근방에 살던 이뉴이트들을 더 북쪽 지방인 까낙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 이 갈등 상황은 1968년 1월 21일, 4개의 원자폭탄과 핵폭발 장치를 실은 미 공군 폭격기 B-52가 툴레 기지 부근에서 추락해 대량의 플루토늄이 주변 얼음 위로 무방비로 방출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극에 달한다 ..  (161, 180, 193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쓴 노나리 님이 머리말에 적었듯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나라안 책은 거의 없습니다. 노나리 님 머리말마따나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대한민국 첫 책’으로 손꼽아도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란드라는 땅을 헤아리는 사람이 드물 뿐더러, 텔레비전에서도 거의 마주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책시렁 한켠에 다소곳하게 꽂아 놓아도 괜찮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서 한 쪽 두 쪽 읽어 나가는 동안, ‘소재와 주제는 남다르다’ 할 만하지만, ‘책이라 한다면 대학생들이 학점을 받으려고 내는 보고서뭉치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이 자료 저 자료를 바지런히 그러모으고 잘 갈무리해 놓았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다큐방송을 찍으면서 몸소 겪은 그린란드 삶자락을 알뜰살뜰 풀어 놓았습니다.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사진을 책 사이사이 알맞게 넣었고, 여느 사람들은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한 ‘서툰 상식’을 뒤집거나 바로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한테는 ‘책’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저 ‘보고서’에 머뭅니다. ‘누리마실(웹서핑) 자료’를 맵돕니다.

 글쓴이가 그린란드에서 보낸 나날이 짧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한국땅을 밟아 본 적 없이 오로지 ‘일본에 옮겨진 한국 역사책’만 읽으면서도 남북녘 역사를 알차게 써낸 가지무라 히데키 님이 있듯이(이분은 《朝鮮史》(講談社,1977)라는 책을 내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노나리 님 또한 그린란드를 밟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알차고 훌륭하게 그린란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나리 님은 자료 모으기는 알뜰히 해냈을지라도, 이렇게 모은 자료로 무엇을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 어긋났습니다. 아직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노나리 님 스스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이란 어떠한 모습이요 흐름인가를 단단하고 씩씩하게 붙잡으며 지내고 있지 못한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남을 바라보기 앞서 나를 바라볼 일이고, 남을 말하기 앞서 나를 말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를 송두리째 내보이면서 차분하게 살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를 곰곰이 들여다보고 바라보면서 치우침없이 말하는 들머리에 설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 삶이 아름답다거나 못났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 손이 일하는 손인지 아닌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 손을 보며 일하는 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자연과 생태와 환경, 지구온난화와 기후협약과 탄소줄이기, 도시와 문명과 기계설비, 공장과 가공식품과 커다란 할인매장, 두 다리와 자전거와 자동차, 기름과 물과 바람, 꽃과 곡식과 나무, 들짐승과 길고양이와 물고기, 남자와 여자와 사람, 아이와 어른과 하느님, 땅과 하늘과 바다, 흙과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파트와 골목집과 지하상가 …… 우리를 둘러싼 이음고리를 먼저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린란드는 한국에도 있고, 한국은 그린란드에도 있습니다. 그린란드에서 한국을 읽을 수 있고, 한국에서 그린란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 어느 한 자락에는 내가 몹시 싫어하면서 나무라고 있는 어떤 정치꾼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비추면서 내 삶 어느 한 구석에는 내가 아주 사랑하면서 우러르는 스승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 현지인들도 그렇게 먹고산다니 우리도 똑같이 따라 먹는 수밖에. 결국 그린란드 체류 50일 내내, 방부제와 첨가제로 범벅된 데다 눈 돌아가게 비싸기까지 한 이 쓰레기들을 위장 속에 꾹꾹 눌러담으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 쓰레기 식단이 혀를 죽여 버린다. 혀는 늘 접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마련이고,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익숙해진 혀는 저도 모르는 새 언젠가부터 공장에서 조미한 맛을 정답이라 여기며 ‘공장의 맛’을 추구하게 된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은 또한 ‘요리’하는 과정을 철저히 생략해 버린다. 좋은 재료를 골라 정성껏 다듬고, 향료와 양념의 조화를 추구하며, 마침내 인간 몸의 균형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예술활동 일체가 단번에 부정된다. 미각의 획일화는 음식의 맛과 멋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요리의 부재는 요리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의성과 새로운 도전의 여지마저 없애 버린다 ..  (210∼211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를 말하는 지식모둠인가요? 아니면, 그린란드를 찾아가서 느끼고 배운 ‘내 삶’을 보여주려는 책인가요? 좀더 깊숙하게 그린란드를 파헤쳐서 사람들한테 그린란드 참모습을 알리려 하는가요? 그린란드를 바라보면서 우리 삶터를 찬찬히 되짚으며 올바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인지요?

 이야깃거리로 삼기 좋은 그린란드 삶자락이라고 해서 다 이야깃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삶터를 돌아보는 길잡이가 되는 그린란드 터전이라고 해서 다 책으로 여밀 만하지 않습니다. 그린란드는 이 지구에서 중심이면서 변두리입니다. 우리 나라 한국은 이 지구에서 변두리이면서 중심입니다. 글쓴이 노나리 님은 수천만 한국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나, 한국사람을 대표하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굴리는 지식이 아닌, 몸으로 삭이는 앎이 되면 좋겠습니다. 손가락을 놀려 짧은 나날에 수없이 많은 지식보따리를 등에 짊어지는 삶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바쳐서 알맞게 긴 나날에 걸쳐 살갗으로 받아들이며 즐겁게 걸어가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에는 한낱 종이뭉치입니다. 삶이 묻어나올 때에는 글솜씨가 좀 어줍잖거나 어설퍼도 싱그럽고 알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재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은 시나브로 제 얼굴과 몸매를 갖춥니다. (4343.1.20.물.ㅎㄲㅅㄱ)


 ┌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글항아리 펴냄,2009)
 ├ 글ㆍ사진 : 노나리
 └ 책값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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