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노나리 지음 / 에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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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땅에 있는 ‘푸른누리(그린란드)’를 찾자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0] 노나리,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엊저녁 서울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부터 아기하고 씨름하던 옆지기는 축 처졌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서울 볼일을 봐야 하는데 몹시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다음달 첫머리까지 해야 하니 어쩌는 수 없습니다. 이 어쩌는 수 없다는 굴레가 참 고단합니다. 아픈 사람을 놓고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란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서도 몸과 마음이 나란히 고단하고 괴로운 노릇인데, 어디 하소연할 데란, 아니 어디 도움을 바랄 데란 없습니다. 우리 삶터는 ‘장애’라고 하면 팔이나 다리가 똑 부러졌다거나 한쪽 팔다리가 짧다거나 하는 ‘정상인이라 하는 사람하고 견줄 때에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팔이 부러지지 않았다든지 말을 못한다든지 눈이 멀었다든지 하지 않으면 ‘그깟 장애야 뭐 대순가?’ 하는 세상 흐름입니다.

 새벽부터 바지런히 글 몇 자락 써 놓고 신나게 빨래를 한 다음 밥이나 죽을 끓여 놓습니다. 허둥지둥 길을 나서야 하니, 어제 해 놓은 빨래를 갤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헐레벌떡 길을 나서며 전철역까지 달음박질을 칩니다. 겨우겨우 전철을 잡아 타고 떠나도 늘 서울 일터에 늦습니다. 늘 늦어도 무어라 한소리를 안 하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해 주어야 참으로 고맙다고 느낄 텐데, 이런 뜻을 내비치면 손을 떼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일자리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 스스로 바라는 일자리가 아니더라도 저쪽에서 바라면서 일을 맡긴다고 한다면 얼씨구나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저처럼 어서 그만둘 수 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일은 배부른 소리로 여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참말 집에서 집식구를 돌보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이제 열아홉 달에 접어든 아이하고 어울릴 또래 동무를 찾아보고 싶으며, 아이가 또래 동무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조용하면서 바람과 물이 맑은 동네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아이는 아이대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랄 테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아픈 몸과 마음을 차근차근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요.


.. 마구잡이 개발 우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게 한국 환경문제의 현주소다. 자칫 그린란드가 한국과 비슷한 노선을 밟게 될까 봐, 그래서 그린란드 환경파괴가 자립이라는 명목 아래에 정당화될까 두렵다 … 그린란드 북동부 도시 우페르나박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 떠 있던 거대한 쓰레기섬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휴지조각에서부터 폐차까지 한데 얽혀 덩어리진 그 섬을 보는 순간, 그린란드에 머물렀던 50여 일 동안 단 한 번도 분리수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29쪽)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도 옆지기는 무겁고 힘든 몸으로 집안에서 아이하고 홀로 놀며 어울리며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그지없이 무겁습니다. 흔히 일컫는 작은식구(핵가족)일 때에는 아이가 없이 둘만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할는지 모르나, 아이를 키우는 삶일 때에는 큰식구가 아니면 서로서로 버거움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꼭 아이키우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살아가며 배우고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눈썰미와 슬기를 주고받을 수 있자면, 작은식구가 아닌 큰식구로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또는 살붙이들이 서로 가까이 담장을 맞대고 지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동체마을이든 공동육아이든 달리 대단한 뜻이나 거룩한 얼이 모인 모둠살이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큰식구로 올망졸망 복닥이며 아이나 어른이나 어리든 늙든 숱한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고 마주하고 살을 섞으면서 사람살이를 배우는 터전을 스스로 잃은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 스스로 이러한 사람살이를 되찾으려는 조그마한 몸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붙이가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고루 어우러져 있던 우리 터전을 우리 스스로 버린 다음, 좀더 많은 돈을 나 홀로 벌겠다는 마음이 하루이틀 불거지면서, 이렇게 우리 스스로 어린이집을 찾고 보육원을 찾으며 따로 누리모임(인터넷 동호회)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다른 자리’를 찾아나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면서 우리 삶을 이렇게 바꾸기만 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기도 했겠지만, 어릴 적부터 받은 제도권 교육이 이러한 길로 이끌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도권 교육에 길들거나 익숙한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삶굴레를 고스란히 물려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밝고 맑은 쪽으로 나아지도록 하겠다는 진보나 개혁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놓치거나 잃거나 잊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면서 ‘사랑’을 참다이 나누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찾을 아름다움이란, 또 사랑이란, 어느 별나라나 달나라 이야기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우리 식구 삶을 사랑스레 보듬으며 이웃하고 동무들과 살가이 어울리는 터전을 갈고닦고 보듬는 일이 바로 진보요 개혁이 되어야겠지요.


.. 일 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간다. 일각고래가 나타날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캠프를 옮겨 봐도 별 소득이 없다. 여정 초반, 사흘 안에 일각고래를 잡겠다며 큰소리 쳤던 닐스와 일랑우악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만 철수하잔다 … 한국에서 소가 그러하듯, 그린란드인들에게 일각고래는 어디 한 구석 버릴 부위 없는 동물이었다. 옛 이뉴이트들은 껍질과 고기 내장은 모두 먹고, 뼈는 집을 지을 때 골조로 쓰거나 개썰매의 날을 만드는 데 썼으며, 수염은 엮어서 바구니를, 폐의 세포막으로는 북을 만들고, 기름은 불을 밝힐 때 썼다 ..  (85, 88쪽)


 오늘 하루 집을 나선 다음 해야 할 일과 집으로 돌아와서 붙잡아야 할 일을 곱씹으면서 능금 한 알을 우걱우걱 씹어 먹습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 분을 지나는데, 아이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새벽 여섯 시가 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납니다. 지난밤, 아이는 젖을 안 주는 엄마한테 젖 달라고 낑낑대면서 몇 시간이고 울고불고 했습니다. 그러다가는 엄마 머리맡에 드러누워 두 손에 인형 하나씩 쥐고 쉴새없이 종알종알 옹알옹알대었습니다. 이른새벽이 될 때까지 그리 낑낑대고 놀았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겠지요. 간밤에 그리 치대었기에 아침에 안 일어나는 아이한테 고맙다고 여겨야 할까요? 애 아빠는 이 아침나절을 홀로 바쁘게 보낼 수 있으니까 반갑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침에 씹어먹는 능금은 엊저녁 신포시장 분식집 아주머니한테서 얻었습니다. 날이 풀려 모처럼 아이를 안고 시장 나들이를 갔더니, 아이가 귀엽다며 분식집 아주머니가 아이 손에 능금 한 알을 덥석 쥐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 번 물어뜯고는 능금을 던져 버렸고, 엄마하고 아빠가 ‘아이가 물어뜯으며 놀다가 버린’ 능금을 나누어 먹습니다.

 오늘은 능금을 씹어먹으면서 반으로 갈라 먹지 않고 통으로 먹습니다. 저는 반으로 갈라야 씨앗 한 톨까지 씹어서 먹고, 반으로 가르지 못하면 깡지를 못 먹어 버릇했는데, 오늘은 용케 통으로 먹으면서도 씨앗 한 톨 한 톨에다가 깡지까지 모두 우걱우걱 씹어서 먹습니다. 요즈음 아주머니들은 능금을 이렇게 먹지 않겠지만, 옆지기가 가끔 저한테 들려주는 말마따나 ‘아줌마가 된’ 셈인가 싶어, 꼭다리 하나만 남긴 채 다 먹고 나서 가만히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서울 볼일 보러 길 나서는 제 옷차림을 보고 ‘아줌마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헌옷 싸게 파는 데에서 1500원 주고 산 청바지 차림새가 아줌마 차림새라고 말하며 웃습니다. “뭐, 애 키우는 아빠는 아줌마하고 똑같지.” 하고 대꾸를 하는데, 그야말로 저는 아줌마 같은 아저씨가 되어 살아가는가 봅니다. 이 집에서는 아빠요 옆지기로서, 제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았을 때에는 제가 갓난아기요 어린이였을 때에 저를 돌보고 키운 어머니로서, 이제 이 같은 길을 걷는구나 싶습니다.

 책으로 익힌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인 삶입니다. 책에서 배운 이야기가 아니라, 손바닥이 온통 갈라지고 꾸덕살 판이 되면서 느끼는 삶입니다. 뜨거운 밥그릇을 맨손으로 쥐어도 뜨겁다고 안 느끼는데, 어제 낮 서울 일터 사람들하고 낮밥을 함께 먹을 때에 펄펄 끓는 냄비 손잡이를 맨손으로 쥐어 보는데, 참말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 밥그릇으로 먹는 나이가 아닌, 이렇게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녹아나는 삶을 어느 결엔가 옴팡 짊어지고 나서부터는 그예 아줌마 삶이구나. 이 나라 아줌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 아줌마가 되어서 배우며 지내는구나.’ 하고 속으로 되뇝니다.


.. 이뉴이트들의 정신을 은근히 말살하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이었다면, 이뉴이트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신문물’의 몫이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왕립 그린란드 무역청’을 세웠고, 이뉴이트들은 곧 무역청에서 구할 수 있는 술, 커피, 담배, 설탕 등의 사치품에 빠져들었다. 이는 이뉴이트들로 하여금 교역소 근처에서 반영구적으로 정착하여 살게끔 부추겨, 사냥하고 유목하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의 구심점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까지 추진중인 오늘날마저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2의 탐사 광풍의 조짐이 보인다 할 만큼 북유럽을 비롯해 세계 강대국들로부터 과학자, 개발자 군단들이 이 섬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린란드 지하자원 개발 이권 다툼에 여념이 없다.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수준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뿐 제국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 유일한 (군사기지요 미군기지인) 툴레 기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1953년 덴마크는 기지 증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그 근방에 살던 이뉴이트들을 더 북쪽 지방인 까낙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 이 갈등 상황은 1968년 1월 21일, 4개의 원자폭탄과 핵폭발 장치를 실은 미 공군 폭격기 B-52가 툴레 기지 부근에서 추락해 대량의 플루토늄이 주변 얼음 위로 무방비로 방출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극에 달한다 ..  (161, 180, 193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쓴 노나리 님이 머리말에 적었듯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나라안 책은 거의 없습니다. 노나리 님 머리말마따나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대한민국 첫 책’으로 손꼽아도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란드라는 땅을 헤아리는 사람이 드물 뿐더러, 텔레비전에서도 거의 마주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책시렁 한켠에 다소곳하게 꽂아 놓아도 괜찮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서 한 쪽 두 쪽 읽어 나가는 동안, ‘소재와 주제는 남다르다’ 할 만하지만, ‘책이라 한다면 대학생들이 학점을 받으려고 내는 보고서뭉치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이 자료 저 자료를 바지런히 그러모으고 잘 갈무리해 놓았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다큐방송을 찍으면서 몸소 겪은 그린란드 삶자락을 알뜰살뜰 풀어 놓았습니다.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사진을 책 사이사이 알맞게 넣었고, 여느 사람들은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한 ‘서툰 상식’을 뒤집거나 바로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한테는 ‘책’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저 ‘보고서’에 머뭅니다. ‘누리마실(웹서핑) 자료’를 맵돕니다.

 글쓴이가 그린란드에서 보낸 나날이 짧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한국땅을 밟아 본 적 없이 오로지 ‘일본에 옮겨진 한국 역사책’만 읽으면서도 남북녘 역사를 알차게 써낸 가지무라 히데키 님이 있듯이(이분은 《朝鮮史》(講談社,1977)라는 책을 내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노나리 님 또한 그린란드를 밟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알차고 훌륭하게 그린란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나리 님은 자료 모으기는 알뜰히 해냈을지라도, 이렇게 모은 자료로 무엇을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 어긋났습니다. 아직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노나리 님 스스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이란 어떠한 모습이요 흐름인가를 단단하고 씩씩하게 붙잡으며 지내고 있지 못한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남을 바라보기 앞서 나를 바라볼 일이고, 남을 말하기 앞서 나를 말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를 송두리째 내보이면서 차분하게 살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를 곰곰이 들여다보고 바라보면서 치우침없이 말하는 들머리에 설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 삶이 아름답다거나 못났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 손이 일하는 손인지 아닌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 손을 보며 일하는 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자연과 생태와 환경, 지구온난화와 기후협약과 탄소줄이기, 도시와 문명과 기계설비, 공장과 가공식품과 커다란 할인매장, 두 다리와 자전거와 자동차, 기름과 물과 바람, 꽃과 곡식과 나무, 들짐승과 길고양이와 물고기, 남자와 여자와 사람, 아이와 어른과 하느님, 땅과 하늘과 바다, 흙과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파트와 골목집과 지하상가 …… 우리를 둘러싼 이음고리를 먼저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린란드는 한국에도 있고, 한국은 그린란드에도 있습니다. 그린란드에서 한국을 읽을 수 있고, 한국에서 그린란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 어느 한 자락에는 내가 몹시 싫어하면서 나무라고 있는 어떤 정치꾼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비추면서 내 삶 어느 한 구석에는 내가 아주 사랑하면서 우러르는 스승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 현지인들도 그렇게 먹고산다니 우리도 똑같이 따라 먹는 수밖에. 결국 그린란드 체류 50일 내내, 방부제와 첨가제로 범벅된 데다 눈 돌아가게 비싸기까지 한 이 쓰레기들을 위장 속에 꾹꾹 눌러담으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 쓰레기 식단이 혀를 죽여 버린다. 혀는 늘 접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마련이고,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익숙해진 혀는 저도 모르는 새 언젠가부터 공장에서 조미한 맛을 정답이라 여기며 ‘공장의 맛’을 추구하게 된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은 또한 ‘요리’하는 과정을 철저히 생략해 버린다. 좋은 재료를 골라 정성껏 다듬고, 향료와 양념의 조화를 추구하며, 마침내 인간 몸의 균형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예술활동 일체가 단번에 부정된다. 미각의 획일화는 음식의 맛과 멋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요리의 부재는 요리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의성과 새로운 도전의 여지마저 없애 버린다 ..  (210∼211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를 말하는 지식모둠인가요? 아니면, 그린란드를 찾아가서 느끼고 배운 ‘내 삶’을 보여주려는 책인가요? 좀더 깊숙하게 그린란드를 파헤쳐서 사람들한테 그린란드 참모습을 알리려 하는가요? 그린란드를 바라보면서 우리 삶터를 찬찬히 되짚으며 올바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인지요?

 이야깃거리로 삼기 좋은 그린란드 삶자락이라고 해서 다 이야깃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삶터를 돌아보는 길잡이가 되는 그린란드 터전이라고 해서 다 책으로 여밀 만하지 않습니다. 그린란드는 이 지구에서 중심이면서 변두리입니다. 우리 나라 한국은 이 지구에서 변두리이면서 중심입니다. 글쓴이 노나리 님은 수천만 한국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나, 한국사람을 대표하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굴리는 지식이 아닌, 몸으로 삭이는 앎이 되면 좋겠습니다. 손가락을 놀려 짧은 나날에 수없이 많은 지식보따리를 등에 짊어지는 삶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바쳐서 알맞게 긴 나날에 걸쳐 살갗으로 받아들이며 즐겁게 걸어가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에는 한낱 종이뭉치입니다. 삶이 묻어나올 때에는 글솜씨가 좀 어줍잖거나 어설퍼도 싱그럽고 알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재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은 시나브로 제 얼굴과 몸매를 갖춥니다. (4343.1.20.물.ㅎㄲㅅㄱ)


 ┌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글항아리 펴냄,2009)
 ├ 글ㆍ사진 : 노나리
 └ 책값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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