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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이제야 비로소 이 책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참 오래 걸렸다...)
이 책 하나 120 ― 백두 살 할머니한테서 읽는 삶
: 오드리 설킬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책이름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글 : 오드리 설킬드
- 옮긴이 : 허진
- 펴낸곳 : 마티 (2006.5.25.)
- 책값 : 2만 원
(1) 주부습진에 걸리며 읽는 삶
아기는 엎드려 자기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아기는 한참 자다가 슬슬 몸을 돌리며 엄마아빠하고는 거꾸로 엎드려 있습니다. 자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기를 눕히지 않으면 언제나 이 방 끝 저 방 끝까지 굴러가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지 않으나, 아마 저도 우리 아기하고 똑같이 어렸을 때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잠을 잤으리라 봅니다.
지난주부터 제 두 손을 제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접히는 자리가 쩍쩍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쥘 때마다 따끔하고 물잔이나 병을 손아귀로 쥐기 힘듭니다. 새끼손가락이 다칠 때에도 무슨 물건을 쥐기 어려웠는데, 이 자리가 갈라져도 참 힘듭니다. 그러나 집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픔을 견디면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엊그제 알아보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갈라지는 일은 주부습진입니다.
주부습진이라니. 주부습진인가. 주부습진이구나. 무언가 다른 데가 아파서 이러나 하고 걱정했는데, 주부습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집일은 조금도 줄 턱이 없는데, 이제부터 주부습진이면 어찌 견디면서 살아가나 근심입니다.
하기는, 날마다 두 시간 남짓 아기 옷가지 빨래를 하는 삶을 열아홉 달째 꾸리고 있으니 주부습진에 안 걸릴 수 있겠습니까. 안 걸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주부습진에 안 걸렸을까요.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래 물을 만지며 더 많은 집일을 했으니 저보다 더 어렸을 때에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데가 없었을 테며, 손이며 발이며 온통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겠지요.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을 떠올려 봅니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던 날부터는 손빨래가 줄었다지만, 오로지 맨손으로 여름이며 겨울이며 이불과 옷가지를 주물러댄 나날이 어머니 손에 오롯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이 어떠한 손이었던가는, 저 스스로 우리 어머니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삶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딱히 빨래기계를 안 쓰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굳이 내 옷가지를 빨래기계를 써 가며 빨아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서, 스물한 살에 혼자 집을 나와서 살아갈 때부터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물예닐곱 살까지는 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리는 살림살이에 빨래는 그리 안 많아, 주부습진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산 뒤에도 두 사람 몫 빨래는 얼마든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이때에도 주부습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빨랫거리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아기를 낳아 키우며 비로소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키우기는 빨래만이 아니니까요. 오줌을 싸거나 똥을 지리면 그때그때 치우고 씻기도 닦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먹이고 입 닦고 하면서 하루 내내 잠잘 때를 빼놓고는 손이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키우기를 온통 어머니한테만, 그러니까 여자한테만 맡기고 살고 있으니, 남자들이 주부습진에 걸려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나라 글쓰고 사진찍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으레 남자요, 예술이나 문화 한다는 여자들 또한 여느 남자와 매한가지로 집일은 돌보지 않거나 집일은 남한테 맡기며 예술하고 문화에만 모든 힘과 품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들한테서도 주부습진 때문에 ‘창작하며 힘들어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예술인 과학인 체육인 연예인 …… 들은 주부습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이 주부습진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추거나 영화로 찍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습진뿐이겠습니까? 빨래하기를 시로 쓰고 소설로 쓰며 영화로 찍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아이키우기를 동화로 쓰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동시로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인다거나 아기한테 죽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지요? 기껏(?) 나온다는 창작품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그리는 모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자리를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삶으로 받아들일 틈이 없으니까요.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을 할 때에 ‘집일 이야기’를 반드시 그려내거나 담아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네 창작밭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네 창작꾼들 삶과 눈길이 너무 한쪽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밥을 안 먹고는 못 살고 물을 안 마시고는 못 살며 바람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고는 못 사는데, 사람이라는 목숨이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을 헤아리면서 그려내거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키운 삶과 손길을 못 보고, 또 내가 키우는 삶과 손길을 못 봅니다.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곧바로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머리로 지어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보고 느끼고 담아내어 펼치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프랑스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멀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도 우리 동네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만나’거나 ‘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맙게 얻으면서 누리는 목숨인가를 느낄 수 있으면, 늘 즐겁고 신나게 일하며 놀 수 있습니다.
(2)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읽기
1902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레니 리펜슈탈은 2003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 살에다가 두 살을 더한 삶을 꾸린 이이는 처음에는 춤꾼이 되고자 했으나 다리를 다쳐 춤꾼이 되는 꿈을 접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감독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습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 걷던 길은 독일 정치권력을 붙잡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소용돌이를 거치며 송두리째 가로막힙니다. 유럽을 불태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찍은 영화 필름이며 집이며 사회활동이며 모조리 잃거나 빼앗깁니다. 전쟁통에 여러모로 아끼며 돌봐 주던 사람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이름에 얽히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빚과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가느다란 삶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하나만큼 다를 뿐이라 하는데, 날마다 죽고픈 마음이었을 텐데 갑갑하고 슬퍼서라도 죽을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마음속에는 뜨거움이 늘 솟구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촬영기를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 사진기를 쥐어든 레니 리펜슈탈은 ‘촬영기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사진기로 풀어내는 응어리’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레니 리펜슈탈한테는 지난날과 똑같은 ‘짓궂은 뭇칼질로 범벅된 글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도 짓밟히는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 터이나, 이러한 ‘죽음보다 못한 삶’에서도 삶자락을 붙잡습니다. 이리하여, “90대가 된 지금(1990년대)도 레니는 다이빙을 즐긴다. 레니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고령 다이버일 것이다. 무언가에 매혹되는 능력과 더 나은 사진을 향한 노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 그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 길고 날씬한 다리를 보면 (아흔을 넘긴) 레니는 아직도 소녀 같다. 레니는 처음 다이빙을 한 이후로 수년간 해저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다. 또다시 사라져 가는 존재를 기록할 운명이 주어진 듯했다. 그래서 레니는 열렬한 환경보후주의자이자 자크 쿠스토의 지지자이며 그린피스의 회원이 되었다(530∼531쪽).”고 합니다.
우리 이웃동네에 여든일곱 나이로 수채그림을 그리는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할머님 댁을 찾아뵈며 인사를 올리고 말씀을 귀담아듣곤 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딸아들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걱정 없이 마지막 삶을 이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할머님으로서는 ‘당신이 손을 놀리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움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다면서, 여든일곱 나이로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면서, 이 가르침삯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예술쟁이로 한삶을 마감한 레니 리펜슈탈 님과 이웃동네 그림할머님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뭇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 다른 넋으로 예술(영화나 사진하고 그림)을 붙잡기도 했지만, 한 분은 예술길에 어린 날부터 젊음과 늙음을 모두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어머니로서 살림살이 꾸리기를 예순 넘어까지 한 끝에 비로소 느즈막하게 당신 예술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하게 당신들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 뜻과 길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돌아본다면,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당신이 세상살이와 세상흐름을 옳고 바르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거나 이끌 만한 길동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쏟거나 바칠 만한 짝꿍은 있었으나, 이 짝꿍들 가운데 레니 리펜슈탈이 한창 뜨거운 젊음을 불사를 때에 슬기롭고 눈밝도록 거든 사람은 없었구나 싶습니다. 따끔하게든 부드럽게든, 히틀러가 움켜쥐던 그무렵 독일 삶터를 바르게 읽고 바르게 도와줄 벗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지 않고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잽싸게 얼굴과 몸짓을 바꾸면서 레니 리펜슈탈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새롭게 살아남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건 일을 하건 했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헤아리면, 다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사람 얼굴과 이름에 기댈 뿐, 레니 리펜슈탈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 삶터를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길로는 접어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니 리펜슈탈도 나이 예순을 넘긴 다음 만나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간 길동무가 있었기에, 늘그막에는 당신 젊은날 매무새에서 한껏 거듭나며 새로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끊이지 않는 뭇칼질에도 견디어 내는 힘이나, 끝없는 손가락질을 살며시 흘려보내면서 빙긋 웃을 수 있는 느긋함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머나먼 나라 사람이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기에, 참말로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분이 늘그막에는 느긋하며 한결 즐겁게 마지막 삶을 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6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이 아닌 우등불 같은 뜨거움을 늘 가슴속에 담으면서 활활 태운 레니 리펜슈탈이었다고 느낍니다. 이 뜨거움이 있기에 히틀러 나치당 정권에서는 ‘사회와 정치를 읽지 못한 바보’였으면서도 영화예술 새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쓴 오드리 설킬드 님은, 두툼한 책 마무리를 지으며,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577쪽)?” 하고 묻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세상을 못 읽고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있겠으나, 레니 리펜슈탈한테만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여느 세상사람들은 레니 리펜슈탈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조용히 뉘우치면서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새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저 영화예술 하나에만 온힘을 바친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당신이 일군 창작은 창작 그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한편, 이러한 창작은 훌륭하지만 이러한 창작 뒤켠에는 또다른 삶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으시오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이처럼 넓고 푸근하게 껴안으면서 부드러이 일깨워 주는 어르신은 우리 사회에도 몇 사람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기만 하거나 잘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터전이 아니라, 처음에는 얄궂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며 미웁기도 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깨닫고 배우면서 우리 터전을 일구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넌 잘못했어. 넌 나빠.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해.’ 하는 말마디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 이 일은 이렇게 되었구나. 다음 일은 다르게 해 보자.’ 하면서 부둥켜안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 님을 감싼다거나, 마음씨는 짓궂고 눈썰미는 형편없으며 친일부역을 했지만 문학은 아름답다며 누군가를 우러르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되자는 소리입니다.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일 때에, 농사꾼이 이 논밭을 그냥 내버려 둘까요? 그예 내팽개칠까요? 참 농사꾼은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을 기름진 논밭으로 돌려놓으려고 여러 해에 걸쳐 땀을 흘리고 흙을 갈고 풀을 심고 갈아엎기를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대여섯 해, 길면 열 몇 해에 걸쳐 바보밭이나 묵정밭을 기름지며 좋은 밭이 되도록 힘씁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따스한 사랑과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는 금긋기가 아닌, 모두 아름다우며 고운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지 싶습니다.
왜 초등 여섯 해, 중고등 여섯 해, 모두 열두 해에 걸쳐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겠습니까. 대학교에 보내려고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목숨이 올바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고 차근차근 섬돌을 디디듯 가르치고 일깨웁니다. 이 열두 해 동안 한 아이는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샛길로 접어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흔들리거나 떠돌 때에 우리 어른들은 지긋이 바라보며 포근히 감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손을 맞잡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켜보며 팔짱낀 채 지켜보지 말며, 어깨동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삶이란, 이이를 헐뜯는다든지 추켜세운다든지 깎아내린다든지 섬긴다든지 하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받아들이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은 어떤 모양 어떤 몸짓인가를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는 어떠한 뜨거움이 어떠한 크기로 어느 때에 있는지를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삶을 우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지나온 발자취뿐 아니라 바로 오늘과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흐트러지거나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다스리며 다독이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발자국을 찬찬히 짚으며 내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는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춤사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몸짓을 가만히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땀방울을 오롯이 살피며 내 땀방울은 어떠한가를 오롯이 살핀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간기를 살피니,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 나라에는 2006년에 옮겨졌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은 2003년에 죽었습니다. 당신이 아흔다섯 살일 때에 나온 책인데, 레니 리펜슈탈 할머님은 당신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되짚으면서 다룬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나서, 당신 마지막 일곱 해는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일구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다루는 평전이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써서 함께 읽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웃동네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 난날을 기리면서 ‘당신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스콧 니어링도 그렇고 레니 리펜슈탈도 그렇고 우리 이웃동네 그림할머님도 그러한데, 모두들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를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당신들 모두가 고마운 이슬떨이요 스승이요 길동무입니다.
(3) 길디긴 이야기 꾹꾹 눌러담기
2006년에 읽은 책을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읽고 다섯 해 만에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2006년 무렵, 이 책을 펴낸 ‘마티’ 출판사에서 다른 책을 내놓았는데 오탈자가 다섯 군데 나오는 바람에 애써 찍은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고 다시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느낌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오탈자를 스물다섯 군데 찾았는데, 자그마치 650쪽이 넘는 책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새로 찍는다면, 1인 출판을 하는 사장님이 알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650쪽짜리 책에 오탈자 스물다섯 군데라면 퍽 적게 나온 셈입니다.
드디어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쓰는구나 하고 지난 다섯 해를 돌아봅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썼다면 아무래도 ‘다섯 해만큼 덜 배우고 덜 깨닫고 덜 생각한’ 채로 느낌글을 썼으리라 봅니다. 다섯 해가 지난 오늘이라 해서 더 배우고 더 깨닫고 더 생각하며 느낌글을 쓴다고 내세우기 힘들지만, 다섯 해를 곰삭일 수 있는 세월이 고맙습니다. 아마, 앞으로 다섯 해를 더 곰삭인 다음 이 책을 새로 돌아본다면, 그만큼 저 스스로 ‘오늘은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그때에 읽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 맞이할 다섯 해를 생각하면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제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든 대목을 하나하나 눌러담아 봅니다.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도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이 책을 마주하고 싶은 분이라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인데, 며칠 만에 다 읽으려 하든지 한두 달 만에 끝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기고 돌아보면서 1900년대 첫무렵부터 1900년대 끝무렵까지 우리 세상 이야기를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낸 한 사람 발자취이자 20세기 인류문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43.1.28.나무.ㅎㄲㅅㄱ)
[18∼20, 118, 129쪽] 여기서 리펜슈탈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장비와 최고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리펜슈탈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서 각 촬영기사들이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 레니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직접 그런 영화를 위한 발라드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용을 할 때처럼 말이다 … 레니는 마을 여관에 방을 잡고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계획을 털어놓자 여관 주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 하지만 레니는 겁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레니는 하루 종일 거리나 산허리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고, 특히 여자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차가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고, 레니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여주자 곧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보려고 애썼다.
[32∼35쪽] 리펜슈탈은 그동안 스포츠 고위 관리들 모두와 한 사람씩 모두 돌아가며 싸운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레니는 높이뛰기 경기장에는 구멍이 두 개,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삼단뛰기 경기장과 100미터 트랙 결승선 끝에는 각 하나씩의 구덩이를 확보했더 … 레니 자신은 운동선수에게든 영화 관객에게든 운동과 영화의 관계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굳게 믿었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과 ‘구성에 대한 관심’이 바로 레니의 동력이었다. 물론 리펜슈탈은 개인의 의지로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개념도 좋아했지만, 이와 같은 경쟁의 중심에 있는 우정도 좋아했다 … 리펜슈탈은 또 “나는 매우 현실적인 것, 삶을 그대로 잘라낸 부분,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특이한 것, 특별한 것만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건강한 것, 즉 살아 있는 것에 매료된다. 나는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마음만 먹으면 리펜슈탈의 발언에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섬뜩한 울림이나 초월적인 질서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기란 매우 쉽다. 하지만 제3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은 의혹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삶을 양식화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전범재판이 연달아 열렸으나 레니는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그녀의 작품 활동을 막았다. 레니는 결코 영화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레니의 다큐멘터리를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녀의 영화가 공개적으로 상영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무삭제로 방송된 적은 없었다. 영화사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심지어 여엉의 업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리펜슈탈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리펜슈탈은 거의 전 세계적인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을 구분할 방법이나 구분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34∼135, 146, 286∼287, 349∼350쪽] 몽블랑의 방랑자 야보르스키는 리펜슈탈과 함께 영화를 만들던 힘든 나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 단 한 쇼트를 찍기 위해서 장비를 전부 등에 짊어지고 8시간 동안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케이블카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장비를 모두 등에 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사랑해야 하지요.” … 리펜슈탈은 할리우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스튜디어가 원하는 이름, 그것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고된 환경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찍을 능력이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거절하면 할수록 영화사는 점점 더 높은 출연료를 제시했다. 리펜슈탈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결국 레니는 영화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지만, 돈 때문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레니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중한 동료들과 다시 한 번, 어쩌면 마지막이 될 모험을 할 기회였기 때문이다(1932년 무렵) …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끌어내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려면 반드시 한 사람이 편집을 해야 한다며,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편집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 리펜슈탈은 직접 꼼꼼하게 정찰하여 최상의 카메라 위치를 찾아냈고, 또한 정확히 어떤 앵글을 원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며, 심지어는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까지 직접 결정했다. (1936년 올림픽에서) 각기 다른 경기에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추구해야 했다 … 리펜슈탈은 각기 다른 경기를 모두 다르게 다루면서 각 경기에 알맞은 속도와 스타일을 적용했고, 능숙한 편집 솜씨로 이런 각 경기를 근사하게 하나로 엮어 전반적인 리듬감을 완성했다.
[149∼150, 452, 458∼459쪽] 레니는 〈푸른 빛〉 작업에 몰두하느라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다면, 독일 경제가 가라앉고 있으며 실업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니가 별 걱정을 하지 않는 사이, 아버지는 사업 규모를 줄이고 전 직원의 60퍼센트를 해고한 후 어머니와 함께 자그마한 아파트에 세를 얻어 이사해야 했다 … 레니가 전쟁에 활발하게 참여한 기간은 채 3주도 안 됐지만, 이 경험은 몇 십 년 동안이나 레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 레니는 전쟁 기간 내내 〈저지대〉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동료 촬영기사들과 조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레니가 야보르스키에게 말했다. “최대한 몸을 사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요. 살아남는 데만 신경 쓰라고요.” 물론 레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151∼153, 233, 236, 277쪽] 레니는 히틀러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히틀러라는 존재 자체와 그가 청중을 사로잡는 방법에 매료되었다 … 레니는 강한 인상을 받으면 누구든 어느 때든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 레니는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었다 … 민주주의는 죽었다. 리펜슈탈은 베르니나와 베른 알프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만 독일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레니는 5월 10일 베를린 대학 맞은편 보리수 거리에서 ‘반독일적’인 사상을 담았다고 판단되는 저술은 모두 불태웠던 분서 사건도, 최초의 유대인 추방 사건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 리펜슈탈은 수많은 작가와 음악가, 화가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계의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렸다 … 괴벨스의 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멀어진 것은 레니의 주장보다 훨씬 뒤였다. 또한 괴벨스는 레니 리펜슈탈이 스위스 알프스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똑똑한 여자’ 레니 리펜슈탈과 몇 번이나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1주일 후인 5월 17일에 괴벨스는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 히틀러가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부분에서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찍었다. 연단 주변에 설치해 둔 원형 트랙을 따라 히틀러의 주변을 ㅊ너천히 돌면서 밝은 조명 아래에 선 이 민중 선동가를 낮은 앵글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260, 263, 274∼275, 276쪽] 히틀러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국민계몽선전부는 계약을 최종 호가인해 주지 않았고, 정부 영화 부서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리펜슈탈에게 촬영기사나 필름을 제공할 권한이 없었다. 리펜슈탈이 공식적인 협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했으니 가장 쉬운 방법은 패배를 자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리펜슈탈의 타고난 집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리펜슈탈이 히틀러에게 느끼는 의무감에도 맞지 않았다 … 리펜슈탈의 회고에 따르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의 거물들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매우 만족한 듯했지만, 리펜슈탈 자신이 보기에는 제대로 된 플롯도 대본도 없는 미완성작에 지나지 않았다. 리펜슈탈은 “이미지를 조합해서 시각적인 리듬과 다양함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토록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낸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괜찮은 연습이었던 셈이었다 … 전당대회가 끝난 후에 발행된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책을 보면, 전당대회 준비가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준비와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리펜슈탈은 전당대회는 그녀가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았든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자신은 이 장대한 행사와 그 준비과정을 단순히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사진과 설명은 그녀의 주장과 달리 리펜슈탈이 실제 전당대회 연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로 종종 제시되었다 … 어느 쪽이 진실이든 리펜슈탈은 자신이 역사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며 기록 대상이 무슨 행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1933년 전당대회를 기록한 〈신념의 승리〉,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의지의 승리〉, 독일군에 대한 좀더 짧은 다큐멘터리 〈자유의 날〉을 만들기 전에도 전당대회를 기록한 뉴스 영화는 존재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이렇게 예술적으로 연출된 나치당 전당대회에 바쳐진, 혹은 정말로 마침내 집권한 히틀러에게 바쳐진 ‘장편’이었을 뿐이다.
[309, 312, 314∼317쪽]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환상적인 분위기다. 초창기에는 그녀의 연기에서 이런 요소를 엿볼 수 있으며, 나중에 연출을 하게 되면서 특징은 더욱 뚜렷해졌다. 리펜슈탈은 일상적인 관심사나 평범한 메커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양식화된 세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 그녀는 결코 프로파간다를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의 의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 히틀러는 전당대회 다큐멘터리를 왜 하필이면 리펜슈탈에게 맡기겠다고 그토록 고집했을까? … 그녀의 역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정황을 접어두어야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이 제6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거절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인가? … 리펜슈탈은 그 걸림돌로 인해 자신이 영영 영화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녀는 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조각 자료들과 그토록 진부한 아이콘을 가지고 걸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전후 비평가들은 리펜슈탈이 이 영화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독일인의 90퍼센트가 히틀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응수했다. 이 영화에서 나치 정당의 교조는 별로 드러나지 않으며 나치의 악질적인 인종차별적 교조나 정치적 박해를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당대회 자체가 그랬던 것이지 리펜슈탈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리펜슈탈은 최면과 같은 의식을 공들여서 훌륭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다.
[367, 369, 433∼434, 447쪽] 리펜슈탈은 확보한 필름 약 400킬로미터를 보는 데만도 10주가 걸렸다. 레니처럼 전설적인 질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 레니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마라톤 주자들의 내면적인 감정”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독한 피로나 빨리 경기가 끝나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감정 말이다. 주자의 무거운 다리는 아스팔트에 들러붙는 것 같지만 의지력이 그를 이끌어 간다 … 지금 이 영화를 역사 다큐멘터리로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에서 엿보이는 나치당 지도자들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지 모른 채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준다 … 레니는 시와 영화가 비슷한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시와 영화는 언제나 ‘교류 전기’처럼 일종의 파동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또한 관객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관객은 시퀸스의 표현력에 의해 절정에 이끌렸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상승하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473, 488∼489쪽]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부터 슈네베르거 부부(전쟁 때 레니는 슈네베르거 부부를 숱하게 도와서 목숨을 여러 차례 건져 주었다)는 레니 리펜슈탈을 멀리하려 했다. 그들은 그날 밤 칠레르탈 계곡 꼭대기의 작은 호텔에 레니를 버려둔 채 떠났다. 다음날 레니가 두 사람을 쫓아서 마을 위 언덕에 있는 한 가족 임대별장에 갔지만, 기젤라가 차갑게 레니를 쫓아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젤라가 소리쳤다. “이 나치 계집 같으니라고!” 한스 역시 따뜻한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눈벼룩은 몇 주 전만 해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원하는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레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리펜슈탈의 자산과 권리, 자유는 모두 강제된 채였다 … 리펜슈탈과 히틀러가 친밀한 관계였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총통의 측근들이 증언한 기록은 많았다 … 리펜슈탈은 또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히틀러식 경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491, 492, 509쪽] 레니는 끝도 보이지 않는 빚과 소송에 시달렸다 … 법정은 레니의 전쟁범죄 혐의를 풀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적의는 1947년 출판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독일 영화 심리분석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와 같은 새로운 해설이나 리펜슈탈의 소송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더욱 부추김을 받았다 …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후 한 번도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의 진창’을 뒹구는 기분이었다. 감금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으며, 심문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인터뷰’의 탈을 썼을 뿐이었다.
[520∼521, 524쪽] 레니는 이들(메사킨 퀴사이르 누바족)의 순진함과 때 묻지 않은 관습을 사랑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 레니 리펜슈탈은 아프리카에 열 달 간 머무르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했는데, 대부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 레니는 차도 텐트도 없이 주로 바깥에서 잠을 잤다(1962년 무렵). 이제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여졌고 뱀에 물려죽은 전사의 장례식에까지 초대받았다. 이곳에서 레니는 어디에든 갈 수 있었고 혼자 있을 때도 두렵지 않았으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레니는 지난 몇 년 간 독일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모욕을 참아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친구들로부터 환영받자 짐심으로 행복했다 … 이번에는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누바족의 영화를 찍으리라 … 레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바족에게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벌집 같은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526, 569, 571∼573쪽] 이때쯤(1968년) 레니의 사진이 유명해졌다. 아프리카 사진을 모은 첫 사진집 《최후의 누바족》이 뉴욕에서 1974년에 출판되었고, 2년 후에는 《카후 사람들》이 나왔다. 레니가 수단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1982년에는 《레니 리펜슈탈의 아르피카》가 출판되었고, 곧이어 《사라지는 아프리카》가 나왔다. 이제 사실상 레니가 알고 레니가 사랑했던 누바족은 사라지고 없었다. 레니의 표현대로 ‘문명의 파괴적인 손’은 누바족에게 누더기옷과 정체성의 위기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돈, 술 그리고 문을 잠글 자물쇠를 가져다주었다. 관광객들이 누바산으로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는 이국적인 정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춤과 싸움의 의식은 수많은 렌즈 앞에서 돈을 받고 치러졌다. 레니는 그녀의 사진이 이런 변화에 일부 책임이 있다든지, 그녀는 단지 ‘환상에 사로잡힌 백일’일 뿐이라는 비난에 반박했다. 누바족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예의 집착과 숭배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는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레니는 깊이 절망했다. 레니가 사진을 찍기 전에 다른 사람들도 누바족의 사진을 찍어 발표해 왔다. 단지 그녀는 사라지는 순간의 목격자이자 기록자가 되는 특권을 누렸을 뿐이다. 레니는 부패해 가는 천국을 보았다 … 리펜슈탈의 사진은 가장 완벽한 인간 육체를 아무 부끄러움 없이 찬미한다. 수전 손택은 《우율한 열정》에서 리펜슈탈이 그려내는 “곧 멸종될 누바족은 리펜슈탈이 만든 나치 작품의 연장”이라고 비난했고 몇몇 비평가들 역시 손택을 따랐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리펜슈탈이 찍은 수단 사람들의 감각적인 초상에 굉장히 기뻐하며 리펜슈탈이 여행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점점 더 친절해졌다. 1975년 니메이리 대통령은 리펜슈탈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수단 시민권을 수여했다. 리펜슈탈은 그런 영광을 누리는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 지적이고 정열적인 탐구로 유명한 손택은 “생각을 자라게” 하는 글로 유명했는데, 리펜슈탈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오히려 많은 독자들의 생각을 고정시켜 버렸고, 거의 30년 전의 크라카우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리펜슈탈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어쩌면 제일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손택의 글이 전혀 다른 두 작품에 대한 평이라는 점이다. 손택은 짓궂게도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제목 하에 레니의 아프리카 사진집을 《SS 제복》이라는 책과 함께 묶어서 평한다 … 손택은 리펜슈탈이 누바족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이런 류의 사진에 대한 손택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손택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리펜슈탈에 대한 이미지가 사진을 보는 눈을 흐렸을 수도 있다. 다른 예술가들 또한, 리펜슈탈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리펜슈탈에게 영감을 준 조지 로저는 1948년과 1949년에 씨름을 하는 누바족 사진을 찍었다. 로저의 사진은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로저의 사진을 파시스트적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손택은) 리펜슈탈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두 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고” 어쩌면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중 가장 위대”할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야누스와 같은 관점이다! … 손택은 리펜슈탈에게 언어적인 공격을 퍼붓지만, 그 방식은 프로파간다라는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 레니는 언제나 누바족을 관찰하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파시스트적이란 말인가?
[577, 594쪽]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 … 우리는 리펜슈탈을 비난하지만, 리펜슈탈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 하지만 무엇을 믿든 간에, 사회가 리펜슈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의지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나치 현상과 나치 현상의 힘(신비화와 볼거리를 통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묶어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금만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 반세기나 지난 상황에서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