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가계부 -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습관
혼마 미야코 지음,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옮김 / 시금치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48 ― ‘가정주부’란 가장 아름다운 ‘직업’
 : 혼마 미야코, 《환경 가계부》


- 책이름 : 환경 가계부
- 글 : 혼마 미야코
- 옮긴이 :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 펴낸곳 : 시금치 (2004.12.10.)
- 책값 : 9000원



 (1) 집일 하는 사람 책읽기


 새벽 세 시 삼십사 분부터 깨어난 아이는 아침 열한 시 삼십오 분까지 칭얼거리다가 잠이 듭니다. 요 며칠 바깥마실을 하는 동안 바깥사람들하고 신나게 어울리며 졸음을 잊은 채 뛰어놀던 아이였는데, 몸이 고단하면서도 새벽 일찍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새벽에 일어난다고 걱정이라거나 힘들다기보다, 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안 자려 하면서 투정과 짜증이 더해 가기 때문에, 아이한테나 어버이한테나 부디 아침에 늦잠을 자면 얼마나 기쁘랴 생각합니다. 잠은 자면서 놀고, 밥도 먹으면서 놀면 오죽 좋을까요.

 칭얼거리는 아이와 함께 방을 쓸고 닦고 치운 다음에 빨래를 하면서 씻깁니다. 빨래를 하는 동안 밥을 안쳤고, 다 된 밥을 먼저 아이한테 먹이면서 다른 찬거리를 마련합니다. 새벽바람으로 청소하고 빨래하고 씻기고 밥하고 밥 먹이고 하기까지 꼭 네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와 살아온 스물한 달 동안 날마다 으레 하는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지만, 하루라도 느긋하게 숨을 돌린다거나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집일을 빼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기는 마음을 알 만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닦달하고 들볶던 아이가 잠든 모습을 바라볼 때에는 이 얄미운 녀석이 달디달며 곱게 그릉그릉거리고 있어, 내가 너한테 무엇을 더 바라며 똑같이 짜증을 부리고 큰소리를 치며 힘들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느냐 싶습니다.

 엊그제 동네 헌책방에 마실을 가서 소설쟁이 오정희 님 산문모음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1994년에 나온 《허리굽혀 절하는 뜻은》(창)이라는 책인데, 오정희 님은 머리말에 “이 책은 가정이라는 울 안에서 밥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때문에 애태우고 사는 재미, 사는 걱정으로 나이들어 가는 평범한 한 여자로서의 입장에서 쓴 작은 글모음이다. 가정주부로, 아이들의 어미로 삶의 결과 세상살이를 바라보기, 내 속에서 끓어넘치는 열정과 넋두리가 들어 있어 내가 쓴 어느 소설보다도 자신의 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자잘한 근심걱정으로 한숨 쉬고 답답해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 그러나 그러한 일상사가 또한 구원이 됨을 모르지 않기에 이런 글모음으로 책을 펴낼 용기를 내어 본다”고 밝힙니다. 여느 글쟁이 여느 글모음은 넘쳐도, 여느 살림꾼 여느 글모음은 드문 우리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한 어버이한테서 한 아이로 자라지 않은 사람이 없건만 이 땅 글쟁이 가운데 ‘한 어버이한테서 한 아이로 자라 온’ 이야기를 글로 만나기란 몹시 힘들고, ‘한 어버이로서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를 글로 만나기란 더욱 힘듭니다. 그나마 오정희 님은 소설을 쓰는 분이었으니 글을 쓸 겨를을 내거나 글을 써 달라고 바라는 곳이 있어 당신 살림살이 이야기를 글로 여밉니다. 그렇지만 숱한 어머니들 이야기는 글로 여미어지지 않습니다. 숱한 어머니와 세월을 함께 보내는 숱한 아버지들 이야기 또한 글로 묶이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혼인을 해서 복닥복닥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꽤 있습니다. 아이와 어우러지는 고단한 아름다움을 밝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느 살림꾼 삶자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글로 쓸 만한 이야기가 못 된다 여길 수 있겠으나, 글로 쓸 만한 틈을 못 낸다 할 테고, 애써 글로 썼다 하더라도 실어 주는 자리가 없습니다. 맛깔스럽다는 온갖 요리를 다루는 책은 있으나, 날마다 먹는 밥이나 국이나 찌개나 김치나 반찬을 다루는 책이 한 가지라도 있습니까. 궁중요리라느니 무슨무슨 요리라느니 하는 책은 넘치지만, 여느 사람이 여느 자리에서 살아가며 늘 먹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밥하기와 얽힌 ‘살림책’은 없습니다. 예쁘장하게 지어 입는 옷이나 사서 입는 옷 이야기를 다루는 책과 잡지는 넘칩니다. 그러나 바쁘고 고단한 살림에 수수하게 지어 입히거나 마련해 입히는 옷 이야기를 다루는 책과 잡지는 없어요.

 아마 돈이 안 되는 살림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제아무리 남녀평등이니 여남평등이니 소리높여 외쳐도 정작 ‘집안일(가사노동)’을 돈셈으로 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나라에서 돈을 줍니까, 회사에서 돈을 줍니까. 동사무소에서 돈을 줍니까, 누가 돈을 줍니까. 그런데 돈셈으로 치지 않는 집안일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요, 예부터 집일을 ‘살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느끼지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사노동’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림’입니다. 많이 어수룩하고 모자라고 어줍잖은 살림이기는 하나, 저는 살림살이를 하는 살림꾼입니다. ‘가사노동’을 하는 ‘가정주부’는 아니에요. 그래서 제 살림살이를 돈셈으로 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니 다달이 50만 원쯤 아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엄마젖을 먹였고 천기저귀를 제가 손빨래로 갈아 채웠으니 이래저래 돈을 얼마쯤 아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안 몰고 아기수레를 장만하지 않았고 옷은 모두 얻어서 입으니 또 돈을 어느 만큼 줄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픈 옆지기를 잘 보살피지 못해 언제나 미안한데, 넘치는 집일을 짐지지 못해 누구한테 맡긴다면 돈을 얼마 내야 하니까, 이만큼 또 돈을 안 쓰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요.

 치고 볶아도 내 사랑이고 내 살림이니까요. 부딪히고 쓰러져도 내 삶이고 내 살붙이이니까요.

 다만, 하루하루 눈알 돌아가도록 어지럽고 손이 떨리도록 힘겨우며 코피가 터지도록 일이 넘치는 삶이기 때문에 여느 책 하나 손에 쥐지 못합니다. 웬만큼 곰삭이거나 되씹는 가운데 풀어낸 이야기책이 아니라면 지루해서 졸음이 쏟아집니다. 아무래도 아이 키우고 살림 하느라 머리가 굳어 돌이 된 까닭인지 모르겠는데, 지식만 넘치는 책은 저한테는 참 재미없습니다. 실용책이든 처세책이든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타구니 부여잡는 문학이나 머리 굴리는 예술이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고단하고 힘겨우며 바쁜 살림꾼이 졸리고 떨리는 손으로 애써 붙잡아 펼칠 만한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이 아닐 때에는 하나같이 책상에서 멀찌감치 내팽개치곤 합니다. 사람이 옹근 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참사랑과 착한 믿음과 고운 손길을 추스르도록 돕는 책이 아닐 때에는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지난 스물한 달에 걸쳐 날마다 되씹고 곱씹습니다만, 아이를 낳아 키우던 날부터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는 할 수 없다’고 느꼈는데,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를 그대로 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해 오던 책읽기는 그예 배부른 책읽기였다고 느낍니다. 속속들이 살림꾼이 되지 못한 채 저부터 지식조각을 주워섬기는 책읽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오늘까지는 스물한 달째이고, 앞으로는 더 기나긴 달수와 햇수에 걸쳐 살림꾼다운 책읽기를 새롭게 익힐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2) 여느 가계부로는 살찌울 수 없는 살림


 여느 가계부로는 살찌울 수 없는 살림을 이야기하는 책 《환경가계부》를 읽습니다. 2004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거의 사랑받거나 눈길받지 못한 채 사라진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온누리에 사랑받지 못하는 책이 한두 가지이겠습니까만, 이 나라에 손꼽히는 환경운동 시민단체 회원 숫자를 생각한다면 씁쓸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눈길받지 못한 채 스러지는 책이 한둘이겠습니까만, 생태와 환경과 웰빙과 그린 따위를 외치는 목소리를 헤아린다면 다른 책이 아닌 《환경가계부》가 이토록 막대접을 받고 조용히 묻혀 버린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픕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저부터 2004년에 이 책이 나온 줄 몰랐습니다. 2004년부터 여섯 해가 지난 201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책이 예전에 나왔음을 알았고, 책을 다 읽은 다음 둘레에 소개하려고 알아보니 판이 끊어져 더는 장만할 수 없는 책이 되어 있더군요.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환경책을 좀더 샅샅이 살피고 꼼꼼히 읽는다고 밝히는 사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책이었다니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나라 도서관에 이 책이 몇 권쯤 남아 있을는지 궁금하고,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책은 헌책방에 거의 나오지 않는데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볼 길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진책이 참 안 팔리지만 사진책보다 더 안 팔리는 책이 환경책입니다. 앞서 여느 살림꾼 이야기는 책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환경책이나 여느 살림꾼 이야기책이나 어슷비슷합니다. 두 가지 모두 한 번 책으로 묶이기 힘들고, 애써 책으로 묶여도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책이 아니고 딱딱한 책이 아닌데, 참 안 읽힙니다. 바른 사람으로 살아가자면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새롭게 돌아볼 이야기입니다만, 참 뒤로 처지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자가용을 버리자’라는 외침은 꿈도 꾸지 못하는 우리들인 탓이기 때문이겠지요. ‘자가용을 버리자’는 못하겠다면 ‘자가용 홀짝수 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못할 테지요. 아니, 한 주에 한 번 자가용을 쉰다거나 열흘에 한 번 자가용을 쉬기조차 못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요. 대중교통을 타지 말고 자전거나 두 다리를 쓰자고 한다면, 이를 받아들여 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촐퇴근하는 거리가 너무 길다고 하지만, 스스로 일자리를 집과 가까운 데에서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합니다. 영어로는 ‘로컬푸드’라고 하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서 얻는 먹을거리를 나 스스로 찾아 먹어야 내 몸과 내 마을이 튼튼합니다. 내가 내 마을에서 내가 즐거이 몸담을 일자리를 얻어서 일해야 나와 내 마을과 내 일터가 튼튼합니다.

 서울이 고향이라면 서울을 사랑하여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고, 안성이 고향이면 안성을 사랑하며 안성에서 일자리를 마련할 노릇입니다. 대구사람은 대구에서 슬기로운 길을 찾고, 나주사람은 나주에서 아름다운 길을 찾아야겠지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옛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제 뿌리내린 고향에서 커야 할 노릇이요, 말이건 다른 짐승이건 제 삶터에서 튼튼하게 살아야 할 노릇입니다. 강릉은 강릉다움을 건사하고 인천은 인천다움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나와 내 집안과 내 마을과 내 겨레와 내 나라와 내 누리가 튼튼할 길이란 없습니다.

 일본사람 혼마 미야코 님이 쓴 《환경가계부》라고 하는 책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들과 중앙정부와 기득권과 정치꾼과 지식인과 운동가들 모두 가장 얕보거나 낮잡는 여느 ‘살림꾼’이 여느 마을에서 여느 모습으로 여느 삶을 꾸리는 이야기야말로 가장 작은 집안부터 가장 큰 온누리까지 살릴 수 있음을 조용히 밝히고 보여줍니다. 돈을 더 버는 삶에도 남다른 뜻이 있겠으나 아름다운 뜻이란 없음을 찬찬히 알려주고 일깨웁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삶이야말로 나와 내 동무와 살붙이 누구한테나 도움이 되며 사랑스러운 길임을 또렷이 드러내고 가르칩니다.

 한꺼번에 정권을 뒤집자는 책이 아닌, 차근차근 내 집안을 바꾸고 내 집안에 앞서 내 삶을 바꾸자고 하는 《환경가계부》입니다. 내가 내 삶을 슬기롭게 바꾸지 못하는데 썩어빠진 정권을 갈아치울 수 없음을 온몸으로 깨우치는 《환경가계부》입니다. 대학교에 간들 배울 수 없고, 대학원뿐 아니라 로스쿨이건 대기업이건 가르쳐 주지 않는 이야기를 담은 《환경가계부》입니다. 나라밖으로 배우러 나간다 한들 배울 수 없는 깊은 이야기를 실은 《환경가계부》입니다. 바로 이 땅 이 자리에서 이 사람들, 그러니까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이웃과 내 동무하고 살가이 얼크러지는 눈물과 웃음이 얼마나 빛나고 애틋한가를 적바림해 놓은 《환경가계부》입니다.

 우리 나라가 아름답지 못해서 아름다운 책이 제대로 태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읽히지 못하니 《환경가계부》라는 책 또한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졌는데, 사라진 책을 되살리기는 어렵고,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삶을 건사하며 아름다운 넋을 가꾸는 이들이 새로운 아름다운 책 하나 선보이며 다 함께 기쁘게 어깨동무할 새로운 환경책 하나 빚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꿈을 꿉니다.


 (3) 아쉬우나마 곱새겨 읽기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리라 하지만, 냉장고 없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세탁기 없이 얼마든지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청소기가 있어야 할 만큼 지나치게 커다란 집에 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자가용을 왜 몰고 있을까요.

 툭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냉장고며 세탁기며 전기밥솥이며 머리말리개며 텔레비전이며 전기를 아주 많이 먹습니다. 이런저런 녀석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면 ‘원시인’이 되라는 소리냐고 따지는 분이 많은데, 그리 멀지 않은 1980년대까지 이런 전기제품을 집에 갖춘 사람은 그리 안 많았습니다. 1970년대에는 훨씬 적었고 1960년대에는 거의 어느 누구도 이런 전기제품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환경가계부》는 우리들한테 원시인이 되자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놓친 대목이 무엇인지 느끼자고 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깨닫고 느끼며 되새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생각하자고 하는 책입니다.

 비록 이 책을 여느 책방에서 만나기란 몹시 힘들지라도, 다문 몇 줄이나마 함께 읽고 곱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한테 새롭게 가르치고 일깨우는 대목을 여러 차례 거듭 읽으며 한 글자 두 글자 천천히 옮겨적어 봅니다. (4343.5.5.물.ㅎㄲㅅㄱ)


[22, 47, 136∼137쪽] 아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했는가, 이것 또한 귀중한 데이터가 됩니다. 일본의 아기들이 아프리카 아기들보다 약 80배나 많은 에너지를 쓴다니 말입니다 … 전기밥솥 안의 남은 밥은 보통 보온 상태로 두는데 의외로 보온은 전기가 많이 듭니다. 6시간 보온할 경우 밥을 새로 한 번 짓는 만큼 전기를 소비합니다 식사 때마다 그때그때 지어먹는 밥이 맛도 좋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입니다 … 아이들의 옷을 항상 바자회에서 사서 입힌다는 젊은 여성도 있습니다. 자신 역시 30엔에 산 티셔츠와 100엔에 산 청바지를 입고 발랄하게 유치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린 지역에서 옷이나 일용잡화를 재활용하고 물건과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에 언젠가는 전체 쓰레기의 양은 줄어들어 있을 것입니다.

[24, 44, 131, 132쪽] 절전은 처음부터 100퍼센트 완전하고 빈틈없이 실행되지 않습니다. 너무 꼼꼼히 하려다 보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 일 년 365일 계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에어컨보다 선풍기를 쓰면 전기사용량은 훨씬 더 줄어듭니다. 최근에 선풍기가 다시 잘 팔린다고 하더군요. 또 선풍기보다 부채를 쓰면 당연히 훨씬 더 절전이 됩니다 … 포장을 거절해서 오히려 좋은 소리도 듣고 이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인력과 쓰레기를 줄이는 이점이 있습니다. “포장 필요 없어요.” “봉투 필요 없어요.” “책 안 싸 주셔도 됩니다.” 이런 단 한 마디로 말입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하기 어려운 사람도 계십니까? … 포장용기를 받아 오지 않으면 쓰레기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걸 처리하느라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42∼43, 89쪽] 카탈로그를 면밀히 훑어보는 습관을 익히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소비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왜 이렇게 읽기 어려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 겉모습과 가격만 선전하게 된 현실은 지금까지 소비자가 그것을 기준으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일본 전국에서 계획되고 있는 댐이 모두 불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필요한 댐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므로 일반 주민이 판단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51, 53, 54쪽] 화력발전에서 전기가 되는 열은 40퍼센트 정도에 불과합니다. 60퍼센트의 열은 버려지고 있습니다. 또 원자력발전은 35퍼센트가 전기가 되고 65퍼센트를 버립니다 … 지금 가장 에너지 절약 노력을 하지 않고 전기 사용량은 날로 늘어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석유와 석탄을 쓰는 화력발전을 우리는 언제까지 의지해야 할까요. 또 먼 곳에 화력발전소를 세우고 길고 긴 송전선을 통해 생산한 전기를 버리는 것이 이치에 맞는 걸까요. 전기를 쓰는 생활을 당연히 여기는 우리들로서 지금까지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전기가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전기 없는 채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125∼126쪽] 유기 농산물을 재배하려면 쌓아 놓은 풀과 똥을 몇 번씩이나 뒤섞어 퇴비를 만들고 농약을 치지 않는 밭에서 잡초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굉장히 힘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비자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벌레 먹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벌레가 먹어도 아무런 독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가게에 진열된 채소는 맛이나 질과 관계없이 그저 겉모습만으로 선택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자란 채소는 크기가 큰 것도 있는가 하면 작은 것도 있고 똑바로 자란 것도 있고 구부러진 것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크기나 형태로 선택을 하면, 선택되지 않는 것들은 버려지거나 아주 싼 값의 떨이로 팔립니다 … 식탁에 오르는 채소에서 소비자는 여러 가지를 보게 됩니다. 채소를 생산한 사람들의 얼굴들, 그 가족의 얼굴들, ‘그 사람이 먹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산자는 재배를 하고, ‘그 사람이 기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비자는 채소를 먹습니다.

[139쪽] 인구가 집중되고 대량으로 소비하며 대량의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대도시야말로 리사이클의 효과가 가장 크지만, 바로 그 대도시가 가장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인간관계’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140쪽] 쇼핑한 물건은 언젠가는 모두 쓰레기가 됩니다.

[141쪽] 자연식품 위주로 식사를 하지 않는 몸은, 영양의 균형이 깨져서 생리적으로 욕구 불만이 되기 쉽습니다. 인스턴트 가공식품에 포함된 화학첨가물은 그러한 욕구불만과 초조함을 더해 줍니다.

[195쪽] 젊은 시절은 한 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므로 너무 잔소리하지 말고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아이들이 진학과 취직 때문에 집을 나가는 순간 전기요금이 반으로 줄어든 예도 있습니다. 혼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 아들과 딸이 곧바로 에너지 절약, 자원 절약 도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만들어 주는 요리의 가치를 깨닫고 ‘맛있다’를 연발합니다. 친구들과는 인스턴트 식품만 사먹고 저녁은 자주 걸러 왔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읽는 마음


 잘난 사람이 쓴 잘난 책을 읽으면 잘난 마음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느낀다. 못난 사람이 쓴 못난 책을 읽으면 못난 마음으로 어줍잖게 우쭐거리는 얼굴이 어떤 빛인가를 느낀다. 고운 사람이 쓴 고운 책을 읽으면 고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를 느낀다. 착한 사람이 쓴 착한 책을 읽으면 내 낯이 붉어지기보다 내가 걸어갈 착한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느낀다. 큰소리치는 겉치레 사람이 쓴 큰소리에 물든 겉치레 책을 읽으면 이런 겉치레와 큰소리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느낀다.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고 투박하게 엮은 책을 읽으면 내 삶이 어느 만큼 수수하거나 투박한가를 돌아보며 내가 가꿀 내 삶이 어떤 결일 때에 즐거울까 하고 곱새긴다.

 이름있는 아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더 잘나거나 더 못나지 않다. 이름없는 저무개가 쓴 책이라 해서 덜 떨어지거나 덜 여물지 않다. 이름있는 출판사 책보다는 뜻있는 출판사 책을 고를 때가 한결 아름답지만,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뜻있는 출판사가 품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는 눈이 퍽 얕다. 스스로 뜻있게 살림을 꾸리지 않는다면 겉껍데기 뜻인지 속차림 뜻인지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부터 뜻있게 살아가고 있어야 뜻있는 출판사에서 땀으로 일군 뜻있는 책을 알아보며 기쁘게 장만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사람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옆지기와 짝을 짓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대로 온누리를 살피고 책을 알아보며 고갱이를 받아먹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한껏 깊다면 한껏 깊은 책에 서린 넋을 읽는다. 내가 살아가는 결이 몹시 얕다면 몹시 얕은 책에 덧발라 놓은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간다.

 우리는 신영복 님 책을 읽을 노릇이 아니라 신영복 님 삶을 받아들일 노릇이다. 법정 스님 책을 찾아 읽으려고 아둥바둥거릴 노릇이 아니라 법정 스님 삶을 살펴 받아안을 노릇이다. 이 땅에는 신영복 님이나 법정 스님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한편, 이분들처럼 이름이 높지 않으면서 거룩하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도록 조용히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많다. 다만, 우리들은 이름을 스스로 낮추어 사람들 앞에 잘 뜨이지 않으면서 당신 둘레 삶자리를 아름다이 여미는 몸짓을 제대로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용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찾자면 우리부터 조용하고 아름다이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은 조금도 조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자가용 제발 버리라고 그토록 외친 권정생 할아버지인데, 권정생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에 시외버스나 기차로 안동역에 내려서 걸어걸어 고개를 넘어간 이는 몇 사람이었을까. 당신하고 마음벗이었던 이오덕 할아버지를 빼고 꾸준하게 낮은걸음으로 찾아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북돋운 사람은 누가 있을까. 자가용을 단단히 붙잡을 뿐 아니라 크고 빠르고 비싼 차에다가 아파트 열쇠까지 주렁주렁 매달면서 권정생 할아버지 책, 이를테면 《몽실 언니》이든 《하느님의 눈물》이든 《우리들의 하느님》이든 떠받든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으랴. 덧없는 몸부림이고 돌아오지 않는 산울림이다.

 반 고흐 책을 읽으면 반 고흐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미우라 아야코 책을 읽으면 미우라 아야코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류영모를 읽으면 류영모가 되어야 할 노릇이다. 반 고흐와 미우라 아야코와 류영모를 지식조각으로 머리에 집어넣는다고 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신영복 님 책이든 법정 스님 책이든 그토록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지만 이 나라에 아름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책을 읽는 마음이 처음부터 그릇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마음을 참되고 착하고 곱게 추스르지 않고, 너무 일찍 책을 장만해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쿠리 영감은 네 주제를 알라고 했다는데,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들 주제를 알고 당신들 주제를 빛낼 길을 걸으며 책을 삼키는 사람은 더없이 드물다. 책을 읽으려면 가난해야 하고, 가난해지면 내 이웃이 보이며, 내 이웃이 보인 다음에는 내가 서 있는 터전과 자연을 알아챈다. (4343.5.3.달.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10-05-03 20:57   좋아요 0 | URL
찬찬한 글, 찬찬히 읽고 싶어 별찜하고 갑니다.

파란놀 2010-05-04 14:4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빨래하는 마음


 이 옷을 누가 입는가 헤아리며 손빨래를 한다. 이 옷을 입는 사람이 사는 터전은 어떠해야 좋을까 곱씹으며 비빔질을 한다. 빨래할 때뿐 아니라 밥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밥을 누가 먹는가 생각한다. 이 밥을 먹는 사람은 어떻게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면 좋은가 돌아본다. 내가 쓰는 글은 누가 읽으라고 쓰는 글인가를 되뇌어 본다. 내 어줍잖은 글 하나를 읽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어떤 생각으로 펼쳐 나가면 좋은가를 가만히 톺아본다. 빨래하는 마음은 밥하는 마음이고, 밥하는 마음은 걸레질하는 마음이며, 걸레질하는 마음은 아이를 안고 동네마실을 하는 마음이요, 아기수레 아닌 어버이 품으로 아이를 보듬는 마음은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이다.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으려는 마음은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이고, 애써 글 한 줄 쓰려는 마음은 호미질 하는 마음이다. 호미질 하는 마음은 바느질 하는 마음이고, 바느질 하는 마음은 설거지를 하고 내 어버이 등과 허리를 부드러이 주무르는 마음이다. (4343.5.1.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 이야기 - 사진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전민조 엮음 / 눈빛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으로 꾸몄다고 다 책이 되지 않는다
 [다들 잘 모르는 사진책 1] 전민조 엮음, 《사진 이야기》(눈빛,2007)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올 2010년 5월 19일부터 새로운 사진잔치를 엽니다. 이번 사진잔치는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이름을 내겁니다. 나이가 들어 저절로 신문사 사진기자 일을 그만둔 뒤로 해마다 다른 사진감을 선보이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으신데, 여섯 해째 꾸준히 마련하는 새로운 사진잔치를 하나씩 들여다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랍고 반갑습니다. 전민조 님은 ‘새 사진감을 찾아 사진을 만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바쁜 틈을 쪼개어 ‘당신한테 가장 아름답고 좋을 사진을 찍어서 갈무리한’ 끝에 이렇게 해마다 당신 사진곳간에서 알찬 보배를 하나씩 꺼내어 우리들한테 선물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진쟁이들은 ‘무언가 톡톡 튀거나 남다르거나 뜻깊을 사진감’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괜찮다 싶은 사진감이 나오면 몇 해에 걸쳐 신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고는 사진잔치를 한 번 열거나 사진책을 하나 내놓고는 이 사진감 또한 슬며시 내려놓습니다. 꾸준히 이어가며 당신 마음밭을 일구는 사진찍기가 아니라 ‘작품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 사진찍기입니다.

 전민조 님은 지난 2007년에 엮은 책 《사진 이야기》에서 “셔터만 누른다고 모두 작품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정직하다. 벽에 걸어 놓기 좋은 아름다운 사진만 찾는 사람들, 또 그런 사진만 찍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진의 발전은 어둡다(머리말).”고 이야기합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고 모두 사진이 되지 않으나,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모두 사진이 됩니다. 찍은 사진을 그러모아 책을 묶는다고 모두 사진책이라 할 수 없으나, 찍은 사진을 그러모으면 모두 사진책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쏟아 아끼는 사이가 모두 사랑하는 사이라 할 수 없으나, 마음을 쏟아 아끼는 사이란 모두 사랑하는 사이일 때하고 매한가지인데, 이 대목을 곱다시 헤아리는 사진쟁이는 퍽 드뭅니다. 전민조 님이 “카메라는 정직하다”고 읊은 이야기를 속깊이 읽어내는 사진쟁이란 몇 안 됩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모두 사진쟁이는 아니나 사진을 찍으니 모두 사진쟁이요,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 우리 삶을 종이에 담아내기는 하나 사진기는 있는 그대로 우리 삶을 종이에 담아내지 않기도 한데, 이를 우리들 가운데 몇몇이나 곱씹고 있으려나요.

 《사진 이야기》라는 사진책은 사진일을 하거나 사진밭에 몸담은 사람들이 쓴 글에서 ‘사진을 읽는’ 고갱이가 되는 넋을 담은 글을 간추려서 묶었습니다. 1994년에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오동명 님은 대낮에 술에 절어 있는 전두환 씨를 사진으로 찍던 일을 되돌아보며, 전두환 씨가 당신을 바라보며 “필름 아껴 쓰라우” 하고 큰소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남겨 놓습니다. 월간조선에서 사진팀장을 하던 이오봉 님은 당신 후배들한테 “취재현장에서 예의를 갖춘 사진기자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몽각 님은 “아이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랑이요, 기쁨이었다”고 말하면서 당신 아이를 사진으로 담은 까닭을 밝히고,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만일 한국이 남태평양의 산호초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섬나라였다면 굳이 내가 취재하고자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얼마 앞서 《황천의 개》라는 사진책이 옮겨진 후지와라 신야 님 1993년판 《인도방랑》이라는 사진책에는 “보잘것없는 여행을 하고 있을 때는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만난다”는 말마디가 적혀 있고, 1926년에 태어나 1967년에 《포토그라피》라는 잡지에 글을 쓴 조중 님은 “사진이 예술이냐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왜 찍었느냐에 따라 분간될 성질의 것이며, 한 장의 사진이 예술사진이냐 하는 것은 그 사진에 담겨 있는 내용이 문제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펼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을 꾸리며 다 다른 사진을 찍는 한편 다 다르게 사진을 바라봅니다. 《사진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백 사람이면 백 가지 사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고, 백 사람으로 백 가지뿐 아니라 즈믄 가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사람에 따라 다른 삶이니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거든요. 사람에 따라 다른 눈길이니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양으로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을 일굽니다. 다 다른 이야기가 다 다른 아름다움과 눈물웃음을 자아내면서 다 다른 문화나 예술로 자리매깁니다.

 다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다 다른 내 목숨이요 넋임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슷비슷하거나 그냥저냥 ‘벽에 걸어 둘 만한’ 작품만 태어납니다. 이래저래 ‘꽤 볼 만한 사진책’이 태어나거나 ‘세계 사진 역사’에 이름 하나 걸칠 작품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아름다운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진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삶에서 비롯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넋을 보듬는 가운데 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이란 사진기 단추를 누르며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글이란 연필을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그림이란 붓을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그러니까, 살림이란 걸레 칼 도마 비누 따위를 들어 일구는 문화이며 예술이겠지요. 아이 하나란 어버이 손길과 마음길로 보듬으며 일구는 고운 목숨이면서 스스로 문화이며 예술일 테지요. 자연이란 풀과 나무와 짐승들이 골고루 어우러지면서 스스로 이루는 문화이며 예술이고요.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바로 우리 살림과 우리 목숨과 우리 자연을 어루만지는 가운데 샘솟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진 이야기》는 우리들 누구나 다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 대목을 건드리는 작은 사진책입니다. (4343.4.30.쇠.ㅎㄲㅅㄱ)


― 사진 이야기 (전민조 엮음,눈빛 펴냄,2007.8.20 / 1만 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은 다섯 붙였지만, 장석봉 번역이 엉터리라서 내 점수는 9점이다) 

 
 이 책 하나 136 ― 묻힌 삶, 묻힌 사람, 묻힌 터
 : 팔리 모왓, 《잊혀진 미래》


- 책이름 : 잊혀진 미래
- 글쓴이 : 팔리 모왓
- 옮긴이 : 장석봉
- 펴낸곳 : 달팽이 (2009.11.12.)
- 책값 : 15000원


 (1) 아이를 키우는 힘든 삶이란


 아이와 함께 마실을 다니면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때때로 만납니다. 어르신들은 아이한테 아무 거리낌이 없이 사탕이나 과자를 쥐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둘레 어른들한테서 사탕이나 과자를 곧잘 얻어먹었지 싶습니다. 이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안 좋아하셨고, 둘레 어르신들한테 아이한테 사탕이나 과자를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집에서 먹지 못하는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고 싶었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가 아이였을 나이에서 서른 해가 훌쩍 지난 오늘날은 지난날과 뒤집어진 일이 나타납니다. 우리 아이가 둘레 어르신한테서 사탕과 과자를 받아먹고, 저는 아버지 된 몸으로 이런 사탕 선물과 과자 선물이 못마땅하고 힘겹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사탕 하나 준다고 뭐 어때서?’이고 ‘사탕 때문에 이가 썩을까 봐 걱정하나?’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바깥에 나와 사람들한테서 자꾸 사탕이나 과자를 받아먹어 버릇하면 무엇보다 ‘밥을 잘 안 먹으려’ 합니다. 다음으로, 바깥에 나오면 으레 누군가 무엇을 먹으라고 준다고 생각합니다. 밥때에 맞추어 한창 밥을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할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아이가 얼마나 땡깡을 부리는지를 사람들이 옳게 느껴야 하고, 선물받는 고마움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면서 무언가를 쥐어 주든 해야 할 줄을 어른들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깟 사탕 하나인데 뭐?’ 하고 생각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아니거든요. 당신 같은 어르신을 한 사람만 만나지 않거든요. 어느 날은 사탕만 자그마치 열 알이나 받아야 한 적이 있거든요.’ 하고 대꾸를 하지만, 늘 이렇게 대꾸를 하자니 고단하고 지칩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짐을 꾸려 서울로 마실을 나왔습니다. 아픈 옆지기가 조용히 명상 수련을 다녀오고 속 다스리는 약을 먹을 수 있게끔 아이는 아빠가 데리고 아빠 볼일 보러 가는 자리에 갑니다. 계단만 보면 꼭 저 스스로 하나씩 디뎌야겠다는 아이는 아무리 힘들어도 계단 끝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다 오르거나 내려가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사탕 한 번 과자 한 번 받아먹은 아이는 밥때가 되어도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젠장 제기랄 하고 구시렁댑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이는 제 아빠가 사탕이나 과자가 아닌 밥을 주니까 고개를 도리질하거나 홱 돌리는데, 다른 사람이 밥술을 떠서 냠냠 하고 말하면 새끼 새들처럼 입을 쩍 벌립니다. 아주 말괄돼지인 녀석이 이때만큼은 고분고분 날름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출판사 분들한테 말씀해서 한 숟갈씩 아이한테 내밀어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먹을까요?’ 하고 궁금해 하던 분들이지만, 막상 숟갈을 아이한테 내미니 도리질 한 번 없이 곧바로 밥을 낼름낼름 먹으니 놀라 합니다.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아이였을 때에 어머니가 떠 주는 밥술은 잘 안 먹고, 둘레 다른 어른들이 떠 주는 밥술은 낼름낼름 받아먹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심통이지만 심통을 부리고, 둘레 어른들한테는 귀여운 척을 떨지 않았느냐 싶어요. 어머니가 골을 내거나 힘들어 할 만큼 미운 짓을 했달까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젓가락질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나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했을 테고요. 깔작깔작거리면서.

 낮잠을 넘기고 졸음을 참아 가며 놀던 아이는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듭니다. 팔이 저릴 무렵 잠든 아이를 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으려 하니 스르르 눈을 뜹니다. 좀 누워서 잠을 자 주면 아빠가 서울 마실 나와서 볼일을 마저 보고 얼른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쩌는 수 없구나 싶고,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빠가 아이한테 미안한 노릇이며, 이래저래 일을 얼추 마무리짓고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쯤에 서울 홍대앞에서 전철을 탑니다. 삼십 분쯤 일찍 일어설 수 있었으면 신도림역에서도 한결 느긋했을 터이나 이때를 놓쳐 꽤 북적이고 미어터집니다. 이런 ‘반쯤 지옥철’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린이한테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아마 ‘뭐야, 이런 때에 왜 아이를 데리고 타고 법석이야?’ 하고들 여깁니다. 그렇지만 누군들 좋아서 미어터지는 때에 아이와 함께 전철을 타겠습니까. 제가 뭔 부자라고 인천까지 택시를 타거나 자가용을 몰겠습니까.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 담은 가방은 겨우 짐칸에 올렸지만, 아빠 책과 다른 짐이 든 무거운 가방은 등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이한테 자리 하나 내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만, 어르신 아닌 분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고, 여느 자리에 앉은 젊은 사람들은 손전화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저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 아이나 조카나 아는 사람 아이가 앞에 있다면 이렇게 모른 척하거나 남 일로 여기지 않았겠지요. 생각하기를 잊은 사람들이고, 마음쓰기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어른들도 지옥철이나 반쯤 지옥철이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갓난아이나 어린이라면 훨씬 갑갑하고 괴롭습니다. 더구나 아이는 키가 작으니, 바닥에 서 있으면 캄캄한 우물에 갇혀 옴쭉달싹 못하는 꼴입니다. 내내 안겨야 해서 더 답답한 아이가 바닥에 서고 싶다며 하도 찡얼거려 내려 주니, 바닥에 서 있기가 훨씬 괴롭다며 다시 안아 달라 해서 안습니다. 틀림없이 아이 찡얼거리는 소리를 아이 둘레에서 ‘밀치는’ 사람들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 쪽으로 ‘안 밀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인 저한테 밀치면 그저 그럴 수밖에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아이한테 밀치면 어떻게 될까요.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만큼은 맨앞과 맨뒤가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여성 전용칸’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았다고 느끼는데,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에 ‘여성 전용칸’이 생긴 까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전용칸’을 마련하는 움직임만큼 ‘어린이 칸’을 마련해야지 싶습니다. 자전거를 실을 칸을 마련한다 하고, 바퀴걸상 타는 자리는 일찌감치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이이든 어린이이든 아이를 데리고 타는 어버이가 아이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 오줌을 누이거나 잠든 아이를 눕히거나, 또는 힘든 아이를 안고 어버이 한 사람이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합니다. 고단한 두 사람은 먼저 잠들고 아빠는 좀더 깬 채 책 한 권을 읽고 잠자리에 듭니다. 잠자리에 누워 거듭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서울 마실을 나와 만난 책마을 일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말을 했지만, 아이키우기란 참 힘들고 참 힘든 하루하루가 보람입니다. 힘들게 아이를 키우며 늘 새롭게 배우고 늘 고맙게 고개를 숙입니다. 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기 때문에 지옥철이 아이한테 얼마나 안 좋은가를 새삼스레 깨닫는 한편, 허울좋은 장애인노약자영유아동반자 자리라고 하는 긴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몸으로 느낍니다. 이런 이름표를 붙인다 한들,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여느 도시사람들은 장애인한테든 노약자한테든 영유아한테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한테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이런 딱지를 붙지지 않고서는 이웃사람을 살피지 못하는 도시사람이란 소리입니다. 이런 딱지를 붙인다 한들 가난하거나 힘든 이웃을 헤아릴 줄 모르는 도시사람이란 뜻입니다. 도시란 삶터는 한 사람이 고운 목숨 선물받은 아름다운 삶임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셈입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바라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도시라면, 이웃에 앞서 나 스스로 내 목숨이 얼마나 고운지를 느끼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자연을 밀어내고 시멘트와 쇠붙이만 가득 채운 도시이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연이 깃들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시에서 제아무리 자연이 어떠하고 생태가 어떠하며 환경이 어떻고 저떻고 떠든들, 도시에서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란 힘듭니다. 아니, 도시사람은 ‘자연스럽게(생태적으로)’ 살 수 없어요. 자연이 없는 곳에서 어찌 자연스레 살겠습니까. 자연이 있는 곳에서조차 숱한 공장과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얼룩져 있는걸요. 게다가 한국땅에 골프장이 좀 많습니까. 한국땅 국립공원에조차 하늘차와 주차장과 기차길 구멍과 고속도로 고가도로 따위가 오죽 많습니까.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는 도시에서고 시골에서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용을 쓰는 꼴이고 몸부림을 치는 판입니다. 좀더 밝은 앞날을 생각하자고, 더욱 따뜻한 터전을 일구자고 애쓰는 흐름이 얕게나마 있습니다.

 다만, 일찍 눈을 뜬 분들 말마따나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는 분들마저 당신 아이들을 학원에 넣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일류대학 졸업장을 거머쥐도록 내몹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읽은 사람치고 이이를 우러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막상 권정생 할아버지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자가용을 버려서 이라크 파병을 막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촛불만 든다고 이라크 파병을 막겠습니까.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지요. 우리들은 촛불은 들었어도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국가보안법이든 막지 못합니다. 더욱이 경부운하이든 4대강이든, 진보나 개혁이나 보수나 무어나 외치기 앞서 내 삶터에서 자가용을 버려야 막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가용을 버리고, 다음으로는 아파트를 버리며, 차근차근 졸업장과 명예와 권력과 은행계좌를 버려야 합니다. 자가용부터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파트를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좋은 책 읽는 기쁨’을 나눌 수 없습니다. 졸업장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호미질하여 푸성귀 얻는 보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은행계좌를 놓지 못하는 사람한테 ‘아이 똥기저귀를 손빨래하는 재미’를 나눌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와 가까이 맞닿거나 도시 둘레에서 복닥이는 삶자리로서는 잃어버린 하루로 머뭅니다. 잃은 어제요 잃는 오늘이요 잃을 앞날입니다. 처음에는 잃지만 차츰차츰 잊는 어제가 되고 잊는 오늘이 되며 잊는 앞날이 됩니다.


 (2) 묻힌 삶을 아로새겨 놓은 《잊혀진 미래》


 1921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이곳저곳을 마실하면서 자랐다고 하는 팔리 모왓 님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두 번째 유럽전쟁에서 총을 들었고, 전쟁이 끝난 뒤 북극땅에 머물며 글쓰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무렵 처음 쓴 책이 《잊혀진 미래》입니다. 당신 스스로 흰둥이이면서 당신과 같은 흰둥이들이 북극땅을 비롯한 온누리 토박이 삶을 어떻게 헤집고 토박이 삶터를 얼마나 일그러뜨리거나 무너뜨리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자연과 생태를 사랑하는 마음을 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팔리 모왓 님 책이 2003년에 《울지 않는 늑대》(돌베개)라는 이름으로 처음 옮겨졌습니다. 2005년에 《걸어다니는 부엉이들》(북하우스)과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북하우스)가 옮겨졌으며, 2009년에 《안 뜨려는 배》(양철북)가 옮겨졌습니다. 《잊혀진 미래》는 다섯 권째 옮겨진 팔리 모왓 님 책입니다.

 당신 책을 즐겨읽거나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한 권 두 권 꾸준히 우리 말로 옮겨집니다. 흔한 말로 잘 팔리는 책은 아닌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인데, 잘 팔리지는 못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 많이 읽히지 못하는 팔리 모왓 님 이야기이지만, 다문 천 사람이든 만 사람이든 당신 이야기에 깃든 깊은 넋과 너른 얼을 고맙게 받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니랴 싶습니다.

 팔리 모왓 님이 태어난 1921년을 헤아려 봅니다. 이무렵 아버지를 따라 ‘학교 아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어린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1921년이 아니라 2010년을 돌아보았을 때에도 ‘학교에 안 넣고’ 세상을 넓고 깊게 배우도록 이끌어 줄 어버이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2007년에 제 고향 인천에 돌아온 뒤로 가끔 학교(고등학교) 후배를 만납니다. 학교 후배들은 대학 입시를 걱정합니다.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 무슨 학과에 가야 좋을지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무슨 꿈을 이루고 싶은지는 제대로 걱정할 줄 모릅니다. 아주 드물게 한두 젊은 넋들은 ‘학교 아닌 꿈’을 이야기합니다. 거의 모든 젊은 넋들은 ‘꿈 아닌 학교’를 이야기합니다. 아니, 꿈이란 없이 학교에 매여 있다고 할까요. 젊은 넋 스스로 너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이요 어느 만큼 사랑스러운 넋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스스로 못 깨닫기도 하고, 둘레에서 일깨우지 못하기도 한달까요.

 후배들을 만날 때면 으레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가지 말며 꿈이 있으면 대학교에 가든 말든 네 길을 찾으라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면 어디에서든 알바를 하거나 일자리를 얻어 네 살림돈은 네 스스로 벌라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는 한 해쯤은 길게 휴학을 하며 한 해치 등록금만큼을 너희 어버이한테 얻어서 ‘나중에 갚을게요’ 하고 말씀드리며 한 해치 등록금 천만 원으로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하여 우리 나라 곳곳을 한 해 동안 샅샅이 누벼 보라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학부모나 청소년이나, 누구라 할 것 없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바쁩니다. 참으로 바쁜 나머지 이웃이고 살붙이이고 동무이고 나 스스로이고 돌아보지 못합니다. 팔리 모왓 님은 당신 이름과 돈과 힘을 내려놓고는 추운 땅 사슴겨레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살았습니다만, 오늘 이 나라에서 내 이름과 돈과 힘을 이렇게 고이 내려놓고 지내고자 하는 분이란 거의 없습니다. 더 붙잡으려 하지 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거머쥐려 하지 더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치를 때에 내 앎을 살핀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보다 나은 점수를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나한테 살기 좋은 집이면서 내 이웃하고 어우러지는 집을 찾지 않는 매무새입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자가용을 씽씽 내달리는 사람은 저 혼자만 살겠다는 몸짓입니다. 좁은 골목길에는 처음부터 자가용을 들이밀지 말았어야 했고, 어쩌는 수 없이 자가용을 들이밀었다면 골목사람 발걸음 빠르기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려야 합니다. 학교 앞에서는 30킬로미터 넘게 달리면 안 된다고 못박아 놓고 있는데 학교 앞에서 30킬로미터 밑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골목길에서는 30킬로미터가 아닌 15킬로미터쯤으로 달려야 옳습니다. 학교 앞에는 아이들만 있으나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못한다는 우리들이기 앞서 생각을 버린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생각을 잃은 우리들이요, 그예 생각을 잊고 마는 우리들이구나 싶습니다.

 생각을 못하는 동안 우리한테 아름다울 삶을 차츰 멀리합니다. 하루하루 멀리하다가는 이내 멀어지고, 이내 멀어지면서 저절로 등을 돌리며, 등돌린 채 지내다가는 아예 파묻습니다.

 착한 마음밭을 파묻습니다. 참된 마음결을 파묻습니다. 고운 마음씨를 파묻습니다.

 듣기 좋아 무슨무슨 공동체인데, 공동체이기 앞서 착한 사람 참된 사람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 해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이 되면 무슨무슨 정책이나 반대이다 무어다 하고 떠들썩한데, 스스로 얼마나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후보를 아직 본 적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착하게 살면 돈을 못 벌겠지요. 참되게 살면 이름을 못 얻겠지요. 곱게 살면 힘을 늘릴 수 없겠지요. 돈도 좀 벌고 이름도 좀 얻고 힘도 좀 키우고 싶으니, 우리 스스로 저절로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길을 걷겠지요.

 1940년대까지는 어찌저찌 살아남아 있었다는 사슴겨레 사람들이 2010년대에 살아남아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한국땅에서는 이런 소식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조금은 살아남았을는지, 다시 살아났을는지, 그예 씨가 말라 버렸을는지, 아주 박물관 유물처럼 목숨만 가까스로 이으면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슴겨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당신들 살림살이를 그토록 추운 땅에서 수천 해에 걸쳐 이어왔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은 살아남았습니다. 도톰한 책 《잊혀진 미래》에 잊혀질 수밖에 없던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 이야기가 눈물겨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한국땅에서도 우리들 착하고 참되고 곱게 살아갈 이야기를 눈물겹거나 웃음짓도록 아로새길 만한 슬기로운 글쟁이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3) 못내 아쉬운 번역인 《잊혀진 미래》


 《잊혀진 미래》를 내놓은 ‘달팽이’ 출판사는 지난 2003년부터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바지런히 펴내고 있는 1인 출판사입니다. 요사이야 1인 출판사가 꽤 늘었지만, 2003년 즈음부터 1인 출판 외길을 걷는 곳은 드뭅니다. 이무렵 1인 출판사를 꾸린 달팽이 출판사는 책마을에서 ‘저러다 그만두겠지’라든지 ‘미친 짓이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출판사 이름 ‘달팽이’마냥 느릿느릿 책살림을 꾸리면서 생태환경책과 인문책을 한 권 두 권 내놓고 있습니다. 달팽이 걸음 출판사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달팽이 출판사 책은 꼭 달팽이 걸음만큼 팔리고 읽히며 받아들여지는구나 싶습니다. 홀로 온갖 일을 다 해내야 하는 만큼 벅차기도 할 텐데, 이래저래 헤아린다 하여도 이번에 나온 《잊혀진 미래》는 번역이 몹시 엉성합니다. 아무래도 번역하신 분이 애벌 원고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넘기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틀림없이 한글로 된 책인데 앞뒤 흐름이 엉성한 글월이 대단히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이런 엉성한 번역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채 책을 내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와 함께 오탈자가 꽤 많습니다. 출판사 살림이 많이 힘들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될 텐데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힘들면 둘레에서 자원봉사를 받아 교정교열을 한 번쯤이라도 더 거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래도 워낙 줄거리가 탄탄하고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제 마음속으로는 ‘애벌 번역 책’을 ‘두벌 번역’ 하면서 읽습니다. 종이에 찍힌 글월 그대로 읽지 않고 이 글월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곱씹으면서 더욱 더디게 읽습니다.

 말끔하고 정갈하게 추스른 책이었다면 이 놀라운 이야기 《잊혀진 미래》를 금세 읽어치우고 덮었을 수 있겠다고 봅니다. 꽤 엉성궂은 애벌 번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탓에, 더욱 더디게 곱씹으며 읽고, 몇 번 읽은 글월을 다시금 새로 읽고 거듭 읽으면서 지난날 사슴겨레 사람들 슬기와 삶을 제 마음자리에 찬찬히 아로새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좋은 번역이었다면 좋은 번역대로 고맙고, 얄궂은 번역일 때에는 얄궂은 번역대로 고맙습니다. 그래도, 애써 읽는 책이라면 얄궂은 번역보다는 좋은 번역이기를 바랍니다. 책을 낸 출판사 사장님과 번역을 한 분께서 아무쪼록 우리 말과 글을 새삼스레 뒤돌아보며 새로 배우시면 기쁘겠습니다. 서툰 번역일지라도 이런 책 하나 묻히지 않고 우리 말로 나온 일은 대단히 반갑습니다. (4343.4.29.나무.ㅎㄲㅅㄱ)


[12, 27, 56쪽] 대략 1960년대부터 우리는 에스키모들의 생존을 보증하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정책을 추구해 버렸다. 옛날부터 내려온 에스키모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빼앗아 버리고는 우리의 근대적 기술사회의 틀로 억지로 끼워맞추는 데 가혹하고 획일적인 노력을 해 온 것이다 … 분명 이들은 배런스의 무자비한 자연에 대항하여 힘들게 투쟁하며 사는 데 온힘을 쏟아부어온 사람들이어서, 서로를 해치는 데 그 힘을 사용하려는 결심이나 바람은 가져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 스쳤다 … 눈보라는 단지 하루 동안 불었지만, 스텔라가 캠프로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이 소녀가 거의 아무 음식도 없고 침구도 없이 2주 이상을 지내며 툰드라의 한겨울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아이들이 이 땅의 한 부분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척도다.

[24, 67, 311쪽] 공부를 해 가면서, 북극이 얼어붙은 강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강과 호수의 세계여서 그곳의 푸르고 깊은 물 양 옆으로 여름철 꽃과 넓게 뻗은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 북극이 얼음 덮인 세계의 꼭대기이기도 하지만, 한여름 더위 속에서는 생명으로 우글거리고 수없이 많은 만개한 식물의 빛깔로 빛나는 거의 200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완만한 평원지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이누이트’는 이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고유한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로써, 인디언들이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 그제야 나는 배런스에서는 부식과 부패가 거의 드물다는 것을 기억했다. 깨끗한 태양과 바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돌무더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된 순간의 모습 그대로 수세기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도록, 나무와 뼈가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71, 93, 105∼106, 150쪽]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수익을 보장받는 기간에만 짧게 머물다가 이 땅을 버리고 떠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파괴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사슴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제 그 사슴 무리들을 보고 나니, 내가 사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이제는 그 거대했던 사슴강은 사라지고 졸졸 흐르는 작은 사슴 시내만 그 지역을 통과한다. 사슴이 그들의 길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 사슴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슴을 멸망시킨 소총은, 마치 자기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냥한 듯 그 소총을 사용했던 인디어들마저 멸망시켜 버렸다 … 이드텐 부족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기 무역을 위해 사슴을 살육하도록 부추겨졌고, 대규모로 살상되는 사슴은 필연적으로 버펄로에게 일어난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12, 115, 140, 216쪽] 이할미우트 부족은 가볍게 여행하기 때문에 그 부족 사람이 여름에 평원지대를 건널 때면 칼, 담배 파이프, 그리고 카미크라 불리는 가죽부츠 여벌만 챙긴다. 먹을 것은 찾아서 먹는다 … 기계에 대한 본능에 의해 조종되는 백인은 모터로 가는 배처럼 바람과 파도를 뚫고 나가지만, 자신이 타고 있는 복잡한 장비가 완벽하게 기능을 다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환경과 항상 불화하며 산다 … 이할미우트 부족은 사슴의 모든 부분을 먹어야만 더할 나위 없이 충분히 음식을 섭취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심장, 콩팥, 내장, 간, 그리고 다른 장기도 중요하다 여기며 종종 먹는다 … 그들의 삶 속에는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물건을 창조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채우거나, 돌 위에 모양을 파 넣지도 않고, 돌이나 진흙에다 새겨 넣지도 않는다. 배런스 땅을 길고 힘들게 여행해야 할 때마다 아름다운 것을 내버려야 한다면, 그것을 창조하는 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118, 135, 163쪽] 그들을 보고 냄새를 맡은 내 첫 반응은 일종의 역겨움이었다. 내 눈에 그들은 너무나 더럽게 보여, 도대체 왜 입을 옷 하나 깨끗한 걸로 찾지 못했는지 의아해 하며 속에서는 백인의 자존심이 본능적으로 솟구쳐올랐다 … 내가 조금은 까다롭게 고기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그래서 나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고,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내 두 손으로 고기를 잡아 이빨로 물어뜯어 먹기 시작했다. 맛있었다 … 이할미우트 부족의 언어에는 ‘사슴’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데 수십 개의 단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가 지닌 엄청나게 많은 미세한 차이를 내 충분치 못한 기억력에다 과도하게 집어넣는 것을 현명하게 자제한 우테크는 내가 사슴에 대해 말해야 할 때 가능한 모든 경우에 사슴의 총칭만을 사용하도록 해 줬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나와 대화할 때는 다른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줬다.

[166, 200, 215쪽] 우테크의 설명으로, 영구적인 캠프 장소를 선택하는 데는 우선 세 가지 주요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조건은 ‘우리의 생명인 사슴이 찬성할 것인가?’이다 … 그녀의 바느질은 바라보고 있으면 경이로운 작업이다. 여름용 부츠는 반드시 방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바느질 솜씨로 꿰맨 솔기 부분 틈에 완벽하게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렇게 꿰맨 부분이 너무나 섬세해서 육안으로는 전혀 바느질 땀수를 셀 수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호우미크가 이렇게 바느질을 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 그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창조의 노동이다. 새 카약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나이 많은 헤크와우는 자신의 일 속에 빠져 무아지경이 돼 버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창조해 낼 때 누리는 미묘한 즐거움을 그는 알고 있다.

[206∼208쪽] 이할미우트 아이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절대로 체벌을 받지 않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을 결코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듯 그는 격렬하게 응수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까?” … 그 아이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결코 배운 적이 없다. 그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관찰하고 흉내를 내는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것뿐이다 … 어떤 지배나 엄격한 일과도 아이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다. 졸리면 잔다. 배가 고프면 음식이 있는 한 언제나 먹는다. 말이나 훈련으로 배우는 것보다 놀이를 통해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놀고 싶어하면 아무도 막지 않고 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준다 … 아이는 부모의 반대라는 그림자나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 없이 놀면서 배우는 것이다.

[245, 255, 368쪽] 이할미우트 사람들은 나를 용서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내 어린애 같은 이기성의 폭발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는 나란 사람이 암컷 늑대가 자기 새끼를 소중히 지키듯 내 물건에 몹시 집착하는 불행한 미개인쯤으로 이해되었다 … 장로회도 경찰도 없다. 입법 기관 같은 것도 없으며, 엄밀히 말하면 이할미우트 부족은 무정부 상태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법이라는 경직된 규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부족은 서로 사이좋게 사는데, 이것의 비결은 인간의 의지와 인내의 힘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협동이다 …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426, 428, 439쪽] 구호품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들이 직접 먹고살 수 있는 방법으로 도와야만 한다.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원시 부족들에게도 자선은 파멸을 초래한다 … 우리는 반드시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땅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줘야 한다 … 북쪽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식단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먼 지역에서 수입한 이상한 식품을 위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기초 생산품을 버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처럼 몰상식한 이야기다 … 우리의 극지방처럼, 그린란드 땅 대부분이 유럽인이 거주하기에는 불리한 자연 그대로의 땅이다. 그러나 그린란드 사람들이 그 땅의 일부인 까닭은, 그 황폐한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번성하는지 오래 전 배웠던 에스키모의 육체적, 정신적 유산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백인의 경제적 욕심을 위한 농노가 결코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