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여우 헬렌 쪽빛문고 9
다케타쓰 미노루 지음,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백 가지 삶과 백 가지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7] 다케타쓰 미노루, 《아기 여우 헬렌》(청어람미디어,2008)



 스물일곱 달째를 지나 스물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가 큰방에서 혼자 놉니다. 아이 엄마는 작은방에서 이불을 무릎에 덮고 뜨개질을 합니다. 아이 아빠는 이불을 쓰고 자리에 누워 허리를 폅니다. 그제 서울과 인천으로 볼일 보러 갔다가 어제 돌아와서는 끙끙거립니다. 하룻밤 사이에 먼길을 오가고 나면 꼭 하루 남짓 끙끙 앓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 아빠한테 넌지시 묻습니다. “아이 예쁘지요?” 아이 아빠는 능청스레 대꾸합니다. “뭐가? 어디가?”

 아이랑 스물일곱 달을 꾹꾹 채워 살아오는 동안 날마다 서른 장 남짓 아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 아이 모습을 어떤 이야기를 붙여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갖은 집일을 떠맡아 살림을 꾸리면서 이 사진은 이렇고 저 사진은 저렇고 하며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이 모습은 이 삶결대로 담고, 저 모습은 저 삶자락대로 담을 뿐입니다.

 요 한두 달 사이 이 사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빠한테 둘도 없이 어여쁜 모델이 되어 주는 이 아이 삶을 어떤 이야기 담은 모습으로 나눌 때에 아빠한테도 엄마한테도 아이한테도 즐거울까 하고. 참말로 바쁘다고 말은 하지만, 이런 말은 핑계일 뿐, 나로서는 아직 아빠다운 아빠 길을 못 걸으니까 아이 사진을 찍으면서 이 사진이 아이 삶하고 어떻게 어울리도록 하면 좋겠는가 하는 갈피를 못 잡는 셈 아닌가 하고.

 아이 사진을 함부로 누리집(블로그라든지 인터넷방이라든지)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느낀 어느 날부터 아이 사진을 섣불리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달 남짓 이러다가 마음을 곰곰이 추슬러 하루에 한 장씩 아이 사진을 글 한 줄씩 붙여 갈무리해 보자 생각합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살갑게 쓸 수 있다면, 이 이야기를 이루는 사진을 둘레 사람하고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없이 사진을 아무렇게나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비로소 생각합니다.

 이제 날마다 한 가지 모습을 되새기며 이름붙이기를 해 봅니다. 이를테면 ‘고구마 어린이’라든지 ‘자전거 어린이’라든지 ‘책 어린이’라든지 ‘포대기 어린이’라든지 ‘북치는 어린이’라든지 ‘춤노래 어린이’라든지 ‘가을길 어린이’라든지 하면서. 어차피 이름을 붙인다면, 되도록 글자수를 맞추고 싶습니다. 첫 이름을 ‘고구마 어린이’로 했으니 모두 세 글자로 맞추고 싶은데, ‘책 어린이’에서 그만 걸렸습니다. 이 이름을 붙일 때 미처 생각을 못했으나, ‘책읽는 어린이’로 했다면 꼭 세 글자가 되었을 텐데, 왜 그때에는 이처럼 이름을 못 붙였나 싶습니다.

 예전에는 굳이 이름붙이기를 하지 않고 날짜만 살폈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하루 동안 찍는 사진 서른 장이나 쉰 장이나 일흔 장으로 얼마든지 책 하나 날마다 만들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쉰 장을 찍더라도 쉰 가지 얼굴빛과 몸빛과 삶빛을 담을 수 있는 ‘내 아이 삶 사진’입니다. 이는 우리 집 아이한테서만 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온누리 어느 집 아이한테서도 엿볼 수 있어요. 아이하고 어버이가 늘 집에만 붙어 있다 하더라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어버이가 날마다 먼길 마실을 다닌다 하더라도 ‘날마다 쉰 가지나 일흔 가지 다 다른 얼굴빛’을 못 볼 수 있어요. 이 나라 저 나라 쏘다닌다 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사진을 얻지 않고, 한 나라 조그마한 마을 작은 집에서 산다는 사람이 덜 떨어진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조그맣게 동물병원을 꾸리는 의사이면서, 당신이 돌보아야 하는 들짐승들 삶을 사진과 글로 묶어 이야기책을 내놓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낸 책 가운데 《아기 여우 헬렌》을 읽으면, “솔개와 함께 생활했던 때를 뒤돌아보면, 그 형제와 형제의 학교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그 솔개의 일생이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입니다(34∼35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들새로 살아야 할 솔개이지만, (몹쓸 어른들 때문에) 몸이 크게 다쳐 아파 하던 솔개를 마을 아이들이 살려 달라며 껴안고 찾아왔다지요. 이 솔개를 어루만지고 함께 돌보면서 다시금 살아나 훨훨 날도록 도왔다지요. 이렇게 솔개랑 하루이틀 살아가면서 다케타쓰 미노루 님부터 ‘즐겁다’고 느끼는 한편, 들짐승 어루만지는 의사로서 솔개 몸이 ‘즐거워’ 함을 느꼈겠지요. 그야말로 날마다 새롭게 즐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아기 여우 헬렌을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아내에게 안겨 있는 헬렌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90쪽).” 하고 느끼거든요.

 아이 사진을 날마다 꾸준하게 찍으면서 곰곰이 떠올립니다. 아이가 아빠한테 안기거나 엄마한테 안길 때, 아이는 더없이 포근해 합니다. 할머니한테 안기든 할아버지한테 안기든 이모한테 안기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마음을 제 마음으로 느끼어 받아들입니다. 아이 사진을 찍는 아빠 앞에서 아빠가 제 모습을 사랑스레 담아내는 줄 느끼니 스스럼없이 찍혀 줍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아빠 사진기를 쥐어 아빠 모습을 찍어 줍니다. 우리 집 딸아이는 고작 여섯 달이 되었을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고, 일곱 달이 채 안 되어 첫 사진을 찍었으며, 돌이 안 되었을 때 엄마나 아빠를 찍어 준다며 사진놀이를 즐겼습니다.

 천재라서 돌쟁이조차 아닌데 사진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예 함께 살아가니까 사진을 제 몸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빠랑 엄마가 텃밭을 일구거나 너른 논을 돌보며 살면, 아이는 낫이나 호미를 즐겨 들겠지요. 이때에 아이는 돌쟁이조차 아닌데 ‘호미 어린이’가 되어 풀 베거나 벼 베는 어린이 몫을 톡톡히 했겠지요. 그러니까, 때때로 텔레비전 같은 데에 ‘아주 어린 꼬맹이가 자동차 이름을 다 판가름하는 모습’ 따위를 보여줄 때에 이 아이를 일컬어 ‘천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드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게다가, 어린이한테 영어를 일찌감치 가르치거나 한자를 일찍부터 알려주는 일 또한 덧없어요. 아니, 이런 짓은 아이를 망가뜨립니다. 어느 아이든 아이일 때 무엇이든 쏙쏙 빨아들입니다. 좋은 모습이든 궂은 모습이든 빨아들여요. 빨아들여야 살아낼 수 있으니까요. 빨아들여 제 것으로 삼아야 무럭무럭 자라니까요.

 아이가 어릴 때에는 영어이니 책이니 한자이니 한글이니 따위를 머리에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삶을 어버이 스스로 힘껏 살아내는 하루하루를 곱다시 껴안도록 손을 잡고 이끌어야 해요. 맑은 바람과 싱그러운 하늘과 하얀 구름과 밝은 별을 아이가 가슴에 꼬옥 안도록 거들어야 합니다. 물맛과 밥맛을 깨닫도록 힘쓰고, 손맛과 발맛을 새삼스레 느끼도록 도와야 합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영어를 잘하거나 일본말을 잘한들 무슨 보람이 있나요. 참답지 않으면서 수백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달달 왼들 어떤 빛이 서리나요. 고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가 서울대학교이든 하버드대학교이든 첫손 꼽으며 들어간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아이하고 살아가는 동안 아이는 어버이한테 날마다 다른 빛깔을 베풀어 주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늘 다른 빛무늬를 나누어 줍니다. 주니까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랑 또한 아닙니다. 살랑살랑 흐르는 사랑입니다.

 노상 느끼는 사랑이니까 노상 느끼는 그대로 사진 한 장 얻고, 노상 느끼는 그대로 사진 한 장 꾸준히 얻다 보니, 나날이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실어 사진을 차곡차곡 그러모읍니다.

 이야기책 《아기 여우 헬렌》을 들춥니다. “헬렌은 한 번도 모래사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이상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00쪽).” 여느 여우와 달리, 앞을 보지 못하는 헬렌은 어미를 잃었습니다. 어미 잃은 새끼 여우한테 무엇인가를 사람이 가르치기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헬렌이라지만, 헬렌은 여느 여우하고 똑같은 여우입니다. 여우는 여우이니까요. 한편, 새끼 여우 헬렌은 구경거리 여우 헬렌이 아닌 서로서로 따사롭고 넉넉히 안아 줄 좋은 살붙이인 여우 헬렌입니다.

 “헬렌은 본래의 귀여운 아기 여우 얼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습니다(161쪽).” 삶을 함께 누리기에 죽음을 함께 맞이합니다. 슬픔을 같이 나누고 기쁨을 서로 맞아들입니다. 솔개를 돌보든 다람쥐를 돌보든 여우를 돌보든 딱따구리를 돌보든 저마다 다른 짐승들을 저마다 다른 결과 손길로 돌보지만, 모두들 고운 목숨이요 삶임을 헤아리는 손길로 함께 돌봅니다. 이들 짐승들을 다루는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차곡차곡 엮어야 비로소 동물병원 살림돈을 마련한다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인데, ‘살림’하는 돈을 얻고자 용쓰던 사진찍기이고 글쓰기였지, 벌어들일 ‘돈’만 생각하며 꾀부리던 사진찍기나 글쓰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제와 오늘이 새롭고, 이 아이와 저 아이가 새로우며, 내 삶과 네 삶이 새롭습니다.

 백 가지 삶을 느끼기에 백 가지 사진을 찍습니다. 백 가지 짐승을 만나기에 백 가지 손길을 뻗어 돌보고자 애씁니다. 백 가지 사진을 찍으며 한 가지로 이어지는 고리를 깨닫고, 백 가지 손길을 뻗는 동안 모두 한결같은 손길일밖에 없다고 알아챕니다. 동물병원이든 사람병원이든, 병원이면서 보금자리이고 삶터입니다. 삶터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사랑과 믿음이 고이 묻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옮기어 나누는 옛이야기로 남을 수 있고, 글로 적바림해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사진으로 옮겨 예술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 아기 여우 헬렌 (다케타쓰 미노루 사진·글,고향옥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8.7.1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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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9] 커팅칼

 읍내에 세 식구 함께 마실을 갑니다. 능금이랑 포도랑 몇 가지 먹을거리랑 장만해서 읍내 한복판에 있는 널따란 쉼터에서 다리를 쉽니다. 아이 엄마가 얼음과자를 먹고 싶다고 해서 읍내에 있는 롯데리아에 갑니다. 작은 읍내에도 롯데리아는 으레 하나쯤 있기 마련입니다. 500원짜리 얼음과자하고 600원짜리 얼음과자를 하나씩 시켜서 아이랑 아이 엄마랑 먹습니다. 둘이 한창 맛나게 먹는데 “커팅칼 좀 주세요.” 하는 말이 들립니다. 뒤쪽에 우리처럼 식구들이 함께 나온 분들이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주문대에서 ‘햄버거 자를 칼’을 달라 말합니다. 주문대에 있던 누나는 “커팅칼을 드릴 수는 없고 햄버거를 가지고 오면 잘라 드릴게요.” 하고 말합니다. 아이가 햄버거를 가져옵니다. 주문대 누나는 안쪽에 있는 일꾼한테 “햄버거 좀 잘라 주세요.” 하고 말합니다. 이윽고 햄버거는 알맞게 썰리고, 아이는 썰린 햄버거를 받아 제자리로 갑니다. 아이가 스스럼없이 읊은 ‘커팅칼’이란 “자르는 칼”일 텐데, 어떠한 칼이든 다 ‘자르는’ 데에 씁니다. 그나저나, 혼례잔치에서 으레 “케익 커팅”을 읊고, 무슨 행사에서도 “테이프 커팅”을 합니다. 그래요, ‘커팅나이프’겠지요. (4343.1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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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22] 삶글

 책을 좋아하며 삶을 꾸릴 때에는 책삶이 된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아끼며 살아갈 때에는 사진삶이 되며, 글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는 글삶이 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일을 놓고 시골살이라 하고, 도시에서는 도시살이라 하는데, 시골삶과 도시삶처럼 적바림해 볼 수 있나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자전거를 즐겨 탈 때에는 자전거삶이 될 테고,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걷는 나날을 즐긴다면 두다리삶이 되려나요. 살면서 ‘삶’을 느끼지 않는 날이란 없습니다. 기뻐도 내 삶이고 슬퍼도 내 삶입니다. 지쳐도 내 삶이요 가붓해도 내 삶이에요. 깊은밤, 칭얼거리는 아이를 토닥여 곱게 재운 다음 일어나 풀숲에 쉬를 하며 밤하늘 올려다봅니다. 조용하면서 따사롭게 살아가던 분들 이야기를 오롯이 담은 책, 그러니까 삶책이 반갑다면서 책사랑을 이어오는 내 나날이라면, 바로 나부터 삶책을 쓸 수 있도록 땀을 흘리고 품을 들이며 마음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글을 쓴다면 삶글을 쓸 노릇이고, 말을 한다면 삶말을 할 노릇입니다. 일을 할 때에는 삶일을 해야겠고, 놀이를 즐긴다면 삶놀이를 해야겠지요. 삶살림, 삶사랑, 삶믿음, 삶꿈, 삶나눔, 삶집, 삶마음, 삶꿈. 한 마디씩 차근차근 되뇝니다. (4343.11.1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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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사람 책읽기


 시골집에서는 큰비가 와락 퍼부을 때 으레 전화줄을 뽑아 놓는다. 벼락이라도 칠라치면 허둥지둥 전화줄을 뽑아야 한다. 자칫 몇 초 늦다가는 벼락이 전화줄을 타고 들어온다. 벼락은 시골집 셈틀을 퍽 하고 터뜨릴 수 있다. 지난여름에는 셈틀까지 탈 뻔했으나 공유기와 모뎀까지만 태우고 끝났다.

 오늘은 갑작스레 날이 흐려지더니 거센 비와 바람이 몰아친다. 부랴부랴 셈틀을 끄고 전화줄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한창 기차표와 비행기표 예약을 하던 터라,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마음에 괜히 더 바빠서 콩닥콩닥 조마조마.

 헐레벌떡 일을 마치고 전화줄을 먼저 뽑는다. 벼락이 치기는 해도 잇달아 치지 않으니 한숨을 돌린다. 셈틀을 끄고 얼마 뒤부터 벼락이 꽤나 크게 자주 친다. 전기불까지 모두 끄고 촛불을 켜야 하나 생각해 보았으나 전기불은 그대로 두기로 한다. 두 시간 남짓 이렇게 있었나. 이동안 책을 한 아름 들고 작은방으로 건너와서 아이한테 책을 읽히고, 또 아빠는 아빠대로 책을 읽는다. 그런 다음 저녁을 차려서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또 책을 펼친다. 아이는 이리 뒹굴고 저리 놀다가 바닥에 잔뜩 굴러다니는 그림책을 펼친다. 아이가 하도 이리 던지고 저리 어지르는 바람에 날마다 몇 번씩 치워도 다시금 엉망이라 아예 두 손을 든다. 오늘은 몸이 너무 고단해서 더 치우지는 못하고, 이듬날 일어나서 치울 생각이다.

 혼자서 뒹굴며 놀기도 하다가는 그림책을 보다가는 또 어지르다가는 또 아빠 등에 갑자기 안기다가는 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가 우리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나는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놀며 무럭무럭 컸을까. 그때 우리 형은 나를 어떻게 마주해 주었을까.

 둘째를 밴 아이 엄마가 다른 일은 하나도 못하고 오로지 뜨개질만 한다. 뜨개질을 하는 바람에 뜨개질 바늘이며 실을 장만하느라 꽤 목돈이 든다. 내 살림으로는 도무지 바늘과 실 값을 댈 수 없어 형한테 전화를 걸어 바늘 값 보태어 달라고 얘기했다. 형은 몹시 고맙게 동생을 기꺼이 도와준다. 돈벌이가 어수룩한 동생은 노상 형한테서 도움을 받는다. 살림이 바닥날 때마다 형이 도와주어 숨통을 튼다. 내가 쓰는 글이랑 내가 찍는 사진으로 벌이를 제대로 하는 적이 없다.

 아이 엄마 얘기로는 아직 바늘을 다 안 샀단다. 아, 앞으로 바늘을 얼마나 더 사야 하기에 아직 모자라다 그러나. 그렇지만 아이 아빠가 책을 사들이는 데에 쓴 돈을 헤아린다면 바늘을 더 사야 한다는 소리는 하나도 따갑지 않다. 마땅히 사야지. 아무렴, 투덜투덜댈지라도 즐거이 사야지.

 둘째가 태어나기 앞서까지 아이 엄마는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뜨개질을 한다면, 아이 아빠는 아이랑 놀며 책을 읽다가는 이른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글을 써야 할 테지. 빨래하고 밥하고 뭐하다 보면 책을 쥘 엄두가 안 나기는 하지만, 빨래를 마치고 밥하기와 설거지를 마치고 크게 한숨을 돌린 뒤에는 바람소리랑 햇살이랑 달빛을 느끼다가 저절로 책을 펼친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고, 집구석에 텔레비전을 모셔 놓지 않다 보니, 아주 홀가분하게 책읽기를 놀이로 삼는다. 그렇다고 재미없거나 지루한 책은 읽고 싶지 않다. 좋은 햇살을 느끼며 좋은 책을 읽는 가운데 하루를 열고, 좋은 밤하늘 달빛을 느끼며 좋은 책을 몇 장 넘기는 가운데 스스르 잠들고 싶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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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1 21:35   좋아요 0 | URL
공유기와 모뎀 오랜만에 들어보네요.인터넷 강국이라고 해도 아직 시골까지 전용선이 들어가진 않는 모양이군요^^;;;

파란놀 2010-11-12 05:28   좋아요 0 | URL
시골은 오로지 전화선으로만 인터넷을 한답니다. 이리하여... 일 때문에 사진파일을 보낸다거나 받아야 할 때에는 100메가에 한 시간 반쯤 걸립지요 @.@

카스피 2010-11-12 10:43   좋아요 0 | URL
허걱 한시간 반씩이나요 ㅜ.ㅜ

파란놀 2010-11-12 22:55   좋아요 0 | URL
100메가에 한 시간 반이니... 웬만한 파일을 보내려면 서너 시간은 기본이랍니다 ^^;
 


 버스삯 기차삯 배삯 비행기삯


 아이 엄마랑 아이랑 아이 아빠랑 이렇게 세 사람이 제주섬을 한 번쯤 밟고 싶다고 생각한 끝에 드디어 이번 토요일에 마실을 하기로 한다. 먼저 목포에 들러 아이 큰아빠를 만나려 했는데, 아이 큰아빠는 토요일에 인천으로 마실을 간단다. 하는 수 없이 제주섬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형하고 전화로 얘기를 하다가 “비행기 타고 가. 이럴 때 비행기 한번 태워 주지.” 하기에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청주공항을 알아본다. 비행기 뜨는 때가 아침이거나 저녁이다. 우리처럼 낮에 움직일 사람이 탈 비행기는 없을 뿐더러, 비행기 뜨는 때에 맞추어 기차표를 끊기 훨씬 어려운데, 기차를 타러 나가려고 시골버스를 잡아탈 때를 살피기는 훨씬 힘들다. 그래도 책상맡에서 머리 지끈지끈 앓아 가며 가까스로 기차표를 끊고 비행기표를 끊는다. 그런데 비행기표를 끊으며 표값을 치르려 하다 보니, 표값이 한 사람 앞에 칠만 원 남짓 떨어진다. 세 사람 묶어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 참 값싸네 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만 한 값이라면 고속철도를 탈 때보다 훨씬훨씬 비싸잖아. 세 사람 따로따로 칠만 원이 넘어 이십이만 원이나 되는 비행기삯이라니. 비행기 안 타는 사람이 비행기 한 번 탄다고 하다가 살림이 아주 거덜나겠다. 우리 집 한 달치 살림돈이 한꺼번에 나간다고 할까. 아, 이십만 원이나 되는 비행기삯을 어떻게 어디에서 벌지? 잠값이야 그럭저럭 벌면 된다지만 비행기삯이란, 에휴. 돌아오는 길은 배와 기차와 시골버스를 갈아타며 아주 천천히 돌고 돌아야겠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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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1 22:00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마실나가시니 즐겁게 놀다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