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쪽빛문고 2
가코 사토시 지음, 이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제주 올레길·인천 골목길·우리 살림집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9] 가코 사토시,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청어람미디어,2006)



2006년 5월 1일부터 이레에 걸쳐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2010년 11월 13일부터 제주섬 마실을 합니다. 네 해 만에 제주섬 마실을 하면서 들뜨는 마음이고 벅차는 가슴입니다. 옆지기랑 제주마실을 처음 하니 즐겁고, 아이하고도 제주마실은 처음이기에 기쁩니다. 아이는 제가 제주를 밟는지 울릉을 밟는지 알까 궁금합니다. 오늘 밟는 이곳 이 느낌 이 이야기를 앞으로 언제까지 고스란히 이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함께 제주마실을 하는 동안 아빠가 찍어 놓은 사진을 돌이키면서 ‘아, 내가 어렸을 때 제주섬은 이런 모습 이런 삶 이런 이야기 깃든 곳이었네.’ 하고 되새겨 줄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나 예술이라 할 때에 으레 ‘예전 사람들이 해 놓은 무언가’를 들춥니다. 서른 해가 되었다든지 쉰 해가 되었다든지 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백 해나 오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야기합니다. 어제 서귀포로 넘어와 이중섭거리 한켠에 자리한 삼만 원짜리 잠집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이중섭거리는 아니었고, 이중섭 님을 기리는 집이나 등불이나 바닥돌 또한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새롭게 마련한 기림집이요 기림돌이요 기림길입니다.


이중섭 님이 살던 동안이라든지, 이중섭 님이 바지런히 그림을 그리던 동안이라든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중섭 님을 기리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박물관이든 전시관이든 도서관이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곱다시 건사하는 일 또한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제주섬 현무암 돌담길이 멋스러운 문화유산인 듯 여기지만, 제주섬 여느 살림집마다 현무암을 쌓아 돌담을 이룬 모습은 그예 ‘삶’이었습니다. 남달리 보이려 한 모습이 아니요, 무슨무슨 문화를 이루고자 이룩한 모습이 아니에요. 한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현무암 돌담길은 시멘트블록 돌담길로 바뀝니다. 띠를 이은 살림집은 슬레트나 개량기와 지붕으로 바뀝니다. 흙벽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바르다가, 이제는 물감으로 갖가지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제주 시내 뒤켠 골목을 걷습니다. ‘올레길’ 아닌 ‘여느 살림집 이어진 골목길’을 걷습니다. 웬만한 살림집마다 문패가 붙은 모습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나무로 새긴 문패, 돌로 빚은 문패, 플라스틱 문패 들이 골고루 어우러져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보고 쇠로 만든 대문을 봅니다. 나무 대문이며 문고리이며 오래도록 닳고 낡은 대문이요 문고리입니다. 모두들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 문고리를 들어 대문을 탁탁 치면 ‘울림 종’ 노릇을 했지, 하고 떠올립니다. 예전에는 여느 살림집에 누름단추 따위란 따로 없었고, 누름단추가 처음 생길 때에는 ‘삐이이!’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참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끄러운 소리를 ‘더 발돋움한 모습’이라거나 ‘현대 물질문명을 누리는 모습’처럼 여겨, 나무대문에 쇠문고리 있는 집조차 누름단추를 비싼값 치르며 달곤 했습니다. 우리 애 엄마도 알까 궁금한데, 지난날에는 우체부 일꾼이 편지를 갖다 주면서 쇠문고리를 탁탁 나무대문에 치면서 “편지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나무대문을 다 열지 않고, 나무대문 한쪽에 작게 낸 쪽대문을 열어 편지를 받았어요. 안에서 “네!” 하며 나오지 않으면, 대문 밑으로 살짝 낸 틈에 편지를 밀어넣지요.



..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면서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 (2쪽)



제 고향마을인 인천에서도 올해 가을부터 ‘제주 올레길을 닮은 걷는 마실’ 길을 마련했습니다. 인천은 예부터 ‘서울로 올려보낼 물건’을 바닷가에서 받아 수레에 실어 나르는 곳이었습니다. 개항기라고 하던 지난날에는 서울로 들여보낼 ‘새로운 서양 문물’을 언제나 맨 처음으로 풀어 놓고 ‘시험을 해 보며 잘잘못을 살피는’ 곳이었습니다. 한국땅에서 ‘맨 처음이라 손꼽는 새 문물’은 거의 모두 인천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철도라든지 극장이라든지 운동경기라든지 종교라든지 ……. 가장 오래된 야구장 또한 인천에 있었으나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뭐, 다 재개발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보았다는 ‘두 다리로 걸으며 문화와 역사를 헤아리는 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걷는 길인가를 가늠해 보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문화와 역사란 죽은 유물이나 굳은 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옛날이나 까마득한 지난날이 문화와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낼 글피가 문화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 눈썰미로 오늘 삶터를 바라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 삶터가 어떠한 오늘 삶터요 어떠한 글피 삶터가 될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어른들로서는 ‘예전과 견주어 오늘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데, 아이들한테 오늘은 오늘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이 어제일 수 없고 글피이지 않아요. 언제나 오늘은 오늘이에요.


아이들은 오늘을 즐기려고 놀이를 합니다. 오늘을 즐기는 놀이를 하지, 어제를 돌아보는 놀이라든지 글피를 맞아들이는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즐거울 놀이를 함께 나누는 아이들입니다.


옆지기하고 아이가 손 잡고 제주 골목을 걷거나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생각합니다. 아빠 눈썰미로 보자면, 이 모습이건 저 모습이건 그닥 새롭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이한테는 모든 모습이 처음이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이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이한테는 앞으로 다섯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또 고작 한 해 뒤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함께 일군 이야기가 더없이 새로우면서 빛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이는 새 삶을 일구며 새 이야기를 긷고, 새 나날을 맞이하며 새 꿈을 키웁니다.


제주시 골목을 거닐며 사진을 찍다가 자꾸자꾸 느낍니다. 제주라 해서 더 남다르거나 나을 수 없는 셈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깨닫거나 헤아릴 수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곳곳에 ‘제주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나 조형물’을 애써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이렇게 세워 놓은 상징물이나 조형물하고 나란히 있는 ‘여느 살림집 살림살이’야말로 애써 목돈 들여 마련한 상징물이나 조형물보다 훨씬 멋스러우며 곱다고 느낍니다.



.. 우리는 지표면 위에 있는 잎이나 꽃, 줄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흙 속에 묻혀 있는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풀이나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숨어 있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5쪽)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 1975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 그림책을 1975년에 일본에서 나온 판으로 즐겁게 보았습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가코 사토시 님 다른 그림책도 일본판으로 알뜰히 갖추어 놓았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1975년 책이니 자그마치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그림책이군요. 책으로 치면 서른다섯 살이고, 사람으로 치면 서른여섯 살입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하고 똑같은 그림책이에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2006년에 한글판이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진작에 1975년부터 이 그림책을 즐겼으나, 한국에서는 고작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 그림책을 즐기는 셈입니다. 일본 어린이와 어버이는 1975년부터 이처럼 놀랍고 알찬 그림책을 맞아들이며 마음밭을 한껏 살찌웠습니다만,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는 2006년이 되어 가까스로 이 그림책을 맛보기라도 하는 셈입니다.


2010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자면, 1975년에 빚은 그림책을 오늘날 즐기는 모습이란 참 ‘낡은’ 이야기에 매인 모습이라 여길 만합니다. 2010년이라면 2010년 이야기를 나눌 노릇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1975년을 살아가던 이웃나라 일본사람보다 무엇이 더 발돋움했거나 무엇을 더 아름다이 여민다고 말하려나요. 2010년 한국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은 얼마나 2010년다운 이야기와 맛과 멋과 깊이와 꿈과 뜻과 보람과 사랑을 담았다 말할 만한가요.


가코 사토시 님은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며, 사람들은 지구 겉껍데기는 잘 알지만 속알맹이는 잘 모른다고.


곰곰이 곱씹어 봅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지구에서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람들은 지구 속알맹이는커녕 겉껍데기조차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문화니 역사니 예술이니 하지만, 문화나 역사나 예술을 얼마나 잘 아는 우리들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어제 발자취를 말하는 우리들이라지만, 어제 발자취는커녕 오늘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닌가 모를 일입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문화와 역사와 예술을 말하기 앞서 ‘삶’을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오늘 삶, 여느 삶, 어제 삶, 고른 삶 들을 두루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성냥공장 터를 찾거나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보거나 외국 선교사 잠집을 찾아다니며 역사가 이러하고 문화가 어떠하며 예술이 어찌저찌 하다고 읊는 이야기 또한 얼마든지 ‘인천 골목 올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았으려나요.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동네 어느 살림집에서 어떤 골목터를 이루며 살았을까요. 외국 선교사가 외국 종교를 이 나라에 퍼뜨리려고 마주하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떠한 삶 어떠한 살림 어떠한 모습이었을까요. 동일방직에서 똥물을 마셔야 했던 언니들은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 어떤 살림을 누구랑 꾸렸을까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1975년 오늘을 살아가는 일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지구 삶터 이야기를 몹시 알뜰히 일구어 냈습니다. 참으로 몹시 알뜰히 일구어 낸 예쁜 그림책이기 때문에 2006년에 한글판으로 나와 2010년에 우리 집 책시렁에 곱게 꽂아 놓아도 빛이 납니다. 2075년을 맞이하든 2175년을 맞이하든 이 그림책은 사람들한테 아리따운 이야기를 쉼없이 길어올리리라 생각합니다. (4343.11.15.달.ㅎㄲㅅㄱ)

-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가코 사토시 글·그림,이태원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6.4.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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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와 글쓰기


길에 물건을 내어놓고 이 물건을 사들일 사람을 기다립니다. 손수 일군 푸성귀이든 다른 데에서 떼어와 파는 푸성귀이건 온갖 물건이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자리에 조그맣고 앉아 기다립니다. 누가 사 갈는지 모르지만 조용히 기다립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기다립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기다립니다. 이동안 다른 살붙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려나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저잣거리 한켠으로 찾아와 길바닥에 앉아 더위이든 추위이든 햇살이든 바람이든 비이든 눈이든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기다립니다. 손님이 뜸할 때에는 꾸벅꾸벅 졸다가, 어느덧 새우처럼 등을 굽힌 채 살짝 눕습니다. 도시락을 먹거나 바깥밥을 사먹으며 하루를 보냅니다. 가끔 이웃 장사꾼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말을 섞습니다. 이웃 장사꾼이 없으면 성경책을 넘기거나 해바라기를 하거나 멀거니 생각에 잠깁니다. 한 해를 살고 두 해를 살며 열 해를 살다가 스무 해를 삽니다. 길손이 흘낏 쳐다보다가는 지나칩니다. 관광객이라는 구경꾼이 빤히 쳐다보다가는 사진을 찍습니다. 아예 들여다보지 않고 스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루 일해 하루 벌어 하루를 삽니다. (4343.11.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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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글쓰기

길을 헤맨다. 자꾸 헤매면서 어디가 어디인지 종잡지 못한다. 그래도 걷는다. 그래도 걸어가며 제대로 가는지 엇갈려 가는지 모르는 채 빙글빙글 돌고 돌면서 온몸이 쑤시고 지친다. 가방 무게가 자꾸 무겁다고 느끼며, 걷기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걷자니 더욱 무겁다. 어느덧 팔은 아무 느낌이 없다. 아이를 내려놓을 수 없다. 가방을 내려놓을 수 없다. 다시금 걷는다. 땀으로 온몸이 젖고 옷 또한 흠뻑 젖어든다. 발이 부어오른다고 느낀다. 발가락과 뒤꿈치가 살짝살짝 따끔거린다. 발목과 무릎은 시큰거린다. 이내 발가락 마디마디 욱씬거린다. 몇 시간쯤 걸었는지 모르는 가운데 겨우 다리쉼을 할 자리를 찾다. 집식구는 쉬를 누고, 애 아빠는 땀을 훔친다. 가방을 내려놓으니 등짝이 없는 듯하다. 손으로 무엇을 쥘 때마다 덜덜 떨리며 놓친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앞으로 걸을 길이 참 멀고, 집을 떠나 제주마실을 나온 지 기껏 이틀째. 벌써부터 집식구는 모두 어깨가 축 처져 버리나. 자가용도 택시도 끌지 않고 두 다리로 깊은 가을날 걸어다니는 사람이란 바보인가. 걷는 사람치고 큰 가방에다가 아이를 안는 사람은 볼 수 없고, 걷는 사람 가운데 여느 살림집 사이사이 흔한 골목을 누비는 사람은 볼 수 없다. 나는 이 길이 내 길이기에 걷는다. 나는 이 길을 거닐면서 내 삶을 돌이킨다. 나는 이 길에서 내 글을 쓴다. (4343.11.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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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잔과 글쓰기


 제주섬 마실을 왔다. 이도1동 1261번지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을 들렀고, 몸국 한 그릇 먹었으며, 저녁나절 아이와 함께 잠들 잠집을 찾아든다. 애 아빠는 제주섬 마실을 기리며 보리술 한 병 사러 잠집 앞 구멍가게에 들른다. 호텔이 늘어선 한켠 구멍가게가 아니라 동네사람 노닥거리는 잠집 사이 구멍가게이니까 바가지는 아니겠지 생각한다. 서울 종로3가 안골목 구멍가게에서는 보리술 작은 병에 2500원이나 받는다. 큰 병은 5000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곳은 일본 손님 자주 들락거리는 골목이요, 그 동네 집값을 헤아리면 그쯤 받아야 달삯을 치를 만하다. 서울에서는 그만큼 바가지를 씌워 장사를 해야 살림을 꾸릴 수 있다. 잠집 앞 구멍가게 이름은 ‘한라수퍼’. 손으로 쓴 간판 글씨가 비바람에 많이 깎이고 이래저래 지워지고 했다. 문을 옆으로 밀며 들어선다. 가게 할망이 누군가하고 전화로 얘기를 나눈다. 퍽 오래 얘기를 나눈다. 천천히 시렁을 돌아보고, 뭘 고를까 헤아린다. 전화 얘기가 꽤 길어지기에 보리술 두 병하고 아이 까까에다가 탄산음료 하나를 골라 셈대에 놓는다. 한참 얘기를 하시던 할망이 살짝 “5100원.” 하고 나즈막하게 말씀한다. 응, 술값이 그리 안 비싸네, 하고 생각하며 아이 까까와 탄산음료를 하나씩 더 고른다. 따지고 보면 아이 까까이면서 아빠 까까이다. “6800원.” 할망은 전화기를 내내 붙든다. 뭔가 깊은 얘기를 나누시는가 보다. 값을 치른다. 잠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는 고단해 하면서도 까까를 잘 주워먹는다. 아빠는 보리술 한 병을 마시면서 속이 꽤 힘들다고 느낀다. 먼 마실을 오며 길에서 몹시 힘겨웠던 탓이요, 엊그제 먹은 짜장면이 아직 내려가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기껏 보리술 두 병인데 한 병만 겨우 마신다. 아이가 잠들고 애 엄마는 속이 더부룩하다며 텔레비전을 본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지 않는 우리들은 이렇게 먼 마실을 나와 잠집에 머물 때에 텔레비전 구경을 한다. 애 아빠는 쓰러진다. 깊은 밤과 새벽에 퍼뜩 깬다. 입에서 술내음이 나는 듯하다. 막걸리 한 병 반하고 보리술 한 병을 마셨을 뿐인데 이렇게 냄새가 나나. 이제는 보리술 두 병조차 가붓이 즐기기 어려운 몸이 된 셈인가. 몸뚱이가 이와 같다면, 술 한 사발 즐기고 나서는 책이고 글이고 즐길 수 없으려나. 너덧 해 앞서까지는 서울에 있는 헌책방으로 마실을 간 다음 가방 가득 꾹꾹 눌러담은 책을 낑낑 들고는 홀로 술집에 들러 보리술 닷 잔 마시며 책을 두 시간쯤 읽고는 잠집에 들곤 했는데, 이제는 아이가 있어 이렇게는 못한다지만, 홀로 느긋이 마실할 수 있을 때에도 이처럼 즐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4343.11.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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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5 09:53   좋아요 0 | URL
제주도 유일의 헌책방이란 책밭서점이 아직도 있네요.저도 몇년전에 지금 자리로 이사오기전에 한번 찾아가본 적이 있는데 또 언제 제주도에 한번 들릴지 모르겠군요ㅡ.ㅡ
 

 지난 2009년에 한 번, '단무지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더니, 올해에도 어김없이 '단무지 어린이'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 20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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